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싸울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미쳤다고 이 험난한 세상에서 팀킬하겠냐]
두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살벌한 상황은 헌터 채팅과는 전혀 달라 보였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그럼 이 상황은 뭔데?]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던전 처리하자마자 뛰어왔을 뿐이야]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신유리 헌터님의 상태창에 B급 공포가 떠서요. 1시간 이내로 와서 합류해 보려고 했는데……, 아슬아슬하게 타이밍을 놓쳤습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아]
한 게이트에 같이 들어가려면 1시간 이내로 입장해야 한다.
일반인이든 헌터든 사람이 들어간 후 1시간이 지나면 게이트의 입구는 봉인되니까.
봉인된 게이트는 그 안에 있는 사람이 다 죽거나, 아니면 던전이 클리어되기 전에는 열리지 않는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나도 그 생각으로 왔는데 하필 마주쳐버렸거든요]
상황은 대충 이해가 갔다.
어쨌든 게이트 사태에 빠졌던 주이안 씨와 신재헌은 내가 B급 공포를 먹는 걸 보고 곧바로 이쪽으로 오려고 했던 듯했다.
난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D급이었으니까.
1시간 이내로 합류하지 못하면 위험할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행히 클리어했지만.
물론 그 과정에서 페널티를 다발로 먹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들 휘하의 기사와 성기사들을 데리고 왔어야 했을 것이다.
문제는 두 사람이 하필이면 이곳에서 마주쳤다는 것이다.
봉인된 게이트는 하얀빛으로 빛나니까, 그들이 내가 있는 게이트를 특정하는 데에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특정하자마자 달려왔을 거고.
그 덕에 다들 정신이 없는지 내가 C급이 된 것도 보지 못한 듯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어휴 이 사고뭉치들]
그래도 고맙긴 고마웠다.
나 죽을까 봐 와준 거 아니야?
이러니저러니 해도 헌터팀뿐이었다.
물론 내가 감동받든 말든 상황은 일촉즉발의 위기로 치닫고 있었다.
“이곳은 황가 휘하의 귀족이 다스리는 영지입니다만, 영주가 신시안 성기사들의 진군 허가를 내려주었습니까?”
신재헌이 입을 열었다.
그의 무거운 목소리가 울리자 순식간에 홀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주이안 씨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교단은 생명을 구원하는 것을 최우선시합니다. 신시안 님의 목소리가 있다면, 속세의 법칙을 어겨서라도요.”
그의 단안경이 반짝였다. 그러자 신재헌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교단이 붙어 있는 곳이 땅인 이상, 속세의 규칙을 자꾸 어기셔서는 곤란할 텐데.”
싸늘한 목소리였다.
그때쯤 되자 난 조금 어이가 없어졌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여러분 진짜 싸우는 거 아니지?]
사실 남몰래 서로에 대한 감정을 키워왔던 건 아니지? 왜 이렇게 본격적이야?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아니 이 동네 설정이 이렇다니까요?]
신재헌이 뻔뻔하게 답하는 가운데, 차가운 표정(이려고 노력하는) 주이안 씨가 헌터 채팅으로 간곡하게 말했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너무 밀어붙이지는 말아 주세요, 신재헌 헌터님.]
잠시간의 침묵을 두고 뒷말이 올라왔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할 말이 없잖아요.]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아니 나랑 말싸움 처음 해보는 사람처럼 그러시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처음 해 봅니다.]
하긴, 두 사람이 싸울 일은 없었다. 신재헌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아 그러네]
어이없는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난 이마를 짚고 싶은 손을 간신히 붙잡은 채 말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여러분, 헌터 채팅도 있는데 오기 전에 서로 어딘지 물어보는 정도의 예절을 갖춰줬으면 이런 불상사는 없지 않았을까요?]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그걸 몰랐네]
아오, 저놈을 콱!
신재헌 저놈이야 원래 저런 놈이라 그렇다 치고, 주이안 씨까지 왜 그래요!
“……신의 목소리를 들을 뿐입니다.”
결국 주이안 씨가 입을 열었다. 그가 교황인 건 정말 다행이었다.
뭐든 할 말 없으면 신의 뜻으로 밀어붙이면 돼! 괜찮아!
침묵 가운데 주이안 씨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래도 다행히 이곳에서 인명피해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으니, 성기사들을 물리겠습니다.”
강단 있지만 온화한 목소리였다. 잘한다, 주이안 씨!
“그래주시겠습니까? 그럼 전 이곳을 좀 더 조사해야겠습니다.”
신재헌이 손을 펴 보였다.
“교단에서 이번에 보여주신 생명을 위한 헌신은 꼭 기억하겠습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꼭 그렇게 비꼬아야겠니?]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아니 이 캐릭터가 그렇다니까]
페널티 안 받는 걸 보면 그런 것 같긴 한데…….
성격 정반대인 캐릭터에 들어가는 바람에 개고생하는 소예리 헌터와는 달리 신재헌은 캐릭터성으로 고생할 일은 절대 없어 보였다.
그때 소예리 헌터가 불쑥 끼어들었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주이안 헌터 울겠어요~]
그러게, 딜링기도 없는 우리 마음 약한 주이안 씨한테 무슨 짓이― 잠깐만.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뭐뭐뭐임? 어디서보고있음?]
