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이게 뭐예요?”
이리 보고 저리 봐도 퀘스트 아이템 같았지만 그 외의 다른 사실은 알 수가 없었다.
주인인 소예리 헌터를 돌아보니 그녀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나도 모르겠는데…… 메인 퀘스트 관련 아이템 같거든요?”
우리 넷의 머리가 다시 모였다.
물론 신재헌과 주이안 씨는 책보다 몸이 작은 탓에, 무슨 난간에 기대는 것처럼 책에 팔을 걸친 채였다.
“내용은요?”
신재헌의 말에 소예리 헌터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펼쳐 보라는 듯이.
주이안 씨가 비켜나자 신재헌은 책 끝으로 걸어가 겉표지를 열어젖혔다.
아니, 열어젖히려고 했다.
“안 열리는데?”
S급 딜러의 힘으로도 안 열리는 책이 있다?
그건 이 책의 표지가 어지간한 바위보다 무겁다는 소리……가 아니라 책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있는 거다.
아니나 다를까, 소예리 헌터가 빙그레 웃었다.
“저만 열 수 있다고 쓰여 있더라고요.”
진짜일 줄은 몰랐지만. 그녀가 흥얼거리듯 말하면서 책을 펼쳤다.
당연히 그녀의 손에서는 책장이 가볍게 넘어갔다.
“?”
하지만 책을 연 뒤에도 우리는 의아한 얼굴을 감출 수가 없었다.
[□□□□□□□□가□□□□해□□앉꿇?]
“책 글자가 오류 났는데요?”
어이가 없어서 말이 튀어나왔다. 근데 소예리 헌터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고, 여기에 마물의 마력을 모아야 글자가 해방된대요.”
“오…….”
그런 식으로 진행된단 말이지.
우리의 시선이 다시 책에 모였다. 난 네모네모 가득한 외계어 내용을 보다가, 책의 제목을 다시 떠올렸다.
“멸, 시록.”
가운데 두 글자. 입 안에서 몇 번 굴려 보면 정답은 나왔다.
“멸망계시록?”
나랑 신재헌이 동시에 말했다.
주이안 씨가 침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것 같아요. 대륙의 멸망을 막는 게 메인 퀘스트였으니.”
주이안 씨의 작아진 단안경이 반짝였다. 그는 아예 책 위로 올라가서 글자를 읽고 있었다.
“마물은 처치하면 될 것 같은데…….”
책 위를 가로지른 그가 한쪽을 가리켰다.
“이 부분이 마음에 걸리네요.”
그가 가리킨 쪽의 문장은 이러했다.
[어□ 날 □□에 □□인들□ 들□□ 우리 사이에 섞인다. 그들□ □□의 □□을 □□으로 대항□□ 하지□, □□들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다.
그리고 이내 □□들이 세상에 □□하여 그들이 오는 곳을 □□□라 이름하고…….]
다른 곳에 비해서는 그래도 알아볼 만했다.
뭐가 와서 어디에 섞이는지 몰라도, 하나 확실한 건 뭔가 일이 잘 안 된다는 것이었다.
뭔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다고 쓰여 있었으니까.
“중요한 문장이니까 먼저 이렇게 나왔을 텐데.”
RP던전 하루 이틀 와본 거 아니다.
신재헌의 말에 우리는 모두 동의했다. 그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빨리 마물들을 해치워서 문장을 완성해 봐야겠네요.”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말을 이었다.
“일단 메인 퀘스트 아이템이 떴으니, 이 RP던전 세계 전체에 뭔가 영향이 갔을 수도 있고요.”
우리의 RP던전 클리어 목적이 ‘대륙의 멸망을 막아라’였으니 아마 십중팔구는 이 세계가 멸망에 가까워졌을 것이다.
준비되지 않은 F급 앞에 떨어진 멸망……. 난 머리를 싸맸다.
“일단 각자 자리로 돌아가서,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보는 게 좋겠어요.”
내가 손을 펴 보였다.
“그러고 보니,”
그때 주이안 씨의 온화한 목소리가 울렸다. 나를 포함한 셋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최근 마물이 폭증했다는 보고가 있었어요.”
“아, 그 보고 때문에 신시안 교에서 황가에 병력 지원 요청도 했었죠.”
