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던전의 S급 시한부 영애 (91)화 (91/218)

91화

“텐치아 백작이라.”

신재헌은 알현실에 앉아 지루한 기다림을 하고 있었다.

며칠 전.

소예리 헌터와 한 약속을 지키겠다는 핑계로 나갔을 때.

그는 정보통으로부터 기이한 소식을 들었다.

‘텐치아 백작이 에델바이스 백작에게 마음을 고백했다고 합니다.’

물론 그 소식보다 먼저 신유리의 헌터 채팅이 있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유리)>>> 마차 타려다 고백받은 썰 푼다]

이야기를 들은 직후 그는 텐치아 백작에 대해 조사하라 명령했다.

텐치아 백작의 이름이야 알고 있었다.

테셔스 드 텐치아.

텐치아 가는 변경백 가문으로 오랫동안 동제국과 서제국의 경계를 지켜온 유서 깊은 가문이자 실력자 가문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청렴함으로 소문이 나 있으며, 먼지를 털어도 먼지털이에서 먼지가 더 날 것 같은 깨끗하기 그지없는 가문이었다.

“흐음.”

신재헌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세상에 더러운 놈 천지라지만, 이런 놈도 있기 마련이지.

황제로서는 만족스러워야 했지만 그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황제란 지위가 RP던전이 끝나면 사라져 버릴 허상이라는 건 둘째 치고, 그냥 텐치아 백작이 싫었다.

“이런 놈이 아니었으면 치워버리기 쉬웠을 텐데.”

이렇게 깨끗한 놈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그는 텐치아 백작에 대해 조사한 종이를 툭툭 치면서 중얼거렸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유리)>>> 바이야 백작 아니고요 텐치아 백작]

그 채팅을 보자마자 가장 먼저 한 생각이 그거였다.

텐치아 백작인지 뭔지, 더는 유리를 볼 수 없게 해야겠다고.

‘말했잖아. RP던전에서 사람 사귀어서 뭐 하냐고.’

그렇게 말하던 신유리는 정말 텐치아 백작에게 티끌만큼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네가 아무렇지 않다면.

다시 말해 그놈이 없어져도 네가 아무렇지 않다면.

그렇기에 더, 난 네 옆에서 이놈을 치우고 싶어.

네게 시선을 두는 놈이 있다는 게 마음에 안 들어.

그래서 텐치아 백작에게 은밀히 친서를 보냈다.

그리고 그 결과.

“폐하, 텐치아 백작이 도착했습니다.”

바깥에 드디어 기다리던 자가 도착했다.

신재헌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들라.”

그의 말이 떨어지자, 알현실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그리고 그 문틈으로 진청색 머리칼의 젊은 귀족이 들어섰다.

“먼 길 오느라 수고했다.”

그 말에 텐치아 백작이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닙니다. 영광스러운 길을 오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눈에 띄게 긴장한 기색이었다. 신재헌은 그를 보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이리 긴장하지?”

그야 황제 앞에, 그것도 몰래 보낸 친서를 받고 왔으니 긴장할 만도 하지.

하지만 신재헌은 모른 척 물었다.

그러자 텐치아 백작이 살짝 몸을 떨었다.

“그, 아, 이런 영광을, 제가…….”

더 당황한 게 보였다. 신재헌이 낮게 웃었다.

“역대 텐치아 백작은 모두 황실의 알현 기록이 있더군. 누가 보면 전통이라 생각할 정도로.”

―탁.

신재헌이 황좌의 팔걸이를 짚으며 의자 끝에 걸터앉았다.

텐치아 백작에게 매우 흥미가 있다는 것처럼.

“감, 감사합니다.”

텐치아 백작은 연이은 칭찬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이었다.

황제에게 치하를 받아서 그런 거겠지만, 귀가 빨개지는 모습에 신유리가 생각이 났다.

신재헌은 눈을 가늘게 떴다.

신유리 앞에서도 저랬을까?

저 표정으로 고백했을까?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그만큼 역대 텐치아 백작들이 뛰어났다는 거겠지. 지금 내 앞에 있는 그대를 포함해서.”

