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허공에서 우리 넷의 시선이 마주쳤다.
[집중치료(SS) 스킬 준비도 : 46%]
치료를 받느라 큰 리액션은 불가능한 신재헌은 눈썹만 치켜올렸다.
“인간 세력 중에 그럴 놈들이라고 해 봐야 동제국밖에 없는데?”
“걔들이 우리 도와줄 것 같진 않았어.”
소예리 헌터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나도 공감이었다.
“저번엔 황성 와서 염장지르다 털리고 갔다며.”
“그랬지.”
신재헌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는 사이 주이안 헌터의 집중치료 스킬이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집중치료(SS) 스킬 준비도 : 98%]
그리고 이내, 빛이 확 퍼졌다.
분명 밝은데 눈이 부시지 않은 빛을 보는 건 언제 봐도 신기한 기분이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 S급(딜러)
- 상태이상 : 없음]
깔끔해진 신재헌이 침대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헌터님, 땡큐.”
몸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니 움직임도 훨씬 가벼워져 있었다.
그러는 사이 주이안 씨의 온화한 미소가 내게로 향했다.
“다음은 신유리 헌터님.”
“윽.”
이제 내가 가만히 있을 차례였다.
다친 게 심하면 잔소리가 쏟아질지도 모른다.
난 최대한 어기적어기적 베개 위로 다가갔다. 작아진 내 몸엔 너무 크다고 생각했는지, 주이안 헌터가 내 앞에 손수건을 깔아 주었다.
땡큐.
“설마 걔들이 병사 보내나?”
그 사이 멀쩡해진 신재헌이 팔을 돌려보며 중얼거렸다.
“그쪽엔 게이트 없으니까 이때다 하고 이쪽에 병사 보내려는 거 아냐?”
난 손수건 위에 누우며 되물었다. 그래 봐야 신재헌 광역기에 끝장나겠지만.
―풀썩.
내가 자리에 눕자 주이안 씨 손에서 빛이 번쩍였다.
“다음엔 이렇게 다치면 안 되는 거, 알죠?”
낮게 웃은 주이안 씨가 물었다.
그의 손에서 먼저 터져 나온 건 진단 스킬이었다.
상태창에 안 나온 이상이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그그럼요.”
그리고 진단 스킬 결과를 봤는지 주이안씨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그…… 좀…… 심각할걸?
L급 던전에서 C급이었던 게 설쳤으니 당연했다.
이리저리 구른 데다 아무리 버프를 둘둘 감았어도 SS급 공격까지 받았으니 성한 곳이 있을 리가 없었다.
“다음에는 무리하게 공격도 받아내지 말고요.”
주이안 씨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그 말에는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가만히 있다가 죽을 수는 없잖아요?”
주이안 씨는 내 말에 더욱 포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누워야 제가 치료를 할 텐데.”
누누누눈에서 살기가 느껴져!
더 다치면 손수 죽여주겠다는 진정한 힐러의 마음이 느껴져!
“넵.”
―풀썩!
난 다시 침대로 널브러졌다.
내 위로 주이안 씨의 집중치료 스킬이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언젠가 주이안 씨가 각성했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 S급 힐러가 등장했다고 헌터협회 앞에 득실거리던 기자들과 길드 인사팀 사람들도 떠올랐다.
‘힐러니까 사람을 죽이진 않겠지.’
‘S급인데? 힘은 좋을걸?’
‘그래 봐야 힐러야.’
당시엔 S급 스탯에 대해 제대로 알려진 게 없었으니 기자들이 그렇게 설칠 만도 했다.
하지만 그놈들은 모를 것이다.
원래…… 던전에서 가장 무서운 건 힐러다. 화난 힐러.
***
[헌터 주이안(S)이 ‘집중치료(SS)’ 스킬 효과를 부여합니다.]
[가지고 있는 SS급 이하의 모든 상태이상이 해제됩니다(교황 스킬 보너스 +50%).]
집중치료 받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었다.
“고마워요.”
내 말에 주이안 씨가 옅게 웃었다. 난 그런 그에게 손짓했다.
“이제 주이안 씨가 쉬어요.”
“……아.”
주이안 씨는 멈칫했지만 결국 침대에 누워 버렸다.
