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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던전의 S급 시한부 영애 (10)화 (10/218)

10화

“요즘 자주 돌아다니네?”

그건 내가 할 말인데?

방정맞은 입이 또 실수할 뻔했다.

난 키칼 놈의 얼굴을 보자마자 튀어나올 뻔한 말을 간신히 눌러 삼켰다.

“바깥에 있는 게 즐거워서요.”

“하긴, 넌 오래 누워 있었지.”

키칼은 안타깝다는 듯 눈썹을 모았다. 난 그 표정을 보면서 소리 없이 감탄했다.

와, 저 이마 딱 뭉개버리고 싶네.

“그래도 조심해야 한다. 바깥은 저택과는 다르잖니. 너에게 마냥 호의적인 사람들만 있는 것도 아닐뿐더러…….”

나한테 독 먹이는 네놈이 있는 이 집구석보다는 안전하지 않을까요?

“아무리 요즘 네가 건강해졌다 해도, 아팠던 몸이지 않니.”

키칼이 시선 듬뿍 안타까움을 담아 말했다.

물론 진실을 아는 내 눈에는 가증스러운 눈깔로 보일 뿐이었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난 그 눈깔을 찔러 주는 건 나중 일로 미루기로 했다.

독이 든 수프를 누가 만들라 시켰는지만 밝혀도 이 작은 가문은 파란에 휩싸이겠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누가 뭐라 해도 저놈, 키칼이 후계자다.

당장 후계자가 정통성 논란에 휘말려 사라지면 우리 가문 후계자는 누가 해?

저놈보다 훨씬 떨어지는 그, 둘째 오빠인지 뭔지 하는 B급 검사?

아니면 일반인인 나?

이 생각을 하는 건 나뿐만이 아닐 터다. 내가 건재하다는 걸 알리고 저놈 면상에 독수프를 쏟아 줘도 늦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런데 요즘, 몸은 정말 괜찮은 거지?”

키칼은 재차 물었다. 걱정스럽다는 듯 묻고 있지만 속이 훤히 보였다.

수프를 먹었을 텐데 왜 반응이 없지?

의아해하는 얼굴이 웃겨서라도 한동안은 그대로 내버려둘 셈이었다.

“그럼요! 오라버니께서 걱정해주신 덕에 무사하답니다.”

난 예쁘게 웃어 주었다.

죽어가던 동생이 건강을 되찾아 얼굴에 홍조를 띠고 있는 모습을 보니 감동스럽지 않니?

하지만 키칼은 흠흠, 하며 몸을 돌릴 뿐이었다.

동생한테 독이나 쓸 생각을 하다니, 쓰레기 새X.

“그럼 외출 잘 다녀오고.”

키칼은 손짓하고는 연무장으로 뛰어갔다.

왜, 내가 멀쩡해서 조바심이라도 드니?

난 쫑쫑거리며 뛰어가는 그 꼬라지를 보다가 헌터 채팅을 켰다.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근데 우리 어떻게 몰래 만나요? 진짜 시장만 나가면 돼요?]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그렇다니까요~ 내가 알아서 할게.]

뭘 어떻게 알아서 한다는 거야?

하지만 난 더 묻는 대신 기사에게 손짓했다.

“오늘은 저택 앞의 번화가를 돌아보고 싶어. 오일장이 선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살펴보고 싶고.”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내 옆에 딱 붙어 있는 이디스 경과 밀리샤 경은 B급 기사답지 않게 감이 좋은 친구들이었다. 덕분에 데리고 다니기 좋았다.

뭣보다 B급 퓨어딜러라니, 귀엽잖아.

게다가 가끔 그들이 수련할 때 보면 검식을 쓰다가 스킬이 꼬이는 모습도 보였다.

시스템창이 보였으면 그들이 검식을 틀릴 일은 없었을 텐데, 아무래도 시스템창이 없어서 그런 듯했다.

저건 B랭크 스킬 포를랭 3검식의 경로다.

내 눈에는 그게 보였다. 이미 세니아 드 포를랭이 알고 있는 스킬이라 그런지도 몰랐다.

그걸 몇 번 알려줬더니 밀리샤와 이디스가 나를 보는 시선이 더욱 극진해졌다.

“정말 감사합니다!”

특히 세니아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아본 적이 없었던 이디스는 더더욱 그랬다. 귀여운 B급 딜러들 같으니.

―덜컹!

