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난 딜러로 각성한 걸 단 한 번도 아쉬워한 적이 없었다.
처음 게이트 사태가 생기고 학교가 A급 게이트로 변했을 때.
내가 보조계나 힐러계였다면 던전을 클리어할 수 없었을 테니까.
그럼 그 게이트에서 나도, 신재헌도, 다른 학교에 있던 아이들도 선생님들도 모두 죽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A급 게이트 대참사가 되었겠지.
그 후로도 그랬다.
몬스터를 앞장서 처리하는 건 내 성미에 딱 맞았다.
딜러답게 보조스킬이 별로 없다고 해도 아쉽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지금만큼은 필요했다.
‘기회가 오면, 꼭 내가 너 대신 죽을게.’
너보다 먼저 죽을게.
네가 나를 살려준 것처럼. 네가 나 대신 피를 뒤집어쓴 것처럼.
그때 신재헌은 그랬다. C급이었던 그는 제가 짐 덩어리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내게 짐이었던 적이 없었다.
나는 혼자인 게 두려웠고 내 뒤에 아무도 없는 게 더 무서웠으니까.
그 어떤 꼴을 보고 보이더라도, 내 뒤를 따르는 네 덕에 나는 앞장설 수 있었다.
그래서 그때도, 과거를 떠올리는 지금도 그에게 나는 고민 없이 답할 수 있었다.
네가 내 인생에 짐이었던 적은 없었어.
‘혼자 두지 마. 어디 가면 안 돼. 알았지?’
게이트 초기에, 던전에 들어갈 때마다 내가 했던 말이었다.
신재헌은 까먹은 것 같지만.
‘귀신 같은 거 안 나온다니까.’
‘안 나와도 아무튼 혼자 두지 마.’
귀신 같은 말도 안 되는 걸 무서워했던 건 헌터로 각성한 후엔 사라져 버렸다.
대신 두려운 건 혼자가 되는 것이었다.
[‘재앙’ 도래…… 신은 우릴 버렸는가]
[지구의 ‘자정작용’?]
게이트가 터진 날을 사람들은 그렇게 평했다.
내가 S급 헌터가 되고 세상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한 그날.
재앙 한가운데에서 힘을 얻은 나는 내가 살던 살 만한 세상이 깨져나가지는 않을 줄 알았다.
[은령아파트 101동에 ‘재앙’…… 생존자 0명]
하지만 나는 가족을 잃었고 내가 지켜야 하는 것은 사라져 버렸다.
그때 내 옆에 있던 게 신재헌이었다.
그가 사라지면 완전히 혼자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저희 헌터 연합에 오시겠습니까? 신유리 헌터님이라면 기꺼이 연합장 자리도 드릴 수 있습니다.’
‘대신 저희 지역을 벗어나지 않는 조건으로…….’
나를 신유리가 아닌 S급 헌터로, 게이트를 없앨 병기로만 보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네가 없으면.
그러니까 혼자 두지 마.
―타탁!
난 그가 뛰어나간 순간 몸을 벌떡 일으켰다.
[오답 노트(SS+) 준비도 : 99%]
[4교시 수업 장소 이동 : 00:00:04]
가만히 앉아 있을 생각은 없다. 내가 딜러든 보조계든 나는 할 수 있는 일을 할 생각이었다.
‘내’가 아니라 ‘우리’는 반드시 살아서 이곳을 나가야 하니까.
[마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냅니다.]
[잔상(SS+)-잔상(SS+)-잔상(SS+)-잔상(SS+)-…… 스킬을―]
[사용범위범위범위범위 : 신유리(C)]
스킬과 마력을 한 번에 쏟아붓자 시스템창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물론 그런 걸 신경 쓸 틈은 없었다.
[버프 : 시너지(A) ‘‘‘‘잔상(SS+)’’’’]
몇 겹으로 겹쳐졌는지 모를 잔상이 내 위에 덧씌워졌다.
최대한 데미지를 분산시켜줄 것이다.
성공할지는 모르겠지만.
―쩡!
검을 든 내가 신재헌과 수학선생님 사이로 끼어들었다.
마지막 순간, 잔상에 익숙해져 주변이 느리게 보이는 것 같았다.
놀란 얼굴의 신재헌이 보였다.
그리고.
[스킬 ‘나는 언제나 네 앞에(SS)’ 개화합니다.]
[나는 언제나 네 앞에(SS) : 데미지 감소 : -50%(2초), 후방에 □□□□□□이 있을 경우 데미지 감소-99%(2초)]
눈을 크게 뜬 순간이었다.
[잔상(SS+)의 효과가 지나친 데미지를 받아 사라집니다]
[잔상(SS+)의 효과가 지나친 데미지를 받아 사라집니다]
[잔상(SS+)의 효과가 지나친 데미지를 받아 사라집니다]
……
시스템창이 눈부실 정도로 환하게 반짝였다.
그 사이로 잠깐 멈칫했던 신재헌의 검이 파고드는 게 보였다.
―……!
굉음이 들린 것도 같았다.
그의 검이 수학선생님의 약점을 정확히 공격했는지 붉은 이펙트가 터지면서 복도가 뒤흔들렸다.
그리고.
[‘분노한 수학선생님(SS)’을 처치했습니다!]
그런 메시지를 본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시야가 암전되었다.
***
다음 순간 눈을 떴을 때, 내 앞에 떠 있는 시스템창은 평화로웠다.
마치 조금 전이 꿈이라도 되는 것처럼.
[4교시 : ‘체육’으로 자동이동되었습니다.]
