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결국 점심은 신재헌의 던전 인벤토리에 잠들어 있던 육포로 해결했다.
“던전 한가운데도 아니고 이걸 저택에서 뜯을 줄은 몰랐네.”
“집 안이라도 몬스터 비슷한 게 있다는 점에서는 던전이나 다름없지.”
신재헌은 덤덤하게 대꾸했다. 독 먹인 놈 말하는 게 분명했다. 언뜻 서늘하게 들리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돌아보면 손바닥만 한 신재헌이 육포를 뜯고 있어서 긴장감이 싹 날아갔다.
그래도 A급 육포인 덕에 맛은 기가 막혔다.
음, 쫄깃쫄깃, 테이스트이즈굿.
게다가 신재헌이 본의 아니게 작아진 바람에, 내가 대부분을 먹고 그는 자그마한 쪼가리만 먹고 엎어져 버렸다.
“……가성비 좋다는 건 인정한다.”
그가 한 입 거리 육포를 먹고 나서 뻗은 채 말했다. 인정하기 싫다는 얼굴이 더 귀여워서 빵 터졌다.
“근데 진짜 안 돌아가도 돼?”
난 밖을 가리켰다. 저녁까지 육포로 챙겨 먹으며 이러쿵저러쿵 하는 사이 벌써 밤이었다.
“궁에서 황제 폐하 안 찾아?”
내 말에 신재헌은 내 손수건을 돌돌 말고 팔베개를 한 채 옆으로 누워 버렸다.
가늘게 뜨인 검은 속눈썹 아래로, 짙은 푸른색 눈동자가 내게 향했다.
“찾으라고 해. 목 날아가고 싶으면.”
쪼끄만 폭군이 말했다. 분명 저 말이 뻥은 아닐 터였다.
황권 강화 퀘스트가 있는 이상 그는 좋든 싫든 제 말을 거스르는 자에게 본보기를 보여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 말을 내 손바닥만 한 게 하니까 픽 웃음만 나왔다.
“알았어. 자는 동안 테이블에서 굴러 떨어지면 안 돼.”
난 그의 옆에 커다란 화분을 옮겨 놓았다.
누가 문을 열고 들어오더라도 그가 바로 보이지 않도록 적당히 가릴 셈이었다.
덕분에 신재헌은 화분을 등지고 내 침대와 마주 누운 상태가 되어 버렸다.
“안 떨어져.”
그가 가볍게 답했다. 난 신재헌을 흘끗 보았다.
“너 잠자리 불편해지면 잠버릇 심해지잖아. 거기서 날뛰면 테이블 쪼개진다.”
이건 진짜 위기였다.
엊그제까지 목이 달랑달랑하던 시한부 영애가 갑자기 테이블을 반으로 쪼갠다?
이건 개연성 문제로 RP던전 페널티 각이었다.
난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쪽을 보다가 불을 툭 꺼버렸다. 그때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안 불편해서 괜찮아.”
정말? 난 신재헌이 잠들어 있을 테이블 쪽을 돌아보았다.
일반인의 눈으로는 아직 어둠에 적응되지 않아,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틀림없이 내 손수건 이불이랑 종이 베개를 베고 누워 있을 테지.
“살다살다 미니미 신재헌은 또 처음이네.”
그 모습이 생각나 난 다시 웃어 버렸다.
별의별 던전을 같이 갔지만, 쬐끄매진 신재헌은 정말 처음이었다.
신재헌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만 들으면 작아진 것도 모를 것 같다.
“일반인 신유리도 십 년 만에 처음 봐.”
“그러게.”
난 게이트 터지자마자 S급으로 각성했으니까 진짜 오랜만에 보겠구나.
난 침대로 가서 누웠다.
“진짜 이상한 날이네.”
정말 이상하고 기묘한 밤이었다. 그리고 안심이 되는 밤이었다.
게이트가 열리면서부터 함께 있었던 친구이자 같은 팀의 헌터 신재헌.
이놈하고는 무인도에 같이 떨어져도 잘 먹고 잘 살 거라고 호언장담했는데 정말 무인도 같은 곳에 떨어져 버렸다.
그것도 헌터 채팅만 남고 멀리 떨어진 채로.
그래서 마치 다른 곳에 떨어진 것만 같았다.
게이트가 터진 이후 신재헌하고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었던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꿈 같았다.
그를 만나고서야 조금 현실감이 들었다.
―새근.
작은 숨소리가 들렸다. 신재헌도 그랬나 보다.
그는 잠자리가 바뀌었는데도 뒤척임 하나 없이 곤히 잠들었다.
그의 숨소리를 따라 새근새근 숨을 쉬려고 노력한 것 같다.
이내 나도 잠들어 버렸다.
***
“아가씨, 일어나세요! 참, 손수건은 정리해 두었답니다!”
