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신재헌이 눈을 꽉 감았다 떴다.
그래도 마찬가지였다. 눈앞의 세상이 흐려 보이는 것은.
유독 흐려진 배경에 신유리만 눈에 띄었다.
S급의 시력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일이란 걸 알면서도 그랬다.
“…….”
몸을 풀고 기지개를 켜다가 눈이 마주치면 웃는 모습.
너는 아무리 봐도 십 년 전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데.
그때와 같은 시선으로 나를 보는 것 같은데.
신재헌은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물었다.
그때는 네 시선이 머물러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는데.
……언제부터 이게 아쉬워졌지?
자세히는 몰라도 확실했다.
이 L급 RP던전에 와서부터 그런 줄 알았는데, 그보다 훨씬 전부터였다.
더 오래전부터 그는 신유리의 시선에서 다른 무언가를 갈구했다.
그가 신유리를 보듯, 신유리가 자신을 보기를 원했다.
“오랜만에 같이 걸으니까 좋다.”
입 밖으로 저도 모르게 한가한 생각이 튀어나왔다.
신유리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너는 분명 황당하다는 듯 말하겠지.
“우리 슬슬 긴장하기로 한 거 아니었냐?”
그렇게. 너무 예상과 같아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 새삼 좋네.”
이렇게 답하면 너는.
“그래, 좋다.”
그래, 그렇게 가벼운 한숨을 쉬고는 실없다는 듯 픽 웃을 것이다.
그럼 난 여기서 아무렇지 않게 다른 말을 해야 한다.
“…….”
그게 둘 사이의 흐름이었다.
늘 그랬다.
십 년 전부터 지금까지.
마치 너와 나 사이의 약속처럼.
신재헌은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여기서 침묵하면 어색해진다는 걸 알면서도, ‘정답’을 벗어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멈출 수가 없었다.
십 년 전부터 이어진 너와 나 사이의 이 암묵적인 약속이, 지금껏 느끼지 못했던 이 벽이.
나는……, 깨지길 원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신재헌은 불쑥 물었다.
“어떻게 좋은데?”
“뭐?”
그 말에 신유리는 눈을 크게 떴다.
둘 사이의 암묵적인 ‘규칙’이 어긋나고 있었다.
신유리가 되묻는 말에 신재헌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신유리는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무슨 뜬금없는 질문을 하느냐는 것처럼.
“…….”
원래대로라면 이쯤에서 실없는 말을 하며 주제를 넘겨야 했다.
그럼 우리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만담 같은 대화를 이어가면서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싫어.
제가 삐뚤어진 것 같다고 느끼면서도 신재헌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입을 열면 늘 나와야 했던 ‘정답’ 대신 다른 말이 쏟아질 것 같아서.
너도 미칠 것 같으냐고 물을 것 같아서.
자꾸 옆만 돌아보느라 넘어질 것 같으냐고, 앞이 안 보이는 기분이냐고, 네 움직임에 흔들리는 머리칼 하나하나가 그림이 되고 머릿속에 수도 없이 명화가 쌓여서 머릿속이 터져 버릴 것 같냐고.
너도, 그렇느냐고.
그녀에게 묻고 싶었다.
***
신재헌은 오늘따라 이상했다.
“어떻게 좋은데?”
그리고 이 질문이 나올 땐 더 그랬다.
이놈은 갑자기 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
소풍 다녀와서 감상문 쓰라는 소리 들은 기분이었다.
그냥 같이 나와서 좋지. 들뜨지. 그런 것 말고 다른 말이 필요한가?
난 어깨를 으쓱했다.
“뭐, 학교 다닐 때 같아서 옛날 생각나고 좋지. 게이트 열리고 나서는 이럴 일 거의 없었잖아.”
내 말에 신재헌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에서 다시 푸른빛이 반짝였다.
추적 스킬이었다.
“그렇긴 했지.”
어깨를 으쓱하는 게 보였다. 난 손을 펴 보였다.
“처음엔 기자들 쫓아와서 이럴 틈도 없었고, 헌터팀 생기고 나서는 정신도 없었고.”
신재헌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를 떠올리는 것처럼.
