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인간의 힘과, 신의 힘이 함께하고 있으니.”
―탕!
그가 다시 검을 내리쳤다. 신의 힘이란 신시안 교의 힘을 말하는 것일 테고, 인간의 힘이라고 할 때에는 신재헌은 마탑에게도 시선을 주고 있었다.
결국 세 세력이 힘을 합쳤다는 걸 보여주는 셈이었다.
그 말에 잠시 조용해졌던 마탑과 신전마저 환호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있어요. 다른 게이트 정리도 부탁할게요.”
주이안 헌터와 소예리 헌터도 나란히 인사했다.
주이안 씨야 원래 저랬다 쳐도 소예리 헌터는 진짜…… 적응 안 된다…….
“그럼.”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갑시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버프 6분 남았어요 빨리빨리]
신재헌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게이트 근처의 영역에 들어서자.
[던전 게이트 입장 : 3인 제한]
[입장 자격 확인 중…….]
[1.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헌터 신재헌(S))
2.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헌터 주이안(S))
3. 클로나 에이센(헌터 소예리(S))]
그리고.
[…….]
다른 사람들의 시스템창은 조용하겠지만 내 시스템창엔 분명히 세 줄로 안내가 떴다.
[‘마법의 신분 증명패’ 효과가 발동됩니다.]
[게이트 입장 조건을 무시합니다.]
[‘마법의 신분 증명패’가 사라졌습니다.]
좋았어!
[입장 자격 확인되었습니다.]
소예리 헌터의 방구석 1열 효과에 마지막으로 보인 건, 신재헌이 자신 있게 웃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이내.
[던전 ‘어릴 적의 추억(SS)’ 입장합니다.]
들어왔다! 이제 시너지 버프가 켜질 차례―
[RP던전 제한이 적용됩니다.]
예? 또???
RP 안의 RP? 이게 무슨 마트료시카야?
[RP던전 배경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할 경우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하지만 그 안내가 끝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난 시스템창을 확인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 / 25세, 딜러(C)
체력 : 326201 (+45000)
근력 : 5627
마력 : 8505 (+400)
민첩 : 4021 (+5)
지구력 : 2164 (+200)
방어력 : 2212 (+5)
특수 : 도금 목걸이(C, ‘헌터 신재헌(S)’ 애장품 보너스 : 획득 경험치 +50%)]
내가 일일퀘스트를 깨서 꾸준히 올려놓은 체력도, 다른 능력치도 그대로였다.
그럼 능력치를 빼앗는 부류의 RP던전이 아니란 뜻인데?
이건 그나마 희망찬 소식이었다.
그럼 대체 어떤 배경인지나 볼까?
[RP던전 진입 완료.]
시스템창이 뜨자마자 난 눈을 떴다.
그리고 익숙하지만 오랜만에 보는…… 칠판과 마주했다.
어?
[신유리(신유리)>>> 여기 우리 학교인데?]
여긴 다름 아닌, 나와 신재헌이 다녔던 고등학교였다.
나도 모르게 친 헌터 채팅은 다행히도 RP던전 제한에 막히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RP던전에 들어오면서 쪼꼬미 물약 버프가 풀렸는지, 난 원래 모습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소예리(예리언님)>>> 와~ 고등학교 오랜만이야~]
[주이안(주이안씨)>>> 그래도 SS급 던전을 딜링하는 것보다는 RP던전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주이안 씨의 말대로 이건 희망찬 일이긴 했다.
내가 S급이 아닌 이상 아무리 시너지 스킬이 있어도 위험부담이 있었던 건 사실이니까.
[신유리(신유리)>>> 설마 학교 배경에서 사람들이 서로 죽고 죽이겠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SS급 던전이니 뭔가 장치는 있을 게 분명했다.
[신재헌(신재헌놈)>>> 우리가 들어오길 잘한 것 같네요]
그건 그랬다.
만일 다른 마탑 2인자나 대사제, 황성기사단장 같은 사람들이 들어왔으면 어떻게 됐겠는가?
그들이 난생처음 보는 이세계의 고등학교 RP를 플레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무리였다.
[소예리(예리언님)>>> 교복이 얼마만이야!]
SS급 던전을 딜로 안 밀어도 된다는 것에 안심했는지, 소예리 헌터가 들뜬 게 보였다.
우리가 있는 곳은 웬 강당형으로 생긴 교실이었는데, 우린 원형으로 놓인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학생들도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우리 학교에 이런 배경이면…….
안심하고 들뜨는 것도 잠깐, 난 본능적인 불길함을 느꼈다.
새파란 시스템창이 떴다.
[1교시 시험 시간입니다.]
시험?
[선생님을 만족시키십시오.]
[선생님의 만족도가 0/100 이하로 내려가면, 선생님이 ‘불만족’ 상태에 빠집니다.]
[‘불만족’ 상태의 선생님은 보스 몬스터로 변화합니다.]
별의별 RP던전을 다 해봤으니 이런 구조는 익숙했다. 하지만 사소한 문제가 한 가지 있었다.
―또각, 또각.
원형으로 배치된 의자 사이, 복도 같은 공간으로 걸어 들어오는 선생님이 보였다.
용수철 이종사촌처럼 롤에 힘을 쓴 머리하며, 저 높은 하이힐.
그리고 꼭 스타킹과 깔맞춤을 한 듯한 저 네일아트까지!
[신유리(신유리)>>> 들어오는 선생님 너무 익숙한데]
안 되는데? 시험이라며? 내 얼굴이 새파래졌다.
[소예리(예리언님)>>> 오, 아는 분이에요? 누군데요?]
