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네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구나. 너를 따르던 포를랭의 기사들이 얼마나…….”
그는 이마를 짚으며 슬퍼했다.
와, 남우주연상감이다.
난 카나페를 먹다 말고 박수를 칠 뻔했다.
안 돼, 페널티!
“이렇게 가문을 떠나는 건……. 너도 생각이 있겠지. 하지만 세냐, 알고 있잖니? 이렇게 가문을 떠난 가주를 따를 기사는 어디에도 없을 거다.”
그럼 가문 후계자한테 독 먹여서 후계자 된 놈은 잘도 따르겠다, 그죠?
난 키칼을 돌아보았다.
내가 아무 말도 안 하고 빤히 쳐다보자, 키칼이 움찔했다.
그래, 찔리는 게 많으셨겠지.
계승식 때 강화제 먹은 것도 있고. 무엇보다 내가 나간 사이에 포를랭 자작 부부가 키칼에게 말했을 가능성이 컸다.
내가 독에 대해 알게 됐다고.
“……큼. 큼큼. 어쨌든 집으로 돌아가서 이야기하자.”
제 발이 저린 키칼이 몸을 돌렸을 때였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늦어서 미안해요]
주이안 씨의 헌터 채팅이 불쑥 올라왔다. 그와 동시에 시종의 목소리가 울렸다.
“신시안 교 신성 예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오.”
그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조리 문으로 쏠렸다.
이 연회가 사실상 허울 좋은 연회로 끝날지, 새로운 백작위가 탄생할지는 순전히 교황의 입에 달려 있었으니까.
하지만 내 앞에 있는 키칼과 키아스 놈을 포함해, 귀족들은 긴장하는 기색도 없었다.
교단과 황가의 사이가 안 좋은 탓에 긴 시간 새로운 가문이 생겨나지 않은 걸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쿠웅.
거대한 문이 열리면서, 은빛과 녹빛 자수로 장식된 새하얀 사제복을 입은 주이안 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연회장의 조명을 받아 단안경의 금빛 줄이 반짝였다.
“제가 너무 늦었군요.”
그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연회장을 울렸다.
신재헌에게 살짝 인사한 그가 곧장 내게로 시선을 주었다.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오는 길에 소식을 들었습니다. 에델바이스 백작이라…….”
주이안 씨의 목소리가 홀을 담담하게 울렸다.
부드럽게 미소 지은 그가 내게로 걸어왔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그의 시선은 명확히 내게 향해 있었다. 그 순간 시스템창이 우르르 떴다.
[RP던전에서의 신분이 변동됩니다.]
[포를랭 자작가 소속 → 에델바이스 백작가 소속]
[‘히든 퀘스트 : 가주’ 클리어!]
[FULL체력 +7777]
오, 체력 좋고.
“축하하신다는 말씀은?”
“세상에.”
벙쪄 있던 귀족들이 뒤늦게 반응했다.
주이안 씨의 말은 내 새로운 작위를 교단에서 인정해준다는 뜻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곧 귀족들이 저마다 웅성거리는 소리로 홀이 시끄러워졌다.
“지금껏 교단은 새로운 가문을 허락한 적이 없지 않았소?”
“불과 2년 전만 해도…….”
2년 전에 누가 새 작위 받으려다가 퇴짜 맞았나 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년 전의 교황과 황제는 지금의 교황과 황제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모종의 이야기라도 있었던 건지…….”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도 들렸다. 사람들은 교황과 황제의 관계에 주목하고 있었다.
“신성 예하께서도 에델바이스 백작의 그 놀라운 속검을 보셨으니, 순수히 감탄하셔서 인정해주신 것이 아닐지…….”
그 놀라운 속검은 안타깝게도 주이안 씨가 대한민국에서 질리게 본 것이었다.
그들이 저마다 추측을 하는 동안 헌터 채팅은 빠르게 올라갔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같은 자리에 있는데 아는 척 안 하기 힘들당]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연회가 끝나면, 따로 자리를 갖는 게 좋겠습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장소만 말해주세요]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와~ 신유리 헌터님 신분 상승 기념 뒤풀이~]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내 의견은????]
나 오늘 피곤한데? 하지만 내 의견은 관심도 없는지 사랑스러운 헌터팀은 채팅을 계속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신유리 헌터님 못 오면 우리끼리 하죠.]
