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신상이라시면……?”
주이안 씨의 시선이 방 한구석에 있는 작은 신시안 신상으로 향했다.
아니, 그거 말고.
난 신상을 보는 그의 시선을 슥 가려주며 말했다.
“사람 신상 정보요.”
그렇게 말한 난 미니미 신재헌을 돌아보았다.
그가 바로 그거라는 듯 작아진 손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역시 너도 그거였지?
이런 데선 기가 막히게 통한다니까?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그래서 흔적은 찾았어요?]
그때 소예리 헌터의 채팅이 올라왔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지금 추적하려고요]
그러는 사이 주이안 씨는 아직도 주저하는 얼굴이었다.
우리가 혹시나 페널티를 받을까 걱정하는 게 분명했다.
놈 때문에 황천길 사전체험 해놓고도 그런 걱정을 하는 걸 보면 천사표는 천사표였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페널티가 문제입니다. 원래 모습으로 다니시면…….]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그야 저번에 변신 물약인가 뭔가 그거 쓰면 되지]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아]
그는 그제야 우리가 사람 신상을 준비해달라고 한 것을 이해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가 곧 고개를 저었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그런데 신유리 헌터님 말씀에 따르면 외형 변경 버프 시간은 짧은 편이었어요. 게다가 변신하려면 상대가 눈앞에 있어야 하는 것 같고……. 맞나요?]
역시 조심스러운 사람이었다.
[외형 변경 물약 : 30분간 시야 안의 상대 중 하나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다.]
그 말에 난 아이템창의 설명을 확인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맞아요]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그러면 신전에서 변신해서 출발해도 30분 후면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아니지]
우린 늘 그렇듯이 방법을 찾는다니까?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그럼 여러 개 마시지 뭐]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그게 돼???]
안 될 것 같진 않은데?
세상 복잡하게 살지 말자! 되는지는 실험해보면 된다!
난 주이안 씨 등을 톡톡 두드려준 다음 신의 상점을 뒤졌다.
[외형 변경 물약 – 100C]
[구매하시겠습니까? Y/N]
두 개쯤 사서 시간이 늘어나는지 확인해보면 되겠지?
“주이안 씨, 잠시 실례.”
난 주이안 씨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 사이 그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외형 변경 물약’ 사용합니다.]
[지정 외모 :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S)]
[외형이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S)’와 똑같이 변합니다!]
[변신은 30분 지속됩니다.]
키가 쑥 크는 게 느껴졌다. 손을 펴 보니 주이안 씨의 손이 보였다.
그리고 옆을 돌아보니 똑같은 눈높이의 주이안 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보는 게 보였다.
“……묘한 기분이네요.”
주이안 씨가 난감한 듯 웃었다.
“그러게요?”
내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주변을 울리는 건 부드러운 중저음의 웃음소리였다.
“여기서 제일 기분이 묘한 건 접니다.”
그때 테이블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이안 씨와 함께 돌아보니 미니미 신재헌이 감동스럽다는 얼굴로 우리 둘을 마주 보고 있었다.
“힐러가 둘이네.”
미안하다, 둘 중 하나는 짝퉁이다!
“그럼 여기서 시간이 증가되는지만 보면 되는 거죠?”
아마 효과가 없으면 효과가 없다고 시스템창이 뜰 거다.
그럼 다른 방법 찾아보면 되는 거고.
[‘외형 변경 물약’ 사용합니다.]
[이미 적용된 외형이 있습니다.]
[현재 외형 :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S)’]
[‘외형 변경 물약’ 추가 복용으로 적용 시간이 30분 증가합니다(00:59:43).]
“오.”
난 시스템창을 확인 후 손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아무 문제 없어요.”
적용 시간을 1시간 이상으로 늘리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없으니, 이론상으로는 주이안 씨 앞에서 물약을 100개 먹으면 3000분, 즉 50시간 동안은 주이안 씨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마시기만 하면 변신 시간 제한 없어요]
문제는 눈앞에 변신 대상이 있어야만 가능하니, 미리 충분히 물약을 마시고 가야 한다는 점이었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오 좋아좋아]
내 모습을 보던 주이안 씨가 결국 옅게 웃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적당히 변신할 만한 기사를 물색해 볼게요.”
그의 말에 신재헌이 벼락같이 끼어들었다.
“성기사 중에 날티 나는 애들로 뽑아줘요.”
