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물렸으면 내가 당장 뛰어오라고 했겠죠.”
소예리 헌터가 싱글벙글 웃었다.
“보고 바로 튀었으니까 걱정 말라고요.”
그녀가 손을 펴 보였다.
저기, 근데 클로나 에이센이 그렇게 말해도 됩니까?
이 통나무집에 우리 넷밖에 없어서 다행히 페널티가 뜨진 않았다.
“다행입니다.”
주이안 씨가 그제야 긴장한 어깨를 늘어뜨렸다.
난 그 모습을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넷이 모이는 거 오랜만인 거 같아요.”
“그러게. 던전 들어오기 전까진 껌딱지처럼 붙어 있었는데.”
신재헌이 새삼 주이안 씨와 소예리 헌터를 돌아보았다.
그러다가 주이안 씨의 긴 로브에 시선을 주었다. 그가 평소 입을 만한 옷은 아니었다.
저번에 봤던 고위사제 복장보다는 훨씬 수수했지만, 그래도 교단 사람이라는 느낌은 들 정도로 새하얀 바탕에 금빛 자수가 놓인 로브였다.
“신재헌 헌터?”
주이안 씨가 의아하게 보자, 신재헌이 양손을 항복하듯 들어 보였다.
“아, 이쪽 세계 사람이신 줄.”
주이안 씨가 판타지 세계 적응이 좀 잘 되긴 했지.
그의 말에 주이안 씨는 물론 나랑 소예리 헌터까지 웃어 버렸다.
“신재헌 헌터도 잘 어울립니다.”
주이안 씨가 그의 옷을 보며 말했다.
“어울리긴 어울리는데 너무 튀어.”
난 결국 한마디 얹어 주었다.
외출하기에는 확실히 너무 눈에 띄는 복장이었다. 한 나라의 황제치고는 수수할지 몰라도.
“아, 이건 정무 보다 급히 나와서.”
“정무래, 와.”
난 통나무집 천장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진짜 황제 폐하 다 됐네.
“어쨌든 이런 옷은 너무 눈에 띄니, 갈아입는 게 좋겠습니다.”
주이안 씨가 던전 인벤토리를 뒤적거렸다.
그리고 곧, 그의 옷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익숙한 하얀 정장으로 변했다. 인벤토리를 이용한 착장이었다.
“와, 새삼 오랜만이에요, 그 정장.”
한국에선 맨날 봤는데! 내 말에 주이안 씨가 낮게 웃었다.
저 하얀 정장은 겉으로 보기엔 그냥 정장 같아도, 사냥용이었다. S급 방어력에 보너스 능력치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하긴 이 세계 사람들이 보지만 않으면 원래 물건 꺼내도 상관없겠네요?”
그를 본 신재헌도 던전 인벤토리에서 제 검을 꺼냈다. 그의 키만 한, 날이 넓은 붉은 대검이었다.
그는 그 검을 한 손으로 다룰 수 있을 정도로 근력이 뛰어난 딜러였다.
“그런 셈이죠.”
소예리 헌터도 옷을 슬쩍 갈아입었다.
원래 대한민국에서 썼던 작은 장식용 왕관을 머리 위에 살짝 올리는 건 물론이었다.
물론 저건 S급 아이템이었다.
“나만 입을 거 없네?”
허탈해서 난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이런 아기자기한 스탯으로 S급들 사이에 서 있으려니 어이없기 짝이 없었다.
난 이래 봬도 태생 S급이었다고! 게이트 터지자마자 S급 됐다고!
“신트롤 각이네?”
툭 뱉으니까 주이안 헌터가 웃었다.
“그래도 딜러 눈썰미가 어디 가진 않죠. 혹시 몬스터에 이상이라도 보이면 바로 말해 줘요.”
아, 천사. 난 잠시 이마를 짚었다.
주이안 씨가 스킬로만 힐하는 게 아니란 걸 잊고 있었다.
“그럼 일단 몬스터 상태를 좀 보고 오죠. 가서 되면 잡아 보고.”
