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그들이 각자의 자리로 귀환한 날 밤.
“예하, 그럼 물러가 보겠습니다.”
네 사람이 던전에 들어간 동안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보고한 성기사단장이 주이안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주이안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푹 쉬어요.”
그러면서 안경을 벗었다.
성기사단장은 그가 늘 쓰던 단안경 대신 황동색 테의 얇은 안경을 벗자 의아함에 고개를 기울였다.
“근데 안경은 왜……?”
원래 단안경만 쓰고 있었던 교황이었으니 신경 쓰일 만도 했다.
“혹시 최근에 눈이 나빠지셨거나―”
그 말에 주이안은 짧게 답했다.
“아니에요.”
그답지 않게 날카롭게까지 들리는 목소리였다. 성기사단장이 멈칫했다.
“실언했습니다.”
“……실언까지는 아니고요.”
짧은 침묵 후에 주이안이 부드럽게 웃었다.
“조금 피곤해서 날카로웠던 듯해요, 기사단장.”
주이안이 미간을 꾹꾹 누르며 손짓했다.
“신경 쓰지 말고 가보세요.”
“……알겠습니다.”
그의 말에 성기사단장은 황송하다는 듯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며 물러갔다.
―달칵.
그렇게 문이 닫히고, 주이안의 방에는 그 주인만이 남았다.
“…….”
역시 너무 무리했나.
시야가 조금 흐릿하게 보여, 주이안은 눈을 꽉 감았다 떴다.
그러고는 가만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창문에 비치는 제 얼굴이 문득 낯선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는 창문에 혼자 비치는 제 모습이 낯설어 보였다.
‘술 없는 뒤풀이가 어딨어!’
‘이건 말도 안 된다!’
‘진정한 알코올의 세계로 주이안 헌터를 초대해야겠어요.’
주이안은 왁자지껄했던 오후를 떠올리며 웃었다.
세 사람은 이 신전에서 이미 떠나고 없었지만, 귓가에 그 소리가 아직도 울리는 것 같았다.
그는 시끄러운 걸 싫어하는 사람이었지만, 헌터팀은 좋아했다.
그에게 헌터팀은 소음이 아니었으므로.
떨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그리운지 모를 노릇이었다.
“……아.”
그는 문득 신유리에게 받았던 것을 떠올렸다.
‘맞다, 이거!’
쪼꼬미 물약 때문에 작아진 채로 총총 뛰어온 그녀가 건네준 건 웬 노트였다.
‘주이안 씨 우리 보고 싶어 할까 봐.’
‘……?’
―사락.
노트를 다시 펼쳐본 주이안은 옅게 웃었다.
노트 안에는 헌터팀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팀에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아까 자습시간에 신재헌 헌터가 그린 거예요.’
‘주이안 헌터님 외로울까봐.’
그렇게 말하며 웃던 신유리의 모습이 떠올라, 주이안이 빙그레 웃었다.
감사한 마음에 돌아보았다가 눈이 마주치자, 신재헌 헌터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던 것 같다.
그는 무심한 듯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챙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네 사람이 사는 한국의 집.
그곳의 주이안의 방에 있는 사진들도 대부분 신재헌이 찍어준 사진들이었다.
‘실물이 더 낫겠지만 때때로 실물 보고 싶은데 없을 때가 있잖아요?’
사진을 처음 받았던 그때도, 그렇게 말한 신재헌은 종종 사진을 주겠다고 하고는 제 방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감동해서 말을 잊은 사이에 사라져 버리는 건 신재헌 헌터의 특징이었다.
쫓아가서 고맙다고 말해도 대답도 안 하는 게 그였다.
쑥스럽다는 것처럼.
“…….”
빙그레 웃은 주이안이 노트의 그림을 살폈다.
창문을 보고 있는 신재헌과, 책을 내려다보는 주이안 자신의 모습. 그 옆의 소예리 헌터는 기술 좋게도 공부하는 척 졸고 있었다.
그리고 신유리 헌터는.
“……?”
주이안은 문득 그림을 자세히 살폈다.
그림에 문외한인 사람이 보더라도 신유리의 그림만큼은 더욱 공들여 그린 게 보였다.
무엇보다 그림 속의 신유리는 신재헌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슥.
주이안이 그림 위를 쓸어 보았다.
그가 자습실에서 흘끗흘끗 보았던 신유리 헌터는 노트에서 한시도 시선을 떼지 못한 채였다.
하지만 신재헌의 그림 속 신유리는 신재헌을 보고 있었다.
“…….”
게다가 신재헌은 유리창에 비친 모습을 그렸으니, 유리창에 가까이 있던 그 자신이 더 잘 보였을 텐데도 신유리가 더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주이안은 숨을 멈춘 채 그림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언제나 네 앞에(SS)]
낮에 들었던 신유리의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아마 신유리 헌터는 신재헌 헌터를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
스킬 이름부터 이미 그녀의 강렬한 소원이 느껴졌다.
“…….”
주이안은 신재헌의 곤란해하던 표정을 분명히 기억했다.
신유리가 수학선생님 이야기를 하는 동안, 신재헌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주이안은 집중치료를 하고 있었으니 그 모습을 더 잘 볼 수 있었다.
‘…….’
심해처럼 짙은 푸른색 눈동자는 고요해 보였지만, 그 안에는 많은 생각이 잠들어 있었다.
그 감정이 짐작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신재헌이 신유리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는 건 주이안도 익히 알고 있었으니까.
[나는 언제나 네 앞에]
그랬기에 그 스킬명을 보았을 때, 신유리가 제 앞에 뛰어들었을 때.
