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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던전의 S급 시한부 영애 (65)화 (65/218)

65화

툭 떨어지는 몽당연필을 얼떨결에 받아들긴 했지만, 앞선 목검과는 달리 전혀 쓸모가 없어 보였다.

“학교 다닐 때도 샤프 썼지 연필은 안 썼는데.”

난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 중에 연필 썼던 거 4B연필 쓴 신재헌밖에 없을걸?

그렇다고 SS급 던전에서 준 걸 버리긴 뭐하니, 일단 인벤토리에 잘 넣어 주었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인지 인벤토리에 몽당연필을 던져 넣고 있었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아.”

소예리 헌터가 자리에서 주섬주섬 일어났다. 좀 힘이 생긴 모양이었다.

신재헌도 벽에서 떨어지며 말했다.

“나가서 뒤풀이합시다, 뒤풀이.”

SS급 던전 클리어했으면 당연히 해야지! 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얼른 나가자!”

한국에 있을 때에는 S급 이상 던전에서 나올 때마다 뒤풀이를 거하게 하곤 했다.

오늘은 정말 지랄맞은 SS급 RP던전이었으니 뒤풀이를 하지 않으면 정신건강에 해로울 게 분명했다.

난 식당 문 쪽으로 뛰어갔다.

SS급 게이트라 출구 구축에 시간이 좀 걸렸는지, 이제야 바깥 모습이 보이려 하고 있었다.

나와 신재헌이 재빠르게 게이트 앞에 섰을 때였다.

“치료 중에 술은 안 돼요.”

암살 스킬이라도 익혔는지 인기척도 없이 다가온 주이안 씨가 말했다.

주이안 씨 너튜브 ASMR 채널 운영자는 안 믿겠지만 주이안 씨가 이렇게 섬뜩한 목소리로 말할 때도 있답니다…….

난 결국 주이안 씨를 흘끗 돌아보았다.

“쪼끔만.”

안 될까요? 내가 눈을 반짝이자 주이안 씨가 온화하게 웃었다.

“술자리는 돌아오지만, 건강은 돌아오지 않아요.”

‘지랄하지 마십쇼’ 하는 목소리가 은은하게 겹쳐 들리는 것 같았다.

“……옙.”

[외부로의 게이트가 활성화되었습니다.]

“두고 가는 물건 없죠?”

“없어용~”

주이안 헌터의 말에 소예리 헌터가 명랑하게 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제 핏방울 정도?”

신재헌의 헛소리도 들렸다.

[던전 ‘어릴 적의 추억(SS)’에서 나가시겠습니까?]

[던전을 나가면 다시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던전에 남은 던전 부산물 및 기타 물품은 사라집니다.]

그 사이 익숙한 시스템창이 지나갔다. SS급 던전이라고 해도 RP던전인 이상 가지고 나갈 수 있는 유용한 물건은 얼마 없을 것이다.

여기서 쓸모 있는 물건이라고 해 봐야 신재헌이 쓸모를 만들어준 그 노트 정도?

[노트(B)]

난 신재헌의 그림이 담긴 노트가 인벤토리에 무사히 있음을 확인한 후에 신의 상점을 열었다.

[쪼꼬미 물약 – 0C]

아쉽지만 다시 작아져야 할 시간이었다.

던전에 교황, 황제, 마탑주 셋이 들어갔는데 수호기사단장까지 넷이 나오는 기적이 벌어져서는 곤란하지 않겠는가?

내 생각을 알아챘는지 신재헌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그 손을 잡고 물약을 마시는 순간.

[‘쪼꼬미 물약’ 효과로 몸이 작아집니다(23:59:59……).]

순식간에 세상이 커지면서 내 몸이 작아졌다. 그리고 그런 나를 신재헌이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탁.

그의 손 위에 놓인 내 시선과 그의 시선이 마주쳤다.

신재헌은 뭐라고 벙긋거리더니, 나를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뭐라고 하는 거지, 싶었는데 잘 생각해보니 알 것 같았다.

고생했어.

그는 그렇게 말했다.

난 그의 체온이 느껴지는 주머니 안에서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어 채팅을 올렸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여러분 나가서는 친한 척하면 안 돼]

주변 풍경이 바뀔 때 채팅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제야 한 마디씩 떠들던 세 사람이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다.

“…….”

잘만 오래 떨어져 있었는데, 같이 던전 한 번 뛰었다고 헤어지기가 더 싫었다.

나가선 또 모른 척, 낯선 사람인 척 해야겠지.

그 사실에 속이 쓰렸다.

그냥 빨리 던전 나가고 싶다. 다 같이 나가서 헌터협회장 머리 박살 내고, 진짜 뒤풀이했으면 좋겠다.

넷 다 무사히 살아서.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개인보상 : 신의 상점 Coin +20000]

[신의 상점 : Lv.2 → Lv.3(UP!)]

[히든 퀘스트 ‘소망’ 클리어!]

어? 눈을 크게 뜬 순간이었다.

[랭크가 ‘B’급으로 상승합니다!]

[모든 능력치가 B급의 보너스를 받아 재조정됩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 / 25세, 딜러(B)

체력 : 500000 (+55000)

근력 : 8500 (+10000)

마력 : 11000 (+10400)

민첩 : 5000 (+10005)

지구력 : 3000 (+10200)

방어력 : 3000 (+10005)

특수 : 도금 목걸이(C, ‘헌터 신재헌(S)’ 애장품 보너스 : 획득 경험치 +50%)]

B급, 각성이었다.

***

“돌아오셨다!”

“와아아아아!”

게이트를 나오자마자 들리는 건 환호성이었다.

“당장 마탑에 연락해!”

“신전에도 연락해!”

“황성에도 연락해!”

사람들은 당연히 난리가 났다.