신재헌이 그 말을 받았다.
“대륙에 이변이 일어나고 있긴 하다는 거죠?”
내 말에 주이안 헌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아요. 좀 더 확실히 조사해 보아야겠지만요.”
“그야 뭐.”
난 어깨를 으쓱했다.
이래 봬도 교황에 황제에 마탑주까지 모여 있으니 정보 수집은 빠르지 않겠는가?
심지어 우린 헌터 채팅으로 즉석에서 정보 교류도 가능했다.
“근데 이 상태론 무리죠.”
신재헌이 제 몸을 가리켰다.
확실히 작아진 상태에서는 무리다. 게다가 신재헌은 부상까지 입었다.
“아, 신재헌 헌터. 이리 누워 보세요.”
주이안 씨도 그게 뒤늦게 생각났는지 화들짝 놀라 신재헌을 다짜고짜 이불, 아니, 손수건 위로 눕혀 버렸다.
신재헌이 훌러덩 뒤로 넘어가며 당황해서 말했다.
“아니 다친 거 말고, 작아진 거!”
“그것도 문제지만 상처는 확실히 봐야죠.”
주이안 씨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지간한 부상으로는 병원 가기도 귀찮아하는 신재헌이었지만 그는 별다른 반항도 하지 못했다.
멀쩡한 척해도 내상이 심한 모양이었다.
“아까는 응급처치였거든요.”
주이안 씨가 손에 노란빛의 스킬을 띄우며 말했다.
“응급처치가 SS+급 치유스킬이에요?”
주이안 씨는 신재헌의 항변을 듣지 않았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소예리 헌터까지 모른 척하자, 결국 신재헌은 곱게 자리에 누워 버렸다.
그 위로 주이안 헌터의 진단 스킬이 번쩍였다.
아까보다 훨씬 밝은 빛이 신재헌의 몸에 오래 머물렀다.
주이안 씨는 살짝 눈살을 찌푸린 채 말했다.
“흉골에 미세하게 금이 가 있어요. 치유 스킬은 커다란 상처를 중심으로 치료하는 스킬이라 미세한 상처는 치료되지 않은 것 같은데…….”
주이안 씨의 손이 번쩍번쩍 빛났다.
푸른빛과 보랏빛. 오랫동안 같은 팀이었으니 스킬 색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저건 부목(S)이랑 응급처치(S) 스킬일 터다.
“2주까진 아니어도 적어도 1주일은 무리하면 안 되겠어요. 여기서 더 무리하면 치유 스킬로도 한계가 있어요.”
주이안 씨가 스킬을 다 쓴 후에 말했다.
신재헌은 그 말에 몸을 일으키더니, 팔을 몇 번 붕붕 돌려 보았다.
“그러게요. 좀 뻑뻑하네.”
“돌리지 말라고.”
지금 그거 실험할 때야? 난 집게손가락으로 그의 팔을 잡아 세웠다.
F급의 힘으로 S급의 움직임이 멈출 리가 없는데도, 그의 움직임은 거짓말같이 멈추었다.
그때, 그런 우리 사이에 케이크 한 조각이 놓였다.
그건 당연히 신재헌과 주이안 씨보다 훨씬 컸다.
“이거라도 먹으면서 얘기……. 어머나.”
거대한 포크를 들고 난감해하는 주이안 헌터를 보는 소예리 헌터의 눈이 반짝였다.
“이거보다 작은 포크는 없는데.”
그때쯤 신재헌은 찻숟가락으로 케이크를 파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빵 터진 내가 소예리 헌터에게 손짓했다.
“아가용 찾아봐요, 아가용.”
“그런 게 없다니까요.”
우린 부엌으로 가서 식기란 식기는 다 뒤져봤지만 당연히 손바닥만 해진 신재헌과 주이안 씨가 쓸 만한 식기는 없었다.
“어, 이거 쓰면 되겠다!”
대신 난 굉장한 앞접시를 발견했다.
그건 다름 아닌 음료수 병의 뚜껑이었다.
그건 공교롭게도 한국의 소주병 뚜껑과 크기가 비슷해 보였다.
“여기, 앞접시요.”
난 두 사람 앞에 뚜껑을 나란히 놓아 주었다.
