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던전의 S급 시한부 영애 (44)화 (44/218)

44화

“뭐, 뭐?”

파리스는 순간 당황했다.

서제국 황제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

파리스는 이자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몇 번이나 약을 올리러 왔었으니 당연했다.

이자는 저를 모시는 귀족들 앞에서만 센 척을 할 뿐, 파리스 자신과 독대하는 이런 자리에서는 비굴하기 짝이 없었다.

동제국이 서제국 내의 다른 세력과 접촉해서 제 자리를 위협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에.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

잠시 방 안에 침묵이 지나갔다.

[…….]

신재헌은 조용한 시스템창을 흘끗 보았다.

페널티 위기는 뜨지 않았다.

그가 RP던전에 입던하기 전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이 소심한 성격이었다고 해도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며 ‘지금까지 힘을 감춰왔고, 폭군으로서 모습을 드러낸’ 것으로 주변 설정을 마쳤기 때문에.

“……아, 아무튼 동제국은 도와줄 의사가 있소이다.”

하지만 파리스는 아직 서제국 황제의 변화에 대해 모르고 있었기에 당황했다.

정확히는 사람이 이렇게 확 바뀔 수 있다는 걸 납득할 수 없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 서제국 황제는 동제국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자신에게 기던 사람이었다.

근데 최근에 좀 살벌한 소식이 들려온다 싶더니,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하지 않았는가?

물론 서제국 황제가 갑자기 미쳤다고 해서 동제국과의 격차가 좁혀지는 건 아니었다.

파리스가 다시 고개를 쳐들며 말했다.

“군사를 파견해주는 대가는 특별히 받지 않는 것으로―”

“서제국은 동제국의 도움이 필요 없다.”

그때 서제국 황제, 신재헌이 그의 말을 딱 잘라 거절했다.

서제국에 온 동제국 병력이 게이트에만 관심 있을 리가 없잖아?

분명 이를 핑계로 빚을 지우거나 첩자를 심는 건 기본이고, 내정간섭이라도 해보려는 의도겠지. 겸사겸사 서제국 여론도 악화시키고.

“뭐, 뭐요?”

하지만 파리스는 그가 당연히 받아들일 줄 알았는지 경악하는 얼굴이었다.

이전에 호구 같았던 아이반의 설정을 생각해 보면 이해는 갔다.

분명 이놈도 확신하고 왔을 거다.

서제국에서 당연히 병사를 원할 거라고.

신재헌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쓸데없는 수작을 부리려면, 상대가 어떤 자인지 잘 알아본 후에 하는 것이 좋을 거다. 그리고,”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재앙이 서제국에만 미쳤지만, 과연 같은 땅과 하늘, 바다를 공유하는 동제국이 이 재앙을 피할 수 있을까?”

그 말에 파리스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그러다가 그가 발끈했다.

“재, 재앙을 우리에게도 일으키겠다는 소리요?!”

그 말에 신재헌이 여유롭게 손을 펴 보였다.

신유리가 가끔 ‘재앙의 주둥아리’라고 평하는 그의 입에서 매끄러운 말이 쏟아져 나왔다.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말싸움을 주이안 헌터보다도 못하는 놈이네. 그렇게 생각하면서 신재헌이 말을 이었다.

“만약 우리가 이 ‘재앙’을 터뜨릴 수 있는 곳에 마음껏 터뜨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그걸 네 멍청한 머릿속에 터뜨리지 이 땅에 터뜨렸을까?”

신재헌의 손끝이 파리스의 머리를 가리켰다. 저도 모르게 제 머리를 감싼 파리스가 입을 벙긋거렸다.

“그게 무슨……!”

하지만 머리 어쩌고 빼고는 맞는 소리긴 했다.

파리스가 벙긋거리는 가운데 신재헌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튼 이번 방문은 잘 기억해 두도록 하지.”

비웃음을 띤 그가 알현실의 문 쪽으로 턱짓했다.

이만 나가 보라는 의미였다.

“이, 이……!”

파리스는 아이반이 황제가 된 이후 서제국 황제의 알현실에 수도 없이 오갔지만, 오늘처럼 무시당한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뭔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형언할 수 없는 지배자의 느낌이 방 안을 내리누르는 듯했다.

