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던전의 S급 시한부 영애 (26)화 (26/218)

26화

“물품은요?”

“별장 앞에 놓고 왔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공문 역시 황가로 보냈습니다.”

주이안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가 보낸 연보랏빛 보따리에는 랭크가 낮아 평소보다 피로가 심할 신유리를 위해서 그가 특별히 제조한 포션들이 들어 있었다.

“황가 반응은 어떻죠?”

그의 말에 정보원은 조심스러워졌다.

그가 보낸 공문은 다름 아닌 검술 대회에 관한 것이었다.

황가 견제 퀘스트도 진행할 겸, 검술 대회에 힐러들을 지원해주는 대신 검술 대회 참가자 중 성기사도 발탁할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하는 공문이었다.

물론 신재헌과는 이미 협의한 사항이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 헌터님)>>> 아 퀘스트 때문에? 알았어요 콜]

하지만 이런 퀘스트 관련 업무는 채팅이 아니라 이 세계에 흔적이 남는 방법으로 진행해야 클리어된다.

황가 견제 퀘스트 때문에 황가를 공격할 순 없으니, 같은 수준의 기사를 확보하는 것으로 퀘스트를 진행하려 한다……는 핑계로 신재헌을 설득했다.

“…….”

주이안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그는 그답지 않게 거짓말을 했다. 아니, 거짓말이 아닐 수도 있었다.

99%의 진실 사이에 섞인 1%의 거짓말. 그리고 1%의 가식을 섞은 99%의 진심.

그는 신유리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성기사가 된다면, 그 위험천만한 저택에서 위협받는 대신 안전한 곳에서 함께 있을 수 있다.

랭크가 낮아진 그녀가 위험에 처하더라도 S급 힐러에 교황 스킬 보너스까지 받는 그가 옆에 있는다면 목숨을 위협받는 일은 없을 터였다.

그녀가, 성기사가 된다면.

이번 검술 대회에는 각 가문의 후계자뿐만 아니라 다른 조건을 충족한 자들도 참가한다고는 들었다.

하지만 주이안이 원하는 건 신유리뿐이었다.

물론 그녀는 현재 카르만의 귀족이니 신시안 교로 바로 돌아서면 잡음이 있겠지만, 그런 예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신시안 교와 카르만 황가의 사이를 떠나, 이 나라의 가장 큰 종교는 신시안 교였으니까.

그가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예하, 그런데.”

보고하던 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주이안이 시선을 들었다.

“별장 앞에 물건을 놓고 가는 자가 한 명 더 있었습니다.”

주이안의 눈이 크게 뜨였다.

별장의 위치를 아는 건 이 세계에 네 명뿐이다.

그리고 그 별장에 사는 두 명을 제외한다면 자신과 단 한 명뿐.

주이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랬군요.”

그는 손짓해서 정보원을 내보내면서 파티창을 바라보았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 헌터님) - S급(딜러)]

톡, 톡. 그가 복잡해지는 머릿속에서 자신을 찾으며 책상을 두드렸다.

한동안 침묵하던 그가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물었다.

“거슬리네.”

그가 입 밖에 낸 건 얼마 전 신재헌이 했던 말이었다.

그때는 그 역시도 신재헌과 같은 자를 거북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신재헌이, 거슬렸다. 이상하게도 그랬다.

***

“별장 앞에 물건을 두고 간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고?”

신재헌도 같은 시각, 비슷한 소식을 들었다. 그의 기사가 깍듯하게 인사했다.

“예. 어느 쪽 사람인지 알아볼까요?”

“아니.”

신재헌은 손을 들어 충실한 기사를 제지했다.

그가 알아봐야 좋을 일은 없었다.

교황과 황제가 같은 사람에게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이 세계 사람이 알아서는 곤란하다.

“그에 대해서는 잊어라.”

그렇게 말한 신재헌이 손짓했다. 나가 보라는 의미였다.

―쿵…….

아무리 소리 없이 문을 닫아도 S급의 예민한 청력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신재헌은 거대한 문이 닫히는 꼴을 보다가,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얼마 전 도착한 공문을 꺼내 보았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 이 던전에서 주이안 헌터가 받은 이름.

[교단 성기사 충원 관련 협력 공문]

그 아래에는 이미 자신이 승인했다는 직인이 찍혀 있었다. 제 손으로 찍은 것이었다.

그가 턱을 매만졌다.

“참 이상하지.”

분명 직인을 찍을 때까지만 해도 유쾌했던 속이 이렇게 뒤틀리는 게.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문득 아까의 채팅이 떠올라 채팅창을 올려 보았다.

