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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던전의 S급 시한부 영애 (82)화 (82/218)

82화

속이 뒤틀리는 것 같다. 신재헌의 입매가 비틀렸다.

아니, 나만 안달하고 있는 건 아니지.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 헌터)>>> 이번 일, 정말 감사합니다.]

마침 채팅이 올라왔다.

미안하고 감사하다는 말을 거듭하는 주이안 헌터는, 평안해 보였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 - S급(힐러)

- 버프 : 없음

- 디버프 : 없음]

상태창도 그렇고. 게다가 그는 늘 정적인 사람이었다.

신재헌은 그가 앉아서 서류 처리에 골몰하는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는 언제나 그렇게 팀의 모두를 온화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랬었다.

하지만 근래 들어 그는 미묘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신재헌은 그걸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모두에게 친절한 그의 시선은 늘 신유리에게 가서 멎었다.

다른 사람보다 한 번 더. 조금이라도 더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게…….”

내 착각일까, 아니면 당신도 나와 같은 마음일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그림, 주이안 헌터한테 전해 줄래?’

신재헌은 고등학교 RP던전에서 그렸던 그림을 떠올렸다.

그 그림을 주이안 헌터가 부디, 기분 좋게 받았어야 할 텐데.

읽어내 봐야 불편한 내 마음을, 경고를 못 알아챘으면 좋겠는데.

“…….”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욕실 가까이로 다가갔다.

장갑과 갑옷은 모두 벗고 가벼운 셔츠와 바지 차림이었다.

―탁.

그렇게 욕실 문을 연 순간.

“오.”

그가 작게 감탄했다.

기묘한 살기가 그의 기감을 건드리고 있었다.

눈앞에는 수증기로 가득 찬 황제 전용의 욕탕이 보였다.

저 수증기 속에 몸을 감추고 싶은 모양이지만.

[추적(A) 스킬을 사용합니다.]

[추적(A) 스킬 효과 유지 중]

근래 유독 많이 썼던 스킬을 다시 한번 켠 순간이었다.

욕실 안이 온통 새빨간 적개심의 흔적으로 가득한 게 보였다.

그리고.

[반경 50m 안에 적이 있습니다(+모든 능력치 5%).]

그 시스템창이 뜨는 순간.

―파악!

신재헌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바로 옆을 거세게 후려쳤다.

“!”

그를 노리던 자의 검이 그대로 수건에 둘둘 감겼다.

수건에 실린 강한 힘과 원심력에 날카로운 검이 바깥으로 확 꺾이자, 암살자는 순간 당황한 듯했다.

―스릉!

하지만 꽤나 실력 있는 자였는지, 길게 당황하지 않았다.

금세 다른 검을 뽑는 미세한 소리가 신재헌의 귓가를 긁었다.

그렇지.

암살자의 무기가 하나일 리가.

―팟!

놈이 검을 쥐는 사이 신재헌은 수건을 확 잡아당겼다.

검을 제대로 쓰려면 움직임이 묶인 검은 포기했을 테니까.

―후웅!

아니나 다를까, 놈이 놓은 검이 그대로 그에게 끌려 왔다.

신재헌의 입매가 비웃음을 그렸다.

암살자는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

―챙!

그가 암살자에게서 빼앗은 검과, 암살자가 새로 뽑은 단도가 불꽃을 튀기며 맞부딪쳤다.

그리고.

―파앗!

손이 재빠른 암살자답게 놈은 다른 손으로 투척용 단도를 뽑아 그에게 집어 던졌다.

신재헌은 바로 고개를 틀어 피했다.

―콰직!

“힘도 좋지.”

그가 뇌까렸다. 놈의 단도는 욕실의 벽을 그대로 뚫고 들어갔다.

볼을 살짝 베였는지 알싸한 느낌이 볼에 퍼졌다.

신재헌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정도 상처는 금세 나아야 했다.

하지만 미미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러면서 혀끝에 달짝지근한 향기가 느껴졌다.

“음…….”

어쩐지. 수증기치고는 짙다 했지.

―챙!

신재헌이 다시 검을 휘둘렀다.

단도를 던지느라 허점을 드러낸 암살자의 자세가 순간 흐트러졌다.

하지만 신재헌은 그를 밀어붙이는 대신, 몸을 빙 돌려 검을 크게 휘두르며 욕실의 문을 걷어찼다.

―쾅!

그러자 욕실 안에 자욱하게 끼어 있던 수증기, 아니 독무가 밖으로 새어 나갔다.

“……!”

