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폐하께서 드십니다!”
연회가 열릴 홀 앞. 대기하고 있던 시종은 신재헌의 모습을 보자마자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어이구, 우렁차기도 해라!
난 귀를 틀어막을 뻔했다.
시야 끝에 자꾸 삶은 문어 숙회 같은 옷자락이 눈에 띄었다.
문어 숙회 생각하다가 초장에 참기름 소리까지 들으니까 이제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아, 이 동네에는 없겠지, 문어 숙회…….
내가 아련한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볼 때였다.
“그리고…….”
시종의 당황한 시선이 내게 쏠렸다. 저 아련한 시선은 필시.
‘♧네가 여기서 왜 나와……?♧’
시종 턱 아래로 자막이 지나가는 것 같았다. 하긴, 황제 폐하와 갑작스레 함께 등장한 신흥 귀족(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라니 호칭하기 난감하긴 하겠다.
“굳이 시끄럽게 굴지 마라.”
신재헌은 시종의 고민을 그냥 끝내 버렸다. 아무 말도 하지 말란 소리였다.
“알겠습니다.”
―쿵쿵.
깊이 고개를 숙인 시종이 거대한 홀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소리 없이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문틈으로 붉은 카펫이 보였다. 그 양옆으로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귀족들의 모습도.
오…….
왕정제라는 게 새삼 실감되는 모습이었다.
신재헌이 그 안으로 먼저 발을 내디뎠다. 나 역시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
붉은 카펫을 밟는 황제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던 귀족들은, 내가 지나갈 때마다 움찔했다.
당연히 삶은 문어 숙회가 걸어가고 있기 때문은 아닐 터였다.
“폐하와 함께……?”
아주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내 귀에 들렸다.
그게 S급인 신재헌 귀에 안 들릴 리가 없었다.
“이 연회의 주인공과 내가 같이 들어오는 게, 의아한가?”
그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바닥에 처박혔다.
그대로 우리는 사람들 사이를 걸어 연회장 가장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
붉은 카펫이 계단으로 이어지는 걸 보면서 난 걸음을 멈추었다.
세니아의 지식이 여기 위로 올라가면 안 된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음, 대충 황제 자리라는 이야기겠지.
단 위를 올려다보니, 의자에 앉고 있던 신재헌과 눈이 마주쳤다. 모두가 고개를 숙인 가운데, 시선이 마주치는 건 우리 둘뿐이었다.
난 RP던전 페널티가 오기 전에 픽 웃어 주었다. 그다음 재빨리 표정을 챙기는 걸 잊지 않았다.
“그럼,”
신재헌 역시 말하다 말고 내게 웃어 주었다. 은밀한 장난을 치는 악동 듀오라도 된 기분이었다.
“―연회 시작 전에, 약속부터 지켜야겠지?”
그의 화려한 옷이 번쩍거렸다.
전에 소예리 헌터의 통나무집에 올 때보다 좀 더 화려한 셔츠와 겉옷을 입은 그는, 아까 오는 길에 분명히 그랬다.
‘이 정도면 소소하게 입은 거야.’
아, 예. 생각해 보면 대한민국에서의 신재헌도 패션에 관심이 없는 축은 아니었다.
난 그냥 집에서 반팔 입고 굴러다녔지만 이놈은 나름 차려입고 다녔던 것 같은데.
생각해 보면 주이안 씨 정장 다음으로 많이 본 게 이놈 셔츠차림이었다.
“의전관.”
내가 생각에 잠긴 사이 불쌍한 의전관이 다시 불려 나왔다. 저번에 그 사람이었다.
그는 이번엔 가타부타 말을 얹는 대신, 붉은 천 위에 화려한 예식용 검을 감싼 채 그에게 올려 주었다.
문양을 보니 카르만 황가의 예식용 검인 듯했다.
―탁.
검집째 검을 집은 그가 단을 내려왔다.
그 사이 고개를 들고 있던 귀족들이 다시 고개를 숙이는 게 느껴졌다.
세니아의 본능이 이때는 무릎을 꿇어야 한다고 강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정말 기사 서임 받는 것 같네. 한쪽 무릎을 꿇자, 신재헌의 검집이 내 어깨에 닿았다.
