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그렇지.”
신재헌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에서 내려섰다.
―탁.
황당해서 웃음이 나왔다.
“쫓자.”
우린 근처 풀숲에 말을 묶어놓고 추적 준비를 시작했다.
준비는 가볍게.
어차피 B급도 이미 탈인간 수준이라 산맥 좀 오른다고 지치진 않을 터다.
문제는.
“적어도 A급 이상 암살자 스킬을 가졌을 거야.”
난 산 초입으로 들어서면서 말했다. 신재헌도 같은 생각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래봐야 A급이었다. 이쪽이 B급인 게 조금 문제가 되긴 하지만.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 / 25세, 딜러(B)
체력 : 764213 (+55000)
9근력 : 11233 (+10000)
마력 : 13230 (+10400)
민첩 : 7595 (+10005)
지구력 : 4959 (+10200)
방어력 : 3426 (+10005)
특수 : 도금 목걸이(C, ‘헌터 신재헌(S)’ 애장품 보너스 : 획득 경험치 +50%)]
보통 막 A급이 된 딜러계 헌터들의 체력이 60만 언저리인 걸 생각해보면, 난 이미 A급 수준을 한참 넘은 상태였다.
일일퀘스트를 꾸준히 깨서 체력을 올려 두기까지 했으니 A급하고 붙어도 밀릴 리가 없었다.
지금 스탯이 S급이 아니라고 해도 S급이었던 경험이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방심해서 좋을 건 없으니까…….
“놈이 튀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두 명만 쫓으러 왔다는 걸 알면 상대는 아마도 이를 드러낼 것이다.
저를 쫓으러 온 자들의 수준이 어떤지도 모르는 채.
성기사 모습의 우리가 산길로 들어섰다.
***
[‘추적(A)’ 스킬 효과 유지 중]
[상대 ‘???’의 흔적을 쫓습니다.]
신재헌은 거듭 같은 상태창을 보고 있었다.
추적 스킬을 켤 때마다 상대의 흔적이 붉은색으로 드러났다.
마치 피를 밟은 것처럼 붉은 발자국이 남아 있는 것.
이걸 따라가면 끝에는 그놈이 있을 것이다.
주이안 헌터를 노린 자가.
우리를 위협하려는 자가.
“…….”
신재헌은 신유리가 잘 따라오는지 틈틈이 확인하며 앞장섰다.
처음에는 산길을 따라가던 적의 흔적은 점점 인간의 손을 타지 않은 풀숲과 나무 사이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나뭇가지가 꺾인 흔적하며, 사람이 지나간 자취는 분명히 남아 있었다.
신재헌의 눈에는 보일 수밖에 없었다.
원래는 없는 길을 사람이 억지로 헤쳐 만든 것. 그는 이런 길을 언젠가 본 적이 있었다.
정확히는 십여 년 전쯤 이런 길을 만든 적이 있었다.
그를 뒤따라오는 사람과 함께.
“학교 가는 길 같네.”
그가 문득 말하자 신유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왜, 우리 지름길로 등교한다고 아파트 산길 넘어서 학교 갔었잖아.”
그의 말에 신유리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맞다. 그때도 없는 길 만들어서 갔지.”
“그때 경비아저씨가 쫓아와서 잡아 죽이려고 했었는데.”
새삼 추억에 잠기려는데, 신유리의 어이없다는 얼굴이 그를 돌아보았다.
“야, 근데 우리 지금 사람 잡으러 가는 거거든?”
그러더니 그녀는 심각한 얼굴로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볍게 걸을 때가 아니에요. 어? 주이안 씨가 죽을 뻔했다니까?”
그러면서 손을 폈다가 주먹을 쥐어 보였다.
신재헌은 그 사이 주변의 인기척을 확인했다. 아직 대화 소리가 들릴 만큼의 반경에 사람은 없었다.
그가 그걸 확인하는 짧은 사이에도 신유리의 말은 이어졌다.
“그놈 낯짝 보기만 해봐. 십년지기도 못 알아볼 만큼 리모델링시켜 줄 테니까.”
그러면서 온갖 살벌한 말을 늘어놓는 신유리는 쌓인 게 많아 보였다.
당연했다.
그녀는 팀의 안녕을 해치는 자를 제일 싫어했으니까.
“RP라지만 너무한 거 아니야? 어떻게 L급 독이 발에 채는 돌멩이처럼…….”
