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주이안(주이안씨)>>> 그래도 애국가인데 괜찮지 않을까요?]
[신유리(신유리)>>> 음치를 무시하지 마세요]
주이안 씨가 안심시켜주려는 듯 말했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음치는 노래를 가리지 않는다고요!
내가 퍼레진 얼굴로 걸어 나가자 신재헌이 잠시간의 틈을 두고 채팅했다.
[신재헌(신재헌놈)>>>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호감도 1만 남겨 제발]
[신재헌(신재헌놈)>>> 마이너스만 만들지 ㅏㅁ]
급했는지 오타까지 났다. 저놈은 내 노래 실력을 아주 제대로 알고 있으니까 그럴 만도 했다.
“준비됐나요, 학생?”
음악선생님의 날카로운 시선이 내게 향했다.
정신없이 강단에 오른 난 목을 가다듬었다.
“네, 네.”
아뇨, 안 됐어요! 하면 만족도 날아갈 것 같아서 그냥 예스맨 하기로 했다.
“그럼, 시작.”
지휘봉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SS급 던전이라 처음엔 공략이 어렵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 직후엔 RP던전이라서 그래도 RP 정석대로만 깨면 어렵지 않겠구나 했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음악 시험이 나온다고?
[신유리(신유리)>>> 이거 –61점에서 더 내려가면 음악선생님 으악선생님 되는 거죠]
[신재헌(신재헌놈)>>> 네]
[신유리(신유리)>>> 저 지금 진지함 이상하면 바로 말해줘야돼요]
RP던전 파훼를 잘못 하다 나온 보스는 일반적인 보스보다 강력하다.
근데 그 보스가 SS급이면?
그야말로 움직이는 대재앙이 될 터였다.
“흠흠.”
난 목을 가다듬는 척했다.
괜찮아! 27년간 불러온, 아니, 알아온 애국가야!
할 수 있다!
용기를 불어넣은 내가 입을 열었다.
“동↗해↗물과~”
그리고 시작되자마자 음악선생님이 멈칫했다.
“신유리?”
난 재빨리 노래를 멈췄다. 누가 봐도 음악선생님의 표정은 괴상했다.
“아, 목이 좀 잠겼거든요. 흠흠흠!”
난 목을 푸는 척하면서 재빨리 채팅했다.
[신유리(신유리)>>> 뭐야 나 틀렸어요?]
잘 부르지 않았나?
지금 내가 지난 27년간 부른 노래 중 가장 성의를 담아서 부르고 있는데?
하지만 헌터 채팅은 가차 없었다.
[신재헌(신재헌놈)>>> 네]
[소예리(예리언님)>>> 네]
[주이안(주이안씨)>>> 예.]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틀렸다고 할 필요가…… 있지.
난 다시 최대한 기억을 되살려보았다.
그리고 입을 뗐다.
“동해물과―♪”
첫 음절은 다행히 제대로 됐는지, 음악선생님이 눈을 감으며 지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좋았어!
“마르고 닳도록♬”
하지만 점점 지날수록 음악선생님의 얼굴이 마르고 닳기 시작했다.
[놀라운 노래 실력에 음악선생님의 만족도가 급감합니다!]
비꼬지 마! 시스템 네가 불러보라고!
[음악선생님 만족도 : 54/100]
“무궁화 삼천리…….”
얼마 안 남았다! 몇 마디 안 남았다!
알면서도 애국가가 너무 긴 것 같았다. 원래 이렇게 긴 노래였나?
[음악선생님 만족도 : 39/100]
왜 이렇게 빨리 떨어져!
“대한 사람 대한으로↗”
[음악선생님 만족도 : 17/100]
이러다 마이너스 찍겠다! 마음이 급해지자 점점 노래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길이 보전↘하세♬”
[음악선생님 만족도 : 4/100]
살았다! 진짜 보스 잡는 줄 알았다!
[신재헌(신재헌놈) - S급(딜러)
- 버프 : 검의 수호자(A) 뜨거운 피(A) 화염검(SS, 대기 중)]
그리고 시스템창의 신재헌은 이미 전투 준비 중이었다.
