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던전의 S급 시한부 영애 (27)화 (27/218)

27화

「모든 참가자가 입장하여 대진표 작성이 끝났습니다. 각 가문에서는 숙소로 보내드린 대진표를 확인하시어, 폐하께서 직접 참관하시는 이번 검술 대회에 실수 없이 임하시길 바랍니다.」

“오.”

대진표라. 내 상대가 될 사람들이 누군지는 알 필요가 있다.

게다가 세니아의 지식으로 아는 이름들이 있을지도 몰랐다.

절로 기분이 들떴다. 딜러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호전성이 오랜만에 머릿속에 불을 지폈다.

난 날듯이 숙소로 향했다.

본격적인 경기는, 내일 오전부터였다.

***

“포를랭 자작가의 세니아 드 포를랭 영애, 입장!”

“와아아아!”

이번에 검술 대회에 참가한 후계자들은 200여 명이었다.

그중 볼만한 경기는 몇 없다는 걸 주최 측에서도 아는지, 8강 이전의 전투는 모두 오늘 내로 끝난다고 했다.

그 후에는 강한 마물 모가지 썰어오기 등, 몇몇 어려운 조건을 통과한 평민 검사들 사이의 검술 대회가 열린다고 했다.

그거야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고.

메인 검술 대회만 생각하면 내일은 적어도 3번은 싸워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난 해 질 녘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건 벌써 오늘 내 마지막 경기였다.

콜로세움이 이렇게나 넓은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축구장 몇 개는 이어붙인 것 같은 거대한 콜로세움 이곳저곳에서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시나브 남작가의 롤랑 영식, 입장!”

“와아아아!”

내 오늘 마지막 상대는 얼굴부터 심상찮게 느끼한 놈이었다.

“영애를 이 자리에서 뵙게 될 줄이야……, 제 올해 운은 이번 검술 대회에 모두 쓴 듯합니다.”

김치 땡기게 하는 목소리가 간드러지게 뽑혀 나왔다.

그는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저 느끼한 머리통에 무슨 생각이 굴러다니는지는 몰라도 하나는 확실했다.

저놈은 이쪽을 만만하게 보고 있었다.

아마 세니아 영애가 폐병에 걸렸다는 소문 때문이리라.

16강까지 올라와서 힘이 다 빠진(?) 환자를 상대하게 됐으니 운이 좋다고 생각할 법도 했다.

“그러게요. 만나게 돼서 기뻐요.”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란다.

난 롤랑인지 뭔지에게 빙그레 웃어 주었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쟤가 지금 운 좋다고 하는 거야?]

멀리서 스킬로 대화를 엿듣고 있던 소예리 헌터의 채팅이 올라왔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저런…….]

주이안 헌터가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신재헌이 팩트를 터뜨렸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대진운이 가장 구린 것 같은데]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쯔쯔]

바쁘게 올라오는 헌터 채팅 사이로 느끼한 면상이 좀 가려졌다.

아, 고추장에 밥 비벼 먹고 싶다.

“그럼 세니아 드 포를랭 영애와 롤랑 시나브 영식의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때 경기를 알리는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푹 쉬십시오, 영애!”

그리고 시작되자마자 놈이 내게 달려들었다. 하품 나오게 느린 동작이었다.

―챙!

잔상 스킬을 쓸 필요도 없었다.

C급의 스탯이 아무리 높다고 해도 잔상 스킬에 익숙한 내 눈에 C급의 공격 속도는 느릿느릿하기 짝이 없었다.

제 운이 좋다며 싱글벙글 웃던 롤랑 시나브의 얼굴에 금이 가는 건 경기가 시작한 지 채 2분이 되기도 전이었다.

“이걸……. 이럴 수가.”

롤랑 놈은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놈이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콜로세움 한쪽을 돌아보았다.

사람들은 내가 가족들을 찾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난 그놈들한테는 관심 없었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에이, 생긴 게 멀쩡해서 3분은 버틸 줄 알았는데]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넵 어림도 없었고요]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내기 졌으니까 전에 말한 S급 망토 넘겨요]

내 경기를 흥미롭게 지켜보며 내기를 하고 자빠진 내 헌터팀 놈들을 찾고 있었다.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싸우는데 자꾸 채팅 올라와서 그슬르그든으?]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이 정도 페널티는 줘야 C급이 안 불쌍하죠]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그만큼 신유리 헌터님을 믿고 있다는 거예요.]

역시 힐링계다. 난 잠시 감동에 눈을 감았다. 그 사이 승패 판정은 끝났다.