홀을 둘러봐도 소예리 헌터의 모습은 없었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안 웁니다.]
그 와중에 주이안 씨가 좀 빠르게 답했다. 왠지 발끈한 것 같았다.
“신전에서도 이번 기현상에 대해서는 조사해볼 생각입니다. 이전에 신전과 황가 사이에 오간 협약대로, 몬스터에 관한 일은 협력해 처리하기로 하였으니…….”
하지만 그의 얼굴엔 곧 온화한 미소가 피어났다.
“함께, 조사해도 되겠지요?”
신재헌은 눈을 가늘게 떴다.
누가 봐도 이마에 ‘마음에 안 듦’이라고 쓰여 있는 듯했다.
“그러시죠.”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보였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황제 설정이 교단 어지간히 싫어하나 보네]
안 그럼 저게 같은 팀 헌터 보고 나올 얼굴이냐?
내 말에 신재헌이 벼락같이 답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교단 쪽으로 머리 두고 자면 체력 깎임]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이럴수가]
헌터 채팅이 경악으로 뒤덮이는 사이에 주이안 씨와 신시안 교 사람들이 몸을 돌려 홀을 빠져나갔다.
휴, 그래도 싸움박질은 없었으니 다행이었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어쨌든 다 싸운 거죠?]
그리고 소예리 헌터는 아까부터 우리 상황을 보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아니 어디에서 보고 있는 거예요?]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하늘 봐요, 하늘!]
하늘? 홀에서 하늘 봐 봐야 천장 아니냐?
무심코 시선을 올렸던 난 잔디를 위해 활짝 열려 있는 개방형 천장 너머로 거대한 불덩이를 발견했다.
저저저저게 뭐냐?
이 동네는 사실 밤에 태양도 뜨고 달도 뜨는 동네였단 말인가?
편견 없는 생각을 하는 것도 잠깐이었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더 싸우면 불덩이 떨어뜨리려고 했는데]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당장 그 사특한 불덩어리를 집어넣지 못할까]
황급히 말하자 헌터 채팅이 웃음으로 도배되면서, 하늘에서 불덩어리가 사라졌다.
삼파전 할 일 있냐, 이 사고뭉치 인간들아!
“어휴.”
습관적으로 이마를 짚었던 난 자레트 후작에게 옆구리를 찔렸다.
왜요, 돌아보려던 난 신재헌을 보고 정신을 차렸다.
맞아, 지금은 쟤가 폐하였지.
난 재빨리 이마를 짚던 손을 마른세수로 바꾸었다.
긴장한 척! 폐하 앞에서 면목이 없는 척!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싸우는 거 방구석 1열로 볼걸 그랬나]
물론 헌터 채팅을 보면서 긴장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헌터 채팅이 강한 사념을 보내면 타자 치듯 입력되는 방식이라서 다행이었다.
컴퓨터 키보드 두드리는 형식이었으면 꼼짝없이 RP던전 페널티 받을 뻔했다.
어휴.
***
나와 다른 귀족들은, 황가에 이번 기현상으로 인해 겪은 일들을 상세하게 보고해야 했다.
“빛을 따라갔더니 샹들리에 괴물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특한 마법사가 한 짓이 분명합니다!”
귀족들이 이구동성으로 진실과 헛소리를 동시에 쏟아놓기 시작했다.
“아니오, 이건 이단자가 한 짓이오!”
“이단자라니? 그런 이야기는 신시안 교단에나 가서 하시오!”
개인감정을 마음껏 뽐내며 서로를 욕하던 귀족들도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게 있었다.
“이번 사태에서 가장 활약한 건 에델바이스 백작이었습니다.”
“저건 맞는 말입니다.”
무려 이야기를 직접 들어주던 신재헌은 내게 시선을 돌렸다.
“에델바이스 백작의 의견은 어떠하지?”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저것이 실화인가, 에델바이스 백작?]
진지한 얼굴로 사람 웃기지 말아 줄래?
그럼 구라겠냐?
“부끄럽지만 그렇사옵니다.”
난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다른 곳에서 일어난 것과 상황은 비슷하군. 다행히 에델바이스 백작이 빠르게 대처해서 이쪽엔 피해가 없었고.”
신재헌은 조사가 끝났다는 듯 손짓했다.
귀족들은 그가 별다른 처벌을 내리는 것 같지 않자 안도했다.
처벌할 게 뭐가 있냐, 너희들이 돌발 게이트 만들어서 떨어진 것도 아닌데.
“그럼 각 영지로 돌아가 보도록. 제국 각지가 시끄러우니 각 영지의 소란을 가라앉히는 데에 힘쓰도록 해.”
신재헌이 말하자 그제야 귀족들은 흩어졌다.
나와 신재헌의 시선이 짧게 마주쳤다. 만난 김에 수다라도 떨고 싶었지만 여기서 수다 떨면 페널티였다.
내가 우리 가문 마차를 찾아갈 때 신재헌의 채팅이 올라왔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이 사람들은 시스템창이 안 보이는 것 같죠?]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예, 저와 같이 게이트에 떨어졌던 성기사들 역시 시스템창은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럼 시스템창을 볼 수 있는 건 우리 넷뿐인가?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홀을 나섰을 때였다.
“에델바이스 백작!”
누군가 우렁찬 목소리로 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