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6장 : 패자의 기회
#124
보고서를 다 읽은 시스로네스 추기경은 한숨을 내쉬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의 맞은편에 선 비서 신부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예하, 혹시 잘못된 부분이 있는지요……?”
“아니, 수고 많았네. 이만 나가 보게.”
비서가 나가고 집무실에 홀로 남은 시스로네스는 정신을 가다듬고 보고서를 다시 읽었다. 왕실의 족보를 분석한 보고서였다.
레이테의 뒤를 이어 사크틸라의 왕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시스로네스는 은밀히 이것을 조사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외에도 이를 조사하는 사람이 여럿 있으리라 확신했다.
브라간사가 반란을 일으킨 지, 즉 그들의 왕이 행방불명된 지도 한 달이 다 되어 갔다.
누구도 왕의 죽음을 직접 입에 담지는 못했다. 하지만 모두 만약을 대비하고 있을 것이다.
왕실의 족보는 그들에게 잔인한 사실을 말해 주었다. 레이테와 가장 가까운 친척, 즉 현 상황에서 사크틸라의 다음 왕이 될 사람의 이름은 로렌소였다. 그는 사크틸라의 적인 브라간사 공작이다.
시스로네스는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확히 확인하고 나니 더 막막했다.
“예하, 코른 후작이 왔습니다만…….”
문밖에서 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스로네스는 몸을 일으켰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오는 코른의 모습을 본 시스로네스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코른은 어찌나 두꺼운 외투를 입었는지 몸이 울룩불룩하고 배가 잔뜩 나와 보였다.
사실 그 모습은 시스로네스라고 다르지 않았다. 코른 또한 추기경을 보고 픽 웃음을 짓다가 기침했다.
“저를 찾으셨다고요.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고비는 넘겼다고 합니다. 후작께서는요?”
“저도 비슷합니다.”
프란세스크의 희생으로 두 사람은 다른 이들과 함께 헤젤을 탈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크틸라까지 오는 며칠은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추위 속에서 필사적으로 도망치다 보니, 몸이 완전히 상해 버렸다.
“이걸 좀 보셨으면 해서 말입니다. 바르시나 분들도 많이 궁금해하실 텐데.”
시스로네스는 보고서를 코른에게 건넸다. 그것을 빠르게 훑어본 코른의 표정이 팍 구겨졌다.
“……세상에.”
“여왕 폐하를 찾지 못하면 사크틸라는 브라간사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야 합니다.”
“정말 그럴 생각입니까?”
“사크틸라의 누가 이 사태를 만든 사람을 왕으로 섬기겠습니까? 그런 일만은 일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미치겠군.”
코른은 머리를 붙잡고 끙끙 신음했다. 그는 한숨을 푹푹 내쉬다가 말했다.
“바르시나의 경우 족보를 조사할 필요도 없습니다. 폐하의 사촌이 몇 명 있으니까요. 그런데 국왕 폐하의 실종 소식이 바르시나에 전해지자마자, 선왕비인 블랑슈 님께서 그들을 별궁으로 불러 함께 지내신다고 합니다.”
시스로네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모후의 개입은 썩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그 반응을 본 코른이 고개를 저었다.
“아, 걱정 마시지요. 왕비께서는 ‘다른 왕족을 왕으로 세울 생각 따위 하지 말고 에르난이나 찾아라.’라는 내용의 친필 편지를 보내셨거든요. 그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사나운 글이었습니다.”
귀족들이 괜한 일을 벌여 나라를 분열시키지 않도록, 블랑슈는 일찌감치 계승 가능성이 있는 왕족을 확보해 둔 것이다.
시스로네스는 블랑슈의 행동이 꽤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르난의 계모는 정치에 관심이 없는 조용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나서지 않을 뿐이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아니라는 건가.’
어쨌거나 왕비의 빠른 행동은 고마운 일이었다. 벌써 왕을 포기하면 곤란하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의 불안이 커지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예하께서 부르시기에 혹시 수색에 무슨 성과가 있나 싶었는데,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로군요.”
“수색은 계속 진행 중입니다.”
시스로네스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왕을 찾아야만 한다. 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병사들을 보내 수색하고 있지만 그것은 사크틸라의 영토에 한정된다. 부부는 여전히 헤젤에 머물고 있을지도 모른다. 소수의 첩자만으로 헤젤에서 사람을 찾기는 무리였다.
차라리 헤젤에 정식으로 사절을 파견해 왕의 행방을 알아보자는 의견도 나왔다. 하지만 헤젤의 상황도 정상이 아닌 만큼 그다지 좋은 수는 아니었다.
막막했다. 어떡해야 하나.
“예하!”
갑자기 집무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팀파노가 들어왔다.
“코른 후작께서도 여기 계셨군요. 두 분 다 밖으로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팀파노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시스로네스가 묻기도 전에, 그가 외쳤다.
“두 분 폐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 * *
“만세!”
양팔을 위로 뻗은 콜롬보가 기운찬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그는 곧 민망해하며 팔을 내리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콜롬보와 눈이 마주친 레이테가 환하게 웃었다. 그녀는 콜롬보의 반응을 충분히 이해했다. 목적지가 보이는데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배를 타고 바다로 나온 지 약 일주일 만에, 드디어 이스팔리스에 도착했다.
“하아…….”
레이테의 옆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있던 에르난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는 거의 쓰러질 듯이 아내에게 몸을 기대 왔다.
“이제야 머리가 어지러워지는군요. 속도 울렁거리고…….”
에르난이 중얼거렸다. 레이테는 웃음을 터뜨리고 남편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에르난은 놀랍게도 전혀 멀미를 하지 않았다. 긴장이 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안심하자마자 멀미를 느끼는 것이다.
“항구에 닿을 때까지는 시간이 걸릴 테니, 들어가서 쉴까요?”
“아니, 밖에 있는 편이 속이 더 편할 겁니다.”
에르난은 힘없이 웃고 그대로 바닥에 앉았다. 하지만 그는 금방 일어나야 했다.
“잠깐만요, 폐하. 저게 뭔가요?”
카테리나가 말했다. 부부는 카테리나가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성벽 위의 대포가 보였다. 대포는 배를 조준하고 있었다.
“히익!”
콜롬보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몸을 엎드렸다. 에르난은 그에게 말했다.
“진정하게. 낯선 배를 발견한다고 무조건 대포를 쏘지는 않…….”
펑!
에르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포성이 울렸다.
“꺄악!”
“으아악!”
카테리나와 세르지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숙였다. 카테리나에게 잡아당겨진 레이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배는 흔들리지 않았고, 대신 풍덩거리는 소리만 크게 들렸다.
“……경고사격 정도는 할 수 있지만.”
에르난이 민망한 듯 중얼거렸다. 대포는 배가 아니라 바다를 향해 발사된 것이다. 그는 아내를 일으켜 세우면서 앞을 바라보았다.
사크틸라의 깃발을 단 배가 다가오고 있었다.
* * *
육지에 발이 닿자, 레이테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감격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거의 두 달 만에 돌아온 사크틸라다. 땅에 입이라도 맞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두 분 폐하!”
귀족들은 물론이고 시민들마저 우르르 몰려와 국왕 일행을 둘러쌌다. 레이테는 환히 웃으며 머리에 썼던 후드를 벗었다.
짧게 자른 머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헉하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레이테는 그 반응이 재미있었다.
사실 레이테는 자신의 머리카락이 정확히 어떤 모양인지 몰랐다. 거울을 제대로 볼 기회가 없었으니까.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에르난이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그도 신이 나 있었다.
부부는 모인 사람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모두 무사했군요.”
국왕 일행을 맞이하러 나온 사람 중에는 헤젤에 함께 갔던 이들도 많았다.
“잘 돌아오셨습니다, 폐하.”
특히 시스로네스와 인사할 때, 레이테는 정말로 울 뻔했다. 레이테는 몸을 굽혀 여왕의 손에 입을 맞추려는 시스로네스를 일으켜 세워 와락 껴안았다.
부부는 화려한 마차에 올라 시내를 한 바퀴 돈 다음 왕궁으로 향했다. 왕궁에서는 성대한 만찬회가 열렸다. 모든 사람들이 기쁘게 웃고 떠들며 음식과 술을 즐겼다.
편안한 공간. 부드럽고 포근한 옷. 따뜻한 음식. 모두 오랜만이었다.
부부를 가장 기쁘게 한 점은 이런 자리에서 긴장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포로 생활이 길었던 에르난의 기쁨이 컸다.
“이렇게 즐기는 게 얼마 만인지…….”
감격스러운 듯 중얼거린 에르난은 아내를 안은 팔을 끌어당겼다. 레이테는 작은 사탕을 그의 입에 넣어주었다.
에르난은 사탕과 함께 아내의 손가락도 쪽쪽 빨았다. 놔 달라는 듯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에르난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간지러우니까 거기까지만 해요. 나머지는…….”
레이테가 말끝을 흐리자 에르난은 비로소 손가락을 놔 주었다. 아내에게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나머지? 좋지요.”
에르난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내를 안아 들었다. 조금 부끄러워하던 레이테는 곧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남편의 품에 파고들던 그녀는 문득 고개를 돌려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레이테는 방긋 웃으며 그들을 향해 말했다.
“미안해요, 여러분. 내일 만나요.”
와아!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 * *
부드럽게 달라붙는 맨살의 촉감을 이토록 편히 느끼기도 오랜만이었다. 에르난은 뜨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테는 살포시 눈을 감은 채 남편의 손길을 즐기고 있었다.
“이렇게 느긋한 밤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요.”
“그러게 말입니다. 이제는 매일매일 이렇게 보냅시다.”
에르난이 입을 맞춰 왔다.
“당연하죠.”
레이테는 짧게 답하고 남편을 받아들였다. 젖은 입술도, 미끄러져 들어오는 혀도 모두 나른하고 느긋했다.
행복하다. 이런 시간을 바라고 또 바랐다. 앞으로도 이렇게 계속…….
‘아.’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레이테는 어깨를 움찔거리며 번뜩 눈을 떴다. 에르난이 몸을 살짝 일으켜 그녀를 바라보았다.
“부인?”
“아……, 아니에요. 오늘은 일단 쉬어요.”
레이테는 팔을 들어 에르난을 끌어안았다. 오늘 막 이스팔리스에 도착하지 않았나. 일단은 아무 생각 없이 쉬는 편이 낫다.
에르난은 천천히 레이테의 위에서 내려와, 그녀의 옆에 누웠다.
“이야기하시지요. 어차피 해결해야 할 일이니까.”
“…….”
레이테는 침묵했다. 무심코 흠칫거리고 말았으나, 마냥 즐거운 오늘 밤의 기분을 가라앉히고 싶지는 않았다.
에르난은 그녀를 재촉하지 않았다. 대신 짧아진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아내가 무엇을 떠올리는지 알겠다는 태도였다. 레이테는 조금 놀랐으나 곧 깨달았다. 남편이라고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 리 없으니까.
또한 오늘 밤, 부부의 귀환을 기뻐한 모든 사람들 역시 같은 생각을 품을 것이다.
사크틸라와 바르시나의 동맹 관계는 지속될 것인가?
* * *
귀족들의 행동은 빨랐다.
세밀한 장식으로 가득 찬 이스팔리스 왕궁의 알현실은 사람으로 가득 찼다. 비어 있던 왕좌는 화려하게 차려입은 주인을 맞이했다.
오랜만에 왕을 알현한다는 흥분 외에도, 불안한 긴장이 사람들 사이에 감돌고 있었다.
그에 대한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모두가 긴장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두 분 폐하. 송구하오나, 두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동맹의 필요성에 대한 깊은 고찰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서로 눈치만 보는 가운데, 입을 연 사람은 사크틸라의 팀파노 후작이었다. 그는 꽤나 긴장한 듯 얼굴이 굳어 있었다.
레이테는 평온한 얼굴로 팀파노의 말을 들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다. 결국 지난밤에 남편에게 하지 못한 말이기도 했다.
매일 함께하자 말했으나 두 사람의 앞날은 불투명하다. 큰 사건이 너무 많이 벌어졌고, 부부는 모두 그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이다.
에르난의 표정도 레이테와 비슷했다. 그도 지금 같은 상황이 오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물론 무슨 말을 듣게 될지도.
팀파노의 말이 끝나자마자, 코른이 앞으로 나섰다.
“바르시나는 사크틸라와 더 이상 동맹을 맺을 필요가 없습니다.”
코른의 창백한 얼굴에는 병색이 만연했다. 그러나 단호하고 사나운 목소리는 여전했다.
문제는, 이런 의견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막막하다는 점이었다.
#125
헤젤에서는 차마 동맹의 미래 같은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당장 살아 돌아가는 일이 우선이었으니까.
간신히 배를 빼앗아 출발했지만, 헤젤의 배가 쫓아올 수도 있었다. 전투를 치르면 불리하므로 무조건 도망쳐야 했다. 처음 이삼일 정도는 배에 탄 다섯 사람 모두가 그런 불안 속에서 살았다.
하지만 헤젤 땅에서 멀어지자 긴장은 차차 풀렸다. 그리고 부부에게는 다른 걱정이 생겼다.
두 나라의 관계는 이전과 달라질 것이다. 또한 부부가 두 나라의 왕인 이상, 그 상황은 부부의 관계에도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사크틸라는 패전의 책임을 에르난과 바르시나에 확실하게 물을 것이다. 이제는 그에 확실한 대답을 해야만 한다.
바르시나는 사크틸라의 일에 더는 엮이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것들이 가리키는 방향이 무엇인지, 부부는 모르지 않았다.
“저희가 바르시나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머문 이유는 일단 병자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폐하께서 반드시 살아 돌아오시리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폐하께서는 저희와 함께 바르시나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코른의 말에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레이테와 에르난도 마찬가지였다.
부부가 결혼할 때부터, 바르시나인들은 사크틸라의 일에 바르시나가 휘말려 드는 상황을 염려했다. 그들의 염려는 무척 좋지 않은 방향으로 현실화되고 말았다.
사크틸라 역시, 이제는 바르시나와 연대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애초에 사크틸라가 에르난을 필요로 한 이유는 여왕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정치적 협력은 결혼의 부산물이다.
‘내가 책임을 져야 하는 건 맞지만, 그게 꼭 동맹의 해체여야 할까?’
에르난은 이 의문의 답을 내리지 못했다.
* * *
팀파노와 코른이 제기한 문제는 어차피 그 자리에서 바로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었다. 이제부터 답을 내야만 하는 일이다.
궁정은 전후 처리와 동맹의 지속에 대한 화제로 점령되다시피 했다.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그에 대해 토론했다.
사실 귀족들 사이에서는 이미 결론이 정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논란이 계속되는 이유는, 그것을 왕에게 대놓고 전할 수 없어서였다.
“아직 폐하의 피로가 다 풀리지 않으셨을 텐데 이런 이야기를 드리게 되어 유감입니다. 하지만 폐하, 팀파노와 코른의 말은 모두 옳습니다. 현 상황에서 동맹을 유지해 봤자 서로에게 폐가 될 뿐입니다.”
레이테를 비롯한 사크틸라인들만이 모인 자리에서, 아르파가 무척이나 점잖게 말했다. 다른 귀족들은 고개를 끄덕여 아르파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렇습니다, 폐하. 정리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의견을 말하더라도 무척 조심스러운 말투였다.
“정리라면, 어느 정도를 말하나요? 바르시나와 맺었던 합의 자체의 파기?”
귀족들은 침묵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차마 말할 수 없어서였다.