이건 중요했다.
너무 원칙 잘 지키는 인상의 성기사로 변신했다간 ‘RP던전 페널티 위기! : 너무 품위 없는 행동’ 이딴 창이 뜰지도 몰랐다.
난 거기에 말을 얹었다.
“엔간하면 기럭지 긴 애로.”
그래야 검 쓰기 편하잖아? 내 말을 신재헌이 바로 받았다.
“양손검 들 수 있는 애로.”
“그럼 난 날렵한 애로.”
점점 주문사항이 늘어갔다.
결국 주이안 씨가 웃음을 터뜨렸다.
“최대한 맞는 자들로 준비해 볼게요. 그러니,”
그의 얼굴에서 잠시 웃음이 거둬지고, 걱정이 드리웠다.
“부디 무리하지 말고 부탁드립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신전 사람으로 변신해서 추적하기로 결정 땅땅!]
소예리 헌터를 위해 내용을 공유하자 답은 바로 올라왔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찾으면 불러요! 못 나가게 가둬 버릴 거야]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예?]
만일 예상대로 놈이 동제국 놈이면 동제국 산맥 쪽으로 갔을 가능성이 컸다.
그 산맥 전체를 틀어막겠다고?
소예리 헌터도 말만 안 했지 어지간히 열 받은 게 분명했다.
***
그날 밤.
에델바이스 백작은 황제의 밀명을 받은 수호기사단장 업무로 외근을 나가게 됐다.
그리고 신재헌은 애초부터 암행이라는 핑계로 나와 있었으니 별다른 절차는 필요가 없었다.
대신 좀 고통스러운 과정이 필요하긴 했다.
‘나흘 변신하려면 몇 개 먹어야 되냐?’
‘4일이 96시간, 5760분이니까…….’
변신해야 하는 기사 몰래 보면서 물약 192개 먹기!
다행인 건 외형 변경 물약이 아주 조그맣다는 점이었다.
다행히 그때마다 뚜껑을 따야 한다는 이야기는 없었으므로 커다란 병에 192개를 쏟아 넣어 먹어도 상관없었다.
그리고 영문도 모르고 3주간 집중 기도실에 들어가게 된 두 기사들을 보면서, 병을 원샷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나한텐 그랬다.
‘……오.’
문제는 미니미 상태인 신재헌에겐 지나치게 많은 물이었다는 점이었다.
거대한 물병 대신 접싯물에서 때아닌 워터파크를 즐겨야 했던 신재헌은 나중엔 욕하기도 귀찮았는지 눈으로 욕하고 있었다.
독 쓴 놈이 누군지 걸리면 곱게 죽진 못할 게 분명했다.
“그럼 준비 끝.”
미니미 버전이 7시간 남은 신재헌도, 나도 성기사 모습이었다.
낯선 모습이 된 우린 서로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가자!”
목표는 당연히, 독 쓴 놈 잡기였다.
그렇게 일이 술술 풀리는 가운데 웃지 못하는 사람도 물론 있었다.
‘예? 또 잠행이요?’
그건 나 대신 가문의 일을 처리해야 하는 우리 가문 집사 헬렌이었다.
신전에서 돌아오는 길에 황가의 명령으로 다시 불려갔다는 이야기에 그녀의 얼굴은 순간 하얗게 질렸다고 했다.
이미 며칠간 격무에 시달린 뒤여서가 분명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미안하다, 가주가 좀 바쁘다!
***
다행히 쪼꼬미 물약과 외형 변경 물약 버프는 따로인 듯했다.
덕분에 출발하고 한참 동안 은발의 성기사 모습으로 작아져 있던 신재헌은, 쪼꼬미 물약 시간이 끝나면서 원래의 크기로 돌아왔다.
물론 성기사 모습은 유지한 채였다.
―탁!
미리 준비해둔 말에 올라탄 그가 말을 타고 몸을 숙였다.
―히히힝!
그러자 그가 탄 말이 빠르게 앞으로 튀어나갔다.
“근데 넌 호위기사 같은 거 없어?”
더 격렬하게 움직이면서도 말하는데, 달리는 말 위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난 그의 뒤를 흘끗 돌아보았다.
아니, 황제란 놈이 암행을 나왔다지만 호위기사 하나 없단 말인가?
사실 바지황제?
내 질문에 신재헌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원래 나올 땐 따라 나오지. 다 따돌리고 오지만.”
