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아니면 작위라도 약속받았대? 그가 인상을 구겼다.
“이거 조사한 놈 데려와.”
서제국의 첩자가 감히! 그가 종이를 구겨버리며 말했다.
“하, 하지만 현 서제국 황제의 숙부 키엘라가 처형당한 건 사실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뒤를 따르는 귀족들도―”
“그야 처형은 어떻게든 했겠지. 근데 검 세 번이 뭐가 어쩌고 어째?”
그가 얼굴을 구겼다.
“누가 보면 서제국 황제 자서전 써오라고 한 줄 알겠다? 어?”
그의 말에 부관이 입을 벙긋거렸다. 아니, 진짠데…….
물론 ‘두뇌가 우수한’ 파리스는 부관의 말을 더 들을 생각이 없었다.
“제까짓 게 이딴 헛소문을 뿌려 봐야 내 손바닥 안이지!”
능력에 비해 간이 비대한 그는 코웃음을 쳤다.
“그놈은 전에도 내 앞에서 이렇게 센 척했어.”
그래 놓고 뒤에서는 동제국의 화를 풀어주려 애썼다.
‘그러게 왜 그러셨습니까.’
그렇게 물어보면 아이반은 비굴한 얼굴로 이렇게 답했다.
‘요즘 귀족들이 동제국에 대한 반감이 심해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서제국 황실의 입장은 분명합니다. 저희는 더 이상 동제국과 반목하길 원치 않고……’
그러면서 줄줄이 사과를 늘어놓더니 선물까지 쥐여 주었다.
“흥.”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이 컸다. 왜냐면.
[여전히 마탑과 신전, 황가는 서로 첨예하게 대립 중]
자료도 그렇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동제국보다 당연히 약할 수밖에 없지.
“아마 곧 연락이 올 거야. 제발 좀 살려달라고.”
이번엔 심지어 서제국엔 재앙이 터진 상태였다.
그 상황에서도 세 세력은 힘을 합칠 줄 모르고 각 지역을 뛰어다니고 있다고 했다.
“뭣보다 그 ‘재앙’을 가장 많이 없애는 쪽이 서제국 내에서 세력을 확보할 텐데, 뒤로라도 도와달라고 연락하겠지.”
그는 답지 않게 괜찮은 결론을 내렸으나, 그가 모르는 한 가지 변수가 있었다.
서제국의 마탑주와 황제와 교황이 앞으론 반목할 일이 없으리란 점.
“가자!”
―덜컹!
파리스가 우렁찬 목소리로 마차를 출발시켰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 변수는 파리스에게 놀라운 소식을 전해 왔다.
“전, 전하! 서제국이 성벽이란 성벽은 죄다 보강하고 있다고 합니다!”
“뭔 헛소리야?”
급히 달려온 부관은 파리스에게 어이없는 소식을 전했다.
“서로 싸우느라 돈도 없는 놈들이 재료가 어디서 튀어나와서 성벽을 보강해?”
그 말에 부관이 답했다.
“그 재앙이…….”
재앙이 뭐? 파리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게이트인가 뭔가 하는 그거?”
“예! 그 게이트의 부산물이란 것들로 성벽을 강화하고 있다고 합니다!”
“뭐?”
파리스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부산물이 뭔데?
하지만 다음 부관의 말에는 파리스의 머릿속이 새하얘져 버렸다.
“그 강도가 낙뢰 마법도 튕겨낼 정도라고 합니다!”
“그게 말이 돼!?”
―쾅!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그가 급히 머리를 굴렸다.
동제국 발탄은 서제국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마법사단이 있었다.
그쪽 마탑이 아무리 날고 기어 봐야 발탄 황성마법사단 하나만 못하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낙뢰 마법을 튕겨낼 정도의 강도가 어떤 것인지는 알고 있었다.
“우, 우린 못 구해?”
파리스가 급히 물었다.
서제국에서 그걸로 성벽을 다 감싸면, 내가 황제 되고 나서 서제국은 어떻게 정복해? 응?
그의 고뇌가 담긴 질문에 부관이 빠르게 답했다.
“못 구합니다!”
“왜!”
