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다행히 내 건 없는지 주이안 씨는 공포의 수프를 더 꺼내진 않았다.
덕분에 난 신재헌의 얼굴이 구겨지는 걸 실시간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
“……후우우.”
앞머리가 휘날리게 다시 한숨을 내쉰 신재헌이 씹어뱉듯 말했다.
“궁으로 돌아가면.”
돌아가면? 뭐? 신재헌의 얼굴은 신전에 선전포고라도 할 것 같은 굳은 표정이었다.
그가 불쑥 말을 이었다.
“내 방만 한 테이블에 고기랑 술 산처럼 쌓아놓고 먹어야지.”
씹어뱉듯 말하는 그는 왠지 엄마 말 안 듣는 애 같았다.
애새X냐? 애X끼야?
주이안 씨는 그런 그의 앞에서 이마를 짚고 있었다.
“딱 사흘만 참으세요, 신재헌 헌터님.”
“음.”
신재헌이 심각한 표정으로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이틀.”
“이틀 반나절.”
주이안 씨가 질 수 없다는 듯 말을 받았다.
“이틀 여섯 시간.”
“이틀 세 시간.”
“이틀 네 시간 삼십 분.”
황당한 흥정이 오가는 사이 난 소예리 헌터를 돌아보았다.
“근데 멸망계시록 말인데요.”
그때쯤 소예리 헌터는 거대한 닭다리를 뜯고 있었다.
헐, 저거 뉴월드백화점에서 독점으로 파는 최고급 던전용 닭다리 아니야?
“네엥.”
딜러들과는 달리 크게 다치지 않은 소예리 헌터는 닭다리를 맛나게도 뜯어먹고 있었다.
―쭈우욱.
난 슬며시 다가가 닭다리 옆의 살을 뜯어서 입으로 가져갔다.
다행히 쪼꼬미 상태라 뜯어가도 티가 나진 않는 듯했다. 움냠냠.
“더 업데이트된 건 없어요?”
그러면서 물었다.
“누가 방해한다든지, 뭐 어떻게 방해한다든지, 그런 힌트.”
그런 게 쓰여있으면 대비가 가능할 거 아냐?
애초에 RP던전이니 RP던전 메인 퀘스트와 관련된 아이템에 바꿀 수 없는 미래가 쓰여있진 않을 거고, 그럼 우리가 대응할 수 있을 터였다.
“으음. 제가 봤을 때까진 없었는뎅.”
내 말에 소예리 헌터가 다시 책을 펼쳐 보았다.
닭다리를 두 손으로 뜯으면서 눈으로만 종이를 넘길 수 있는 건 소예리 헌터의 스킬 덕분이었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 S급(보조)
- 버프 : 보이지 않는 손(B)]
저 스킬이 가끔 좀 갖고 싶단 말이야.
가령 밤에 불 끄러 가기 귀찮을 때나…….
잠깐만.
근데 소예리 헌터는 저게 간절해서 생긴 스킬이란 말인가?
혹시 나처럼 불 끄기 귀찮아서?
그럼 대체 얼마나 불 끄러 가기가 싫었던 거지?
내가 심각한 얼굴로 허공에 둥둥 뜬 책을 쳐다보는 사이, 소예리 헌터가 눈을 크게 떴다.
“오, 새로 떴어요!”
“뭐가요?”
그 말에 결국 이틀 11분 15초로 합의를 본 주이안 씨와 신재헌이 우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거 봐!”
소예리 헌터가 그런 우리에게 책을 휙 돌려주었다.
허공에서 책이 반 바퀴 돌아 우리 앞에 펼쳐졌다.
“오.”
새로 내용이 뜨긴 떴다.
그런데 문제가 좀 있었다.
[ㅇㅇㅎ ㅎㅈㅇㄱㄴ ㅇㅅㅈㄹ ㅂㄴㄱ, ㅇㅇㅂㄷㅎ ㄱㅎㅇㄱㄴ ㄷㅇ ㅁㅇㄱ, ㅎㄹ ㄷㅇㄷㄴㄴ ㅁㅌㅈㅇ ㅁㅂㅇ ㅂㅇㅎㅇ ㅇ ㄷㄹㅇ ㅍㄱㅇ ㅅㅇ ㄴㅇㄹ ㅎㄷ.
