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아무리 시스템이 불친절하다지만 시스템은 ‘정답 없는’ 것은 만들어두지 않았다.
그건 게이트 사태 이래 불변의 법칙이었다.
“일단 들고 있어 보는 게 좋겠어요. 감정을 계속해보니까 뭐가 나오긴 하는데 이 이상으로 나올 것 같지는 않거든요.”
소예리 헌터는 신기한 물건 보는 눈으로 심장을 보다가 말했다.
“‘뒤틀린 나무가 살아온 시간이 담겨 있다’…… 이렇게만 나와요.”
시간이 담겨 있다?
한 3초 심각해졌던 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나중에 감정해보죠.”
원래 딜러는 이런 복잡한 거 생각하는 거 아니야!
내 말에 소예리 헌터가 웃었다.
“그럼 이거 내가 가져가도 돼요?”
“네, 가져가세요.”
그거 던져서 딜 넣을 것도 아닌데, 뭐.
“나중에 어디 쓰일 데 있으면 꼭 알려주고요.”
“OK~”
소예리 헌터가 인벤토리에 아이템을 던져 넣었다.
그러면서 물었다.
“온 김에 도와줄 게이트는 없어요?”
어우. 난 그 말에 황송하게 답했다.
“많죠.”
***
S급 헌터의 힘은 굉장했다!
소예리 헌터가 돌아가는 길에 발견했다는 핑계로 처리해준 던전은 B급 세 개였다.
그 덕에 우리 영지의 기사들은 한시름 덜게 되었다.
“급한 게이트는 어느 정도 처리된 것 같고, 앞으로 열리는 게이트는 좀 더 체계적으로 대응할 생각이야.”
난 소예리 헌터가 만들어준 시간을 허투루 보낼 생각은 없었다.
집사 헬렌은 내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일단 새로 훈련받는 병사들은 어디에 있지?”
“지금 기사관 훈련장에서 훈련 중입니다.”
헬렌이 곧바로 답했다. 기사관 훈련장이면 여기서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난 창밖으로 흘끗 그곳을 내려다보았다.
[D] [E] [E] [D]
기사가 되기엔 아직 멀어 보이는 꼬꼬마 딜러들의 헌터 랭크가 보였다.
심지어 거기 섞여 검을 휘두르는 자들 중에는 엉뚱하게도 클래스 마크가 + 모양인 사람도 있었다.
힐러라는 소리였다.
힐러가 왜 저기 있냐?
“저기 앞에서 네 번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에 서 있는 병사.”
내 말에 헬렌이 나와 같은 곳을 내려다보았다.
“예.”
“저 병사는 의무반으로 보내. 거기가 적성에 더 잘 맞을 거야.”
내 말에 헬렌이 눈을 깜빡였다.
“그걸……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으십니까?”
[RP던전 페널티 위기! : 개연성 부족]
으으악!
세니아에게는 안타깝게도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없었던 모양이다.
아니, 정확히는 딜러는 알아보는데 힐러는 알아보는 눈이 없었던 듯했다.
당연하지! 본인이 딜러인데! 으아악! 잘못 나불거렸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님들 힐러 특징 빨리 하나둘셋 나 급함 페널티직전]
“음…….”
난 고심하는 척하면서 헌터 채팅을 기다렸다.
여러분, 제가 지금 급하거든요?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힐을 잘한다?]
그거야 당연한 거고!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아니 딱 보기에 뭔가 힐러 관상인 사람들 있잖아요]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주이안 헌터 말이죠~]
맞는데! 맞긴 한데! 잠깐, 주이안 헌터 특징?
1번. 잘생겼다. 2번. 사람 도와주는 거 좋아한다.
이런 거 댔다간 페널티 각이었다.
그럼 3번이다!
“딱 보니 검에 살기가 없잖아.”
살기가 얼마나 없으면 주이안 헌터 스킬에 딜링기가 하나도 없겠냐?
그나마 검사 같은 이유를 대자, 드디어 페널티 위기 경고창이 사라졌다.
헬렌은 감탄하는 눈으로 나와 문제의 병사를 번갈아 보았다.
“과연 그렇군요.”
그렇긴 개뿔!
검 휘두르는 게 좀 매가리가 없다 뿐이지, 훈련하는 데에서 살기를 보이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 사이 뒤늦게 신재헌이 채팅을 올렸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힐러 관상은 모르겠고 목소리들이 조곤조곤하죠]
넌 이 거리에서 목소리가 들리겠냐? 하여간 인생에 도움 안 되는 놈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힐러 본인이 등판했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힐러하고 목소리는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제가 본 힐러는 그랬는데]
네가 본 힐러라고 해봐야 주이안 씨 하나 아니냐?
“저 병사는 의무반으로 보내보겠습니다.”
아무튼 다행히 RP던전 페널티 위기는 지났으니 다행이었다.
헬렌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저 병사 중에 좀 훈련이 된 병사들하고 기사 한 명을 팀으로 짜서, 게이트에 투입하자.”
이제는 더 이상 A급 세 명을 D급 게이트에 넣는 등의 인력 낭비를 해선 곤란했다.
지금까지야 A급 기사들도 게이트가 낯설 테니 그렇게 해 줬지만, 지금부터는 곤란했다.