날 깨운 건 신재헌이 아니라 하이텐션 하녀의 목소리였다.
난 눈을 번쩍 떴다.
손수건? 정리해?
“그……”
……럼 그 위에 있던 놈은 어디로 치웠니?
물론 그렇게는 차마 물어볼 수 없어 난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고마워.”
그러니 얼른 나가보렴. 내가 손짓하자 하녀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제가 얼른 아침 가볍게 가져올게요!”
그러고는 쌩하니 사라졌다. 역시 하이텐션 하녀였다.
또 독 탄 음식 들고 오지 마라.
―쾅!
문이 닫히는데 능력치가 높아져서 체력도 까이지 않았다.
난 하녀한테 신경 쓰는 대신 헌터 채팅으로 시선을 주었다.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잘 갔어?]
“어,”
나도 모르게 반말해 버렸다. 어젯밤의 여파였다.
입을 막았지만 이미 나간 헌터 채팅은 지울 수도 없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잘 왔지요.]
신재헌의 답은 바로 올라왔다. 그때 소예리 헌터의 채팅이 불쑥 올라왔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뭐야, 둘이 같이 있었어요? 언제 만났대?]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아니 어제 수련하는데 신재헌이 왔더라고요]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일반인 버전 신유리 구경할 겸 겸사겸사 갔죠]
역시 그냥 구경이 목적이었던 거잖아! 이걸 확 그냥!
주먹에 힘이 꽉 들어갔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그런데 금방 C급 되겠던데요]
어젠 하지 않았던 말이었다. 하지만 묘하게 익숙한 말이기도 했다.
‘금방 S급 찍겠다!’
내가 C급이었던 신재헌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때는 이미 선천적으로 타고난 헌터 랭크는 바꾸기 힘들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그래도 난 그를 응원했다.
그는 반드시 S급이 되기를 원했으니까.
하지만 세간의 시선은 그렇지 못했다.
사람들이 보기에 신재헌은, S급 헌터 옆에 붙어 다니는 C급 짐덩어리였다.
[S급 신유리가 죽는다면 그건 옆의 C급 때문일 것]
그런 이야기까지 돌았다.
모두가 그렇게 욕했지만 신재헌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적어도 옆에 있으면, 너 대신 한 대는 맞을 수 있겠지.’
그가 담담하게 했던 말은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난 그가 그런 모욕을 들으면서도 내 옆에 남아주는 게 고마웠다.
그래서 그를 응원하고 도왔다. 그리고 그 기대에 부응하듯 그는 단숨에 S급으로 치고 올라왔다.
무엇이 동기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를 욕하던 자들은 꼬리를 말고 사라져 버렸다. 당시 유명했던 기자조차도 언론에서 이름조차 내밀지 못하게 되었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신재헌 헌터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가능성이 꽤 있겠는데요?]
소예리 헌터의 말에 뒤이어 신재헌의 말이 올라왔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가능성이 아니라 반드시 될 겁니다. 그 이상도요.]
그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C급이었던 신재헌에게 내가 확신을 가졌던 것처럼.
“그때 네가 이런 기분이었구나.”
난 중얼거렸다.
사실 난 이번 RP던전에서 랭크업이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신재헌이 기이한 케이스인 거지, 전 세계적으로 랭크업을 한 사례 자체가 별로 없었으니까.
하지만 믿어주는 사람이 있으니 달랐다. 이건 반드시 해내야 했다.
“그래, 신트롤 안 하려면 해야지.”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냥 식당 가서 밥 먹어야겠다.”
아무래도 하이텐션 하녀가 갖다 주는 음식을 먹기에는 불안했다.
그냥 가서 먹을 거 찾아 먹는 게 낫겠다.
“근데 주이안 씨는 바쁜가?”
우리가 그렇게 한참 동안 대화를 하는 동안에도 주이안 씨는 말이 없었다.
헌터 채팅 올라오는 건 보일 텐데.
고개를 갸웃거린 난 식당으로 내려갔다.
그렇게 주이안 씨가 말이 없는 며칠 동안, 충분히 소예리…… 아니, 클로나 에이센 씨와 친해진 난 집안사람들이 모인 식당에서 공표했다.
“며칠 동안 수련을 하러 떠나려고요.”
그 말에 키칼은 먹던 스테이크를 되새김질했고, 자작부인은 칼을 떨어뜨렸으며, 자작은 손에서 잔을 미끄러뜨렸다.
이름도 까먹은 둘째 오빠 놈만 흥미롭게 날 지켜봤을 뿐이었다.
“……세니아, 아직 몸이 너무 약하지 않니.”
포를랭 자작부인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살폈다.
자작이 동의했다.
“마음이 앞서는 건 이해한다. 하지만 너도 알지 않느냐. 몸과 마음이 같이 움직일 때 비로소 수련의 성과가 보이는 것을.”