마차는 금세 준비되어 성 앞 번화가로 향했다. 이전에 주이안 씨를 만났던 곳이었다.

오늘 그곳엔 고해소 대신 성대한 오일장이 서 있었다.

“오…….”

한국 오일장하고는 또 다르겠지?

마차가 멈춘 후에, 난 밀리샤가 문을 열어주기도 전에 마차 문을 슬쩍 열고 바깥으로 발을 내디뎠다.

외출용 바지를 입은 터라 몸은 가뿐했다.

포를랭이 무가라서 좋은 건, 다른 귀족 영애들처럼 레이스가 주렁주렁 달린 화려한 드레스 때문에 고생할 일이 거의 없다는 거였다.

―탁.

시장의 분위기가 들떠서 그런가, 땅바닥을 딛는 내 발걸음도 경쾌하게 들렸다.

“아가씨, 제가 모시겠습니다.”

놀란 밀리샤가 다가왔지만 난 손을 흔들었다.

“괜찮아. 요즘 몸도 많이 좋아졌고.”

무엇보다 내가 만나고자 하는 사람이 바로 근처에 있으니 에스코트를 받을 생각은 없었다.

마차가 선 곳 바로 근처 상점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던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RP던전의 인물에 빙의했다지만, 이곳은 기본적으로 던전이었다.

우리의 외형에 맞추어 우리가 빙의한 캐릭터들의 얼굴 설정이 변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소예리 헌터가 무슨 옷을 입고 있든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오.”

화려한 마법사 로브가 먼저 보였다.

소예리 헌터님이 좋아하는 진한 붉은빛에 은빛 장식이 수놓아진 로브였다.

그 위로 보이는 건 검은 머리칼이었다. 원래 붉은색으로 염색하셨었는데, 던전 들어와서 바뀐 건가?

붉은 머리가 좋다고, S급은 머리도 안 상한다며 최고급 염색약을 쌓아놓고 사셨던 분이 웬일로?

아, 아니면 사람들이 알아볼까봐 염색하신 건가?

아무래도 후자인 듯했다.

“흐으음.”

검은 머리칼 아래의 금안이 반짝였다. 재밌는 물건들을 잔뜩 보신 모양이다.

호기심 많은 소예리 헌터님은 그 호기심 덕인지, 뭔가 잡스러운 감정 스킬도 많이 갖고 있었다.

“이거랑…… 이거.”

가까이 다가가니 물건을 고르는 눈이 빛났다.

저건 감정(B) 스킬의 효과다.

난 그 모습을 모른 척 흘끔흘끔 보며 상점의 물건들을 둘러보았다.

“고르려면 얼른 고르쇼.”

그런데 상인은 화가 난 모양이었다.

하긴, 물건 까다롭게 고르면서 안 사는 사람이면 화날 만도 하지.

하지만 난 안다.

저 상인은 곧 함박웃음을 짓게 될 것이다.

“……사이에 있는 물건들 다 담아 주세요.”

소예리 헌터의 말에 상인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예, 예?”

“모두 담아주세요. 다 갖고 싶어요.”

소예리 헌터가 예쁘게 웃었다.

그래, 소예리 헌터는 지름신을 참지 않는 사람이다.

일단 눈에 띄는 물건은 다 산다!

“아, 알겠습니다!”

순식간에 함박미소를 짓게 된 상인이 커다란 종이봉투를 꺼냈다.

그가 조심스럽게 물건들을 담는 동안, 소예리 헌터님이 날 돌아보았다.

“아가씨도 사고 싶은 물건이 있나요?”

왜요, 뭐 사게요? 하고 툭 말을 던질 줄 알았던 소예리 헌터의 목소리는 부드럽기만 했다.

익숙한 얼굴에 그렇지 못한 말투에 웃음이 터질 뻔했다.

“아뇨, 그냥 구경 왔어요.”

난 간신히 귀족 영애 같은 조그만 웃음만 새게 하는 데에 성공했다.

“구경이요?”

소예리 헌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원래 소예리 헌터였으면 등을 팡 치면서 그럼 나랑 가즈아! 하고 내 손을 이끌었어야 했다.

빙의한 ‘클로나 에이센’이 원래 조용한 성격인가?

“네. 아파서 이런 곳에 한동안 못 나와봤거든요.”

내 말에 밀리샤와 이디스의 표정이 안 좋아지는 게 보였다.

아니, 너희들이 왜 안타까워해?

“세상에.”