합의를 파기하고 동맹 관계를 정리한다면, 두 왕의 부부 관계도 지속될 이유가 없었다. 부부는 왕이다. 그들의 결합에서 정치적 요소를 떼어놓기는 불가능했다. 둘은 완전히 하나다.
정략적으로도 부부 관계는 확실히 끝을 봐야 옳다. 그래야만 다른 사람, 다른 나라와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다.
하지만 부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사이가 얼마나 좋은지 모르는 이는 없었다.
“……경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대강은 알고 있습니다. 일단은……, 되도록 마음에 담은 말을 다 해 주세요. 의견을 드러내고 나눠야 답이 나오리라 생각해요.”
레이테가 차분하게 말했다. 귀족들은 한참이나 망설인 끝에 조금씩 입을 열었다.
“동맹을 맺을 필요가 더 이상 없을 뿐, 바르시나를 적대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그건 알고 있어요.”
“저, 그리고……. 폐하께서는 충분히 새 출발을 하실 수 있습니다.”
레이테는 새 출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직감적으로 그 의미를 깨달았고, 쓴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별로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동맹 해체가 수면 위로 올라왔으니, 따라 나올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두 분 모두 아직 젊으시니까…….”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시면 될 겁니다.”
귀족들의 표현은 조금씩 노골적으로 변해 갔다. 그래도 여왕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 애쓰는 귀족들의 노력이 기특해 보일 지경이기는 했다.
“지금의 남편분과는 친구로 지내시면…….”
‘어떻게든 이혼이라는 단어는 말하지 않으려 애쓰는구나.’
물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여왕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뻔하니까.
“송구하오나, 군주의 결혼이…… 원래 그렇습니다.”
레이테도 안다. 왕의 결혼은 원래 이런 식이다.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 현실적인 필요성에 따라 결합하는 관계다.
레이테와 에르난의 결혼 역시 그런 이유로 성사되었다. 심지어 다른 나라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지독한 정치성을 띤 결혼이었다. 결혼을 통해서 원래는 불가능한 힘의 균형을 만들어냈으니까.
균형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이 결혼생활의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
에르난을 사랑하는 이상, 레이테는 그와 이별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사적인 마음만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는 무리였다. 설득력이 떨어지기도 할뿐더러, 왕으로서 올바른 태도도 아니다.
‘이 결혼이 정략적으로 여전히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해.’
당장이라도 주장은 할 수 있다. 에르난만큼 바람직한 형태로 여왕과 사크틸라의 권한을 보장할 남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는 소극적인 대처다. 귀족들은 어떻게든 새 남편감을 찾으려 할 것이다. 외국 왕족 중 적당한 상대를 도무지 찾을 수 없을 때는 국내 고위 귀족이라는 차선책도 있다.
누구도 반가워하지 않을 길이기는 했다. 하지만 선택지의 존재 유무 차이는 크다.
레이테는 시스로네스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는 회의 내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시스로네스라면 좋은 책략을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도 별 도리가 없는 듯했다.
* * *
레이테의 앞에서 귀족들이 차마 입에 담지 못한 그 단어는, 에르난의 앞에서는 상당히 거침없이 등장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이혼이 최선입니다.”
에르난은 그렇게 말한 귀족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바르시나의 귀족이라면 이 정도 눈싸움은 예삿일이었다. 그는 뻔뻔하게 에르난의 시선을 받아냈다.
바르시나인도 눈이 있는 이상, 부부가 절대 헤어질 마음이 없다는 사실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사크틸라와의 관계를 정리하려면 결혼생활을 확실히 끝내야만 한다.
“후우……,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지만. 불가능한 일이오.”
에르난은 내키지 않는 듯 망설이다 말했다.
“여러분께 말씀드리기 민망하지만, 결혼은 신의 앞에서 약속한 일이지. 신께서 관여하신 언약을 인간이 마음대로 끊을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나.”
귀족들은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에르난을 바라보았다.
교리상으로는 에르난의 말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대다수 바르시나인은 교리를 모른 척하며 살았다.
귀족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왕이 사크틸라인과 결혼해 사크틸라에서 오래 지내더니, 생각마저 사크틸라식으로 변해 버렸나?
‘어쩌다가 이런 말까지 꺼내는 지경이 되었는지…….’
에르난도 민망했다. 어떻게든 그럴듯한 반대 표현을 찾다 보니 기억이 성서와 교리서까지 닿았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시스로네스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 생각일까.’
이스팔리스로 돌아온 뒤, 에르난은 여태 시스로네스와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 아내와 함께하는 오전 알현 때 인사를 받는 것이 전부였다.
시스로네스는 부부의 결혼을 주선한 사람이다. 그는 이 결혼을 어느 누구보다도 계산적으로 바라볼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계속 침묵하고 있다고 했다.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다.
* * *
사크틸라와 바르시나 사람들은 여러 차례 모여서 앞으로의 일을 논의했다. 물론 큰 진전은 없었다.
그들이 왕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만 이혼하자’지만, 강하게 밀어붙이지 못하니 제자리에서 뱅뱅 돌 뿐이었다.
결국 양국의 귀족이 모두 모인 공식 알현 때, 코른이 나섰다.
“확실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는 두 분 폐하의 결혼 무효화를 원합니다.”
사크틸라 귀족들은 작게 한숨을 내쉬거나 눈을 질끈 감았다. 그들은 결국 여왕에게 이혼이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하지 못했다.
“다행히도 두 분 폐하께서는 아직 왕자가 없습니다.”
그 말마저 대놓고 나오자, 알현실은 적막에 잠겼다.
귀족들이 비교적 쉽게 군주의 이별을 논의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아직 둘 사이에 아들이 없기 때문이었다.
레이테는 이를 악물었다. 또다시 자녀 문제다.
아라고에서 보냈던 지난겨울, 바르시나 귀족들은 부부 사이에 언제 아이가 탄생할지 관심이 많았다. 레이테는 그 관심이 대단히 부담스러웠다.
다행히 그때는 황금 양모 기사단 결성이나 헤젤 사절의 방문 같은 일이 터져 부부의 자녀에 대한 관심이 흐지부지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피할 수 없는 문제가 되고 말았다.
‘어떡해야 하지.’
무조건 우기는 어린아이 같은 짓을 할 수는 없다. 설득을 시켜야만 한다. 하지만 레이테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에르난도 침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달리 대응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레이테가 임신했다고 거짓말이라도 해야 하나?’
안 된다. 레이테도 그런 방식은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에게 너무 괴로운 짐이 된다.
여기까지 말이 나온 이상, 귀족들은 어떻게든 결론을 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여전히 왕의 눈치를 보며 말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서지도 않았다.
“후계자 문제가 복잡해지기 전에 정리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두 분 폐하와 두 왕국의 새 출발을 위한 기회입니다.”
귀족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두 분 폐하께서 결혼하신 지도 2년이 다 되어 갑니다. 두 분의 사이가 좋다는 사실은 바르시나와 사크틸라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여왕께서 왕자를 수태하지 못하셨다는 건……, 혹시 건강상의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까?”
바르시나 귀족 중 한 사람이 유독 높은 어조로 말했다.
그 순간 알현실은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왕의 건강을 함부로 지적해서는 안 된다. 답답한 마음에 한 말이겠지만 지나쳤다.
바르시나 귀족은 자신에게 향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지 못했는지, 왕좌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송구하오나, 임신 불능은 대단히 정당한 이혼 사유입니다.”
레이테는 깜짝 놀라 숨이 멎는 듯했다. 정말로, 이 정도 말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
“이 새끼가!”
사크틸라인이 모인 쪽에서 한 남자가 튀어나오더니 바르시나인의 멱살을 붙잡았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당황하며 사크틸라인을 말리려 애썼다.
“진정하시오! 두 분 국왕 폐하를 알현 중이지 않소!”
“진정은 네놈들이나 해! 이 사태를 만든 놈이 누구인데 왜 우리 여왕 폐하를 불완전한 여성으로 취급하며 모독하는 것이냐!”
“이 사태를 만든 놈? 당신이야말로 무슨 자격으로 우리 왕을 욕하는 거요?”
결국 말리려던 귀족들조차 언성을 높이면서 알현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동맹 관계를 끝내야 한다는 의견은 양국 귀족이 모두 같았다. 하지만 이는 각자의 이해관계가 일치했을 뿐이다. 그들이 서로 손을 잡은 적은 없었다.
왕좌를 붙잡은 레이테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미칠 듯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아라고에서도 직접 말만 하지 않았을 뿐, 바르시나 귀족들은 지금과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여왕의 몸에 이상이 있을 것이라고.
자기들의 왕에게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물론 레이테는 에르난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누구의 문제도 아니다. 그냥 임신이 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레이테는 오로지 바르시나인 때문에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분노에는 사크틸라인의 태도도 한몫했다.
사크틸라 귀족들은 강한 어조로 바르시나인을 비판했다. 여왕을 모욕했기 때문이었다.
레이테는 자신을 향한 귀족들의 지지가 늘 고마웠다. 오랫동안 무기력한 여왕이었는데도 귀족들은 그녀를 무시하지 않았다.
왕으로서 정통성이 확실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것도 맞다. 그러나 지금, 레이테는 진짜 이유를 깨달았다.
‘나에게 기대 자체를 안 했던 거야.’
귀족들의 머릿속에서, 왕자를 품지 못하는 여왕은 불완전한 인간이다. 그들에게도 레이테의 존재 이유는 왕자 생산을 위한 매개체일 뿐인 것이다.
#126
“나갑시다.”
여전히 고성이 오가는 가운데, 에르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이테는 굳은 얼굴로 눈 앞에 펼쳐진 한심한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귀족들은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바빠 에르난이 일어나는 줄도 몰랐다.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된 논의가 가능하겠습니까? 그리고 당신에게 저런 태도를 보이는 자들과는 대화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에르난의 말투에는 조금 날이 서 있었다. 그러나 아내를 일으켜 세우려는 손짓은 부드러웠다.
레이테는 남편을 따라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입가가 비틀려 올라가고 조소가 이어졌다.
“당신 말이 맞지요. 그런데 그냥 넘어가기 싫군요.”
날카롭다 못해 공격성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공석에서 레이테가 이런 식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적이 있었나?’
에르난은 조금 당황했다. 불쾌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그녀는 고고하고 차디찬 모습으로 그것에 맞서기 마련이었다.
레이테는 가볍게, 그러나 경멸을 숨기지 않으며 코웃음 쳤다. 턱에 살짝 닿는 짧은 머리카락이 흔들거렸다.
더 이상 길게 하늘거리지 않는 그녀의 머리카락은 미용사의 손에 깔끔하게 다듬어졌다. 다만 도피생활 동안 무작정 짧게 자르기만 한 탓에, 정리를 마치니 거의 에르난과 비슷한 길이가 되어 버렸다.
여왕이 유독 신경 써서 머리를 길렀던 이유는 날카로운 인상을 상쇄시키기 위해서였다. 긴 머리카락을 곱게 빗거나 느슨하게 땋아 여성미를 강조하면 한결 부드러워 보였다.
그러나 이제 은발은 속임수 없이 차게 빛났다. 에르난처럼 곱슬기가 있지도 않다 보니 냉정한 인상을 더 강화할 뿐이었다.
‘레이테는 그대로인데, 인상 때문에 괜히 더 날카로워 보이는 걸까?’
틀린 추측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라고 할 수도 없었다.
레이테는 이를 살짝 악물었다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모두 조용히!”
“여왕 폐하……?”
놀란 귀족들이 다툼을 멈추고 여왕을 바라보았다. 여왕의 눈빛은 목소리만큼이나 매서웠다. 소란을 피운 귀족들을 당장이라도 찔러 죽일 것 같았다.
“왕의 앞에서 무슨 추태지? 그대들은 두 왕국의 미래를 위하는 척하면서 정작 왕에게는 관심도 없군. 그렇게 우리가 만만해 보였나?”
부드러움이라고는 티끌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여왕의 말투는 귀족들에게 생경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심지어 존대조차 없었다.
레이테는 원로 고위 귀족과 성직자는 물론, 어지간한 귀족들을 존대하며 대했다. 탐브레의 눈치를 보며 살던, 모든 언행이 방어적이어야만 했던 시절 형성된 습관의 영향이었다.
무력하고 어린 여성을 왕으로 섬기는 이들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아야 했다. 적을 더 만들면 곤란했다. 또한 여왕을 지지하는, 아니 그녀를 불쌍히 여기는 세력이 유지되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도 여왕은 연민의 시선을 받아야만 하는가?
‘그러니까 임신도 못 하는 여자 취급에 불완전 운운하며 발끈하지.’
“송구합니다, 폐하.”
“정숙하겠습니다.”
레이테의 기세가 어찌나 살기등등했는지, 사크틸라인은 물론 바르시나인마저 쩔쩔매며 여왕에게 몸을 굽혀 사과했다.
“내가 경들의 기준에 흡족하지 못한 왕인 모양인데, 긴 시간을 숨죽이며 살아왔으니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야. 하지만 내가 왕이라는 사실까지 잊으면 곤란하지 않나?”
“잊다니요. 아니옵니다, 폐하.”
“글쎄? 아무리 동맹을 끝내자는 이야기를 하는 중이라 해도 그렇지, 아직 동맹 사이잖나? 그런데 동맹 관계의 핵심은 벌써 잊은 것 같아서 말이야.”
귀족들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정말로 동맹의 내용을 잊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알현실에 모인 이들은 모두 왕국의 중신들로, 동맹과 같은 중요한 일은 결코 망각하지 않는다. 아예 바르시나 왕위를 계승할 때 합의했던 사항을 그대로 읊을 수 있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은 여왕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확실하게 파악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두 나라는 두 명의 왕을 공동 군주로서 섬기기로 했소.”
에르난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신 답하고는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아내의 모습은 그에게도 조금 낯설었다. 레이테가 예민하다는 사실이야 만났을 때부터 알았지만, 그 성격을 이토록 적나라하게 공석에서 표출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동시에 지금 상황은 에르난에게 묘한 쾌감을 주기도 했다. 보이지 않는 껍데기를 깨고 나온 듯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레이테가 남편을 향해 방긋 미소 지었다. 사랑스럽고도 익숙한 웃음이었다. 다시 앞을 돌아본 그녀는 차가운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왕에게는 대를 이어야 할 의무가 있지. 그런데 왕의 일이 그것뿐이던가? 왕국의 주인으로서 백성을 통치하는 건 누구의 몫이지? 왜 경들은 내가 그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느냔 말이야! 경들에게 내가 왕이 맞기나 한지 의문스러워!”
레이테가 무작정 발악하듯 소리치는 것은 아니었다. 쌓였던 뭔가를 토해 낼수록 그녀는 머리가 차가워져 갔다.
왕에게 가져야 마땅할 기대를 품지 않았다고 해서, 저들이 레이테를 왕으로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저 레이테 같은 여왕은 유례가 없을 뿐이다. 여왕 본인은 자신의 처지에서 무엇이 이상한지 깨달았지만 귀족들은 모를 수도 있다.
몰랐을 뿐이라고 해서 화가 가라앉지는 않았다. 결국은 그녀 자신이 가르쳐줘야만 하니까.
어쩔 수 없다. 고고하게, 우아하게 그들을 내려다보기만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여왕의 꾸짖음에 귀족들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들이 반성 비슷한 것을 하는지, 여왕이 설친다고 생각하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레이테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어차피 군신 간의 신뢰란 썩 순수한 감정이 아니다. 진심이 어떠하든 여왕의 지적을 수용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판단하기만 하면 된다.
