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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던전의 S급 시한부 영애 (8)화 (8/218)

8화

“아, 오라버니.”

내가 오라버니라는 호칭을 마지막으로 써본 건 신재헌하고 했던 내기에서 졌을 때였다.

소름이 오소소 돋았지만 입술을 꾹 다물어 참아냈다.

RP던전 페널티 받을 순 없잖아!

“요즘 다시 검을 잡았다면서. 계승식 때문이지?”

키칼은 내 손에 쥐어진 검을 보다가 나를 보았다.

계승식 이야기를 굳이 하는 건, 내가 검을 잡는 순간 제 경쟁자가 되기 때문일 터였다.

“맞아요.”

그리고 난 그걸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키칼의 표정이 아주 잠깐 굳는 걸, 난 분명히 보았다.

이놈 보게?

하지만 그건 찰나였다. 그의 표정이 곧 부드럽게 풀렸다.

그리고 걱정이 담긴 표정으로 변했다.

“너무 무리하지 마. 알잖아. 폐에 병이 들면 이미…….”

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이미 뭐? 망했으니까 하지 말라고? 이놈 말하는 본새가 끝내주는데?

난 어이가 없어서 웃을 뻔했다.

RP던전 페널티 목전까지 다녀온 난 정신을 가다듬었다.

난 세니아 드 포를랭이다! 신유리 아니다!

여기서 박장대소하면 페널티다!

“그래도 다시 주어진 기회를 물리고 싶진 않아요.”

[히든 퀘스트 : 끈질긴 설득 클리어!]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검에 대한 의지를 다졌습니다.]

[방어력 +5]

히든 퀘스트도 있었냐? 난 나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그래, 이 기세로 쑥쑥 커라, 세니아!

근데 내 미소를 무슨 뜻으로 해석했는지 키칼이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 자신 있다면, 나도 정진할게, 세냐.”

그러고는 몸을 홱 돌려서 가 버렸다.

저놈 봐라?

난 어이가 없어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다가, 키칼 놈이 사라지고 나서야 터뜨릴 수 있었다.

“저게 미쳤나?”

아니 저놈은, 위로하러 온 척하면서 왜 이미 네 폐는 뒈졌다는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위로 맞냐? 난 키칼의 머리 위에 떠 있던 마크를 생각하며 인상을 구겼다.

“분명 딜러 마크는 맞는데…….”

저번에 잘못 본 게 아니었단 말이지. 그의 검 마크 뒤에 일렁이는 구리구리한 기운은 더욱 강해져 있었다.

“아무래도 저놈이 구리구리해. 구린 냄새가 나.”

눈살을 찌푸린 난 다시 검을 다잡았다. 드디어 수련할 수 있는 시간이 왔다!

‘포를랭 1검식.’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상태창이 우르르 떠올랐다.

[포를랭 1검식(F)을 사용합니다.]

[체력과 지구력에 비례해 총 사용 횟수가 계산됩니다.]

[현재 체력과 지구력 기준 총 사용 횟수 계산 중…….]

“?????”

이렇게 복잡한 스킬이었어?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검 두 번만 휘둘렀을 뿐인데 눈앞이 까무룩해졌다.

[……계산 완료. 0.2회]

[의식이 OFF됩니다.]

야, 이, 씨…….

털썩, 하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의식이 끊겼다.

***

눈 떠보니 낯익은 천장이었다. 내 방 천장.

키칼 딜러 마크보다 구린 현실이었다.

“실화냐.”

F급 스킬 한 번도 못 써보고 정신을 잃어? 의식이 OFF돼?

난 살면서 그런 시스템창 처음 봤다.

S급 던전에서 주이안 씨랑 소예리 헌터가 쓰러져서 신재헌이랑 둘이 굴러서 클리어했을 때도 이런 상태창은 못 봤다.

어이가 없네?

그렇게 생각하는데 문이 달칵 열렸다.

“어머, 아가씨!”

