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아무리 키칼과 리카스의 대결이 일찍 끝났다고 해도, 황가 기사 에스나는 공정성을 위해 한 시간 동안 휴식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동안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설마 지겠어?”
그럴 리가. 조금 전 키칼의 전투를 살펴본 결과, 그가 쓰는 스킬은 죄다 포를랭 검식을 기반으로 한 스킬들이었다.
그리고 그건 당연히 세니아의 머릿속에 있었다.
다시 말해, 그가 검을 어디로 휘두를지 눈에 보인다는 의미였다.
[한 방에 승리할 경우 : FULL체력 +20000
2~5방에 승리할 경우 : FULL체력 +5000
6~11방에 승리할 경우 : FULL체력 +1000
12번 이상 검을 휘둘러 승리할 경우 : FULL체력 +100
패배할 경우 : FULL체력 –20000]
게다가 이런 대박 퀘스트가 뜬 이상, 최상위 보상은 놓칠 수 없었다. 난 검을 꽉 쥐었다.
―뎅―!
종이 울렸다. 계승식 재시작을 알리는 종이었다.
***
“오.”
계승식전이 열리는 연무장에는 키칼이 이미 검을 닦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꼴에 여유로운 척을 하려는 것 같은데 다리가 달달 떨리는 게 다 보였다.
그런데 그 달달 떨고 있는 볼썽사나운 꼬라지보다도 눈에 띄는 게 있었다.
[키칼 드 포를랭]
그의 머리 위에 있는 이름이 조금 새빨갛게 빛나고 있었다. 저걸 내가 못 알아볼 리 없다.
가끔 던전에서 무리하게 약물 도핑을 할 경우 생기는 현상.
가끔, 클리어하기 어려운 게이트에 들어갔을 때 신재헌의 이름이 저렇게 변하고는 했다.
무리해서라도 몬스터들을 처치하려고 할 때, 말려도 강화제를 처먹는 게 그 멍청한 놈 특기였다.
그가 강화제를 먹지 않게 하려고 옆에서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런 붉은 이름을 여기서 보다니 기가 막혔다. 그리고 어이없다 못해 화가 났다.
지금 계승식전에 자신이 없어서 강화제까지 먹은 거야?
물론 이 세계에 던전산 강화제가 있을 리는 없다.
보나마나 체력과 기력에 좋다는 음식이나 마법약 같은 걸 구해서 먹었겠지.
……그런데 뭘 얼마나 처먹었길래 붉은 이름이 되지?
나도 급할 때 강화제를 먹어 봐서 알지만, 어지간히 먹어서는 붉은 이름이 되진 않는다.
나나 신재헌도 S급 능력치로는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서나 붉은 이름이 될 때까지 강화제를 마셨다.
강화제 덕에 잠깐 동안 랭크가 SS급으로 표시될 정도로.
그럼 저놈은?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얘 E급 이겨먹으려고 강화제까지 먹었는데요?]
어이가 없어서 채팅을 치니까 곧바로 반응이 왔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키칼인가 하는 친구? 얼마나 약해빠졌길래?]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A급 정도]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엥?]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독을 쓸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정말…….]
주이안 씨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다가 덧붙였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혹시 모르니 조심하세요, 신유리 헌터님.]
역시 걱정덩어리 주이안 씨다웠다. 무슨 강화제를 먹었는지 몰라도 확실히 조심할 필요는 있어 보였다.
내가 답하려는 때였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근데 걔는 황명이 황명으로 안 보이나 보네]
난 채팅창을 보다가 멈칫했다.
다시 새삼 그가 귀족들의 목을 날려버린 황제라는 게 떠올라서였다.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때였다.
“양측 후보 준비되었다면, 계승식전을 시작하겠습니다.”
에스나 경의 목소리가 내 생각을 끊었다. 난 재빨리 헌터 채팅을 껐다.
“세냐, 너와 다시 이렇게 검을 겨루게 되다니 기쁘기 그지없구나.”
키칼이 느끼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쁘기 그지없어서 강화제까지 처먹으셨습니까?
“저도 그래요.”
난 슬슬 키칼의 이름이 FULL체력+2만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저놈 목에 한 방에 검만 겨누어도 기본 체력이 두 배가 된다!
