93화
대기도가 끝난 후.
제 방으로 돌아온 주이안은 업무용 책상으로 가는 대신 잠시 소파에 걸터앉았다.
“음…….”
눈이 피곤한 건 어쩔 수 없는 거겠지.
그가 눈을 잠시 꽉 감았다 떴다.
그때였다.
“예하.”
바깥에서 성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신전의 정보통을 담당해 은밀하게 움직이는 자들 중 하나.
“들어오세요.”
주이안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러자 소리 없이 들어온 자가 고개를 숙였다.
“급한 일인가요?”
“급한 일은 아닙니다만, 황가와 귀족가 정세에 변화가 있는 듯합니다.”
“정세에 변화가 있다?”
주이안은 헌터 채팅을 흘끗 보았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이곳에 가장 먼저 올라왔을 텐데?
“예. 북쪽 라엘라 영지의 주인이 정해졌다고 합니다.”
황제 아이반이 숙부의 세력을 숙청하며 황가에 귀속됐던, 알짜배기 땅의 주인이 정해졌다.
확실히 중요한 이야기이기는 했다.
“……?”
주이안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 정도 사안이면 신재헌 헌터님이 당연히 공유해주셨을 텐데.
별로 중요한 뜻으로 한 인사 조치는 아닌가?
“라엘라 영지라면…….”
주이안이 뇌까렸다.
규모도 있고 생산량도 뛰어난 영지이니 그곳을 어떤 자가 차지하느냐에 따라, 제국 북쪽의 판도가 바뀔 수도 있었다.
“누가 그 땅의 주인이 됐죠?”
당연히 친황가 세력일 것은 뻔하고, 신전에 얼마나 우호적인 자인가에 따라 신전에서 취할 행동이 달라진다.
새로운 귀족은 아닐 거다.
주이안, 교황인 자신이 새로운 귀족 가문을 허락하는 건 신유리 그녀뿐일 테니까.
그럼 어느 가문이지?
그가 의문을 가진 순간, 성기사가 답했다.
“동쪽의 변경백이었던 텐치아 백작이라고 합니다.”
“아.”
복잡해지려던 주이안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깨끗해졌다.
그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황당한 것도 잠깐이었다. 이내 그는 웃음을 참았다.
“황제가 과감한 인사 조치를 했군요.”
“예. 동쪽의 유서 깊은 가문을 굳이 북쪽으로 이동시킨 연유는 아직 조사 중입니다만,”
조사? 그럴 필요는 없었다. 주이안이 옅게 웃었다.
“텐치아의 게이트 방어도를 높이 평가한 것이겠지요.”
그런 핑계였을 것이다.
게이트 방어율 92%.
신유리 헌터님에게는 못 미치지만 이 세계의 다른 귀족들에 비해선 압도적인 능력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북쪽 산맥 근처의 가문들은 게이트 대응에서 상대적으로 부족한 성적을 내고 있었다.
그러니 마침 핑계가 좋았다.
그런 자가 가면 북쪽의 게이트 방어율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테니까.
그 모든 걸 알면서도 주이안은 속 쓰린 미소를 감출 수밖에 없었다.
과연 황제가, 신재헌 헌터가 그 생각만으로 텐치아 백작을 북쪽으로 보냈을까?
아니었을 텐데.
하지만 이내 그의 얼굴엔 다시 온화한 미소가 떠올랐다.
과격하게까지 보이는 움직임. 감히 그녀를 넘보지 말라는 듯한 경고.
그런 속뜻이 보이고 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그걸 떠나 주이안 역시 신재헌의 결정에 찬성이었다.
주이안은 손을 펴 보였다.
“그럼 우리 쪽에서도 움직여야겠군요.”
명목은……, 뻔하다. 그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텐치아가 친황제파로 너무 기울어지지 않도록 하세요. 원래도 신시안 님에 대한 신앙심이 있었던 자이니…….”
주이안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가 말했다.
“라엘라 평원에서 가장 게이트가 많이 열리는 지역에 신전을 추가 건립하는 안을 추진해 주세요.”
“……!”
그의 말에 성기사가 눈을 크게 떴다.
그만큼 교황이 텐치아를 주목하겠다는 뜻이었으니까.
“전투가 있는 곳에는 신시안 님의 자비가 필요할 테니.”
“……과연, 그렇겠군요.”
성기사가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에게 부드럽게 웃은 주이안이 손짓했다.
이만 물러가 보라는 의미였다.
“바로 명을 받들겠습니다.”
성기사는 빠르게 몸을 물렸다. 감동받은 표정이었다.
―달칵.
문이 닫히고, 주이안은 다시 소파에 앉았다.
“…….”