그 전에는 몰라도 게이트가 열린 순간부터 우리는 늘 함께 있었다.
그랬기에 우리가 떠올리는 기억은 같았다.
“그러고 보니까 정신없이 10년이 갔네.”
난 새삼 과거를 떠올렸다.
10년이면……, 신재헌하고 나도 많이 컸구나.
[정부에서는 ‘재앙’으로 불려왔던 최근 상황을 ‘게이트 사태’로 명명하여 신속히 대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청와대에서는 군경을 비롯하여 새로이 나타난 ‘능력자’들을 중심으로…….]
게이트나 헌터 같은 말이 낯설었던 때.
그때 두 사람은, 그저 세상에 던져진 어린애에 불과했다.
‘학생이라 모르나 본데, 이 정도 돈이면 큰돈이라니까?’
‘전속 계약이라는 게 어떤 거냐면…….’
그렇게 그들을 이용해 먹으려는 자들 천지였다.
특히 신유리가 최연소 태생 S급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녀의 집 앞에는 사람들이 끓었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저놈은 거짓말하는 겁니다!’
‘저희 서울 헌터 연합에서 약속드릴 수 있는…….’
‘너야말로 입 다물어! 네가 등쳐먹은 헌터가 몇인데!’
서로를 견제한답시고 서로의 약점을 말하다가 자폭하는 자들을 수십, 수백 명을 보았다.
그때 내가 했던 말이 이거였다.
“‘차라리 아무도 믿지 말자.’”
내 말에 신재헌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랬었잖아, 우리.”
내가 손을 펴 보였다. 어릴 때 했던 말이라 까먹었나?
하지만 신재헌은 까먹은 얼굴은 아니었다.
조금 가라앉은 얼굴로 그가 답했다.
“그랬지.”
한 박자 늦은 답이었다. 난 그때를 회상했다.
“길드들 다 걷어차고 쉬려니까 주이안 씨 오고……, 참나, 다른 길드 가는 게 더 대우 좋다니까.”
내가 픽 웃자 신재헌도 낮게 웃었다.
주이안 씨도 웃긴 사람이었다.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S급 힐러의 수는 전 세계에서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데, 그 어떤 대우를 해준다고 해도 다 마다하고 이 헌터팀에 붙어 있었다.
“어휴, 그때 큰 길드 들어가셨으면 언플에, 이런 L급 던전 들어올 일도 없으셨을 텐데.”
사람이 사서 고생을 해요, 하여간.
그래도 그가 원망스러울 리 없었다. 오히려 고마운 사람이었다.
‘늘 헌터님들께 감사하죠. 특히 신유리 헌터님께는 더더욱.’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난 그에게 해준 것도 없었다.
거대 길드에서 흔히 준다는 ‘소속료’도 준 적이 없었다.
당연하다. 거대 길드와는 운영 방식이 달랐으니까.
“그 뒤에 소예리 헌터님도 합류하고.”
소예리 헌터도 주이안 씨 못지않게 엉뚱하게 합류했다.
“S급 모임에서 처음 뵈었었지.”
신재헌이 내 말을 받았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소예리 헌터님이 다른 S급들 소개해주지 않았으면 지금도 얼굴 몰랐을걸.”
소예리 헌터는 그때도 인싸 중의 인싸였다.
문제는 S급들의 관계였다.
그들은 서로를 돕는 게 아니라 밟고 일어서길 원했고, 제가 국내에서 1위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싶어 했다.
그리고 소예리 헌터는 그런 분위기를 싫어했다.
그러다가 만난 게 우리였다. 우리도 1위고 뭐고 관심이 없었으므로.
“그 후로 많이 나아진 것 같아.”
난 기지개를 켰다. 힐러와 보조계 헌터가 팀에 합류하자 팀의 안정성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너랑 있을 때도 좋았지. 근데 사실 단둘일 땐 좀 무서웠거든.”
난 신재헌의 등을 보면서 말했다.
그는 지금 성기사의 모습이었지만, 그의 모습을 상상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신재헌이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뭐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처럼, 의아한 얼굴이었다.
“그야 혹시 둘 중에 누가 실수하면, 그래서 잘못되면, 죽으면.”
난 입술을 일자로 굳게 다물었다가 말했다.