귀족들은 겉모습만큼은 여왕의 말을 숙고하는 듯했다. 바르시나인마저 그랬다. 물론 단순히 여왕의 기세에 눌렸을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왕에게 서슴없이 대드는 바르시나인의 평소 태도를 생각해 보면 굉장한 것이기도 했다.
문득 레이테는 자신의 손등을 덮은 온기를 느꼈다. 어느새 남편이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은 느릿느릿하게 아내의 손을 쓸었다. 동의, 격려, 혹은 사과 같은 다양한 감정이 손끝으로 전해지는 듯했다.
레이테는 손을 뒤집어 남편의 손을 맞잡았다.
“두 분 폐하의 결혼을 추진한 사람으로서 한마디 하겠습니다.”
침묵을 끝낸 이는 시스로네스였다. 최근 그는 기이할 만큼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늘 생각에 빠져 있는 모습이었다.
이제 머릿속 정리가 끝난 모양이다. 그가 할 말이라면 보통 내용은 아닐 것이다.
“여왕 폐하의 임신 문제를 따지는 망발은 불필요한 일입니다. 애초에 이혼은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교회법원에서 혼인 무효 판결을 내려야만 하지요. 특히나 군주의 결혼이므로, 두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정중하게 성좌의 허락을 구해야만 합니다.”
아. 레이테의 감탄사가 짧게 울렸다. 에르난은 아내를 잡지 않은 쪽 손으로 자신의 무릎을 탁 쳤다.
‘왜 여태 저 생각을 못 했지?’
“교황의 허가장이 나오기 전까지, 두 분 폐하는 세상이 뭐라 한들 부부입니다. 신의 법도가 그러하니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시스로네스는 참으로 유감이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추기경께서도 결혼을 무효화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코른이 물었다. 그는 시스로네스에게 수상하다는 눈길을 노골적으로 보내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판단하자는 겁니다. 가능하지도 않을 이혼을 우리가 멋대로 추진했다가 큰일이 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먼저 확인을 해 봐야지요. 마침 제가 성좌에 다녀올 일이 있으니 알아오겠습니다.”
“성좌에 다녀올 일?”
“원래 추기경 임명은 성좌에 앉은 교황께 직접 받아야 합니다. 저는 건강 문제로 성좌에 가지 못하고 교황의 특사를 통해 톨도스에서 임명을 받았습니다만, 그래도 한번 성좌에 가 교황을 알현하기는 해야겠지요.”
“예하, 건강 문제라면 지금도…….”
“이제 병은 다 나았고 열 살은 젊어진 것 같습니다. 공작께서는 아직이십니까?”
“…….”
코른은 껄껄 웃는 시스로네스에게 더 대꾸하지 못했다. 평소의 코른이라면 멀쩡한 척하지 말라며 강하게 쏘아붙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침묵했다. 반박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므로.
시스로네스의 주장은 타당했다. 즉, 성좌의 허가가 나올 때까지 이혼도 동맹도 모두 논의를 중단할 수밖에 없다.
시간을 버는 술책이라는 것이 모든 이의 눈에 뻔히 보일지라도.
신앙심의 문제가 아니다. 성좌의 권위에 함부로 도전했다가는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만다.
‘이걸 궁리하고 있었던 건가.’
에르난은 상당히 놀랐다. 그의 책략도 책략이지만, 부부의 결혼을 되도록 유지하려는 방향 자체가 놀라웠다.
시스로네스가 자기 입으로 말했듯이, 부부의 결혼을 생각해 낸 사람은 그였다. 그것은 어떤 감정도 없는 순수한 계산의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결혼을 유지하는 쪽이 레이테와 사크틸라의 미래에 이롭다는 계산 결과가 나왔다고 볼 수 있을까?
* * *
알현이 끝나자, 시스로네스는 여왕의 부름을 받아 그녀의 집무실로 갔다. 그곳에는 레이테뿐만 아니라 에르난도 함께 시스로네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방법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아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인데 왜 그 생각을 못 했는지 신기할 정도예요.”
레이테의 표정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답이 없어 보이던 일에 해결책이 생겼으니까.
“여왕 폐하, 제게 왜 존대를 하십니까?”
“네?”
시스로네스는 다른 말을 했다. 레이테는 의아한 듯 눈을 멀뚱거리다가 곧 웃음을 터뜨렸다.
“추기경이시잖아요! 나는 물론이고 에르난, 아니 헤젤 왕 벨류도 추기경 같은 고위 성직자에게는 공경을 표하는걸요. 그게 당연하고.”
“어쩔 수 없는 세상의 법도라 칩시다. 하늘에 계신 분이 오죽 무서워야지…….”
레이테의 옆에 앉은 에르난이 입을 삐죽였다.
“그러십니까? 노인 공경인 줄로 알겠습니다.”
시스로네스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레이테는 픽 웃었고, 에르난은 시종을 불러 명했다.
“연로하신 추기경께서 불편하지 않도록 등과 발에 받칠 쿠션을 몇 개 가져오너라.”
그리하여 추기경은 왕의 앞치고는 대단히 편안하게 앉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성좌까지 먼 길을 가려면 쓸데없는 일에 힘을 빼지 말고 조금이라도 체력을 비축해야지요. 정말 괜찮겠습니까?”
에르난이 물었다. 시스로네스는 말없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괜찮을 리가 없다. 열 살 젊어졌다는 말은 아무도 믿지 않을 허세였다.
“죄송해요. 괜한 짐을 짊어지게 한 것 같군요. 그렇지만……, 잘 부탁해요.”
레이테의 목소리는 살짝 떨렸다.
성좌까지 오가는 길도 멀지만, 부부의 이혼 문제 해결에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알 수 없다. 레이테와 에르난만 한 거물의 이혼은 순식간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더군다나 시스로네스는 허가를 받지 않기 위해 애써야만 한다. 그런 식으로 부부의 시간을 벌어 주는 것이다.
“날이 조금 풀리면 출발하도록 해요. 한겨울에 긴 여행을 하면 누구라도 병에 걸릴 거예요.”
“알겠습니다. 아마 이런저런 준비를 하다 보면 시간도 금방 갈 듯합니다.”
“필요한 것은 모두 지원할 테니 요청하세요.”
“감사합니다.”
“출발 전까지 시의를 보낼 테니 몸 관리도 잘 하시고요.”
“예.”
레이테는 미안한 마음에 괜히 이것저것 말했다. 아니, 미안하기만 하면 다행이다. 실은 더 불안한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돌아오지 못할지도 몰라.’
괜한 염려도 아니었다. 그의 나이와 건강 상태를 생각해 보면 사크틸라로 돌아오지 못하고 생을 마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시스로네스를 막을 수도 없었다. 그는 억지를 부려서라도 대륙으로 떠날 것이다.
“좋아요. 그러면 당장 시의를 불러서…….”
“폐하. 그전에 저와 브라간사의 일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27
레이테는 너무 놀란 탓에 순간적으로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헤젤에서 시스로네스와 헤어지기 전, 두 사람의 대화는 썩 좋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레이테는 당시 시스로네스에게 느꼈던 감정을 쉽게 정리할 수 없었다. 실망? 서운함? 또한 그를 버리고 도망쳐야 한 데에 따른 죄책감도 빼놓을 수 없다.
대화를 마무리하지 못한 채, 반란과 탈출이라는 극한상황에 맞닥뜨렸다. 사크틸라로 돌아와서는 시스로네스와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하지만 지난 감정을 직접 해소한 것은 아니었다.
딱히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무사한 것만으로 충분했으므로.
그래서 잊고 있던, 아니 잊으려 했던 일을 시스로네스가 다시 꺼낼 줄은 몰랐다.
“제가 폐하를 보호 대상으로만 여기는 것 같다 하셨지요. 폐하께서는 무척 서운해하셨습니다. 사크틸라에 돌아오고 나서야 생각해 보니, 제가 폐하를 미숙한 왕으로 여기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까 알현실에서의 말씀도 그런 맥락이었지요. 왕을 왕답게 여기지 않는다고.”
여태껏 들어 보지 못한 짙은 자책에 레이테는 당황했다. 에르난도 마찬가지였다.
“많이 늦었습니다만, 그에 대해 사죄하고자 합니다.”
“저, 그게요……. 나는 미숙한 왕이 맞아요. 물론 알현 때 나온 그런 의미의 불완전하다는 말은 싫지만. 아무튼 나는 많이 부족한걸요. 예하의 충성에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어요. 다만 그때, 예하께서는 여왕을 섬기는 사람일 뿐이라는 식으로 말했지요. 나는 그게 좀…….”
여왕은 남편인 에르난 못지않게 시스로네스를 신뢰했다. 그렇기에 그는 또 다른 가족 같았다. 심지어 그를 남편보다 더 오래 알고 지내기까지 했다.
하지만 공적인 영역을 벗어나는 감정을 드러내도 괜찮을까? 레이테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망설였다.
“여태 느낀 겁니다만.”
갑자기 에르난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어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레이테는 영문을 모르고 그에게 안겼다.
“추기경 예하는 장인어른이랄까…… 그러니까, 당신 아버지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예……?”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시스로네스가 멍한 눈으로 부부를 바라보았다. 레이테는 주먹 쥔 손으로 남편을 가볍게 때렸다.
“무, 무슨 소리예요.”
“말 그대로입니다. 계속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추기경에게 나는 당신을 위해 뼈가 부스러져라 일해야 하는 일꾼입니다. 처음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마찬가지겠지요.”
“…….”
“내가 당신의 부모님을 모르기 때문일까요? 당신과 가장 가까운 사이인 어른이 추기경인 것을 어떡합니까. 더군다나 당신이 못 하는 말이 어쩐지 이것과 비슷한 내용일 것 같아서.”
마침 남편에게 안겨 있겠다, 레이테는 아예 그의 품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무슨 말을 그런 식으로 해!’
여왕인 레이테에게 사적인 관계란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일까, 어쩐지 무척 부끄러웠다.
“……과찬이십니다, 폐하.”
시스로네스는 한참 후에야 짤막하게 말했다. 그는 어쩐지 민망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할 만큼, 레이테가 예하를 믿고 친근하게 대했다는 겁니다. 두 사람이 정확히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모르지만, 레이테는 그 부분이 아쉬웠던 모양인데.
그런데요, 부인. 지금 내가 아니라 추기경 때문에 부끄러워서 이러십니까? 그건 정말 질투가 나는…… 윽.”
레이테는 주먹 쥔 손으로 남편의 가슴을 치고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뭐, 뭔가 좀 이상하긴 하지만……. 에르난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에요. 나는 그냥 그 부분이 아쉬웠을 뿐이지, 예하께 죄책감을 지우려는 건 아니었고……, 하아.”
횡설수설하던 레이테는 말을 멈추고 한숨을 쉬었다. 알현실에서 귀족들에게 호통치던 여왕이 지금은 무슨 짓인지. 그녀는 자세를 고쳐 앉은 다음 말을 이었다.
“좀 더 나를 믿어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었지만, 사실 지금 그걸 다시 말할 필요는 없는 것 같군요. 내가 믿을 만한 여왕이 아니라면 예하께서는 사크틸라를 떠나지 않을 테니……. 맞나요?”
레이테의 서운함은 사실상 해소된 셈이었다. 시스로네스는 레이테를 믿고 떠난다. 심지어 그 목적은 이혼을 막기 위해서다. 레이테가 생각하기에, 이는 시스로네스가 에르난도 믿는다는 증거 같았다.
그러니 시스로네스가 떠난 뒤의 일을 논의해야 한다.
“그렇습니다. 제가 시간을 버는 동안 두 분 폐하께서는 이 상황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이라. 나는 동맹의 현실적인 필요성을 주장해서 귀족들을 설득시켜야 한다고 봐요. 지금 같아서는 솔직히…… 남편이랑 헤어지기 싫어서 고집부리는 것처럼 보이겠지요.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라지만 그게 전부라면 곤란해요. 왕 자격도 없지.”
레이테는 남편을 마주 보았다. 에르난이 씩 웃음 지었다. 그도 같은 생각을 했다.
“바르시나가 사크틸라와 연합해야 한다는 내 생각은 여전합니다. 이베로 반도라는 터전을 버리고 대륙으로 이주라도 할 것이 아닌 이상 이웃과의 연계는 필수적입니다.”
“좋습니다. 비록 바르시나에서는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아 보이지만, 반도와의 교류 자체가 아직 익숙하지 않은 탓이라고 봅니다. 그러니 폐하께서는 끈기를 갖고 교류를 계속하셔야 합니다.”
시스로네스가 말했다. 흡족한 듯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인 그는 이제 레이테를 바라보았다.
“사크틸라에는 바르시나가 반드시 필요한 존재는 아니에요. 하지만 바르시나와의 교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을 강조한다면 사정이 달라지겠지요. 그동안은 내부 혼란에 휩쓸리기에 바빴지만 이제 시야를 더 넓힐 필요가 있어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두 분의 그런 생각을 지지하는 세력을 확실히 모으시는 것이 우선이겠습니다. 그러니……, 각자의 나라를 진정시키는 데에 일단은 집중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아…….”
부부는 잠시 침묵했다. 시스로네스가 말하는 진정의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법률적으로는 혼인 관계를 유지하지만, 당장은 떨어져 지내며 각자의 나라에 집중하라는 뜻이다.
“레이테와 내가 단둘이 사이좋게 지내는 꼴은 못 보겠다, 뭐 이런 생각이십니까? 혹시?”
에르난이 말했다. 시스로네스에게 따져 묻는 것은 아니었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지독하게 허탈했다.
“어쩔 수 없습니다. 그게 최선이라 생각합니다.”
“…….”
“당분간은 바르시나에 돌아가 계십시오.”
에르난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바르시나를 떠난 지 1년이 되었나. 돌아갈 때도 되긴 했지…….”
영영 바르시나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은 물론 아니다. 전쟁이 이렇게 끝난 이상, 한 번쯤은 바르시나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반드시 가야만 했다. 되도록 바르시나를 구성하는 세 자치영역을 모두 돌아보며 민심을 수습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에르난 혼자 돌아간다는 선택지는 머릿속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당연히 두 왕이 함께 가야 하니까.
에르난은 인정해야만 했다. 현 상황에서 바르시나의 질서를 잡기 위해서는 레이테가 관여하지 않는 쪽이 효율적이다. 그래야만 본래 목적에 집중할 수 있다.
이는 사크틸라의 경우에도 동일하다.
“두 분은 부부이십니다. 그 언약이 풀리는 일은 신께 맹세코 없을 것입니다.”
시스로네스의 목소리는 비장하기까지 했다. 굳은 결심의 표현은 곧 부부의 별거를 확실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군주의 모든 행위는 두 사람의 이름으로 시행한다. 서로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는 둘 중 누구든 공식 문서의 서명이 가능하나, 역시 두 사람이 함께 동의한 것으로 간주한다……. 기억하나요?”
레이테가 읊조리듯 말했다. 에르난은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 계약서의 문구였다. 이후 바르시나와 사크틸라 사이에 체결한 합의사항에도 포함된 내용이다.
그 사항을 이런 식으로 상기하게 될 줄은 몰랐다.
“바르시나는 당신에게 맡기겠어요. 나는 당신이 행하는 모든 일을 전폭 지지하는 거예요. 그게 이 국면을 타개할 가장 빠른 길이라면…… 그렇게…….”
