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난 건물이 반쯤 부서지고 있는 가운데 비교적 멀쩡한 2층으로 빠르게 뛰어 내려갔다.
“아까 100점 맞은 놈 찾아야 돼!”
분명 수학선생님이 100점 시험지를 보고 분노 수치가 10점 내려갔으니, 아예 시험을 잘 본 학생을 데려다 바치면(?) 분노 수치가 100 아래로 내려갈 가능성이 컸다.
문제는 그놈이 누구냐는 것이었다.
“야, 너 혹시 이번 모의 수학 100점 맞은 애 알아?”
난 학교가 시끄러워져서 그런지 2층에서 웅성거리는 학생들 중 하나를 붙잡고 물었다.
설마 반응 없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 학생은 내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알지. 우리 반에 이번 모의 싹 만점 맞은 애 있는데.”
나이스!
“걔 어딨어? 아니, 이름이 뭐야?”
걔한테 볼 일이 많거든? 걔가 학교를, 아니 우리를 구할 수 있을 것 같거든?
“천재 말이지?”
내 질문에 학생이 물었다. 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 천재.”
“천재지.”
학생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니까 그 천재 이름이 뭐냐고!
“이름이 뭔데?”
“천재라니까.”
설마 이름이 천재?
“김천재 몰라?”
[RP던전 페널티 위기! : 지식 부족]
아니, 모르면 안 될 정도로 유명한 애였어?
“아아아알지.”
난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하긴, 이름이 김천재인데 공부까지 잘하면 나라도 알았을 듯했다.
“걔 혹시 어디 있는지 알아?”
“그것도 몰라?”
[RP던전 페널티 위기! : 지식 부족]
이것도 지식이냐! 인상을 팍 쓴 난 문득 한 장소를 떠올렸다.
“혹시 자습실?”
설마 거기? 내 말에 학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페널티 위기창이 사라졌다.
“그렇지.”
아니, 학교가 박살 나는 와중에 자습실에 박혀 있는, 이름이 김천재에 모의고사 만점인 애가 있다?
시스템, 너무 NPC 막 만드는 거 아니냐?
“고마워!”
하지만 막 만든 덕분에 찾기는 쉬웠다.
난 아까 신의 상점에서 산 물건을 들고 자습실로 부리나케 뛰어갔다.
[외형변경물약 : 원하는 사람의 외형으로 일정 시간 동안 변신할 수 있다.]
시스템창 뜨지 마! 시야 가리지 마! 나 바빠!
***
[자습실 디버프 : 조용히(S) 천천히(S) 볼펜딱딱이지마세요(S) 너는지금꿈을꾸고있지만나는꿈을이루고있다(S)]
사람 신경 긁는 디버프 목록이 지나갔지만 생명에 지장 가는 디버프는 아니었다.
대부분 소리를 못 내게 하는 것들이라 오히려 나한텐 좋았다.
그리고 자습실 안에는 예상대로 한 명밖에 없었다.
―쿠콰콰쾅!
그야 학교가 박살 나고 있는데 누가 자습실에 온단 말인가?
분명 저기 앉아 있는 사람이 김천재다!
네가 필요해!
난 그가 있는 라인으로 다가가다가 당황했다.
“?”
쟤는 왜…… 머리 위에 종이컵을 올리고 있냐?
혹시 공부 따위는 자신에게 너무 하찮은 시련이라서 물컵이라도 올려놓은 건가?
사지에 모래주머니 달고 수련하는 딜러처럼?
―쿵! 쿠쿵!
건물이 무너질 듯 흔들리니 종이컵 안의 물도 흔들렸다.
하지만 김천재는 마치 다른 세계에 있는 것처럼 꿋꿋하게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저―”
내가 말을 걸려는 순간이었다. 천천히 김천재가 나를 돌아보았다.
말 걸면 죽여버리겠다는 시선이었다.
난 뒤통수를 쳐서 기절시키려던 손을 슬며시 내렸다.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헌터의 감이 말하고 있었다.
이놈 건드리면 X된다!
“미안.”
하던 거 하렴. 얼굴 봤으니 됐단다.
나는 두 손을 들어 보이고는 슬며시 들고 있던 약병을 땄다.
[‘외형 변경 물약’ 사용합니다.]
[지정 외모 : 김천재(SS+)]
SS+급이었냐! 건드렸으면 보스몹 하나 더 추가될 뻔했잖아!
[외형이 ‘김천재(SS+)’와 똑같이 변합니다!]
[변신은 30분 지속됩니다.]
30분이면 충분했다. 이제 수학선생님을 진정시키러 나갈 때였다.
자습실 디버프 때문에 천천히 걷던 난, 자습실 버프가 끝나자마자 밖으로 튀어나갔다.
―쿵! 콰콰콰쾃!
그 사이에도 위층은 박살 나고 있었다.
수학선생님! 사랑스러운 제자가 뛰어갑니다! 진정해!
***
힐러와 보조계의 조합은 나쁜 편이 아니었다.
특히 주이안과 소예리처럼 긴 시간 호흡을 맞춰온 조합이라면 생존에는 최적이었다.
문제는 생존에만 최적이라는 점이다.
[분노한 학생부장 선생님(SS+)이 ‘징계’를 가합니다!]
[체육관이 부서졌습니다!]
“이러다가 학교 다 박살 나겠는데.”
소예리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들은 체육관(이었던 것)의 폐허 뒤에 숨어 있었다.
“어디 있냐, 이놈들!”
극대노한 학생부장 선생님은 학교를 다 부술 기세였다.
“그래도 변화가 없는 걸 보니 더 화나시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주이안이 틈으로 학생부장 선생님을 살피며 말했다.
