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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던전의 S급 시한부 영애 (11)화 (11/218)

11화

“오늘 업무는 이미 마치셨습니다.”

“아.”

주이안은 헌터 채팅에서 눈을 떼고는 성기사에게 시선을 주었다.

“알고 있어요. 페리 경도 가서 쉬세요.”

그의 온화한 목소리가 교황청 집무실을 울렸다.

페리라 불린 성기사가 황송하다는 듯 깊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성기사 페리가 물러가는 사이, 주이안이 살짝 고개를 들었다.

그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사르륵.

그가 움직이자 긴 사제복의 옷자락이 바닥에 끌려 소리를 냈다.

그는 페리가 완전히 간 것을 확인하고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페리의 말대로 좀 쉴 필요가 있었다.

아무리 교황으로서 자리를 다지는 게 서브퀘스트라고 해도, 너무 열심히 일했다.

“…….”

그가 옅게 웃었다.

헌터팀의 서류 처리를 주로 맡았던 건 늘 주이안 자신이었다.

가장 꼼꼼한 성격이기도 했지만, 그가 이런 일을 좋아했다.

아니, 좋아하는 줄 알았다.

“왜 이렇게 질리는지.”

그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서류작업을 싫어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교황청에 쏟아져 들어오는 문제는 지루하기만 했다.

가끔 그의 눈에 띄는 건 마물 출몰 위치 정도였다.

그것도 그가 아는 지역 주변이 아니면 금세 흥미가 식고는 했다.

주로…… 포를랭 영지 근처, 말이다.

“…….”

그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제 안의 변화를 서서히 알아채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한국에서도 서류 처리를 좋아했던 게 아닐지도 몰랐다.

그 서류에 쓰여 있는 누군가의 이름, 혹은, 그 누군가를 위해 일을 처리한다는 만족감이 그를 이끌었을지도 몰랐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서브 퀘스트 : 교황의 사색]

그의 시선이 시스템창으로 향했다.

RP던전에서 상황에 맞추어 퀘스트가 뜨는 거야 흔한 일이다.

하지만.

[클리어 조건 : ???]

클리어 조건에 아무런 이야기도 없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의아함을 담은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보상 : 죽음의 고통(S)]

“……!”

주이안이 눈을 크게 떴다.

스킬 이름만 봐도 패시브가 아니라 액티브 스킬이었다.

게다가 저런 이름이라면 힐이나 보조계 스킬일 리가 없었다.

S급 딜링스킬.

S급 힐러로서 단단히 이름을 굳힌 주이안이었지만, 그에게는 지금껏 S급은커녕 B급 딜링스킬 하나 주어지지 않았다.

이 퀘스트만 따라간다면 딜링스킬이 주어진다는 말이다.

[서브 퀘스트 : 교황의 사색]

[교황으로서 업무를 끝내고 보니 교황청 바깥의 일이 궁금해졌습니다. 교황청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보세요.]

보통 이런 퀘스트가 나온다는 건, 십중팔구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다.

주이안은 고민 없이 몸을 돌려 문으로 다가갔다.

다르게 말하면 쉬지도 못하고 다시 업무에 복귀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RP던전이 퀘스트로 이끌어주는 걸 보면 메인퀘스트인 ‘대륙의 멸망을 막아라’와 관련이 있을지도 몰랐다.

―쿵쿵.

그가 문을 노크하자 놀란 성기사들이 문 앞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들은 황송하다는 얼굴로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예하, 어찌 직접 이렇게.”

주이안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지금 예의나 허례허식을 따질 때는 아니었다.

“느낌이 안 좋아요. 교황청 주변을 중심으로 위험요소가 있는지 다시 한번 파악해 보세요.”

“……!”

교황의 느낌은 곧 신의 뜻과 관련 있는 것. 성기사들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혹시 마음에 특별히 걸리는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주이안은 멈칫했다.

교황으로서의 느낌이 가리키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끝내, 마음에 걸리는 곳은 있었다.

“……포를랭 가 영지와 그 주변을 잘 살펴보세요.”