신재헌이 대검 끝으로 통나무집 문을 툭 밀었다.
오랜만에 4인 사냥 시작이었다.
***
“둘 다 바빴을 텐데, 와줘서 고마워요.”
숲을 헤쳐 나가는 중에 내가 말했다.
아무리 서로 챙기는 게 일상인 헌터팀이라지만, RP던전에선 제자리를 벗어났다간 자칫하면 페널티까지 먹을 수 있다.
신재헌과 주이안 씨는 그 위험을 무릅쓰고 와준 셈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사냥까지 해도 되나?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어보려던 때 신재헌과 눈이 마주쳤다.
“별로 안 바빠요.”
신재헌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까는 정무 중에 급히 왔다며?
주이안 씨도 비슷한 타이밍에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교황 서브 퀘스트에 마물 퇴치도 있어서요. 제게도 도움 되는 일이랍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었다.
신재헌은 검을 든 채 숲길을 걸으며 몸을 풀었다. 언제든 앞으로 튀어나갈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었다.
근데 오늘은 튀어나가면 안 되는데?
“오늘 우리 딜러 하나인 거 알죠?”
“아.”
아니나 다를까, 앞서 걸어가던 신재헌이 삐끗했다.
원래대로라면 저 옆에 내가 딜러로 서 있어야 했는데, 오늘은 안타깝게도 일반인 버전 신유리였다.
“그랬지.”
까먹고 있었냐!
“우린 탱커 없는데. 곤란하네요.”
소예리 헌터가 턱을 매만졌다. 신재헌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요. 딜러 치고 단단한 편이라서.”
“그래도 몇 랭크인지도 모르는 몬스터 공격을 혼자 받겠다고?”
내가 정상적인 상태였으면 내 주스킬인 잔상 스킬로 어떻게든 해치웠을 터였다.
하지만 신재헌 혼자는 무리였다.
“괜찮아요. 여기서 좋은 패시브 스킬 하나가 생겨서.”
그가 자신 있게 이쪽을 돌아보더니,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황제의 피라고, 보유스킬 효과 20% 증가하는 스킬 있어요.”
난 입을 떠억 벌렸다.
20%? S급 스킬에 20% 보너스면 추가 데미지가 얼마야?
그때 소예리 헌터도 불쑥 끼어들었다.
“아, 그건 나도 있어요. 마탑주 마법 데미지 보너스 20%.”
“오…….”
난 감탄했다.
“그럼 주이안 씨도 교황 치유 보너스 50%, 두 사람도 20%씩 보너스 있는데 나만 또 없네?”
혹시 시스템이 날 싫어하는 게 아닐까? S급 찍으면 나중에 기깔나는 보너스 줄 거지? 응?
그때 소예리 헌터가 눈을 깜빡였다.
“50%? RP던전에서 그렇게 스킬 보너스를 많이 주나?”
“그러게요?”
신재헌도 고개를 기울였다. 이상하긴 이상했다.
전에 주이안 씨 스킬을 받았을 때, 보너스가 50%인 걸 보면서 장난 아니라고 생각하긴 했다.
근데 그것도 여기가 L급 던전이라 보너스가 큰 줄 알았는데.
두 사람은 20%인데 주이안 씨만? 힐 할 일이 많나?
언제 그렇게 우리한테 친절한 시스템이었다고? 내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혹시 페널티 같은 건 없어요? 50%면 좀.”
내 말을 신재헌이 받았다.
“맞아. 저번에 나 S급 던전에서 스킬 보너스 두 배 받는 대신 스킬 사용제한 있었잖아요.”
그가 주이안씨를 돌아보았다.
“그런 제한 없어요?”
그 말에 주이안 씨는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보유 스킬 모두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헐.”
시스템이 주이안 씨한테 반했나?
아니면 내 보너스도 주이안 씨한테 갔나?
어이없어할 때 주이안 씨가 신재헌을 돌아보았다.
“그럼 탱킹 부탁할게요.”
주이안 씨가 손을 펴 보였다.