내 축하 연회라며? 신유리 없는 신유리팀이야?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와인창고 털어서 감]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신시안 교는 금주입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걸리지만 않으면 되죠]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안주는 내가~ 그런데 얼마 없는데 저번처럼 작아지면 안 돼요?]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소예리 헌터님…….]
이 인간들을 콱!
물론 수다 떠는 건 채팅에서만이었다.
교황과 황제인 주이안 헌터와 신재헌은 물론, 마탑주인 소예리 헌터님도 서로 간단하게 예의만 갖출 뿐 눈 한 번 제대로 마주치지도 않았다.
“교단과 황가 사이가 괜찮아졌다고 생각하기에는…….”
“아무런 교류도 없지 않았소. 지금도 분위기가 얼음장인 걸 보면.”
그 모습에 귀족들은 역시나 하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눈치 빠른 놈들도 있었다.
“그래도 이전보다는 신성 예하의 눈길이 많이 부드러워지신 것 같소.”
그리고 그 말은 우리 헌터팀 모두에게 들렸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그렇다는데?]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이런…….]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주이안 헌터, 이쪽 좀 째려봐요. 눈매가 너무 선하시네]
헌터 채팅의 단점은 끄기 전엔 눈을 감아도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난 이 표정관리 힘든 상황과는 별개로 헌터 채팅을 끌 수가 없었다.
주이안 헌터 놀리기가 세상에서 최고 재밌다.
슬쩍 주이안 씨를, 아니, 교단 쪽을 보니 주이안 씨 표정이 걸작이었다.
연갈색 머리칼에 선한 인상을 지닌 그가 누군가를 노려본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조금 난감함과 엄격함(?)이 섞인 얼굴로 신재헌을 돌아보고 있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무슨 이단자 보듯 하시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아 웃기지 말자 제발]
아무래도 사이 나쁜 교황과 황제 연기를 하는 건 좀 힘들 듯했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그냥 둘이 공식석상에서 만나지 마세요]
내 결론에 소예리 헌터의 웃음이 채팅창을 뒤덮었다.
멀리서 주이안 씨가 이마를 짚는 것이 보였다.
웃음 참기 챌린지는 그렇게 연회 내내 계속되었다.
아, 간신히 페널티는 안 받았다.
***
연회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
내 뒤에 당연히 붙어 있었던 포를랭 가의 기사들과 하녀들은 없었다.
그야 내가 에델바이스 백작이 되었으니 붙어 있기는 뭐했을 것이다.
“음…….”
생각해 보니 그 B급 퓨어딜러 꼬꼬마 친구들에게는 조금 미안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들도 곧 진실을 알게 될 터였다.
저들이 모시던 가문이 얼마나 쓰레기였는지.
진짜 세니아를 생각하는 기사들이라면 이 결정을 이해해주겠거니, 생각할 때였다.
“안녕하십니까, 에델바이스 백작님. 처음 뵙겠습니다.”
내 앞에 웬 하녀 군단이 나타났다. 아니, 자세히 보니 하녀만 있는 건 아니었다.
한눈에 봐도 수준 높아 보이는 기사들은 물론 하인과 집사로 보이는 사람들까지 모여 있었다.
“반가워. 근데.”
난 떨떠름하게 물었다.
“누구지?”
우리 혹시 아는 사이니?
내 질문에 하녀들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오늘부로 에델바이스 백작님을 모시라 명령받았습니다.”
“누구한테?”
누가 이런 고마운 짓을? 내 말에 하녀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감히 제 천한 입에 담을 수 없는 분의 귀한 뜻이었습니다.”
저렇게 말할 정도면 웬만한 신분이 아닐 텐데…….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나한테 하녀 종합선물세트 쏜 사람 이실직고]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넵 접니다]
그럼 그렇지.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에델바이스 저택 어디 있는지도 모르시잖아요. 걔들이 모시고 가서 저택도 잘 쓸고 닦고 잘 때도 지켜주고 밥도 해주고 빨래도 해줄 겁니다]
하긴, 사용인 하나 없이 새 영지에 입성하는 것도 모양새가 좀 웃기긴 했겠다.
그래도 이런 것까지 준비해줄 줄은 몰랐는데.
신재헌이 원래 이렇게 세심한 놈이었나?
