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자고로 S급 헌터란 나름 사치에 익숙한 자들이다.
정확히는 돈 쓰는 데에 별 감각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도 그럴 게, 게이트 부산물로 벌어들이는 돈만 해도 천문학적인 수준이었으니까.
나도 S급으로 각성한 이래 돈 걱정하고 산 적은 없었다.
갖고 싶으면 고민 없이 사고, 그러다 질리면 어디 갔는지도 몰라서 처박아놓고.
그러다가 물건 찾기 귀찮아서 다시 산 다음 정리하기 귀찮아서 또 새로 사는 수준?
물론 물건 살 때는 뭐든 높은 가격순으로.
낮은 가격순으로 검색하면 내가 살 건 핸드폰인데 1200원짜리 핸드폰 케이스만 검색되잖아.
귀찮다!
그건 핸드폰이나 사과패드 같은 작은 물건들부터 차나 집까지 예외는 아니었다.
나만 해도 내 소유의 건물이 어디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허어.”
여하튼 S급 헌터들이 돈 쓰는 데에 익숙하다는 이야기를 왜 하냐면, 내가 지금 사치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와, 머리 위에 금줄을 주렁주렁 달아놨네?
벽에 붙은 샹들리에 하나가 한국 돈으로 수천만 원은 쉽게 나갈 것 같았다.
그리고 애초에 이 건물 자체가 연회용으로 지어진 1층의 넓은 홀이었다.
이런 돈지랄은 이 세계에서는 귀족들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나를 이 자리에 초대한 건, 춤을…… 최대한 안 출 것 같은 자였다.
자레트 후작. 올해로 69세, 무가의 노귀족.
“어서 오시게, 에델바이스 백작!”
그는 무골로 소문난 자였다.
입을…… 좀 턴다는 게 문제지만 어쨌든 춤은 안 출 것같이 생기긴 했다.
그도 그럴 게 나보다 위로 1.5배, 옆으로 2배는 넓은 사람이라 춤출 사람 찾기도 쉽지 않을 듯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레트 후작님.”
난 영업용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러면서 홀 안을 둘러보고 완전히 확신했다.
여기서 춤출 일은 없겠다!
“에델바이스 가에서는 거리가 있는 곳인데 오기 피곤하지는 않으셨는지 모르겠소.”
“말 타고 오니까 금방이던데요, 뭘.”
난 가볍게 웃어 주었다. 그러면서 홀 중심을 살폈다.
이 건물은 확실히 춤추는 용도가 아니라 검을 겨루는 용도로 만들어진 건지, 간이 경기장이 세워진 게 보였다.
다치지 말라고 잔디도 깔려 있……는데 잠깐, 이 세계에 인공 잔디도 있나?
의아해서 천장을 봤다가 난 내 눈을 의심했다.
“……오.”
무려 천장을 열고 닫을 수 있게 해놓았다.
버튼을 누르면 천장 일부가 접혀 들어가고 이 잔디밭에 햇빛이 쏟아지게 하는 형식인 모양이었다.
요컨대 이 잔디밭은 건물 안에 있는 주제에 진짜 잔디밭이었다!
이야, 중세 배경 세계관에도 이런 기술력이 있다고?
진짜 햇빛을 받아 큰 덕인지 부드럽고 풍성한 잔디밭에는 이미 누군가 구른 흔적이 보였다.
뭉개진 잔디며 군데군데 튀어 있는 흙까지.
“아, 드디어 요즘 사교계의 주인공이 오셨구만.”
내가 잔디를 다 살폈을 때쯤이었다. 어느새 내 주변으로는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들고 있었다.
와, 인싸 된 기분이다!
내가 퀘스트 보상만 아니었어도 여기 안 왔다!
난 한국에서부터 유구하게, 사람이 우글우글 모여서 나만 쳐다보는 이런 행사를 별로 안 좋아했다.
“세이렌 백작가의 텐타라고 하네.”
“이조르 자작가의…….”
어쩌고 가문의 어쩌고라는 소개가 쏟아졌다.
다행히도 내겐 시스템창이란 게 있어서 소개를 받자마자 그들의 머리 위로 이름이 뿅뿅 떠올랐다.
대부분이 D급보다는 랭크가 높은지, 딜러 표시만 되고 랭크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S급이었던 내게 상대의 랭크를 알아보는 법이 시스템창만 있는 건 아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입니다.”
인사하면서 악수를 나누는 사이. 그 짧은 찰나만으로도 사람들의 수준을 파악하는 건 충분했다.
