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교황을 찾는 것 같으니 그다음으로 주이안 씨에게 시선이 쏠리는 건 당연했다.
“누구 데리고 왔어요?”
내 말에 주이안 씨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몰래 나왔습니다.”
“?”
그럼 저놈은 뭔데?
우리가 의문을 가진 순간 멀리서 정답이 울려 퍼졌다.
“이곳에 들끓는 마물들을 처단하라! 성하와 신시안 교를 위하여!”
아무래도 신시안 교의 충실한 신자인 귀족이 마물 소탕이라도 하려는 모양이었다.
의도는 좋았지만 우리 상황에는 노땡큐였다.
“일단 두 분은 숨는 게 좋지 않을까?”
소예리 헌터가 신재헌과 주이안 씨를 가리켰다.
동감이다.
하필 신시안 교의 충실한 신자인 귀족이라면, 교황 얼굴도 황제 얼굴도 다 알 거 아니야?
“……!”
두 남자의 시선이 부딪쳤다. 주이안 씨가 급히 신재헌을 부축했다.
“일어날 수 있겠어요?”
“일어날 수야 있는데,”
신재헌은 아직 몸을 제대로 움직이기 힘든 듯했다.
그 사이 말발굽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진군하라! 신시안 님을 위하여!”
난 머리를 싸맸다.
“상황 다 끝났는데 뭔 진군이야!”
그 사이 신재헌은 침대에서 내려와 휘청거리고 있었다. 저 상태로 피하는 건 무리였다.
“소예리 헌터, 혹시 숨길 수 있는 스킬 없어요?”
온갖 잡다한 스킬에 밝은 소예리 헌터이니 뭔가 있을 법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파티의 도라에몽 소예리 헌터는 고개를 저었다.
“나 투명화 스킬은 없어요.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녀가 바닥을 가리켰다.
“둘 다 땅에 30분만 묻혀 있을래요?”
“예?”
주이안 씨가 당황하는 사이 내가 머리를 다시 싸맸다.
“되겠냐고!”
신재헌은 그 사이 주이안 씨의 팔을 잡았다. 일단 자리를 피할 셈인 듯했다.
“아,”
물론 몸 상태는 별로 협조적이지 않았다. 그가 재차 비틀거리자 주이안 씨가 그의 머리에 힐링 스킬을 퍼부었다.
“이 상태론 못 움직여요, 신재헌 헌터.”
이렇게 되면 방법은 다시 하나뿐이었다. 난 더 고민할 것도 없이 신의 상점을 열었다.
“미안하다, 한 번만 더 먹자!”
내가 꺼낸 건 당연히 쪼꼬미 물약이었다.
처음 보는 물건에 당황한 주이안 씨와, 그래도 두 번째라고 익숙해진 신재헌의 입에 나란히 쪼꼬미 물약이 들어갔다.
“독 아니에요!”
꿀꺽. 두 사람이 쪼꼬미 물약을 삼킨 순간이었다.
―포퐁!
눈앞에 새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두 사람이 작아지는 소리였다.
난 주이안 씨와 신재헌을 재빨리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물론 신재헌은 좀 더 조심스럽게 넣어 줬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신유리 헌터님? 이게 무슨…….]
당황한 주이안 씨가 주머니에서 탈출하려고 했다. 안 돼!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가만히 있어요]
신재헌의 채팅 후로 두 사람이 주머니에서 뭐라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S급이면 들렸겠지만 안타깝게도 일반인의 귀에는 그들의 대화가 들리지 않았다.
그들을 간신히 숨긴 그 순간이었다.
“간악한 마물은 어디에 있느냐!!”
위풍당당한 귀족이 모습을 드러냈다. 뒤에는 한눈에 봐도 수백 명은 되어 보이는 기사들을 대동한 채였다.
그들은 모조리 C급이었다.
오, 멧돼지 도시락 세트인가?
“해치웠답니다.”
그때 소예리 헌터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 번 생각하지만 저 대외용 얼굴이며 목소리는 정말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클, 클로나 에이센?”
귀족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움찔했다.
이전에 포를랭 기사들과 만났을 때와는 달리 붉은 머리칼로 돌아온 소예리 헌터는 단연 눈에 띄었다.
그리고 덕분에 귀족은 그녀를 알아보는 듯했다.
“마탑에서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지? 아니, 온 겁니까?”
