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아 교황 잡는 게 제일 보상 좋았는데 아깝네요]
입맛을 다시는 신재헌의 얼굴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이보쇼.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그니까 요컨대 난 주이안 씨 아니면 신재헌 씨 둘 중 하나만 만나야 한다는 거예요?]
주이안 헌터 만나서 병 치료받고, 황궁 가서 신재헌 만나서 가신 하면 안 되는 거?
그 말에 신재헌과 주이안 씨의 채팅이 동시에 올라왔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아마?]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아무래도 우리 둘을 번갈아 만나면 신유리 헌터님 상황이 곤란해질 거예요.]
요컨대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놈 된다는 거지?
이거 골 때리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정 둘 다 만나고 싶으면 주이안 헌터는 몰래 만나고 내 가신 하세요]
그런 얘기 막 해도 돼? 황당해서 실실 웃음을 흘렸다.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실화냐]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아니 근데 병 고칠 방법이야 여러 가지일 거고, 황제보단 교단 사람이 만나기 쉬울 거 아니에요]
그건 그랬다. 당장 내가 있는 이 복도에도 신시안 교의 문장이 붙어 있었으니까.
[신시안 교의 문장]
[카르만 제국에 가장 널리 퍼진 종교인 신시안 교의 문장이다.
신시안은 황가와 신시안 교의 정치적인 상황과는 별개로, 카르만 제국민들의 큰 지지를 받고 있는 교단이다.
반면 카르만 제국과 견제관계인 발탄(동제국)에는 신시안 교의 신전이 전혀 없다.]
“세냐?”
그때 가족들이 날 불렀다. 난 화들짝 놀라서 실실거리던 웃음을 거두었다.
어우, RP던전 쫑날 뻔했네.
“어디 아픈 데라도 있는 거야?”
키칼인지 뭔지 하는 오빠 놈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 왔다.
아프면 실실 웃겠냐?
“이놈이!”
그의 말뜻을 알아차린 포를랭 자작이 그의 등짝을 후려갈겼다.
그 사이 헌터 채팅이 다시 올라왔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아무튼 가신추천]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아니 왜 그렇게 가신을 밀어붙여요 아까부터 ㅋㅋㅋㅋ]
내 말에 신재헌은 고민 하나 없이 답했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그럼 S급 특급 딜러를 놓치라고요? 이 나라 딜에 죽고 딜에 산다던데?]
딜생딜사는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정보창이 떴다.
[정보 : 제국의 정세
서제국이라고도 불리는 카르만 제국은 검을 숭상하는 국가입니다.
그런데 현 황제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은 검 실력이 가장 미천하고 몸이 약한 데다, 머리가 좋지 않아 많은 귀족들이 몸을 돌린 상태입니다.
경쟁국인 동제국 ‘발탄’에서는 그런 그의 상황을 보고 서제국 카르만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검을 잘 쓰는 신하가 필요합니다. 그 본인도 건강이 좋아져 검을 쓸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죠.]
검 실력이 가장 미천하고 몸이 약해? 멍청해?
그건 어제까지의 얘기였을 것이다.
신재헌이 황제가 된 이상 카르만 흥했습니다. 이 주식은 살았습니다.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그야 딜러가 필요해 보이긴 하는데…… 근데 여러분 다 능력치 갖고 들어왔어요?]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네, 갖고 들어왔어요. 스킬도 모두 있고요.]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저도요]
마탑주가 된 소예리 헌터는 말이 없었다.
그래도 아마 마탑주라니까 소예리 헌터도 본인의 보조 스킬을 다 들고 들어왔을 가능성이 컸다.
그럼 나만 이 꼬라지란 소리?
난 인자한 미소를 거둘 수가 없었다.
나중에 신의 상점인가 뭔가나 뒤져봐야겠다. 뭐 쓸모 있는 거 있나.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그럼 일단 민심을 살핀다고 하고 나갈게요. 잠행 퀘스트도 있어서. 포를랭 가 근처 시장으로 가면 만날 수 있겠죠?]
결국 주이안 헌터와는 몰래 만나기로 했다.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네. 체력이 좀 깎일 것 같긴 한데 힐링 있으시죠?]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있죠. 그리고 교황 스킬 보너스로 죽은 사람 소생도 한 번은 가능하대요.]
와 씨, 대박인데?
근데 왜 그 소생 내가 받을 것 같지?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그럼 만나는 건…….]