그녀가 빠르게 투덜거렸다. 그 소리를 신재헌은 말없이 듣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여 주면서.
그럴 때마다 그녀는 더욱 흥분해서 주먹을 쥐어 보였다. 아무래도 놈은 걸리면 제대로 얻어터질 모양이었다.
일찍 잡지 못하면 내 몫은 없겠군.
신재헌이 소리 없이 웃었다. 그래도 불쾌하진 않았다.
―툭, 사락.
그들이 가는 길의 나뭇가지가 꺾이고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 소리보다 그녀의 목소리가 더 분명하게 그의 귀에 파고들었다.
외형 변경 물약 때문에 달라진 데다, 분명 속삭이는 목소리인데도 그랬다.
“…….”
하지만 신재헌은 굳이 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답을 원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른 이유가 컸다.
답하기 싫었다.
정확히는 그냥, 듣고 있고 싶었다.
‘등교하는 길에 할 말 아닌 건 아는데 벌써 집 가고 싶다.’
같이 학교에 가던 시절에도 그녀는 끊임없이 혼자 조잘거렸다.
그때는 저 조잘조잘 이어지는 이야기 사이에 끼어드는 자신의 말이 자연스러웠던 것 같았다.
“…….”
하지만 신재헌은 쉽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지금은 뭔가 껄끄러웠다. 그녀의 이야기 사이에 제가 끼어드는 것이.
왜?
“그놈도 참 간이 커. 머리가 없나?”
그렇게 말하면서 걷는 그녀는 학창시절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때도 신유리는 이렇게 지저귀듯 말했고, 자신은 주로 리액션을 하면서 듣는 쪽이었다.
그 덕에 등굣길은 지루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굣길이 기다려졌다.
다른 이물질 없이 너와 함께하는 시간이.
그때는 그냥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는데.
“그놈 도망가진 않겠지?”
신유리의 질문이 불쑥 그를 두드렸다. 신재헌은 저도 모르게 답했다.
“아직 멀리 못 갔어.”
추적 스킬을 켜고 있었으니 답은 바로 나왔다.
하지만 그는 제 목소리가 이물질 같다고 생각했다.
흠결 하나 없는 음악에 집어넣어진 잡음처럼.
분명 십여 년 전에는 이 재잘거리는 말 사이에 끼어드는 제 목소리가 자연스러웠던 것 같은데.
“신재헌?”
그때 신유리가 그를 불렀다.
“어?”
“오늘따라 말이 없다?”
그랬나? 신재헌은 멈칫했다.
그렇게 답하는 순간까지도 그는 제 목소리가 낯설게 들렸다.
외형 변경 물약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발랄한 이야기 사이에 끼어드는 자신이 자꾸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신유리가 의아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스킬 쓰느라.”
그랬기에 그가 한 박자 늦게 답했다.
“아.”
신유리는 다행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하긴, 집중해야 하지.
그렇게 중얼거린 그녀가 물었다.
“나, 다물까?”
“아니.”
그 목소리엔 바로 답했다.
“계속 이야기해 줘.”
그렇게 말하다가 그는 문득 제가 이상한 답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 잡으러 가는 길에, 굳이 추적 스킬을 쓰는 도중에 옆에서 이야기를 계속해서 신경을 흩트려 봐야 좋을 건 없었으니까.
굳이…… 이야기해 달라고 할 필요는 없었는데.
신유리도 의아한 듯 그를 보고 있었다.
신재헌은 그녀가 더 이질감을 느끼기 전에, 바로 답했다.
“라디오 같아서.”
“뭐야?”
신유리가 얼굴을 구겼다.
순식간에 둘 사이에 놓일 뻔한 어색함이 아주 조그만 조각으로 변해 버렸다.
신재헌은 손을 펴 보였다. 그녀를 볼 때마다 늘 짓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난 운전할 때도 라디오파였어.”
“염병하고 있네.”
신유리가 투덜거렸다. 그제야 두 사람 사이의 어색함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아무튼 계속 얘기해 줘.”
하지만 신재헌은 굳이, 그렇게 말했다.
계속 듣고 싶어.
그 뒷말은 차마 붙이지 못했다. 신유리는 눈썹을 치켜올렸다가 팔짱을 끼었다.
“판 깔아주니까 못 하겠네. 뭐, 할 이야기가 있어야지.”
