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내용 올려줄게요]
조용해진 채팅창에 다시 소예리 헌터의 채팅이 올라왔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유약한 황제에게는 암살자를 보내 보고, 우유부단한 교황에게는 독을 먹여 보지만 실패한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확실히 ‘실패한다’고 못박았네요. 그런데…….]
주이안 씨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뭐 때문에 그러는지는 알 것 같았다.
소예리 헌터 이야기가 없잖아?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대신 홀로 돌아다니는 마탑주의 마법을 봉인하여 서제국을 억누르고, 이 대륙의 패권을 손에 넣으려 한다.]
우리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소예리 헌터의 채팅이 올라왔다.
요컨대, 황태자 그놈은 내가 기껏 암살자를 살려 보내서 경고까지 해줬는데도 씹었단 말이지?
그래서 마탑주, 소예리 헌터를 노리고 있는 거고?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와 정말 패치 끝내준다]
황태자 대가리도 끝내준다! 오진다!
그놈은 제 머릿속이 시스템창에 의해 멸망계시록에 박제되고 있는 줄도 모를 것이다.
아무튼 소예리 헌터의 말대로 두 사람에 대한 위협은 끝났다고 보면 된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이제 나만 기다리면 돼요! 설렌다!]
설레? 마법 봉인이라니까 암살은 아니겠지만 나름 나쁜 일 하러 오는 건데? 설레?
하지만 채팅창 너머로 소예리 헌터가 웃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진짜 일부러 봉인 당하게요?]
소예리 헌터는 마법에 당해 보고 마법을 쓴 놈을 쓱싹하면 깔끔하다는 주장을 했지만 난 다시 생각해봐도 찜찜했다.
진짜 괜찮을까?
아까 신재헌이 습격당하기 전에야 ‘그래, 소예리 헌터가 말린다고 들을 사람이냐?’ 싶은 마음에 결국 동의하긴 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할수록 이건 영 아니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소예리 헌터가 마치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고럼고럼 안전하다니까요! 말리지마!]
말려도 할 거야! 그런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어휴, 하여간 저 실험정신!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그럼 딱 기다려요 신재헌 헌터님 습격한 거 보니까 그쪽도 곧 할 것 같아]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헉 한반도내 S급 최상위 딜러 신유리 헌터님이 날 지켜주는 거예요?]
저 오글거리는 호칭은 또 뭐야?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그래도 우리 긴장을 좀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얼른와요 얼른얼른]
소예리 헌터가 쾌활하게 웃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걱정에 싸인 주이안 헌터의 채팅이 올라오는 걸 보면서, 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얼른 가서 일단 만나고 생각해 보자.”
말리는 건 가서도 할 수 있다!
내가 집사를 찾으려는 때였다.
“가주님!”
집사가 날 먼저 찾아왔다.
“어?”
보통 집사가 먼저 찾아오는 경우는 별로 좋지 않은 경우인데?
아니나 다를까, 대답하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집사가 다급한 얼굴로 말했다.
“연합 ‘미야’에서 가주님을 급히 찾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게이트 대응 연합에서?
“왜?”
어디 게이트 큰 거 나왔대?
“최근 바이야 백작의 영지에 게이트가 급격하게 많아졌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막기가 힘들어 도움을 요청한 것 같습니다.”
“오…….”
뭘 해도 피가 끓어오르는 것 같은 의욕만땅 백작님이 떠올라 난 눈썹을 치켜올렸다.
누구 영지 아니랄까 봐 게이트도 의욕적으로 나온 모양이었다.
“다른 ‘미야’ 소속의 가문들은 게이트를 막느라 여력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음…….”
미야에서 이렇게 정식으로 다른 가문에 도움을 청한 건 처음이었다.
그만큼 확실히 다른 가문을 돕는 선례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이야기였다.
문제는 소예리 헌터인데.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나 딱 반나절만 늦어도 돼요?]
신재헌이 습격당한 직후라 좀 불안했다.
그사이에 일 터지는 거…… 아니겠지?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고럼고럼~ 조사해봤는데 봉인마법은 원래 준비하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하더라구]
그렇게까지 조사해봤는데 굳이 직접 맞아봐야 될까요?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지식은 준비되었다! 와라 봉인마법!]
