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계승식 전까지 적어도 C급은 만들어 두려고요]
하녀가 새 음식을 가져올 때쯤에, 내 휘황찬란한 계획이 채팅창에 공유되었다.
일반인이 헌터가 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F급 헌터가 E급과 D급을 넘어 C급이 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건 아래에서 올려다보았을 때의 이야기다.
까마득한 산꼭대기, S급에 있었던 내 눈에는 일반인에서 C급으로 올라가는 게 S급 내에서 스탯을 올리는 것보다 훨씬 쉬워 보였다.
물론 세니아의 몸이 잘 따라준다면, 말이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근데 포를랭 가에 있으면 자꾸 독 먹이려고 들 거 아니에요? 나와서 살래?]
어지간히 급했는지 반말과 존대가 섞여서 나오는 게 보였다.
픽 웃음이 터졌다.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어디로 나가는데요?]
나 여기 말곤 갈 데 없는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우리집!]
갑자기 소예리 헌터가 불쑥 튀어나왔다.
아니, 채팅 보고 계셨어?
하긴, 개인톡 기능도 없는 헌터 채팅에서 이런 일은 흔한 일이었다.
나와 신재헌이 뭐라 반응할 틈도 없이 소예리 헌터의 채팅이 빠르게 올라왔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어차피 신유리 헌터님 황가도 교단도 못 간다면서요. 그럼 우리 집 와.]
그건 맞는 소리긴 했다. 몇 가지 사소한 문제를 빼면.
난 슬그머니 물었다.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소예리 헌터 집이 어딘데요?]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마물 잡는 곳이요. 마물은 내가 잡을 테니까 겸사겸사 경험치도 드시고.]
수련하기엔 딱일 거라는 소리다. 좀 끌리는데?
내가 채팅에 뭐라 답하려는 때였다. 신재헌이 끼어들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그런데 포를랭 영애와 마탑주가 원래 아는 사이가 아니잖아요?]
그답지 않은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그러게?
모르는 사이인데 뜬금없이 짱친 먹고 소예리 헌터 집으로 날랐다간 그날로 RP던전 페널티 먹고 모가지다.
하지만 소예리 헌터는 굴하지 않았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그럼 새로 아는 사이 하면 되죠!]
소예리 헌터의 발랄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신유리! 나와! 언니가 맛있는 거 사줄게!]
“못 산다, 진짜.”
오랜만에 웃음이 터졌다.
난 그렇게 소예리 헌터와 ‘우연히 만나 친구 되기’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
[클로나 에이센(소예리 헌터)>>> 아니, 시장에만 있으면 다 알아서 해 주겠다니까요.]
[세니아 드 포를랭(유리)>>> 진짜죠? 그냥 나가면 되지?]
[클로나 에이센(소예리 헌터)>>> 그렇다니까!]
발랄한 채팅이 눈앞을 오갔다.
―툭, 툭, 툭, 툭.
채팅을 보며 황좌를 두드리던 자의 손이 멎었다.
화려한 금으로 꾸며진 황좌는 피가 묻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붉은 천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 신재헌이 앞을 바라보았다.
“…….”
알현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원래 의전관이나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을 감시하려고 붙어 있던 귀족 세력의 밀정들은 모두 두꺼운 카펫 위의 피로 산화해버린 지 오래였다.
그중엔 심지어 카르만과 휴전 중이지만, 적대국가나 다름없는 발탄 제국의 첩자와 연결된 자들도 있었다.
그들 역시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건 그가 황제로 빙의하자마자 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위는 얼마 전 다시 붉은 피로 덮였다.
이번에는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 대신 그의 숙부를 지지하던 자들의 피였다.
알현실에 들르는 자들이 그 생생한 핏자국에 놀라는 꼴을 보면서도, 신재헌은 굳이 그 카펫을 치우라 하지 않았다.
저건 이 알현실에 들르는 자들에게 한동안 경각심을 주게 될 테니.
“…….”
신재헌이 다시 눈을 돌렸다.
바쁘게 올라가는 채팅창을 보던 그가 바로 옆, 자신의 퀘스트창으로 시선을 주었다.
[개인 퀘스트 : 황권 강화 진행 중]
[개인 퀘스트(MAIN) : 원하는 것을 완전히 가져라]
메인 개인 퀘스트는 미클리어 시 이 RP던전을 빠져나갈 수 없는, 중요한 퀘스트다.
신재헌은 어깨를 으쓱했다.
