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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던전의 S급 시한부 영애 (81)화 (81/218)

81화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

본색을 드러낸 서제국의 황제는 매우 활동적인 인물이었다.

지금까지 어떻게 그리도 완벽하게 제 속을 숨기고 유약한 체 살아왔는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그는 바깥 외출이 잦았다.

뿐만 아니라 기사들을 따돌리는 솜씨 역시 일품이었다.

이제 암행에 다녀와서 자연스럽게 궁으로 홀로 들어오는 황제의 모습이 익숙할 정도였다.

처음에는 황성의 모두가 기겁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황제는 무사히 돌아온다. 매번 상처 하나 없이.

황제는 그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본래 카르만 제국은 실력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나라.

저를 호위하겠다는 기사들이 알아채지도 못할 만큼 뛰어난 실력으로 사라져 버리는 황제를, 감히 누가 호위한단 말인가?

그랬기에 황성 사람들은 제멋대로인 황제 아이반에게 적응할 수밖에 없었다.

“다녀오셨습니까.”

이번 암행도 마찬가지였다.

황제 아이반의 보좌관 실라는 복귀한 그를 보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이번 암행에도 기사들이 따라붙었다고 했다.

하지만 황제는 그들의 머리 위에서 놀고 있었고, 이번에도 당연하다는 듯이 그들을 따돌렸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황제의 쪽지만 남아 있었다.

[늦어도 5일]

매번 [3일], [일주일] 등으로 쓰여 있던 쪽지였다.

황제는 써 놓은 쪽지의 기한을 넘겨 돌아오는 법이 없었다.

“급한 일은 없었지?”

황제는 황제궁으로 빠르게 들어서며 물었다. 보좌관 실라가 다시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예.”

급한 일이 있었으면 황제는 이미 돌아와서 일을 처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황제 아이반.

그는 궁 밖에 나가 있다가도 궁에 무슨 일이 생기면 말한 날짜보다도 훨씬 일찍 자리로 돌아오는 자였다.

마치 궁을 제 손 안에 놓고 들여다보는 것처럼.

그렇기에 그가 자리를 자주 비워도 아무런 반발이 없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동제국에 모든 것을 내어주는 듯하며 유약함만을 보였던 황제 아이반.

이제 그를 함부로 생각하는 자는 황성 어디에도 없었다.

“그럼 씻고 좀 쉬지.”

실라는 황제의 그 말을 들으며 그가 약간 피곤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평소에는 사람 같지 않은 체력으로 암행을 다녀와 업무까지 처리하던 황제였다.

이번 암행에서는 무슨 일이 있으셨나?

하지만 질문한다고 답해주시는 분은 아니다.

“알겠습니다. 뜨거운 물을 바로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이미 황제 폐하께서 궁에 들어서실 때부터 물을 데워 두었을 테니, 황제 전용의 넓은 욕탕에도 이미 물이 가득 찼을 것이다.

“옷만 갈아입고 가지.”

황제 아이반, 신재헌이 실라에게 손짓했다.

“예.”

실라가 물러간 후.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팔자에도 없는 황제 노릇 하기가 이렇게나 귀찮다.

그는 제게 황제라는 자리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이건 아주 번거롭고 필요 없는 일이었다.

RP던전에 이로운 자리만 아니었어도 때려치웠을 것이다.

“…….”

그는 신유리를 생각하다가 눈을 감았다.

하루 종일 말을 달려서 귀환했으니 S급인 그라도 정신적인 피로가 쌓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그는 산에서 본 신유리의 청량한 미소가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 미소는 십여 년 전부터 그대로였다. 쭉.

바뀐 건 나뿐이다. 신재헌이 짧은 숨을 다시 토해낼 때였다.

―우우웅!

기묘한 울림이 S급의 기감을 자극했다. 신재헌이 빠르게 옆을 돌아보았을 때였다.

“?”

그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에게만 보이도록 따로 장치를 해 두었는지, 푸른 빛에 휩싸여 있는 붉은 새가 보였다.

저건 분명 마탑주의 것인데. 이 세계의 마탑주라고 해 봐야 한 명뿐이었다.

“……소예리 헌터?”

주변에 아무도 없었기에 말할 수 있는 이름이었다.

할 말이 있다면 헌터 채팅으로 하면 될 것을, 굳이 이렇게 불사조를 날려 보낸다는 건 한 가지 뜻밖에 없었다.

