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던전의 S급 시한부 영애 (29)화 (29/218)

29화

[세니아 드 포를랭 / 25세, 딜러(D)

체력 : 90000 (+45000)

근력 : 3000

마력 : 5300 (+400)

민첩 : 2000 (+5)

지구력 : 1300 (+200)

방어력 : 700 (+5)

특수 : 도금 목걸이(C, ‘헌터 신재헌(S)’ 애장품 보너스 : 획득 경험치 +50%)]

D급으로 각성하자마자 능력치가 깔끔하게 재정리되는 게 보였다.

저게 아무래도 세니아의 몸에 최적화된 D급의 능력치이리라.

“이번 검술 대회의 우승자는 세니아 드 포를랭 영애입니다!”

내 우승을 못 박는 기사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함성이 쏟아졌다.

***

검술 대회 시상식.

조용하게 정리된 검술 대회장에서 신재헌은 근엄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를 감싼 황좌는 휘황찬란했다.

근엄.

하지만 내 시야 한쪽으로 지나가는 헌터 채팅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그래도 전직 S급이 꼬꼬마들 사이에서 너무했네]

그는 근엄한 얼굴로 깐족대고 있었다.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꼬꼬마라니, 아까 카를렌타 영애 못 봤어요? 장난 아니던데]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기본적인 능력치 차이도 있고~ 신유리 헌터님 잘했어요!]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힐링은 조금 있다가 해 드릴게요. 힐링 스킬은 빛이 눈에 띄어서…….]

반면 다른 헌터팀 사람들은 힐링 그 자체였다. 한국이었으면 이미 신재헌 머리 한 대 쥐어박았다!

“세니아 드 포를랭이라…….”

그때 신재헌이 입을 열었다.

황좌에 나른하게 앉아 있던 그가 흥미롭다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게 보였다.

“조금 전 보인 경의 실력에 크게 감탄했다.”

그렇게 말하니 정말 황제 같았다.

나를 내려다보던 그의 시선에 곧 흥미가 드러났다. 사실 난 근엄한 표정보다 저게 더 익숙했다.

저게 신재헌이 늘 나를 보는 표정이었으니까.

물론 자세는 달랐다.

신재헌은 싸울 때 빼고는 나무늘보처럼 늘어져 있는 놈이기는 했지만, 황좌 한쪽에 몸을 기댄 채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있는 모습은…… 굉장히…….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야 허리아파 보여]

나도 모르게 반말이 튀어나갔다. 신재헌은 그 자세에서 꼼짝도 안 하고 채팅으로 대꾸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S급 물로 보지 마라]

S급의 코어근육 자랑에 난 어이가 없어졌다.

이거 D급 서러워서 살겠냐?

내가 인자한 미소를 짓는 사이 신재헌이 입을 열었다.

“실력 있는 자는 그 실력에 걸맞은 대우를 해줘야겠지. 자…….”

내게 몸을 기울인 그가, 턱을 괴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세니아 드 포를랭 영애, 내게 원하는 것이 있는가?”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어이구 우리 신재헌 헌터 근엄해요]

아, 깜빡이 좀 켜고 웃기라고! 난 순간 표정 관리에 실패할 뻔했다.

“이제 포를랭 가의 시대가 열렸군.”

“폐하께서 보는 앞에서 실력을 드러냈으니…….”

“그런데 아까 그 속검은 포를랭 가의 검식과는 거리가 멀지 않았소?”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슬쩍 시선을 돌려 살펴보니 포를랭 가와 나를 번갈아 보는 자들이 많았다.

그리고 포를랭 가의 사람들은 아주 기분 좋은 얼굴이었다. 키칼 드 포를랭을 제하고.

특히 자작 부부는 더했다.

내가 가문의 치부를 드러내는 대신, 입을 닫고 검술 대회에서 우승했으니까. 포를랭 가의 이름이 드높아졌다고 생각하고 있으리라.

하지만, 기쁨은 거기까지만 즐기시기 바랍니다!

안녕해, 안녕!

“폐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내가 입을 열자 좌중이 조용해졌다.

난 시선을 들고 신재헌을 흘끗 보았다.

그러다가 조금 먼 곳의 좌석에 앉아 있는 주이안 씨를 흘끔 돌아보았다.

‘혹시, 성기사가 될 생각은 없나요?’

그의 말이 떠올라서. 하지만 내 선택은…….

“저는 새 이름을 원합니다.”

내가 입을 열었다.

세니아라는 이름을 바꾸고 싶다는 게 아니었다.

포를랭 가문의 이름을 거부하는 것.

다시 말해 새로운 성을 받고 싶다는 뜻이었다.

어찌 됐든 성기사 말고 황제 기사 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미안해요, 주이안 씨! 생각해봤는데!