“저희에게는 그 ‘재앙’이 없습니다! 서제국에서 수입할 수밖에……!”
걔들이 팔아 주겠냐!
이런, 젠장! 파리스가 머리를 싸맸다.
재앙을 원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
세계에 게이트가 터진 후.
처음 세계는 게이트가 터진 한국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보았다.
[#PrayforKorea]
[#PrayforAsia]
SNS에는 우리나라를 응원하는 해시태그도 올라왔다. 물론 비웃는 나라도 있었다.
[1: 한국, 이대로 괜찮은 거야?wwww / ID:sdjwufwa9]
[2: 그 나라 말대로 ‘X’됐지 뭐. 한국에 누가 이제 여행 가?]
[3: <<2 어차피 볼 것도 없었어 wwww]
우리나라도 난리가 났다.
당시에는 헌터넷이 없어서 온갖 커뮤니티 사이트며 SNS에는 폭발할 듯이 새 글이 올라왔다.
[한국 10년 후 상황.jpgif]
이런 제목과 함께 ‘정상영업합니다’ 현수막이 걸린 폐가 사진이 돌아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그 상황은 얼마 안 가 뒤집혔다.
한국이 어떤 나라인가?
있는 모든 걸 활용하는 민족.
일단 재료가 생기면 끓여보고 김치로 담가보고 장아찌로 만들어보고 시작하는 민족이 아닌가?
곧 인터넷 게시판엔 이런 게시글이 도배되었다.
[??? : 우리는 늘 답을 찾아낼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 내용 : (펄럭이는 태극기 사진)]
그리고 분위기는 빠르게 반전되었다.
[‘게이트’ 사태…… 전화위복의 기회?]
[게이트에서 채집한 목재, 일반 목재 강도의 7배 이상으로 해석돼]
[전문가 “같은 종인데도 게이트산 나무는 강도부터 달라”]
그렇다. 게이트 부산물을 사용할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그건 ‘나는 야생인이다’를 찍으며 산에서 홀로 살던 사람이 처음 발견했다.
[‘기적의 미나리’ 발견한 ‘야생인’ 이석형(58)씨 전격 인터뷰!
“싱싱해 보이는 미나리가 게이트 안에 있어 참을 수 없었다”
‘미지의 공간에 있던 미나리인데 탈날까 걱정되진 않았느냐’는 질문에 ‘김치로 담그면 다 괜찮아’ 답해]
그 후 게이트에서 먹은 음식이 유독 맛있다느니, 게이트에서 나온 물건이 유독 단단하다느니 하는 소문이 확 퍼지면서 순식간에 게이트 부산물 산업이 부상했다.
그때부터 우리나라를 불쌍하게 보던 세계의 시선은 바뀌기 시작했다.
게이트에서 나온 물건들은 같은 종에 같은 물건이라고 해도 보통 물건의 몇 배 이상의 강도를 자랑했던 것이다.
[전문가, “게이트 부산물 사용해도 부작용 없어”]
[게이트 사용 방도 폭넓어…… F급 던전, 대량의 쓰레기 투입 후 닫자 쓰레기 사라져]
[환경전문가들 ‘환호’]
이 좁아터진 나라에서 없는 자원으로 살아가던 한국이 게이트라는 재앙을 자원으로 바꾸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RP던전에 떨어진 의지의 한국인인 우리 네 명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소예리 헌터, 혹시 가공 스킬로 B급 아이템도 가공하실 수 있어요?]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그래도 내가 S급인데 B급을 못 다룰까! 당근당근]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어 하시는 김에 저도 감정 하나만요]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감정? 어디서 미감정 템 얻었어요?]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네 던전 클리어 보상]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오~ 뭐야뭐야 감정 먼저 하러갈래]
소예리 헌터는 신기한 물건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이었다.
덕분에 바람같이 에델바이스 영지로 날아왔다.
물론 페널티를 피하기 위해 공적인 이유를 가지고 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에델바이스 영지에 신기한 모양의 게이트가 나타났다는 제보를 받았답니다.”
벼락같이 저택으로 날아온 소예리 헌터는 불쑥 말했다.
여기서 눈치 빠른 신유리는?