맞다, 우리 탱킹 이야기 중이었지.
신재헌에게 탱커에게나 주어지는 강력한 보호 스킬 몇 개가 걸리는 게 보였다.
그렇게 선두는 딜러 겸 탱커 신재헌이 서고, 그 뒤에 힐러 주이안 씨와 일반인 나. 그 뒤에 보조딜러 소예리 헌터가 뒤따르게 되었다.
이대로면 트롤링 확정인데?
[신의 상점]
난 시스템창 한쪽 구석을 켜 보았다.
이대로 트롤 되는 것보단 뭐라도 하는 게 나을 터였다.
그리고 지금 믿을 만한 건 신의 상점뿐이었다.
스탯 업도 많이 했겠다, 새로 물건 살 만한 거 없을까?
“오.”
사실 반쯤은 기대를 접고 켠 건데 좋은 게 보였다.
[Coin : 29830]
3만 코인이 다 되어 가잖아? 그렇다면…….
[은하 서버 스킬 열쇠 – 30000C]
170코인만 모으면 저거 살 수 있다!
뭐든 은하 서버에 저장된 내 S급 헌터 정보의 스킬 하나라도 꺼낼 수 있다면 적어도 트롤은 아닐 터였다.
무엇보다 비상시에 내가 혼자 힘으로 살 순 있어야 했다.
이건 트롤하곤 다른 문제다. 생존력 문제.
RP던전에서 죽으면 대한민국의 S급 신유리도 죽는 거니까.
[신의 상점 Coin +1]
그 와중에도 상점 코인은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4명이 같이 있는 탓에 코인을 많이 주진 않았지만, 몬스터가 워낙 많아 이대로면 170 채우는 것도 시간문제일 듯했다.
……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우우웅!
검을 땅에 늘어뜨린 신재헌이 정면을 보며 마력을 모았다.
그의 대검에 붉은빛 오라가 감돌기 시작했다.
“아니, 저거―”
저 스킬이 뭔지 내가 모를 리가 없었다.
매번 전투 때마다 최전방에서 그와 함께 몬스터를 상대한 게 나였으니까.
“하아!”
신재헌이 횡으로 검을 크게 휘두르자, 전방으로 날카로운 검기가 날아갔다. 말릴 틈도 없었다.
―퍼퍼퍼펑!
시원한 소리와 함께 전방이 쓸려나갔다.
그와 동시에 숲의 나무들이 기둥뿌리만 남긴 채 흔적도 없이 산화해 버렸다.
난 머리를 싸맸다. 옆에 있던 소예리 헌터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광역기 쓰면 안 되는데.”
“왜?”
좀 당황한 신재헌이 우리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뒤늦게 같이 머리를 싸매고 있는 소예리 헌터를 보며 말을 덧붙였다.
“요?”
좀 성의 있게 존댓말 덧붙여 봐라!
내가 머리를 싸매는 사이에 주이안 씨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여긴 게이트 내 환경이 아니라서 부러진 나무가 재생이 안 됩니다, 신재헌 헌터.”
“아.”
제 나라의 삼림을 파괴한 환경파괴범이 이마를 짚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닌 듯했다.
소예리 헌터는 몬스터는 물론이고 식물들까지 싹 다 재로 변해 버린 숲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저기에 좋은 연구 재료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환경 파괴범 같으니!”
그러나 이미 박살 난 건 어쩔 수 없었다. 신재헌이 검을 내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사드릴게요.”
“돈이면 다인 줄 알아요!”
소예리 헌터가 신재헌에게 째릿한 시선을 보냈다.
그때쯤 난 웃음을 참고 있었다. 옆의 주이안 씨를 보니 그도 반응이 비슷했다.
저게 진짜 화난 게 아닌 걸 알고 있으니까.
일단 소예리 헌터는 진짜 화나면 표정부터 없어진다.
그리고 오랫동안 같은 팀이었던 신재헌이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예. 보통 돈이면 되죠. 얼마면 됩니까?”