귀족은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대뜸 반말을 하려고 하다니, RP던전만 아니었어도 소예리 헌터의 정의의 지팡이가 날아들었을 터였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말본새가 귀여운 친구네.]
“몬스터가 있다기에, 처치할 겸 나왔어요.”
다행히 이번엔 말과 채팅이 바뀌지 않았다. 소예리 헌터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이곳은 마탑 소유의 땅입니다만……. 병사를 이끌고 오신 건, 교단에 혹여 다른 뜻이 있다는 것으로 생각해도 될는지요?”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불만이면 계급장 떼고 붙자!]
말조심, 아니, 채팅조심 하라고!
조마조마한 나를 사이에 두고 유려하게 쏟아지는 말에 귀족이 당황했다.
“그, 그게 아니라 최근 신성 예하께서 직접 마물을 토벌하시느라 업무가 과중하시어, 이 부족한 몸이라도 도움이 될까 하고…….”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혹시 얘네 장래희망이 멧돼지 밥인가?]
귀족이 길게 주절거리기 시작하자 소예리 헌터의 미간이 좁아졌다.
성격 나온다!
난 재빨리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근데 그 마물이 사라졌어요. 방금 여기 계신 마탑주님이 예쁘게 구워버리셨답니다.”
난 빙그레 웃어 주었다.
마탑주와는 달리 유명하지 않은 내 얼굴은 알아보지 못했는지, 귀족이 나를 흘끔거리며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우리 뒤쪽을 돌아보았다.
“구워……?”
뭐가 그렇게 의아한가 하고 보니 나무가 부러지고 박살 난 숲의 상태는 화재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아차.
“잘랐나?”
그게 중요하냐! 난 두 손을 펴 보였다.
“아무튼 신성 예하께서 얼마나 민생에 신경을 쏟고 계시는지 알겠어요. 감사한 마음으로 봉헌이라도 드리러 가겠습니다.”
“마탑에서 그러하시다면…….”
내가 마탑 쪽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 귀족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馬)머리를 돌렸다.
“크흠. 간악한 마물이 신시안 님의 은총으로 정화되었다! 일동 전방을 향해 함성!”
“와아아아아!”
은총(물리). 좀 물리적인 힘이긴 하지만 은총으로 해결된 건 맞지. 응응. 그니까 얼른 가.
난 기뻐하며 다시 돌아가는 귀족과 기사들을 재빨리 배웅해 주었다.
사기가 충만한 귀족이 멀리멀리 퇴장한 후에야 난 어깨를 늘어뜨렸다.
“일단 돌아가서 신재헌 상태부터 살펴봐요.”
내가 손짓했다. 소예리 헌터가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난 옆으로 치워 두었던 시스템창을 무심코 앞으로 당겨 보았다.
[어둠에 물든 마물(SS+) 퇴치 보상]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
일단 우리는 소예리 헌터의 거처로 돌아왔다.
그리고 돌아오자마자 난 작아진 주이안 씨와 신재헌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런 약도 있었군요. 해독도 안 되고…….”
주이안 씨는 신기한지 여러 가지 스킬을 써 보고 있었다.
신재헌은 쪼꼬미 물약이 두 번째라 그런지 테이블 위에 드러눕는 모습이 익숙해 보였다.
“혹시 여분의 약이 있나요, 신유리 헌터님?”
“있죠.”
사실 여분이 아니라 새로 사는 거지만.
난 어차피 무료인 쪼꼬미 물약을 주이안 씨 앞에 내려놓아 주었다.
주이안 씨는 자기랑 비슷한 크기의 약병을 낯선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슬그머니 병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때 눈을 감고 있던 신재헌이 한쪽 눈만 뜨고 말했다.
“그거 약병 잘못 만지면 박살 나요.”
“아.”
주이안 씨가 재빨리 손을 거뒀다.
“박살 내도 되는데.”
내 말에 주이안 씨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까지 살펴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조심스레 거절하는 주이안 씨 대신, 소예리 헌터가 쪼꼬미 물약을 덥석 집어 들었다.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신의 상점에 이런 물건이 많은 거예요?”
“별거 다 있어요. 아까 말했듯이 원래 제 스킬이나 아이템 가져오는 것도 가능하고요.”
랜덤이지만.
“그럼 아까는 잔상 스킬 뽑은 거야?”
신재헌의 질문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검지 하나를 세워 보인 채로, 자랑스럽게!