“포를랭 가의 세니아 드 포를랭 승리! 다음 경기를 준비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난 절망의 도가니탕에서 허우적대는 롤랑 시나브에게서 신경을 끈 채로 돌아섰다.

그 뒤로는 에티드 가와 카를렌타 가 등이 언급되었다.

벌써 16강인 만큼 적어도 B급 상위거나 A급의 실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카를렌타 가의 영애가 눈에 띄었다.

“확실히 이름 있을 만하네.”

내가 지금까지 처리한 여섯 명의 상대는 모두 C급과 B급 하위 친구들이었다. 그들과 카를렌타 가 영애는 풍기는 기운부터가 달랐다.

“오…….”

게다가 그녀가 쓰는 건 포를랭 검식 같은 정형화된 스킬이 아니라, 실전용 검술이었다.

마치 게이트에서 몬스터를 대적하는 데에 익숙해진 헌터들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카를렌타 가 영애는 뭐 하다 온 사람이래요? 현역 헌터라고 해도 믿겠는데?]

사실 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의외로 답은 바로 올라왔다. 신재헌이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용병으로 몬스터를 잡으면서 돌아다닌 기간이 길었대요]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카를렌타 가의 가풍이 그래요. 후계자는 가장 험한 곳에서 키울 것.]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아니 그런 것까진 또 언제 알아봤대?]

반쯤 감탄이 섞인 내 말에는 답이 없었다.

하여간 어지간한 가문은 아닌 게 분명했다. 난 다시 카를렌타 가 영애의 경기를 지켜보았다.

키칼 같은 가짜가 아니라 진짜 A급이다.

이쪽도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역시 16강쯤 되니까 수준이 다르네.”

아까 그 C급 롤랑 놈은 지 입으로 털었던 대로 대진운이 좋아서 기어 올라온 것 같지만, 이제부터는 진짜들의 리그였다.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이거 잘하다 지는 건 아니겠지?]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신유리 헌터가 긴장할 정도로 근력이나 민첩성이 높은 딜러는 아닌 것 같아요.]

전장 전체를 봐야 하는 힐러의 눈은 무엇보다도 확실하다.

주이안 씨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 긴장하진 않아도 된단 소리였다.

난 몸을 돌렸다. 그래도 오랜만에 땀 좀 뺐으니 숙소에서 쉴 셈이었다.

그 사이 소예리 헌터가 내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왔다. 마탑주 차림이 아니라, 평상복에 로브를 뒤집어쓴 채였다.

―짝!

그녀와 하이파이브하는 사이 헌터 채팅이 올라왔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카를렌타 가에서도 신유리 헌터를 눈여겨본 것 같네요]

이건 또 뭔 소리야?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왜요?]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영상석으로 신유리 헌터 경기 찍은 거 분석하고 있다는데?]

이놈은 또 어디에 사람을 심어 놔서 저렇게 소식이 빨라?

물론 뜨악할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와, 난 분석할 영상도 없는데]

그 능력치 가지고 남의 영상 분석까지 할 정도로 노력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 나 1위 해야 하거든?

난 1위 해서 신재헌한테 반드시 받아야 할 게 있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이미 낮에 다 했잖아요]

그때 신재헌의 채팅이 불쑥 올라왔다. 난 머리를 긁적였다.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그으건 그렇죠]

이미 잔상에 익숙해진 눈은 카를렌타 영애의 검술을 샅샅이 파헤친 지 오래였다.

그녀가 어떤 검식에 따라 검을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그녀가 사람인 이상 습관이란 게 있는 법이었다.

그리고 그게 S급 딜러인 내 눈에 보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당장 그녀가 경기를 시작하자마자 공격해올 검로 몇 개는 상상할 수 있을 정도였다.

호들갑 떨긴 했지만, 그리 어려운 상대는 아닐 거다.

[포를랭 자작가 – 세니아 드 포를랭]

난 카를렌타 가 영애의 검을 생각하며 내 숙소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나보다 내 방 앞에 먼저 온 선객이 있었다.

“?”

무늬 하나 없이 새하얀 로브. 하지만 그 안에 숨겨진 연갈색 머리칼과 단안경을 보고도 누군지 모를 리가 없었다.

주이안 씨?

“할 이야기가 있어서 왔어요.”

그의 온화한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할 말 있으면 헌터 채팅으로 하면 되는데, 굳이?

“일단 들어가서 얘기해요.”

복도에서 떠들긴 여러모로 뭐했다.

난 소예리 헌터와 주이안 헌터와 함께 내 방에 들어섰다.