“나, 나중에 두고 보겠소이다!”

삼류 악역의 대사를 지껄인 황태자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신재헌은 그의 뒷모습엔 시선도 주지 않고 헌터 채팅창으로 시선을 주었다.

[클로나 에이센(소예리 헌터)>>> 동제국에서 사신 왔다던데 어때요?]

마침 타이밍 좋은 질문이었다. 신재헌의 얼굴에 완연한 비웃음이 떠올랐다.

[클로나 에이센(소예리 헌터)>>> 마탑에선 동제국 싫어하던데]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 헌터)>>> 신전에서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서제국 내부에서는 서로를 날카롭게 견제하고 있는 마탑과 황가, 신전이었다.

하지만 공동의 적인 동제국 앞에서는 아닌 모양이었다.

[클로나 에이센(소예리 헌터)>>> 그래서 와서 뭐래요?]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 게이트가 터져서 불쌍해진 서제국에게 동제국이 자비를 베풀어 군사를 보내줄 수 있대요]

그의 말에 좀 어이가 없었는지, 잠시간의 텀을 두고 소예리의 채팅이 올라왔다.

[클로나 에이센(소예리 헌터)>>> 퍽이나ㅋㅋ]

[클로나 에이센(소예리 헌터)>>> 그런데 진짜 동제국엔 게이트가 없었대요?]

그 채팅을 보면서 신재헌은 파티 상태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유리) - C급(딜러)

- 버프 : 그림자 속의 무법자(S) 암순응(S) 잔상(SS+) 잔상(SS+)]

아까 하녀에 대해 물으며 간다던 게이트가 아무래도 어두운 게이트인 모양이었다.

공포 디버프가 없는 걸 보면 그녀의 말대로 C급 게이트인 모양이고.

그럼 저 스킬 보너스를 받고도 신유리가 클리어하지 못할 게이트는 없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데.

[버프 : 그림자 속의 무법자(S) 암순응(S)]

신유리의 상태창은 정신없이 번쩍이고 있었다.

[버프 : 그림자 속의 무법자(S) 암순응(S) 잔상(SS+) 잔상(SS+)]

몇 번이나 잔상 스킬이 생겼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원래 이렇게 빨리 중첩이 가능한 스킬이었나?”

아니었는데.

그녀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첩용 스킬을 하나하나 발동시켜 걸어 올려야 했다.

물론 전투에 익숙한 태생 S급 딜러답게 그 속도는 빨랐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스킬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속도는 S급인 그의 눈으로 쫓기에도 빠르다고 느낄 정도였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 네 없었대요]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 헌터)>>> 없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클로나 에이센(소예리 헌터)>>> ㅇㅇ 아니면 우리 게이트 초기처럼 나라별로 순차적으로 게이트 뜨는 것일지도 몰라요]

신재헌은 헌터 채팅을 흘려보며 신유리의 상태창을 살폈다.

계속 잔상 스킬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게 반복되는 걸 보면, 뭔가를 연습하고 있거나 새로운 방법으로 스킬을 사용하는 방법을 익힌 게 분명했다.

“신유리.”

그가 보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뇌까렸다.

역시 신유리였다.

그녀는 그가 모르는 사이에도 강해지고 있었다. C급이라는 틀에 갇히지 않고.

저도 모르게 웃은 그가 채팅창에 시선을 주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 저도 순차적으로 뜬다에 걸게요]

아무래도 느낌이 그랬다.

아무리 이곳이 RP던전이라고 해도 기본적인 개연성은 갖추고 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딱 잘라 서제국에만 게이트가 뜰 리 없다.

[클로나 에이센(소예리 헌터)>>> 내가 보기엔 일본처럼 늦게 뜨는 거야]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 헌터)>>> 그럼 저렇게 한가하게 놀러 다니면 안 될 텐데…….]

주이안이 혀를 차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지구에서 처음으로 게이트 사태가 생겼을 때.

한국은 비교적 일찍 게이트가 터진 나라에 해당했다.