목소리가 우렁찬 하녀가 놀라 트롤리도 잊고 내게 달려왔다.

“괜찮으세요?”

“괜찮아.”

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안 괜찮다. 상태창을 켜 보니 가관이었다.

[체력 : 56 / 200]

분명 쓰러지기 전엔 풀피였는데 일어나보니 이 모양이다.

이게 바로 위대한 F급 스킬 포를랭 1검식의 효과?

……일 리는 없고 그냥 아직 스탯이 낮아서 그런 듯했다.

난 아직도 쓰러지기 직전에 봤던 시스템창을 잊을 수가 없었다.

사용 횟수 0.2회. WOW!

“다행이에요! 주인님들과 도련님들께서 얼마나 걱정하셨는지 몰라요……. 어머, 내 정신 좀 봐.”

하녀는 재빨리 트롤리로 달려갔다.

그녀가 쟁반 위의 음식을 덮은 둥근 뚜껑을 걷어내자 김이 폴폴 나는 뜨끈한 수프가 보였다.

“이거라도 먼저 마시고 계시겠어요? 아가씨께서 언제 깨어나실지 몰라 한 시간마다 대령하라 하신 수프예요.”

배고파서 쓰러진 줄 알았나 보다.

난 헛웃음을 참았다. 하지만 그런 세심한 배려도 나쁘지 않았다.

“고마워.”

일어나 앉은 내가 손짓하자 하녀가 수프를 쟁반째 내 앞에 놓아 주었다.

아, 계단참에서 양송이수프 퍼먹었던 거 생각나네.

내가 무심코 수프가 담긴 그릇을 잡았을 때였다.

[서브 퀘스트 : 귀족답게]

[언제나 귀족다운 몸가짐을 잃지 마세요.]

[조건 : 수프 우아하게 마시기]

[보상 : 체력 모두 회복]

아, 맞다.

이건 보상이 문제가 아니라 한국에 있을 때처럼 후루룩 마셔버렸다간 RP던전 규칙 위반이었다.

―달그락.

결국 스푼을 들긴 들었는데, 아, 이거 감질날 것 같단 말이지.

내가 스푼으로 수프 표면을 슬쩍 긁어 입에 가져다 댔을 때였다.

[DANGER!!]

“……!”

스푼을 든 내 손이 우뚝 멈췄다.

[독이 감지되었습니다. (독 감지(SS) 효과)]

[독 리실린(A) 감지]

[독 감지(SS) 스킬의 효과로 자동해독됩니다.]

“오.”

인생이 스펙터클하기 짝이 없었다.

F급 스킬 쓰려다 정신 잃고 일어나보니 독이 든 수프가 내 앞에 있다?

입가에 인자한 미소가 떠올랐다.

독을 준 게 이 하녀는 아닐 거고…….

“혹시 이 수프는 누가 준비하라고 했어?”

“아, 이거요? 키칼 도련님께서요.”

하녀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오, 그렇구나.

“요즘 아가씨 걱정을 많이 하세요.”

본인 걱정이겠지. 설마, 설마 했더니 정말 키칼 그놈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웃자 하녀가 기분 좋은 목소리로 물었다.

“따로 말씀이라도 전해 드릴까요?”

고맙다는 말 같은 거라도 전해줄까 해서 묻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직접 전할게.”

“아차, 아가씨께서도 이제 움직이실 수 있죠!”

하녀가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대책 없이 해맑은 하녀다. 난 하이텐션 하녀에게 손짓해 보였다.

“응, 이제 거뜬해.”

내 말에 하이텐션 하녀가 신나서 방방 뛰었다.

“그럼 더 맛있는 거 많이 가져오겠습니다!”

“그건 부엌에서 따로 준비해줄래?”

내 말에 하녀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알겠습니당!”

하녀가 신이 나서 사라져 버렸다. 또 키칼 놈이 독 넣은 걸 먹을 수는 없지.