“세니아 경.”
그는 드 포를랭이라는 내 성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대신 헌터 채팅으로 이상한 말을 지껄여댔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너의 죄를 사하노라.]
아, 웃을 뻔했다. RP던전 페널티 위기에 처한 난 발끈했다.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아 진지한데 웃기지 마라 진짜]
그러는 사이 그가 말을 이었다.
“경을 짐의 새로운 기사이자…….”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가문명. 그렇게 중얼거린 그가 곧 입을 열었다.
“에델바이스 지방의 백작으로 삼고자 한다. 마침 빈 땅이 많아 좋아.”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아니, 에델바이스?]
하필 그거?
하필 에델바이스야?
내가 머릿속을 볶는 사이 귀족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에델바이스 지방이라면 꽤나 탐내는 가문이 많았는데…….”
“신흥 귀족이 가져갈 줄이야.”
하지만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내 머릿속을 괴롭히는 건 대한민국에서 들었던 노래였다.
그것도 게이트 터지기 전, 한 10년 전에 고등학교에서 배웠을 것 같은.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아니, 왜 가문명으로 사람 아픈 기억을 건드려?]
그리고 난 그 노래에 안 좋은 기억이 있었다.
아직 교단의 허가가 떨어지지 않아서 그런지 헌터 채팅에 뜨는 내 이름은 여전히 세니아 드 포를랭이었다.
내 시선이 그것에 머무는 사이, 신재헌의 채팅이 올라왔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 아픈 기억이라니, 좋은 추억인데.]
좋은 추억은 개뿔! 난 기뻐하는 미소 사이에 살기를 감추기 위해 애써야 했다.
저놈은 고등학교 때 나랑 같은 반이었다.
요컨대 내가 에델바이스 음악 가창시험 때 겨우 기본점수 받았던 걸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때 음악선생님은 내 노래를 듣고 경악했다.
‘이건 음악에 대한 결례야!’
기본점수를 주는 것조차 작곡가에게 미안하다는 걸출한 명언을 남긴 음악 선생님은 저놈한테는 만점을 주었다.
생각해 보면 신재헌은 예술 쪽으로 못하는 게 없었다.
음악이면 음악, 그림이면 그림. 게이트만 안 터졌어도 음대나 미대에 갔을지도 모르겠다.
“앞으로도 카르만을 위한 검을 닦기를 바란다.”
내 머릿속이 과거의 아픈 기억에 찔리든 말든 신재헌은 고개를 돌렸다.
물론 헌터 채팅은 빠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에델바이스가 왜 아픈 기억인데요?]
생각해 보니 소예리 헌터도 마탑주로서 이 연회에 초대됐을 터였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신유리 헌터 엄청난 음치거든요]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헐, 진짜? 어쩐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소예리 헌터는 박장대소했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뒤풀이로 노래방 안 가는 이유가 있었네~ 괜찮아요, 사람이 어떻게 모든 걸 잘해~]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그림도 못 그려요 사람이 지렁이로 퇴화함]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아오 저걸 콱]
이래서 동창이 같은 헌터팀이면 안 된다! 내가 주먹을 꽉 쥐었다.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영어시험에서 baby bady로 써서 틀린 게 ㅋㅋㅋㅋㅋㅋ]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아 언제적 흑역사를]
지는! 우리가 서로를 깎아먹는 배틀을 하고 있을 때였다. 주이안 헌터의 채팅이 올라왔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조금 늦을 것 같아요. 마차 바퀴가 고장났다고 해서……. 곤란하네요.]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천천히 와요!]
아니, 교황이 탈 마차 바퀴를 박살 내 놓은 네가지 밥 말아먹은 놈은 또 누구냐?
저쪽 교단도 하여간 어딘가 썩어 있는 게 분명했다.
우리가 신나게 채팅을 하는 사이, 신재헌이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살벌했던 분위기를 풀기 위한 것이기도 하니, 다들 즐겁게 즐겨주었으면 좋겠군.”
그의 말에 귀족들이 조용해졌다.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지켜봐서 알겠지만, 난 이유 없는 처형은 하지 않는다.”