검만 뽑으면 되는 상태. 스탠바이 완료.
한 대만 패고 싶다!
“이건…….”
여하튼 공포의 노래 시간이 끝나자 음악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어떻게.”
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본 듯한 그녀의 입에서 찬사가 쏟아져 나왔다.
“음정도 박자도 맞는 게 하나도 없어! 테러블! 이건 내 귀에 대한 실례야!”
[음악선생님의 분노(S)가 가해집니다!]
[–53423]
“썩 들어가! 내 눈에 보이지 마!”
[음악선생님 만족도 : 2/100]
으악! 얼굴만 봐도 빡치나 봐!
난 재빨리 얼굴을 가리고 자리로 돌아왔다.
버프를 끈 신재헌이 감탄했다.
[신재헌(신재헌놈)>>> 와 진짜 음공을 쓰네]
지금 감탄할 때야?
[헌터 주이안(S)이 ‘치료(S)’ 스킬 효과를 부여합니다.]
[체력 +53423]
[현재 체력 : 100%(FULL)]
주이안 씨가 힐을 해 주는 사이, 소예리 헌터가 한숨을 내쉬었다.
[소예리(예리언님)>>> 그래도 살았어요]
진지한 걸 보니 이쪽도 만만찮게 걱정한 모양이었다.
“다음.”
하지만 우리 사정엔 관심 없는 음악선생님은 다음 이름을 곧바로 호명했다.
“신재헌 학생.”
신재헌이면 살았다!
음악이나 미술이나 예체능 쪽은 못하는 게 없었던 신재헌이다.
음악선생님 만족도는 기사회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신재헌은 음악선생님에게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노래를 시작하자마자.
[음악선생님 만족도 : 5/100]
만족도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다행인데 은근히 빡치네?
게다가 음악선생님의 얼굴은 아까 내가 노래를 부를 때와는 달리 천국에서 노니는 얼굴이었다.
[음악선생님 만족도 : 17/100]
아니, 학생 얼굴 보고 저렇게 태세전환이 빨라도 돼?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음악선생님 만족도 : 41/100]
음악선생님의 만족도는 실시간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음악선생님 만족도 : 57/100]
그리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만족도는 신재헌의 노래가 끝나자 89가 되어 있었다.
“허어.”
신재헌의 노래를 즐기던 음악선생님이 눈을 떴다.
그리고 심장을 움켜쥐며 오버를 해댔다.
“완벽해! 음정박자 하나도 어긋나는 것이 없어! 이대로 녹음해서 교과서에 수록해도 되겠어요! 퍼펙트!”
그러면서 엄지까지 척 올려 보였다.
[음악선생님 만족도 : 100/100(MAX!)]
신재헌이 여유롭게 자리로 돌아왔다. 생각해 보면 고등학교 때도 음악선생님이 분노하면 보스가 된다는 것만 빼고 비슷한 상황이었던 것 같긴 했다.
“다음, 주이안!”
그때 음악선생님이 벼락같이 주이안 씨를 불렀다.
[주이안(주이안씨)>>> 다녀오겠습니다.]
온화한 미소가 우리에게 향했다. 우린 모두 안도한 얼굴로 그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주이안 씨 ASMR 너튜브 채널에는 주이안 씨가 노래를 흥얼거리는 ASMR도 있었다.
[주이안 힐링 ASMR 노래 30초 – 헌터덕질모음집]
게시일 : 2년 전
└[댓글] 활명수 : 매일하루에한번씩들으러옵니다 (4분 전)
└[댓글] 살려주세요 : 성지순례왔습니다 S급각성하게해주세요 (17분 전)
N천만 조회 수에 실시간으로 댓글에 성지순례까지 달리는 노래 영상의 주인공이 주이안 씨였으니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음악선생님 만족도 : 100/100(MAX!) 유지 중]
[‘음악선생님의 기쁨’ 버프를 받습니다(파티원 전체 능력치+20%)]
와, 음악선생님 화끈하시네?
이러면 선생님 하나쯤 빡쳐도 잡을 만할 것 같은―
[신유리 제외]
새파란 시스템창을 본 난 순간 뭔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까먹어 버렸다.
