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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던전의 S급 시한부 영애 (28)화 (28/218)

28화

다음 날.

검술 대회 8강 결투가 시작되었다.

8강부터는 조금 고전했지만 잔상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는 자들은 없었다.

덕분에 얼마 전까지 폐급 일반인이었던 사람치고는 수월하게 결승까지 올라왔다.

그리고 이내.

“오늘의 마지막 결투, 카를렌타 가 루릴 영애와 포를랭 가 세니아 영애의 결투입니다!”

검을 뽑는 소리가 선명하다. 결투 시작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세니아 영애.”

루릴 드 카를렌타의 눈은 진지하게 반짝였다. 어제 봤던 느끼한 상판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분명 A급이라면 내 스탯을 느낌으로나마 알 수 있을 텐데, 약해 보이는 상대에게도 방심하지 않는 것이다.

“잘 부탁드립니다, 루릴 영애!”

이런 상대라면 나도 즐거웠다.

어제랑은 달리 최선을 다할 마음이 생겼다. 난 검을 고쳐 쥐었다.

[잔상(SS+) 스킬을 사용합니다.]

[적용 대상 : 수룡의 가시비늘(B)]

이제 마력이 빠져나가는 것도 익숙했다.

루릴 영애가 인사하듯 고개를 숙이자마자, 내게 짓쳐들어왔다.

“하아!”

빠른 찌르기였다.

찌르기로 상대의 범위 안으로 뛰어 들어가 순식간에 빠른 검술을 구사하는 것이 어제 내가 본 루릴 영애의 전법이었다.

하지만 빠른 건 이쪽도 뒤지지 않았다.

―쩡! 쨍!

[밀쳐내기에는 힘이 부족합니다.]

[–3351]

[–6683]

검 몇 번 가볍게 스친 것만으로도 체력이 훅훅 깎여 나갔다.

하지만 템으로 4.5만이나 뻥튀기된 데다가, 검술 대회에서 쫌쫌따리 오른 내 체력에서 이 정도 깎이는 건 버틸 만한 수준이었다.

난 내 상태창을 확인했다.

[세니아 드 포를랭 / 25세, 딜러(E)

체력 : 78554 (+45000)

근력 : 2633

마력 : 5064 (+400)

민첩 : 1735 (+5)

지구력 : 1113 (+200)

방어력 : 615 (+5)

특수 : 도금 목걸이(C, ‘헌터 신재헌(S)’ 애장품 보너스 : 획득 경험치 +50%)]

체력이 12만을 넘으니 3천 정도 까이는 것쯤이야.

내가 공격을 거듭 받아내자 카를렌타 영애는 눈을 빛냈다.

―후웅!

그리고 검을 찌르려다 말고 갑자기 횡으로 크게 그었다.

분명 찌르기를 하려는 듯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봤는데, 뜻밖의 공격이었다.

“!”

내 눈이 잔상에 익숙하지 않았으면 그대로 중상을 입었으리라.

몸을 뒤로 훅 물렸지만 검풍이 찢고 지나가는 자리는 어쩔 수 없었다.

[–55631]

루릴은 이 기세로 밀어붙이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가만히 당하고 있을 사람이면, 게이트에서 이미 몬스터 아가리에 물려 죽었지!

[잔상 효과 : ‘수룡의 가시비늘(B)’ 유지 중]

[잔상(SS+) 스킬을 중복 사용합니다.]

[적용 대상 : ‘수룡의 가시비늘(B)의 잔상’]

잔상에 잔상을 덧입힌다.

내 잔상 스킬은 데미지를 줄 수 있다.

물론 검 본체로 치는 것만큼은 아니지만 이 세계 사람들이 그걸 알 리가 없었다.

검 하나에 잔상을 만들면 서너 개의 잔상이 그려지는데, 그 잔상에 다시 잔상을 입히면 카를렌타 영애가 보기에 내 검은 열여섯 개 정도로 불어나 보일 것이다.