[세니아 드 포를랭(유리)>>> 근데 신재헌 헌터님, 이거 랭크 각성은 어떨 때마다 되는 거예요? 능력치만 맞춰서 되는 건 아니잖아요]

신유리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랭크 각성이 어떨 때마다 되냐고?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 네가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게 뭐야?]

제가 무심코 반말로 흘려버린 채팅도 보였다. 그가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세니아 드 포를랭(유리)>>> 이 빌어먹을 RP던전에서 탈출하기? 우리 여기 넣은 헌터협회 놈들 대가리 후려갈기기?]

신유리의 답장이 보였다.

그녀는 진심인 것 같았지만 신재헌은 알았다.

그걸로는 부족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 그건 나도 동감인데 그거 말고 좀 더 직접적인 동기가 필요해요]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 반드시 랭크업해야 할 이유가 있어야 돼요, 본인한테]

그가 이렇게 답한 뒤로 신유리는 답이 없었다.

반드시 랭크업할 이유를 생각해내려고 하는 걸까.

생각에 빠지면 그녀는 말이 없곤 했다.

흑갈색 머리칼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입을 비죽 내민 채 턱을 괸 모습은 쉽게 상상되었다.

그녀는 생각에 빠지면 말이 없는 것뿐만이 아니라 주변에 신경을 안 쓰니까.

그 덕분에 신재헌은 그럴 때마다 신유리를 마음껏 볼 수 있었다.

―사각.

그의 펜 끝이 종이 위에 제 머릿속을 그려냈다.

게이트에 오기 전 어느 숱한 날, 카페의 둥그런 테이블에 한쪽 팔을 괸 채 생각에 빠져 있던 그녀의 모습을.

그날 그녀의 뒤로 날리던 단풍잎 한 장마저 그는 기억했다.

살짝 내리깔린 긴 속눈썹을 묘사하던 펜 끝이 멎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 반드시 랭크업해야 할 이유가 있어야 돼요, 본인한테]

아까 자신이 했던 말이 보였다. 멎었던 신재헌의 펜끝이 움직였다.

“‘나처럼.’”

네 옆에 서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있었던, 나처럼.

그는 그림 옆에 쓴 말을 중얼거리며 제가 그린 신유리를 보았다.

그가 그림에 조예가 있다는 건 헌터들은 물론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남들은 다 잘 그린다고 칭찬해도 그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림 속의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마음이 기묘하게 들끓었다. 용암을 삼킨 것처럼 뜨겁게 속이 탔다.

늘 함께 있을 땐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열기였다.

“아.”

그리고 그는 그 열기의 정체를 모를 만큼 어리거나 어리석지 않았다.

그저 믿을 수가 없을 뿐이었다.

―탁.

그는 차마 제 그림을 구기진 못하고, 종이를 접어 서랍 안에 넣어 버렸다. 어떻게 그려도 제가 그린 신유리는 부족했다.

진짜가 보고 싶었다.

그녀가 보고 싶었다.

***

마침내 검술 대회 날이 밝았다.

각 가문의 후계자가 참여하는 데다 황제가 직접 주최하는 행사인 만큼 규모는 컸다.

축구장 몇 개를 이어붙인 크기의 콜로세움으로 초대받은 난, 이게 무려 한 달 만에 지어졌다는 괴이한 소식을 들었다.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이거 부실공사 아님?]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그건 아니고 여긴 마법이 발달해서, 돈만 들이면 뭐든 빨리 지을 수 있더라고]

요컨대 돈지랄 했다는 소리?

하지만 황가의 위엄을 뽐내는 첫 행사를 반쯤 무너져가는 좁아터진 공간에서 진행해도 곤란하긴 할 터였다.

“포를랭 가의 후계자 세니아 드 포를랭 님, 신분 확인되셨습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이 콜로세움 건물은 넓어도 지나치게 넓어서, 검술 대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따로 쓰는 숙소까지 지정되어 있었다.

참가자 중 대부분이 각 가문의 후계자들인 만큼 그 숙소 역시도 화려하다고 했다. 구린 데서 잘 걱정은 없겠다.

“당신은……!”

문제는 내 뒤의 소예리 헌터가 입장할 때였다.

그녀는 클로나 에이센의 신분을 숨기지 않은 채, 화려한 마탑의 로브를 쓰고 왔다.

당연히 그녀의 얼굴을 본 황가 기사는 긴장했다.

“무슨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마탑과 황가 역시도 견제하는 사이였으니 저런 반응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공포의 주둥…… 아니, 무적의 입이 본의 아니게 봉인당한 우리의 온화한 클로나 에이센 씨는 생긋 웃어 보일 뿐이었다.