집중치료 스킬이 날로 먹는 스킬일 리가 없었다.
극심한 상태이상까지 치료하는 대신 힐러의 기력을 그만큼 깎아먹는 스킬이었다.
주이안 씨는 좀처럼 힘든 티를 안 내는 사람이었지만 보나마나 지금쯤 눈앞이 핑핑 돌 게 분명했다.
“오늘 하루 제가 모시겠습니다, 힐러님.”
신재헌이 주이안 씨의 어깨까지 이불을 올려 덮어 주었다. 그 사이 난 이불을 피해 주이안씨 머리맡까지 열심히 도망나왔다.
작아지니까 이불도 재앙이구만.
주이안 씨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피곤한 건 아니―”
그 말에 나와 신재헌이 동시에 답했다.
“구라치지 마요.”
“뻥치지 마십쇼.”
주이안 씨의 입이 딱 다물렸다.
우리가 댁을 하루 이틀 보는 줄 알아?
주이안 씨가 결국 곱게 침대에 널브러진 사이, 난 자리에 앉았다.
“난 동제국 움직임 좀 알아보라고 할게요.”
신재헌은 앉는 대신 문으로 향했다.
“오래 있을 것 같으니 회의하려고 모였다고도 전하고요.”
그 말에 소예리 헌터가 싱글벙글 웃었다.
“틀린 말은 아니네~”
견제하는 세 세력의 수장이 옹기종기 한 방에 모여 오래 있는 것부터 이상한 일이니 떡밥을 미리 깔아야 했다.
RP던전에 들어온 이상 RP 페널티를 피하는 건 기본이니까.
그렇게 신재헌이 나갔다 들어온 후.
우리는 회의를 빙자한 뒤풀이를 시작했다.
―쿠웅.
두어 시간 자고 일어난 주이안 씨가 침대를 치워 버리자, 소예리 헌터는 인벤토리를 뒤져 거대한 돗자리를 꺼냈다.
“방 안인데 돗자리까지?”
내 말에 빠르게 돗자리 세팅을 마친 소예리 헌터가 새침한 표정으로 검지를 까딱였다.
“테이블은 좁고, 맨바닥에서 먹으면 다음 날 엉덩이 배겨요.”
저 말이 소예리 헌터 입에서 나온 게 아니면 믿었을 것이다.
그런데 S급 엉덩이가 배기게 하는 바닥이 있으면 내가 걸을 때마다 데미지를 받지 않았을까요?
“그냥 기분 내려고 하는 거죠!”
내가 정곡을 찔렀는지 소예리 헌터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들켰나?”
하지만 돗자리가 있든 없든 달라지는 건 없었으므로, 우린 슬그머니 넓은 돗자리 위를 한 자리씩 차지했다.
“방 안에서 이러는 것도 신기한 기분이네.”
“그러게요.”
내 말에 신재헌이 아까보다 훨씬 멀쩡해진 얼굴로 답했다.
“모처럼 건전한 뒤풀이를 할 수 있겠네요.”
주이안 씨도 훨씬 밝아진 얼굴이었다. 그의 낯에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
건……전한……뒤풀이……?
그 말에 소예리 헌터와 내 시선이 마주쳤다.
알코올은 독으로도 안 듣는 S급 파티에서 술은 안 좋다고 꾸준히 주장하는 게 주이안 씨였다.
아무리 S급 내성이 좋다고 해도, 언제 어떻게 독이나 디버프에 노출될지 모르니 굳이 몸에 안 좋은 걸 먹어봐야 좋을 게 없다는 이유였다.
요컨대 주이안 씨는 술 없는 뒤풀이 자리가 마음에 드는 듯했다.
“대신 맛있는 걸 많이 먹으면 되죠.”
빙그레 웃은 그는 우릴 달래듯 인벤토리를 뒤졌다. 던전용 요리를 고르는 듯했다.
하지만 그의 미소는 신재헌이 인벤토리에서 뭔가를 꺼내자마자 와장창 박살 나 버렸다.
“휘이이이!”
와인병을 거꾸로 든 채 무슨 소주 소용돌이 마는 것처럼 흔들고 있던 신재헌과 눈이 마주친 탓이었다.