“……!”

아니나 다를까, 카를렌타 영애의 검이 급격히 꺾였다.

찌르려다가 휘두르고, 그 상태에서 다시 검로를 바꾸다니 어지간한 훈련과 순발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S급인 내가 봐도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어떻게 저런 속도가……!”

카를렌타 영애 뒤에 있던 관중들이 웅성거리며 고개를 앞으로 쭉 빼는 게 보였다.

하지만 관중석에 눈을 돌릴 틈은 없었다.

이쪽으로 흐름이 넘어왔으니 공격할 차례였다.

[잔상 효과 유지 중 : ‘수룡의 가시비늘(B)’ ‘수룡의 가시비늘(B)의 잔상’]

여기에 찌르기를 함께 쓰면.

[스킬 ‘버터관자구이 먹고 싶다(E)’ 사용]

[찌르기 보너스 데미지가 가해집니다.]

‘버터관자구이 먹고 싶다!’를 외쳤으면 보너스 데미지가 더 가해졌겠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그 전에 이 자리에서 세니아가 버터관자구이를 찾았다간 꼼짝없이 페널티 받는다!

―챙! 채챙!

카를렌타 영애의 검로가 기묘하게 꺾이면서 내 잔상들을 쳐냈다.

적어도 십수 개의 잔상이 순식간에 시야를 뒤덮었을 텐데도, 그녀는 대부분의 검을 막아냈다.

[스킬 ‘포를랭 2검식(E)’ 사용]

[익숙한 검로로 검이 휘둘러집니다. 보너스 스탯이 주어집니다. (근력 +330)]

[스킬 ‘버터관자구이 먹고 싶다(E)’ 사용]

[찌르기 보너스 데미지가 가해집니다.]

스킬 랭크가 낮다는 건 다시 말해, 스킬을 중복으로 쓰기가 쉽다는 말이다.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호선을 그렸다.

아주 오랜만에 싸울 만한 상대를 만나니 딜러로서의 호전성을 참을 수가 없었다.

기분부터가 달라졌다.

수십 갈래를 그리며 들어가는 내 검끝이 경쾌하게 느껴졌다.

그쯤 되자 내 앞에 푸른 상태창이 떴다.

[헌터 소예리(S)의 ‘방구석 1열(A)’ 스킬 효과를 승인하시겠습니까?]

[Y / N]

아니, 싸우는데 상태창 띄우지 말라고!

난 고민도 없이 Y를 선택했다. 모르는 스킬도 아니었으니까.

내가 보는 시야와 청각을 소예리 헌터가 공유받는 스킬이다.

한마디로 지금 상태에서는 관람용 스킬.

내가 스킬을 승인하자마자 시스템창이 줄줄이 울렸다.

[헌터 신재헌(S)이 헌터 소예리(S)의 ‘방구석 1열(A)’ 스킬 효과를 공유받습니다.]

[헌터 주이안(S)이 헌터 소예리(S)의 ‘방구석 1열(A)’ 스킬 효과를 공유받습니다.]

벼락같이 효과 공유 요청을 했는지, 곧바로 두 사람의 이름이 올라왔다.

―쩡!

내 상태창이 보일 리 없는 카를렌타 영애는 자잘한 상처를 입으면서도 내 검을 일일이 쳐냈다.

잔상과 진짜가 구분되지 않으니 다 쳐내는 것이다.

감탄할 만한 속도였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이야, 이런 건 방구석 1열로 봐야지]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즐거워 보입니다, 신유리 헌터님.]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오 박빙]

지금 즐거워 보이는 건 여러분 같거든요?

남의 싸움에 도움은 못 줄망정 시스템창으로 사람 시야를 막아?

“하앗!”

그때 카를렌타 영애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방어적인 자세에서 공격적인 자세로 순식간에 돌변했다.

그와 동시에 그녀가 왼손을 휘둘러 내 잔상을 쳐냈다.

―파파팍!

