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발검 속도가…….”
밤톨 비를 맞고 있는데 하녀 원투쓰리가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주인님이십니다.”
아니, 얘들은 신재헌한테 뭔 소리를 듣고 온 거야?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발검이었습니다.”
하녀들은 놀란 얼굴이었다.
너희도 놀랐니? 나도 놀랐단다.
매크로로 스킬을 묶었다고 속도 보너스가 들어갈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역시 주인님이십니다.”
하녀 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자 원과 쓰리도 연신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역시, 역시, 하는데 너희 대체 신재헌한테 무슨 소리를 듣고 온 거야?
그걸 따질 틈은 없었다.
[보스 : 뒤틀려 자란 나무(C)가 출현하였습니다!]
[보스 몬스터 : 뒤틀려 자란 나무(C)의 영역에 들어섭니다.]
배경이 숲인 만큼 방문을 열고 보스룸에 들어가는 일은 없었다.
특정 조건을 만족하자 바로 보스가 출현하면서 주변이 보스룸으로 바뀐 거다.
이건 알겠는데.
“시야가……!”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당황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하녀들이 보였다.
[‘뒤틀린 그늘’ 영역 효과를 받습니다.]
[주변의 모든 불빛이 사라집니다.]
안 그래도 그늘 천지였던 숲은 아예 태양이 사라진 것처럼 어두워져 버렸다.
“주인님!”
“당황하지 마.”
난 하녀들을 진정시켰다. 정말 괜찮단다.
다른 것도 아니고 어둠 속이면?
[그림자 속의 무법자(S) 활성화됩니다.]
[암순응(S) 활성화됩니다.]
내가 비록 암살스킬이 있는 건 아니지만 밤눈은 자신 있단다.
스킬이 활성화되자마자 당황하는 하녀들의 모습이 잘 보였다.
“조명을 밝혀!”
“제게 부싯돌이 있습니다!”
하녀들이 우왕좌왕하는 게 보였다.
―탁! 탁탁!
거의 앞도 안 보이는 주제에 열심히 부싯돌로 불을 붙여보려는 하녀를 난 아련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애들아, 보통 이럴 땐 B급 이상 스킬이 아니면 조명이 밝혀지지 않아요…….
속으로 이야기해도 하녀들에게 들릴 리가 없었다.
그러니 그냥 빨리 처리하는 게 나았다.
―쿠쿠쿵……!
주변의 울림이 점점 거세지기 시작했다.
부싯돌을 들고 있는 하녀도, 앞도 안 보이는 주제에 나를 호위하겠다고 검을 들고 긴장하고 있던 하녀들도 멈칫했다.
“뭔가 다가옵니다!”
어디서 오는지는 모르는 듯했다.
[뒤틀려 자란 나무(C)]
하지만 내 눈에는 이름값 제대로 하는 모습의 나무가 잘 보였다.
그건 뿌리를 다리 삼아 우리에게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저게 나무뿌리냐? 문어 다리지?
생긴 것만 봐도 답이 나왔다.
저건 나무답지 않게 유연한 나뭇가지를 빗자루인 양 이용해 우리를 쓸어버릴 것이다.
그럼?
그 전에 없애면 된다.
난 몸을 낮췄다.
[매크로 ‘지금몬스터날아오는데그게문제냐(C)’를 사용합니다.]
[잔상(SS+) - 잔상(SS+) 스킬을 사용합니다.]
[적용 대상 : ‘수룡의 가시비늘(B)의 잔상’의 잔상]
[빠른 스킬 중첩으로 속도 보너스 적용(10%, 헌터랭크 상한)]
[빠른 스킬 중첩으로 데미지 보너스 적용(10%, 헌터랭크 상한)]
빠르게 시스템창이 지나가고.
내 검 끝에 푸른 빛이 맺혔다.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했다.
일단 C급 보스 몬스터인 데다 크기가 너무 컸다. 보나마나 체력통도 무지막지하게 크겠지?
치명타를 먹일 방법이 필요했다.
그리고 난 그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좀 쪽팔리지만……★
“버터관자구이 먹고 싶다……!”