[주이안(주이안씨)>>> 이런 종류의 RP던전은 우리 기억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니, 기억나는 선생님이 있다면 희소식이네요.]
희소식 아닐걸? 아닐걸요?
주이안 씨는 그렇게 말했지만 옆의 신재헌을 돌아보니, 이쪽도 얼굴이 새하얘져 있었다.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이내, 우리 앞 강단에 선생님의 발걸음이 멎었다.
―쿵!
[1교시는 음악 시험 시간입니다.]
새파란 시스템창이 떴다.
[소예리(예리언님)>>> 와, 음악!]
소예리 헌터는 기쁘겠지만 난 그렇지 않았다.
[신유리(신유리)>>> 아니 음악교과서 ㅁ 지워서 으악으로 바꿔둔 게 10년 전인데]
하필 음악이야! 차라리 체육 시험 치게 해달라고! 난 머리를 싸맸다.
그제야 소예리 헌터가 멈칫했다.
[소예리(예리언님)>>> 맞다, 신유리 헌터님 노래 못 부른다면서요]
[주이안(주이안씨)>>> 설마, 음악 시험이라는 게…….]
주이안 씨도 곧 상황을 파악했는지 얼굴이 하얘졌다.
난 마지막 희망을 잡고 물었다.
[신유리(신유리)>>> 소예리 헌터님 혹시 음감 보정 같은 스킬은 없나요?]
못 불러도 보정을 잘 때리면 되지 않을까?
[소예리(예리언님)>>> 그런 건 없는뎅]
하지만 만능 보조계 헌터라도 없는 게 있는 법이었다.
아으으윽!
헌터 채팅이 난리 난 가운데 근엄한 얼굴을 한 음악선생님의 시선이 우리 사이로 내리꽂혔다.
[음악 실기 시험 시간입니다.]
[가창력을 뽐내어 선생님을 만족시키세요.]
이런 X…….
[음악선생님 만족도 : 50/100]
[0 이하로 내려갈 시 ‘분노한 음악선생님(SS)’으로 진화합니다!]
왜 시작부터 50이야!
이왕이면 하해와 같은 스승의 마음으로 100부터 시작해 달라고!
내가 머리를 싸매든 말든 RP던전은 시작되었다.
“그럼 이름 순서대로 시험 시작하도록 할게. 어디 보자…….”
음악선생님의 보랏빛 네일아트가 반짝이는 우아한 손끝이 출석부를 훑었다.
이름 순서? 가나다순이겠지? 그렇다면 처음은 당연히…….
“소예리, 앞으로.”
음악선생님의 우아한 목소리가 울렸다.
다른 학생 모습의 개체들은 모두 그냥 장식으로 있는 건지, 시험을 보는 건 우리뿐이었다.
[신재헌(신재헌놈)>>> 휴]
[신유리(신유리)>>> 그래도 처음이 소예리 헌터라서 다행이네요]
[주이안(주이안씨)>>> 응원하겠습니다.]
인싸 하면 소예리, 소예리 하면 인싸 아닌가? 노래방에서도 마이크를 놓는 법이 없는 그녀였다.
물론 노래도 흥겹게 잘 부르는 사람이었다.
“그럼, 시작.”
음악선생님의 우아한 손끝에서 지휘봉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예리 헌터는 움찔했다.
[소예리(예리언님)>>> 근데 동창 헌터님들, 혹시 음악시험 무슨 노래였는지 기억나요?]
[신유리(신유리)>>> 아……니……요?]
기억나겠습니까? 그 순간 우리의 얼굴이 다시 파래졌다.
기억 안 나는 노래 나오면 누가 나가든 만족도 바닥 찍는 거 아니야?
[소예리(예리언님)>>> 고등학교 다닌 게 20년 전인뎅]
[주이안(주이안씨)>>> 아…….]
주이안 씨의 탄식과 함께 신재헌의 채팅이 동시에 올라왔다.
[신재헌(신재헌놈)>>> 음악선생님이면 음공 쓰나?]
벌써 음악선생님 잡을 생각 하지 마!
“소예리 학생?”
그때 음악선생님의 눈이 번뜩였다.
그러면서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이번 가창 시험곡은…….]
잠시간의 침묵. 그리고.
[‘애국가’입니다.]
그 시스템창이 뜨자마자 우린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아무리 글로벌하게 논다지만 애국가를 까먹을 리가 없었다.
“흠흠.”
얼굴이 밝아진 소예리 헌터가 입을 열었다.
“동해물과―♪”
[소예리(예리언님)>>> 모르는 노래 나오는 줄 알고 놀랐잖아~]
소예리 헌터는 채팅하면서도 여유롭게 노래를 소화해냈다.
음악선생님은 그럭저럭 만족스러운지, 살짝 웃는 얼굴로 지휘봉을 흔들고 있었다.
“우리나라 만세♩”
소예리 헌터의 우아한 목소리가 강당, 아니 음악실을 울렸다.
그리고 마침내.
“……길이 보전하세♪”
소예리 헌터의 시험이 끝났다. 그러자 음악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군, 괜찮아. 다음.”
[음악선생님의 만족도가 10 상승합니다!]
[현재 음악선생님 만족도 : 60/100]
소예리 헌터가 눈을 찡긋했다.
[소예리(예리언님)>>> 클로나로 있을 땐 노래 부를 일 없었는데, 그래도 부르니까 좋다~]
여유롭게 강단을 내려오는 그녀와는 달리 난 다가올 미래를 직감했다.
가나다순으로 출석부가 쓰여 있으면? 이 다음 순서는?
“신유리, 앞으로.”
으아아악!
아무리 애국가라도 노래는 노래였다.
그리고 난, 치명적인 음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