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전 아직 독이라고 말도 안 했어요, 아버지.”
간신히 정신머리를 수습한 내가 말했다.
“잘 알고 계신 걸 보니, 독을 구하는 데에 도움이라도 주신 건가요?”
내 말에 자작은 이마를 짚었고, 자작부인은 눈을 감아 버렸다.
더 캐물을 필요도 없었다.
저기, 인간적으로 뭔가 변명은 한마디 해 줘야 하는 거 아니냐?
혹시 실례지만 돌으셨습니까?
……라고 물으려다가 눈앞에서 페널티가 깜빡거려서 간신히 정정했다.
“왜 그러신 거죠?”
자작 부부는 한참 침묵했다. 그러다가 자작이 입을 열었다.
“……처음엔 몰랐다.”
여기서 갑자기 그딴 근엄한 표정은 왜 짓는 건데?
“첫 계승 시험에서 키칼이 승리했을 때. 그때까지만 해도 키칼이 네게 그런 짓을 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지.”
자작이 눈을 감더니 제 사정을 줄줄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전 네가 병을 털고 다시 일어난 후에, 그 애가 네게 독을 먹였었다는 걸 알게 됐지. 또 다른 독을 먹이려고 하고 있다는 것도.”
그래서 얼씨구나 하고 도운 거야?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
“그럼 왜 그때 그만두라 하지 않으신 거죠?”
내 말에 포를랭 자작이 허리를 꼿꼿이 폈다.
여기서? 갑자기? 머리박아도 모자랄 판에?
“가문의 미래를 위해서였다.”
“네? 혹,”
―시 장래희망이 철창 속 인생이신가요?
[RP던전 페널티 위기! : 세니아 드 포를랭의 성격과 맞지 않는 발언]
그때 새빨간 경고창이 떴다.
내가 페널티를 간발의 차로 피해가는 사이 포를랭 자작이 개도 안 먹을 헛소리를 씨불이기 시작했다.
“알다시피 현 황제는 능력을 중시하는 자다. 그런데 그 숙부를 지지했던 우리 가문에서 후계자가 눈에 띄지 않으면 곤란하지 않느냐. 그런데,”
“그런데 제 몸이 약해졌으니까 키칼을 후계자로 세우기로 하셨다, 이건가요?”
다시 빨간불이 번쩍였다. 아, 욕 박을 뻔했다.
페널티 직전이라며 시야가 번쩍거렸다. 진정하자, 진정!
“가문의 후계자 자리가 독에 의해 좌지우지됐다는 게 알려지면 그게 무슨 망신이겠느냐?”
자작이 말했다.
“게다가 이미 몸이 약해진 네게 후계자 자리를 줄 순 없었다.”
진정하려는 내게 포를랭 자작은 기름을 붓기 시작했다.
“그 병이 독 때문에 생겼다는 걸 알고 계셨잖아요?”
“너도 검을 수련해 알지 않느냐? 이미 한번 망가진 몸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한 마디도 지는 법이 없었다.
“게다가 네가 아픈 사이 이미 키칼은 후계자 수업을 마쳤다. 포를랭에서 네게 더 시간을 들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
헌터 신유리의 어이가 가출했습니다.
이런 걸 부모님이라고 친근감을 가졌을 세니아가 불쌍할 지경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오는 걸 입가를 가려서 간신히 페널티를 피했다.
“세냐, 그래서 어떻게 할 셈이냐?”
그때 자작이 다시 물었다. 그건 내가 할 질문 아니냐?
“네?”
내가 집 나간 얼탱이를 찾는 사이 자작부인이 말을 받았다.
“이 일은 덮는 게 현명하단다, 세냐.”
아주 화룡점정이었다.
덮긴 뭘 덮어요? 전생에 덮밥집 사장님이셨습니까?
부부는 일심동체라더니 딱이네?
“제가 왜 그래야만 하죠?”
내가 왜? 이제 어차피 이 가문의 후계자는 나다.
키칼이 댁들 아들이라 불쌍한 건 알겠는데, 후계자나 다름없던 세니아에게 독 먹인 키칼이 더 문제 아니야?