레이테의 목소리가 떨렸다. 남편을 덥석 붙잡은 손도 목소리만큼이나 떨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맺은 관계가 완전히 파탄 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일단은 두 나라의 안정이 제일 중요했다. 그를 위해서라면 물러설 수도 있고 양보도 해야 한다.
하지만 언제까지?
레이테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을 무시하려 애썼다.
* * *
“바르시나로 돌아가겠소.”
다음 날 아침, 중신들이 모인 회의에서 에르난은 덤덤하게 말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귀족들의 표정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에르난은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이런 수를 두기로 한 이상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했다. 벌써 의기소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면에서는 레이테가 에르난보다 나았다.
“어제 시스로네스 추기경이 말했다시피, 우리 부부의 결혼 문제는 무엇을 하려 해도 성좌의 허가가 필요하지. 하지만 언제 나올지 모르는 허락을 기다리느라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어. 따라서 사크틸라와 바르시나의 현재를 위해, 나와 에르난은 각자의 나라에 충실할 생각이다.”
여왕은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냉정한 얼굴이었다. 감정이 격해졌던 어제에 비하면 목소리는 날카롭지 않은 편이었다. 대신 무척이나 단호했다.
“결혼과 그에 따른 일체의 것들은 그대로 둘 것이며, 이에 대한 반박은 받지 않아. 반대를 하고 싶다면, 사크틸라와 바르시나에 당장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해 보면 좋겠군.”
의식적으로 강경하게 말하려니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무척이나 어색했고, 당장이라도 귀족들이 그녀에게 등을 보이고 떠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레이테는 이런 태도가 앞으로 자신에게 필요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에르난 없이, 시스로네스도 없이 그녀 홀로 나라를 통치해야 하니까. 여왕은 중신들의 위에 서서 그들을 이끌어야만 한다.
* * *
에르난이 바르시나에 돌아가기로 결정되었으나, 출발이 당장 이뤄지지는 않았다.
단순히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것과는 개념이 달랐다. 에르난의 귀국은 일단 두 나라의 연합을 어느 정도 분리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그동안의 일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사크틸라에서 머무는 바르시나 귀족의 수도 적지 않았다. 제법 대규모 인원이 이동해야 하므로 그 준비도 필요했다. 그리고 헤젤에서 탈출한 후유증으로 여전히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도 일부 있었다. 그들이 마저 회복할 시간도 필요했다.
무엇보다, 부부에게 이번 이별은 어디까지나 재회를 염두에 둔 것이다. 부부는 다시 만나는 날을 대비해야 했다.
“오랜만이네. 잘 지내고 있나?”
에르난은 이스팔리스 왕궁의 한 방을 찾아갔다. 이곳에는 왕실의 귀한 손님이 머물고 있었다.
국왕 부부의 무사귀환에 가장 공이 큰 사람, 탐험가 콜롬보였다.
“폐하, 이곳까지 무슨 일이신지요! 많이 바쁘실 텐데요. 아, 소식 들었습니다…….”
콜롬보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에르난을 맞았다. 그러나 곧 왕의 눈치를 보면서 목소리를 줄였다.
마냥 반가워하기에 궁정의 분위기는 영 좋지 않다. 식객일 뿐인 콜롬보도 그 정도는 알았다.
“뭐…… 그렇게 됐네. 그런데 자네, 요즘 할 일 없지?”
콜롬보는 왕의 탈출을 돕는 대가로 탐험을 지원받기로 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탐험 준비를 시작할 수조차 없었다. 콜롬보는 왕궁에 눌러앉아 노는 신세였다.
“예? 어……, 그렇지요.”
“우리가 사크틸라행 배를 알아볼 때, 자네가 대륙산 신무기라고 말했던 물건이 혹시 이건가?”
에르난은 그를 따라온 시종에게 눈짓했다. 길고 묵직한 막대기를 들고 있던 시종이 그것을 콜롬보에게 보였다.
“맞습니다. 보병용 휴대 화기입니다.”
“신기한 물건이야. 이걸 좀 더 알아보고 싶은데, 자네가 도와줬으면 해.”
#128
에르난이 시종에게 손을 내밀었다. 시종이 무기를 건네자 에르난은 그것을 들어 겨드랑이 앞에 댔다. 그는 어색한 자세로 심지가 연결된 작은 고리에 손가락을 걸어 잡아당겼다.
“히익! 잠깐만요, 폐하! 위, 위험……!”
콜롬보가 괴성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에르난은 껄껄 웃음을 터뜨리며 방아쇠에서 손가락을 뺐다.
“놀라는 걸 보니 사용법을 아는 모양이군. 안심하게. 화약이 안 들어 있거든. 그리고 심지에 불도 안 붙였잖은가.”
“휴우…….”
콜롬보는 숨을 크게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오누바 근처를 지나가던 헤젤 상선을 사크틸라 함선이 나포했는데, 그 배에서 나온 물건 중 하나야. 포로의 말로는 총이라고 하더군. 그런데 이런 식으로 생긴 건 처음 봐.”
“폐하께서는 대포를 축소해서 만든 것만 보셨겠지요? 들고 계신 것은 최근에 발명된 개량품입니다. 사용하기 더 쉽고 안전하지요.”
“브라간사는 대포에 관심이 많았지. 그래서 이 무기도 실전에서 사용할 궁리를 하는 모양이야.”
“공작이 꽤 현명한 생각을……, 헉. 아니, 그게…….”
콜롬보는 무심코 브라간사를 칭찬하다가 화들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브라간사는 에르난의 적이다.
“맞아. 현명하지. 그러니 현명한 방안을 내가 가로채야겠어.”
“예?”
“자네는 이 총에 대해 좀 아는 모양인데, 그러면 이걸 판매하는 자들도 알고 있나?”
“총포상이요? 그런 일을 하는 고향 지인이 있긴 합니다만……, 장사라면 어차피 바르시나 사람들이 더 전문가 아닙니까?”
“그렇긴 한데, 반도 상인에게는 말도 안 되는 폭리를 취한다더군. 그러니 자네가 좀 도와주게. 어차피 당분간은 탐험도 못 떠나. 레이테가 자네 지원할 여유가 있을 것 같아?”
에르난의 말이 옳았다. 내부 혼란을 수습하기에 바쁠 여왕에게 사크틸라 밖 탐험에 신경을 써 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당분간 바르시나 사람들과 함께 장사 좀 하게. 설마 탐험 자금을 레이테의 돈만으로 충당하려는 건 아니겠지?”
“어, 물론…… 아니지요. 폐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콜롬보의 얼굴은 울상이 되어 있었다.
‘정말로 레이테에게 전액 지원받을 생각을 한 거야?’
에르난은 기가 막혔다. 콜롬보는 염치가 없거나 현실감각이 없는 것이 틀림없다. 애초에 그가 하겠다는 탐험의 비현실성을 보면 후자가 맞는 듯하지만.
콜롬보와의 만남을 마친 에르난은 레이테의 집무실로 향했다.
레이테와 낯선 남자 몇 명이 회의용 탁자에 둘러앉아 있었다. 소박한 차림새로 보아 왕궁 밖에서 온 사람 같았다.
“어서 와요, 에르난. 마침 헤젤의 동향을 보고받으려던 참이에요.”
아내에게 다가간 에르난은 그녀와 깊은 입맞춤을 나누고 아내의 옆에 앉았다.
레이테가 먼저 들어온 남자들에게 눈짓했다. 한 남자가 말했다.
“벨류 왕의 상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식사를 거의 못 한다는군요.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던 지병이 있는 모양인데, 사람들은 브라간사가 독이라도 먹인 것 아니냐며 의심하는 상황입니다.”
“독살? 흐음, 벨류가 지금 사망하면 브라간사에게도 썩 이롭지 않을 텐데. 에르난, 당신 생각은 어떤가요?”
“동의합니다. 벨류가 살아 있다고 브라간사에게 유리한 건 아니지만, 죽어 버리면 앞날을 완전히 예측할 수 없게 되니까요.”
이미 물밑에서는 벨류의 죽음에 대비하여 브라간사와 그의 적대파가 경쟁적으로 후계자를 찾느라 바쁘다는 보고가 이어졌다.
브라간사 본인이 왕좌에 앉으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 의외였다. 하긴, 브라간사가 당장 왕이 될 현실적인 방법이 없다. 그러니 힘없는 왕족을 허수아비로 세워 시간을 벌 생각일 것이다.
부부는 프란세스크의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프란세스크는 죽지 않았다. 하지만 브라간사의 포로가 되어 꽤 험한 대접을 받는다는 모양이다.
“리세우 공 소식이 들어오는 대로 카테리나에게 알려주기로 했는데……, 일단은 모른 척하는 편이 낫겠어요.”
레이테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에르난은 눈을 질끈 감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공작의 석방 협상을 빨리 진행해야겠어요. 사크틸라에서도 적극 협력할 거예요. 당신도 알다시피, 모두가 리세우 공에게 목숨 빚을 졌죠.”
“아, 그렇군요. 다행인 일입니다. 어쩌면 이건 두 나라의 협력이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는다는 증거가 될지도.”
에르난은 쓴웃음을 지었다. 좋게 생각해 보면 그렇다. 하지만 애초에 프란세스크가 잡히는 일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 편이 좋았을 텐데.
그밖에 헤젤 왕실의 이런저런 일에 대한 보고가 이어졌다. 브라간사의 어머니가 왕궁에서 리리우를 돌보고 있는데, 아들에게는 비협조적이라는 부분이 흥미로웠으나 크게 주목할 만한 일은 없었다.
보고를 마친 이들이 나간 뒤, 에르난은 자신이 며칠 동안 궁리한 것을 이야기했다. 콜롬보와도 의논한 신식 총기의 도입, 그리고 방위 강화에 대한 것이었다.
“돌아가면 일단……, 지난 전쟁으로 온 세상에 허술함이 들통난 바르시나의 군사력을 강화할 겁니다. 손봐야 할 구석이 꽤 많지요.”
에르난은 쓴웃음을 지었다. 레이테와 결혼식을 할 때만 해도, 그는 전쟁터에서 공을 쌓을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그로부터 대략 1년 후, 에르난은 대패했으며 포로가 되는 망신까지 당해 버렸다.
두 번 다시 그런 수모를 입을 수는 없다. 자신으로 인한 수많은 사람의 희생도 더는 없도록 할 것이다.
“바르시나는 대륙과 가깝다는 이점이 있으니, 신무기도 이것저것 실험할 생각입니다.”
“잘 되기를 바랄게요.”
“그리고 당신에게 권유하자면……, 헤젤의 공격으로 무너졌던 요새 말입니다.”
“아. 조만간 보수공사를 시작할 거예요.”
“마침 잘 됐습니다. 요새 보수에 대한 구상을 말하려 했어요. 성벽을 높게 짓지 말고, 낮고 탄탄하게 짓는 편이 좋아 보입니다. 위력이 부쩍 강화된 신식 포탄을 버텨야 하니까요.”
“괜찮은 방안이네요. 의논해 보겠어요. 그런데 요새 보수 문제를 생각했다는 건……, 혹시 브라간사가 다시 군사행동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레이테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가능성 수준이 아니라 반드시 할 거라고 봅니다. 브라간사가 후계자 문제를 어떻게든 넘기고 나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다시 원정에 나설 겁니다. 타국과의 전쟁을 통해 내부 분열을 덮는 거지요. 아니면 최소한 하는 척이라도 하겠지요. 원정을 핑계 삼아 군사를 모은 다음, 반대파를 토벌한다거나.”
“모두 가능성 있는 이야기네요. 과거에 헤젤이 사크틸라를 침공했던 사례를 보면 그런 식의 의도가 많았거든요.”
레이테는 어린 시절, 시스로네스에게 역사를 배우며 그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탐욕적인 권력 다툼과 전쟁 같은 악한 행위가 반복될 뿐인 기록을 왜 읽어야 하냐며 따졌던 기억이 있다. 실은 공부가 지루했던 것인데, 대놓고 표현할 수는 없어서 둘러댄 말이었다.
악한 행위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시스로네스는 꽤 진지하게 답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기 쉽지 않으니 역사가 반복된다는 말도 함께.
‘그 말을 들으며 막연하게 선조들이 한심하다고 비웃었던가?’
지금 생각하니 우습기 짝이 없었다. 본인이 아무리 잘하려 해도 주변 상황이 따르지 않으면 어쩔 수 없다.
여왕으로서의 권력 행사. 평화 회담과 전쟁. 그리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남편과 떨어져 살아야 하는 삶도.
“……당신도 나도 꽤 바쁘겠네요. 당장 할 일만 하다가도 시간이 훌쩍 가겠어요.”
바쁘게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재회가 다가오지 않을까? 레이테는 막연한 소망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헤젤이 사크틸라를 다시 침공한다면 바르시나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물론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혹시 다시 연합군을 구성하고 싶나요?”
“내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다. 사크틸라라는 벽이 굳건해야 바르시나도 안전합니다. 그러니 당신이 말한 문제는, 바르시나를 설득해야 하는 내 과제지요. 우리가 잠시 떨어져 지내는 기간은 그것을 이룰 기회가 될 거라고…… 믿습니다.”
기회. 에르난의 말이 옳았다. 현실적으로도 맞을뿐더러, 그렇게 생각해야만 앞으로의 시간을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에르난은 내일 배를 타고 떠난다.
“……열심히 해요.”
레이테의 목소리가 떨렸다. 에르난은 아내를 끌어안았다.
그 상태로 부부는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
* * *
저녁 무렵, 두 나라의 귀족이 모두 모인 회의가 열렸다. 프란세스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레이테의 예상대로 이 일에 대해서는 두 나라 사람 모두가 일치된 의견을 보였다. 최대한 빠르게, 효과적으로 프란세스크를 석방해야 한다.
주제 자체가 갈등의 여지가 없다 보니, 두 나라가 잠정적으로 갈라서게 되는 현 상황과는 달리 평온하게 진행된 회의였다.
그러고는 밤이 왔다.
레이테는 목욕을 하느라 느지막하게 침실로 들어왔다. 에르난이 창가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창문은 열려 있었다.
“추운데 왜 거기 있어요. 내가 오기 전에 잠들까 봐?”
“아, 전에 그랬었지요. 지금은 아닙니다. 굳이 추운 데에 있지 않아도 당신이 오기 전에는 안 잡니다. 그저 달구경이라도 할 생각이었는데, 안타깝게도 날이 흐려서 거의 안 보이는군요.”
에르난은 창밖을 가리켰다. 그의 말대로 밤하늘에는 달이 보이지 않았다. 레이테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창문을 닫았다.
“좀 밝아야 당신도 잘 보일 텐데.”
“초를 더 켜라고 할게요. 그러면 될 거예요.”
레이테는 시녀를 부르러 나가려 했다. 그때 에르난이 뒤에서 그녀를 안아 붙잡았다.
“됐습니다. 가까이 있으면 잘 보이는걸요. 지금 누가 더 들어오는 것도 싫고.”
귓가에 닿는 남편의 숨결이 뜨거웠다. 레이테를 안은 몸의 열기도 방금 전까지 창가에 앉아 있던 사람 같지 않았다.
에르난의 손이 레이테의 뺨에 닿았다. 레이테는 그의 손짓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부부의 눈이 마주쳤다. 방 안이 별로 밝지 않다지만, 레이테에게는 에르난의 붉게 빛나는 눈이 잘 보였다.
붉은 눈은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동요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레이테의 가슴이 욱신거렸다.
아마 자신도 남편에게 저런 눈을 보이고 있을 것이다. 레이테는 이를 악물었다. 벌써 울어 버리면 안 된다.
“레이테.”