***
주이안 헌터와 만나는 날짜는 이틀 후였다.
그리고 그 이틀은 잡스러운 퀘스트를 좀 끝냈더니 금방 지나갔다.
내가 그동안 깬 퀘스트들은 이러했다.
복도 나가기. 100m 쉬지 않고 걷기. 팔굽혀펴기 시도해보기 등등.
그럴 때마다 FULL체력은 쑥쑥 올라갔다.
그래서 이틀이 지난 지금, 내 풀체력은 무려 30!
와, 대단하다!
“오늘 외출하신다고 하셨죠! 제가 금방 외출 준비 마치고 올게요!”
―쾅!
[지나치게 큰 소리를 들어 체력이 소모됩니다.]
[–1]
오늘도 하이텐션의 하녀가 문을 세게 닫는 바람에 체력은 [29/30]이 되었다.
그래도 전보단 살 만했다. 부축을 받아서 저택 밖으로 나가는 것도 생각보다 쉬웠다.
[서브 퀘스트 : 체력 증강
목표 : 저택 나가기]
[서브 퀘스트 : 체력 증강 클리어!]
[FULL체력이 3 증가합니다.]
“너무 멀리는 가지 말고. 기사들을 붙여 줄 테니.”
포를랭 자작부인은 오랜만에 멀리(?) 나가는 딸이 걱정되는 듯했다. 그래 봐야 저택 거의 바로 앞인데.
그것도 마차 타고 가는 거였다.
“다녀올게요.”
난 포를랭 일가에게 손을 흔들고는 마차에 올라탔다.
나를 따라온다는 오빠 놈들은 그냥 물려 버렸다.
아무래도 저 딜러 마크 뒤에 이상한 연기 같은 게 피어오르는 것이 영 미심쩍어서였다.
내가 S급 헌터로서 수없이 던전을 클리어하며 얻은 교훈은, 일단 수상한 건 피하라는 거였다.
그럼 중간은 간다.
그래서 결국 내 옆에 붙은 이들은 B급 퓨어딜러 네 명……이 아니라 수준 높은 기사 네 명이었다.
“아가씨를 목숨 걸고 지키겠습니다.”
과잉충성이 꽉꽉 눌러 담긴 것 같은 기사들은 나를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듯했다.
무가인 가문의 후계자가 될 수도 있었을 만큼 재능 있던 사람이 병 하나로 스러져 버렸으니 당연했다.
“부탁할게.”
난 가련한 목소리로 말해 주었다.
B급이라니 귀여운 딜러들이네. 나중에 내가 기력전수라도 해 줄게.
……나중에 내 스킬 돌려받으면.
[기력 전수 : SS급(보조)
-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경험치를 전해줄 수 있다]
난 은하 서버에 고이 잠들어 있을 내 스킬을 생각하며 마차 문을 닫았다.
―쿵.
***
주이안 헌터와 내 계획에는 아주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
이 넓은 시장바닥에서 우리 둘이 어떻게 자연스럽게 만나는가?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지금 시장 다 와 가요. 근데 우리 어떻게 만나요?]
갑자기 일면식도 없는 교황과 포를랭 영애가 아는 척하면서 만났다간 RP던전 규칙 위반으로 둘 다 모가지다.
아니 정확히는, S급 이상 RP던전에서는 규칙 위반 시 심각한 페널티가 있으니, 스킬 랭크가 내려가거나 심하면 죽을지도 모른다.
[…….]
하지만 헌터 채팅은 조용했다.
소예리 헌터랑 신재헌은 오늘 바쁘다고 했으니 이해는 갔다.
그런데 주이안 씨는 대체 뭘 하는 거야?
그리고 그 의문은 시장에 가자마자 풀렸다.
[신시안 고해소]
시장에 큼지막하게 고해소가 차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 안에 누가 있을지는 뻔했다.
[신시안 교의 고위사제 이안 님께서 여러분의 고해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고해소 앞에는 대문짝만 한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그 안으로 사람들이 들어갔다가 나오는 게 보였다.
이안이라니 너무 대놓고 힌트 주시는 거 아니에요?
주이안 씨도 귀여운 면이 좀 있다니까.
난 고해소로 바로 걸음을 옮겼다.
“고해소에 가시는 겁니까?”
그때 옆에서 귀여운 B급 퓨어딜러……가 아니라 포를랭 가의 기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응.”
