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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던전의 S급 시한부 영애 (86)화 (86/218)

86화

원래 마법사와 기사들은 소 닭 보듯 하는 사이였다.

하지만 다행히 내가 데려온 기사들과 마탑의 마법사들은 안면이 있는 듯했다.

아마 함께 게이트에 들어가 본 적이 있거나 그런 거겠지.

“후우.”

친해지길 바라 안 찍어도 돼서 다행이다.

“그럼 이제 엘리베이터는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없어 보이는 건물을 올라 볼까?”

난 탑으로 들어오자마자 마주친 계단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가운데가 텅 빈 이 마탑은 계단이 원형으로 쭉 위로 솟아 있는 형태였다.

마법사들은 수련도 안 한다던데 이걸 대체 어떻게 오르는 거야?

물론 B급 스탯으로 올라가는 거야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내가 S급일 때도 20층 건물을 굳이 걸어서 뛰어 올라가고 싶진 않았다고!

내가 주먹을 꽉 쥐고 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후웅.

별안간 내 밑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응?”

당황해 바닥을 보는 순간.

소예리 헌터의 머리칼이 생각나는 붉은 마력이 내 몸을 둥실 띄워 올렸다.

“어어?”

뭐뭐뭐뭐야!

당황해서 벽을 짚으려고 했지만 바람은 내게 적대적이지 않았다.

산들바람처럼 선선한 바람이 머리칼을 날리게 했다.

그리고 점점 나를 위로 데려가기 시작했다.

“오, 설마 가운데가 뻥 뚫린 게…….”

엘리베이터(오픈카ver.)가 있기 때문이었습니까?

이걸 몰랐네?

[6F]

내가 감탄하는 사이 나는 벌써 6층을 지나고 있었다.

“이건 오는 사람은 다 데려다주는 건가?”

그럼 암살자나 소예리 헌터 스킬을 봉인하려는 놈도 혹시 친절하게 안내되는 시스템?

그럼 안 되는데?

아니, 이렇게 솟아오르면 오히려 처리하기 쉬울 수도 있었다.

“바람이 놓아주기 전엔 뭐 어디 잡을 수도 없고…….”

이래 봬도 투척 1등으로 물리선생님의 사랑을 받은 몸이 아닌가?

바람 타고 날아오는 놈 꿰뚫는 건 자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후웅!

순간 내 근처의 붉은 마력이 사라졌다.

“응?”

설마 이대로 20층 높이에서 떨어지는 거? 내가 인자한 미소를 지었을 때였다.

“여기예요!”

소예리 헌터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

저쪽이다! 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바람이 나를 인도해 20층의 복도에 내려놓는 것도 모른 채 그 옆을 멍청하게 쳐다보았다.

소예리 헌터가 앉아 있는 테이블에, 의외의 얼굴이 같이 앉아 차를 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재헌?”

신재헌은 답 대신 차를 마시며 손을 들어 보였다.

그 얼굴을 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또 한동안 못 볼 줄 알았는데! 하는 기쁜 마음과.

서제국 황제 또 암행 나온 거야? 그럼 일은 누가 해?

이 나라 정말 괜찮은 거지?

……하는 걱정스러운 마음이.

***

“걱정돼서요.”

여기까진 어쩐 일이냐는 말에 신재헌은 간단히 답했다.

그의 시선이 소예리 헌터에게 향했다.

“제 습격도 빨랐으니 혹시나 해서.”

“하긴.”

그럴 수 있지. 같은 헌터팀인데 걱정이 안 될 리가 있나.

하지만 말없이 달려온 건 의외라 자꾸 시선이 갔다.

오면 온다고 헌터 채팅에 말할 법도 한데.

“…….”

그 사이 인사를 마친 소예리 헌터는 눈을 반짝이면서 책을 보고 있었다.

난 저 표정을 알았다.

논문 볼 때 표정이다. 아주…… 흥미로워하는 표정이다.

그리고 저땐 누가 옆구리 찔러도 못 알아챌 정도로 집중해 있는 게 보통이었다.

때문에 난 목소리를 낮춰 신재헌에게 물었다.

“아니, 난 근데 네가 끝까지 반대할 줄 알았거든?”

소예리 헌터가 봉인 마법에 당해 보는 계획에 대한 이야기였다.

내 말에 신재헌이 소예리 헌터를 흘끗 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듣다 보니 소예리 헌터님 말씀이 맞더라고. 여기만큼 안전하게 스킬 배울 수 있는 데가 어딨어?”

“…….”

우리가 그렇게 떠드는 동안에도 소예리 헌터는 책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나도 안 들리는 게 분명하다!