에르난이 나지막이 아내의 이름을 불렀다. 레이테는 남편에게 답하고자 악다문 입을 살짝 열었다. 입술이 열리면서, 참던 눈물마저 흐를 것 같았다.
그 순간, 에르난이 입술을 덮쳐 왔다.
숨이 막힐 듯 진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탐욕스럽게 서로를 갈구하던 두 사람의 몸이 마구 엉켰다.
에르난의 손이 레이테의 옷 매듭에 닿았다. 느슨하게 묶은 매듭이 순식간에 풀어지고, 헐렁한 슈미즈가 스르륵 흘러내렸다. 레이테도 팔을 뻗어 남편의 옷을 끌어내렸다.
창가에서 침대는 멀지 않았다. 부부는 서로를 껴안고 입술을 탐하는 채로 몇 걸음 걷다가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읏……! 아, 고마워요.”
어느새 에르난의 손이 레이테의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레이테는 방긋 웃음 지었다.
에르난은 손을 빼는 대신, 아내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짧아진 은발은 이전처럼 풍성하게 그의 손에 감기지 않았다. 그래도 부드러운 감촉은 여전했다. 에르난은 천천히 그것을 느꼈다.
아내를 만나기 전, 오랜 시간 동안 그림으로만 이 신비한 은발을 봐 왔다. 다시 그런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니 끔찍했다.
‘하지만 오늘 밤은 아직 아니야.’
부정적인 생각은 이르다. 아직은 레이테가 눈앞에서 그의 품에 안겨 있지 않나.
날이 밝을 때까지라도, 헤어짐은 잊어버리자.
#129
한참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에르난의 손이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그 손은 레이테의 눈가, 콧대, 입술을 느릿하게 만지고 턱을 쓸었다.
손이 지나간 곳에는 입술이 따라왔다. 쪽 입 맞추는 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레이테의 귓가에는 소리 하나하나가 길게 남았다.
“사랑해요.”
입술과 입술이 만나기 직전, 레이테가 속삭였다. 에르난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나도 사랑합니다.”
부드럽게 닿은 입술 사이로 말캉한 혀가 들어왔다. 음란하게 입 안을 헤집어대던 혀지만 지금은 서두르지 않았다. 상대방을 느끼며 느릿하게 엉켰을 뿐이었다.
급하게 움직이면 너무 빨리 끝나버릴 테니까.
하지만 입맞춤도 결국은 끝나기 마련이다. 레이테는 아쉬운 마음을 흩어버리고자 남편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레이테를 꽉 안은 에르난은 그녀의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고는 입술에 닿는 살을 살짝 깨물었다가 빨아들였다.
“으읏.”
레이테가 짧은 신음을 흘렸다. 남편을 끌어안은 그녀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에르난은 자신이 자극했던 곳을 혀로 살살 핥았다. 간지럼에 몸을 움찔거리는 아내가 귀여웠다.
에르난은 한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약하게 붙잡고 살살 굴렸다. 레이테의 몸이 더 떨렸다.
“하아, 응…….”
“맛있네요.”
진짜로 먹는 것도 아니면서. 레이테는 마음속으로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대로 먹히는 것은 꽤 기분 좋은 일이다.
‘당분간은 이 기분도 느끼지 못하겠지……, 아.’
쓸데없는 생각을 해 버렸다. 레이테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검은 머리카락에 뒤덮인 뒤통수가 보였다. 남편은 계속 그녀에게 흔적을 남겼다. 부드럽게 가슴을 감싸던 손이 튀어나온 정점을 잡고 빙글빙글 돌렸다.
“읏, 하아……. 흐읏.”
자극을 느낄 때마다 신음이 터져 나왔다. 쾌감이 레이테를 점점 잠식하고 있었다.
기쁘면서도 불안했다. 평소대로라면 가차 없이 의식을 쾌락에 내던졌을 것이다. 지금은 그러기 망설여졌다. 기억하지 못할까 봐.
하지만 레이테의 망설임에 아랑곳하지 않고 쾌감은 그녀의 몸 곳곳으로 스며들었다. 몸 깊은 곳이 욱신거리는 느낌이 강해지더니 참을 수 없어졌다. 레이테는 다리를 꼬았다.
그 움직임을 눈치챈 에르난의 다리가 그녀를 감쌌다. 그는 아내의 쇄골 근처를 탐하고 있었다.
“오늘은 조금 더 참아요.”
에르난이 고개를 살짝 들어 레이테를 바라보았다. 음욕에 젖은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못 참을지도…….”
레이테가 중얼거리자 에르난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몸을 살짝 일으켜 아내의 위로 완전히 올라갔다.
레이테는 자신의 허벅지에 단단한 열기가 닿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다리를 움찔거리자, 에르난이 허리를 살짝 비틀며 깊은 숨을 토해냈다. 뜨거운 숨결에 레이테의 어깨가 떨렸다.
“이러면서 참으라니 너무하네요.”
불평은 했으나, 레이테는 남편을 더 재촉하지 않았다.
남편은 무척 꼼꼼하게 레이테를 탐하고 있었다. 손끝과 입술에 아내의 모든 것을 기억해 두겠다는 양.
그 흐름을 깨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남편의 치밀함에 잠식당하는 것이 좋았다. 본능에 휩쓸린 허리가 한 번씩 움찔거리며 졸라대긴 했지만.
사실 에르난도 비슷했다. 상체는 세심하게 움직이고 있으나, 다리 사이는 잔뜩 성나 있었다.
“하, 후우…….”
참으라고 말하는 그야말로 참기 힘든지, 에르난의 숨소리는 꽤 가빴다.
레이테의 손이 그의 등을 쓸었다. 남편을 진정시키는 듯한 움직임이지만 실상은 그의 흥분을 부채질했다.
에르난은 몇 번이고 허리에 힘을 주었다. 그럴 때마다 느껴지는 묵직한 압박이 레이테는 무척 좋았다.
허리 아래는 당장 터지기라도 할 듯 팽팽하게 긴장해 있건만, 아내의 가슴을 탐하는 에르난의 부드러운 손짓은 신중했다. 봉긋 솟은 언덕을 감싼 농밀한 애무에 레이테는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읏, 흐읏! 아……, 흐응! 하아……!”
기억은 머리가 아니라 몸이 해 줄 것이다. 레이테의 몸이 들썩거렸다. 에르난은 가슴을 입 안에 머금더니 예민한 부분을 혀로 살살 굴렸다.
“아읏, 아. 에르난…… 읏!”
에르난의 한 손은 입술이 닿지 않은 가슴을 주무르고 있었다. 다른 손은 아내의 허리를 더듬었다.
안으로 잘록하게 들어간 아내의 허리선은 보기에 무척 아름답다. 하지만 에르난은 지금처럼 만지며 느끼는 쪽도 무척 좋아했다. 실은 지나치게 좋은 바람에 허리에 피가 몰려 뻐근한 기분이 들었다.
아내의 몸은 하나지만 기억은 여러 가지로 할 수 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입에 머금어 그 맛을 볼 것이다. 에르난은 세심하게 아내를 훑었다.
다리까지 내려온 손은 곧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다. 레이테가 몸을 부르르 떨며 신음했다.
“흣, 하아……, 읏, 앗!”
에르난은 한 손으로 그곳을 자극하면서, 다른 손으로는 아내의 다리를 들어 올렸다. 입술이 허벅지에 닿았다. 에르난은 안쪽의 보드라운 살을 탐하기 시작했다.
“아응, 읏!”
살을 핥다가 빨아들이는 동작은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그러나 허리를 들썩이는 레이테의 반응은 격했다. 에르난은 시간을 한참 들여 그곳을 괴롭혔다. 다리 사이에 넣은 손가락이 무척 끈적거렸다.
“읏, 으응, 흐앗! 아! 아……, 흐윽…….”
절정에 몸부림치는 아내의 흐느낌 섞인 신음이 미칠 듯이 유혹적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밤새 이곳을 괴롭히고 싶었다. 그러면 레이테는 어떻게 될까? 얼마나 쾌락에 무너져 내리고 기뻐하며 울까?
왜 이런 생각을 지금에서야 하나?
‘…….’
아내의 모든 것을 취했다는 착각에 빠진 지난 세월이 바보 같았다. 아직도 레이테에게는 그가 모르는 부분이 남아 있다.
평생 이런 식일 터다. 레이테를 알고 또 알아도, 새로운 것을 만날 테고 호기심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여자에게서 벗어나고 싶지 않다.
울컥한 에르난은 쪽쪽 빨아들이던 살결을 깨물었다. 레이테의 몸이 살짝 튀어 올랐다.
“흐앗!”
놓고 싶지 않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자신의 무능함에 따른 후퇴를 포장하는 변명일 뿐이다. 얼굴을 살짝 든 에르난은 이를 악물고 숨을 가다듬었다. 꼴사납게 지금 흐느낄 수는 없다.
레이테의 안쪽을 괴롭히던 손가락도 밖으로 뺐다. 감정의 동요에 따라 움찔거렸기 때문이었다. 울컥하는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에르난은 미세하게 떨리는 입술을 다시 아내의 다리에 가져다 댔다. 입술 끝에 닿는 살결을 느끼며, 그는 천천히 아래로 몸을 내렸다. 양손은 입술을 따라 움직이며 가느다란 다리를 쓸었다.
발끝의 키스를 마지막으로 에르난은 몸을 일으켰다. 그는 다시 아내의 위로 올라타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레이테의 보랏빛 눈은 젖어 있었다. 깊은 눈동자에는 기쁨과 슬픔이 질척하게 뒤섞인 듯했다.
에르난은 한 손으로 아내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레이테의 눈이 감기고 기분 좋은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춘 에르난은 허리를 들어 그녀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흐응…….”
묵직한 살덩이가 깊은 곳을 채우자, 레이테의 입에서 기분 좋은 신음이 나왔다.
에르난은 분신을 압박하는 온기를 잠시 음미했다. 미칠 듯이 기분이 좋다. 그는 자신을 감싼 쾌감에 허리를 움직여 답하기 시작했다.
예민한 살과 살이 진득하게 맞부딪치며 섞이고 체액이 스며들었다. 꽉 끌어안은 팔다리가 엉키고 허리는 힘껏 들썩였다. 상대를 갈구하는 헐떡임은 뜨거운 숨으로 사랑하는 이를 녹였다.
색정적인 마찰음과 함께 기둥이 나갔다 들어오며 안을 찌를 때마다, 레이테는 저릿한 쾌감에 사로잡혔다.
이렇게 기분이 좋아도 될까. 기쁨에 몸부림칠수록 시간은 빨리 지나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쏟아지는 자극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앗! 흐…… 읏, 앗! 으읏! 하앗! 하응…… 읏! 아! 하아…….”
다시 찾아온 절정에 몸이 움츠러들었다가 노곤하게 풀어지려 했다. 그러나 에르난은 그녀가 쉴 틈을 주지 않고 쾌락을 퍼부어댔다.
여러 차례 정을 받아냈고, 피로에 나가떨어질 것 같은데도 경련하며 기뻐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의식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난 몸은 본능에 흔들릴 뿐이었다. 한정된 시간이라는 개념 따위 모조리 잊은 채로.
* * *
레이테는 쓰러지듯이 남편의 위에서 내려왔다. 에르난이 그녀에게 했던 것처럼, 그녀도 에르난의 몸을 샅샅이 만지고 핥았다. 그리고 격렬하게 몸을 섞었다.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지만 레이테는 눈을 감을 수 없었다.
피곤하지만 눈은 떠졌고 팔다리도 움직였다. 마지막까지 사랑하는 사람을 느끼고 싶다. 가장 강렬한 기억을 남기고 싶었다.
에르난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땀에 전 몸으로 서로를 껴안아 체온을 주고받았다.
말을 나눌 필요는 없었다. 뜨거운 숨결만으로도, 그들은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더 안고, 더 사랑하고 싶다. 영원히.
그러니 키스하자.
입술과 입술이 가까워졌다. 그대로 서로에게 녹아들면 된다.
하지만 거친 숨소리 사이로 파고든 새 울음소리에, 두 사람의 움직임이 뻣뻣하게 굳었다.
“아.”
레이테가 짧게 탄식했다. 한 번 귀에 들어온 새소리는 점점 그 크기를 키워 갔다. 레이테는 귀를 틀어막고 싶었지만 눈을 감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을 외면할 수 있지도 않았다.
“안 돼…….”
에르난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무척 처절하게 들렸다.
그를 비웃듯 새소리가 다시 들렸다. 닫힌 나무창문 틈새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부부는 서로를 끌어안고 흐느꼈다.
* * *
세르지는 뒷갑판에 덩그러니 선 에르난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바닷바람이 차니 왕을 선실로 모시거라.”
그는 삼촌인 코른 후작의 명령을 수행해야 했다. 하지만 차마 에르난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이스팔리스 항구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진 지는 한참 되었다. 그런데도 에르난은 여전히 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르시나까지 돌아가는 길에서는 섬을 거의 만날 수 없다. 이제 며칠 동안, 에르난의 눈에는 바다만 보일 것이었다.
그러면 원하지 않더라도 강제로 시공간에 대한 감각이 흐려질 터다. 뱃멀미에 실컷 고생하다 보면 틀림없이 그렇게 된다. 그런 식으로 기절하다시피 몸을 흐느적거리다 정신을 차리면 바르시나에 도착할 것이다.
‘……아니.’
에르난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는 미쳐 버릴 만큼 머리가 맑았다. 너무 맑아서 오히려 기분이 혼란스러웠다. 화가 난 것인지, 절망한 것인지 구분조차 안 됐다.
혼란 속에서도 진정으로 선명한 것은 있었다. 배에 오르기 전, 아내와 나눴던 마지막 키스였다. 에르난은 손으로 입술을 조심히 더듬었다. 레이테의 온기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이 느낌이 얼마나 갈까.’
결코 잊고 싶지 않으나, 금방 흐려질 것이다. 그러니 완전히 잊기 전에 다시 그녀를 만나러 가야 한다. 누구도 막을 수 없이 당당하게.
* * *
카테리나는 두 번째 망토를 여왕에게 덮어 주었다.
레이테가 고개를 살짝 끄덕여 고마움을 표했다. 카테리나는 조금 놀랐다.
에르난과 바르시나인들이 탄 배가 떠난 지 몇 시간이 지났다. 여왕은 여전히 항구에 앉아 바다를 보고 있었다. 남편을 떠나보낸 슬픔에 멍하니, 넋을 잃고 그러는 줄 알았다. 옷이 덮이는 줄도 모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자세히 여왕을 살펴보니, 그녀의 눈은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붉게 충혈된 눈자위와는 대조적이었다.
“폐하, 이제 그만 왕궁으로 돌아가서 쉬시는 건 어떨까요? 아프시면 안 되잖아요.”
잠시 고민하던 카테리나가 조심스럽게 여왕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가 보기에, 레이테는 억지로 이성을 붙잡고 있다.
레이테는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카테리나와 다른 시녀가 양옆에서 그녀를 부축해 주었다.
여왕은 저무는 해가 걸린 수평선을 마지막으로 바라본 뒤, 발걸음을 옮겼다.
#130
레이테 여왕의 궁정이 이스팔리스에 머문 지도 일 년이 넘었다. 잠시 헤젤에 다녀온 시기도 있었으나, 여왕은 사크틸라 남부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이 지역은 레이테에게 무척 낯선 땅이었다. 오랫동안 전혀 신경을 쓰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워낙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더니, 이제는 눈을 감고도 남부의 지도를 꼼꼼하게 그릴 수 있을 지경이다.