신재헌이 진지한 얼굴로 받아치자 소예리 헌터가 빙그레 웃었다.
“잘 아시네요. 얘네 마탑 연구자금 부족하던데.”
“황가 차원에서 지원하죠.”
신재헌의 답이 바로 나왔다. 소예리 헌터가 기분 좋게 웃었다.
“좋아! 만세! 근데 내가 무슨 마법 연구하는지 이야기했어요? 이거 개인 퀘스트로 나왔거든요.”
“오.”
그 말에는 나도 관심이 생겼다.
주이안 씨도 마찬가지인지 돌아보고 있었다. 소예리 헌터가 손을 펴 보였다.
“말 안 했나 보네.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을 만들래요.”
그 말에 소예리 헌터를 제한 우리 셋의 걸음이 멈췄다.
“뭘 만들어요?”
“예?”
“네?”
보조계 헌터도 사람이다.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이라니……. 그런 스킬을 만드는 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소예리 헌터가 투덜거렸다.
“나보고 이 던전에 그냥 죽치고 살라는 게 아닐까?”
“설마요.”
난 소예리 헌터를 위로할 겸 말을 받아 주었다.
그래도 이 RP던전은 스킬이 아니라 마법이 존재하는 세계였다.
그런 마법을 연구하는 데에는 이 RP던전 세계가 훨씬 이로울지도 모른다. 게다가.
“RP던전에서 클리어 불가능한 퀘스트가 나온 적은 없었잖아요. 게다가 RP던전 안에서 새로 습득한 스킬은 보상으로 주어지기도 하고.”
한마디로 발명만 할 수 있으면 대박이라는 소리였다.
주이안 씨가 내 말을 받았다.
“확실히 대한민국에서 연구하는 것보단 이 세계에서 연구하는 게 나을 것 같은 주제네요.”
온화한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혹시 교단에서 지원할 만한 게 있으면 도와줄게요.”
“하긴, 여기만큼 돈 인맥 마구 쓸 수 있는 데가 어딨겠어요?”
나도 손을 펴 보였다.
본인은 마탑주에, 황제에 교황까지 지인인 마당에 못할 게 있을 리가 없었다.
나처럼 쓸 일 없는 사람 빼고.
새삼 그러데이션 빡침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때 신재헌이 불쑥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신유리 헌터도 필요한 거 있으면 말씀하시고. 전에 잔상 스킬로 실험하고 싶은 거 많다면서요.”
“그것도 잔상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염장 지르니?
내가 예쁘게 웃어줬지만 신재헌은 흔들림 없이 대꾸했다.
“전에 신의 상점인가 뭔가 있다면서요. 거기서 스킬은 못 사요?”
“몬스터 잡고 코인 얻어서 어떻게든 살 수는 있는데…… 그게 원래 가진 스킬 중에 랜덤으로 나와요.”
내 말에 신재헌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원하는 스킬 나올 때까지 마물 잡아서 코인 얻을 수 있게 부대 배치해줄게요. 내 기사가 된다면.”
“……오.”
신재헌, 나 설렜다. 주이안 씨가 말을 보탰다.
“마물 등장은 교단에서 가장 먼저 알아채니까, 성기사가 되어도 도와줄 수 있어요.”
그 순간 주이안 씨와 신재헌의 시선이 부딪쳤다.
저기, 지금 나 FA시장 한가운데에 던져진 거?
“교단에서 그렇게 강한 무력은 필요 없을 텐데요, 주이안 헌터.”
“황가에는 이미 훌륭한 기사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신재헌 헌터.”
날카로운 목소리와 온화한 목소리가 재차 부딪쳤다.
근데 여기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저기, 나 아직 일반인인데요?”
내가 전처럼 S급 딜러면 모를까, 아직 F급도 못 된 사람 데려가겠다고 저러고 있는 거야?
내 말에 주이안 씨와 신재헌은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답했다.
“곧 C급 될 거잖아.”
“곧 아니게 되실 거잖아요.”
“아, 예.”
굳은 믿음 고호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