“원큐에 뽑았다!”
“오.”
원래 내가 뽑기 운이 좀 좋긴 했다.
“마력은 괜찮아요?”
근데 그때 주이안 씨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잔상 스킬에 마력이 많이 드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작아진 채 나를 올려다보는 얼굴이 깜찍했다.
난 두 사람 위에 손수건을 덮어 주면서 말했다.
“아깐 좀 아슬아슬하긴 했는데 오면서 찼어요.”
이건 소예리 헌터의 보조 스킬 때문이었다.
그녀의 베이스캠프(A) 스킬은 주변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력을 조금씩 채워주는 효과가 있었다.
“근데 전처럼 쓰려면 마력이 좀 많이 필요하겠더라고요.”
뭐, 원래 내가 딜러치고 마력이 높긴 했지만.
내가 말하는 사이 신재헌은 손수건을 둘둘 말고 누워 버렸다.
그러면서 불쑥 물었다.
“근데 아까 보상으로 뭘 받았길래 그렇게 놀랐어?”
그러고는 옆을 보고 재빨리 덧붙였다.
“요?”
그러려면 그냥 존대를 하지 마라, 이놈아. 황당해서 웃음이 실실 나왔다.
하지만 기쁜 소식은 공유해야 하는 법!
난 내 머리 위를 가리켰다.
이쯤에 있나? 아니면 이쯤?
나는 세 사람의 머리 위 S랭크 부분의 위치를 생각하며 내 머리 위를 열심히 가리켜 보였다.
“이쯤에, 보여요?”
내 말에 세 사람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F급?”
“각성하셨군요, 신유리 헌터님.”
“오…….”
신재헌은 놀랐는지 이불…… 아니, 손수건을 박차고 일어났다.
주이안 씨는 어설프게 덮고 있던 손수건 이불을 떨어뜨려 버렸다.
쪼꼬미 물약을 살펴보던 소예리 헌터도 놀랐는지 나를 보고 있었다.
“일단 딜러로 각성했으니까 지금까지보다 스탯 쌓기는 더 쉬울 것 같아요.”
그랬다. 아까 내가 봤던 시스템창에는 각성 시스템창이 떠 있었다.
[세니아 드 포를랭…… ‘F’]
난 S급만 받아봐서 아주 생소한 랭크였지만.
그래도 그 아래로 선명하게 딜러라고 찍혀 있는 걸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일단 딜러로 각성한 이상 일반인일 때보다 능력치를 올리기가 훨씬 쉬울 터였다.
시스템창이 ‘딜링’에 맞추어 개편되었다는 소리니까.
“난 경험치 무지막지하게 주던데. 솔킬해서 그런가?”
신재헌이 자기 시스템창을 두드리며 말했다.
“아마 그런 것 같아요. 저도 보조 경험치가 많이 들어왔거든요.”
주이안 씨가 그 옆에서 시스템창을 확인했다.
조그만 얼굴들이 제 눈앞 이곳저곳을 살피는 모습이 웃기고 귀여웠다.
“맞다, 나도 보상 들어왔겠구나?”
와중에 소예리 헌터도 보는 걸 까먹었는지 뒤늦게 시스템창을 확인했다.
“소예리 헌터가 웬일로 보상에 관심이 없어요?”
평소엔 우리 중에 가장 보상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소예리 헌터였다.
내 말에 소예리 헌터가 내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아니, 너무 충격적이잖아.”
그녀가 테이블 위의 두 남자를 가리켰다.
“둘 다 쪼끄매져서 너무 귀엽지 뭐예요.”
그녀가 몸을 숙이더니, 신재헌과 주이안 씨의 볼을 한쪽씩 잡고 징징 당겨 보았다.
“안 놔요?”
신재헌은 볼멘소리를 터뜨렸고, 주이안 씨는 곤란하다는 듯 외쳤다.
“소예리 헌터님……!”
“알았어, 알았어요.”
소예리 헌터는 말로는 알았다면서 한참 동안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그러고는 아이템창에서 뭘 꺼냈다.
“난 보상으로 처음 보는 책 받았어요.”
“책?”
붉어진 한쪽 볼을 붙잡은 신재헌과 주이안 씨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소예리 헌터는 던전 인벤토리에서 낡아 보이는 책 한 권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멸……시록?”
책의 제목은 이러했다. 멸□□시록.
우리의 시선이 책에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