진짜 실전으로 다져진 자들은 걸음걸이나 사소한 움직임부터 다르니까. 대부분 C~B급 딜러들인 듯했다.
날 초대한 자레트 후작과 몇몇 귀족들을 제하고.
“오…….”
이쪽이 시끌벅적해지자 내게 관심 없는 척하던 사람들도 다 이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지난번 검술 대회 경기는 인상적으로 보았다네. 그래서 꼭 가까이에서 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지.”
대충 인사가 끝나자 자레트 후작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특히 그 속검은…….”
그가 은근슬쩍 서두를 떼며 말꼬리를 흐렸다.
역시 잔상 스킬에 대해 궁금해하는 듯했다.
그건 S급들의 모임에 가도 마찬가지였다.
전 세계에서 잔상류의 스킬을 가진 건, 딜러고 힐러고 보조계고 간에 단 한 명, 나뿐이었으니까.
스킬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간혹 스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깨달음을 얻으면 스킬을 얻는 경우도 있었기에, 그런 목적으로 내게 다가온 자들도 많았다.
그건 여기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마치 검 끝에 마법적인 무언가가 깃든 느낌이었다네. 아직 내 경험이 부족한 건지…….”
자레트 후작의 눈은 학구열(?)로 불타고 있었다.
아, 이렇게 매달리면 또 약해지는데.
내가 스킬에 대해 무슨 말을 해주든 깨달음을 얻는 건 본인 몫이었다.
말을 해줄까 말까, 고민할 때였다.
“내 에델바이스 백작이 오면 꼭 묻고 싶은 게 있었지.”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요컨대 아까 인사타임에 인사 한마디 안 건넨 놈이라는 의미다.
돌아보니 랭크도 안 떴다. 그래도 꼴을 보니 B급 정도는 되어 보였다.
“흐음.”
그가 나를 살피듯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댁은 누구신데 그렇게 뽑아버리고 싶은 눈깔을 가지셨습니까?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타이밍을 놓쳤다.
“포를랭 가에는 그런 속검기가 없어. 우리 가문이 재작년까지 포를랭 가와 검술교류를 했는데, 에델바이스 백작의 검식은 포를랭 가의 검식과는 흐름이 전혀 다른 검식이었단 말이지.”
줄줄이 말을 읊던 남자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백작께서는 그 속검을 어디에서 익히셨소?”
혹시 이 동네도 스승님 두고 다른 데서 뭐 배우면 안 되는 동네였어?
난 깝깝한 옆 나라들을 떠올렸다.
중국도 일본도 스승이 있는 헌터라면 다른 종류의 스킬을 배우는 게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그 덕분에 헌터들의 발전이 저해된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기도 했다.
“그런…….”
“포를랭 자작가와 교류가 없었으니 알 수가 있나.”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걸 보니 아무래도 여기도 그런 동네인 듯했다.
술렁거리는 사람들의 분위기를 등에 업은 남자가 고개를 쳐들었다. 그때였다.
“바이야 백작, 에델바이스 백작께서 놀라시지 않소. 요즘 시대에 어디에서 무슨 검을 익혔는지가 뭐가 중요할까.”
아, 이쪽 동네에서도 그건 고리타분한 거였어?
자레트 후작의 말에 사람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리는 게 보였다.
“아니, 난 이건 꼭 물어보고 싶었소.”
하지만 바이야 백작이라 불린 밉상은 진상짓을 끝내지 않았다.
그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을 찌푸리며 물어 왔다.
“에델바이스 백작께서는 지금껏 건강이 좋지 않아 누워 있었을 텐데…… 그건 대체 어디에서 익힌 속검인가?”
그가 손을 펴 보였다.
“검에는 자고로 흐름이, 뿌리가 있어야 하는데 백작의 검은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가 이 말일세.”
그러더니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본디 포를랭 가의 검류는 서부 지방의 계보를 그대로 따르는 베기형 검술이지. 그런데……”
난 바이야 백작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 나 이런 놈들 알아.
일본 S급들하고 만났을 때 그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 들어본 적이 있었다.
자긴 몇천 년 묵은 어떤 검류의 몇 대 계승자라느니 하는 소리를 지껄이던 그들은 안타깝게도 나랑 하는 대련에서 탈탈 털리고 갔다.
그것도 모자라서 얼마 후 게이트 안에서 깨끗하게 옥X싹싹 곰팡이제거 당했다.
아……. 입만 산 친구들 별론데.
……라고 할 순 없으니 좀 고급지게 말해주기로 했다.