그러는 사이 점점 게이트는 커져만 가고, 이내 대륙인들의 절반 이상이 게이트의 마물에 의해 사망한다.]
나와 신재헌과 주이안 씨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게이트 때문에 망한다는 건 알겠다.
그럼 앞내용이 문젠데.
“중요한 게 안 나오지 않았어?”
그래서 어떻게 망하는데?
“왜 여기만 자음 퀴즈야? 알아서 맞히라는 건가?”
신재헌이 심각한 표정을 짓는 사이, 난 다시 소예리 헌터의 닭다리에서 쭈욱 고기를 찢어 왔다.
“그러게.”
그러면서 입에 넣으려는 순간이었다.
함냐.
“?”
내 입은 허공을 베어 물었다. 내 손에 들려 있던 닭고기는 어느새 주이안 씨의 손에 들려 있었다.
“안 돼요.”
“쳇.”
엄청 조금인데!
내가 손을 슥슥 닦는 사이 신재헌이 멸망계시록 앞에 섰다.
팔짱을 낀 그가 멸망계시록을 노려보듯 읽기 시작했다.
“내가 그래도 문과였거든요.”
그러더니 뜬금없이 자기어필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 셋은 황당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우리도 문과였거든?
“이거 좀 알 것 같은데.”
신재헌은 멸망계시록의 자음 부분을 가리켜 보였다.
[ㅇㅇㅎ ㅎㅈㅇㄱㄴ ㅇㅅㅈㄹ ㅂㄴㄱ, ㅇㅇㅂㄷㅎ ㄱㅎㅇㄱㄴ ㄷㅇ ㅁㅇㄱ, ㅎㄹ ㄷㅇㄷㄴㄴ ㅁㅌㅈㅇ ㅁㅂㅇ ㅂㅇㅎㅇ ㅇ ㄷㄹㅇ ㅍㄱㅇ ㅅㅇ ㄴㅇㄹ ㅎㄷ.]
자신 있게 말하는 걸 보니 뭔가 알아채긴 한 모양이었다.
우리의 시선이 그의 입에 모인 순간이었다. 그가 불쑥 말했다.
“아야한 황제에게는 왕선지를 보내고.”
뭘 보내? 우리가 황당한 눈으로 쳐다보자 신재헌이 말했다.
“선짓국 먹고 싶다.”
그럼 그렇지. 헛소리였습니다.
내가 손을 내젓는 사이 신재헌이 멸망계시록을 제멋대로 읽기 시작했다.
“아이부들해 교황에게는 돈을 먹이고.”
소예리 헌터가 그 말에 깔깔 웃었다.
“주이안 헌터가 좀 부들부들하긴 하지.”
그 말에 주이안 씨는 또 심각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돈 안 먹습니다.”
그러다가 멈칫하고는 중요한 부분을 지적했다.
“근데 아이부들해는 대체―”
그러는 사이 신재헌은 다음 문장을 읽었다.
“하루 돌아다니는 마탑주의 면발은 불어…….”
“면발은 뭐야?”
마탑주 이야기가 나오자 소예리 헌터가 다시 멸망계시록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깔깔 웃는 사이 신재헌이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이 이상은 모르겠네요.”
그 말에 난 황당해서 물었다.
“앞은 자신 있고?”
내 말에 신재헌은 뻔뻔한 얼굴로 대꾸했다.
“교황 부분은 맞는 것 같지 않아요?”
맞겠냐 싶었지만 주이안 씨가 발끈하는 얼굴이 떠올라서 난 나도 모르게 대꾸했다.
“돈 먹는 건 모르겠고 사람이 부드럽다는 건 맞는 것 같은데.”
우리가 헛소리를 늘어놓을 때 주이안 씨가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교황’, ‘황제’, ‘마탑주’를 가리키는 건 맞는 것 같아요.”
온화한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없었다.
그제야 우린 진짜 진지한 얼굴로 멸망계시록을 쳐다보았다.
“그러게요.”
“으음.”
세 사람의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쓰여 있다는 건데.
헛소리는 그만하고 생각해보자.