옆에서 소예리 헌터가 웃다가 바닥으로 무너져 버렸다. 나도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들 앞에 놓이니 병뚜껑도 들통처럼 커다래 보였던 것이다.
“그냥 퍼먹고 말지.”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듯 신재헌이 찻숟가락을 들고 케이크에 덤볐다.
주이안 씨도 동감했는지 눈을 빛내며 포크를 들었다.
그리고 둘은 곧, 케이크 한 조각의 반의반도 못 먹고 뻗어 버렸다.
……배불러서.
***
신재헌과 주이안 씨는 쪼꼬미 물약 효과가 끝나자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리고 돌아가기 전.
“수련이 끝나면 포를랭 저택으로 돌아가는 거죠?”
독 얘기를 자세히 듣고 나를 걱정하던 주이안 씨는 은빛 막대 하나를 꺼내 보였다.
“소예리 헌터, 여기에 스킬을 좀 담을 수 있을까요?”
“물론이죵~”
보조계 헌터인 소예리 헌터. 그녀에게는 ‘스킬 부여(SS)’라는 스킬이 있었다.
그녀의 시그니처 스킬이기도 했다.
우리 헌터팀이 쉽게 게이트를 공략할 수 있는 비결 중 하나이기도 하고.
온갖 물건에 온갖 스킬을 다 부여할 수 있었으니까.
“그럼 독 감지 스킬로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하.”
소예리 헌터가 가볍게 만들어낸 ‘마법 은빛 막대’는 그렇게 내 손에 쥐어졌다.
“음식, 조심해요.”
주이안 씨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그의 옆에서 신재헌이 말했다.
“이상한 거 먹이려고 하면 바로 채팅 치고.”
그들은 내게 몇 번이나 당부를 하고 돌아갔다.
왜 그래, L급 물가에 F급 던져놓은 부모들처럼?
……물론 부모 빼곤 맞는 소리긴 했다.
아오, 이놈의 RP던전을 콱!
그리고 소예리 헌터와 며칠 동안 이곳저곳을 쑤시고 다니던 나도, 계승식 전날 포를랭 저택으로 귀환했다.
“이거 성장하는 맛이 있네.”
그동안, F급에서 E급으로 승급한 건 물론이었다.
……컨디션이 박살 나는 바람에 C급은 못 됐지만.
그 SS급 멧돼지 놈이 와서 설치지만 않았어도 컨디션이 박살 날 일은 없었을 텐데!
[체력 : 20183 (+45000)]
그래 봐야 아이템을 제외한 내 풀체력은 2만에 불과했다.
아이템 보너스를 받아서 6.5만이라니, 말세였다.
“이 정도면 엄청나게 오른 거긴 한데…….”
난 상태창을 보며 팔짱을 끼었다. 문제는 상대가 A급이라는 거다.
그래도 칼을 제대로 맞지 않는 한 한 방에 쓰러지지는 않을 테니, 해볼 만하다. 게다가…….
[마력 : 1970 (+200)]
마력도 굉장히 많이 올랐다.
이거 때문에 소예리 헌터 옆에 찰떡처럼 붙어 있었다! 조금이라도 마력 영향 받아보려고!
그 결과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E급 딜러가 마력 2천이면 기이할 정도로 높은 거였다.
[잔상(SS+)]
물론 이 스킬을 제대로 사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지만.
난 상태창을 도로 닫았다. 그래도 내 검 하나 잔상을 만들어 쓰는 데에는 문제없는 마력량이었다.
내가 그렇게 시스템창을 살필 때였다.
E급이 되어 일반인보다는 더 좋은 눈을 가지게 된 탓에, 창밖으로 지나가는 거슬리는 놈을 발견하고 말았다.
“키칼?”
그는 밤인데도 검을 들고 수련장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러더니 꼴에 검을 진중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다가, 열심히 포를랭 검식을 따라 휘둘러대기 시작했다.
“불안하긴 한가 보지?”
아까 내가 돌아올 때만 해도, 마차 앞에서 ‘세냐, 걱정했잖아.’ 하면서 좋은 오빠 흉내는 다 내던 놈이었다.