신시안 교 금주라며!

그건 참을 수가 없었어!

“새 이름이라…….”

신재헌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손끝이 황좌의 팔걸이를 톡, 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새 가문은 이미 내가 포를랭 저택을 나올 때부터 1위 상으로 약속했던 것이지만, 난 확실하게 못 박듯 말했다.

봐라, 나의 박력!

“예. 세니아 드 포를랭, 포를랭 가의 후계자가 아닌, 새로운 가문의 주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 말에 좌중 한쪽이 시끄러워졌다. 특히 포를랭 가가 있는 쪽이 더했다.

안 봐도 표정은 비디오였다. 지금쯤 포를랭 자작 부부도 키칼하고 표정이 비슷해졌을 거다.

“후계자 자리를 내려놓는다고?”

“이게 무슨…….”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D급 됐다고 청력도 좋아진 듯했다.

“새로운 가문을?”

“20여 년간 새로운 가문이 생긴 역사가 없지 않았소?”

그렇게 웅성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20년 동안이나 새 가문이 안 생겼어요?]

내가 포를랭 자작저를 나오면서 새 가문을 달라고 했을 때, 신재헌은 쿨하게 OK했다. 마치 마트에 있는 빵 하나 사 주듯이.

물론 난 거기에 반드시 들어가야 할 조건을 추가했다. 꼭 크림빵이어야 해!!!

……가 아니라,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꼭 자작가보다는 높은 작위로. 포를랭에 꿀리기 싫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알았어]

쿨하게 승낙하길래 걱정 안 했는데, 알고 보니 쉬운 게 아니었던 거?

그 답은 주이안 씨에게서 나왔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교단과 황가가 함께 허락해야 새로운 가문을 세울 수 있거든요.]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아]

그런데 교단하고 황가가 사이가 안 좋았으니 허락을 해 줄 리가 있나.

게다가 새로운 가문이면 어쨌든 황제 쪽 사람이 생기는 거잖아?

대충 이해가 돼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교황하고 황제하고 수다 떠는 나랑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흐음…….”

신재헌은 고민하는 척 눈을 가늘게 떴다. 난 그의 입가에서 익숙한 미소를 잡아냈다.

내가 그와 장난칠 때 보던 미소였다.

하지만 폭군이 짓는 미소는 다른 뜻으로 보이기 마련.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싹 조용해졌다.

“좋아. 경의 활약 덕에 눈이 즐거웠으니 상을 내려야겠지.”

그가 마침내 시원하게 웃었다.

“이번 검술 대회가 황가에서 주최한 첫 검술 대회인 점, 그리고 경의 실력이 뛰어나며 지금까지 주류였던 검술과는 다른 새로운 길을 개척한 점을 고려하여…….”

새로운 길이라면 대충 잔상 스킬을 말하는 듯했다.

하긴, 포를랭에서 원래 쓰던 검술은 아니긴 하지.

“곧 있을 우승 축하연에서, 세니아 영애를 백작위에 봉하고자 한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의 옆에 있던 새하얀 복장의 남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주이안 씨 옆에 있던 사람이 아닌 걸 보니 교단 쪽 사람은 아니었다.

저건 누구야?

가슴팍에 황가의 인장을 거하게 새긴 남자는 다짜고짜 신재헌 앞에 넙죽 엎드렸다.

“폐하, 갑자기 백작위라는 큰 작위를 내리시는 것은, 아직―”

“의전관?”

남자의 말을 신재헌이 끊어 버렸다.

아, 누군가 했더니 의전관이었구나.

세니아의 지식은 그가 황가와 관련된 의식은 물론, 새로운 작위 수여에도 일부나마 관여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

신재헌이 말을 끊어 버리자, 의전관은 목구멍이 막힌 것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S급의 위압감에 눌리는 것이리라.

“그럼 그대가,”

신재헌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눈을 즐겁게 해 줄 텐가?”

그 말에 의전관은 바르르 떨기만 했다. 그러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하, 하나 새 작위에는 교단의 승인이 필요하옵니다. 아직 교단 측의 의견이…….”

“그건 내가 알아서 하지.”

신재헌이 손짓했다. 이만 물러가라는 뜻이었다.

헌터 각성도 못 한 불쌍한 일반인 의전관은 그렇게 물러갔다.

저러니까 진짜 황제 같네.

난 혼란스러운 틈을 타 신재헌을 쳐다보았다.

세니아의 지식은 황제와 눈이 마주치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들키지만 않으면 잠깐은 괜찮을 것이다.

서늘했던 그의 시선이, 나와 맞닿자 순식간에 변하는 게 보였다.

내가 알던 장난기 어린 신재헌의 얼굴이다.

물론 그것도 잠깐, 그가 입을 열 때 그의 얼굴은 다시 서늘한 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럼, 이만 검술 대회의 끝을 고한다.”