신재헌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무슨 기분을 느꼈을지 아주 조금은 짐작이 갔다.
신유리에게 많은 것을 받은 사람 중 하나로서, 빛나는 그녀의 등 뒤에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면서도 견디기 힘든 일인지 알고 있었기에.
주이안의 손끝이 다시 그림 속 신유리 위를 훑었다.
그림에서 그녀만큼은 유독 금방 살아 움직일 것처럼 생동감 있었다.
유쾌하게 웃는 얼굴도, 반짝이는 그녀의 눈도.
“…….”
분명 노트만 보고 있던 그녀가 마치, 정말로, 신재헌만 보고 있었던 것처럼.
그게 아니라면…….
그림을 보던 주이안은 문득 노트에서 손을 뗐다.
그러자 그림의 구석, 아주 작은 글씨가 보였다. 신재헌의 글씨였다.
[약속은 꼭 지킬게]
신유리 헌터에게 한 말이었을 것이다.
그 약속이 무얼까.
주이안은 신유리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토록 빛나는 사람을 동경하지 않기란 힘든 일이다.
그는 신유리를 가만히 보다가 깨달았다.
그림 속의 신유리도, 주이안 자신이 신유리를 보듯 그렇게 신재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니, 신유리 헌터는 분명 노트만 보고 있었으니.
“이건…….”
주이안이 뇌까렸다. 그림을 그린 사람은 신재헌이었다.
그가 원하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제게만 시선을 주길 원하는 것.
신유리가, 저만 바라봐주길 원하는 것.
“아…….”
주이안이 짧게 탄식했다.
그는 이 RP던전 밖에서도 언젠가 들었던 악마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는 것 같았다.
이 RP던전에 들어오면서부터는 더욱 자주 들리게 된 그 목소리가.
‘네 마음을 똑바로 봐.’
‘네가 무엇을 원하는지.’
악마의 목소리라 믿고 싶은, 제 속마음이.
“신재헌 헌터.”
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직 자신만을 보는 신유리의 모습을 그려놓은 그의 이름을.
신유리에게 자신이 더 특별해지길 원하는 그의 이름을.
하지만 안타깝게도 신유리는 너무나도 공평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모두를 좋아해주었다.
팀이 아니라 개개인을 좋아했고, 사랑했다.
신재헌이 원하는 건 그게 아닌데.
‘내가 원하는 것도 그게 아닌데.’
악마의 속삭임이 다시 들려왔다. 주이안이 주먹을 꽉 쥐었다.
내가 당신 안에서 가장 큰 일부이기를 원해.
물론 팀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신유리의 세계에는 그들 셋만이 있다는 것을.
‘내가 가장 아끼는 거 알죠?’
그녀가 팀이 모일 때마다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우리 세 명에게 주어지는 마음이 100이라면.
“…….”
주이안이 눈을 감았다.
당신이 100이란 마음을 셋에게 동등하게 나누어준다면.
33씩 가지고도 1을 셋이 다시 나눠 가져야 한다면.
무한히 3등분을 해도 결국 남게 되는 1을, 아주 작은 조각이라도 좋으니, 반드시 내가 갖길 원해.
내가 당신 안에서 가장 큰 조각이길 원해.
어떤 것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길 원해.
그리고 그건 신재헌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당신도, 나도.”
힘든 사랑 하는구나.
그가 뇌까릴 때였다.
―쿵쿵.
노크 소리가 울렸다.
“예하, 다과를 가져왔습니다.”
어린 목소리가 울렸다. 주이안은 시계를 돌아보았다.
“……늦은 시간인데.”
게다가 이미 성기사단장은 교황이 쉬는 줄 알고 있을 터였다.
그가 나가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따로 언질을 주었을 텐데.
“그, 실례일까요……?”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습사제의 목소리였다.
아무래도 교황이 쉰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주이안은 생각에 잠겼을 때 방해받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수습사제를 무안하게 만들 수는 없으니.
―살랑.
그가 문을 열자 어린 사제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몇 번이나 얼굴을 본 사제였다.
“히스 사제님.”
주이안이 먼저 이름을 부르자 수습사제가 눈을 크게 떴다가, 얼굴을 붉혔다.
―달칵.
그의 앞에 과자가 담긴 접시가 조심스럽게 놓였다. 차도 함께였다.
김이 폴폴 나는 차를 흘리지 않겠다고 맨손으로 받치고 왔는지, 손이 붉게 부어 있는 게 보였다.
이런.
“잘 먹을게요.”
“감, 감사합니다!”
어린 사제는 고개를 거듭 숙였다. 주이안은 손을 뻗어 그런 사제의 손을 잡았다.
“……!”
놀라는 아이에게 주이안이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뜨거운 건 맨손으로 잡지 말고요.”
그가 손수건을 쥐여준 채, 눈을 감았다.
―파앗!
치유 스킬이었지만 아이에게는 시스템창이 보이지 않으니, 성력을 써서 치유해주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화상 입을 수도 있으니까. 알았죠?”
그의 말에 아이가 고개를 숙였다.
“가, 감,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머리를 박을 기세인 아이를 간신히 돌려보낸 주이안이 다시 집무용 책상 앞에 앉았다.
“늦은 시간에 뭘 먹는 건 몸에 안 좋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심란하니 늦게 잘 것 같다.
주이안은 노트에 시선을 주었다.
―바삭.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쿠키를 베어 물었다.
그 순간이었다.
―파앗!
“……!”
순식간에 새빨간 시스템창 몇 개가 그의 시야를 채웠다.
흐렸던 시야가 그의 의지와는 다르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툭.
그의 몸이 옆으로 기울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