“마법사들도 때로는, 이런 활기찬 행사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답니다.”

그녀가 마탑의 신분패를 들어 보였다.

“혹시, 마탑 사람들은 입장시키지 말라는 황명이 있었나요?”

“그, 그건 아닙니다만.”

오는 길에 알았는데, 마탑주라는 직책은 공작가의 가주에 준하는 지위로 대접받는다고 했다.

당연히 한낱 기사가 클로나 에이센을 막을 수는 없었다.

“마, 마탑주 클로나 에이센 님. 신분 확인되었습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그녀는 관중을 위한 숙소로 안내될 터였다.

물론, 안내만.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 S급(보조)

└ 분신(S) 스킬 효과 :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 B급(보조)]

분신 스킬을 사용한 소예리 헌터는 분신을 관중용 숙소로 보내 버리고 본체만 내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왔다.

물론 헌터 인벤토리에서 마탑과는 전혀 상관없는 옷을 꺼내 입은 채였다.

“분신 스킬 오랜만에 보네요.”

난 내 뒤로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소예리 헌터에게 작게 말했다.

그녀의 스킬은 일시적으로 눈을 어지럽히는 내 잔상 스킬과는 용도가 다른 스킬이었다.

내 잔상은 눈만 좋다면 누구든 잔상임을 알 수 있다.

보이느냐와 피할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지만. 명백하게 공격용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소예리 헌터의 분신 스킬은 달랐다.

공격은 전혀 할 수 없는 대신 같은 파티원이거나 특수 스킬을 가진 헌터가 아니라면 절대 그녀의 분신이 가짜임을 알아챌 수 없었다.

“나도 오랜만에 써 봐요.”

소예리 헌터가 홀가분한 얼굴로 기지개를 쭉 켰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저놈 표정 걸작인데?”

“누구?”

어딜 보는 거지?

소예리 헌터가 한쪽 구석으로 시선을 주는 걸 보니 그녀의 분신의 시야를 공유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게 보일 턱이 없다.

뭔 표정인지 궁금해할 나를 위해, 소예리 헌터는 기꺼이 묘사해 주었다.

“키칼. 먹던 밥에서 애벌레 나온 표정 짓던데요.”

“오.”

못 본 게 한이다.

“그러고 보니 그놈 랭크도 가짜일 가능성이 높아요.”

내가 이 얘기 했던가?

저택을 나오던 날 밤에는 미처 정신이 없어서 하지 못한 듯했다. 소예리 헌터가 눈을 깜빡였다.

“A급이 아니라고요?”

“네. 너무 쉽게 이겼거든요. 무엇보다.”

난 내 머리 위를 가리켰다.

“A급이 붉은 이름이 될 때까지 강화제를 먹고도 E급 하나 못 눕히는 게 말도 안 되죠. A급치고는 내 잔상을 전혀 보지도 못했고.”

“오…….”

소예리 헌터의 눈이 반짝였다.

“내가 기회 될 때 무력화 스킬 써 볼게.”

그녀가 개구쟁이 같은 표정으로 눈을 찡긋했다.

“나이스.”

그녀의 무력화 스킬은 강화제 같은 약물의 효과를 급격히 억누르는 것이었다.

원래는 나나 신재헌이 붉은 이름이 될 때까지 강화제를 먹었을 때 후유증을 줄이기 위해 썼던 스킬이지만, 이번엔 다를 터였다.

키칼이 먹는 게 질 좋은 던전산 강화제도 아니고 그냥 강화제면, 약물의 효과가 급격히 억눌리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풀릴지도 몰랐다.

그럼 그놈의 진짜 랭크가 보일 터였다.

“그건 그렇고…… 일단 상위권으로 못 올라갈 일은 없겠네.”

난 기지개를 쭉 켰다.

오는 길에 보이는 후계자들 대부분이 C급 이하였다.

내가 이 허접한 D급 C급 사이에서, 아무리 스탯이 밀리기로서니 질 리가 없다.

난 어깨를 으쓱했다.

S급 짬이 있지, 이런 꼬꼬마 친구들 사이에서 우승 못 하면 쪽팔리긴 하겠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내겐 1위를 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난 헌터 채팅을 위로 올려 보았다.

내가 저택을 나오던 날 밤의 채팅이었다.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이번 검술 대회 우승하면 뭐 줘요?]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글쎄요. 신유리 헌터가 원하는 거?]

신재헌도 이미 내가 이길 거라고 확신하면서 말한 것 같다. 픽 웃음이 샜다.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그럼 내가 우승하면―]

내가 거기까지 읽었을 때였다. 콜로세움 전체에 목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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