하지만 소예리 헌터는 역시 말려도 듣지 않을 것 같았다.
이미 신난 그녀의 채팅을 보면서 난 집사에게 손짓했다.
“바로 마차 준비해. 바이야 가로 갔다가 마탑에 들러야 할 것 같아.”
내 말에 눈을 크게 뜬 집사가 고개를 숙였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
게이트 대응 연합 ‘미야’는 아직까지 잘 유지되고 있었다.
대체 내가 뭘 했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존재만으로 도움이 되는 어쩌고저쩌고 수호기사단장 에델바이스 백작’ 덕에 잘 굴러가고 있다며 매주 내게 보고가 날아왔다.
그런데 정말 미야 소속의 가문들은 다른 가문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게이트 방어율이 좋았다.
난 병력도 빌려준 적 없고, 조언 한두 마디 해준 것뿐인데.
뭐지? 너네도 혹시 시너지 스킬 효과 받니?
헌터 채팅 친구창에 3년 이상 존재한 헌터들만 받는 시너지 스킬 보너스를 귀족들이 받을 리가 없었다.
“오…….”
난 황당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내며 바깥을 내다보았다.
이미 바이야 백작의 영지로 들어선 마차는 한바탕 몬스터가 휩쓸고 간 곳을 지나고 있었다.
오면서 들은 바이야 영지의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몇 개의 게이트는 이미 폭주한 데다가 그중에 B급짜리도 있어서 기사들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진 몬스터를 잡느라 다른 게이트를 닫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실정이었다.
덕분에 영지는 대체로 어수선했다.
보통 이러면 다른 가문들은 가주가 제 영지를 탈출해서, 일단 안전을 확보한다.
그 후에 영지 전체를 보면서 작전을 세우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바이야 백작은 달랐다.
‘어찌 영지민들을 두고 영주가 자리를 비울 수 있겠소! 그건 기사도에 어긋나는 일이외다!’
그렇게 바이야 저택이 떠나가라 외친 열혈백작 바이야는 아직도 저택에 남아 전투를 진두지휘하고 있다고 했다.
덕분에 다른 미야 연합의 가문들은 가주가 직접 들를 수가 없어 사람을 보내 의견 교환을 하고 있다고 했다.
“우린 그럴 시간이 없지.”
난 그 보고를 떠올리면서 뇌까렸다.
어차피 터진 게이트가 B급이 최대라면 이쪽에는 별로 위협적인 몬스터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잔여 병력이 없어 군수물자만 지원 가능한 다른 가문들과는 달리 우리 가문은 잔여 병력이 충분했다.
―히히힝!
내 마차 주변을 따르는 저 기사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최대한 속도를 높여!”
빨리빨리! 내 말에 마부가 마차의 속력을 높이는 게 느껴졌다.
바이야 영지의 혼란을 빠르게 수습하고 바로 소예리 헌터가 있는 마탑으로 가야 했다.
***
―크아아아아!
원래 몬스터는 약할수록 시끄러운 법이다.
몬스터를 몇 무리 만나긴 했지만 바이야 백작의 저택까지 도착하는 데에는 차질이 없었다.
몇 번 몬스터의 괴성을 듣고 나니 바이야 백작의 저택은 코앞이었다.
그리고 그 코앞의 전장에서, 난 뜬금없이 만나려던 사람을 만났다.
“어, 어찌 이곳까지!”
그건 다름 아닌 바이야 백작이었다.
아니, 댁이야말로 저택에 있다더니 왜 전장 한가운데에 기사1처럼 있어?
C급 몬스터를 썰고 보니 바이야 백작이 뒤에서 감동받은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아저씨, 그러다 울겠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에델바이스 백작―!”
거의 바이야 백작이 통곡하는 것 같은 목소리로 쩌렁쩌렁 외쳤다.
“역시! 기사의 귀감이라 할 만하오!”
저거 설마 감동받아서 목소리 떨리는 거야? 진짜 울어?
“어서 오시오!”
하하하하하! 그렇게 웃으며 바이야 백작이 내 등을 팡팡 쳤다.
“아니, 전장 한가운데에서 뵙게 될 줄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이야 백작이 호탕하게 웃었다.