그래서 오누바에 시찰을 나온 여왕은 아침 일찍, 시종과 호위 기사 몇 명만 데리고 근처의 요새 공사 현장을 깜짝 방문했다. 원래는 계획에 없던 일이다.
“여왕 폐하!”
요새 사령관과 장교들, 공사 감독관 등이 우르르 뛰쳐나왔다. 인부들도 일을 멈추고 여왕에게 인사했다.
레이테는 빠르게, 그러나 예리한 눈길로 현장을 살펴보았다.
백 년도 넘은 역사를 가진 이곳은 지난 전쟁 때, 요새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절반 이상을 새로 짓고 있는데, 돋보이는 부분은 기존과 다른 구조의 성벽이다.
성벽을 낮고 두껍게 지으라는 남편의 조언을 참모들과 논의했더니 타당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사크틸라는 대륙에서 기술자를 불러오는 등 적극적으로 서쪽 국경 요새의 보수에 들어갔다.
“여름 내내 고생 많았겠는걸.”
“예. 그렇지만 요즘은 괜찮습니다. 많이 선선해졌으니까요.”
껄껄 웃는 공사 감독관의 이마에는 말과 달리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가을이 왔다지만 한낮은 여전히 여름 같다.
요새를 둘러보며 작업자들을 격려한 여왕은 떠나기 전 그녀의 시녀장을 불렀다.
“카테리나.”
기존 시녀장이 나이가 들어 은퇴하자, 여왕은 카테리나를 새 시녀장으로 임명했다. 카테리나는 바르시나에 돌아가지 않고 레이테의 곁에 남아 있다. 프란세스크가 풀려나면 하루라도 빨리 만나고 싶다는 이유로.
사크틸라 여왕의 시녀장으로 바르시나인이 임명된다는 소식에 궁정이 꽤 소란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시녀장의 임명은 어차피 여왕의 자유다.
“오누바에 돌아가면 인부들에게 과일을 좀 보내도록 해요. 아, 포도가 좋겠군요. 한창 수확철이지요?”
“맞아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폐하.”
환호 가득한 작별 인사를 받고, 여왕 일행은 요새를 떠나 오누바로 돌아왔다.
한때 이곳에서는 헤젤과의 밀거래가 극성이었다. 브라간사는 이 도시를 통해 신무기를 수입했고, 사크틸라의 정보를 수집하기도 했다.
헤젤에게 다시 당하지 않기 위해, 왕실은 항구와 주변 해역, 그리고 상업 활동 일체를 엄격하게 감시하고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
오누바에 온 여왕은 현장을 견학하고 시민의 의견을 들었다. 무역소 설치, 선적 서류 제출, 세율 조정 등에 대한 회의가 이어졌고, 이제 그 내용을 담은 칙령을 발표한다.
여왕의 서명은 칙령서 말미의 중앙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치우친 곳에 위치했다. 왼쪽은 여왕의 남편이자 사크틸라의 또 다른 왕이 서명할 자리다.
레이테는 그 공간을 잠시 응시했다.
지금 그곳에 에르난의 이름이 적힐 일은 없었다. 그러나 부부의 결혼 계약 사항에 따라, 문서의 효력에는 문제가 없다. 레이테가 서명하면 에르난도 동의한 것으로 간주하므로.
‘에르난에게 방해받지 않기 위한 조항이었지만, 이 칙령은 에르난도 동의할 내용이겠지.’
부재중인 시스로네스를 대신해 왕명 대리인의 임무를 수행하는 주교가 커다란 왕실의 인장을 여왕에게 건넸다. 비서가 녹인 밀랍을 문서 한쪽에 부었고, 레이테는 인장을 찍었다.
선명하게 찍힌 사크틸라 왕의 문장은 레이테만의 것이 아니다. 문장의 절반은 에르난의 상징으로 채워져 있다.
에르난이 바르시나로 떠난 지도 반년이 넘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레이테의 남편이다. 부부의 문장이 그 사실을 선명히 말해 주었다.
레이테는 이런 식으로 남편의 존재를 느끼고는 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넓은 침대에서 홀로 잠들고 온기 없이 일어나는 생활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오후가 되자 여왕은 신학자들을 만났다. 레이테는 일주일에 두 번씩 그들을 만나 토론을 했다. 시스로네스가 추기경좌에 오르자마자 왕에게 제안했던 교회 개혁 안건 때문이다. 제안자인 시스로네스는 부재중이지만, 레이테는 이 일을 미루지 않기로 했다.
여왕과 신학자들 사이는 그럭저럭 이야기가 잘 통했다. 레이테도 자신이 학자와 토론을 나눌 수준이 된다는 사실에 놀랄 정도였다.
‘숙부의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공부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시스로네스에게 배울 만한 것은 다 배웠구나.’
자신감이 붙은 레이테는 이 일을 상당히 의욕적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사크틸라 교회는 왕실에 협조적인 편이기도 하기에, 이 작업은 비교적 순탄히 이뤄질 것이다.
밤에는 가벼운 만찬회가 열렸다. 오누바에 온 이후, 레이테는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한 매일 밤 연회를 열었다. 최대한 많은 사람을 만나며, 도시의 침체된 분위기도 끌어올리기 위해서였다.
사교 연회에 남편 없이 참석하는 것은 레이테에게 적잖은 인내를 필요로 했다. ‘외로운’ 여왕을 노리는 갖은 시선 때문이었다.
“여왕 폐하.”
“어서 오십시오, 폐하.”
여왕이 이혼을 한다 해도, 일개 귀족이 여왕의 남편이 될 가능성은 없다. 그러니 여왕의 애인이라도 되어 볼 야심을 불태우는 것이었다.
낮 동안 여왕의 호통에 굽실거리느라 바빴던 자들도 밤이 되면 반하기라도 한 것처럼 꾸며낸 눈빛과 미소를 레이테에게 보냈다.
어쨌거나 끈적끈적하니 영 부담스러운 태도였다. 더군다나 그들의 반한 척은, 에르난보다 한참 못했다.
레이테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에르난 또한 첫 만남부터 아내를 사랑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내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처음부터 참 그럴듯했다.
“폐하, 오늘도 아름다우십니다!”
‘아냐. 여왕을 유혹할 생각이 있다면 더 노력하라고.’
감흥 없는 찬사를 들으며, 레이테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남편은 저렇지 않았다.
에르난과는 만나자마자 무작정 살을 맞댔다. 하지만 육욕 어린 시간은 방해를 받은 탓에 오래 가지 못했다. 그때 에르난은 아내가 될 사람에게 아름답다고 말했다.
정확히 어떤 느낌의 표현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신 레이테는 자신이 보였던 반응을 기억했다. 분명 자신은 냉정해지려 애썼다.
에르난의 울림은 한순간에 그녀를 동요하게 했다.
이런 식으로 남편과 자연스럽게 비교하게 되고 만다. 그런데 그 남편은 옆에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대부분 남자들은 이 이상 여왕을 귀찮게 하지 않았다. 낮의 여왕이 보이는 깐깐한 모습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여왕을 유혹하고 싶긴 하지만, 눈치를 보고 있다.
물론 가끔 예외는 있다.
“여왕 폐하! 제 아들과 무척 잘 어울리시는군요. 아들, 적적하실 여왕 폐하를 잘 모시거라.”
여왕에게 인사한 어느 부부가 그녀의 옆을 지키는 기사를 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여왕과 잘 해 보라는 양 눈치를 주는 부모가 부담스러운지 기사는 난처한 표정이었다. 레이테는 태연하게 말했다.
“아디오스 경은 훌륭한 기사네. 그와 황금 양모 기사단의 변함없는 충심이 늘 고마워.”
남편이 없는 여왕의 에스코트는 사크틸라인 황금 양모 기사단원 몇 명이 돌아가며 맡고 있었다.
바르시나인 기사는 에르난과 함께 돌아갔기 때문에, 레이테의 곁에 남은 기사단원의 수는 많지 않았다.
황금 양모 기사단은 에르난이 만든 조직이다. 그래서 팀파노같이 원래 신분이 높은 귀족이면 모를까, 하급 귀족 출신 기사들은 사크틸라 궁정에서 붕 뜬 존재가 되고 말았다. 레이테는 그들에게 큰일을 맡기지는 못해도 소외시키지 않으려 애썼다.
레이테와 에르난 부부는 기사단을 통해 두 나라의 젊은이들이 교류하기를 원했다. 레이테는 그 희망을 놓을 마음이 없었다. 지금은 애매한 상황이라도, 미래에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이다.
연회가 끝나자, 레이테는 처소로 돌아와 목욕을 하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레이테가 거울 앞에 앉자 시녀가 그녀의 머리를 빗어 주었다. 이전에는 두 명이 긴 시간을 들여 머리카락을 정리해야 했으나, 길이가 짧아진 지금은 한 명이 빗어도 금방 끝나기 마련이었다.
“폐하, 차 한 잔 드세요.”
머리를 다 빗고 나니, 카테리나가 들어와 찻잔을 건넸다. 달달한 향이 나는 캐모마일 차였다.
“숙면에 도움이 된대요.”
“고마워요.”
레이테는 빙긋 웃고 차를 마셨다. 따끈한 기운이 몸 안을 데우는 느낌이 좋았다. 하지만 편히 잠들기는 힘들 듯했다.
이미 머릿속에서는 에르난과 캐모마일 차를 마시며 보낸 시간이 떠오르고 있으니까. 레이테는 오늘 밤도 이런저런 추억을 되새기며 뒤척거리다가 겨우 잠들 것이다.
“헤젤에 간 협상단의 연락이 왔어요.”
레이테는 다 마신 찻잔을 카테리나에게 건네며 말했다. 찻잔을 받아드는 카테리나의 손이 흠칫거렸다.
“브라간사를 직접 만나 리세우 공의 석방 협상을 진행하는데, 분위기가 나쁘지는 않다고 하네요. 브라간사도 이번에는 함부로 행동하지 못할 테고요.”
협상단에는 사크틸라와 바르시나의 고위 귀족 여럿이 포함되어 있다. 모두 프란세스크에게 목숨 빚을 진 사람들이었다.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그들은 반드시 리세우 공과 함께 돌아올 거예요.”
“감사합니다, 폐하…….”
“공작이 돌아오면, 둘이서 잠시 바르시나에 다녀와요.”
“네? 오빠와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 있고 싶어 사크틸라에 남았지만, 폐하를 모시고 싶은 마음도 커요. 오빠와 함께 바르시나에 돌아가려는 건 아니에요.”
“알아요. 그렇지만 어머니 좀 만나고 와요. 걱정이 크실 텐데.”
“아…….”
카테리나가 울먹거렸다. 레이테는 그녀를 가볍게 안아 주었다.
* * *
에르난의 가을은 뜻밖의 인물과의 만남으로 시작되었다. 바르시나인도 비겁하다고 손가락질하는 남자, 페레트가 살두비아 왕궁에 나타난 것이다.
페레트는 왕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몸을 굽혀 걸어 들어왔다. 그는 왕좌에 앉은 에르난의 앞에 몸을 조아렸다.
“국왕 폐하의 충성스러운 종 페레트 발란시오가 존엄하시며 절대무적이신 바르시나의 위대한 왕 돈 에르난 폐하를 뵙사옵니다.”
에르난을 높이고자 주렁주렁 단 수식어는 바르시나 궁정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표현은 아니었다. 그의 목소리는 벌벌 떨리고 있었다.
“절대무적? 자네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닌 것 같아.”
에르난이 빈정거렸다. 절대무적은커녕, 왕은 뼈아픈 패전을 겪었다.
그리고 페레트는 왕을 따라 전쟁에 참여했다가 도망친 비겁자다. 전쟁 이후, 고향인 발란시아에서 그를 보았다는 사람의 증언이 있었다. 그가 궁정에 나타나기는 처음이었다.
알현실을 채운 귀족들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페레트를 보고 있었다.
“어쨌거나 무사히 살아 있어서 기쁘다네. 상황이 어떠한들 죽음보다는 사는 게 좋지. 진심이야.”
에르난의 표정은 하나도 진심 같지 않았다. 페레트는 머리를 연신 조아렸다.
“부족한 저를 환대해 주시니 영광이옵니다.”
환대는 무슨. 에르난은 마음속으로만 코웃음을 쳤다.
엄밀히 말해서 페레트는 죄인이 아니었다. 전투 중 탈영했다고 보기에 애매한 부분이 있으므로.
페레트 역시 그 점을 잘 아는 듯했다. 패배가 확실한 상황에서, 바르시나의 소중한 병사들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멀리 도망가야 했다. 그는 이런 내용의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제게는 폐하께 승리를 안겨 드릴 의무가 있거늘, 그러지 못해 수치스러웠습니다. 차마 폐하를 뵐 용기조차 낼 수 없어 영지를 관리하고, 가문의 사업을 도우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폐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오게 되었습니다.”
“어떤 일을 말하나? 한두 가지가 아닌데.”
에르난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폐하, 화승총이라 부르는 무기에 관심을 갖고 계시지요? 본격적으로 총병을 양성하려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네.”
“사업 문제로 대륙 본토에 갔을 때, 저도 그 무기에 흥미가 생겨 이것저것 배워 왔습니다. 그 지식을 활용해 폐하의 대업을 돕고 싶습니다.”
결국 자신을 등용해 달라는 뜻이었다. 곳곳에서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 소리가 들렸다.
#131
“페레트 경, 왜 다른 이들이 자네를 비웃는지 알겠지.”
에르난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이 풍기는 사늘한 기운에 페레트는 아예 바닥에 몸을 붙이다시피 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지만 소인의 부끄러움보다 국왕 폐하의 영광이 더 중합니다.”
저 뻔뻔함에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모르겠다……. 에르난은 한숨을 쉬었다.
페레트의 말대로 에르난은 여름 내내 총기에 대해 열성적으로 공부했다. 부족하고 불편한 점이 없지 않으나, 에르난은 점점 이 무기에 마음이 끌렸다.
특히 그가 관심을 보인 부분은, 이 무기가 다른 장거리 무기인 활에 비해 배우는 데에 드는 시간이 짧다는 점이었다. 당장 육군 양성이 급한 바르시나 입장에서 대단히 매력적인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아라고 근방에서는 대륙에서 초빙한 전문가의 지휘 아래 화승총의 시험 생산이 조만간 시작된다. 총을 다룰 군인은 왕이 직접 모집해 봉급을 지불할 생각이었다.
귀족들은 이 구상을 별로 환영하지 않을 것이다. 왕이 자신만의 군대를 조직해 귀족을 탄압하리라는 의심을 할 테니까.
따라서 페레트와 같은 주류 귀족 밖의 사람을 등용할 필요가 있었다. 에르난이 아는 한 그의 능력은 제법 준수한 편이기도 했다.
문제는 바닥으로 떨어진 페레트의 평판이다. 당장 에르난도 그를 썩 신뢰할 수 없었다.
“경이 군에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는지 증명해야 해.”
“하명하십시오. 얼마든지 제 실력을…….”
“지난 전쟁의 생존자 입장에서…….”
생존자라는 표현에 담긴 조롱을 느끼기는 어렵지 않다. 페레트는 고개를 푹 숙였고 다른 귀족들은 코웃음을 쳤다.
“자네 왕이 무엇을 잘못했나 말해 보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고개를 든 페레트의 어리둥절한 눈이 에르난을 향했다. 에르난은 대단히 엄격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지휘관으로서 보고 느낀 것이 있을 텐데?”
