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텐치아 백작?
그가 누군지는 알고 있었다.
그는 동제국과의 경계를 지키는 변경백이기도 하고, 연합 ‘미야’의 우수회원(?)이기도 했다.
나 다음으로 영지 게이트 방어도가 뛰어났으니까.
“어서 오세요.”
난 그에게 짧게 인사해 보였다. 텐치아 백작은 날 보고 놀란 듯했다.
“에델바이스 백작께서도 오셨군요.”
검은색 눈을 크게 뜬 텐치아 백작이 곧바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척!
그런 그의 앞에,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바이야 백작의 간이의자가 놓였다.
“?”
귀족이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그 간이의자에 당황한 것 같았던 텐치아 백작은 곧 떨떠름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난 그에게 다시 눈인사를 하면서 말을 이었다.
원래 귀족끼리 만나면 이런저런 복잡한 인사를 나눠야 했지만 그런 허례허식을 지킬 시간은 없었다.
“일단 에델바이스에서는, 협정을 생각해서 조금의 병력을 데려오긴 했어요.”
내가 말하자 바이야 백작이 의욕으로 번뜩이는 눈을 내게로 돌렸다.
“미리 연락을 했어야 했는데, 아무래도 바이야 백작령에 먼저 허락을 구하고, 에델바이스에서 다시 병력을 출발시키기엔 시간이 부족한 것 같아서요.”
바이야에도 시간이 없었지만 나한테도 시간이 없었다.
“물론 저택까지 데리고 들어오는 건 실례라고 생각하는 만큼 아직 저택 밖에―”
내가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바이야 백작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이미 그 훌륭한 기사들은 저택에서 쉬고 있소이다!”
아니 대체 언제 들여보낸 거야?
―탕!
그때 바이야 백작이 다시 한번 발을 굴렀다.
“검을 든 자를 대우하는 것이 또 다른 검사의 숙명!”
그러면서 콧김이 나올 것처럼 흥분한 그가 외쳤다.
“두 백작의 지원에 이 레디드 드 바이야, 깊은 감사를 표하는 바요!”
이 사람 더 흥분하면 실려 가겠는데?
난 그에게 진정하라는 뜻으로 손짓하면서 텐치아 백작을 돌아보았다.
진남색 머리칼의 진중해 보이는 이 젊은 귀족도 바이야 백작의 끓어오르는 피(?)에 당황한 듯했다.
그러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멈칫하더니, 물었다.
“근데 에델바이스 백작께서는 이곳까지 어떻게……? 분명 외근 중이라 회신이 늦는다는 답변을 미야에 공유해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건 아마 우리 가문 집사가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소예리 헌터를 보러 가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있는 마탑으로 가기 위해 가장 빠른 길은 이 바이야 백작령을 거치는 것이었으니까.
물론 그 100%의 진실을 말할 순 없었으므로 난 적당하게 말했다.
“고통받는 제국민들이 있는데 가만히 쉬고 있을 순 없죠.”
입에 침 대신 바이야 백작이 준 과일주스를 바르고 한 말이었다.
물론 이것도 거짓말은 아니었다.
[서제국 게이트 장악도 : 58%
동제국 게이트 장악도 : 42%]
차이가 줄어들었다고! 이대로 두면 안 돼!
내가 결의에 찬 주먹을 꽉 쥐었을 때였다.
“……!”
텐치아 백작은 눈을 크게 뜨더니, 좀 멍하니 날 보다가 말했다.
“역, 역시 소문대로 대단한 분이십니다.”
대체 뭔 소문이 난 거야?
이쪽도 바이야 백작의 감동의 물결에 휩쓸려버렸는지 조금 달아오른 얼굴로 말했다.
“오는 길에 몬스터들을 싹 처리한 일행이 있다고 들었는데, 설마 그분이 에델바이스 백작이셨을 줄이야.”
그는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고 있었다. 옆에서 바이야 백작이 말을 받았다.
“그것도 검 한 번에 싹!”
“오오…….”