[모든 버프가 자동해제됩니다.]
[자동이동 페널티 : 모든 능력치 -50%(00:59:59)…….]
내가 죽고 주이안 씨가 나를 소생시켰나, 생각하기에는 4교시였다.
불과 몇 초 안 지났다는 이야기였다.
[잔여 체력이 2% 이하입니다.]
눈을 간신히 뜨자 교실이 보였다.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파티 상태부터 살폈다.
[신유리(신유리) - C급(딜러)
- 상태 이상 : 체력 부족, 다발성 골절, 중상(집중치료 필요)]
[신재헌(신재헌놈) - S급(딜러)
- 상태이상 : 체력 저하, 정신력 저하, 골절(늑골, 왼팔), 체력 부족]
[주이안(주이안씨) - S급(힐러)
- 상태이상 : 없음]
[소예리(예리언님) - S급(보조)
- 상태이상 : 없음]
넷 다 살아있긴 했다.
소예리 헌터와 주이안 씨는 멀쩡했고, 신재헌과 내 체력만 바닥을 치고 있었다.
[주이안(주이안씨)>>> 이게]
주이안씨는 놀란 듯했다. 그는 헌터 채팅을 던져버리고 힐부터 퍼부었다.
[헌터 주이안(S)이 ‘회복의 손길(SS+)’ 스킬 효과를 부여합니다.]
[WARNING! : 중상 상태로 40% 이상 체력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체력이 40% 정도 차니 눈앞이 제대로 보였다.
[4교시 : ‘체육’ 시험이 시작됩니다.]
시스템창이 번쩍 떴다. 난 눈을 깜빡였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좀 안 됐다.
체육 시험을 왜 교실에서 봐? 필기시험이야?
[‘체육’ 시험을 실시할 체육관이 없습니다.]
다음에 뜨는 시스템창에 난 눈썹을 치켜올렸다.
[신유리(신유리)>>> ?]
[신재헌(신재헌놈)>>> ?]
의아한 우리와는 달리 주이안 씨와 소예리 헌터는 무슨 상황인지 대충 파악한 듯했다.
설마 체육관 댁들이 박살 내셨습니까?
[‘체육’ 시험을 실시할 임시 장소 탐색 중…….]
[탐색 실패.]
[4교시 : ‘자습’으로 자동교체됩니다.]
예?
나와 신재헌의 시선이 앞자리에 앉아 있는 주이안 씨와 소예리 헌터와 마주쳤다.
[소예리(예리언님)>>> 그럼 4교시 꿀빠는 거야?]
소예리 헌터가 모두의 희망사항을 말하는 순간이었다.
[교실로 ‘분노한 체육선생님’이 입장합니다.]
분노? 또 몹이야? 나도 모르게 긴장했을 때였다.
“대체 어떤 미친놈이 학교를 박살 내고 다니는 거야!”
체육선생님이 샤우팅을 하며 교실로 쳐들어왔다. 근데 그의 머리 위에는 랭크 표시가 없었다.
몬스터가 아니었다. 어?
“아주 요즘 다들 수업 태도가 개판이야, 어?”
―탕탕!
체육선생님이 교탁을 내리쳤다.
“학교 멀쩡해지면 시험 바로 볼 줄 알아라, 응?”
그러더니 교탁 앞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아 버렸다.
“?”
저게 끝이야?
보통 고등학교에서 멀쩡한 건물들이 박살 나면 사람 소행이라고 생각하진 않을 텐데? 박살 나서 빡치고 끝?
우리의 시선이 다시 마주쳤다.
그때 주이안 씨의 손이 번쩍였다.
[신재헌(신재헌놈) - S급(딜러)
- 상태이상 : 골절(안정 필요) 중상(집중치료 필요)]
상태이상 몇 개가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두 개는 주이안 씨도 단숨에 없앨 수 없는 것들이었다.
[주이안(주이안씨)>>>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주이안씨는 우리 상태를 보고 심각함을 느낀 듯했다.
[신유리(신유리)>>> 그게 말하자면 긴데요]
채팅을 하려는데 신재헌의 시선이 느껴졌다. 할 말 많은 표정이었다.
내가 뭐라고 말하려는 때였다.
[올바른 수업 태도를 보이십시오!]
시스템창이 번쩍 떴다. 설마 수업 태도 점수 나오면서 체육선생님 빡치는 전개는 아니지?
[…….]
하지만 다행히 체육선생님이 온화한 편인지(?) 그런 일은 없었다.
소예리 헌터는 그 꼴을 보고 한탄했다.
[소예리(예리언님)>>> 그냥 학교 처음부터 다 부술걸]
[신재헌(신재헌놈)>>> 수업할 장소가 없으면 수업도 못한다는 사실을 일찍 알았어야 했는데]
RP던전을…… 그렇게 변칙적인 방법으로 깨는 경우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실패하면 리스크가 너무 컸다. B급 RP던전이 S급으로 변하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아마 잘못 시도했다간 우린 지금쯤 천국에서 수다 떨고 있었을 거다.
―쾅쾅!
그때 체육선생님이 교탁을 다시 내리쳤다.
“지방방송 꺼라.”
아니, 선생님도 헌터 채팅 들리십니까?
난 슬그머니 헌터 채팅에서 시선을 뗐다.
안 그래도 빡친 채 튀어나온 체육선생님을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대신 앞에 놓인 노트를 펼쳤다.
마침 필통도 있었다. 누구 건지 모르지만 땡큐!
[화났냐]
내가 샤프로 빠르게 휘갈긴 글씨를 본 신재헌이 눈썹을 치켜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