“어찌 기사가 저택에만 처박혀있을 수 있겠소이까! 내가 있을 곳은 검과 피가 있는 곳이거늘!”
난 그 말에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전투 지휘는 잘하고 있는 거지?
꼬마 헌터, 아니 기사들 막 게이트에 함부로 굴리는 거 아니지?
내가 고뇌하는 사이 난 근처에 있는 바이야 백작의 막사로 안내되었다.
―펄럭!
귀족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어쩌고저쩌고 해야 하는 쓸데없는 암묵적 규율이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바이야 백작은 규율규율, 그렇게 외치더니 지금은 사전에서 규율을 지워 버린 듯했다.
그의 막사에는 고급 물건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제대로 된 것은 업무용 테이블뿐, 그것도 언제든 막사를 옮기거나 중요한 문서는 치울 수 있도록 잘 묶여 있었다.
“오…….”
내가 짧게 감탄할 때였다.
조립식 업무용 테이블 서랍에서 뭔가를 꺼낸 바이야 백작이 그걸 내게 척 내밀었다.
“?”
멈칫하고 보니 웬 육포였다.
“전장 한가운데에서 한가하게 음식을 만들 수는 없지 않소! 하하하하!”
그건 그렇지. 난 떨떠름한 얼굴로 육포를 받아들었다.
“육포는 얼마든지 준비되어 있다오!”
그렇게 호탕하게 외친 바이야 백작이 간이의자를 두 개 펴 보였다.
정말 게이트 안에서 천막 친 느낌 확 나는데?
난 바이야 백작을 새삼 쳐다보았다.
저번에 같이 던전에 다녀와서 감명(?)받았다더니, 검류가 어쩌고저쩌고하며 답답하게 이론을 주장하던 바이야 백작은 사라져 있었다.
정말 이 사람이야말로 헌터의 귀감…… 아니, 기사의 귀감인데?
육포를 멍청하게 뜯던 난 정신을 차렸다.
이게 문제가 아니지.
빨리 소예리 헌터를 만나러 가야 했다.
“얼른 논의하죠.”
내가 육포를 든 손을 내리고 말하자 바이야 백작이 눈을 부릅떴다.
“……!!!”
그는 소리 없이 흥분하더니 갑자기 제 무릎을 내리쳤다.
뭐, 뭐냐?
“역시…… 역시 기사 중의 기사!”
크오오오! 그는 감동의 바다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듯했다.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는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고통받는 영지민들을 한순간도 두고 보실 수 없는 것이오?”
―쿵!
참을 수 없다는 듯 땅을 박차며 일어난 그는 업무용 책상 아래에서 뭔가를 꺼내왔다.
―뽕!
병을 따는 익숙한 소리가 들려 왔다.
설마?
“기사 중의 기사! 에델바이스 경을 위해 건배!”
아니, 전시 중에 밥은 안 해 먹어도 술은 드십니까?
난 어이가 없어 떨떠름하게 잔을 받아들었다.
그런데 그 잔에 쏟아지는 건 청량한 과일주스였다.
알코올 0%. 누가 봐도 제로.
……사실 뇌가 술에 절어버린 건 내가 아닐까요?
고백한다.
가끔…… 한 B급 던전 갈 땐 한 손에 맥주 들고 갔다…….
“……오면서 봤는데 많은 게이트들이 이미 폭주했더라고요.”
주스를 벌컥벌컥 마시면서 감동의 도가니탕에서 허우적거리는 바이야 백작을 건지려면 뭔 말이라도 해야 했다.
백작은 내 말에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렇소. 이 레디드 드 바이야가 부족한 탓이오. 하나……!”
―쿵!
다시 바닥을 구른 그가 쩌렁쩌렁 외쳤다.
“에델바이스 백작과 텐치아 백작이 이렇게 날 돕고자 찾아오셨으니 위기는 물러갈 거외다!”
텐치아 백작?
나 말고 오는 사람이 또 있었어?
내가 무심코 막사 입구를 돌아본 순간이었다.
―펄럭.
때마침 바이야 가의 집사가 천을 젖히고 들어왔다. 뒤에는 손님을 하나 달고 있는 채였다.
“주인님. 텐치아 백작님이 오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