난 몸을 낮춘 채 키칼 놈의 움직임을 살폈다. A급 따위한테 이렇게 진지해지는 건 내 인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시작!”
―스릉!
우리의 대화가 끝나자마자 에스나 경이 검을 뽑아 높이 쳐들었다. 황가의 문장이 빛나는 검이었다.
그 소리와 함께 키칼이 짓쳐들어왔다.
“하아!”
그렇게 여유로운 척 다 하더니 시작하자마자 뛰어드는 꼴이 볼만했다. 눈앞에 A급 스킬인 ‘포를랭 4검식’이 펼쳐졌다.
그리고 당연히, 그 스킬을 아는 내 눈에는 검이 어디로 날아들지 훤히 보였다.
―후웅!
물론 그걸 안다고 피하는 게 쉬운 건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잔상 스킬에 익숙해진 내 눈이 빠른 움직임을 잡아내는 데에 능숙하다는 것이었다.
난 몸을 최소한만 틀어 가까스로 공격들을 피해 냈다.
[–3337]
[–4151]
확실히 스탯 차이 때문에 스치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인 데미지를 받는다. 이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붉은 이름이 될 때까지 강화제를 먹은 놈 데미지가, 이렇다고?
나나 신재헌이 E급 근처로 검을 휘둘렀으면 이미 그 E급은 반으로 쪼개졌을 것이다.
이건 기껏해야 A급 상위 데미지다.
A급이 붉은 이름이 될 때까지 강화제를 먹었는데도 고작 A급 상위라고? S급은 되어야 하는데?
난 키칼의 이름 위 랭크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
A라고 쓰인 랭크가 이상하게 뒤틀려 있는 게 보였다. 저게 뭐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
공격이 먹히지 않자, 이를 악문 키칼이 검을 거세게 휘둘렀다. 포를랭 검식에 없는 공격이었다.
―타탁!
검끝이 아슬아슬하게 목을 스쳐 지나갔다.
[-10113]
데미지가 크다. 하지만 A급에서 붉은 이름이 될 때까지 강화제를 먹은 것치고는 너무나 약하다.
눈을 가늘게 뜬 내가 그것마저 피해내자 키칼 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이렇게 피하기만 할 거냐, 세냐!”
비겁하다는 듯이 이를 악문다. 하지만 듣는 나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강화제까지 처먹어 놓고 이것밖에 못 해?
한편 우리를 지켜보던 기사들 사이에선 웅성거림이 퍼지고 있었다.
“세니아 아가씨께서 회복하신 건 알고 있었지만…….”
“이전보다 더 빠르신 것 같지 않아? 움직임이 다르셔.”
포를랭 자작 부부도 놀란 눈치였다.
“세냐가 언제 저렇게까지…….”
그 반응에 키칼이 이를 꽉 악물었다.
“세냐!”
조바심이 나는지 쩌렁쩌렁 외치는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키칼의 검에는 점점 힘이 실렸다. 그만큼 단순무식한 공격이었지만, 스치면 사망인 공격이 날아들고 있다는 소리였다.
이거 받아치기 하려다가 팔 부러지겠는데?
“좀 진정하세요.”
난 그에게 손을 펴 보였다.
그러다가 네가 지쳐 쓰러지겠다. 뭐가 그렇게 다급해? 누가 쫓아와?
무엇보다 저렇게 설쳐 대면 이쪽에서 퀘스트를 클리어할 수가 없었다.
난 FULL체력 2만짜리 목을 보며 옅게 웃어 보였다.
그 말에 키칼의 얼굴이 뭐 씹은 표정으로 변했다.
“나를 놀리는 게지, 세냐!”
“그럴 리가요.”
사실 놀리는 거 맞다.
이놈은 좀 철저하게 밟혀봐야 한다.
제가 아무리 강화제까지 처먹는다고 해도 약해진 세니아 드 포를랭조차 당해낼 수 없는 찌질이라는 걸 깨달을 때까지.
제 위치를 확실히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내가 RP던전 클리어하고도 세니아가 고생을 안 하지.
물론 클리어된 RP던전이 어떻게 되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기분이 그렇다는 소리다!
난 검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그를 피하며 작게 말했다.
“따로 마법약까지 드신 것 같은데, 황가에서 보는 계승식에서 이러셔도 괜찮으시겠어요?”