―툭툭.

신재헌이 고개를 들라는 뜻으로 황좌의 팔걸이를 노크하듯 두드렸다.

“……!”

그러자 멈칫한 텐치아 백작이 조심스럽게 시선을 들었다. 이내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신재헌의 입매가 매끄럽게 올라갔다.

“난 지난 숙청 때에도 텐치아 백작가만큼은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 말에 텐치아 백작은 눈을 크게 떴다.

“모든 가문을 의심해야 했지만 텐치아만큼은 그러지 않았지. 절대 황가를 배신하지 않을 가문이기에.”

신재헌이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그리고 그 기대에 부응하듯, 텐치아는 배신자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게이트 사태에도 잘 대응해 주었다.”

신재헌의 말에 텐치아 백작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부족한 능력에 이런 영광을 받아 어찌할 줄을 모르겠습니다.”

그의 떨리는 목소리에 신재헌이 웃음을 터뜨렸다.

“부족한 능력이라.”

웃음을 그친 신재헌이 말을 이었다.

“그럼 이 제국에서 게이트 방어도로만 본다면 그대보다 뛰어난 사람은 한 사람뿐이겠군.”

“……!”

멈칫한 텐치아 백작과 신재헌의 시선이 마주쳤다.

순간 흔들리는 텐치아 백작의 시선을, 신재헌은 분명히 알아챘다.

먼 곳을 보는 듯한 시선.

눈앞에 있는 황제란 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시선.

신재헌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제가 늘 그랬기에 알았다.

저자는 유리를 생각하고 있었다.

반짝이는 사람.

그녀는 누구나 시선을 줄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제가 이렇게나 안달이 나는 것이다. 저런 놈들이 또 꼬일 것만 같아서.

“이렇게 그대를 부른 건, 그 능력을 높이 사 그대에게 제안을 한 가지 하고 싶어서였다.”

신재헌이 입을 열었다.

털어도 먼지털이에 먼지가 더 많을 것 같은 귀족가라면?

오히려 그 능력을 좋은 데에 쓰게 하면 된다.

“그 능력을 제국을 위해, 더 넓은 곳에서 써줄 수 있겠나?”

“더 넓은 곳이라 하시면……?”

텐치아 백작이 눈을 크게 떴다. 신재헌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북쪽 산맥, 라엘라 평원의 수호자로서 말이야.”

신유리가 있는 동쪽이 아니라 먼 곳에서.

텐치아 백작에게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오히려 텐치아 가에게는 대대로 영광으로 기록될 것이다.

라엘라 평원.

그곳은 현 황제 아이반이 숙부 세력을 숙청한 이후로 황가의 관할 아래에 쭉 두었던 곳이었다.

이 제국에서 금싸라기땅으로 불리는 땅 중 하나이기도 했다.

수도에서 멀다는 것만 제하면 영지의 생산량이나 발전 가능성까지, 제2의 수도라고도 평해지는 곳.

그곳의 주인이 되는 것이니까.

“……!”

텐치아 백작의 눈이 크게 뜨였다. 신재헌이 미소 지었다.

“그대라면, 충분히 그 땅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을 것 같은데.”

그의 가벼운 말이 알현실을 울렸다.

황제의 말은 진심이었다. 텐치아 백작은 입을 떠억 벌렸다.

눈앞에 출세 가도가 촤르륵 펼쳐진 셈이었으니 당연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신재헌이 소리 없이 웃었다.

더없는 영광을 줄 테니 신유리의 곁에서 떠나.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

***

내가 마탑에서 돌아오고 얼마 안 있어, 연합 미야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뭐? 라엘라 평원?”

거기 엄청 좋은 땅이라고 들었는데?

물론 먼 북쪽에 있어서 난 신재헌이 던져줘도 안 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거길 미야 사람이 간다고?

“예. 텐치아 백작께서 그곳으로 가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 그럼 미야는?”

난 집사의 말에 되물었다.

여긴 동쪽 끝이고 거긴 북쪽 끝인데, 사실상 지금처럼 연합에 소속되어 병력을 긴밀히 주고받기엔 한계가 있을 터였다.