딜러답게 나랑 같이 머리 빈 걸로 우리 파티에서 top2를 달리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땡큐땡큐]
여하튼 덕분에 편해지겠다. 난 집사로 보이는 자에게 손짓했다.
“그럼 안내해.”
“바로 모시겠습니다.”
하녀들 사이를 걸어 나온 집사가 나를 안내한 지 한 일 분쯤 지났을 때였다.
준비되지 않은 내 앞에 불청객들이 튀어나왔다.
“널 따르던 기사들의 실망이 크다. 알고 있느냐?”
그건 당연히 포를랭 자작이었다.
포를랭 자작가 사람들은 연회에선 차마 못 했던 말을 줄줄이 풀어놓을 모양인지, 아예 복도에 진을 치고 있다가 나를 맞이했다.
“폐하께서는 기사들의 의리를 아시는 분. 지금이라도 포를랭 가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한다면 충분히 참작해주실 게다.”
포를랭 자작이 뻔뻔하게 입을 열었다.
와.
자작의 머릿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 같았다.
포를랭 자작가의 기사들은 핑계일 뿐이고, 에델바이스 백작가의 땅과 작위가 포를랭 자작가 손에 들어오길 기대하는 것이 분명했다.
“뿐만 아니다, 세냐.”
포를랭 자작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이제는 네가 명실상부한 포를랭의 후계자인데, 누가 네 자리를 위협한단 말이냐?”
듣자 하니 어이가 없었다.
댁들이 위협하겠죠?
언제는 한번 병든 몸은 언제 무너질지 알 수 없다면서?
“전,”
그런 쓰레기통에 돌아갈 마음은 추호도 없는데요?
하고 뱉을 뻔했지만 여기서 신유리 버전으로 말하면 곤란했다.
그렇다고 입 닥치고 있기에는 너무 빡이 쳤다.
“언제 제 등에 검을 들이밀지 모를 가문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어요.”
세니아, 이 정도는 괜찮지? 응?
이 정도는 똑 부러지게 얘기할 수 있죠? 그렇죠, 우리 세니아 착하죠~
[…….]
다행히도 시스템창의 경고는 없었다.
그래, 사람이 호구가 아니면 이 정도는 해줘야지.
“……새로운 가문이 선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신성 예하께서 무슨 생각으로 허가해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포를랭 자작이 재차 나를 설득하려고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을 하셔도 돌아가지 않습니다.”
내가 미쳤습니까? 너희 아가리에 좋은 거 밀어 넣어 주게?
내 강경한 눈빛에 포를랭 자작이 입을 다물었다.
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귀족 사회의 무서움을 모르는구나. 귀족의 세계에서는 홀로 설 수 없다. 인간이,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게 될 게다.”
요컨대 인맥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주겠다는 뜻이었다.
그러게요. 인맥이 얼마나 무서운지 곧 알게 되실 것 같네요.
난 헌터 채팅창을 보며 자비롭게 웃어 주었다.
“쉽지 않은 길이 될 게야. 우린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테니까.”
포를랭 자작부인이 옆에서 입을 열었다.
가문의 후계자가 갑작스럽게 후계자 자리를 박차고 나간 걸로 이미 얘기가 돌고 있었다.
그 이야기가 자기들 유리한 방향으로 흐르도록 언플이라도 하겠다는 뜻인가?
마치 내가 권력욕에 미쳐서 백작이 되어 뛰쳐나간 것처럼.
“저 역시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나도 당연히 깡통처럼 가만히 걷어차일 마음은 없었다.
니들도 인맥의 무서움을 맛보렴!
“가자.”
포를랭 자작이 몸을 홱 돌렸다.
포를랭 가 사람들이 졸졸 그를 따라 사라지는 모양새가 웃겼다.
난 그들을 보다가 헌터 채팅을 켰다.
[세니아 드 에델바이스(신유리)>>> 포를랭 가에서 인맥의 무서움을 보여주겠다는데?]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좋은 말이군요.]
주이안 헌터가 바로 답했다. 그 뒤로 채팅이 줄줄이 올라왔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그러게, 어디 해 보라고 해요]
전혀 타격 없는 교황님과 황제 폐하 사이로, 마탑주님 말이 뚝 떨어져 내렸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어머나, 권력의 맛~ 맛있겠다~]
요컨대 전혀 긴장감이 없었다.
다시 표정관리의 위기가 찾아왔다. 흡, 숨 참자, 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