하긴, 기껏해야 A급들이니 S급인 신재헌이 그들을 따돌리는 게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대체 얼마나 암행을 나왔던 거야?”
이놈이 싸돌아다니는 게 너무 익숙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신재헌은 내 말에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가, 내게 손가락 다섯 개를 펴 보였다.
“다섯 번?”
내 질문에 신재헌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가 생각하는 것의 다섯 배 정도?”
그 말에 내 표정은 심각해졌다.
“이 나라 국정은 안녕한 거야?”
황제가 나라에 관심이 없는데요? 대륙 망하기 전에 서제국 먼저 망하는 게 아닐까?
설마 동제국 소속으로 던전 클리어하는 거? 그럼 우리 보상은?
온갖 헛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는 사이 신재헌은 뻔뻔한 얼굴로 대꾸했다.
“돌아가는 거 보면 모르냐?”
하긴, 이놈이 이렇게 싸돌아다녀도 나라는 어떻게든 돌아가고 있었다.
“신기한 일일세.”
혀를 차면서 난 말(馬)의 속도를 높였다.
그와 함께 나란히 달리고 있자니 기분이 묘하게 들뜨는 것 같았다. 여행이라도 가는 것 같아서.
좋은 일로 가는 것도 아닌데.
“…….”
게다가 그는 은발, 나는 적발. 심지어 둘 다 낯선 남정네 모습이었다.
주이안 씨가 구해준 신성기사들의 모습이었다. 우리의 요구대로 잘생기고 듬직한 친구들로 골라준 결과였다.
물론 이 친구들은 지금쯤 갑자기 교황의 명령으로 독실한 3주 기도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아마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고 있을 터였다.
미안!
“저쪽으로 쭉 직진.”
우린 정말 최소한만 쉬고 달렸다. 놈이 동제국 쪽으로 넘어가면 쫓기 귀찮아지니까.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 - S급(딜러)
- 버프 : 추적(A)]
그의 버프창에 수도 없이 추적이 떴다가 사라진 끝에, 우린 동제국과 맞닿은 산맥에 도착했다.
여기까지는 주이안 씨가 말한 대로였다.
그런데 우리는 산맥 근처에서 기이한 흔적을 마주해야 했다.
정확히는 신재헌이 그 흔적을 발견했다. 추적 스킬 때문에 그의 푸른 눈이 연신 반짝였다.
눈살을 찌푸린 그가 입을 열었다.
“여기 흔적이 너무 많은데.”
푸른빛이 덧씌워진 그의 눈은 언제 봐도 묘한 느낌이었다.
저것이 내게 향하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살기를 쫓는 눈을 보면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위협적인 느낌보다는, 뭐랄까, 우리 팀을 지키겠다는 그의 의지가 느껴져서.
원래 보조계 헌터들이 많이 익히는 추적 계열의 스킬이 그에게 있는 건 그에게도 강렬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우리 팀을 쫓는 자를 끝까지 따라가 죽이겠다는.
“이 근처에 놈이 아직 있는 것 같아.”
그때 신재헌이 내 생각을 끊어냈다.
“아직도?”
난 그 말에 되물었다.
우리가 며칠 간격을 두고 쫓아왔으니 동제국 쪽으로 넘어갔을지도 모른다고 짐작은 했다.
그래서 어쩌면 일이 귀찮아지겠다 생각하면서 오긴 했는데, 뭐?
아직 여기 있다고?
“아직 있고, 주기적으로 근처 마을에 들르는 것 같아.”
신재헌의 푸른빛이 반짝이는 눈이 근처를 살폈다. 그 말에 난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다는 건.”
이 근처를 놈이 맴돌고 있다는 거고, 당연히 놈은 이 근처 지리에 익숙해졌다는 말이 된다.
쫓는 데 오래 걸릴 수도 있겠는데? 잘하다 변신 풀리면 돌아갈 때 신재헌 주머니에 넣고 가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난 눈을 가늘게 떴다.
“목표에게 독을 먹이는 데 성공하고도 튀는 게 아니라 여기서 얼쩡거리고 있었다는 건 교황의 소식을 듣고 싶어서였을 거고.”
신재헌의 입이 열렸다. 난 그 말을 나도 모르게 받았다.
“그럼 교황이 어떻게 됐다는 소식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는 거네?”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입을 열고 나니 더욱 그랬다.
불쾌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