“그, 그게…….”
페레트는 입을 우물우물하며 망설였다. 그는 에르난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왕을 비판하라는데 과연 어느 정도까지 허용 가능할까?
왕은 왕이다. 정도가 지나치면 아무리 비판하라는 명령을 왕이 내렸다 해도 페레트가 무사하기는 힘들 것이다.
결국 페레트는 도로 고개를 숙이며 침묵을 택했다. 에르난이 말했다.
“내가 말해 보지. 경도 공감할 거야.”
“예…….”
“근본적인 원인은 바르시나와 사크틸라의 불화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바르시나만 노력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었지. 그러니 그것을 빼고 보자면, 바르시나군의 전력 자체가 문제였지. 바르시나인은 바다에서의 삶이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두 다리로 걷고 말을 타는 방법 자체를 잊어버렸어!”
에르난의 호통에 귀족들은 심기가 불편한 듯 눈살을 찌푸리며 수군거렸다. 하지만 앞으로 나서 지금 바닥을 딛고 서 있는 것이 다리가 아니면 무엇이냐는 식으로 반박하는 이는 없었다. 바르시나가 육지에서의 싸움법을 잊은 것은 사실이므로.
“그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고, 최대한 빠르고 효율적으로 병사들의 수준을 끌어올려 사크틸라와 비등하게 맞춰야 했네. 그런데 바르시나 왕은 병사들의 훈련 상태를 불안해하면서도 제대로 조치를 취한 것이 없지.”
“저, 폐하. 그건 페레트 경을 비롯한 지휘관들의 부족이…….”
귀족 한 명이 말했다. 에르난은 귀족 전체를 바라보며 외쳤다.
“지휘관의 지휘관은 왕이야!”
알현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하고 싶은 말은 상대가 왕일지라도 잘 참지 않고 마음껏 험하게 하는 이들이 바르시나인이었다. 하지만 왕이 왕 자신에게 독설을 퍼붓는 상황은 그들에게도 익숙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어떻게 됐나? 왕이라는 자가 적국에서 포로 생활이라니.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망신이야. 그렇지 않나?”
“…….”
에르난은 이가 갈렸다. 치욕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제대로 마무리 짓지도 못했다. 그는 도망쳤고, 그를 대신하듯 프란세스크가 헤젤에 잡혀 있다.
“나와 바르시나가 당한 수모를 생각하면 복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 하지만 복수보다 저 중요한 일은 재발 방지야. 바르시나의 전력을 체계적으로 강화해야 하네. 급할 때 여기저기에서 긁어모으다시피 징집한 농민들에게 뭘 얼마나 기대할 수 있겠나? 페레트 발란시오, 경은 이 상황의 극복에 어떤 식으로 기여할 수 있지? 답할 수 없다면 고향으로 돌아가게!”
에르난의 시선이 다시 페레트에게 향했다. 페레트는 왕의 기세에 덜덜 떨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화, 화승총은 다른 무기에 비해 훈련이 용이해 병사 육성에 드는 시간 대비 효율이 탁월합니다. 총병을 주요 병과로 내세우는 도전……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아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지만, 전력 강화가 급한 우리 군의 입장에서는 해 볼 만한 도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차피 사크틸라처럼 전통이라고 내세울 만한 육군이 있지도 않으니까요. 그리고 저는 총병의 양성에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머뭇거리던 페레트의 목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굳어 있던 에르난의 얼굴도 서서히 풀렸다.
왕의 반응을 본 페레트는 자신감이 생겼는지, 굽혔던 허리를 펴고 말을 이었다.
“총병 양성과 함께……, 상비 병력을 어느 정도 두어야 한다고 봅니다. 폐하의 말씀대로 전시에만 징집하는 군사는 오합지졸이 되지 않을 수가 없으니까요. 상비군을 갖춰 더 체계적인 군사 훈련을 해야 합니다.”
저지른 짓이 있으니 마냥 신뢰하기에는 껄끄럽다. 하지만 신기할 만큼 에르난의 의중을 잘 파악한다.
지금 에르난에게는 이런 사람이 필요했다. 그에게 기회를 줘야 할 것 같다.
* * *
에르난의 예상대로, 귀족들은 페레트가 제안하는 식으로 모습을 드러낸 에르난의 구상을 반가워하지 않았다. 결국 평소의 바르시나 국정회의답게 고성이 오가는 난장판이 펼쳐졌다.
“병력을 양성하기 싫다면 또 왕을 포로로 보내든가!”
에르난은 자신의 치욕스러운 과거를 방패로 내세우며 귀족들에게 맞섰다.
왕이 포로 이야기를 꺼내면, 어떤 거친 말을 내뱉던 귀족이라도 잠잠해지고는 했다. 왕이 포로가 되는 상황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말아야 하니까.
그런 식으로 겨우 밀어붙인 회의가 끝나자, 에르난은 집무실에 갔다. 확인해야 할 서류가 적지 않았다.
그중에는 프란세스크의 석방을 위해 떠난 사절이 보낸 편지도 있었다. 사크틸라에 도착해 여왕을 만났고 사크틸라 측 인원과도 합류했다는 내용이었다.
‘……레이테를 만났다니 부럽잖아.’
매정하게도 여왕에 대한 언급은 만났다는 말이 전부였다.
조금이라도 자세히 묘사해 주면 좋았을 텐데. 에르난은 마음속으로 투덜거리며 편지를 마저 읽었다.
‘세스크는 올해 안에 풀려날 수 있으려나.’
편지의 수신일을 보아하니, 지금쯤이면 협상단은 헤젤에 도착했을 듯했다. 브라간사는 호락호락한 사내가 아니다. 협상은 편지 속 호언장담처럼 쉽게 진행되지는 않을 것이다.
에르난은 다른 편지를 펼쳤다. 대륙에 가 있는 콜롬보가 보낸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일을 잘해 주고 있다.
그밖에 다른 것들까지 확인하고 나니, 꽤 늦은 시간이 되어 있었다.
“폐하, 밤이 깊었습니다. 이만 취침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시종장이 다가와 말했다. 에르난은 고개를 저었다.
시종장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그가 복도에 대기한 시종들에게 지시하는 소리가 살짝 들렸다.
“모포와 차를 가져오게. 폐하께서는 오늘도 이곳에서 밤을 지새우실 듯하네.”
에르난은 침실에 가는 것을 싫어했다. 그곳에는 가장 차가운 현실이 있었다. 아내가 없다는 현실.
원래부터 에르난과 레이테는 낮 동안 따로 일하고 밤이 되어서야 다시 만나는 경우가 잦았다. 바르시나와 사크틸라의 일은 구분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낮 동안 일에 몰입하고 있으면 애써 아내와 떨어져 지낸다는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밤이 되면 가차 없었다. 침실은 텅 비어 있다.
집무실에 앉아 있긴 하지만, 더 할 일은 없다. 에르난은 서랍에 넣어둔 책을 꺼냈다. 이베로 반도의 전설적인 영웅들에 대한 전기였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바르시나도, 사크틸라와 헤젤도 없이 반도 전체가 대제국의 일부였던 시절의 사람이다. 에르난은 어렸을 때부터 이들의 이야기를 꽤 즐겨 읽었다. 그들과 같이 빛나는 영웅이 되고 싶었다.
여러 현실을 직접 겪으며, 에르난은 자신이 영웅과 결코 똑같아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최근 이 이야기를 다시 읽는 이유는, 무모했던 시절의 패기를 떠올리고 싶어서였다.
지금 에르난에게는 현실을 냉정하게 파악하는 눈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현실을 견디기 힘들었다.
* * *
연중 온화한 이스팔리스는 겨울에도 제대로 된 눈을 보기 힘든 곳이었다. 한겨울인 1월이건만, 오늘도 눈 대신 비만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방금 막 육지에 발을 내디딘 프란세스크는 그 비를 온몸으로 맞으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사크틸라는 겨울비도 따뜻하군요!”
프란세스크와 함께 보트에서 내린 이들 사이에서 웃음소리가 번졌다. 프란세스크의 석방을 위해 파견된 두 나라의 사절들이었다.
빗물이 정말로 따뜻할 리는 없다. 그저 프란세스크의 기분이 편안할 뿐인 것이다.
“각하,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잘 돌아오셨습니다!”
맞은편에서 한 남자가 다가오며 밝은 목소리의 바르시나어로 외쳤다. 그는 프란세스크에게 망토를 덮어 주었다.
남자의 가슴에서 흔들거리는 황금 양모 기사단의 목걸이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프란세스크는 환히 웃으며 남자를 바라보았다가 놀란 얼굴을 했다.
“세르지 피로시? 경이 왜 여기 있나? 바르시나인은 다 돌아갔다던데?”
“왕께서 이곳에 남으라고 하셨습니다. 뭐, 별다른 일을 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프란세스크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무언가를 깨닫고 물었다.
“혹시 카테리나도 이곳에 있나?”
“예. 아가씨는 여왕 폐하의 시녀장이 되었습니다.”
“어…… 그렇군.”
에르난이 세르지에게 진짜로 부탁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세르지가 사크틸라에 남은 이유는 카테리나 때문일 것 같았다.
아무래도 좋다. 동생을 금방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프란세스크는 기분이 더 좋아졌다. 육지를 오랜만에 밟았더니 걷는 느낌이 영 어색했지만 그마저도 즐거웠다.
프란세스크와 일행은 근처에 대기한 마차에 탔다. 화려하게 장식한 마차는 보통 물건이 아닌 듯했다. 프란세스크가 그 점을 지적하자, 여왕이 보낸 마차라고 세르지가 설명했다.
덕택에 프란세스크는 편안하게 왕궁으로 갈 수 있었다. 그는 곧바로 여왕을 알현하기 위해 대기실로 들어갔다.
“세스크!”
대기실에서는 카테리나가 프란세스크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테리나는 오빠에게 뛰어들어 엉엉 울기 시작했다.
“얼굴도 제대로 못 봤는데 울면 어떡해.”
프란세스크는 동생을 안고 그녀의 등을 토닥거렸다. 카테리나는 한참 동안 흐느끼다가 오빠의 품에서 벗어났다.
카테리나가 얼마나 울었는지, 프란세스크의 옷이 푹 젖어 있었다.
“여왕을 뵈어야 하는데 이러면 좀 난감한걸. 폐하를 알현할 때 입을만한 옷은 이것뿐이란 말야.”
“아, 그건 괜찮아! 오빠가 입을 새 옷이 있어. 여왕 폐하께서 장만해 주신 거야!”
주변에 대기하던 시녀들이 프란세스크에게 다가왔다. 시녀들은 바르시나 궁정에서나 볼 법한 호화로운 옷감으로 만든 옷과 모자를 들고 있었다.
카테리나는 직접 오빠에게 새 옷을 입혀 주었다. 그녀는 옷을 다 입은 프란세스크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내 오빠지만 진짜 잘생겼네.”
“너 카테리나 맞아? 내 동생은 그런 말 안 하는데…….”
“오늘만 이러는 거야!”
동생이 얼마나 신이 난 줄 알겠다. 이제는 여왕의 시녀장이라면서 칠칠하지 못하게 드레스의 소매 매듭이 풀린 줄도 모르고 방방 뛰고 있으니.
프란세스크는 피식 웃음 짓고 동생의 풀린 매듭을 묶어 주었다. 뒤늦게 그것을 깨달은 카테리나는 민망함에 얼굴을 붉혔다.
“바르시나의 리세우 공작 각하, 알현실로 들어오십시오.”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프란세스크는 카테리나와 함께 알현실로 향했다.
#132
왕좌를 향해 다가오는 프란세스크를 보며, 레이테는 포로이던 에르난을 만났을 때만큼이나 놀랐다.
쾌활한 미소를 짓고 있긴 하나, 피폐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었다. 화려한 새 옷도 쇠약함을 다 가리지는 못했다.
일 년이나 포로 생활을 했으니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레이테는 왕좌에서 일어나 프란세스크에게 다가갔다.
“리세우 공! 다시 만나서 기뻐요.”
레이테는 프란세스크의 손을 덥석 잡았다. 프란세스크는 여왕의 머리가 짧게 잘린 것을 보고 잠시 놀랐다가, 곧 한쪽 무릎을 꿇고 여왕의 손에 입을 맞췄다.
“바르시나와 사크틸라의 여왕 폐하를 뵙습니다. 에르난과 레이테 두 분 국왕 폐하의 은혜로 저는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프란세스크가 말하자 주변이 술렁거렸다. 프란세스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여왕의 손에 입을 맞췄다.
그는 사람들이 무엇에 놀랐는지 알았다. 레이테를 바르시나와 사크틸라의 여왕이라 표현했으며, 에르난과 레이테를 함께 말했기 때문이다.
틀린 표현은 아니었다. 현 상황이 어떻든, 레이테는 아직 에르난과 부부였다. 두 사람과 두 왕국 사이에 맺은 계약도 여전히 유효하다.
리스보아에서 출항해 이스팔리스까지 오는 동안, 프란세스크는 일 년 사이 두 나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적당히 분위기를 파악한 뒤에는 일부러 바르시나인과 사크틸라인을 따로 만나며 이야기를 들었다.
같은 일인데도 미묘하게 서로 다른 말이 나왔다. 두 나라는 서로를 미워하고 있다.
다행히도 시스로네스가 머리를 잘 쓴 덕택에 국왕 부부는 여전히 부부 관계다.
부부는 완전히 헤어질 마음이 절대 없을 것이다. 프란세스크는 확신했다.
‘분명히 다시 만날 기회를 노릴 테지.’
프란세스크는 자신이 부부를 도울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바르시나와 사크틸라는 반목하는 사이가 되었으나, 프란세스크의 구출 문제에서는 서로 손을 잡았다. 프란세스크가 그들 모두를 구했기 때문이었다.
일 년의 시간과 건강을 바친 대가로 프란세스크는 두 나라를 연결하는 고리가 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어떻게든 활용할 생각이었다.
프란세스크는 자신의 손에 전해지는 레이테의 흠칫거림을 느꼈다. 얼굴에는 놀란 기색이 가득했다.
그러나 여왕은 곧 아무렇지도 않은 듯 표정을 고쳤다. 너무 당연하게 듣는 말이라는 듯이. 그 모습을 보며 프란세스크는 지금 상황이 전혀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많이 피곤할 텐데 일단은 쉬어요. 그리고 헤젤에서 겪은 일을 조금 들려주면 좋겠군요.”
레이테는 프란세스크를 일으켜 세웠다.
여왕을 마주 본 프란세스크는 그녀의 인상이 자신이 기억하던 것과 달라졌다고 느꼈다. 단순히 머리를 짧게 잘랐기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 * *
밤에는 성대한 만찬회가 열렸다. 프란세스크의 귀환을 축하하고, 협상단의 노고도 치하하는 자리였다.
프란세스크는 여왕을 시작으로, 연회 참석자 거의 전원에게 술을 한 잔씩 받았다. 기분 좋게 취한 얼굴로 그는 헤젤에서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고문 쪽으로 특화된 헤젤인의 창의력, 비실비실한 벨류 왕, 모자(母子)의 눈치 싸움. 이 중 어떤 것을 먼저 말씀드릴까요? 고르시지요, 폐하.”
“기쁜 자리니까 고문 같은 이야기는 나중에 하죠. 동생 울리지 말고.”
고문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카테리나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프란세스크는 아차 하며 동생을 가볍게 안아 토닥여 주었다.
“전부 흥미로운 주제이긴 하지만, 일단은 리세우 공이 어떻게 지냈는지 먼저 말해 주세요.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이지요.”