“제가 모시겠습니다.”
기사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고해소 안까지 따라 들어올 기세였다.
저게 에스코트인가 뭔가 하는 거겠지만 난 고해소에 기사랑 같이 들어갈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럼 주이안 씨랑 비밀 얘기 못 하잖아?
“아냐, 나 혼자 갈 수 있어.”
난 부드럽게 그 손을 밀어냈다.
그러자 기사가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아가씨께서는 아직 몸이,”
정말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 같았다. 귀여운 B급 같으니. 나중에 내가 꼭 기력 전수해줄게!
“괜찮아. 그런데 너, 이름이 뭐지?”
이름은 알아야 전수해줄 것 아니겠니? 내 말에 기사가 감동받은 얼굴로 말했다.
“이디스입니다!”
“그래, 이디스 경. 꼭 기억해둘게.”
난 이디스 경에게 싱긋 웃어주고는 고해소로 향했다.
다행히 고해소 줄은 길지 않았다.
요컨대 주이안 헌터와 내가 만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는 의미다.
―펄럭.
정말 고해소처럼 생긴 새까만 공간에 들어서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오세요. 신시안 님께서는 늘 여러분을 굽어살피고 계십니다.”
와, 종교가 없는 나였지만 주이안 헌터 목소리로 들으니까 홀릴 것 같았다.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와, 주이안 씨 진짜 교황 같은데?]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앗]
“흠흠.”
주이안 씨는 당황한 듯했다. 그러더니 곧 속삭였다.
“신유리 헌터님?”
입구에 있던 안내문에 따르면, 이 고해소는 신력으로 보호되어 방음이 완벽하다고 했다.
다시 말해 우리 대화를 들을 수 있는 건 우리 둘뿐이라는 소리였다.
“넵, 주이안 씨.”
내가 답하자마자 두꺼운 암막커튼이 확 걷혔다.
그리고 연갈색 머리에 단안경을 쓴 익숙한 주이안 헌터의 모습이 드러났다.
대신 옷은 내가 알던 옷과는 달랐다.
원래도 새하얀 정장을 잘 입고 다니는 사람이었지만, 이번엔 금빛 자수가 화려하게 놓인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와……. 주이안 씨 판타지풍 로컬라이징 끝내주네.”
적응력 장난 아니다. 내 말에 주이안 씨가 웃음을 터뜨렸다.
“신유리 헌터님은…….”
그는 잘 어울린다고 하려다가, 내 상황이 생각났는지 말끝을 흐렸다.
그러고는 싱긋 웃었다.
“곧 어울리는 모습이 될 것 같네요. 병은 제가 치료해드릴 테니. 앉아 보세요.”
그가 손짓했다.
털썩 앉으려다 또 피통이 깎일까 봐 조심히 자리에 앉았다.
고해소의 옅은 조명이 그의 단안경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게 보였다.
“손목을.”
주이안 씨의 스킬 중에는 ‘진찰’이라는 게 있었다.
손목의 맥박만 짚어도 몇 가지 상태 이상은 바로 알아볼 수 있는 능력.
그걸 알았기에 난 곧바로 손목을 내어 주었다.
“음…….”
기력이 움직이는 익숙한 진동과 함께, 하얀 빛무리가 내 손목을 감쌌다.
진찰 스킬이었다.
결과는 곧바로 나올 것이다. 내가 아는 주이안 씨의 진찰 스킬은 그랬다.
그런데 주이안 씨는 말이 없었다.
“어때요? 혹시 불치병? 신트롤 확정?”
주이안 씨가 고개를 저었다. 내 말에 잠시 풋 웃었던 그가 곧 심각한 표정으로 눈을 떴다.
“이건 병이 아니에요, 신유리 헌터님.”
“?”
그럼 뭔데? 상태이상 폐병 아니야? 난 내 상태창을 켜 보았다.
[세니아 드 포를랭 / 25세, 일반인
체력 : 33
근력 : 2
마력 : 0
민첩 : 2
지구력 : 5
상태이상 : □□□(?)]
“어?”
원래 폐병에 시한부라고 쓰여 있던 부분이 이상하게 바뀐 게 보였다.
숨은 진실을 알아야 상태창 내용이 변경되는 조건이라도 있었던 건가?
내가 눈살을 찌푸린 순간이었다.
주이안 씨가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이건 독이에요.”
뭐라고? 난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