그러면서 어깨를 으쓱한 그녀는, 금세 이야기 주제를 잡았다.
“최근에 나 초대한 연합 ‘미야’ 말이야. 거기에 완전 일본이나 중국 헌터 같은 백작 하나가 있었는데…….”
바이야 백작을 말하는 건가.
신재헌은 바로 알아들었다. 그녀의 주변 이야기는 그녀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관심 있게 듣고 있었으니까.
그녀가 생각하는 것보다…… 한 다섯 배쯤, 더.
하지만 그는 모른 체하며 계속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 듣는 것처럼.
“던전 한 번 다녀오더니 갑자기 내 검에 감명을 받았다면서 자꾸 대련하자고 쫓아와. 아주 귀찮아서 미치겠어.”
신유리가 손을 펴 보였다.
“왜 그런 애들 있잖아. 지면 더 불타오르는 애들. 나쁘진 않은데 수준 차이가 너무 나니까 가르쳐줄 건 없고, 계속 패자니 미안하고……”
그렇게 떠드는 그녀도 조금은 들떠 보였다.
학생 때의 등하굣길처럼.
신재헌이 그걸 느꼈을 즈음, 신유리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 눈치 없이 들뜨네.”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애써 눈을 날카롭게 떴다.
“그놈, 잡을 수 있겠지?”
그렇게 말하는 그녀에게 신재헌은 당연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흔적은 산을 벗어난 적이 없어. 교황이 죽었다는 소식을 기다리는 게 확실해.”
그래서 주기적으로 마을에 내려갔을 거고.
만일 교황에게 변고가 있다면 마을 근처에 있는 작은 신전에도 당연히 눈에 띄는 움직임이 있을 거다.
신전이나 서제국 측에서 반응해서 그 정보를 차단하기 전에, 동제국이 서제국을 침략하기 딱 좋은 타이밍이 되는 것이다.
치유를 담당하는 서제국의 한 축이 무너지는 그 순간.
그의 말에 신유리가 인상을 썼다.
“그렇단 말이지…….”
그러더니 목을 풀며 손을 털기 시작했다. 아까의 장난스러운 얼굴이 조금 지워져 있었다.
신재헌은 그 익숙한 느낌을 알았다. 살기였다. 적을 향한 살기.
‘팀의 안녕’을 해친 자에 대한 적의.
“…….”
신재헌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아까부터 자꾸 미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주이안 헌터를 노린 자, 같은 팀의 헌터를 노린 자에게 복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와는 별개로 뭔가, 자꾸 다른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끼어들고 있었다.
“…….”
[‘추적(A)’ 스킬 효과 유지 중]
그는 시스템창을 보면서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물었다.
S급의 기감을 살려 주변을 살피고, 흔적을 찾아 추적 스킬을 쓰는 것.
그 일에 신경 쓰는 것 외의 모든 정신이 다, 옆의 신유리에게 쏠려 있었다.
십 년 전 등굣길과 같으면서도 다른 것 같은 이 느낌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알 수가 없어서.
‘빨리! 나 오늘 지각하면 뒈져! 진짜로!’
그렇게 산길에서 방방 뛰던 신유리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도 같았다.
외형 변경 물약 때문에 다른 자의 모습이라고 해도, 그는 저 자리에 서 있는 신유리를 머릿속으로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그녀를 바라봐왔기에.
“…….”
학교 다닐 때와 지금 그녀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 같았다.
그 시절의 너. 십 년 전의 너.
그리고 지금의 너.
속으로 뇌까리던 신재헌이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물었다.
아까부터 입 안을 쓰게 만드는 것의 정체를 완전히 알아차린 덕이었다.
‘나 지금 엄청 서두르고 있거든?’
‘그거보다 좀 더 빨리. 너의 한계를 시험해 봐. 우린 지금부터 11분 안에 교문을 통과해야 돼.’
‘날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
‘다물어. 세상에 못 하는 건 없어. 안 하는 거지.’
십여 년 전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는 그녀와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좋은 때인지도 모르고 그저 그렇게 흘려보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때와는 명확히 다른 감정.
“…….”
조금만 더 내게 말해 봐.
어떤 말이든 좋아.
네가 아는 다른 사람들보다 내게 더, 많은 말을 해 줘.
……아.
그가 소리 없이 탄식했다.
그는, 신유리를 갈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