내 기억상 게이트가 한 번 우후죽순 생겼다가 잠시 소강상태가 오면, 그 후에 더 많은 게이트가 생겨났었으니까.
“그리고 나도 직접 참전할 거야.”
“예?”
내 말에 헬렌이 움찔했다.
“하지만 주인님께서 직접 나서시는 건―”
“기사들이 위험한 곳에 나서는데 나만 후방에 있을 순 없잖아. 게다가 게이트에 직접 가 봐야 일선 기사들을 적절한 데에 분배할 수 있을 거야.”
이것저것 말을 갖다 붙였지만 사실 본심은 하나였다.
나도 스펙업 해야 하거든?
“……알겠습니다.”
하지만 내 본심을 알 리 없는 헬렌은 감동의 도가니탕에서 헤엄치며 물러갔다.
***
그렇게 사흘쯤 흘렀을까.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 / 25세, 딜러(C)
체력 : 297809 (+45000)
근력 : 5627
마력 : 8505 (+400)
민첩 : 4021 (+5)
지구력 : 2164 (+200)
방어력 : 2212 (+5)
특수 : 도금 목걸이(C, ‘헌터 신재헌(S)’ 애장품 보너스 : 획득 경험치 +50%)]
난 좀 더 튼튼한 C급 딜러가 되었다.
“보통 B급 체력이 얼마 정도더라.”
내 기억상 B급 딜러 정도면 체력 20만은 기본적으로 넘었다.
근데 난 C급 주제에 이미 23만이었다. 그런데도 아직 B급 히든 퀘스트를 못 찾은 것이다.
물론 이게 일반적인 경우고, 랭크업은 전 세계적으로도 희귀 케이스지만.
난 이대로 C급에 있을 순 없었다.
‘간절한 게 있어야 돼요.’
신재헌이 이야기했던 게 떠올랐다.
“아니, 헌터협회 뚝배기 깨는 거 빼고 뭐가 더 간절해야 해?”
혼자 집무실에 있는 덕에 불만은 마음껏 토로할 수 있었다.
이럴 때 다 같이 있었으면 답답하다고 술이라도 까는 건데!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좀 씁쓸했다.
이걸 얼른 클리어해야 다시 별장도 놀러 가고 마음껏 수다도 떨고 하지 않겠는가?
“헌터협회장 머리고 뭐고…….”
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냥 얼른, 무사히 클리어하고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난 상태창을 다시 보았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 / 25세, 딜러(C)]
그러려면 이 헌터 랭크로는 절대 불가능했다.
[신의 상점 : Lv.2]
[Coin : 30272]
게이트 덕에 쏠쏠하게 모이는 신의 상점 코인으로 스킬 열쇠를 사 봤지만, 얻은 스킬은 내 주력 스킬과 거리가 먼 것들뿐이었다.
[휴식(B)
- 앉거나 누워 있을 때 빠르게 체력을 회복]
[시너지(A)
- 3년 이상 헌터 채팅에서 함께했던 헌터와 게이트 입장 시, 파티 전원 데미지 보너스 +15%(2명 이상 시, 1명당 +5% 증가)]
심지어 시너지 스킬은 이 L급 RP던전 자체엔 적용되지 않는지 OFF 상태였다.
아무래도 이 던전 내에서 또 같은 게이트를 들어가야 발동되는 듯했다.
“이대로 있으면 여기서 늙어 죽을 게 틀림없어.”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보통 RP던전의 시간은 지구의 시간보다 훨씬 빨리 흘러간다.
우리가 여기 1년 있는다고 한국에서 1년이 지나진 않을 거란 소리다.
길어도 몇 주겠지.
하지만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기자들은 뭐 같은 기사를 써댈 게 분명했다.
[L급 던전 입장한 신유리 헌터팀, 2주째 ‘행방불명’]
[신유리 헌터팀도 L급 던전은 무리였나]
그딴 기사가 올라올 생각을 하니 열이 올랐다.
무엇보다.
‘신재헌!’
저번에 신재헌이 다쳤던 것도 마음에 걸렸다.
점점 강한 게이트가 출몰할 거고, 거기서 트롤링 안 하려면 빨리 랭크업을 해야 했다.
우린 원래 2딜러로 탱커를 대신하는 파티였으니, 내가 구멍이 나면 날수록 굴러가기가 힘들었다.
“좋아.”
랭크업을 못 하면?
S급 같은 C랭크가 되면 된다.
깡스탯으로 민다는 이야기 들어 봤나, 응?
한 번 팰 거 두 번 패고, 두 번 팰 거 네 번 패면 언젠가 몬스터는 뒈지게 되어 있다고!
딜러다운 생각을 하며 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아니, 박차고 나가려고 했다.
패기 있게 나서려는 내 앞에 헬렌이 초대장만 내밀지 않았어도 그랬을 것이다.
[게이트 대응 귀족 연합 ‘미야’에서 에델바이스 백작을 초대합니다.]
이건 또 뭐야? 여기도 드디어 길드 만드니?
나 길드 싫은데? 너희도 게이트 부산물 수수료 뗄 거니?
온갖 생각은 발신인의 이름을 보고 멎었다.
[레디드 드 바이야]
아니, 이 의욕만땅 인간이 또 뭘 하려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