그래도 선생님이라고 존댓말을 써주는 주이안의 인성에 감탄하며 소예리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다고 딜해서 잡는 건 무리예요.”
배경이 아무리 학교라고 해도 던전은 SS급이었다.
게다가 RP던전의 룰을 박살내고 나오게 한 보스 몬스터였으니, 당연히 일반 SS급 보스 몬스터보다 스탯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아까 진짜 죽을 뻔했어.”
소예리의 얼굴엔 웃음기 하나 없었다. 진지한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징계’ 스킬에 스쳤을 뿐인데 체력의 90%가 날아가 버렸다.
아마 주이안이 따라오지 않았다면 체력 저하 페널티로 움직임이 느려져 사망했을 것이다.
“괜찮으십니까?”
주이안의 온화한 목소리도 걱정을 담고 있었다. 소예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데 저 학생부장 선생님은 어떻게 쫓아내지?”
딜로는 안 된다. 그럼 RP던전답게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에서…… 분노한 학생부장 선생님을 따돌리는 방법?
소예리는 주이안을 슬그머니 돌아보았다.
“혹시 학생부장 선생님한테 쫓긴 적 있어요, 주이안 헌터님?”
그 말에 주이안은 정색했다.
“이번이 처음입니다.”
소예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난 맨날 쫓겼는데.”
불량학생과 모범생 파티였다. 이래서야 담 넘기도 무리였다.
“담도 높고.”
SS급 던전답게 담을 넘기 위해선 어떤 결계를 뚫어야 하는 듯했다.
결국 답은 하나였다.
모여라, 지식의 ★!
[소예리(소예리)>>> 학생부장 선생님 따돌리는 법 아는 사람!?]
파티창을 보니 두 사람은 아직 멀쩡했다. 수학선생님을 피해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뜻이리라.
소예리는 주이안은 몰라도 신재헌과 신유리라면 학생부장 따돌리는 법을 잘 알고 있을 것 같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신재헌(신재헌터님)은 채팅불가 지역에 있습니다.]
[신유리(유리유리)는 채팅불가 지역에 있습니다.]
“왜!?”
소예리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지금 나오면 용서해준다!”
그러는 사이 학생부장 선생님은 도망친 학생 붙잡기 전용스킬을 쓰고 있었다.
저기에 낚이는 사람이 있을―
“어쩔 수 없군요.”
모범생 주이안이 폐허 뒤에서 걸어 나갔다.
소예리가 입을 떠억 벌렸다.
이래서 모범생은 안 돼!
***
[신유리(신유리 헌터님) - C급(딜러)
- 디버프 : 조용히(S) 천천히(S) 볼펜딱딱이지마세요(S) 너는지금꿈을꾸고있지만나는꿈을이루고있다(S)]
신유리 헌터님은 어디 자습실에라도 들어가신 모양이다.
주이안이 그렇게 결론 내릴 때쯤 신유리의 디버프가 싹 사라졌다.
자습실에서 나온 게 분명했다.
[소예리(소예리 헌터님)>>> 신유리헌터님 학창시절에 학생부장선생님 따돌려봤어요?]
소예리의 급한 헌터 채팅이 올라왔다.
[…….]
하지만 신유리는 답이 없었다.
주이안의 시선이 신유리의 버프창에 향했다. 설마 아직도?
[신유리(신유리 헌터님) - C급(딜러)
- 버프 : 시너지(A) 물리선생님의 기쁨(S)
- 디버프 : 헌터 채팅 불가]
주이안이 눈을 가늘게 뜨는 사이.
“주이안 헌터님! 지금 나갈 때 아니야! 그거 다 낚시야! 돌아와!”
지금 자수하면 봐준다는 선생님 말씀 믿는 사람이 어딨냐!
소예리는 딱 돌아버릴 것 같았다.
그녀는 주이안을 잡아끌었지만 주이안은 다시 숨을 생각이 없어 보였던 것이다.
수학선생님을 다른 두 헌터가 처리하고 있으니, 이쪽에선 학생부장 선생님을 반드시 처리해야 했다.
RP던전 특성상 수학선생님이 처리되어도 학생부장 선생님이 처리가 안 되면 4교시를 무사히 시작해도 위험할 수 있었다.
자고로 학생부장 선생님이란 수업 중간에도 학생을 부를 수 있는 자들이 아닌가?
그럼 여기서 학생부장과는 담판을 지어야 했다.
[신유리(신유리 헌터님) - C급(딜러)
- 버프 : 시너지(A) 물리선생님의 기쁨(S)
- 디버프 : 헌터 채팅 불가]
별다른 버프가 떠 있지는 않았지만, 주이안은 신유리를 믿었다.
C급이 SS급 던전에서 활약한다고 하면 누구나 비웃겠지만, 주이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두 사람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는 특히 그랬다.
그는 늘 신유리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낸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닥쳤던 수많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모두가 체력이 바닥을 쳐 쓰러져 있을 때에도.
피투성이로 등을 보이며 서 있던 신유리는 어떻게든 정답을 찾아냈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그는 신유리를 믿었다.
‘사람이 할 말은 하고 살아야죠!’
그녀가 그렇게 외쳤던, 그들이 만났던 첫날처럼. 그렇게 당당하게 자신을 다시 만나러 올 거라고.
그는 문득 신유리와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그리고 옅게 웃었다.
“혹시 드디어 돌았나요, 주이안 헌터?”
소예리 헌터는 열심히 그를 잡아끌려고 했다. 주이안은 손을 내저었다.
“정답을 알 것 같습니다.”
“모범생은 학생부장의 정답을 몰라!”
소예리는 그를 부정했다. 그때였다.
“여기 있었구나! 이놈들!”
학생부장 선생님이 눈을 번뜩이며 그들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