“혼자잖아.”
신재헌이 눈을 가늘게 떴다가,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 그랬으면 됐지.”
“그야 그렇긴 한데.”
지난 일이라도 그때를 생각하면 살얼음판 걷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 때였으니까.
어제 인사하던 사람이 게이트 가서 죽었다는 소리가 들려오는 세상.
심지어 게이트에서 죽은 사람은 장례도 치를 수 없었다.
함께 들어갔던 동료가 시신을 챙겨 오거나, 굳이 클리어도 못 한 던전에 들어가 수습해 오는 사람이 있지 않고서야.
물론 두 경우 모두 극히 드물었다. 그냥 클리어하기도 어려운 게이트에서 남의 시신까지 건사할 사람도, 그를 위해 들어갈 사람도 찾아보기 어려웠으니까.
그나마 같이 들어갔다가 나오는 길에서 흔적을 찾으면 수습할 가능성이 높아지긴 하는데, 그게 아니면 그냥…….
그 던전은 클리어하면 사라지고, 그곳에서 죽은 사람도 사라지는 거다.
없는 것처럼.
그래서 실종 처리가 곧 사망 처리나 다름없는 때였다.
“근데 지금은 아니라서 좋아. 적어도 나 죽어도 너 혼자 남진 않잖아.”
그 말에 신재헌이 날 돌아보았다. 그러다가 픽 웃었다.
“그래서 죽게?”
“아니?”
미치셨습니까?
“난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은 인간이라.”
손을 내저은 난 어깨를 으쓱했다.
“뭣보다 지금은 살아있는 게 더 재밌어.”
내 말에 신재헌이 아주 잠깐 멈칫한 것도 같았다.
“게이트 사태 막 터졌을 땐 안 그랬는데.”
그땐 너무 절망스럽고 절망스러워서, 내일 눈 뜨면 혼자가 되어 있을 것 같아서 무서웠는데.
이제는 아니니까.
내가 가볍게 웃을 때였다.
신재헌이 갑자기 멈춰 섰다.
“어억.”
그리고 난 그 뒤에 갖다 박을 뻔했다.
“깜빡이는 켜고 멈춰주겠니?”
“죄송.”
하나도 안 미안한 말투로 대충 답한 신재헌이 푸른빛이 감도는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흔적이 두서없이 흩어져 있어.”
지금까지도 그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지금은 더 작았다.
“이 근처가 생활반경인 것 같아.”
“오.”
드디어 온 건가? 나도 그를 따라 목소리를 팍 낮추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할 말 있으면 채팅합시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그럽시다]
주이안 헌터에게 독을 쓴 놈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헌터 채팅을 들을 순 없을 테니 이쪽이 대화 나누기엔 최적이었다.
그리고 난 소예리 헌터에게도 연락하는 걸 잊지 않았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소예리 헌터님 부탁해요]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드디어 위치 잡았어요~?]
산맥을 통제하려고 대기하고 있던 소예리 헌터의 채팅이 올라왔다.
우리가 놈의 위치 근처로 다가가면 연락하기로 했던 차였다.
범인이 도주하지 못하도록 산맥 전체의 공간을 막아버리기로 했으니까.
미리 막지 않은 이유야 간단했다.
산맥 전체를 통제하는 건 막대한 마력이 소모되니까.
그것도 마탑주 보정을 받은 S급 보조계 소예리 헌터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웅!
그 순간 우리 주변의 공기가 미묘하게 울렸다.
익숙한 느낌이었다. 소예리 헌터의 결계(S) 스킬.
원래는 게이트에서 몬스터가 많이 나왔을 때 나눠 잡으려고 쓰는 스킬이었지만 이번에는 용도가 달랐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지금부터 2시간 유지할 수 있어요]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그 안에는 잡지 자신있다]
두 시간이면 충분하지!
나와 신재헌의 시선이 마주쳤다.
“…….”
신재헌은 말없이 자신을 가리켰다가 밝은 쪽 길을 가리켰다. 자신이 그쪽으로 가겠다는 의미인 듯했다.
난 그 반대쪽을 돌아보았다.
깊은 숲으로 들어가는 길.