“뿌리도 중요하지만 검의 본질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세니아, 네가 너무 고급스럽게 말하는 사람이라 언니가 힘들다!!!
“그렇지,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네.”
자레트 후작이 재빨리 내 말을 거들었다. 이쪽은 말이 좀 통할 것 같은데?
“흐음…….”
바이야 백작은 저보다 높은 후작이 내 편을 들자 마음에 안 드는 기색이었다. RP던전이라고 입 못 터는 게 한이다.
이거 아무래도 밑밥 좀 깔아두는 게 나을 것 같다.
여기 있는 동안 이렇게 내내 고상하게 말했다간 사람이 미쳐버리고 만다!
난 찰나간 짱돌을 굴린 끝에 결론 내렸다.
좋아, 지금부터 ‘포를랭 가에서 안 좋은 일을 겪고 삐딱선 타게 된 세니아’ 버전으로 간다!
“검의 본질이라.”
그때 한쪽 구석에서 한 노귀족이 중얼거렸다. 얼굴만 봐도 견적이 나왔다.
무…… 무지막지한 꼰대다!
“그럼 그 본질이란 걸 직접 눈에 담아보고 싶은데.”
노귀족의 말에 바이야 백작의 얼굴이 확 폈다.
제 실력(?)을 보여줄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내 얼굴도 확 폈다.
아, 좋지! 검 가져와! 한판 뜨자!
“그럼 마침 준비된 자리도 있는 것 같으니―”
난 기꺼이 잔디밭을 가리켰다.
바이야 백작은 언제 튀어갔는지 이미 잔디밭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고놈 빠른 놈일세.
내가 잔디밭으로 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쿠쿵.
이게 무슨 소리야?
난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땅이나 건물이 흔들리는 게 아니었다. 공기가 흔들리고 있었다.
―쿠쿠쿵…….
흔들림이 다시 느껴졌다. 내가 미간을 좁혔을 때였다.
“얼른 오시게! 설마 물리지는 않겠지!”
바이야 백작이 잔디밭에서 발을 쿵쿵 구르며 외쳤다.
그리고 그 밑의 잔디밭에서 뭔가 꿈틀대는 게 보였다.
마치 잔디밭에서 뭐가 튀어나오려는 것처럼.
“거기, 밑에!”
난 나도 모르게 반말로 외쳤다.
“그런 얕은 속임수에 속을 것 같소!”
바이야 백작은 내 말에 흥분해서 받아쳤다.
나도 그런 유치한 짓 안 해, 미친놈아!
난 그의 발밑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푸른 빛을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콰드득!
좀 더 살벌한 소리가 들리자, 그제서야 사람들이 움찔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자레트 후작이 주변을 살폈다.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진 것처럼 홀 전체가 압박감에 휩싸였다.
“이거…….”
왜 이렇게 익숙하지?
이 동네에서 나한테 익숙한 거 나오면 안 되는 거 아니냐?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헌터 채팅이 우수수 올라왔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신유리, 지금 자레트 영지에 있어?]
이놈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안 거야?
그와 동시에 주이안 씨의 채팅도 올라왔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신유리 헌터님, 지금 어디예요?]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무슨 일 있어요?]
나 지금 바쁘다. 말 걸지 마라.
내가 눈앞에 집중하려는 순간이었다.
시야 한쪽에서 헌터 파티원의 상태를 나타내는 창이 시끄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 D급(딜러)]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 S급(딜러)]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 S급(보조)
- 버프 : 시야확장(A) 비행(A) 얼음 감옥(S)]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 S급(힐러)]
특히 소예리 헌터님 상태창이.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아 망했어요~ 아]
소예리 헌터의 잘린 채팅을 마지막으로 헌터 채팅이 뚝 끊겨 버렸다.
내가 눈을 크게 뜬 순간이었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 S급(보조)
- 상태이상 : 중독(A) 오른팔마비(A)
- 버프 : 시야확장(A) 비행(A) 얼음 감옥(S)]
상태이상이라고?
전투할 때나 뜨는 버프와 상태이상이 순식간에 파티창을 어지럽혔다. 그때 내 앞에 푸른 시스템창이 불쑥 떴다.
[돌발 게이트의 범위에 들어섰습니다!]
뭐?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 외 14인, B급 던전 <샹들리에 반란>에 입장합니다]
[던전 목표 : 보스 클리어]
뭐라고?
눈을 크게 뜨는 사이, 주변 환경이 일그러졌다.
게이트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익숙한 느낌이 온몸을 휘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