“시험 준비하느라 수고했어요. 모두 다음에 봐요.”
음악선생님은 퇴장하면서 날 째려보는 걸 잊지 않았다.
저런 쿨하지 못한 양반을 봤나!
[‘1교시 : 음악’ 클리어했습니다.]
고등학교가 몇 교시까지 있었지? 우리의 표정이 일제히 심각해졌다.
[신유리(신유리)>>> 이거 설마 8교시인가 9교시인가까지 해야 돼?]
[소예리(예리언님)>>> 고등학교가 수업을 여덟 개나 했어요?]
소예리 헌터가 고대의 기억을 되살리려는 때였다.
[2교시 장소로 이동하십시오(시간제한: 00:09:59……).]
[2교시 장소 : B반 교실]
[지각 시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페널티란 단어만큼 무서운 게 없었다.
“같은 반이니까 학생들 따라가면 될 것 같죠?”
소예리 헌터가 슬그머니 옆으로 다가왔다.
교복 차림이 어색한지 치맛단을 살짝 털어본 그녀가 팔짱을 꼈다.
“회춘한 기분인데?”
그러자 주변을 지나가던 학생이 그녀를 이상한 눈으로 흘끗 보고 지나갔다.
[신유리(신유리)>>> 페널티 받을 소리 하지 마십쇼]
[소예리(예리언님)>>> 이이잉, 저 친구도 20년만 지나 보라고 해]
소예리 헌터는 입을 비죽거렸지만 더 말하진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옆으로 주이안 씨가 다가왔다.
단안경은 RP던전 보정을 받았는지 그냥 안경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적응이 안 되는 듯 안경을 살짝 건드려보다가 말했다.
“얼른 가죠.”
교복을 입어도 온화한 미소는 그대로였다.
“기억상 그렇게 멀진 않아요.”
그리고 내 옆으로 신재헌이 따라붙었다. 신재헌은 내가 기억하던 고등학교 시절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달라진 건 S급 외모 보정으로 그때보다 좀 더 키가 크고 보기 좋게 변했다는 것 정도?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고등학교 때보단 잘생겨지지 않았냐?”
그의 자신감이 비대한 발언이 귀를 찔러 왔다. 난 나도 모르게 답했다.
“S급 된다고 얼굴이 재건축되는 게 아니에요, 친구.”
신재헌의 표정이 썩는 걸 보니 고등학교 때랑 닮은 것 같기도 했다.
***
B반은 나와 신재헌의 기억 속 위치에 있었다. 요컨대 멀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신유리(신유리)>>> 근데 이거 설마 진짜 시험 여덟 개 봐야 하는 건 아니겠지?]
그 말에 주이안 씨가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우리 자리는 넷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으므로, 한데 뭉쳐 채팅할 수 있었다.
[주이안(주이안씨)>>> 칠판 옆에 시간표가 붙어 있네요. 4교시까지인 것 같아요.]
“휴.”
그 말에 안도의 한숨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시간표
- 1교시 : 음악
- 2교시 : XX
- 3교시 : XX
- 4교시 : XX]
쪼잔하게도 2교시가 뭔지 나오진 않았지만 곧 밝혀질 터였다.
[신재헌(신재헌놈)>>> 4교시만 버티면 됩니다 여러분]
[신유리(신유리)>>> 선생님 빡치게만 하지 말자]
[소예리(예리언님)>>> 이 난이도로만 계속된다면 어렵진 않을 것 같아요~]
[주이안(주이안씨)>>>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다행이에요.]
그렇게 우리가 한마디씩 하는 순간이었다.
[2교시 : ‘물리’에 진입합니다.]
시스템창이 떴다. 헌터 채팅이 잠시 멎었다.
그러다가 우르르 올라왔다.
[신재헌(신재헌놈)>>> 뭐?]
[신유리(신유리)>>> 예?]
[주이안(주이안씨)>>> 물리……?]
[소예리(예리언님)>>> 물……리……?]
우리의 표정이 일제히 심각해졌다.
우리…… 넷 다 문과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