아까보다 몸이 더 녹진해진 기분이다. 주이안은 소파 등받이에 몸을 늘어뜨렸다.
그런 그의 귓가에, 다시 한번 새까만 악마의 속삭임이 울렸다.
‘텐치아 백작, 그자가 신유리 헌터님을 다신 보지 못하게 하자.’
신유리 헌터님이 그자에게 관심을 가지기 전에.
이미 시선을 끈 그자가, 신유리 헌터님의 호감을 가져가기 전에.
그러니 주이안은 북쪽을 아주 편하게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라엘라 근처의 게이트 상황이 어땠지…….”
몸을 일으킨 주이안이 업무용 책상으로 다가갔다.
여전히 흐린 시야에 눈살을 찌푸린 그가, 안경을 꺼내 썼다.
***
에델바이스 영지가 핫하긴 핫한가 보다.
하긴, 내가 봐도 그럴 만했다.
10년 만에 나타난 새로운 귀족가!
황가도 관심! 신전도 관심!
그것도 모자라 영지의 주인은 수호기사단장이라는 직위를 가진 데다 마탑주와 친분까지 있다!?
이건 되는 주식이다!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도 이해가 갔다.
[에델바이스 영지에 마탑주 클로나 에이센이 머물고 있다]
그 소문이 퍼지는 걸 난 굳이 막지 않았다.
막을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친한 게 알려지면 소예리 헌터랑 만나기도 편해지고, 무엇보다 마탑주가 여기 있다는 소식에 마법사들이 슬금슬금 모여드는 것도 좋은 소식이었다.
“여기가 바로 마탑주님께서 연구를 진행하신다는…….”
“에델바이스 영지의 마력 흐름이 심상치 않은 건 내가 진작 알았다니까!”
그렇게 아는 척하며 들어오는 마법사들을 보면서 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게다가 신전 규모도 커서 사제를 지망하는 사람들도 슬금슬금 영지 중심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신시안 신전은 어디로 가면 되나요?”
그런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도로도 좀 재정비해 주었다.
저어쪽은 신전 가는 길. 저어쪽은 마탑 가는 길입니다아.
로마도 제국을 세우고 가장 먼저 한 게 도로 정비라고 하지 않았던가?
자고로 뭘 하려면 길부터 잘 닦여 있어야 하는 법이다.
사람이 움직이고 싶어도 길이 개판이면 집에 드러누워서 너튜브나 보게 된다고.
그리고 그 결과.
“와우.”
내 앞으로 몰려든 기사단 지원자들의 서류 뭉치 두께가 둔기로 느껴질 즈음.
시험을 보겠답시고 몰려든 꼬꼬마 딜러…… 아니, 기사 지원자들을 보고 난 감탄했다.
내 생각보다 두 배는 더 많이 온 듯했다.
“이야, 우리 신유리 헌터님 인기도 많아요~”
나랑 같이 첨탑 지붕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던 소예리 헌터가 말했다.
난 어깨를 으쓱했다.
“난 원래 인기 많았어요. 너튜브에 신유리 치면 나오는 영상 보다가 밤도 새울 수 있었는데, 몰랐어요?”
“헐.”
소예리 헌터가 입을 떠억 벌렸다.
“몰랐어?”
그렇게 같은 팀 헌터한테 관심이 없어요?
내가 눈을 가늘게 뜬 순간이었다. 소예리 헌터가 말했다.
“난 주이안 헌터님 ASMR 듣느라 신유리 헌터님 검색해볼 생각을 못 했네.”
“저런.”
주이안 ASMR은 못 이기지. 음음.
우리 팀이 주로 머무는 곳은 복층 집이었다.
1층은 주이안 씨와 신재헌의 방이 있었고, 2층은 나와 소예리 헌터의 방이 따로 있었다.
별장이라고 샀지만 그냥 넷이 붙어있을 일이 많으니 아예 눌러앉아 버린 집.
그 2층에서 창문을 열고 주이안 씨 ASMR을 틀어놓고 있으면, 10분도 안 되어 아래층에서 사람이 올라왔다.
‘……신유리 헌터님.’
그리고 문을 열어보면 아주 곤란한 얼굴의 ASMR 주인공이 서 있었다.
‘그…… 잠들기 전에 제 목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이상해집니다.’
그러면서 자기 ASMR 꺼달라는 소리를 곱게 돌려서 하는데, 흐흐흑.
그 재미는 놓칠 수가 없지.
“졌다.”
완패. 난 양손을 들어 보였다.
소예리 헌터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그나저나 헛소문 났더라고요.”
소예리 헌터는 우글우글 모여들어서 내 연설이 시작되길 기다리는 검사들을 내려다보았다.
