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아야!”
어깨가 삐그덕거린다.
어제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는 이유만으로 몸살감기에 걸렸다.
게다가 지병으로 창밖 공기를 십 분만 마셔도 피 섞인 기침이 터져 나온다.
“괜찮으십니까!”
하녀들이 우르르 달려온다. 내 가문의 오빠라는 것들도 우르르 달려와서 어쩔 줄 몰라 한다.
“세냐, 걸을 수 있겠어?”
“그러게 이런 사소한 일은 직접 하지 말래도.”
저택에 소란 아닌 소란이 벌어졌다.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오락가락한다.
[체력이 부족합니다.]
[30초 내 휴식에 돌입하지 않을 경우 정신이 OFF됩니다.]
[30…… 29…….]
염병!
이건 고작 내가 창문 한 번 벌컥 열어젖혔다가 벌어진 일이었다.
원래는 창문을 열어도 멀쩡한 건 물론이고 창문을 맨주먹으로 바삭바삭하게 부숴도 손에 흠집 하나 안 나던 인간이 나였다.
그런데 대체 어쩌다 이 꼴이 났냐고?
그건…… 불과 사흘 전의 일 때문이었다.
***
신유리 헌터.
27세. 대한민국 최연소 S급 헌터.
혼자 클리어한 SS급 던전 10여 개, S급 던전은 셀 수도 없으며 A급 던전은 졸면서도 클리어한다는 전설의 딜러.
‘잔상’을 만들어 몬스터들을 유린하는 새로운 사냥방식으로 각광받고 있으며, 각국에서 엄청난 몸값을 요구하며 귀화를 요청해 왔지만 모두 거절한 것으로 유명하다.
[거침없는 신유리 헌터의 진군 비결]
[국내 최악, 최고 난도의 던전을 파훼한 신유리 헌터팀]
[빠른 클리어의 비결은 딜2 힐1 보조1…… 신유리 헌터팀 인터뷰]
매일 뉴스며 신문을 뒤덮는 게 일인 데다,
―콰직!
“아, 또 부러졌네.”
힘 조절이 안 돼서 실수로 문손잡이를 부숴버릴 때가 있을 정도로 강한 힘을 자랑하기도 하는 헌터……가 나였는데.
헌터팀과 함께 이 엿 같은 L급 던전에 발을 들이밀면서 모든 게 시작되었다.
[신유리 헌터 팀 4인, L급 던전 <연약한 시한부 영애에 빙의해버렸다>에 입장합니다.]
[던전 목표 : 대륙의 멸망을 막아라 (기한 1년)]
[헌터 ‘신유리’의 기존 정보는 은하 서버에 저장됩니다.]
[RP던전으로 헌터 ‘신유리’의 능력치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뭐? RP던전이라고?’
RP던전.
롤플레잉 던전이라고도 불리는 곳.
이 던전에 들어가면 헌터의 기존 능력치가 사라지고, 던전 내 세계의 어떤 인물에 빙의해 그 인물의 능력치를 가지게 된다.
[‘세니아 드 포를랭’ 영애의 능력치 다운로드 중…….]
여기가 RP던전인 줄 알았으면 이 L급 던전에서 엄청난 마수가 튀어나오건 말건 튀어버렸을 것이다.
그냥 그 마수를 기존 능력치로 상대하는 게 나았을 테니까!
하지만 뒤늦게 발견되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L급 게이트를 자세히 조사하려는 자는 없었다.
[게이트학 권위자 진정현, 갑작스러운 두통 호소]
[한국대 게이트학 연구실 연락두절]
수많은 게이트학 학자들이 모른 체하는 가운데, 시간만 흘러갔다.
기본적인 조사에서 나온 건 이 던전이 도시 배경에 가깝다는 것과 L급이라는 것뿐.
게이트가 터지기 전에 어쩔 수 없이 출발했는데…….
1000분의 1 확률로 나올까 말까 한다는 RP던전이 L급 게이트일 줄 누가 알았겠느냐고!
물론 S……T……A……Y……를 지금 와서 외쳐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난 이미 세니아 드 포로리…… 아니, 포를랭인지 뭔지가 되었고, 이 영애는 던전 이름대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연약한 영애였다.
***
처음 눈을 떴을 땐 정말 낯선 천장이었다.
내 입으로 이런 책빙의 주인공의 전형적인 대사를 뱉을 줄은 몰랐지만 아무튼 낯선 천장이었다.
서양 중세 귀족풍의 주렁주렁한 장식이 달려있는 방 안.
RP던전을 한 번도 공략 안 해 본 건 아니지만…….
“이런 소설 같은 데에 떨어진 건 처음인데.”
난 곧바로 상태창을 켜서 능력치를 확인했다.
RP던전에선 빙의한 인물의 성능을 확인하는 건 기본…….
[세니아 드 포를랭 / 25세, 일반인
체력 : 10
근력 : 1
마력 : 0
민첩 : 1
지구력 : 3
상태이상 : 폐병(시한부:6개월)]
“뭐?”
체력 10? 걸어만 다녀도 체력이 빠지는데?
게다가 시한부라고? 설마 시한부라서 능력치가 이 지경인 거야? 지금 나랑 장난해? 이런 몸으로 클리어를 하라고?
“대륙 멸망을 막아? 이딴 캐릭터로?”
다행인 건 여기에 우리 헌터팀이 다 들어왔다는 것이다.
대검 하나로 멀쩡한 빌딩 하나를 날려버릴 수 있는 S급 딜러 신재헌.