국경이 인접한 북한과 중국 역시도 며칠 사이에 게이트가 생겨났다.

그리고 그 후 ‘저주받은 3국’이라며 전 세계의 인터넷이 떠들썩했다.

특히 일본의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한국을 조롱하기도 했다.

[게이트 없는 일본으로 어서 오세요]

게이트 없는 안전한 일본이라고 홍보까지 해가며 염장을 질러대기도 했다.

그리고 정확히 반년 후.

[(속보) 일본 총리 관저 지하에 게이트 발생…… A급 추정]

일본은 개판이 되었다.

애초에 시스템은 자비로운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이 보기엔 세계 어느 나라의 누구든 똑같은 인간이었고, 공평하게도 모든 나라에 게이트가 열렸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도 클리어에 1년 제한이 걸린 RP던전 안이니, 반년까지 걸릴 리가 없었다.

신재헌이 소리 없이 웃었다.

***

동제국 황태자 파리스는 급히 귀환길에 올랐다.

서제국에서는 귀빈실은커녕 그 어떤 거처도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황태자가 보는 눈이 있는데 길바닥이나 다름없는 허름한 평민들의 여관에서 잠들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그는 불쾌하다는 얼굴로 마차에 올라탔다.

“아이반, 그놈이 미쳤나!”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아직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는 아이반이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다.

‘서제국 황제의 최근 동향이 수상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읽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부관이 그렇게 말하면서 무슨 두툼한 종이를 준 것도 기억이 났다.

그러면서 뭔가 중요한 얘기라고 급하게 말하던 것도 같았다. 물론 그는 제대로 듣지 않았다.

‘어어, 나중에.’

귀족 영식들과 카드 게임을 하러 나가던 파리스는 그의 말을 흘려들으며, 서류를 대충 짱박아두고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의 부관은 늘 작은 일에도 호들갑을 떠는 성격이었던 것이다.

이번에도 그런 것이리라 믿었다.

“그, 그 자료 있어?”

하지만 이번엔 봐야 할 듯했다.

“예? 자료라시면…….”

“아이반에 대한 자료 말이야! 그 두꺼운 거!”

그의 말에 이번 여정에 함께했던 부관은 재빨리 서류를 들고 왔다.

“보시지 않으신 듯하여 혹시나 하고 들고 왔습니다만……. 근데 알현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마차에서 얼굴을 팍 구기는 걸 보니 분명 뭔가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부관의 촉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황태자 파리스는 그런 답을 해줄 시간이 없었다.

대체 그 미친놈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리고 파리스는 서류의 첫 장을 넘기자마자 턱이 빠져라 입을 벌렸다.

[숙부 키엘라를 제 손으로 처형하고…….]

“그 아이반이 처형을?”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이번 대, 즉 자신이 동제국 황제가 될 즈음이면 서제국은 아주 먹기 좋게 익은 과실이 되어 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멍청한 서제국은 동제국의 차기 황제인 자신이 망나니인 줄 알지만, 사실 그는…… ‘브레인’이었으니까.

원래 뛰어난 머리를 가진 자 옆에는 상대적으로 우매한 자들밖에 없으니, 제 뜻을 모르는 법이다.

이마를 짚으며 잠시 자신에 취해 있던 파리스가 정신을 차렸다.

“혹시 이놈 뭐 잘못 먹었어?”

아니면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리가?

숙부의 이름만 나와도 긴장하던 놈이었다.

하지만 검 실력과 무력을 가장 우선으로 보는 서제국에서, 아이반의 검 실력은 허접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그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사냥 대회든 뭐든 온갖 행사들을 다 피해 가면서 국정에만 열중했다.

물론 국정에 열중한다는 건 핑계고 그냥, 나가기 싫어한 거였다.

그런데 그런 놈이 숙부를 처형해?

[검을 든 채 맞붙어 채 세 번 휘두르기도 전에 키엘라의 목이 날아갔다고 합니다.]

그것도 검 세 번 만에?

황태자 파리스는 스스로 우수하다고 주장하는 제 뇌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연한 결론을 내렸다.

“이거 쓴 놈 서제국에서 돈 받았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