무엇보다 세니아는 다리 밑에서 주워 왔어? 댁들 딸 아니야?
이야기 듣자 하니 빙의한 헌터 어이가 없네?
“다행히 별 문제 없지 않았니. 무엇보다…….”
지금 A급 상위에서 E급으로 내리꽂힌 게 별일 없는 거?
“―현 황제는 편법에 예민한 자다. 우리가 다시 눈 밖에 나서는 곤란하다는 것 알지 않니. 이걸 황제가 알게 되면…….”
미안하지만 신재헌은 이미 알고 있는데?
이야…….
감탄스럽기까지 했다.
난 살짝 입을 벌렸다.
게이트 안에 들어갈 때 보던 소설들에서 가끔 “가문의 명예를 위해 희생해라!” 어쩌고 하는 귀족들을 본 적은 있었다.
근데 이거 실사판으로 보니까 대박인데? 머리 한 대씩 찍고 싶은데?
“하.”
마른세수가 절로 나왔다. 더 이상 이야기를 들을 필요도 없었다.
무엇보다 나도 이딴 가문을 위해 검을 들 필요가 없었다.
“생각 잘 알겠어요.”
난 뒷얘기를 듣지도 않고 나와 버렸다.
“세냐!”
뒤에서 애절하게 부르든 말든 관심 없었다. 난 한국인이다.
자고로 한국인은 혼자 못 죽는 민족, 당하고는 못 사는 민족, 매운맛의 민족이다!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신재헌 헌터님, 나 이번 검술 대회 나갈 때 부탁 하나만 해도 돼요?]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뭔데요?]
그의 답은 바로 올라왔다. 난 복도를 빠른 속도로 가로지르며 말했다.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아무래도 포를랭 자작 부부가 자식보다는 가문이나 외부의 시선을 더 신경 쓰는 것 같거든요]
세니아에게 검은 인생이었을 것이다. A급 상위까지 치고 올라간 건 재능 덕분만은 아닐 터였다.
그런 그녀에게 키칼이 독을 먹인 사실을 묻어 주자고?
키칼을 위해서도 세니아를 위해서도 아니고 오직 가문만을 위해서, 세니아의 억울함을 묻어 버리자고?
그저 가문의 후계자만 중요하다는 듯한 태도. 난 그게 어이가 없었다.
검을 들고 남의 목을 딸 수도 있는 놈들이면 적어도, 검을 제대로 된 곳에 겨누어야 할 거 아니야?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난 우리가 RP던전 끝나고도 세니아가 이딴 가문에 속해 있는 건 아니라고 보거든?]
적어도 자신의 삶을 존중해주는 집에 있어야 할 거 아니야?
가문을 위해 희생되는 게 당연하다는 집안에 있을 필요가 없지.
내 걸음이 빨라졌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무슨 일 있었어?]
신재헌이 반말로 물어 왔다.
팀이 다 볼 수 있는 헌터 채팅이었지만 반말은 오히려 반가웠다.
그가 바로 옆에 있는 것 같아서.
아무리 남이라지만, 내가 세니아에 빙의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저들의 잔인함에 치가 떨려서인지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배신감도 배신감이지만 분노가 더 컸다.
저딴 것들도 사람이라고 저기 앉아서 찻잔 기울이고 앉아 있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제가 갈까요?]
그때 주이안 씨도 끼어들었다. 역시 걱정해주는 건 우리 헌터팀 사람들뿐이었다.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교황님이 이 시간에 어딜 오려고]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나도 갈 수 있어. 불만인 놈들 목은 날리면 되고]
이놈은 진짜 이럴 것 같아서 무서웠다.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위험한 건 아니니까 괜찮아요. 그냥 어이가 좀 없어서]
그래도 조금 마음이 따뜻해졌다. 이 개 같은 RP던전에서 진짜 서로를 생각하는 건 역시 팀밖에 없었다.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키칼이 세니아한테 독 먹인 거 자작 부부는 이미 알고 있었대요. 그런데 더 웃긴 건 숨기자고 함]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
그의 ‘?’에서 모든 의문이 느껴졌다. 난 나도 모르게 픽 웃었다.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황제한테 걸리면 죽는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신재헌도 그 말엔 어이가 없었는지 채팅이 끊겨 버렸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그런…….]