살펴본다고 해서 나쁠 일은 없을 터였다. 성기사들은 가라앉은 얼굴로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명을 받들어 움직이겠습니다.”

―타다닥!

기사들이 빠르게 흩어졌다.

주이안은 그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이 RP던전 세계관 특성상, ‘위험’이란 십중팔구 마물일 터였다.

그리고 강한 마물이라면 사제들의 힐과 보조를 받은 성기사들이 처리해야 했다.

하지만 그보다 강한 마물이라면…….

그가 파악한 성기사들의 수준은 기껏해야 A급이었다.

SS급 이상의 몬스터가 나타난다면 이 RP던전에서는 그의 헌터팀을 제외하면 몬스터를 해치울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것이었다.

어쩌면, 아예 없을지도 모르고.

***

그리고 얼마 후, 주이안의 예상대로 보고가 올라왔다.

“신성 예하, 온 대륙에서 마물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이곳 카르만 제국뿐만이 아니라 발탄 제국에서도 평소보다 많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 보고에 주이안이 눈살을 찌푸리며 뇌까렸다.

“원래 이 시기에 마물이 들끓긴 하지만…….”

그가 빙의한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의 기억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이안은 창밖을 보다가 물었다.

“유독 잦은 것 같은데요.”

그 말에 성기사가 고개를 숙였다.

“예. 자세히 조사해보아야겠지만 확실히 비정상적으로 수가 늘었습니다.”

주이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사제들과 성기사들로 토벌팀을 조직하세요. 이번 사안은,”

대륙 전체에 마물이 들끓는다는 건, 다른 제국들의 땅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이 제국…… 신재헌, 황제의 땅에서도.

그렇다는 건 병력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의 허락이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교단에도 병력은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사태를 수습하기 힘들었다. 그와 긴밀하게 협력하면 마물을 처리하기는 좀 더 쉬우리라.

“…….”

‘거슬리네.’

그런데 왜 이럴 때, 신재헌의 헌터 채팅이 떠오르는지 모르는 노릇이었다.

입을 굳게 다물었던 주이안이 입을 열었다.

“황제에게 정식으로 서한을 보내세요. 이번 마물 증가 건에 관하여 교단과의 협력이 필요할 것 같다고요.”

“하지만 예하, 황가는…….”

황가와 교단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네 살짜리 어린아이도 알 만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주이안은 의견을 물리지 않았다.

“마물들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속세의 잇속을 따질 때가 아니에요.”

그의 단호한 말에 성기사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성기사가 빠르게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주이안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곧 일정이 다시 빡빡해질 터였다.

“…….”

그는 마지막으로 봤던 헌터 채팅을 떠올렸다.

소예리 헌터와 만나신다고 했지.

“마물을 잡아 레벨업을 하실 모양이지만…….”

몸은 괜찮으실까.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신유리가 무사한지 완벽하게 봐줄 수 있는 건 이 세계의 유일한 S급 힐러인 자신밖에 없었다.

늘 주이안 자신을 지켜주던 건 신유리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 사실이 묘한 기분으로 다가왔다.

“…….”

그는 언젠가 던전에서 쓰러졌을 때 보았던 신유리의 등을 기억했다.

사선을 몇 번이고 넘나든 만큼 너무나도 많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네 명이 만나 헌터팀이 된 이후 이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있는 것도 처음이었다.

“…….”

주이안은 창문에 비치는 제 얼굴을 보았다.

신유리가 잘 어울린다며 깔깔 웃던 단안경이 보였다.

그가 창문에 손등을 슬쩍 대어 보았다. 손에 제 얼굴이 가려져 버렸다.

“차갑다.”

정신이 확 들 정도로. 그가 중얼거렸다.

***

소예리 헌터는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말실수를 했다.

하지만 그녀가 데려다주는 곳은 확실히 흥미롭긴 했다.

“오…… 정말 모르겠다.”

내가 중얼거렸다.

전과 같지 않은 일반인의 동체시력으로는 손장난이 대부분인 마술의 비밀도 알아채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러니 더 재미있었다.