난 아주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걸리면 황족기만죄인데 모가지 괜찮겠어?
근데 설마 이 정도 말하는 거 가지고 페널티는 안 걸리겠지?
내가 세니아에 빙의한 이상 세니아답지 않은 말을 하면 RP던전 페널티로 불이익을 받는다.
[…….]
하지만 시스템창은 조용했다. 난 나도 모르게 씩 웃었다.
세니아, 역시 할 말은 하고 사는 성격이었구나!
“그, 그걸 네가 어떻게……!”
키칼의 검 끝이 눈에 띄게 흐트러졌다.
이거 단순한 놈이네. 일단 아니라고 잡아떼야 하는 거 아니냐?
난 새빨개진 키칼의 이름을 흘끗 보다가 몸을 틀었다.
―후웅!
단순화된 공격이 내 앞의 허공을 찢을 듯 거세게 스쳐 지나갔다.
A급 검사치고는 허점이 너무나도 많은 공격이었다.
[잔상(SS+)을 사용합니다.]
[적용 대상 : 수룡의 가시비늘(B)]
신재헌이 준 내 검에 푸른빛의 잔상이 가해졌다. 마력이 빠져나갔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난 수 개의 잔상과 함께 검을 내질렀다. 물론 이 정도로 쉽게 A급이 쓰러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위협하는 데에는 충분했다.
난 이 뒤로 이을 검로를 몇 개 정도 떠올리며 손을 움직였다.
“!”
하지만 키칼에게는 의외로 빠른 공격이었던 모양이다.
“이, 이게!”
놀란 키칼은 말도 잇지 못했다. 지켜보던 몇몇 기사는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B급 기사들은 그렇다 치고 A급이 겨우 이 정도에 놀란다고?
―휘잉!
내 검의 잔상 중 뭐가 진짜인지 알아챌 수가 없었는지, 키칼 놈의 검이 허망하게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그 사이로, 내 진짜 검이 파고들었다.
흥분해서 어지러워진 시야에, 제가 강화제를 먹었다는 사실을 들켰다는 것에 충격먹은 탓인지 그는 내 움직임을 곧바로 따라잡지 못했다.
―탁!
키칼의 검이 바닥을 찍기 전에, 내 검이 그의 목에 닿았다.
“?”
난 눈을 깜빡였다.
끝? 진짜 끝? 이게 A급 수준이라고?
퀘스트가 상대를 죽이는 것이었으면 고생했겠지만, 목에 검 대는 것은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 쉽게?
“그만!”
승부가 판가름이 나자 곧바로 에스나 경이 제 검을 칼집에 집어넣었다.
척! 하는 소리가 연무장 가운데를 울렸다.
“아까 그 속도는 대체…….”
“너도 봤어? 난 잔상 몇 개밖에 못 봤어.”
“검이 너덧 개라도 되는 것처럼 순식간에…….”
흥분한 기사들이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신기하지, 얘들아? 응, 처음 봐서 그래.
미소가 비어져 나왔다. 내 잔상 스킬을 처음 보는 자들이라면 으레 저런 반응을 보이곤 했으니까.
물론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 눈앞에는 새파란 시스템창이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서브 퀘스트 : 설욕 클리어!]
[조건 ‘한 방에 승리할 경우’를 달성하여 최상급 보상이 지급됩니다.]
[FULL체력 +20000]
캬, 쾌감!
내가 주먹을 꽉 쥐었을 때였다.
시스템창 너머로 입술을 씹어대는 키칼 놈이 보였다.
저놈, 아무래도 이상하긴 하단 말이지……. 이긴 거야 좋지만 A급이 못 피할 속도는 아니었는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의 붉은 이름이 파삭 꺼지듯 빛을 잃었다. 강화제 약효가 다한 것이다.
저럴 땐 원래 능력치로 돌아오면서 극심한 피로를 겪게 된다.
“……?”
그 사실을 알면서도, 키칼이 털썩 쓰러지는 모습에 난 눈을 크게 떴다. 놈이 바닥에 널브러져서는 아니었다.
놈의 이름 옆, 기괴하게 일그러져있던 A급이란 글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설마, 이놈 진짜 A급이 아니라 강화제로 A급인 척하고 다녔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