여유작작해 보이던 면상에 지금은 다소 조급함이 떠올라 있었다.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내가 마물한테 물려 죽었길 바랐을 텐데, 내가 며칠 사이에 몰라보게 건강해져서 나타났으니까.
저래 봐야 A급에서 검 몇 번 휘두른다고 수준이 높아지지는 않는다.
난 그 한가한 꼴을 눈에 잘 담아 주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드디어 황가에서 사람이 도착했다.
계승식의 시작이었다.
***
“제1기사단의 선임기사 에스나입니다.”
포를랭 가의 계승식을 보러 온 건 무려 황제 직속 기사였다.
확신하는데, 저 사람은 신재헌이 직접 골라서 보냈을 것이다.
혹시나 키칼 놈이 수를 쓰지 못하도록, 엄격한 자를 보냈겠지.
그 생각이 맞음을 증명하는 듯, 그녀의 눈은 날카롭게 포를랭 가 이곳저곳을 훑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황가의 칙명을 직접 받고 온 자였으니, 아무리 귀족이라도 함부로 반말을 할 수 없는 건 당연했다.
포를랭 자작 부부가 그녀를 공손히 맞이했다.
“계승식을 치를 분들이, 키칼 드 포를랭, 리카스 드 포를랭, 세니아 드 포를랭 세 분이 맞습니까?”
둘째는 원래 방콕라이프였는지 얼굴 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딜러 마크 뒤에 붙어 있는 구리구리한 기운은 키칼하고 똑같았다.
“맞습니다.”
우리 셋이 동시에 말했다.
우리의 말에 기사는 준비했다는 듯 통 하나를 꺼내 들었다.
새까만 천으로 덮여 안쪽은 보이지 않는 통이었다.
“하나씩 뽑으십시오. 한 분은 부전승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세니아의 지식은 이전 계승식도 똑같은 절차로 이루어졌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키칼 놈이 부전승이 되면 귀찮을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뽑은 순간이었다.
“오.”
[부전승]
부전승 티켓을 뽑은 건 나였다.
내 뽑기 운이 또!
그걸 확인한 키칼의 얼굴이 숨김없이 구겨졌다. 그리고 리카스는 덤덤한 얼굴로 자리로 돌아갔다.
“그럼 리카스 드 포를랭과 키칼 드 포를랭의 1차 계승식전이 있겠습니다.”
기사 에스나가 통을 탁 소리 나게 닫아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미 연무장 한가운데에 준비된 계승식전 자리를 가리켰다.
난 리카스와 키칼이 그쪽으로 향하는 동안, 그들의 머리 위를 흘끗 보았다.
이미 세니아가 그들의 수준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그들의 랭크는 선명하게 보였다.
A급인 키칼과 B급인 리카스.
수준 차이는 현격하다. 결과는 금방 나올 터였다.
계승식을 지켜보던 포를랭 가의 기사들도, 포를랭 자작 부부도 그 사실은 알고 있는지 리카스를 지켜보는 사람보다 나를 흘끔흘끔 쳐다보는 사람이 더 많았다.
심지어 리카스 드 포를랭마저 긴장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제가 질 줄 알고 있다는 듯이.
―챙!
“키칼 드 포를랭, 승리!”
아니나 다를까, 결과는 10분도 채 되지 않아 나왔다.
리카스는 검을 손에서 놓치자마자 항복의 뜻으로 손을 들어 보였고, 기사 에스나가 곧바로 승리 사인을 주었다.
키칼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검을 치켜드는 순간이었다.
[서브 퀘스트(조건부 클리어) : 설욕]
내 앞에 퀘스트가 떴다. 조건부 클리어 퀘스트?
[키칼 드 포를랭을 꺾을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압도적인 실력을 과시하여 그에게는 절망을, 사람들에게는 기대를 심어 주세요.]
퀘스트 아래를 보니 클리어 조건이 가관이었다.
[한 방에 승리할 경우 : FULL체력 +20000
2~5방에 승리할 경우 : FULL체력 +5000
6~11방에 승리할 경우 : FULL체력 +1000
12번 이상 검을 휘둘러 승리할 경우 : FULL체력 +100
패배할 경우 : FULL체력 –20000]
이건 퀘스트가 아니라 도박 같은데요?
선택의 여지가 없는 난 얼탱이가 나간 얼굴로 검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