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다행히 신전에서는 손님에게 품이 넓은 로브 비슷한 외투를 지급했다.
그걸로 신재헌을 가리는 건 쉬운 일이었다.
그리고 필요할 때만 외투를 살짝 젖히면, 내 옷 주머니에서 빼꼼 얼굴을 내민 신재헌이 추적 스킬을 사용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 S급(딜러)
- 버프 : 추적(A)]
그러고는 방향을 알려주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앞으로 쭉 복도 끝까지 가요]
이쯤 되면 신재헌 모양의 미니 내비게이션을 달고 다니는 꼴이었다.
물론 수상해 보이면 곤란했으므로 주이안 씨와 나는 영양가 있어 보이려고 애쓰는 대화를 이어갔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겠지요.”
“그러게요.”
연기에 익숙하지 않은 주이안 씨와 나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어색하다! 심각하게 어색하다!
“그럼 이쪽도 쭉 살펴보시겠어요?”
주이안 씨가 신재헌이 말했던 복도를 가리켰다.
이래서야 교황과 백작인지 부동산업자와 건물 사러 온 손님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진짜 연기 못한다]
그걸 실시간 감상하는 신재헌이 솔직한 감상을 내놓았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뭐야 나도 보고 싶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NOOOOOO]
와중에 소예리 헌터는 입맛을 다셨다. 이쪽도 사람 놀리기로는 신재헌 못지않은 사람이었다.
그녀가 근처에 없어서 다행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아슬아슬하게 RP던전 페널티는 피해 가면서 신전을 돌아다녔다.
물론 중간에 위기가 없던 건 아니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 S급(딜러)
- 버프 : 추적(A)]
그가 딱 주머니에서 고개를 내민 순간 옆쪽 복도에서 누군가 튀어나온 탓이었다.
“!”
깜짝 놀란 내가 옷자락을 여미자 주머니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어억.”
아마 작아진 신재헌에겐 돌풍이 닥쳤을 게 분명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사람 와서요]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생명을 소중히 다뤄주세요]
S급 주제에 제가 말랑말랑 젤리쯤 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호들갑은!
난 답 대신 그가 있는 주머니를 툭 쳐 주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어억]
우릴 보던 주이안 씨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난관을 거친 끝에 우리가 닿은 곳은 2층 복도였다.
주이안 씨가 있던 방과는 다소 떨어진 곳이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쿠키 들고 이런 먼 곳까지 왔다고?]
분명히 뜨거운 잔까지 들고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걸 들고 굳이 먼 길을 돌아서 주이안 씨 방으로?
난 눈썹을 치켜올렸다. 사실 과자 갖다준 애가 독 넣은 거 아냐?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밤에는 중앙 복도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서 그랬을 거예요]
그 말에 난 지나온 신전의 구조를 떠올렸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중앙복도를 못 가면 이렇게 길을 돌아가는 것도 이해는 가네요]
그러면서 그가 주머니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그가 다시 추적 스킬을 사용했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놈이 어떻게 쿠키에 독을 뿌렸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는 다시 주머니 속으로 쏙 숨으며 채팅으로 말을 이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독이 든 쿠키를 넘기자마자 복도 끝 방으로 들어간 거 같네요]
무슨 핑계를 대서 어린 사제를 불러 세웠는지 몰라도,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가 말한 곳은 복도 끝의 구석진 방이었다.
그러고 나서 바로 밖으로 탈출. 대충 답이 나오는 듯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이 이상은 나가서 추적해야 할 것 같네요]
신재헌의 추적 스킬은 상대가 누군지 몰라도 추적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었다.
하지만 그 특성상, 파티원이 공격당한 자리에서부터 흔적을 쭉 이어 추적하지 않으면 상대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건물 안에서의 흔적은 잡았으니 이제 건물 밖에서 어디로 이동했는지 알아볼 차례였다.
신전 안에선 할 일 다 했다는 뜻이었다.
“그럼 일단 방으로 돌아갈까요?”
주이안 씨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렇게 안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여기서 ‘그럼 이만!’ 하고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그대로 추적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꼼짝없이 RP던전 페널티였다.
내 말에 주이안 씨가 해사하게 웃었다.
