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협동연구를 하되, 연구 방향은 마탑에서 이끄는 것으로 하지.”
그가 말을 맺자 황성마법사들의 표정이 좀 구겨졌다.
반면 마탑은 음소거 상태로 환호를 내지르고 있었다.
게이트 연구를 어지간히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만일 게이트에서 마법을 쓰는 몬스터가 나온다면, 공격 마법 연구는 저희가…….”
황성마법사장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말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황성 마법사들은 공격 마법을 연구하는 자들이 더 많고 마탑 마법사들은 마법 자연현상을 연구하는 자들이 더 많다고 했다.
“그것쯤이야.”
그 덕인지 마탑 쪽에서는 곧바로 수긍했다.
그러자 황성 마법사들의 얼굴도 활짝 폈다.
나름 윈윈으로 결과가 나온 듯했다.
“그럼 신전 쪽에서는?”
신재헌이 주이안 씨를 돌아보았다.
이쪽은 마법사가 없기 때문인지 지금까지 조용히 있었다.
주이안 씨는 신재헌과 시선이 마주치자, 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쯤 한국에서 너튜브 ‘주이안 ASMR’ 채널을 운영하는 사람은 아마 X줄이 타고 있을 것이다.
신규 영상 업데이트를 못 하고 있으니까.
원망하려거든 우리를 여기 처넣은 헌터협회 놈들을 탓하렴!
“저희 신시안 교는 생명 보호를 가장 우선시합니다.”
그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회담장을 울렸다.
“만일 게이트가 관리되지 못해 몬스터가 게이트 밖으로 나오게 된다면,”
―쿵!
그가 들고 있던 길고 화려한 봉으로 바닥을 내려쳤다.
“신시안의 검이 가장 먼저 그들을 처단하길 원합니다.”
한마디로 교단의 성기사들은 게이트 바깥을 주로 지키겠다는 의미였다.
신재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게이트 안은 이쪽에서 맡지.”
“물론 치료에 필요한 사제들은 게이트 내부로도 지원하겠습니다.”
원래 신전과 황가는 몬스터 처리를 위해 협력을 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협의가 쉬웠다.
“그럼 수호기사단장 에델바이스 백작.”
분위기 좋은데 갑자기 신재헌이 날 불렀다.
그의 뒤에서 회담을 지켜보던 귀족들이 일제히 날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아니, 내가 탱커도 아닌데 이렇게 주의를 끈다고?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왜?]
순간 당황한 난 헌터 채팅으로 답해 버렸다. 그러다가 뒤늦게 답했다.
“예.”
“보고받은 바로는 게이트 관리가 가장 우수한 영지가 바로 에델바이스라고 들었다. 근처에서 다른 귀족들과 함께 연합전선도 꾸렸다지.”
그 말에 난 고개를 숙였다.
“부족하지만 그렇게 대응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귀족들이 웅성거리는 게 느껴졌다.
“연합전선?”
“병력을 따로 모았다곤 들었는데……, 폐하께 보고는 드린 건가?”
“보고를 드리지 않았다면…… 흐음.”
그들의 눈이 빛나는 것 같았다. 왜? 이걸로 건수 잡게?
“오직 몬스터와 게이트에 대응하기 위한 모임일 뿐입니다.”
어림도 없지! 난 곧바로 못 박았다.
신재헌 역시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알고 있다. 이미 모임을 만들 때부터 보고하였으니.”
그 말에 귀족들은 좀 아쉬워하는 얼굴이 되었다.
애들아, 속을 좀 감춰주지 않겠니?
“그런데 그 연합전선보다도, 수호기사단장이라는 직위를 가지게 된 만큼 에델바이스의 게이트 관리 방법을 제국 전체에 전했으면 좋겠군.”
그때 신재헌이 긴 말을 늘어놓았다.
“관리 방법이라시면…….”
난 멈칫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나보고 설마 뭐 만들라는 거 아니죠? 그죠?]
신재헌의 시선이 아주 살짝 구석으로 향하는 게 보였다.
저놈 분명 헌터 채팅 봤다!
“게이트 대응 매뉴얼 초안을 금주까지 만들어 보고하도록.”
보고도 저런 말을 하는 거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바로 그겁니다]
난 그를 째려볼 뻔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아니 왜요]
나 이런 거 못 한다고! 서류 작업 질색이라고!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저 영지 서류작업도 꽈배기 되면서 하고 있어요 자비좀]
한국에서도 나와 관련된 서류 정리는 주이안 씨가 도맡아 했었다.
나한테 가르쳐주려고 했지만, 내가 손대면 작은 일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곤 했기 때문에.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근데 만들긴 만들어야 돼요]
그건 그렇긴 한데! 내가 속으로 머리를 싸맬 때였다.
헌터 채팅창에 천사가 강림했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도와드릴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것 참 안심되긴 하는데……. 교황이 직접 오긴 힘들 거고, 헌터 채팅으로 매뉴얼 만드는 걸 어떻게 도와줘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신재헌이 철회하지 않는 한 깔 수는 없었다.
서류가 아무리 싫어도 RP던전 페널티보다 싫을 리가 없었다.
신재헌놈, 두고 보자!
“그럼 좀 더 긴밀한 협의가 필요하겠군. 식사 후에 하는 게 좋겠어.”
그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원래 귀족들의 방식이 이러했다.
대략적인 이야기는 다 같이 하고 나중에 세부적인 내용을 정하는 것.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연 회 만 세!]