보통의 경우라면 이쪽이 더 위험했겠지만 난 달랐다.
이 정도 어둠이면 암순응(S) 스킬과 그림자 속의 무법자(S) 스킬이 발동되기에 충분하니까.
“…….”
그럼 난 이쪽으로 갈게. 그와 같은 뜻으로 난 숲 쪽을 가리켰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세 분 모두 조심해요]
우리가 갈라지는데 주이안 씨의 채팅이 올라왔다.
걱정도 참 팔자인 사람이었다.
난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숲속으로 접어들었다.
[암순응(S) 활성화됩니다.]
[그림자 속의 무법자(S) 활성화됩니다.]
예상대로 스킬은 활성화되었다. 눈이 훨씬 밝아지는 게 느껴졌다.
좋아…….
어떤 놈인지 낯짝을 봐야겠다.
‘괜찮아요.’
주이안 씨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지만, 말은 안 했어도 L급 독이면 통증이 상당했을 것이다.
특히 그가 제대로 해독하지 못하고 의식을 잃을 정도의 독이었으면 더더욱.
만독불침 패시브가 있는 주이안 씨였으니 독의 효과가 덜했을 텐데도 그 정도라면, 다른 사람이 그 독에 노출됐다면 죽었을지도 몰랐다.
“…….”
입매가 비틀렸다.
놈은 만일 주이안 씨가 잘못되었다면 이곳에서 그 소식을 듣고 웃었을 것이다.
새삼 옆에 있던 신재헌이 분위기를 풀어줬다는 게 느껴졌다.
나 혼자였다면 내내 분노를 참지 못했을 테니까.
“게이트 터졌을 때 생각나네…….”
난 내게도 잘 안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처음 게이트가 터졌을 때.
처음에는 게이트를 처리하는 데에만 골몰하던 사람들이, 아주 조금 게이트에 대해 알게 됐다고 경쟁하기 시작했던 그때.
게이트 안에서 뒤통수를 치고 아이템을 독식하는 도둑 같은 놈들이 설치기 시작할 때.
‘게이트 안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사람들은 몰라.’
‘알아도 A랭크 랭커가 처리할 수 있는 던전이 몇 개인데, 처벌하겠어?’
‘처벌은 누가 하는데? 일반인들이 A급을? 어떻게?’
그 당시 유명한 A급 강도가 했던 말이었다.
‘사실상 게이트는 치외법권이지.’
그의 일행은 그렇게 말하면서, 팀을 이루어 고랭크 헌터를 덮쳐 죽인 다음, 그의 아이템을 뺏는 게 일이었다.
그리고 보조계가 한창 무시당하던 시기, 소예리 헌터가 그들에게 겨냥된 적이 있었다.
그때까지 실패한 적이 없는 그들은 오만했고, S급이라도 보조계라면 도주를 막고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
하지만 소예리 헌터는 그곳을 탈출했다.
게이트산 재료로 만들어진 극독에 당한 소예리 헌터를 보던 주이안 씨의 얼굴은 정말, 사람을 죽일 것 같은 표정이었다.
‘치외법권이라고 했지?’
그래서 우리는 그들에게 치외법권이라는 게이트 안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그들에게 갚아 주었다.
거대 길드든 뭐든 필요 없었다.
S급 헌터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랭커의 분노가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소예리 헌터가 아닌 척하면서도 화가 나서 이 산맥을 통째로 결계로 틀어막아 버린 것도 그때 일 때문일 것이다.
‘소예리 헌터님, 누가 이랬어요? 얼굴은 봤어요?’
제 일처럼 물어보던 주이안 씨의 얼굴이 생각이 나서.
나 역시 그때의 분노를 기억했다.
그러니 상대에게 보여줄 것이다.
누구를 건드렸는지. 치외법권의 헌터가 어떻게 변하는지.
“이쪽인가?”
난 나뭇가지가 부러져 있거나 발자국이 옅게 난 흔적 등을 따라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추적 스킬이 없어도 이 정도 쫓는 건 쉬웠으니까.
하지만 숲을 빠져나온 난 눈썹을 치켜올릴 수밖에 없었다.
“여긴…….”
아까 신재헌하고 갈라졌던 곳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