“……신재헌 헌터님?”
주이안 씨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하지만 신재헌도 빙그레 웃어 주었다.
“주이안 헌터님.”
그도 받아치듯 주이안 씨를 불렀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나는 말없이 신재헌을 응원했다.
뒤풀이의 퀄리티는 네 손, 아니 네 입에 달려있다!
그때 소예리 헌터가 슬그머니 두 사람에게서 떨어졌다.
“난 주이안 헌터 잔소리 안 들을래.”
그렇게 속삭이더니 내 뒤에 쏙 숨어 버렸다.
“술은 언제든 드실 수 있답니다.”
“이 자리에서 놓친 술은 두 번 다시 못 먹죠.”
주이안 씨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신재헌의 담담한 목소리가 맞부딪쳤다. 주이안 씨가 와인병을 잡으며 말했다.
“집중치료를 받았다고 해도 하루는 쉬어 줘야 돼요. 안 그럼 뼈가 잘 안 붙을 수도 있어요.”
“뼈는 원래 알코올로 붙이는 겁니다.”
신재헌이 개소리로 말을 받았다. 하지만…… 저건 팩트였다.
알코올로 붙여야지, 암!
“신재헌 헌터님?”
“네, 주이안 헌터?”
두 사람의 시선에서 불꽃이 튀는 듯했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 S급(힐러)
- 버프 : 순간집중(SS)]
그때 주이안 씨의 버프창에 버프가 올라왔다. 능력치 30% 증가 버프.
설마 힘으로 뺏으려고?
물론 신재헌도 가만히 있진 않았다.
그의 자가 버프는 죄다 검을 들 때나 적개심을 가진 적에게 통하는 것들이라 버프창이 움직이진 않았다.
대신 자세를 바꾸었다.
딜러와 힐러(능력치 +30%)의 싸움!
―빠악!
……은 개뿔!
소예리 헌터가 둘의 머리를 나란히 후려갈겼다.
“그마안. 재롱은 안 아플 때 보여주기. 알았죠?”
그녀의 말에 슬그머니 두 사람이 거리를 벌렸다.
그 사이 신재헌의 와인은 주이안 씨에게 넘어가 버렸다.
앗, 내가 쌔비려고 했는데!
주이안 씨는 어림도 없다는 듯 인벤토리에 와인을 던져 넣어 버렸다.
“나중에 드릴게요.”
신재헌은 앞머리가 날리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주이안 헌터님 드세요.”
“안 마셔요. 대신 이것, 드릴게요.”
소예리 헌터가 다시 내 옆으로 돌아오는 사이, 주이안 씨는 토라진 것 같은 신재헌에게 뭔가를 건넸다.
“오.”
난 그걸 보면서 감탄했다. 그건 다름 아닌 수프였다.
“드세요.”
“…….”
신재헌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소예리 헌터는 그때쯤 음소거 상태로 웃으면서 바닥을 치고 있었다.
“그래도 뒤풀이인데 이건 좀―”
“드세요.”
주이안 씨가 다시 말했다.
뒤풀이에서 수프 마시는 게 좀 억울하긴 하겠지만, 맛있는 거면 다 잘 먹는 놈인데?
“헉.”
난 아무 생각 없이 수프를 봤다가 기겁했다.
저 초록색 죽은?
“오.”
난 슬그머니 몸을 뒤로 물렸다. 소예리 헌터는 이미 돗자리 위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특단의 조치(SS)]
주이안 헌터가 온갖 던전산 허브와 치료제를 넣고 푹 고아 만든 그 수프는 아주 건강한 맛이었다.
먹으면 몸에는 확실히 좋았다. 문제는 맛이 겁나게 없다는 점이었다.
저걸 줄 정도면 그가 진단했을 때 신재헌의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했던 게 틀림없었다.
“드세요.”
주이안 씨가 다시 말했다.
신재헌은 거듭된 친절에 떨리는 손으로 수프를 받아들었다.
“제가 그렇게 보이는 것만큼 심하게 다친 건 아닌―”
“드세요.”
기계같이 같은 말을 반복하는 주이안 씨 앞에서 신재헌은 사약 받는 표정이었다.
결국 그가 떨리는 손으로 수프를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