―달칵.

신재헌은 불사조가 앉아 있는 창문을 열어젖히며 눈을 가늘게 떴다.

소예리 헌터.

그녀는 아마 산맥에서 일어난 일을 다 봤을 것이다.

내 화풀이도 봤겠지.

그것 때문일까.

그는 그 암살자에게 제 분노를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다. 그랬다면 신유리가 그자의 모습조차 보지 못했을 테니까.

그래서 그는 자제하고 살기를 억눌러야 했다.

그러지 못하면 ‘정답’에서 어긋나게 되니까.

신유리와 신재헌 자신 사이에 있는 암묵적인 룰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신유리가 아는 신재헌은 늘 쾌활한 자였다. 어두운 곳과 새까만 피와는 관련이 없는 사람.

그랬기에 그는 저를 억눌렀다. 억누른 것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헌터팀에서 그의 실체를 처음으로 본 사람이 바로 이번, 소예리 헌터였다.

―툭.

창문을 열자마자 불사조의 부리에서 편지가 떨어져 내렸다.

신재헌은 말없이 편지를 펼쳐 들었다.

[비밀이 생겼네요, 신재헌 헌터님.]

그렇게 시작한 편지를 신재헌은 벽에 기댄 채 읽어 내려갔다.

[이번 산맥에서의 일이,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모습이란 건 알겠어요. 나도 처음 보고 놀랐거든.]

진지한 듯했던 편지 뒤쪽은 금세 소예리 헌터의 장난기가 묻어났다.

[그런데 신재헌 헌터님이 하늘을 노려볼 땐, 정말 깜짝 놀랐지 뭐야. 얼굴 뚫리는 줄 알았어~]

소예리 헌터의 너스레가 들리는 듯했다.

“…….”

신재헌이 잠시 눈가를 문질렀다.

그렇게 노려봤던가?

하늘을 올려다보기는 했다.

신유리에게 제 모습을 말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그런데, 좀, 노려봤던가……?

그랬다면 소예리 헌터는 산맥을 막아주고자 한 것밖에 없었는데 봉변을 당한 꼴이었을 것이다.

“……팀에 피해 주지 않기로 했는데.”

신재헌은 쓴맛을 삼켰다. 신유리와 한 약속이었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부터 친한 건 맞지.’

‘그런데, 소예리 헌터님이랑 주이안 헌터님이 그거 때문에 소외감은 안 느꼈으면 좋겠거든.’

그래서 두 헌터가 있을 땐 존대 아닌 존대까지 하지 않는가.

……자주 까먹는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규칙은 지켜 왔다.

신유리가 원하는 일이기에.

그런데 이번에는 그 규칙을 신유리 몰래 어긴 꼴이 되어버렸다.

소예리 헌터에게는 미안한 일이었다. 제 감정 하나 제대로 주체하지 못해 벌어진 일이었으니.

신재헌이 마른세수를 할 때였다.

―우우웅.

왠지 쓰인 내용의 분량치고는 넓어 보였던 편지지에 없던 글자가 떠올랐다.

[미안하다고 생각되면 부탁 하나만 들어주기!]

신재헌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이번에도 당한 모양이다.

소예리 헌터는 다른 세 사람보다 사람 만난 경험이 많아서 그런지, 이런 종류의 일에는 탁월하게 감이 좋았다.

팀에 간혹 흐르곤 했던 묘한 기류 같은 것들.

그런 것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고 자연스럽게 풀어주던 사람이 소예리 헌터였다.

신재헌 자신 이상으로.

“부탁이 뭔데요.”

신재헌은 그녀가 앞에 있는 것처럼 물었다. 그러자 편지는 그의 말을 들은 것처럼 답을 풀어냈다.

[나 봉인 마법 배우고 싶은데~?]

“하.”

결국 신재헌은 이마를 짚었다. 이래서야 완전히 당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자신 때문에 봉변 아닌 봉변을 당한 소예리 헌터였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사과할 기회를 주시면.

거절할 수가 없잖아.