“전부터 장비 파밍이 좀 하고 싶었는데.”
마침 잘된 일이다.
여긴 기본적으로 L급 던전이니, 이곳에서 나오는 아이템들은 대부분 등급이 높을 것이 분명했다.
특히 그가 앉은 황제라는 자리는 귀한 장비들의 위치를 알아보는 데에 제격이었다.
그가 사람을 이곳저곳에 보내어 알아본 결과, 트랩과 마물들이 지키는 던전 끝에 있는 마검이나 성검 등은 특히 등급이 높은 것들이었다.
아쉽게도 옆 제국인 발탄보다는 질이 좋지 못했지만.
어쨌든 그는 그런 물건들을 죄다 가져오라 명했다.
어차피 S급인 그의 눈에는 기사들의 수준이 훤히 보였다.
그보다 등급이 높은 헌터, 아니, 기사들은 없으니 당연했다.
“황가의 기사단이 대부분 A급 상위 딜러고…….”
그는 게이트 사태에 익숙한 헌터였다.
덕분에 여러 던전에 마법사와 딜러, 즉 기사들을 팀으로 나누어 보물을 가져오게 하기는 그에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마법사와 기사들은 처음에는 불안해했다가, 던전에서는 신기해했다가, 나중에는 그를 존경했다.
대체 어떻게 그들 자신의 수준을 잘 알고 이렇게 적절한 던전에 파견하신단 말인가?
뿐만 아니라 그 던전에서의 경험은 기사나 마법사들에게 또 다른 수련의 기회가 되기도 했다.
덕분에 그는 기존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이 쌓아왔던 한심한 업적들을 연일 갈아엎고 있었다.
지금 황성에서, 적어도 그와 단 한 번이라도 마주한 적이 있는 자는 그의 실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번에 보고가 올라온 던전은 적어도 S급 이상의 딜러가 필요해 보이는데.”
그가 서브 테이블에 있는 종이를 집어 들었다.
[마검 ‘라제티아’ 던전]
그는 종이에 적힌 내용을 흥미롭게 훑어보았다.
대한민국에서처럼 던전이 헌터 랭크로 표시되진 않았기 때문에, 그가 이곳 기사들의 수준과 맞추어 이곳의 던전을 랭크화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등장하는 마물들의 수준과 느껴지는 마력의 정도를 통해 산출한 마검 라제티아의 던전 등급은 A급 상위.
피해 없이 쉽게 잡으려면 적어도 A급 상위의 힐러와 보조계 헌터, 딜러가 함께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S급 딜러 하나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리고 그 딜러는 굳이 먼 데서 찾을 필요 없었다.
“이건 직접 가서 구해오는 게 빠르겠네.”
그가 종이를 옆으로 휙 던져 버렸다.
종이는 바닥이 아닌 그의 던전 인벤토리로 들어가 버렸다.
“폐하.”
그때 알현실 밖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이곳에 온 뒤 네 번째로 갈아치운 알현실 앞의 시종이었다.
“들라.”
그가 짧게 말하자 거대한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문틈으로 트롤리를 끌고 들어온 시종이 고개를 숙였다.
신재헌의 시선이 트롤리로 향했다.
그곳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건 제국 각지에서 모은 검과 방패 등의 장비였다.
[레아의 검(C)]
[불의 방패(B)]
……
대부분 볼 것 없는 장비들이었다.
“가져와.”
그래도 가까이에서 보는 것과는 다르리라.
트롤리가 소리 없이 피 묻은 카펫을 지나 그의 앞에 다다랐다.
그가 손짓하자, 시종은 소리 없이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신재헌은 트롤리의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세니아 드 포를랭(유리)>>> 그럼 포를랭 영지에서 만나요!]
[클로나 에이센(소예리 헌터)>>> 오케이!]
그러는 동안 길게 이어지던 두 헌터의 채팅은 끊겨 있었다.
“…….”
신재헌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곳이 RP던전만 아니었으면 그 역시 포를랭 영지로 갔을 터였다.
그까지 4명으로 이루어진 헌터팀은, 던전에 가지 않을 때에도 늘 함께 있었으니까.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는 게 낯설고, 어색할 정도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가 무기 하나를 집어 들었다.
[물의 정령의 검(A)]
그나마 눈에 띄는 게 이거였다.
A급 하위 정도의 무기.
중하급 헌터들에게는 신의 무기나 다름없겠지만 그에게는 쓸모없었다.
“내가 찾던 것들은 아니군.”