방어구가 있었을 텐데도 그걸 뚫고 데미지가 가해졌다. 하지만 영애는 상처는 아랑곳 않고 내게로 뛰어들었다.

“!”

순간 영애와 내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은 결의로 반짝이고 있었다.

반드시 이기고 말겠다는 눈.

그걸 위해 왼팔의 상처를 감수하고 내게로 뛰어든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카를렌타 영애의 눈에서 다른 사람을 보았다.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것.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얻어야 할 것이 있는 사람의 눈.

“하아!”

저도 모르게 기합이 터졌다.

A급 딜러와 검을 정면으로 맞댈 생각은 없었지만 돌발행동에 대처할 시간이 없었다.

―쨍!

거센 금속음과 함께 시스템창이 주르륵 올라왔다.

[잔상(SS+)의 효과가 지나친 데미지를 받아 사라집니다.]

[잔상(SS+)의 효과가 지나친 데미지를 받아 사라집니다.]

[잔상(SS+)의 효과가 지나친 데미지를 받아 사라집니다.]

……

십수 개의 잔상이 데미지를 나눠 받지 않았으면 난 이미 뻗었을 것이다.

[–10336]

체력이 깎여 슬슬 시야가 어두워졌지만 난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모든 것을 건 카를렌타 영애의 공격이 무산된 지금이 기회라는 걸.

부상을 감수하고 뛰어드는 건 카를렌타 영애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난 과감하게 그녀에게 뛰어들었다.

[잔상(SS+) 스킬을 사용합니다.]

[적용 대상 : ‘헌터 신유리(E)’]

[마력이 10% 이하입니다.]

[시야가 좁아지며 급격히 피로가 몰려옵니다.]

나를 막으려던 카를렌타 영애의 검이 내 잔상을 허무하게 꿰뚫었다.

그리고 그 뒤로 내가 검을 내질렀다.

―후웅!

E급치고 빠르게 휘두른 검이 그녀의 목 바로 앞에 멎었다.

“그만!”

승부는 결정지어졌다. 내 승리였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와, 고생했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방구석 1열 스킬 이름값 했다]

줄줄이 올라오는 헌터 채팅 사이로 파란 시스템창이 끼어들었다.

[헌터 주이안(S)이 ‘기력 보충(S)’ 스킬 효과를 부여합니다.]

[시야가 회복됩니다.]

[헌터 주이안(S)이 ‘손상 회복(A)’ 스킬 효과를 부여합니다.]

[체력이 최대 체력의 15%까지 회복됩니다. (교황 보너스(+50%)]

그제야 몸이 가볍게 움직였다.

난 헌터 채팅으로 고맙다는 말을 치기 전에 카를렌타 영애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후련하지만 아쉽다는 얼굴이었다.

“좋은 결투였어요.”

내가 손을 내밀자, 영애는 어느 가문의 어떤 찌질이와는 달리 기분 좋은 미소와 함께 내 손을 잡고 일어섰다.

“언젠가 영애와 속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군요.”

그녀는 땀을 닦아내며 눈을 반짝였다.

지고도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눈.

랭크가 높은 헌터들에게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눈이다.

난 그 눈을 보다가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아.

언젠가 본 눈이다.

넘어지고 바닥을 굴러도 반드시 일어났던 사람. 눈앞이 아니라 먼 곳을 보고 있던 사람.

“영애는 꼭 더 발전할 거예요.”

난 카를렌타 영애의 손을 꽉 잡아 주었다. 이 영애는 언젠가 S급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열의 있는 눈이었다.

내가 알았다. 나는 알았다.

나는 그런 사람을 아니까.

우리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세니아 드 포를랭, 승리!”

기사의 외침과 함께 시스템창이 주르르륵 올라왔다.

[히든 퀘스트 ‘각성의 계기’ 클리어!]

[랭크가 ‘D’급으로 재조정됩니다.]

[모든 능력치가 D급의 보너스를 받아 재조정됩니다.]

D급, 랭크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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