그는 헌터 채팅을 올려보았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 아무리 스킬이 맞아가면서 배우는 거라지만 L급 던전에서는 좀]

[클로나 에이센(소예리 헌터)>>> 이 RP던전 세계관상 봉인 마법을 건 놈만 처리하면 된다니까~? 이번만큼 안전하게 스킬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없어요!]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유리)>>> 아이고 저사람 또 약파네 잡상인 안받습니다]

[클로나 에이센(소예리 헌터)>>> ♚♚스킬즈 오브 더 봉☆인♚♚걸릴시$$마법 봉인☜☜스킬100%증정※ ♜스킬오브 보조계♜많을수록 좋음¥ 특정조건 §§봉인걸려보기§§안할시☞☞★공허한스킬창★단한번의획득기회@@@즉시연락]

황성으로 달려오면서 봤던 채팅이었다.

신재헌은 결국 비밀의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 이번 기회에 소예리 헌터님이 봉인 스킬 익혀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확실하게 답했으니, 편지에 회신할 필요는 없으리라.

그는 편지를 불태우며 헌터 채팅을 바라보았다.

예상대로 채팅은 그의 손에 쥐어진 편지 이상으로 불타고 있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유리)>>> 실례지만 폐하 돌으셨습니까?]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 헌터)>>> 신재헌 헌터님?]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는 반응들과,

[클로나 에이센(소예리 헌터)>>> 역시 신재헌터님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니까! 실험정신이 있어요!]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유리)>>> 실험정신은 개뿔 쟤 과학실험시간마다 졸다가 실험관 유리막대로 뚫은 놈이거든요]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 헌터)>>> 무엇보다 안전이 가장 문제입니다. 물론 소예리 헌터님의 능력을 믿지만, L급 RP던전인 만큼 마법이 봉인됐을 때 어떤 위기가 닥칠지…….]

신중한 주이안의 채팅이 올라왔다.

신재헌은 그들의 반응을 보다가 채팅을 툭 던졌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 근데 우리가 다른 건 막아도 소예리 헌터님 학구열은 못 막아]

그 말에 잠시 조용했던 채팅이 우르르 올라왔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유리)>>> 그건…… 그렇긴 하죠]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 헌터)>>> ……어쩔 수 없군요.]

소예리 헌터가 바란 건 아마 두 사람을 설득하는 것까지였을 것이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 여기가 스킬 대신 마법이 있는 세계고, 다행히 봉인도 마법이니까]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 마법에 걸려 보고 그 후에 마법을 건 놈만 확실히 잡아서 처리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의 말에 소예리가 곧바로 반응했다.

[클로나 에이센(소예리 헌터)>>> 바로 그거지!]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유리)>>> 진짜 하게요???]

[클로나 에이센(소예리 헌터)>>> 이렇게 안전하게 스킬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없다니까 그러네~? 위기를 기회로! 몰라요?]

신재헌은 채팅을 보면서 소리 없이 웃었다.

지금쯤 신유리는 머리를 싸매고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말하겠지.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그럼 딱 기다려요 내가 호위해줄게]

그녀는 지금 B급이지만 능력치는 B급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 RP던전 세계에서 마법사들은 검 수련을 동시에 한 경우가 없었으니, 십중팔구 마법 봉인을 거는 마법사는 움직임이 굼뜬 자일 것이다.

S급 헌터의 스킬을 봉인할 정도로 강력한 봉인 마법을 건 직후라면 더할 것이고.

아무리 L급 보정을 받는다 해도, 상대가 마법사인 이상 신유리가 상대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클로나 에이센(소예리 헌터)>>> 지이이인짜? 진짜?]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유리)>>> 혼자 있는 것보단 천오백만배쯤 낫지 않을까?]

[클로나 에이센(소예리 헌터)>>> 천오백만배만 낫겠어? 일억이천오백만배낫지~]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 헌터)>>> 그럼 혹시 모르니 방어 계열의 버프를……]

결국 소예리의 실험 아닌 실험은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난 듯했다.

거기까지 도운 후에야 신재헌은 채팅을 껐다.

“후.”

그가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S급이 되어 느껴 본 지도 오래인 피로감이 머릿속을 쓸어버리는 느낌이었다.

이번 암행 내내 긴장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기분 나쁜 긴장감은 아니었다.

신유리, 그녀와 함께 돌아온 것이 너무 새삼스럽게 긴장되어 그랬을 뿐.

“…….”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은 늘 자연스러웠는데 대체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건지.

그는 의문과 동시에 답을 찾아냈다.

나만, 안달하고 있기에 그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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