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에델바이스 백작.
신흥 귀족의 등장에 귀족가 사교계는 들끓었다.
특히 기존 귀족들 중, 검보다는 사교계에서의 영향력으로 이름을 날리던 귀족 가문들은 대놓고 에델바이스 백작에 대한 적개심을 표출하기도 했다.
“이건 기존의 질서를 깨는 일이 아니오?”
“포를랭 자작가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소?”
아무리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이 제 숙부를 따르던 자들을 숙청했다고 해도, 그와는 별개로 검보다 입이 살아있는 귀족들은 여전히 존재했다.
그리고 그들은 정통 실력파 귀족들과는 사이가 안 좋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실력파 귀족들이 에델바이스 백작의 등장을 반기는 건 아니었다.
“순식간에 수십 갈래로 갈라지던 속검을 보았소?”
“포를랭 자작가에 그런 인재가 있을 줄은.”
“……지나치게 도드라지면 시선을 받는 법이거늘.”
이미 고여버린 귀족들은 천재의 출현을 반갑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20여 년 만에 교단의 허가를 받은 가문이라니. 너무 스포트라이트가 쏠리지 않았는가?
흔치 않게도 실력파 귀족들과 사교계의 귀족들은 같은 생각을 했다.
에델바이스 백작의 기를 눌러줄 필요가 있겠다고.
***
난 살면서 내가 땅 주인이 될 줄은 몰랐다.
물론 한국에서도 땅을 가질 순 있었지만, 난 그것보다 게이트 왔다 갔다 하는 게 더 수입이 좋은 사람이라 신경 쓰지도 않았다.
아니 그리고, 한국에서는 부동산 좀 가졌다고 이렇게 하녀랑 뭐시기들이 줄줄이 딸려오지는 않는다고!
“저택 내부는 이미 오시기 전에 정리를 마쳤습니다. 하지만 급히 준비한 만큼 부족한 점이 있을까 우려됩니다.”
집사는 조심스럽게 말하며 내게 몇백 평은 넘어 보일 것 같은 거대한 저택을 소개했다.
“이전 주인이 넓은 저택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때문에 저택이 조금 작은 감이…….”
“됐어.”
여기서 더 넓으면 무슨 운동장이냐? 난 손을 내저었다. 어차피 내가 쓸 방 몇 개에 사용인들 거처만 있으면 충분하니까.
한국에서 쓰는 주택도 조그맣지는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크진 않았다.
“그럼 식사 먼저 하시겠습니까?”
집사는 정말 안도한다는 얼굴로 물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줄줄이 목욕시중이며 마사지며 무슨 고급 호텔 풀서비스를 받고 나서야 난 하녀들에게서 풀려났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와…… 침대…… 녹는…… 다…….]
침대 속에 있자니 녹아내릴 것 같았다. 미리 따뜻한 물주머니로 데워 놓은 이불 속이 나를 반겼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네, 여러분이 좀 괘씸해 보일 정도로 마음에 드네요]
나 빼고 RP던전 시작 직후부터 이런 거 풀서비스로 즐겨왔다는 소리?
난 침대에 녹아들면서 괘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근데 좋은 점만 있는 건 아니에요. 아마 며칠 후부터―]
피곤한 나는 헌터 채팅을 읽다 말고 잠들어 버렸다.
***
그렇게 꿀을 빤 지 며칠 후, 난 읽다 만 헌터 채팅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난 준비되지 않은 멍한 머리로 난제와 부딪혔다.
“가주님.”
아침부터 급히 달려온 집사며 기사들이 나한테 이구동성으로 보고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현재 영지로 들어오는 모든 길의 영지에서 저희 가문으로 향하는 상단들에게 통행세를 걷기 시작했습니다.”
“통행세?”
이게 뭔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야? 무슨 동네 깡패야? 통행세 걷게?
“……원래는 안 걷던 걸, 걷기 시작했다는 거지?”
“예.”
집사는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난 그에게 손짓했다.
“걷기 시작한 영지의 주인이 누군지 싹 알아와.”
이건 누가 봐도 견제였다.
어디 해 보자 이거지?
일단 적이 생겼으니 적의 목록을 알 필요가 있었다.
“알겠습니다.”
“너는?”
난 집사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기사를 가리켰다.
댁은 왜 거기서 오줌 마려운 강아지처럼 서 있어?
“영지 내 몬스터들의 동태가 수상합니다!”
“?”
귀족들이야 그렇다 치고, 몬스터들은 왜? 난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건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분께서 어제 주인님께 전하라 이르신 것입니다.”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분?