“백작께서 보시기엔 신전의 경계가 어떻던가요?”
갑자기 돌아가긴 뭐하니까 물어보는 말이 틀림없었다.
난 귀를 기울이는 게 분명한 성기사들을 위해 약간의 립서비스를 해주기로 결심했다.
“물 샐 틈 없이 방비되고 있는 것이 역시 성기사단입니다. 저희 가문의 기사들도 한 수 배워야 할 것 같아요.”
내 말에 성기사들의 고개가 다시 빳빳해졌다.
칭찬 듣고 기분 나쁜 사람은 없지, 음음. 게다가 제국 수호기사단장의 말이니 더욱 기분이 좋을 터였다.
근데 빈말은 아니었다.
B랭크인 내 눈에 성기사들의 랭크가 안 뜨는 거 보면 적어도 A급 이상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게 분명했으니까.
그렇다면?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독 탄 놈이 적어도 A급 이상인 것 같죠?]
그렇지 않고서야 A급 성기사들 사이의 철저한 경계를 뚫고 들어올 수 있을 리가 없으니.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아니면 적어도 암살스킬이 S급에 가까울지도 모르고요]
헌터랭크가 낮아도 스킬 랭크가 높은 경우가 더러 존재했으니까.
한마디로 긴장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서브 퀘스트 : 추적’ 클리어!]
[보상 : 민첩 +500]
클리어되어 반짝이는 시스템창을 치우며 우린 방으로 돌아갔다.
***
“나가서 바로 추적하실 건가요?”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사람들을 물린 주이안 씨가 물었다.
“네.”
고개를 끄덕인 내가 다시 신재헌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주머니가 좀 답답했는지 몸을 푸는 모습이 보였다. 나름 주머니 넓은 옷 입고 왔는데 그래도 좁긴 좁았을 터였다.
그가 팔을 빙빙 돌리며 말했다.
“추적스킬로 볼 수 있는 흔적도 시간에 따라 흐려져서, 최대한 빨리 쫓아야 돼요.”
주이안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러더니 곤란한 얼굴로 우리를 번갈아 보았다.
“혹시, 페널티를 받을지도 모르는 상황이 오면 그땐 그냥 돌아오세요.”
RP던전이니 덧붙이는 말일 터였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 RP던전 페널티를 먹을지 모르니까.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그놈 모가지 딴다고 페널티 먹을 것 같진 않아요.”
그놈은 이 신유리가 없앨 테니 안심하라구!
내가 웃어 보이자 주이안 씨가 난감한 듯 웃었다.
“물론 그렇습니다만, 혹시 모르니까요. 누구인지 아직 알 수도 없고, 게다가 두 분의 얼굴은 알려져 있으니 만일 그자가 두 분을 알아본다면…….”
그가 말하는 도중에 다시 시스템창이 떴다.
[서브 퀘스트 : 복수]
[팀의 안전을 위협하는 자가 나타났습니다. 그에게 실력을 보여주세요.]
[보상 : 신의 상점 Lv. 4]
“……오.”
이 퀘스트는 나한테만 떴는지 두 사람에게서는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신의 상점 4레벨이라는 보상을 보니 정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레벨이 높아질수록 재밌는 물건이 많아지는 듯했으니까.
[Coin : 45022]
혹시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은하 서버 스킬 열쇠를 사지 않고 모아둔 코인이었다.
이번 퀘스트 클리어하고 4레벨 신의 상점에 뭐가 있는지 본 후에 스킬을 살 생각이었다.
아냐, 이번엔 인벤토리를 가져와 볼까?
B급이 쓸 수 있는 템을 내가 갖고 있었던가? 그런 허접한 템을 갖고 있었던 기억은 없는데?
내가 행복한 고민을 할 때였다.
“범인뿐만이 아니라 가는 길에라도 두 분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면 페널티를 받을지도 몰라요.”
주이안 씨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생각을 접은 난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씀.”
하지만?
우리는 늘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늘 그랬듯이.
나와 신재헌의 시선이 잠깐 마주쳤다.
그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그럼 신상 좀 준비해주세요.”
내 말에 주이안 씨가 순수하게 반짝이는 눈을 깜빡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