그 사실을 재차 확인하면서 난 신재헌을 쳐다보았다.

“너도 혹시 학구열이 막 끓어오르냐?”

직접 마법에 당해봐도 괜찮겠다 싶을 정도로?

내 말에 신재헌은 놀랍게도 어깨를 으쓱했다.

진짜로?

난 놈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놈이 왜 딜러로 각성한 거지? 시스템 눈깔이 빠졌던 게 아닐까?

“신재헌 헌터님도 드디어 내 마음을 알아준 거죠.”

그때 소예리 헌터가 끼어들었다. 잠시 책에서 시선을 뗀 듯했다.

난 그 틈을 타 물었다.

“그래서 놈은 아직 안 온 거죠?”

내 말에 둘은 나란히 고개를 저었다.

“안 왔지이.”

소예리 헌터의 장난스러운 말과 함께 신재헌이 어깨를 으쓱했다.

“늦더라고요. 내가 와 있는 걸 알 리도 없는데.”

그 말에 난 어이가 없어 그를 가리켰다.

“그렇게 얼굴 까고 왔는데 모른다고요?”

페널티는 안 드셨습니까? 내 말에 신재헌은 경갑에 달린 검은 후드를 푹 뒤집어썼다.

“이러고 왔어요.”

“오…….”

난 짧게 감탄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 쓰고 있는 게 문제 아닐까요?

놈이 갑자기 튀어나와서 서제국 황제 얼굴 보면 RP던전 페널티가 좋다고 버선발로 뛰어나올 텐데?

내가 그를 빤히 쳐다보는 사이 그는 다시 후드를 벗어 버렸다. 그때 소예리 헌터가 웃음을 터뜨렸다.

“다시 뒤집어쓰는 게 좋겠대요.”

“아니, 그건 아니고.”

난 대번에 그 말을 부정했다.

신재헌의 푸른빛 나는 눈동자와 내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검은 머리칼이 주인이 고개를 기울임에 따라 살랑, 흔들렸다.

얼굴 보면 좋지. 좋은데…….

“페널티 문제 있을까 봐 그랬죠.”

맞는 말이긴 한데 왜 이렇게 말하는 게 어색하지? 모래 씹는 것 같은 기분에 난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다 말고 문득 이곳이 20층 높이란 걸 떠올렸다.

탑 최상층이라서 얼굴 마음껏 까고 있는 건가?

아무나 몰래 올라올 순 없을 테니까…….

그럼 이해는 가는데 좀 불안했다.

“근데 여긴 너무 타깃 되기가 쉽지 않아요?”

누가 습격할지 모르는 상황에, 이런 퇴로도 없는 곳에 있어도 괜찮은 거야?

내 걱정에 소예리 헌터님은 한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그럼요, 괜찮아.”

무슨 자신감이야???

내가 눈썹을 치켜올리자 소예리 헌터가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우리 유리는 걱정도 많지~

그렇게 흥얼거리던 그녀가 돌연 씨익 웃었다. 장난기 어린 미소였다.

“이래야 마법사가 꼬인다구요!”

“네?”

꼬여? 내가 눈을 깜빡이자, 소예리 헌터는 비밀이라는 듯 검지를 들어 입술에 대어 보였다.

신재헌은 이미 들은 이야기인지 놀라지도 않은 채 듣고 있었다.

“상대는 내가 멸망계시록에서 미리 읽었다는 걸 모르잖아.”

“그건 그런데―”

말을 받던 난 문득 소예리 헌터의 생각을 알아챘다.

아하.

“그니까 마탑주는 지금 편안한 마음으로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는 컨셉?”

“그거지!”

소예리 헌터가 깔깔 웃었다. 그러면서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한눈에 봐도 복잡한 그림과 글자가 쓰인 책이었다.

“오우.”

친환경 수면제 아냐, 저거?

난 손을 내저으며 책에서 시선을 돌렸다.

반면 신재헌은 그걸 심각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난 소예리 헌터가 다시 책에 빠진 걸 확인하고, 신재헌을 쿡 찔렀다.

“넌 저거 해석할 수 있어?”

신재헌은 내 말에도 말없이 책을 보고 있었다.

‘이놈 알고 보니 보조계 아니야?’라는 생각을 한 지 2초 만에 신재헌이 답했다.

“따라 그리긴 쉽겠다.”

“오.”

그럼 그렇지.

그거 참 부러운 능력이에요!

딜러 둘이 거대한 책을 보면서 감탄하는 동안에도 소예리 헌터는 책을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정말 재밌긴 재밌는 모양이었다. 금안이 반짝반짝 빛났다.