“아, 그 건에 대해 마탑에 연락드리고자 했는데. 벌써 오셨군요.”
없어도 있는 척하기!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음 역시 눈치 빨라서 좋아용~]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아니 그래도 말씀은 하고 오시지 ㅋㅋㅋㅋㅋ]
주이안 헌터였으면 페널티감이었다고!
내가 눈을 흘기자 소예리 헌터가 예쁘게 웃었다.
“그럼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할까요?”
다른 영지도 아니고 에델바이스 영지의 내 저택이다.
우리 둘이 남는 게 어려울 리가 없었다.
―달칵.
중요한 이야기라는 이유로 사용인들을 쫓아낸 내 집무실에 소예리 헌터와 나만이 남았다.
“휴, 입조심하느라 죽는 줄 알았네.”
소예리 헌터는 손부채질을 했다. 사실 아까부터 나도 긴장하고 있었다.
“아직도 헌챗이랑 말이랑 헷갈려요?”
“안 헷갈리겠어요? 원래도 헷갈렸는데!”
하긴, 원래 한국에 있을 때에도 소예리 헌터는 헌챗과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이 자주 헷갈리는 사람이었다.
“어휴.”
내가 고개를 살래살래 젓자 소예리 헌터가 입을 비죽였다.
“신유리 헌터님도 내 나이 돼 봐. 10년 안 갈 것 같지? 서른일곱 멀어 보이지? 금방이야!”
늘 이어지는 공방에 답은 하나였다.
“제가 서른일곱이면 소예리 헌터는 마흔일곱일 텐데 뭐가 걱정이에요?”
“어린 게 벼슬이지, 아주! 응!”
소예리 헌터가 내 볼을 징징 잡아당겼다.
“으스급히므르즈브등그즈므스으!”
S급 힘으로 잡아당기지 마세요!
“나빴어요, 안 나빴어요!”
“은느쁘쓰으!”
안나빴어요!
“나빴어! 얼른 빨리, 마법의 말!”
소예리 헌터는 내 볼을 놔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난 마법의 말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으르은느!”
“뭐라구~?”
소예리 헌터가 재빨리 내 볼에서 손을 뗐다. 난 볼을 싸매며 항복했다.
“예리 언니!”
“좋아, 좋아. 평소에도 그렇게 부르라니까.”
소예리 헌터가 환하게 웃는 얼굴로 내 맞은편에 앉았다.
장난꾸러기 헌터님 같으니라고!
“그래서 내가 감정해줄 물건이 뭐예요?”
소예리 헌터가 눈을 반짝였다.
“아.”
난 인벤토리를 뒤져 바로 물건을 꺼냈다.
[뒤틀린 나무의 심장(미감정)]
―탁.
테이블 위에 물건을 내려놓자 소예리 헌터가 눈을 반짝였다.
나무의 심장이라더니 돌이나 다름없는 모양의 물건을 이리저리 돌려본 소예리 헌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짜 어디다 쓰는지 모르겠는 물건이네. 뭔 씨앗 같기도 하고.”
“씨앗이 이렇게 커요?”
주먹만 한데?
내가 주먹을 들어 보이자 소예리 헌터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야 게이트 물건은 비정상적으로 큰 것이 많잖아요.”
그건 그랬다.
소예리 헌터는 아이템을 몇 번 더 돌려보다가 눈을 깜빡였다.
―파앗!
그녀의 금빛 눈 앞에 새파랗고 반투명한 돋보기 모양의 빛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감정 스킬이었다.
“으음.”
감정 결과는 바로 나올 텐데?
하지만 소예리 헌터의 반응은 뭔가 시원찮았다.
“왜요? 그냥 잡템?”
그냥 능력치나 받아올 걸 그랬나?
내 질문에 소예리 헌터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감정할 수 없대요. 이런 창 뜨는 건 처음인데.”
“‘아직’?”
그럼 뭔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 건가? 내가 고개를 기울였다.
“RP던전 제한인 것 같거든요.”
몇 번 더 감정해본 소예리 헌터가 말했다.
“RP던전 주요 아이템인가?”
그럼 선택지로 주지 말고 기본적으로 획득하게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