난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스킬 구호를 중얼거렸다.
[버터관자구이 먹고 싶다(E) 스킬을 사용합니다.]
[찌르기의 치명타 확률이 대폭 상승합니다!]
[구호 보너스 : 치명타 확률+20%]
관자구이 어쩌고 스킬 보너스까지 합쳐진 검의 잔상이 뒤틀려 자란 나무를 덮쳤다.
―쿠콰콰콰쾃!
잔상과 함께 검이 나무를 꿰뚫는 느낌이 선명하게 손을 관통했다.
[치명타!]
[치명타!]
[치명타!]
……
수십 개의 잔상이 한 번에 나무를 공격하면서 치명타 시스템창 역시 수십 개 번쩍였다.
그리고.
[던전 내 기여도(%)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96.7%)
밀리아(1.1%)
딜리아(1.1%)
실리아(1.1%)]
내 던전 내 기여도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게이트 던전 ‘어두운 숲(C)’ 클리어!]
[헌터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C)’ 기여도 96.7%]
[압도적인 기여도로 보너스 보상이 주어집니다.]
언제 봐도 기분 좋은 시스템창과 함께 시야가 회복되었다.
[암순응(S) 해제됩니다.]
[그림자 속의 무법자(S) 해제됩니다.]
[시야가 회복됩니다.]
“!”
놀란 하녀들이 내 이곳저곳을 살폈다.
“괜찮으십니까!”
하녀 원투쓰리가 꾀꼬리처럼 똑같은 말을 하는 모습은 감동스러울 정도로 신기했다.
난 괜찮다는 뜻으로 손을 들어 주었다. 물론 내가 쿨병이 들어서 그런 건 아니고.
[적용 가능 보상 정산 중…….]
지금 중요한 시간이라고!
보스 혼자 처리했는데 좋은 보상 내놔라!
[선택 가능 보상 :
A) 전체 능력치 +5%
B) 뒤틀린 나무의 심장(미감정) 획득]
C) 튼튼한 나무 방패(B) 획득]
“오.”
난 눈을 크게 떴다.
전체 능력치가 좀 탐나긴 하지만 이거야 다른 방법으로도 올릴 수 있다.
C의 튼튼하다고 주장하는 방패도 B급이면 굳이 가져갈 필요 없을 것 같았다. 내가 방패 쓰는 사람도 아니고.
근데 B는?
뒤틀린 나무의 심장이라고?
미감정 등급인 걸 보면 감정사에게 가져가야 뭐 하는 물건인지 알 수 있을 듯했다.
다른 헌터팀이었다면 RP던전에선 쓸 일이 없을 물건이었겠지만, 우리 헌터팀은 달랐다.
소예리 헌터의 감정 스킬이라면 이게 뭔지는 볼 수 있을 터였다.
[보상 B ‘뒤틀린 나무의 심장(미감정)’ 선택하셨습니다.]
“저기 출구가 생겼습니다!”
내가 보상을 선택하는 사이, 시스템창이 없어 보상 선택이 불가능한 하녀들은 출구를 살피고 있었다.
“나가자.”
난 그들에게 손짓했다.
이 어쩌고 심장이 뭘 하는 물건인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던전 ‘어두운 숲(C)’에서 나가시겠습니까?]
[던전을 나가면 다시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던전에 남은 던전 부산물 및 기타 물품은 사라집니다.]
익숙한 시스템창을 뒤로하고 난 게이트를 빠져나갔다.
[서브 퀘스트 ‘누구를 위하여 검을 드는가’ 클리어!]
[보상 : 마력+777]
음, 깔끔한 클리어였다.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주인님, 나가면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하녀 원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뭘?”
“최상급 관자로 만든 버터관자구이를―”
“피피피필요없어!”
다물어! 다 들었냐! 들었어도 모른 척해!
의아한 얼굴의 하녀를 뒤로하고 난 게이트를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스킬 이름 바꿔줘! 염병할!
***
게이트가 열린 지 수일째.
서제국에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뭐? 동제국에는 재앙이 없었다고?”