목숨만 붙어 있으면 어떻게든 살려내는 ‘신의’ S급 힐러 주이안.
그리고 온갖 보조 스킬로 우리 주변을 든든하게 보호해주었던 S급 보조계 헌터 소예리.
설마 팀 채팅까지 안 되는 건 아니겠지?
원래 던전에선 채팅이 불가능하지만, RP던전에선 예외인 경우도 있으니까.
나는 방 제목을 입력한 뒤 채팅방을 생성했다.
[은하 서버 채팅방 ‘이게 던전이냐 시스템아(방장:헌터 신유리)’에 접속합니다.]
[헌터 신유리(방장)가 주이안씨, 신재헌놈, 예리언님을 초대하였습니다.]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 다들 들어왔어요?]
난 초조하게 채팅을 기다렸다.
개인톡 안 되는 거 빼고는 다 괜찮은 이 헌터 채팅만 있어도 RP던전의 난도는 수직하락한다.
RP던전이야 수도 없이 겪어봤다.
한쪽 능력치가 구리다고 해도 다른 쪽에서 능력치가 쓸 만한 인물에 빙의되었다면 클리어야 쉬운 일이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네, 접속했습니다]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오 채팅은 되나보다]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허접한 능력치로 험난한 L급 던전에 혼자 떨어지는 건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삼진에바였다.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던전 메인 클리어 조건 봤어요?]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네 쌈빡하던데요. 멸망막기]
L급이라고 다르진 않은지, 다른 RP던전이 으레 그런 것처럼 메인 던전 클리어 조건은 똑같은 모양이었다.
아니 근데, 저놈은 왜 이름이 저렇게 번쩍번쩍해?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아니 뭐에 빙의됐길래 이름이 그렇게 죽여줘요?]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신재헌놈)>>> 모르겠음 아 잠만 무슨 회의 오라는데?]
그렇게 말한 신재헌은 답이 없었다. 빙의한 인물이 바쁜 인물인 모양이었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아, 신유리 헌터님. 지금 접속했답니다. 기도회 중이라서 헌터 채팅에 바로 답할 수가 없었어요.]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 기도회요?]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네, 고위사제 신분인 것 같고요. 신유리 헌터님은요?]
헐, 고위사제래. 교단에서 끗발 날린다는 소리 아니냐?
난 입을 떡 벌렸다.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아무래도 이번 던전 제가 트롤인듯; 저 무슨 시한부 영애래요]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시한부요? 그럼 일단 병부터 치료해야겠네요]
우리가 그렇게 이야기할 때였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헌터님들 저 마탑주 됐어요! 출세했당!]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네?]
[클로나 에이센(예리언님)>>> 카르만 제국 마탑주요!]
“잠깐, 카르만 제국이라고?”
난 대화창을 위로 쭉 올려보았다.
그리고 신재헌의 이 세계 이름을 한참 쳐다보았다.
“아이반 엘레티아 폰 카르만.”
카르만? 카르만 제국?
상식적으로 안동 김씨만 nn만 명인 우리나라도 아니고, 중세 세계관에서 제국 황가 성씨를 쓰는 가문은 하나뿐일 것이다.
그니까 요컨대 신재헌 저놈은 황족에 빙의됐고,
힐러 주이안 씨는 고위사제에 빙의됐고,
보조계 헌터 소예리 씨는 근사한 마탑주님이 됐는데,
나만 시한부 영애네?
와! 인맥 쥑이는 시한부 영애다! 고호맙다!
난 머리를 싸맸다.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죄송합니다……. 저 이번 던전 트롤 예약이요……. ㅎ…….]
능력이 진짜 시한부뿐이야?
아니지? 난 급히 시스템창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능력 하나를 발견했다.
[시한부 페널티 대가로 ‘신의 상점’을 개방할 수 있습니다.]
[신의 상점 : 온갖 사기적인 아이템을 대가만 지불하면 마음껏 구매 가능!]
“오오, 역시!”
죽으란 법은 없는 거지!
그냥 시스템창 띄우듯 부르면 나오는 건가?
“신의 상점 개방.”
말하자마자 시스템창 한쪽에서 상점 창이 확 떴다.
심플한 검은색 베이스에 금테로 장식된 창은 일반 시스템창에 비해 좀 더 고오급져 보였다.
그리고 그 상점 창에 활성화된 아이템이 딱 하나 보였다.
즉 지금 구매할 수 있는 아이템이 하나밖에 없단 소리였다.
그것도.
[쪼꼬미 물약]
“?”
이게 뭔데? 혹시 체력이라도 보강해주나?
딱 봐도 구린 이름이지만 원래 겉모습으로 아이템을 판단해선 곤란하다.
하지만 설명을 확인한 난 곧 얼굴을 파삭 구겼다.
[먹으면 손바닥만 하게 작아진다. 이름값을 위해 초코맛이다.]
지금 나랑 장난해?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신유리 헌터님, 일단 만나요. 사제한테는 치유력이 있으니 치료해드릴 수 있을 거예요.]
아니, 시한부고 자시고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난 아까보다 조금 덜 낯선 천장을 조용히 올려다보았다.
[아리엔사 시안 데마르(주이안씨)>>> 신유리 헌터님?]
[세니아 드 포를랭(신유리)>>> 네 신트롤입니다…….]
어째서 인생은 이렇게 힘들고 괴로운 걸까?
난 무려 신의 상점 오픈 기념으로 영구 무료판매라는 쪼꼬미 물약을 구매하며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