난 그런 그녀를 보다가 신재헌을 다시 돌아보았다.

“근데 넌 진짜 왜 왔어?”

신재헌은 내 말에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너 올 때까지 소예리 헌터 지킬 사람이 있어야 하니까.”

난 눈썹을 치켜올렸다.

“진짜 그거 때문에?”

소예리 헌터가 나처럼 스탯 낮아진 것도 아닌데?

내 말에 신재헌은 한 박자 늦게 답했다.

“……주이안 헌터 같은 경우도 있으니까.”

혹시 모를 비상상황에 대비한다는 뜻 같았다. 신재헌의 변명에 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정말 그것뿐이야?

“왜…… 그렇게 보는데?”

내 시선에 그가 답지 않게 말을 흐리며 물었다.

이놈 봐라?

난 팔짱을 꼈다.

“주이안 씨야 처음이라서 습격당한 거고. 소예리 헌터님은 방어 튼튼 보조계에 습격할 것도 이미 알고 있는데, 굳이 황성에 복귀하자마자 여기로 바로 뛰어 왔다고?”

게다가 이놈이 갑자기 소예리 헌터 편 든 것도 뭔가 수상했다.

무엇보다 이놈은 거짓말할 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입꼬리를 살짝 올리면서 고개를 기울이는 버릇이 있었다.

―바로 저렇게.

내가 모를 줄 알지?

난 살짝 고개를 기울인 그의 얼굴을 가리켰다.

“너 그거, 거짓말할 때 얼굴이다?”

내 말에 신재헌이 멈칫했다. 그러다가 말했다.

“그런 얼굴이 어딨어?”

어이가 없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린 채였다. 난 그의 얼굴을 가리킨 손을 거두지 않고 말했다.

“여기.”

“…….”

신재헌은 나를 한동안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숨길 땐 숨기는 놈이다.

그걸 알아내려고 해 봐야 말 빙빙 돌리면서 안 가르쳐주는 게 이놈 특징이지.

그럼, 이럴 땐?

난 신재헌이란 사람에 대한 정답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난 일부러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를 살폈다.

“너 혹시…… 이 밤에 여기 온 것하며…….”

내가 뭔가를 의심하는 듯하자 신재헌이 날 돌아보았다.

“예리 언니한테 마음 있으면 접어라. 너 같은 놈한테 못 준다.”

―찌이익!

그 순간 소예리 헌터가 보고 있던 책을 반쯤 찢어 버렸다.

“?”

농담인데 그렇게 놀랐어?

한국에서도 한두 번 이런 식으로 놀린 게 아니었다.

“흠흠. 하던 얘기들 해요. 난 재밌게 듣고…… 아니, 보고 있거든.”

듣고? 내가 눈썹을 치켜올릴 때였다.

“하.”

신재헌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손을 펴 보였다가 물었다.

보나마나 ‘소예리 헌터도 좋지만 아무래도 한 사람만 선택하기엔 내가 너무’로 시작하는 헛소리를 늘어놓을 타이밍이었다.

그런데 그는 불쑥 다른 이야기를 했다.

“너야말로 그 텐치아인가 하는 놈한테 관심 없어?”

“어?”

내가 멍청하게 되물었다.

“나중에 대답해주기로 했잖아. 그놈 고백에.”

“그거야 거기서 씹을 수 없―”

답하던 난 눈살을 찌푸렸다. 잠깐만.

“그걸 어떻게 알아?”

그 일이 있은 직후 난 마차를 타고 여기로 달려왔다.

텐치아 백작이 나한테 고백한 거야 내가 채팅으로 알려줬으니 알았겠지만, 내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안 알려줬는데?

근데 그 소식이 내 마차보다 빨리 신재헌한테 닿았다고?

그럼 마차보다 빠른 소식통이 있었단 소리? 그것도 내 옆에?

내가 눈썹을 치켜올렸을 때였다.

신재헌이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네 말대로 거기서 씹을 순 없었을 거 아냐.”

“그……건 그렇긴 한데.”

상식적인 반응이라면 그렇긴 하지. 난 머리를 긁적였다.

여하튼 텐치아고 베네치아고가 문제가 아니었다.

“여하튼 난 그 사람한테 관심 없네요.”

난 손을 내저었다. 아까부터 하여간 남의 로맨스엔 관심이 비상하다니까?

“말했잖아. RP던전에서 사람 사귀어서 뭐 하냐고.”

내 말에 신재헌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이놈이 말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가 불쑥 물었다.

“그럼 실제로는?”

“어?”

“남자, 사귈 생각 있어?”

난 그 말에 눈을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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