“내가 전장 한가운데에서도 그 깔끔한 일검을 봤다는 것 아니겠소? 그 검은 정말 에델바이스 백작 평생 수련의 정수를 담고 있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소. 특히 그 찌르기! 그 깔끔한 검로하며…….”
혹시 내 버터관자구이먹고싶다(E) 스킬 보셨나요?
그 틈에? 그 쪽팔리는 스킬을 꼭 봤어야 했어?
내가 머리를 싸매는 사이 두 백작은 나를 띄우다 못해 비행기 위로 날려 보내고 있었다.
이러다 비행 스킬 생길 판이었다.
“그보다 논의에 집중하죠.”
나 소예리 헌터 보러 가야 하거든? 지금 감탄할 때야?
하지만 내 말은 오히려 두 백작에게 불을 붙인 듯했다.
“하……!”
“흐읍……!”
둘은 서로를 보며 숨을 들이켜더니, 무릎을 치고 발을 굴렀다가 막사를 돌아다니며 주먹을 꽉 쥐기 시작했다.
이건…….
‘이건 된다! 되는 주식이다!’
라고 말하면서 게이트 부산물 수익으로 주식 놀이를 할 때의 들뜬 소예리 헌터와 완전히 판박이였다.
‘크으! 내가 된다고 했죠!?’
특히 주식 올랐을 때 표정.
자리 박차고 일어나서 무릎 치고 이마 치고 눈 감고 주먹 꽉 쥐면서 방방 뛸 때, 딱 그 표정.
“역시! 믿고 있었소!”
‘역시! 믿고 있었다니까!’
소예리 헌터 보러 가는 길이라 그런가, 자꾸 소예리 헌터가 보이네…….
난 그들을 말리려다가 진정하길 기다리기로 했다.
이대로 더 말했다간 불이나 더 붙일 것 같았다.
그래, 니들 맘대로 생각해라.
착한 사람 되기 참 쉽죠?
***
논의는 길지 않게 끝났다.
흥분을 가라앉힌 두 백작과 내가 이야기한 계획은 간단했다.
일단 바이야 백작가의 기사들이 기본기가 없는 것도 아니다.
이번 상황은 게이트가 한 번에 터져서 속수무책으로 당한 게 분명했다.
그럼 순간적으로 터져 나온 게이트를 정리할 병력만 있으면 된다는 소리.
기존의 바이야 백작가 기사들은 휴식 겸 게이트 밖으로 나온 몬스터들을 잡고, 에델바이스 가와 텐치아 가의 기사들을 중심으로 새로 생긴 게이트들을 정리한다.
그럼 순간적으로 폭증한 바이야 백작령의 게이트를 정리하면서, 폭주한 몬스터를 처리할 수 있으니 바이야 백작령이 빠르게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말 감사하오!”
바이야 백작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귀족들은 원래 고개를 쉽게 숙이지 않는다. 그만큼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일주일을 주기로 기사들의 현황과 게이트 관리 현황을 미야 전체에 공유하겠소이다. 정말로 감사하오!”
바이야 백작은 우리를 배웅하면서도 끊임없이 감사 염불을 외워댔다.
“주인님! 서쪽 평원에 게이트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집사의 보고에 정신을 차렸다.
“뭐라고!”
바이야 백작이 다시 쾅! 발을 굴렀다.
“얼른 지휘하러 가보세요. 배웅은 충분히 받았습니다.”
내 말에 바이야 백작이 다시 한번 나와 텐치아 백작에게 묵례했다.
“그럼, 그럼 가보겠소이다!”
그러더니 대뜸.
―스릉!
“진군이다!”
검을 뽑고 뛰어나가기 시작했다. 아니 설마 직접 가는 거야?
“서, 설마 직접 전장에 가십니까?”
텐치아 백작이 놀라 묻자 이미 멀어진 바이야 백작이 큰소리로 외쳤다.
“피가 끓어오르지 않소! 참을 수가 없소이다!”
저렇게 피가 맨날 끓으면 저게 선짓국이지 사람이냐?
넘치는 에너지에 난 혀를 내둘렀다.