받아보니 누군지 알겠다.
기사가 건네준 지도에는 ‘S’라는 신재헌의 이니셜이 휘갈겨져 있었다.
“지도?”
펄럭. 펼쳐 보니 지도는 에델바이스령 전체를 자세하게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군데군데 산이나 숲 같은 곳에 ‘E’, ‘D’ 같은 알파벳이 보였다.
어디서 많이 본 지도 형식인데…… 아.
“몬스터들 수준이구나.”
그걸 내가 알기 쉽게 랭크로 드러낸 게 분명했다. 기사가 묵례했다.
“예.”
지도를 자세히 살펴보니 C급 이하의 몬스터들뿐이었다.
이 정도면 괜찮은 거 아닌가?
“여기에 무슨 문제가 있나?”
내 말에 기사가 재차 묵례했다.
“일부 몬스터들의 수준이 비약적으로 상승했습니다. 특히 이곳과 이곳이…….”
기사가 가리킨 곳은 ‘F’, ‘E’로 표시되어 있던 곳이었다. 난 눈썹을 치켜올렸다.
“어느 정도로?”
“멜테인 숲에 있던 몬스터와 비슷한 수준의 몬스터들이 나타났다고 기사들이 보고했습니다.”
“멜테인이라.”
지도 아래쪽으로 내려와 보니 ‘D’라는 등급이 보였다. 이 정도면 나 혼자도 쓸어버릴 수 있겠는데.
문제는 기사가 아닌 일반 병사들이 처치하기엔 힘들 거란 점이었다.
지난 며칠 동안 살펴본 에델바이스 영지의 병사들은 대부분 E급, 기사들은 A급 수준이었다.
기사들의 수준이 높은 건 신재헌이 보낸 기사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움직일 수 있는 기사는?”
A급이 가면 던전에 익숙하지 않은 자들이라도, 쉽게 처리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기사는 난감한 얼굴이었다.
“저택을 경계할 최소한의 인원을 두고 모두가 나가 있는 상태입니다. 일반 병사들이라도 파견한다면,”
“그건 안 될 것 같고.”
난 팔을 몇 번 돌려 보았다.
며칠 호강했으니까 좀 뛰어 볼까?
“내가 직접 갈게.”
어차피 D급 정도면 몸 풀기 딱 좋을 것이다.
난 내 능력치 창을 켜 보았다.
지난 며칠 동안 잡스러운 퀘스트와 함께, 일일퀘스트까지 끝냈더니 나온 스탯이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 / 25세, 딜러(D)
체력 : 141139 (+45000)
근력 : 3103
마력 : 5322 (+400)
민첩 : 2095 (+5)
지구력 : 1370 (+200)
방어력 : 709 (+5)
특수 : 도금 목걸이(C, ‘헌터 신재헌(S)’ 애장품 보너스 : 획득 경험치 +50%)]
아침마다 일일퀘만 깨도 하루 10% 체력 보너스라니, 끝내준다, 진짜.
비록 내 현재 등급은 D급이지만, 능력치는 이미 D급하고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예?”
난 내 말에 당황한 기사에게 손짓했다.
“갈 준비 해.”
말(馬)이든 식량이든.
난 그렇게 말하면서 지도를 훑어보았다. 그러면서 몬스터가 강해졌다는 곳의 위치에 주목했다.
다른 가문의 경계와 가까운 곳에서만 유독 문제가 생기고 있었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
난 왜 아닐 것 같지? 응?
***
―콰콰쾅!
S급씩이나 돼서 D급 몬스터하고 이만큼 박진감 넘치게 싸울 일이 얼마나 있을까?
내가 몬스터를 직접 잡으러 출정한 사이, 에델바이스 가의 집사는 내 영지에 통행세를 물린 괘씸한 놈들의 목록을 가져왔다.
[하시엘 백작가, 텔렛 후작가, 익시엘 자작가…….]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목록은 대부분, 몬스터가 강해진 곳 근처에 맞닿아 있는 영지의 주인들 목록과 겹쳤다.
“아무리 봐도 이거, 그놈들이 장난질 친 건데.”
아니, 몬스터를 잡아 족치진 못할망정 남의 영지 몬스터 강해지라고 마력석 던져 넣어줄 건 뭐야?
몬스터 등급을 어떻게 올렸나 했더니, 이 동네에는 마력석이란 게 있어서 마물들을 강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했다.
물론 경우에 따라 몬스터만 강하게 해주는 건 아니라서, 마력석은 매우 비싼 물건이었다.