처음부터 이 새하얀 독무에 숨어 있을 생각이었는지, 새하얀 옷으로 둘둘 감고 있는 암살자와 신재헌의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멸망계시록에서 황제에게는 암살자를 보낸다고 했다. 암살 방법이 ‘독살’이 아니라서 이 독무가 주이안 헌터에게 쓰인 독만큼 강력하진 않은 듯했다.

그건 다행인 일이었다.

“흐읍!”

암살자는 독무가 다 사라지기 전에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신재헌에게 다시 검을 휘둘러 왔다.

“이게 암살자인지 무기상인지 헷갈리네.”

신재헌은 놈이 주렁주렁 달고 있는 무기를 보면서 어이가 없어졌다.

검을 포기한 이유가 있었구만?

놈은 단검을 하나 더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단도까지 소매에 몇 개 더 붙여놓은 참이었다.

―쩡!

신재헌과 암살자의 검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신재헌이 눈을 가늘게 떴다.

힘이 생각보다 강했다.

이 수증기로 위장된 독무가 L급으로 보정된 게 아니라면, 문제는 이 암살자였다.

이놈이 RP던전 보정을 얼마나 받은 걸까?

원래 암살 계열의 스킬을 가진 자들은 딜러들과 이렇게 정면으로 검을 맞대면 밀려나가기 마련이었다.

같은 S급들끼리도 그랬다.

하지만 놈은 미동도 없었다.

―째앵!

적어도 S급 이상이라는 거지.

신재헌이 다시 검을 내질렀다.

그래도 주이안 헌터의 일을 끝낸 뒤 시일은 두고 올 줄 알았는데, 미리 황성에 대기하고 있었을 줄이야.

그럼 사실상 황태자 그놈은 주이안 헌터와 나를 동시에 노린 것이 아닌가?

이게 동제국의 저력일까, 아니면 RP던전 보정일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사아아…….

욕탕 안의 수증기와 독무가 걷히자 암살자의 눈가에 점점 초조함이 드러났다.

그야 당연했다.

아무리 황제가 달라졌다 해도 이 정도 실력일 줄은 몰랐을 테니.

[S]

같은 S급의 암살자이지만 RP던전의 힘 보정을 받은 놈.

이 정도면 해볼 만했다.

암살자에게는 불행하게도 이쪽은 대(對) 인간형 몬스터 스킬이 많은 딜러였다.

게다가 상대는 퇴로 없는 욕실 안에 있고, 욕실 대부분은 물이니 몸을 숨기거나 이리저리 몸을 피하기도 어려웠다.

“…….”

암살자의 눈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그것도 잠깐.

“하아압!”

놈은 결국 도망치기를 포기했는지 정면으로 부딪쳐 왔다.

신재헌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RP던전이 지능도 보정해주진 않는군.

그는 ‘스탯이 약한’ 상태로 고랭크의 랭커를 상대하는 데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C랭크일 때부터 그랬으니까.

[기혈개방(S) 스킬을 사용합니다.]

[5분간 받아들이는 버프의 효과+10%]

[검의 수호자(A) 스킬을 사용합니다.]

[뜨거운 피(A) 스킬을 사용합니다.]

[화염검(SS) 스킬 효과를 받습니다.]

버프 스킬을 한 번에 확 올린 신재헌이 마지막으로 검을 꽉 쥐었다.

[약점 간파(S) 스킬을 사용합니다.]

그 순간 놈의 몸에 푸른색 빛이 노출되었다.

허점이 드러나는 것이다.

신재헌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하아!”

그가 기합과 함께 검을 크게 휘둘렀다. 암살자가 이를 드러냈다.

“흥!”

제가 일부러 드러낸 허점에 속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신재헌이 검으로 내리친 건 놈이 아니라.

욕탕의 바닥이었다.

무게 문제로 대리석 안쪽은 당연히 텅 비어 있었고, 암살자에게는 불행하게도 욕탕은 물로 가득 차 있었다.

―콰지지지직!

신재헌이 검을 내지른 곳을 기점으로 놈이 딛고 있던 바닥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

암살자가 자리를 피할 틈도 없이, 바닥이 무너지면서 텅 빈 안쪽 공간으로 욕탕의 뜨거운 물이 들이닥쳤다.

“푸헙!”

암살자가 물에 빠진 사이.

그 잠깐이면 충분했다.

빠르게 휘두른 신재헌의 검이 암살자를 꿰뚫었다.

“!”

[추적(A) 스킬 효과 유지 중]

[반경 50m 이내에 있던 적이 사라집니다(능력치 증가 효과 해제).]

추적 스킬은 아주 쓸모 있었다.