주이안 씨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것도 보였다.
주이안 씨가 천사표라서 망정이지 다른 헌터 채팅이었으면 욕부터 도배됐을―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완전 미친 XX들 아니야? 그대로 아X리에 독 쑤셔넣고 맛좋은 독 한사발 너희도 잡숴보라고 하지 그랬어요?]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대가X에 명예욕만 찬 주제에 능력도 없어 실력도 없어 난 그런 XX들이 세상에서 제일 한심하더라]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언니가 걔네들 턱주가X에 주먹 한 대씩 박아줄게! 어디야 어디?]
소예리 헌터가 있었지, 참.
소예리 헌터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뻔히 알면서도 거기 어디냐고 호들갑을 떨어 댔다.
빠르게 올라가는 채팅에 결국 웃음이 터졌다.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일단 지금은 이 집구석 나가는 게 먼저일 것 같아요]
난 내 방에 올라가서 대충 검과 짐을 챙겼다. 소예리 헌터 집에 갈 때랑 비슷한 짐이었다.
이 집구석에 더 있을 필요가 없으니까.
물론 이대로 이 집구석을 남겨놓을 생각은 더더욱 없다.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그런 의미에서 소예리 헌터님, 좀 더 신세 져도 돼요?]
내 말에 줄줄이 올라오던 소예리 헌터의 욕이 뚝 끊겼다.
사근사근해진 목소리가 내 귀에 들리는 듯했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아 물론이지~ 내가 레드카펫 깔아서 모실게요. 어디야, 어디!]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지금 저택에서 나가려고요]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아 소예리 택시 갑니다~]
다행히 소예리 헌터는 바쁘지 않았던 듯했다.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저번에 만난 곳에서 기다릴게요 땡큐]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응응 알았어요~]
소예리 헌터가 금방 달려오겠다고 호들갑을 떠는 사이, 난 신재헌을 다시 불렀다.
아니, 부르려고 했는데 신재헌의 말이 조금 더 빨랐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확실히]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나 지금 짐 다 챙겼어요 이제 난다 난다 포를랭 영지 보인다]
소예리 헌터의 호들갑 사이로 그의 말이 유독 눈에 띄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신유리 헌터에게 그 가문은 더 이상 필요없겠네요]
***
신재헌의 살벌한 말이 있은 지 몇 시간 후, 나는 저택을 나와 버렸다.
그리고 마차를 타고 간 시장에서, 정말 날아온 소예리 헌터와 함께 포를랭 영지를 벗어나 버렸다.
이 속세의 어쩌구를 잊고 난 떠납니다!
포를랭 집안 사람들은 마차를 타는 나를 보며 당연히 당황했지만 막을 수 없었다.
여차하면 내가 키칼이 한 짓을 불어버릴 거라고 생각했는지, 포를랭 자작 부부가 나를 쫓아가려는 사용인들을 막아 버렸다.
그 덕에 편히 나온 지 며칠째, 나와 소예리 헌터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원래 마탑주 방콕러였다면서요. 이렇게 돌아다녀도 페널티 안 받아요?”
내 걱정에 소예리 헌터는 쿨하게 대답했다.
“연구 목적으로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한 달도 버텼던 사람이래요.”
엄지 척. 연구 목적이라는 구실만 댄다면 어디든 쏘다녀도 상관없다는 소리였다. 문제는 이거였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바닷가에 온 거예요?”
난 검끝으로 바다 건너편에서 어기적어기적 걸어오는 물고기인간 몬스터를 가리키며 물었다.
소예리 헌터가 볼을 긁적였다.
“그건 아니고 휴양지는 역시 해안가잖아.”
그녀가 눈을 찡긋했다.
“쓰레기 치우고 쉬자, 신유리 헌터!”
그니까 그 쓰레기를 왜 휴양객이 치우냐고!
난 휴양지인지 뭔지에 오자마자 검을 휘두르며 내적 비명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