아무튼 할 일은 끝났으니까 소예리 헌터한테 가면 될 것 같았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나와 텐치아 백작은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마차로 향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지금 바이야령에서 출발해요]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넵넵]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나 신유리 헌터님 오신다셔서 어제부터 행복했잖아~]
올라오는 채팅에 난 나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바로 마탑으로 가자.”
“예.”
내가 손짓하자, 이미 내 일정을 알고 있는 기사들이 마차 문을 열어 주었다.
설마 가는 사이에 뭔 일 터지진 않겠지?
서둘러 마차에 올라타려는 때였다.
“에델바이스 백작!”
멀리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
돌아보니 진남색 머리칼을 휘날리며 뛰어오는 건 텐치아 백작이었다.
아니, 아까 인사하고 갈 길 가는 거 아니었어요?
그가 엄청나게 빠르게 달려오는 바람에 주변의 시선은 모두 우리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에델바이스 가와 텐치아 가의 기사들, 바이야 가의 기사들은 물론이고 물자 보급을 위해 온 다른 미야 소속 가문의 하인들이나 기사들까지.
“!”
그걸 뒤늦게 알아차렸는지 텐치아 백작의 얼굴이 제 머리 색과 정반대로 변했다.
요컨대 새빨개졌다는 소리였다.
“에델바이스 백작!”
뭐야? 내가 상황파악을 채 하기도 전에 갑자기 텐치아 백작이 쩌렁쩌렁 외쳤다.
“그대의 기개에 반했습니다!”
“네?”
여기서요? 갑자기요? 이렇게요?
“오, 텐치아 백작께서…….”
“에델바이스 백작께 청혼한 것이오?”
‘반하면 다 청혼이야?!’라고 따지기에는 귀족 사회는 그런 사회이긴 했다.
“미야 연합에 경사가 날지도 모르겠소.”
사람들이 김칫국을 한 사발로 들이켜는 와중에 난 어이가 없었다.
지금 나 고백받은 거?
너는 뭔 고백을 마차 타려고 다리 한 짝 올려놓은 사람 앞에서 하니?
“지, 지금.”
텐치아 백작은 내가 당황한 걸 알았는지 뒤늦게 말을 덧붙였다.
“지금 답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텐치아 백작은 아무리 봐도 바이야 백작 옆에서 같이 피가 끓어버린 게 분명했다.
그가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저, 이 마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타타타타탓!
그러더니 도망치듯 돌아서 제 마차로 뛰어가 버렸다.
“?”
???
지금 나더러 어쩌라고?
난 이마를 짚었다.
“……일단 가시겠습니까?”
옆에서 기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최대한 빨리 마탑으로 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는 기사였다.
쫓아갈 시간도 없고, 쫓아갈 일도…… 아닌 것 같았다.
난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보다가 기사 하나에게 손짓했다.
“일단 나중에…… 연락드리겠다고 해.”
거절을 하든 뭘 하든 소문날 건 뻔한 듯하니, 깔끔하게 정리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난 떨떠름한 얼굴로 마차에 올라탔다.
그러면서 헌터 채팅을 켰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마차 타다가 고백받은 썰 들을 사람]
채팅에는 곧바로 반응이 왔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헐]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누군데요?]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아니, 어쩌다가……?]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몇 살? 연상? 연하?]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뭐 하는 사람인데요?]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바이야 백작령에 가셨다고 하셨으니 설마…….]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나이 40에 신유리 헌터한테 고백을 했다고? 이런 미]
헌터 채팅이 난리가 났다. 이렇게 뒀다간 바이야 백작이 썰릴 기세였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바이야 백작 아니고요 텐치아 백작]
내 말에 잠시 헌터 채팅이 조용해졌다가 다시 왁자지껄해졌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뭐야 듣도보도못한 애한테 우리 유리헌터님을 넘길 순 없어]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아, 그 변경백 가문의……]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그놈 파혼한 적 있는데요?]
이 와중에 넌 그걸 어떻게 아는 거냐?
헌터 채팅은 터져나갈 기세였다.
“어휴.”
하여간 로맨스라곤 인생에 티끌도 안 묻은 인간들이 남의 로맨스엔 환장을 해요,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