내 말에 소예리 헌터가 살짝 입을 벌렸다.

밀리샤와 이디스 경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안타까워하는 얼굴이었다.

“마음 아프게도.”

그녀의 떨리는 손끝이 내 어깨에 닿았다.

아니, 이분이 왜 이래?

평소에 소예리 헌터가 할 만한 짓은 아니었다.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이러니까 정말 소예리 헌터님 아닌 것 같아요 ㅋㅋㅋㅋㅋ]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나도 그래요! 근데 빙의한 애가 사근사근한 캐릭터인 걸 어떡해?]

그럼 그렇지. 이렇게 안 어울리는 짓 하는 이유가 있었다.

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삼켰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나도 적응 안 되니까 웃지 마요!]

“조금 시간이 있을 것 같은데…… 제가 구경시켜 드릴까요, 아가씨?”

눈앞의 소예리 헌터, 아니 클로나 에이센과 소예리 헌터는 헌터 채팅으로 제각기 다른 자아를 뽐내고 있었다.

“좋아요.”

난 웃음을 참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밀리샤와 이디스가 뒤에서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아가씨.”

나를 만류하려는 듯했다.

모시는 아가씨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덥석 따라가려 하니 당연했다.

하지만 여기서 소예리 헌터님하고 헤어지면 좀 곤란하거든.

난 귀여운 B급 아가들에게 살짝 웃어 주었다.

“조금만. 오랜만에 나왔잖아.”

들뜬 얼굴로 말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시장 때문에 즐거운 게 아니라 소예리 헌터를 만나서 즐거운 거지만, 귀여운 기사 친구들이 그걸 알 리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밀리샤와 이디스는 결국 곤란하다는 얼굴로 물러났다.

[경계 태세]

내 스킬창에 있는 스킬이라 그런지 두 사람 머리 위로 쌍검이 올라오는 게 보였다. 당연히 경계대상은 소예리 헌터였다.

난 시스템창을 보면서 웃음을 삼켰다.

아이고, 귀엽기도 하지.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저 귀여운 B급 꼬마들은 누구?]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호위기사요]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헐]

소예리 헌터가 간신히 웃음을 참는 게 보였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신유리를? 자기들이 누굴 호위하려고 하는지는 아는 걸까?]

원래 그녀라면 깔깔 웃고 난리도 아니었을 터였다.

직설적인 표현을 서슴지 않는 그녀는, 예의를 지키는 선에서 표현이 풍부한 사람이었으니까.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여기가 한국이었으면 S급 딜러 신유리를 지키려는 호위기사가 있다고 난리가 났을 텐데!]

깔깔 웃는 그녀의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지금은 클로나 에이센이라는 마탑주였다.

게다가 그녀의 말에 따르면 성격이 사근사근하기까지 한.

“시장이 좀 시끄럽긴 한데…….”

간신히 웃음을 참은 그녀가 말을 이었다.

“혹시 쓰레기 새끼들이 껄떡거리면 제가 처리해줄 테니 신경 쓰지 말고.”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볼 것이 아주 많은 거리랍니다. 잘 따라와요.]

난 그 말에 멈칫했다.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저기, 나올 말이랑 헌터 채팅이 바뀌었는데요.]

내 말에 소예리 헌터도 멈칫했다.

“어머.”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빌어먹을, 역시 힘들다니까.]

입을 살짝 막은 그녀가 곤란하다는 얼굴로 웃었다.

“귀찮아 죽겠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말조심해야지.]

저기, 방금도 바뀐 것 같은데요?

작은 목소리라 다행이지, 페널티 위기가 목전에 있었다.

아무래도 쉽지 않은 여정(?)이 될 듯했다.

***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 헌터님)>>> 거슬리네]

채팅을 지켜보던 단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주이안은 신재헌의 그 채팅에서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입 안에서 꺼끌거리는 말이었다.

“맞아요, 신재헌 헌터님.”

그가 낮게 말했다.

“나도 거슬려요.”

같은 헌터팀의 헌터를 노리는 자가 있다면 거슬릴 수밖에 없다.

그것도 실력이 안 되어 독이나 쓰는 저급한 족속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묘하게 저 말이 기억에 남았다.

“거슬리네.”

주이안이 입 안에서 그의 말을 굴려볼 때였다.

“신성 예하.”

그를 부르는 소리에 그가 시선을 돌렸다. 단안경과 연결된 금빛 줄이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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