그건 그렇고…….

난 슬슬 식어가는 수프를 꼬나보았다.

“이야…….”

설마, 설마 했더니 진짜였네?

검 연습 시작한 동생을 독으로 바로 쓰러뜨리려고 해?

“이렇게밖에 후계자 자리를 유지 못 하겠다?”

어휴, 찌질해. 난 수프를 대충 옆으로 치워두고는 헌터 채팅을 열었다.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독 맞았네요]

주이안 씨한테 사실은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였다. 근데 주이안 씨보다 먼저 튀어나온 사람이 있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독? 무슨 독?]

다짜고짜 반말 찍찍이다.

“이놈 분명히 헌터팀 다른 사람 있을 땐 존댓말하기로 해 놓고서.”

어이가 없어서 웃어 버렸다. 물론 지금 와서는 별 의미 없는 약속이기는 했다.

처음 신재헌과 내가 이 약속을 했던 건, 고등학교 동창으로 처음 만났던 우리와는 달리, 나중에 합류한 소예리 헌터와 주이안 씨를 배려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같이 게이트 여럿을 공략하면서 우리 사정을 알게 된 주이안 씨와 소예리 헌터는 우리가 존대를 하든 말든 신경 안 쓰는 눈치였다.

그래서 우리 사이 대화는 거의 반존대에 가까웠다.

“……근데 내가 여기다 말 안 했나?”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제가 빙의한 영애가 알고 보니까 시한부 환자가 아니고 독을 먹어서 그런 거래요]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귀족한테 독을? 누가요?]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그걸 방금 알았는데 얘네 오빠란 놈이]

내 채팅이 올라가자마자 벼락같이 답변이 왔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아 그 키칼 드 포를랭?]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아니 어떻게 알아요?]

세니아 얘 오빠 두 명인데?

하긴 세니아가 병을 얻자마자 바로 후계자 자리를 꿰찬 놈이 그놈이었으니 구려 보일 만도 했다.

내가 머쓱해할 때였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신유리 헌터 있는 곳이면 자세히 알아봐야죠.]

신재헌의 채팅이 올라왔다. 난 잠시 눈을 깜빡였다.

당연한 말인데 본의 아니게 떨어져 있는 상태다 보니 묘하게 감동스러웠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근데 세니아는 원래 헌터 랭크가 어느 정도였어요?]

그때 질문이 올라와서, 난 생각을 멈추고 바로 대답했다.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A급 상위 정도? 스킬도 다 그렇고요. 지금은 체력이 후져져서 못 쓰긴 하는데]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아…… 그런데 독을 써서 그렇게 만들었다는 거죠?]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네]

내 답에 신재헌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내가 헌터 채팅을 끄려 할 즈음에 답이 툭 올라왔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거슬리네]

헌터 채팅을 보다가 난 눈을 깜빡였다.

물론 같은 팀 헌터 건드리는 놈 있으면 나 같아도 거슬릴 것 같다.

그런데 이놈이 어젠지 엊그젠지 알현실에 피바람을 불게 한 황제라는 걸 생각하면 왠지 소름이 돋았다.

“……신재헌 적응 끝내주게 잘하네.”

게이트에선 맨날 얼레벌레 웃던 놈이.

문득 언젠가가 떠올랐다.

‘야, 내가 여기서 살아서 나가면 내일 축구공 선물해 줄게.’

‘축구공을 뭐 하러?’

SS급 몬스터 무더기를 앞에 놓고 하는 소리치고는 실없었다.

그가 날 쳐다보면서 웃었던 기억이 선했다. 짙푸른 눈동자는 그때도 긴장감 없이 웃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 여기 밀어 넣은 헌터협회 놈들 대가리 따서.’

‘염병하고 있네.’

그래, 이놈은 나랑 둘이 남아서 죽네 사네 할 때도 헛소리 지껄이던 놈이었지.

픽 웃은 나는 헌터 채팅을 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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