설마 탈퇴하는 건가?

그래도 아까운 인재인데. 내가 턱을 매만질 때였다.

“그것에 대해서 말입니다만…….”

내게 소식을 전한 건 바이야 백작의 기사였다.

파이팅이 지나치게 넘쳐서 그렇지, 백작은 능력 없는 자가 아니었다.

그는 범람한 게이트에도 당황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병력을 이끌어, 순식간에 영지의 안정을 되찾았다고 했다.

거기에 우리 가문과 텐치아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던 건 물론이다.

그는 도와줘서 감사하다는 뜻으로 선물과 함께 사람을 보내 왔다.

그러면서 전해진 소식이 이거였다.

“에델바이스 백작님께서 괜찮으시다면 북쪽 근처의 다른 가문들과 힘을 합쳐 ‘미야’를 확장하는 건 어떨지, 의견을 조심스럽게 여쭤보라 하셨습니다.”

“오…….”

이건 또 새로운 생각인데? 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 북쪽과 동쪽을 아우르는 연합이 되는 거다.

당연히 급한 상황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도 많아질 거다.

“괜찮은데?”

내 말에 바이야 가 기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더니 그는 아까부터 흘끔거리던 내 옆자리를 대놓고 쳐다보기 시작했다.

“예. 그리고…….”

기사가 조심스럽게 내 옆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내 옆에선 붉은 머리카락을 편히 늘어뜨린 소예리 헌터가 찻잔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찻잎이 참 예쁘게 생겼단 말이야.”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ㅂ바바바반말]

이 사람이 페널티 무서운 줄을 모르네! 내가 기겁해서 채팅을 하자 소예리 헌터는 뒤늦게 덧붙였다.

“요.”

그렇게 성의 없이 덧붙일 거야? 그래도 페널티 안 떠?

마탑주가 생각보다 싹수없는 성격이란 설정인 건지 소예리 헌터의 표정은 평안하기만 했다.

페널티 위기 창 뜬 사람으론 안 보였다.

그녀는 마탑에서의 사건(?)이 있은 직후, 마탑의 안전 문제가 우려된다며 연구 겸 자신을 지켜준 에델바이스 백작의 영지에서 머물겠다 선언한 상태였다.

물론 속마음은 달랐다.

‘나 유리 헌터랑 더 있으면 안 돼? 골방 연구원 컨셉 너무 지겨워. 살려줘!’

그냥 지루해서 따라온 거였다.

“마침 이곳에 마탑주님께서 머물고 계신다 하시고, 이전부터 두 분께서 각별한 우정을 다져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바이야 가의 기사가 말했다. 난 그를 돌아보았다.

각별한 우정? 그렇게 소문이 났어?

하긴, 소예리 헌터는 내가 포를랭 가에 있을 때도 오고 그랬지.

물론 그때야 정체를 숨기고 있었지만.

내가 에델바이스 백작이 된 후부터는 그때부터 친해진 거라고 소문을 내긴 했는데 이게 각별한 우정이란 단어로 돌아올 줄이야.

“그렇습니다만…….”

그때 찻잔에서 시선을 뗀 소예리 헌터가 금안을 반짝였다.

“혹시 ‘미야’에서 마탑에 문의하실 일이라도 있으실까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원래 보조계 무시하던 애들 아니었어?]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마법사 무시하긴 했죠]

채팅이 지나가는 사이 바이야 가의 기사가 말했다.

게이트 사태 전, 마법사를 소 닭 보듯 하는 시선으로 봤던 때와는 달리 공손함을 갖춘 채였다.

“혹시 마탑주님께서도 괜찮으시다면, 이번 동-북쪽 미야 연합 확장 기념 연회에 마탑주님을 초대하고 싶어 하십니다.”

저 말을 꺼내는 자가 바이야 백작의 기사라는 점에서 난 감동받을 뻔했다.

물론 그건 소예리 헌터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드디어]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얘네가 드디어]

뒷말을 안 해도 보이는 것 같았다.

드디어 너희가 파티플이 뭔지를 알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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