그건 역사적으로 사이가 매우 안 좋은 동제국 놈들의 입에서부터 나온 소리였다.
온 나라가 게이트로 발칵 뒤집힌 서제국과는 달리, 동제국의 영역에는 게이트는커녕 몬스터 한 마리도 없이 싹 사라졌다고 했다.
마치 칼로 자른 것처럼, 서제국 황제의 명령이 미치는 땅에만 게이트가 열렸다는 것이다.
당연히 게이트의 공포는 서제국민들만을 덮쳤고, 그 사실을 알게 된 동제국은 아주 조심스럽게 서제국에 사절을 파견했다.
“저건 동제국 문장이 아닌가?”
“무슨 일이지?”
동제국에서 서제국으로 향하는 길에 있는 영지민들이 거의 다 동제국의 방문 사실을 알게 될 정도로, 아주 조심스럽게.
요컨대 그냥 동네방네 소문내면서 왔다는 소리였다.
그러고는 서제국 황제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 앞까지 가서, 아주 안타까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짓고 있는 건 동제국 발탄의 황태자 파리스였다.
“서제국에 이런 재앙이 생기다니, 정말, 정말 매우 안타깝소.”
안타까운데 왜 얼굴은 쪼개고 있는 거지?
그 꼴을 보는 황제 신재헌은 속이 아주 불편했다.
이걸 그냥 머리를 날려버리면 당연히 페널티 먹겠지?
“이런 안타깝고 안타까운 상황이…….”
어제 안타깝다는 단어를 배웠는지 자꾸만 안타까워하는 발탄 황태자 파리스를 보며 신재헌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찾은 거지?”
모른 척 물었지만 대충은 알고 있었다.
[정보 : 동제국 발탄의 황태자, 파리스
동제국 발탄과 서제국 카르만은 감정이 매우 좋지 못합니다.
그 원인 중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이 발탄의 황태자, 파리스입니다.
서제국 황제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은 지금껏 파리스 발탄에게 번번이 놀림당했으며, 외교적인 일을 홧김에 처리해 빈축을 사기도 했습니다.]
시스템창은 이럴 때는 친절했다. 대충 설명 훑어보고 얼굴 보니 답이 나왔다.
염장 지르러 왔군.
“아무리 긴 시간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어쨌든 같은 대륙에 존재하는 나라가 아니오?”
파리스가 눈을 처연하게 뜨고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발탄은 멀쩡하다고 해도 바로 옆 제국에 이런 대재앙이 터지다니, 정말 지켜보고만 있기가 안타까웠소.”
발탄이 멀쩡하다는 것을 거듭 강조한 파리스가 말했다.
“그래서 서로 돕고 살자는 마음으로, 제안을 드릴 겸 찾아왔소이다.”
“제안?”
신재헌은 살짝 고개를 기울인 채 손짓했다.
어디 말해 보라는 의미였다.
“크흠.”
그 불량한 태도에 파리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놈이 정신을 못 차렸구만?
서제국 카르만에 재앙이 터지기 전에도 발탄과 카르만의 국력 차이는 확실했다.
게다가 그 차이는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서제국 카르만은 마탑과 신전과 황가 세 세력이 반목하는 멍청한 상황이었으니까!
한마디로 아무리 저놈이 황제라 해도 황태자인 내 말을 무시할 수 없다, 이 말이다.
고개를 쳐든 파리스가 말했다.
“아시다시피 동제국에는 우수한 인력들이 많이 있소. 이번 서제국의 재앙을 지켜보고 안타까움을 느낀 바, 동제국의 인력들을 보내어 서제국 각지의 재앙을 진압하는 데에 도움을 드리려 하는데, 어떠시오?”
간단히 요약하자면 그냥 서제국에 군사 파견하겠다는 소리였다.
신재헌이 속으로 감탄했다.
화려한 개소리잖아?
“서제국에서 그리도 믿어 의심치 않는 신시안께서 서제국을 왜 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가 사람을 긁으려고 하는 게 보였다.
신재헌은 따분한 얼굴로 그의 말을 끊었다.
“말조심 좀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