우리 넷 중에 인싸 소예리 헌터만 신난 가운데, 하나둘씩 연회용 홀로 자리를 옮겼다.
***
간단한 식사가 준비된 홀.
한국으로 치자면 뷔페와 비슷한 분위기였지만 여기서 진짜 식사를 하는 자는 없었다.
대신 웅성거리는 귀족들이 대부분이었다.
“마탑과 신전과 이런 식으로 협력하는 건 거의 수십 년 만이 아니오?”
“잘될 수 있을지…….”
“아직까지 분위기가 살벌하지 않습니까.”
신재헌도 그 말을 들었는지 채팅이 득달같이 올라왔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우리 살벌하다는데요?]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이제 좀 친한 척해도 되는데 너무 뻣뻣하시네]
주이안 씨 놀리기가 시작되었다.
불쌍한 우리 힐링계 주이안 씨.
서류 정리도 도와주기로 했는데 너무 놀리는 것 같아서, 이번엔 안 끼어들기로 했다.
“…….”
헌챗을 보다가 주이안 씨를 돌아보니 그는 조금 곤란한 얼굴이었다.
그것도 헌터팀으로 오랫동안 함께한 우리나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변화였다.
그러다가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더니, 곧 날카로운 눈으로 황가 쪽을 살피기 시작했다.
저건…….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저번에는 이단자 보듯 하시더니 오늘은 다르시네]
그 말에 난 참지 못하고 결국 끼어들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연습했어요?]
채팅창이 웃음소리로 뒤덮였다. 주이안 씨의 얼굴이 다시 곤란함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몇 초 후, 그의 채팅이 슬그머니 올라왔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조금…….]
진짜였냐!
헌터 채팅이 잠시 침묵에 휩싸였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이래서 순수한 사람은 놀릴 수가 없어]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이건 우리가 잘못했다]
놀리다가 정화당한 우리는 주이안 씨 놀리기를 그만두었다.
“그래도 교황 예하께서는 분위기가 조금 부드러워지신 것 같으니…….”
“그래도 아직 황가 쪽을 예리하게 주시하고 계십니다.”
“게이트 사태가 빨리 종식되었으면 좋겠군요.”
귀족들의 반응은 곧바로 돌아왔다.
난 분명 보았다. 그 말에 주이안 씨가…….
아주 잠깐, 뿌듯한 미소를 짓는 것을.
이거 헌챗에 올리면 10년 놀림감이다!
본능이 외쳤지만 난 주이안 씨의 미래를 위해 참아주기로 했다.
어휴, 귀여워.
***
본격적으로 세 세력이 힘을 합치기 시작하자 게이트를 물리치는 건 순식간이었다.
딜러, 힐러, 마법사에 더불어 성기사 쪽에 자주 보이는 탱커 클래스까지 더해지자 게이트 투입조의 안정성이 확 올라간 덕이었다.
당연히 인력 부족도 줄어들었다.
보조계끼리 가서 낮은 등급 게이트에서 얼려놓고 나무작대기로 돌려 깎을 일도 없고, 딜러끼리 죽네 사네 하면서 딜생딜사할 일도 없어졌으니까.
물론 이것도 지휘조를 구성하는 내가 게이트 대응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여기 사람들이 나의 노고를 알아줄 리가 없었다.
“와, 업무량 장난 아닌데.”
난 에델바이스 가의 업무는 거의 집사 헬렌에게 전담시켰다.
다행인 건 신재헌이 능력 없는 사람을 내게 붙여주지 않았다는 거?
집사 헬렌은 아주 잠깐 곤란해했을 뿐, 곧 에델바이스 가의 업무를 아주 확 줄여서 최종결재가 필요한 서류만 내게로 가져왔다.
그동안 난 게이트 조 구성에 힘썼다.
[C게이트 전담조1.
- 신전 소속 사제 말레티
- 제3황성기사단 기사 유안
- 마탑 소속 마법사 이리아]
이런 식으로 아예 각 계열의 헌터, 아니 병력을 조로 붙여 놓는 일이었다.
물론 그건 헌터팀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그들을 직접 보고 헌터 랭크를 파악해준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B급 게이트부터는 탱커가 들어가야 할 것 같고.”
우리야 SS급 게이트도 탱커 없이 깼지만 얘들은 게이트가 익숙하지 않으니까.
난 그렇게 깃펜으로 조를 구성하다가 문득 인상을 썼다.
―우둑!
슬슬 힘 조절이 안 될 스탯이 돼서 그런가, 요즘 들어 깃펜이 자주 부러졌다.
난 부러진 펜을 쥔 채 고민했다.
“이렇게 일이 많아서 매뉴얼은 언제 쓰지?”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매뉴얼 도와주신다던 주이안씨 구합니다]
채팅에 답은 바로 왔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어떤 것을 도와드릴까요?]
그렇게 인포메이션 같은 말투로 나오셔야겠습니까?
내가 잠시 당황할 때였다.
―쿵쿵.
웬 노크 소리가 방을 울렸다. 노크를 하는 건 좋은데 좀 어이가 없었다.
“뭐 하는 놈이야?”
들려온 쪽이 창문 방향이기 때문이었다.
무심코 돌아본 난 입을 떠억 벌렸다.
저게 미쳤나 봐! 남들이 보면 어쩌려고!
―벌컥!
난 더 생각할 틈도 없이 창문을 열어젖혔다.
“후우.”
그러자 손을 털고 들어오는 건 다름 아닌 신재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