카드가 손가락 사이 어디로 쑥쑥 사라지고, 상자 안에 갇혀 있던 사람이 어떻게 검에 안 찔리고 빠져나가는지, 때로는 몰라야 스릴이 느껴지는 법이다.

“그죠, 신기하죠?”

소예리 헌터가 빙그레 웃었다. 온화한 미소였다.

그리고 우리 뒤를 졸졸 쫓아오는 귀여운 B급 삐약이들은 그런 그녀를 열심히 경계하고 있었다.

우리가 노는 내내.

그렇게 노려보기도 지치겠다, 얘들아.

우리는 그렇게 한참 시장 이곳저곳을 쏘다녔다.

언제 어디에 게이트가 열릴지 모르는 한국과는 달리, 마물이 나오는 구역이 딱 정해져 있어서 그런지 안전지대의 사람들은 편안해 보였다.

그만큼 놀 거리도 볼거리도 많았다. 마치 10여 년 전 한국처럼.

난 그때를 생각하다가 웃었다.

“오늘 정말 재밌었어요.”

내가 그 말을 꺼낸 건 해 질 녘 무렵이었다.

소예리 헌터는 아쉬운 얼굴로 나를 보았다.

저건 클로나 에이센이라 짓는 표정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저도요. 자신 있게 안내해준다고는 했지만…….”

그녀가 난감한 얼굴로 웃었다.

“사실 노는 건 자신 없거든요.”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얘가 방구석 연구원이더라고요. 나 노는 건 진짜 자신 있는데.]

역시 나오는 말과는 다른 내용의 헌터 채팅이 한쪽 눈에 띄었다.

하긴, 옆에서 잔잔하게 웃는 주이안 씨와 달리 신재헌과 함께 북 치고 장구 치고 노래까지 부르던 사람이 이 사람이었다.

진짜 안 어울리는 캐릭터 빙의해서 개고생 중이시네.

난 결국 픽 웃었다.

“충분히 재미있었어요. 다음에 혹시 또 만날 수 있을까요?”

내 말에 소예리 헌터가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얼굴에 함박미소가 피어났다.

“정말요? 귀한 집 아가씨 같은데…….”

그녀의 시선이 여전히 경계태세 풀장전인 B급 삐약이들에게로 돌아갔다가 떨어졌다.

“괜찮겠어요?”

그녀가 물었다.

거리가 있어서 우리 대화가 잘 들리진 않겠지만, 삐약이들도 우리가 무슨 대화를 하는지 대충은 눈치챌 터였다.

“네. 이제 몸도 낫고 있고, 저택에만 있는 것보다는 낫죠.”

내가 맑게 웃자, 소예리 헌터가 악수하자는 뜻으로 손을 내밀었다.

난 놀란 척 눈을 크게 떴다가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럼 저 귀요미들 또 데리고 와.”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그럼 내일 또 볼래요?]

또 바뀌셨는데요? 내가 툭 치자 소예리 헌터가 정신을 차렸다. 소곤소곤 말해서 다행이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봬요. 참, 내 이름은 클로나예요.”

그녀가 맑게 웃었다.

“전 세냐라고 불러 줘요.”

포를랭 영지 한복판에서 세니아라고 밝혀 봐야 좋을 것 없으니 세냐라고만 해 주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을 꽉 잡고 흔들어 주었다.

이렇게 점점 친해지면(?) 클로나 에이센의 집에 초대받는 것도 자연스러우리라.

“그럼 내일 봐요, 세냐!”

그녀가 B급 삐약이들의 에스코트를 받고 마차에 오르는 내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삐약이들의 머리 위 [경계 태세]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좋은 사람인 것 같아. 너무 경계하지 마.”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경계 태세는 사라지지 않았다.

처음 만난 사람을 따라다니는 순진한 아가씨를 지키겠다는 열의가 눈에서 번뜩였다.

그거 헛고생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 그냥 고마워하기로 했다.

그래, 그것도 수련의 일환이다, 얘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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