그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서늘하게 내리깔리는 검은빛 긴 속눈썹이 보였다.

오…….

센 척하네, 저놈.

***

검술 대회가 끝난 후.

귀족가에는 비웃음이 만연했다.

“오랫동안 침대에만 누워 있었다지 않았소?”

“아무리 자질 있는 영애였다고 한들, 역시 어리긴 어렸던 게지.”

귀족들은 한낱 자작 영애가 교단과 황가의 사정도 모르고 말도 안 되는 청을 올렸다고 생각했다.

“교단에서 새로운 귀족의 탄생을 허가해줄 리가 없지.”

귀족들의 생각이 대부분 이러했다. 물론 황제 앞에서 감히 입을 여는 자들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 모든 말이 신재헌의 귀에 들어오지 않는 건 아니었다.

“뚫린 입들이라고 잘들 지껄이는군.”

그는 소식을 전해 준 기사에게 손짓했다. 이만 물러가라는 의미였다.

그러면서 그는 신유리 생각을 했다.

그녀는 지금쯤 드레스룸에 있을 터였다.

포를랭 가에서 보란 듯이 뛰쳐나왔으니, 모시는 하녀가 없을 것 같아서 황가의 시녀들을 보내주었다.

아무래도 그녀가 가질 백작가의 사용인들도 구해주는 편이 좋을 성싶었다.

다른 데서 구했다간, 어느 귀족가의 스파이가 섞여 들어갈지 모르니.

“썩은 내가 나네, 썩은 내가.”

그가 중얼거렸다.

게이트 최전선의 딜러로서, 어지간하면 복잡한 일에 관여하기 싫어하던 그에게 황제는 별로 맞지 않는 직업인 듯했다.

하지만 어떨 땐 황제가 편하기도 했다.

바로 지금 같을 때.

―탁.

생각에 잠겨 그녀가 있을 드레스룸 앞에 다다른 신재헌이 실소했다.

안에서 신유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도와줘서 고마워요.”

곱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와는 달리, 헌터 채팅에는 그녀의 불만이 올라가고 있었다.

[세니아 드 포를랭(유리)>>> 님들 여기 드레스가 하얀 바탕에 레이스 끝이 보라색이에요 뭐 생각 안 나요?]

[클로나 에이센(소예리 헌터)>>> 초장~?]

[세니아 드 포를랭(유리)>>> 그쵸 나만 삶은 문어 숙회 생각나는 거 아니죠? 아 군침 돌아서 미칠 것 같네]

신재헌이 픽 웃었다.

RP던전에 처음 들어올 때에는 헌터협회 놈들을 죽여버리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특히 신유리가 시한부 영애에 빙의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더더욱.

하지만 어차피 클리어 전에는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우선 눈에 띈 건 신유리의 새로운 모습이었다.

늘 당황하는 일 없이 검으로 모든 걸 해치워 버렸던 그녀가 RP던전의 제약에 묶여 있는 모습이.

처음에는 같이 당황했다.

하지만 제게 그녀를 지킬 힘이 있다는 걸 깨닫고 나서는,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달칵.

그때 드레스룸 문이 열렸다.

문틈으로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보였다.

물론 귀족 영애들이 입는 것만큼 화려하고 긴 드레스는 아니었다.

무릎까지 오는 가볍고 활동적인 드레스.

옷 군데군데 들어간 은빛 장식은 약간의 격식도 갖추고 있었다.

“……!”

놀란 시녀들이 신재헌에게 고개를 숙였다. 신재헌은 손짓해서 그들을 모두 물려 버렸다.

순식간에 복도에 둘만 남았다.

“어때?”

신유리가 그의 눈앞에서 핑그르르 돌아 보였다.

쇼핑하러 백화점 가면 자주 하던 짓이었다.

“…….”

신재헌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모습도 사람도 익숙한데 왜, 내 기분만은 이렇게 낯선 건지.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살짝 떠올랐던 검은 머리칼이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 사이로 그녀다운, 자신감 있어 보이는 흑갈색 눈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

신재헌은 순간 그 눈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 눈이 거울처럼 자신의 모습을 담는 것에 기이하게도 신경이 쓰였다.

저 모습은, 황성 연회에서만 볼 수 있는 그녀의 모습일 터였다.

새로운 모습.

정말 이대로 시간이 멈추는 마법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가 생각했다. 연회가 끝나면 그녀는 그녀의 영지로 가야 한다. 새로운 작위를 받았으니까.

그럼 다시 먼 곳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건 싫어.

불쑥 그런 생각이 들어, 그가 미간을 좁혔다.

“씹어? 너도 초장 생각하냐?”

그러다가 신유리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아니, 난 참기름에 소금.”

“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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