그가 트롤리 위로 검을 툭 떨어뜨렸다. 무기를 재빨리 받아든 시종이 물었다.
“폐기할까요?”
“그―”
고민 없이 그러라 명하려던 신재헌의 손끝이 멎었다.
다른 놈들이 갖는 것보단 폐기해버리는 게 나았다. 황권 강화 퀘스트를 위해서는 그랬다.
하지만 신재헌은 손끝을 내렸다.
“이번 검술 대회에서 상으로 내리지.”
그의 말에 시종의 얼굴이 폈다.
확실히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고생해서 얻어온 병장기인 만큼 그가 보기엔 고급스러운 물건들이 많았던 것이다.
이대로 버리기에는 아까웠다.
“그리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시종이 몸을 조심스럽게 물리려는 순간이었다. 신재헌이 다시 불쑥 트롤리로 손을 뻗어 검 하나를 집었다.
[수룡의 가시비늘(B)]
[체력+15000, 지구력+200, 마력+200]
B급에 이 정도 능력치면 나쁘지 않은데?
물론 S급인 그가 B급 물건을 쓸 일은 없었다. 대신 그는 지금 S급 무구를 쓸 수 없는 신유리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만 두고.”
그 말에 시종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가 보기에도 저 검보다는 좋아 보이는 무기가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감히 황제의 말에 거역할 수는 없는 법.
“예.”
신재헌은 고개를 숙인 시종에게 손짓했다. 나가 보라는 의미였다.
휙, 몸을 돌려 다시 황좌로 돌아간 그가 소리 없이 웃었다.
저 중 가장 좋은 물건은 신유리의 것이 될 터다.
어차피 S급 상위 무기를 낮은 등급의 헌터가 쓰려고 해 봐야 검에 휘둘리기만 할 뿐이다.
그 자신이 그래봤기에 알았다.
“C급이 되겠다 했으니…….”
신유리, 그녀라면 해낼 것이다.
일반인이 2주 내로 C급이 된다고?
지구의 헌터들이 듣는다면 기도 안 찰 소리라고 하겠지만 신유리는 할 수 있었다.
신재헌은 그렇게 확신했다.
C급에서 S급이 된 예시를 바로 옆에서 본 그녀가, 일반인에서 C급이 되기가 어려울까.
“그래도 고생할 테니 선물 하나쯤은 괜찮겠지?”
유독 신유리 생각이 났다. 그가 헌터 채팅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세니아 드 포를랭(유리)]
그 이름이 눈에 자꾸 띄었다.
주이안이나 소예리보다도 오래 함께해서 그런지도 몰랐다.
훨씬 어리고, 어려웠던 때부터.
“보고 싶네.”
그가 툭 던지듯 말했다.
지난 10여 년 동안은 느낄 틈도 없었던 그리움이었다.
그들은 늘 함께 있었으니까.
그는 문득 제가 약한 헌터였을 때를 회상했다. 그때도 신유리는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그녀가 아니었으면 그는 이 자리에 없었을 터였다.
10여 년 전 터진 게이트에 휘말려 이미 사망했을 테니까.
‘치지직-’
‘정부 주재의 재난 컨트롤타워가 상황을 지휘할 것입니다.’
인터넷은 물론이고 휴대폰까지 모두 불통이 되었던 그날.
전국, 아니 전 세계에 동시다발적으로 터진 게이트를 처리한 건 각 나라의 군인들이 아니었다.
그들보다 먼저 상황에 적응하고 각성한 헌터들이었다.
그리고 신유리는 그들 중에서도 가장 먼저 상황에 적응한 사람이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S급 헌터]
그렇게 찬란하게 빛나는 그녀 옆에서, 그는 반드시 강해져야 했다. 짐이 되기는 싫었으니까.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 - S급(딜러)]
[클로나 에이센(소예리 헌터) - S급(보조)]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 헌터) - S급(힐러)]
[세니아 드 포를랭(유리) - 일반인]
헌터팀 상태창을 보던 그가 입술을 일자로 굳게 다물었다.
그의 시선은 ‘일반인’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 비웃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 이 순간의 신유리를 누구보다도 깊이 이해했다. 그러기에 도와줄 수밖에 없었다.
신유리가 10여 년 전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신재헌…… 헌터 각성.’
‘각성 랭크…… C.’
A급 몬스터가 쏟아져 나오는 한가운데에서, C급 헌터에 불과한 자신을 위해 피를 뒤집어썼던 신유리.
이제 그가 신유리를 지켜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