“세 분 모두 무사하십니까!”

주머니 밖을 흘끔 보니, 앞으로 대사제와 마탑의 2인자, 그리고 황성 의전관이 우르르 달려오는 게 보였다.

나오고 보니 세 사람의 옷은 교복 대신 원래 입고 있던 옷이었다.

옷도 교복이 입은 손상을 그대로 가져왔는지 좀 해진 게 문제지만.

“모두 무사해.”

신재헌이 짧게 답했다.

“안에선 무슨 일이……!”

“폐하께서 부상이 심하십니다!”

그거야 맞는 소리지만 이따 주이안 씨가 치료해줄 터였다.

우리 앞에서 사람들이 엄청나게 시끄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원래 게이트에서 막 나온 헌터들은 예민해져 있기 때문에, 한국에선 사람들이 이렇게 몰려올 일이 없었다.

그런데 이 동네는 그 매너를 아는 사람이 없는 듯했다. 당연하겠지만.

우리가 숙련된 S급 팀이 아니었으면 성질이 난다며 사고를 냈을지도 몰랐다.

“일단 돌아가서 쉬어야겠어요.”

하지만 우린 지성인이었으므로 소예리 헌터의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먼저 나갔다.

아니, 이제 클로나 에이센이지.

내가 머릿속을 재정렬하는 사이 사람들이 멈칫했다.

그제야 우리가 SS급 던전, 그니까 저들 입장에서는 뭔진 몰라도 엄청나게 힘든 던전을 클리어한 직후란 걸 알아차린 듯했다.

순간 피로가 몰려온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우르르르, 사람들이 비켜나 길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걸어온 대사제가 고개를 숙였다.

“근처 신전에 세 분이 쉬실 만한 장소를 마련해두었습니다.”

오.

대사제의 말에 난 그 순간 신시안 교에 입교할 뻔했다.

대사제는 셋이라고 했지만 내 한 몸 누울 자리가 없을 것 같진 않았다.

“조금 쉬다 가시겠습니까?”

놀란 우리와는 달리 주이안 씨는 놀라지 않은 듯했다.

“물론 아무런 정치적 계산도 없습니다.”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신재헌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설마 여기서 까는 거 아니지?

아무리 신전하고 황가가 사이가 안 좋다지만 지금은 그런 공적인 감정은 잠시 접어두어야 할 때가 아닐까요?

아주 잠깐 긴장의 순간이 지나고,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신세 좀 지겠습니다.”

클로나 에이센의 온화한 얼굴에 적응하려는 소예리 헌터도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고, 그제야 우리는 신전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덜컹!

화려하고 튼튼해 보이는 마차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그래도 쉴 곳 준비되어 있어서 다행이네요]

주이안 씨는 나와 신재헌하고는 다른 마차에 탔지만 헌터 채팅은 곧바로 올라왔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미리 준비해두라고 했습니다.]

SS급 던전 들어가니까 당연히 나오자마자 뻗을 거라고 예상했나?

우리 팀에서 주이안 씨를 제외하면 생각도 하지 못할 발상이었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역시 힐링계]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힐러만세]

우리가 찬양할 때였다. 주이안 씨의 채팅이 연달아 올라왔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신전에서는 금주인 것 아시죠?]

그 말에 신재헌의 주머니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던 나와 신재헌의 시선이 마주쳤다.

마탑 쪽 마차에 탄 소예리 헌터도 우리랑 비슷한 표정을 지었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설마 이 모든 것이 주이안 씨의 계략?

이따 몰래 마시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까 신전이면 아예 몰래 가져올 술도 없을 거 아냐!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그냥 돌아가면 안 될까?]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뒤풀이에 술이 없다고?]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혹시 쉴 곳 따로 마련하신 분]

[…….]

신재헌의 채팅 뒤로는 침묵이 이어졌다.

물론 애초에 지금 별안간 마차를 돌렸다간 빼도 박도 못하고 RP던전 페널티나 먹을 터였다.

주이안 씨가 그걸 모를 리도 없고.

……왠지 마차 탈 때 표정이 좋다 싶더니!

이건 분명히!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함정이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함정이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속았다! 힐러의 함정이다!]

우리 셋이 원성 아닌 원성을 쏟아냈지만 주이안 씨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SS급 던전에서 당한 부상이니 더 자세히 봐야 해요.]

그러고는 무서운 채팅을 연달아 올렸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특히 딜러 두 분]

그 채팅에 나와 신재헌은 굳어 버렸다.

여기서 뭐라고 하느냐에 따라 주이안 교관은 천사가 될 수도, 악마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뒤풀이는 나중에 하면 되지]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ㅇㅇ;]

결국 우린 꼬리를 내렸다.

치료받는 내내 주이안 씨가 이거 하지 말라, 저거 하지 말라, 그땐 왜 그랬냐, 힐러다운 애정 어린 잔소리를 쏟아낼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긴장됐기 때문이었다.

물론 거기서 졸거나 반박하면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잔소리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어 근데 신전에 프라이빗한 공간은 있는 거죠?]

그때 우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소예리 헌터가 물었다.

중요한 문제였다. 안 그럼 난 신재헌 주머니에서 쉬어야 한다고!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물론입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나이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오 좋아좋아! 그럼 나 할 말 있어요! 방금 생김]

방금? 설마 난 술 마셔도 돼요, 뭐 이런 거?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녀의 목적은 묵직한 것이었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멸망계시록 기억나죠?]

메인 퀘스트 아이템을 기억 못 하면 S급 실격이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당근]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새로 내용이 업데이트됐어요]

게이트 클리어해서 그런가?

처음 계시록을 본 뒤로 꽤 많은 던전을 클리어했으니 그럴 법도 했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근데 같이 봐야 할 것 같아요]

뭔 내용이길래? 나와 신재헌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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