[ㅇㅇㅎ ㅎㅈㅇㄱㄴ ㅇㅅㅈㄹ ㅂㄴㄱ, ㅇㅇㅂㄷㅎ ㄱㅎㅇㄱㄴ ㄷㅇ ㅁㅇㄱ, ㅎㄹ ㄷㅇㄷㄴㄴ ㅁㅌㅈㅇ ㅁㅂㅇ ㅂㅇㅎㅇ ㅇ ㄷㄹㅇ ㅍㄱㅇ ㅅㅇ ㄴㅇㄹ ㅎㄷ.]
“…….”
난 멸망계시록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뭐뭐한 황제에게는?
우유한…… 아니지. 의아한…… 이것도 아니고.
역시 아야한 황제란 말인가?
난 얼굴을 구겼다.
“신재헌 때문에 자꾸 왕선지로 읽히는데.”
“저도요.”
“나도.”
그 사이에서 예대 지망생이었던 신재헌이 불쑥 말했다.
“오선지일지도.”
난 결국 그를 돌아보았다.
“다물어.”
“넵.”
***
머리를 굴려봤지만 왕선지와 돈 먹는 교황 어쩌고 하는 내용 이상으로는 해석이 되질 않았다.
그리고 결국 회의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긴 시간이 이어진 후, 우린 헤어져야 했다.
물론 주이안 헌터가 원했던 ‘건전한 뒤풀이’가 끝난 후였다.
[쪼꼬미 물약 효과 : 14:57:21……]
물론 쪼꼬미 물약 효과는 아직 사라지려면 멀었다.
“여러분, 나 B랭크 된 건 봤죠?”
난 신재헌의 주머니에 담긴 채, 방을 나서기 전에 물었다.
내 말에 주이안 씨가 온화하게 웃었다.
“아까는 치료에 신경이 쓰여서 미처 축하를 못 했네요.”
그럴 수 있지. 집중치료인데.
내가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주이안 씨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저택으로 돌아가시면 팔을 움직이실 때―”
“아아아알았어요!”
이러다 LA에 있을 때 치료한 이야기도 하겠어!
난 벌써 다섯 번째 듣는 주의사항을 두 손을 들어 틀어막았다.
“역시 신유리야.”
그때 신재헌이 불쑥 말했다. 그는 놀랍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내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난 새삼스러운 기분에 그를 쳐다보았다.
“?”
어깨를 으쓱하는 그는 당연하다는 얼굴이었다.
대단한 일을 해낸 걸 보는 표정도, 대단한 사람을 보는 표정도 아니었다.
당연하다는 얼굴.
너라면 해낼 줄 알았다는, 그런 얼굴.
내가 살짝 입을 벌렸을 때였다.
“진짜 역대급 성공신화인데, 이걸 밖으로 못 가져간다니!”
통탄스럽다! 소예리 헌터가 머리를 싸맸다.
“그러게요. 일반인에서 B급 된 거 보면 사람들이 난리가 날 텐데.”
내 말에 소예리 헌터가 깔깔 웃었다.
“아쉬워!”
“나도!”
난 소예리 헌터가 내민 손가락을 덥석 끌어안았다.
B급 성공신화를 밖으로 못 가져간다는 것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 방에서 나가면 다시 데면데면한 척해야 한다는 게 더 아쉬워서.
“다들 조심해요. 무슨 일 있으면 채팅하고.”
신재헌이 문을 나서기 전에 말했다.
“상태창 수시로 살필게요.”
주이안 씨도 그의 말을 받았다.
나만 아쉬운 건 아닌지, 세 사람의 걸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느려졌다.
―탁.
그리고 이내 문 앞에 섰을 때.
우린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를 바라보았다.
빨리 던전 끝내고 나가자!
난 세 사람을 보면서 생각했다. 나가선 진짜 뒤풀이하는 거다! 사람들 눈치 볼 필요 없이!
―끼익…….
신재헌이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이미 대사제와 마탑 사람들, 그리고 기사들이 와 있었다.
이제부터 우린 다시 헌터팀이 아니라 소원한 사이였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팬미팅 온 것 같네]
……헌터 채팅만 빼면.
난 신재헌의 주머니 속으로 다시 쏙 숨어 버렸다.
수호기사단장은 공식적으로 황가 밀명으로 남부에 몰래 다녀온 것이니, 커지면 신재헌한테 보고하는 척 알현실에 들렀다가 저택으로 돌아가야겠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큰 던전도 처리했으니 한동안은 조용하겠지, 하고.
내가 에델바이스 저택으로 돌아오고, 일이 생기기 전까진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