그런데 저놈들은 나 좀 엿 먹여 보겠다고 그 비싼 몬스터들 사이로 마력석을 던져준 것이다. 아직 증거는 발견 못 했지만 백 퍼센트다.
“진짜 몹쓸 놈들이네.”
[Coin : 70037]
하지만 몹쓸 놈들도 쓸모는 있었습니다.
지난 며칠간 내가 쓸어버린 몬스터들은 나랑 랭크가 비슷한 덕에 신의 상점 코인을 심심찮게 줬다.
그때마다 서브 퀘스트가 우르르 깨지는 건 덤이었다.
그놈들은 나더러 엿 좀 먹어보라고 했겠지만, 안타깝게도 이쪽엔 달콤한 당 덩어리만 떨어진 셈이었다.
돌아가면 스킬 열쇠나 까 봐야겠다!
[은하 서버 스킬 열쇠 – 30000C]
원래 이런 뽑기는 집에 앉아서 경건한 마음으로 해야 하는 거다.
―스릉!
내가 마지막으로 뻗은 검에 꽥꽥거리던 몬스터가 절명했다.
그러면서 지난 며칠 동안 우르르 깨졌던 서브 퀘스트가 마지막으로 클리어됐다.
[서브 퀘스트 : 비정상적인 변화 클리어!]
[FULL체력+15000, 지구력+132, 근력+455, 마력+233]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 / 25세, 딜러(D)
체력 : 181139 (+45000)
근력 : 4103
마력 : 5822 (+400)
민첩 : 2695 (+5)
지구력 : 1730 (+200)
방어력 : 1009 (+5)
특수 : 도금 목걸이(C, ‘헌터 신재헌(S)’ 애장품 보너스 : 획득 경험치 +50%)]
한번 체력이 높아지기 시작하니, 일일퀘스트랑 같이 진행하면 체력이 하루가 다르게 올랐다.
물론 은하 서버에 저장된 내 S급 수치에 비하면 귀여울 정도지만, 체력 10으로 시작해서 여기까지 온 게 어디냐?
문만 열 번 세게 닫아도 사망 위기였는데, 장하다, 신유리!
“그런데 랭크업이 좀처럼 안 된단 말이지.”
난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리 퀘스트를 박살 내도 C급으로 승급하는 퀘스트는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신재헌은 그랬다. 내가 좀 더 간절해야 한다고.
간절히 랭크업을 해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아니, 이거 빨리 깨서 헌터협회 놈들 머리 깨러 가는 거 말고 더 간절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고?
“주인님, 마차로 모실까요?”
그때 D급이라는 상태창 내용을 꼬나보던 내게 기사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물었다. 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말 타고 돌아가자.”
마차 뭐 하러 타냐, 답답시럽게.
난 귀여운 B급 기사와 함께 한바탕 수련을 하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주변 가문 견제 장난 아니다 진짜]
통행세에 몬스터에 아주 가지가지였다.
몬스터는 내 손으로 처치했고, 문제는 통행세였지만 그것도 내게는 쉬운 일이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통행세? 그거 황가 허락 없이 걷으면 불법인데?]
하지만 정답은 늘 가까이 있는 법.
난 헌터 채팅으로 바로 황제 폐하께 저 불충한 귀족 종자놈들을 찔러 버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통행세는 없던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아마 저놈들은 평생 궁금할 것이다. 에델바이스 백작가에서 어떻게 바로 황가에 찔러 넣었는지.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너무 심하다 싶으면 말해요~ 내가 실수인 척 날려 줄게]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예?]
실수인 척 영지를 날려 버리겠다고요? 실화냐?
하지만 이 나라 황제란 놈은 그 말을 묵인했다. 아니, 묵인하다 못해 한술 더 떠서 말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그럼 난 그놈들 먼지 털어서 처형 구실이라도 만들어 볼게요]
이 나라 이렇게 막장으로 굴러가도 되냐? 아무리 RP던전 세계라지만 괜찮은 거야? 응?
내가 그렇게 인간으로서의 정을 유지하려 애쓸 때, 사건이 하나 더 터졌다.
“가주님!”
며칠 전 아침처럼 급하게 달려온 집사가 하얘진 얼굴로 내게 보고했다.
“신시안 교의 고위사제들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무슨 연락?”
난 눈곱도 떼기 전에 어이없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에델바이스 영지에서 신전을 철거하라는 신의 뜻이 내려왔다고 합니다.”
“응?”
신의 뜻이 지금 헌터 채팅에 잠들어 있는데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