적개심을 가졌던 상대를 눈앞에 두고 사용하면, 상대가 살아있는지 아닌지 대번에 알 수 있었으니까.

깔끔하게 적을 처리한 신재헌이 몸을 돌렸다.

“목욕은 물 건너갔네.”

반파된 욕탕을 두고 그가 손등으로 볼을 문질러 보았다.

아직도 피가 나는 걸 보니 검에는 치유를 늦추는 독을 발라두었겠고.

어지간한 독에는 반응도 안 하는 혀끝이 얼얼해진 것을 보니 아마 저 하얀 독무와 독이 반응하는 구조인 모양인데.

―탁.

신재헌은 욕실에서 나와 버렸다.

독무가 자욱했던 곳에서 벗어나자 확실히 몸 상태가 나아졌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 잡았어요]

그걸 확인하자마자 그는 헌터 채팅에 바로 보고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유리)>>> 뭘?]

답은 바로 올라왔다. 신재헌은 그녀의 반응을 느긋하게 기다렸다.

그녀는 그의 예상대로, 딱 파티의 상태창을 볼 정도의 간격만 두고 바로 다시 채팅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유리)>>> 설마 벌써 왔어요???]

가까이 있을 때는 비참했다가 이름만 봐도 기분이 들뜨는 건 무슨 어이없는 일인지.

신재헌이 웃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 그러게요, 벌써 왔네요]

나도 바로 올 줄은 몰랐지.

신재헌이 욕실을 흘끗 돌아볼 때였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한 박자 늦게 시종과 기사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특히 근처 경계를 하던 기사들의 얼굴은 새하얘져 있었다. 그야 당연했다.

황제가 암살자를 막아냈다 해도 근처를 경계하던 기사들은 모두 사형감이었으니까.

“이번 일로는 아무도 벌할 생각 없다.”

그 말에 기사들이 눈을 크게 떴다.

신재헌은 그들을 무심한 얼굴로 지나쳤다.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아니까.

L급 RP던전 보정 받아서 들어온 놈을 어떻게 잡아?

“대신―”

그래도 페널티를 피하려면 할 말은 해야 했다.

유약한 성격에서 ‘제 모습을 드러낸’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은, 결코 자비로운 성격은 아니었으므로.

“그만큼 더, 노력해야겠지만.”

눈에 띄는 성장을 해 오라는 뜻이었다.

기사들이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앞에 부복했다.

신재헌은 그들을 스쳐 지나가며 생각했다.

찬물로라도 샤워해야겠다.

아니, 처음부터 필요한 건 뜨거운 욕탕이 아니라 찬물이었을지도 몰랐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유리)>>> 괜찮은 거죠? 버프 보고 깜짝 놀랐잖아]

유리. 신유리.

걱정하는 헌터팀의 채팅 사이로 신유리의 이름만 보여서.

***

“아니 뭔 암살시도를 이렇게 빨리 해?”

난 어이가 없었다.

동제국은 무슨 암살자 천국이야?

사실 그래서 던전을 못 깨는 건가?

정면에서 딜할 딜러가 없어서? 죄다 옆구리 찌르기 특화라서?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괜찮으니까 걱정 마세요]

괜찮다는 놈이 버프를 그렇게 떡칠하고 때려잡아?

어지간한 중상이 아니면 상태창에 뜨지 않는다.

다시 말해 부상이 있어도 뜨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 S급(딜러)

- 버프 : 뜨거운 피(A) 검의 수호자(A)]

지금은 적을 상대하지 않고 있는지 버프 수가 줄어들어 있었다.

하지만 초조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L급 독까지 뜬 동네가 아닌가? 작은 상처로도 치명적인 독이 들어가면 순식간에 상태가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진짜 괜찮은 거죠?]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또 올 수도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겠습니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안 그래도 외출 후에 피로도 풀리지 않으셨을 텐데]

내 말이 그 말이다. 이렇게 상도덕 없이 암살자 보내는 게 어디 있냐?

암살자에 상도덕 따지는 것도 웃기지만 정말 황당했다.

안도감과 분노와 황당함이 머릿속을 교차할 때였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적어도 주이안 헌터랑 신재헌 헌터한테 뭐가 다시 갈 것 같진 않아요~]

발랄해 보이는 그녀의 채팅은 확신을 담고 있었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멸망계시록 내용이 바뀌었거든요! 두 사람 암살에 실패했다고!]

난 소예리 헌터의 채팅에 눈썹을 치켜올렸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그거 실시간 패치되는 거였어???]

소예리 헌터가 깔깔 웃을 정도의 사이를 두고 채팅이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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