시계 보니 8분 정도 남았다.
“뭔데요?”
내가 돌아보니 소예리 헌터가 무시무시하다는 듯 팔을 문질렀다.
“에델바이스 영지에선 기사 선발전을 서바이벌로 한다면서요!?”
“네?”
그게 뭔 멍소리야? 난 눈썹을 치켜올렸다.
미쳤냐, 서바이벌을 하게?
그럼 저 중에 엄청 잘난 놈 하나 끼어 있으면 2등이나 3등은 빛도 못 보고 날아갈 수 있다는 소리였다.
난 그런 멍청한 선발식을 할 생각은 없었다.
“에델바이스 백작님은 아주 무시무시하고 깐깐해서, 100대1의 서바이벌을 뚫어야만 기사단으로 채용해준댔어.”
아이고, 무서워라! 소예리 헌터가 팔을 열심히 문질러댔다.
“아니, 그런 소문은 어디서 들어요?”
“기사단 입단 신청하는 곳에 분신 꽂아놨다가 들었어요.”
“어휴.”
하여간 호기심은! 난 손을 내저었다.
“전 이만 서바이벌 해명하러 갈게요. 그런 헛소문 낸 사람 누구야?”
내 말에 소예리 헌터가 웃음을 터뜨렸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이 ‘비행(A)’ 효과를 부여합니다.]
난 그녀의 스킬을 받아 둥실 떠올라, 아래로 향했다.
점점 현장의 소란스러움이 느껴졌다.
“살아남아라, 아들!”
“네, 어머니!”
그리고 정말 비장함이 가득한 대화들도 들렸다.
아니, 진짜 서바이벌로 소문난 거야? 그걸 믿어, 애들아?
“에델바이스 백작님께서 오십니다!”
내가 단상 근처로 다가가자 기사단장이 외쳤다.
목청 좋고!
그의 목소리에 웅성거리던 좌중이 잠잠해졌다.
난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E] [D] [E] [C] [D] [D]
꼬꼬마 딜러들의 랭크가 보였다. 간혹 C급도 보이기도 했다.
음, 물 좋고.
“자, 이렇게 에델바이스의 기사가 되고자 온 인재들이 많아서 너무나 기쁩니다.”
단상엔 마이크 비슷한 물건도 없었지만 내 목소리는 알아서 울렸다.
마이크 비슷한 효과를 주는 마법이었다.
“…….”
긴장한 꼬꼬마 퓨어딜러들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물론 그중에는 진로를 잘못 찾아온 것 같은 힐러나 탱커, 보조계들도 보였다.
타 영지의 첩자라도 되는지 뒤가 구린 딜러마크를 단 놈들도 있었다.
사람은 속여도 시스템창은 못 속인다, 얘들아. 쯧쯧.
“이번 에델바이스가의 기사단 시험을 두고 이야기가 많은 걸로 아는데요.”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 처음인데.
난 새삼스러운 기분에 휩싸였다.
언제가 마지막이었더라? 기자들 앞이었던가?
‘공식적인 답변이 필요한 질문은 메일로 보내주시죠.’
신재헌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래, 어느 날부터인가 신재헌은 내게 몰려오는 기자들을 차단해 버렸다.
‘난 우글우글 몰려오는 기자들이 싫어.’
내가 그 말을 하고 나서부터인가?
‘왜?’
그렇게 묻는 신재헌은 짙은 푸른색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정말 그 이유를 모른다는 듯이.
너 때문인데.
그래서 그렇게 말할 뻔했다.
네가 C급일 때부터 널 물어뜯느라 안달이었던 기자들을 내가 좋아할 리 없잖아.
하지만 난 그냥 대충 답해 버렸다.
‘몬스터보다 더 득달같이 달려들잖아. 뉴스는 원할 때만 탈래.’
그 후였던 것 같다. 나보다 신재헌이 카메라 앞에 더 나선 것이.
미안하면서도 고마웠다.
C급이었던 그는 이제 S급이었다.
심지어 S급 중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의 딜러.
그를 무시할 수 있는 기자는 없었다. 그를 무시하던 기자들은 이제 그에게 알랑거리느라 정신없었다.
[인정에 약한 헌터는 살아남지 못한다 – S급 신유리와 C급에 관하여]
그리고 그딴 얼토당토않은 칼럼을 써댔던 수많은 기자들은 어느 날부터인가 보이지 않았다.
“…….”
사람들 앞에 서자니 그의 뒷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내 앞에 서 있었다.
나를 보호해주려는 것처럼.
‘너보다 먼저 죽겠다고 했잖아.’
그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내가 멍해졌을 때였다.
“가주님?”
기사단장이 날 조심스럽게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