S급으로서 스킬 수련을 해 본 나도 저 말만큼은 공감이었다.
하지만 C급이라도 찍으려면 이 집구석에서 있을 순 없었다.
무엇보다 언제 내 입에 독이 물려질지 모르는데, 이 저택에 어떻게 가만히 있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미 오랜 수련을 겪은 몸이니까 다를 거라고 생각해요.”
난 또박또박 말했다.
사실 믿는 구석이 있긴 했다.
팀에서 도와주기도 할 거고, 난 원래 S급이었으니 그 아래 랭크는 훨씬 오르기 쉬울 거라는 계산 외에도 하나 더.
내가 잠시 빌린 이 몸, 세니아 드 포를랭은 원래 A급 상위의 실력자였다.
이미 몸이 강한 힘에 길들여져 있다는 소리였다.
단지 독 때문에 체력을 제대로 쓸 수 없어 약해져 있었을 뿐.
체력만 되돌려준다면 A급 상위까지 치고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반드시 될 겁니다. 그 이상도요.’
신재헌의 말처럼.
난 곧은 시선으로 포를랭 가 사람들을 주시했다.
“네 뜻이 그러하다면…….”
포를랭 자작은 끙, 앓는 듯한 소리를 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세니아가 다행히 수련에 대해서는 제 고집이 강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성격이 순종적인 성격이었다면 RP던전 페널티를 받았을 텐데.
그럴 각오까지 하고 한 말이었는데 세니아의 본래 성격이 쿨해서 다행이었다.
맘에 드네! 언니가 S급으로 만들어줄게!
나 던전 졸업하면 S급 몸으로 키칼인지 뭔지 꾹꾹 밟아 주면서 잘 살아!
“그럼 호위기사라도 대동하는 건 어떻겠니?”
포를랭 자작부인이 제안했다.
그거 아주 괜찮은 생각이었지만 내가 세니아면 모를까, 신유리인 이상 사양이었다.
그럼 소예리 헌터랑 편하게 사냥 못 하잖아.
이럴 땐!
“……그건,”
난 곤란한 얼굴로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다음 방 안의 검을 한 번 슥 봐 주고, 기사들에게 시선을 한 번 쓱 준 다음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알아듣겠니, 여러분?
“……그래. 아무래도 약한 모습을 기사들에게 보이긴 싫겠지.”
바로 그거야!
난 소리 없이 환호했다.
눈치 빠른 포를랭 자작 만세!
하지만 포를랭 자작부인은 내키지 않는 듯했다.
“그래도 안전 문제가 있는데 어찌 외부에 세냐 홀로 보내겠어요.”
그녀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홀로 아닙니다. 마탑주랑 같이 갑니다. 여차하면 황제하고 교황도 달려올 겁니다.
물론 그 말은 할 수 없어서 자작부인의 심려는 깊어져만 갔다.
“기사의 자존심이 있죠.”
그때 키칼 놈이 입을 열었다. 그가 자작부인을 돌아보았다.
“세냐도 포를랭의 기사예요, 어머니. 직접 가르친 기사들한테 수련지에서까지 호위를 받는 건 세냐에게도 상처일 겁니다.”
이놈이 웬일로 사람을 돕네?
난 그런 키칼에게 진심으로 웃어 주었다. 물론 그 새카만 속은 훤히 보였다.
가서 그냥 마물한테 뒈지라고 고사지내는 거지?
넌 나중에 와서 보자.
“……세냐. 안전한 곳으로만 다녀야 한다. 알겠어?”
결국 포를랭 자작 부부는 서로를 보다가 내 수련을 허락해 주었다.
걱정스러운 시선은 거두지 못한 채였다.
난 그들을 보며 문득 생각에 잠겼다. 어젯밤, 독을 먹은 신재헌의 말이 떠올라서.
‘내가 궁에 떨어졌잖아. 그래서 독은 본의 아니게 많이 먹어봤거든.’
‘뭐?’
놀라는 내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신재헌은 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이건 희귀하고 교묘한 독이야. S급으로 랭크되기도 하고. 적어도 일개 가문의 후계자 자리에서 몰래 구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니란 거지.’
‘분명 내부에서 도운 자가 있었을 거야. 키칼 드 포를랭보다 더 지위가 높은 자. 이를테면 가주나…… 그 부인 같은.’
그는 그렇게 말했다.
‘아니면 적어도 그놈이 독을 구하는 걸 방관했거나.’
생각보다 더 기가 막힌 집구석이었다.
난 걱정스러워 죽겠다는 포를랭 자작 부부에게 대충 대답해주며 생각했다.
적어도 둘 중 하나, 어쩌면 둘 다 방관자다.
세니아가 독을 먹게 만든.
다시 말해 이 집구석에, 적이 하나가 아니란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