“무슨 일로 왔어요?”

하얀 로브 후드를 벗는 주이안 씨를 돌아보니, 그는 여느 때와 같은 온화한 얼굴이었다.

“음……. 신유리 헌터님.”

말하던 그가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뭔 일 있어서 온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혹시, 성기사가 될 생각은 없나요?”

준비되지 않은 내 앞에 뜻밖의 스카우트 제의가 떨어졌다.

여기서요? 갑자기요?

“성기사요?”

“네.”

주이안 헌터는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말했다.

난 신재헌과의 헌터 채팅을 떠올렸다. 원래대로라면 나는 황가 쪽 사람이 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주이안 씨도 같은 파티다.

내가 성기사가 되든 기사가 되든 이 세계 멸망만 막으면 되니까, 타이틀 문제일 뿐이라는 것.

“성기사가 되면 교단에 머물게 되는 거죠?”

내 말에 주이안 씨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단정하게 정리된 연갈색의 앞머리가 흔들렸다.

“네. 외부의 시선을 신경 써야 하는 황가와 달리 교단은 교황의 말이 곧 신의 말이나 다름없으니,”

주이안 씨가 옅게 웃었다.

“신유리 헌터님을 번거롭게 하는 자들도 없을 거고요. 무엇보다 위험할 일도 없을 거예요.”

그가 손을 펴 보였다.

“만일 신유리 헌터님이 성기사가 되겠다고 한다면, 제 직속 호위기사로 임명할 생각이거든요.”

“오…….”

기가 막힌 신분 상승의 기회……가 아니라 심심하진 않겠다.

물론 교단도 사람 사는 곳이니 갑작스럽게 낙하산 타고 날아든 나를 기이하게 쳐다보는 시선은 있을 터였다.

무엇보다 가문을 물려받을 후계자가 성기사가 되는 것도 드문 일일 테니까.

아무리 검술 대회 출신이라고 해도.

“한번 고민해볼게요.”

난 주이안 씨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고민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난 헌터 채팅을 쭉쭉 올려 보았다.

신재헌하고 약속했잖아?

“신재헌 헌터와 한 이야기는 저도 봤어요.”

내 시선이 헌터 채팅창을 훑어 올라가는 걸 알아챘는지, 주이안 헌터가 입을 열었다.

채팅창 너머로 그의 눈동자가 보였다.

방 안의 조명을 받아 살짝 반짝이는 단안경의 줄에 잠깐 시선을 빼앗겼을 때였다.

“물론 황가의 기사가 되는 것도 좋은 선택이지만, 자유롭게 움직이는 건 오히려 교단 쪽이 나을지도 몰라요.”

주이안 헌터가 손을 깍지 낀 채 턱을 괴었다. 살짝 웃는 얼굴이 성스럽기까지 하다.

괜히 교황 자리에 꽂힌 게 아닌가 봐.

“자유로운 것, 좋아하잖아요. 신유리 헌터님은.”

그가 그렇게 말할 때였다. 거짓말 같은 타이밍에 헌터 채팅이 울렸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신유리 헌터가 말한 거, 다 준비 끝났어요]

나와 주이안 씨를 포함해, 소예리 헌터의 시선까지 각자의 헌터 채팅창으로 향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나, 실망시킬 거 아니죠?]

검술 대회 1위 할 거지?

그렇게 묻는 말이겠지만 이 상황에서는 기묘하게 들렸다. 이상하게도 그랬다.

주이안 씨는 헌터 채팅창에서 시선을 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너무 오래 시간을 뺏었네요. 선택은 신유리 헌터님의 몫이니,”

그가 몸을 돌렸다. 새하얀 로브 후드를 뒤집어쓰며 그가 작게 말했다.

“선택, 기다릴게요.”

S급 헌터의 발걸음은 구름이라도 밟는 것처럼 조용했다.

―달칵.

문이 닫히자 난 머리를 긁적였다.

신재헌의 채팅 한마디로 여기가 갑자기 은밀한 스카우트의 현장으로 바뀌어 버린 기분이었다.

“일단 내일 이기려면 잠은 자야겠죠?”

난 떨떠름한 얼굴로 침대에 가서 얼굴을 박았다.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당근빠따지 선물 잘 닦아놓으세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묘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

그리고 한편, 그런 신유리와 방을 나서는 주이안을 지켜보던 소예리는 작게 중얼거렸다.

“염병 천병들을 떨고 있네.”

소예리는 열 살 차이 나는 어린 친구들의 기 싸움에 두 팔을 문질렀다.

어이구, 소름 돋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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