그 말에야 귀족들의 분위기가 조금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내 친구가 폭군이라니!’ 하는 클리셰 소설들은 삼만 편쯤 본 것 같지만 이걸 실사판으로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채팅으로는 내가 아는 신재헌 그대로인데, 눈앞에 보이는 그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폐하, 이번에…….”
그가 단에서 내려와, 테이블에서 잔을 집어 들자 귀족들이 슬금슬금 그의 주변에 모이기 시작했다.
원래 신재헌이 빙의하기 전에도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을 지지했던 귀족들이었다.
한두 명이 모이기 시작하자 너도나도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난 그 광경에 감탄했다.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이야 인기 장난 아니네요]
뒤늦게 존댓말을 붙인 느낌이지만 아무튼 존댓말로 말해 주었다.
신재헌은 그런 데 신경 쓸 틈도 없는지 헌터 채팅으로 탄식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아…….]
그가 사람들 사이에 묻힌 동안, 나도 그에게서 적당히 떨어진 테이블로 다가갔다.
간단한 핑거푸드로 배라도 채울 생각이었다.
음, 저기 연어 카나페 비슷한 게 보이는데.
문어 숙회가 연어 카나페 이종사촌을 향해 손을 뻗는 모습은 아마 걸작일 터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세니아 드 포를랭 영애를 여기서 뵙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어떤 귀족이 불쑥 다가와 입을 열었다.
아직 교단 허가가 안 났다고 굳이 포를랭을 붙이는 건가?
왠지 모를 불쾌감에 돌아보니, 오징어 비슷하게 생긴 귀족이 느끼한 표정으로 잔을 들어 보이고 있었다.
그 뒤로 웅성거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공교롭게도 D급치고는 귀가 좋은 편이라 그들의 뒷담이 내 귀로 쏙쏙 굴러들어왔다.
“죽어가던 자 아니오? 어떻게 저런 힘을…….”
“게다가 가문의 후계자 자리를 꿰찼다지 않소. 그런데 새 작위를 원한다고? 얼마나 권력욕이 강하면…….”
하여간 이런 데 입만 산 놈들 많은 건 알아줘야 한다.
난 대충 연어 카나페 이종사촌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저도 제가 이런 과분한 자리에까지 오게 될 줄은 몰랐답니다.”
물론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세니아 버전이었다. ‘저도 사실 검술 대회에 허접한 놈들이 그렇게 많을 줄은 몰랐습니다’ 같은 소리를 했다간 페널티감이었다.
“실력이 좋은 기사더군요, 세니아 영애. 역시 유서 깊은 포를랭 가의 일원답습니다.”
난 결국 옆의 오징어남을 다시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진짜 교단 허가가 안 나서 포를랭, 포를랭 하는 거야?
아까 에델바이스 받은 거 못 들었니? 노래 불러줘?
“그런데 새로운 작위를 가지신다면 사실상 포를랭 가의 후계자는 없어지는 게 아닌지…….”
남자가 다시 말할 때에야, 남자의 머리 위에 이름이 떴다.
세니아도 자주 보는 사이는 아니었는지, 지식 업로드(?)에 시간이 걸린 듯했다.
[키아스 드 그람(C)]
[그람 자작가의 장자. 그람 자작부인은 포를랭 자작부인과 소꿉친구 관계이다.]
그 밑으로 설명 시스템창이 곧바로 올라왔다. 아하.
이놈이 아까부터 깐족거린 이유가 있었구만.
내가 잔을 들어올릴 때였다. 키아스 뒤로 포를랭 자작가 사람들이 오는 게 보였다.
특히 포를랭 자작 부부는 배신감에 가득 찬 얼굴로 이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 옆의 키칼은 애써 희열을 숨기는 얼굴로,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연어 카나페 이종사촌을 입 안에 쏙 넣어 버렸다.
[RP던전 페널티 위기! : 정도 이상의 뻔뻔함]
그러자 눈앞이 번쩍거렸다.
세니아, 사람이 좀 뻔뻔해질 수도 있어야지! 내가 슬쩍 손을 내렸을 때였다.
“세냐. 대체 무슨 짓을 한 게냐?”
내 앞에 도착한 키칼 놈이 다짜고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