“아, 제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군요. 처음 몇 달 동안은 존재 자체로 사람을 고……생시키는 곳에서 지냈습니다.”
‘감옥이겠지.’
레이테는 힐끗 카테리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울먹이고 있었다. 프란세스크는 동생 때문에 고문이라는 말을 차마 못 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다 한 번은 독감을 좀 심하게 앓았는데……, 물론 보시다시피 지금은 멀쩡합니다.”
“다행이에요.”
“이후 왕궁 내의 비교적 평범한 방에서 지냈습니다. 아주 가끔은 정원을 산책하는 호사도 누리고.”
프란세스크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왕이 아니다. 에르난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에서 지냈을 것이다.
“그래도 공주 두 분이 리세우 공의 편의를 많이 봐 주었습니다. 브라간사는 저희가 리세우 공을 아예 만나지도 못하게 하려 했는데, 그분들이 저희를 도와주었습니다.”
헤젤에 다녀온 협상단 사절 중 한 사람이 말했다.
“공주 둘이라. 한 명은 리리우일 테고……, 다른 하나는 누구지? 리리우 공주에게 동생이 있나?”
레이테가 물었다. 오래전, 에르난과 혼담이 오갔다던 리리우의 동생이 떠올랐다.
“리리우 공주에게 동생이 있다고 들었지만, 몇 년 전 병으로 죽었습니다. 다른 공주는 벨류 왕의 누나인 테레자를 말하는 겁니다. 반역자의 어머니 되지요.”
프란세스크가 답했다.
“반역자라면 브라간사를 말하나요?”
“예. 테레자는 아들이 저지른 짓을 무척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그와 완전히 반목하지도 않더군요. 아들은 아들이란 건지…….”
“아까 말한 모자의 눈치 싸움이 이 이야기인가요?”
“맞습니다. 모자가 서로를 무척 껄끄러워하는데, 그 이상 뭘 못 합니다. 궁정 분위기가 그렇다 보니 간혹 저 같은 사람이 숨 쉴 구멍이 생기기도 하지요. 산책도 하고, 연애도 하고……. 하지만 탈출은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두 분 폐하가 아닌지라.”
“그 와중에 연애라니 참 대단하네…….”
훌쩍거리던 카테리나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치고 말했다. 프란세스크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협상단의 보고서는 따로 받았지만, 공의 이야기도 듣고 싶네요. 우선 벨류 왕은 어떤가요?”
“왕은 오늘 밤이 마지막이라더라……, 이런 이야기를 스무 번도 넘게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폐하께서도 보고받으셨다시피, 벨류는 여전히 살아 있지요. 숨만 쉬는 수준이라 해도.”
“그러면 브라간사는?”
“무난하게 국정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왕에게 반기를 든 상황 자체가 정상이 아니지만. 어쨌거나 그건 겉으로 보이는 모습일 뿐이고, 물밑으로는 유력 귀족들을 포섭하고, 벨류의 뒤를 이을 수 있는 왕족을 찾느라 바쁩니다. 브라간사 편이든 아니든 헤젤의 온 귀족이 그 일에 매달리는 듯했습니다.”
어느 쪽이 후계자를 먼저 확보하는지에 따라 브라간사의 태도에 변화가 있을 것이다.
직감적으로는 브라간사가 후계자를 찾아내는 쪽이 사크틸라에 더 악재가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헤젤은 사크틸라를 적대할 테니.
“아, 그리고 하나 더 있습니다. 어떻게든 리리우 공주와 결혼하려 하더군요. 억지로 쥐어짜서라도 왕족의 정통성을 강화할 생각인 겁니다.”
“공주는 절대 그럴 생각이 없을 텐데.”
“예. 아예 왕궁을 탈출해 수도원으로 들어가려 했습니다. 제가 왕궁을 떠날 때는 준비 중이었지만, 지금쯤이면 아마도…… 무사히 탈출했겠지요.”
시종일관 쾌활하던 목소리가 급격히 가라앉았다. 붉게 취기가 올라 있던 안색이 창백해졌다.
프란세스크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잔을 들어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 * *
프란세스크는 이스팔리스 왕궁에서 가장 호화롭게 치장한 손님방에서 머무르며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괜찮다고 허세를 부리긴 했으나, 그의 몸은 엉망진창이었다. 고문의 후유증은 컸다.
여왕은 자신의 시의를 프란세스크에게 보냈다. 그리고 허약해진 프란세스크를 살찌우려고 작정이라도 했는지, 귀한 음식도 잔뜩 대접했다.
프란세스크에게 은혜를 입은 귀족들도 그를 계속 찾아왔다. 사실 프란세스크는 자신이 누구를 구했는지도 잘 몰랐다. 보이는 사람을 무작정 마차에 태웠고, 다가오는 헤젤 병사를 내쫓았을 따름이었으니.
그중에는 사크틸라인도 적지 않았다. 특히 팀파노 후작이 등장하자 프란세스크는 대단히 놀랐다.
“……공작 각하 덕택에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팀파노는 딱딱한 어투로 말했다. 그는 지금 상황이 어색한지 프란세스크를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했다.
동생 심발로의 죽음으로 인해, 팀파노와 프란세스크의 사이는 완전히 벌어졌다. 하지만 프란세스크에게 감사를 표하는 팀파노의 마음은 거짓 같지 않았다.
프란세스크와 악수를 나누는 손은 훨씬 솔직했다. 힘찬 손짓에는 결코 적의가 담기지 않았다.
“후작께서도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진심으로 기쁘군요.”
“원래 저도 헤젤에 가려 했습니다. 저를 구해주셨으니, 제가 공을 구할 차례라 생각했으니까요. 그렇지만 요새 정비 등 여왕 폐하께서 맡기신 일이 많아 그렇게 못 했습니다.”
프란세스크는 자신의 가슴에 무언가가 울컥 치미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미끼로 다른 사람들을 탈출시켰다. 혼란을 벗어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 판단해 그렇게 행동했다. 프란세스크는 헤젤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고, 실제로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것뿐이었을까?
팀파노의 얼굴에 심발로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이제 조금은 그에게 속죄한 것인지도 모른다.
“괜찮습니다. 말씀만으로도 이미 몇 번은 도움을 받은 듯한 기분이 되는군요.”
프란세스크는 환히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눈물이라도 흐를 것 같았다. 고문을 받으면서도, 동생 앞에서도 안 울었는데.
“그러십니까? 실은 다시 도움을 청하려고 왔습니다.”
“도움? 말씀하시지요.”
“헤젤은 언제나 사크틸라를 노리고 있으며, 브라간사의 행동은 예측하기 힘듭니다. 헤젤의 침공에 대비해 방비를 강화하고 있긴 하나, 아직 부족하지요. 그러니 공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프란세스크의 눈이 크게 떠졌다. 단순한 감사 표시를 넘어, 이런 제안까지 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프란세스크에게는 큰 문제가 하나 있다.
“그렇지만 저는…….”
그는 사크틸라인이 아니다. 일련의 사태로 사크틸라인이 증오하게 된 나라의 사람이다.
“여왕 폐하의 신하이지 않습니까?”
“아……!”
프란세스크는 진심으로 놀랐다. 팀파노는 레이테가 바르시나와 사크틸라, 두 나라의 여왕이라 말하고 있지 않나?
* * *
프란세스크가 사크틸라에 돌아온 지도 한 달이 넘었다. 그는 왕궁에 머물면서 몸을 치료받았다. 또한 여왕, 귀족 등과 수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꽤 바쁜 시간을 보냈다.
오래간만에 참석할 회의가 없는 날이다. 프란세스크는 가벼운 마음으로 외출에 나섰다.
그는 자신이 처음 사크틸라의 귀족 회의에 참석했을 때 느꼈던 어색함을 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정치에 관심이 없다지만 그도 대귀족으로서 이런저런 공식 석상에 나가보았다. 하지만 그런 자리는 처음이었다.
팀파노를 비롯해 프란세스크의 도움을 받았던 사크틸라인들은 그에게 협조적이었다. 하지만 나머지는 그렇지 않았다. 불순물 취급하며 껄끄러워하는 기색이 또렷했다.
여왕이 바르시나에 처음 가서 정치 회의에 참석했을 때 받은 느낌이 딱 이렇지 않았을까? 프란세스크가 받은 것보다 더 강한 적개심을 상대해야 했을 것이다.
그래도 헤젤에 대한 정보 하나하나가 간절한 탓인지, 프란세스크는 차차 사크틸라인의 모임에 받아들여졌다.
그 느릿한 변화는 프란세스크를 상당히 뿌듯하게 했다. 프란세스크 개인 차원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바르시나와 사크틸라가 협력하고 있지 않나.
물론 두 나라 사이에는 갈등이 컸다. 다른 점도 많다. 하지만 같은 목표 아래에서 손을 잡을 수 있다.
그리고 두 나라의 모두가 다른 것만은 아니었다. 시내에서 한창 펼쳐지는 사육제도 그랬다.
2월 중순이면 바르시나 전체가 축제의 열기에 휩싸인다. 사크틸라도 마찬가지였다.
거리의 사람들은 모두 가면을 썼다. 프란세스크도 간단한 가면을 사 얼굴을 가렸다. 가면을 쓰자 시야가 좁아지면서 약한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지나가는 말을 보지 못해 부딪칠 뻔하기도 했다.
‘아직 정상은 아니군.’
너무 오래 놀지는 말아야겠다. 맥주라도 마실 생각에 노점으로 향하던 프란세스크의 눈에 익숙한 두 여성이 보였다. 레이테와 카테리나였다.?#133
레이테와 카테리나 모두 가면을 썼다. 하지만 프란세스크가 그들을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았다. 레이테의 은발 때문이다. 레이테는 얼굴만 가렸지 머리카락은 가리지 않았다.
“아니, 사크틸라에 여왕 폐하 말고 또 은발인 사람이 있었다니!”
“여왕 폐하보다 미인이십니다, 부인.”
지나가는 사람들은 레이테에게 농담을 던졌다.
“고마워요. 여왕 폐하보다 제가 더 낫다니 굉장히 신나는걸요?”
레이테가 능청스럽게 답했다. 프란세스크는 폭소했다.
가면 쓴 은발 여자가 여왕임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가면을 썼으니, 표면적으로는 모른 체한다.
“안녕하십니까. 아름다우신 분들.”
그래서 프란세스크도 모른 체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는 신사분. 걸음걸이가 조금 불편해 보이던데 괜찮으신가요? 오늘같이 거리에 사람이 많은 날에는 다칠 수도 있어요. 내가 당신의 주치의라면 외출을 금지했을 텐데.”
레이테는 방긋 웃으면서도 제법 날카로운 말을 했다.
“부인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돌려드리겠습니다. 두 분께서만 외출해도 괜찮습니까?”
프란세스크는 짐짓 걱정스러운 척했다. 그렇지만 그는 이미 주변에 숨은 여왕의 기사 여럿의 기척을 눈치챈 상태였다.
“괜찮아요. 나를 혼낼 사람은 없거든요. 하지만 당신은 꽤 혼이 날 것 같네요.”
레이테의 옆에 선 카테리나가 심상치 않은 눈빛으로 오빠를 노려보고 있었다. 왕궁으로 돌아가면 그를 가만두지 않을 기세다.
“혼이 날 때는 나더라도, 이왕 밖에 나왔으니 맥주 한잔 어떠십니까?”
카테리나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프란세스크는 어깨를 으쓱이고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세 사람은 강가가 보이는 노점에 자리를 잡았다. 술을 마시던 사람들도 레이테에게 유쾌한 말을 한마디씩 했다.
프란세스크는 그 모습을 신기해하며 지켜보았다.
“폐하께서도 사육제를 즐기러 나오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카테리나가 워낙 축제 구경을 하고 싶어 하길래 나와 봤어요.”
아마 카테리나는 여왕이 외출하기를 바라며 일부러 그렇게 행동했을 것이다. 며칠 전, 카테리나는 오빠에게 여왕이 너무 집무실에 틀어박혀 일만 하는 게 걱정이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사크틸라 사람들도 해학이 뭔지 잘 알더군요. 제 고향에 알려진 사크틸라인에 대한 인상은 엄숙한 광신도 아니면 잘난체하는 가난뱅이…… 뭐 그런 쪽인데. 돌아가면 그게 얼마나 잘못된 편견인지 꼭 알려야겠습니다.”
프란세스크의 말에 레이테가 키득키득 웃었다. 사육제가 끝나면, 프란세스크는 동생과 함께 사크틸라를 떠나 바르시나로 간다.
“떠날 준비는 잘 하고 있나요?”
“예. 폐하께서 선물을 너무 많이 주셔서 가져갈 일이 걱정입니다.”
“그래도 빠짐없이 다 챙겨가세요.”
“물론입니다. 특히 그림은 각별히 주의해서 운반하겠습니다.”
“고마워요.”
레이테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아라고 앞바다는 대포를 실은 군함으로 가득했다. 해적 소탕을 위해 바르시나에서 대대적으로 꾸린 선단이었다.
사람들은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돌아온 함대에 열광했다. 아라고에서 겨울을 보내는 왕도 항구에 나와 있었다.
호화롭게 꾸민 왕좌에 앉은 에르난은 오랜만에 무척 밝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과거에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했던 일을 비로소 끝냈다. 바르시나의 상선은 당분간 평화롭게 바다를 오갈 수 있을 것이다.
원정의 승리는 오랜 바람의 실현뿐만 아니라, 전술 실험도 성공적이었음을 의미했다. 모든 함선에 신식 대포를 배치했고, 전투 병력의 대다수를 총병으로 구성했다.
총병의 육성은 기본적으로 육지에서의 전투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러나 바르시나의 주 전력은 역시 해군이다. 에르난은 몇 가지를 실험하고자 군사들을 배에 태워 보냈다.
그 실험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는 오후 늦게 열릴 회의에서 전부 보고받을 것이다. 지금은 머리 아픈 생각보다 승리를 즐기는 쪽이 더 중요했다.
왕이 포로로 잡히기까지 했던 치욕스러운 패배 이후, 바르시나가 오랜만에 맞는 승리이므로.
정박한 함선들은 일제히 바르시나의 깃발을 올렸다. 바람에 힘차게 펄럭이는 깃발들의 모습은 장관이었다.
그런데 빨갛고 노란 줄무늬 깃발 틈에, 홀로 다른 깃발을 올린 배가 있었다. 배를 발견한 사람들이 외쳤다.
“어, 저게 뭐지?”
뻔뻔할 만큼 화려하게 장식한 바르시나와 사크틸라 국왕 부부의 문장이 그려진 깃발이었다. 낯설게 생긴 상선이 그것을 펄럭이며 항구로 다가왔다.
에르난은 처음 보는 배였다. 하지만 그는 흥분에 사로잡혔다.
‘사크틸라에서 온 거야!’
낯선 배에서 내린 사람을 본 순간, 에르난은 왕좌에서 벌떡 일어나 뛰쳐나갔다.
“세스크!”
에르난은 거의 덮치다시피 하는 모양새로 프란세스크를 덥석 안았다. 프란세스크가 몸을 휘청거리며 뒤로 몇 걸음 걸어야 할 정도였다.
“드디어 돌아왔어! 친구여!”
“윽, 폐하. 에르난……! 조금만 덜 격하게 환영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문자 그대로 죽을 것 같…….”
고문의 후유증인지, 프란세스크는 조금만 몸을 압박당해도 숨쉬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는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라고에 군함이 이렇게 많은 건 오랜만에 봅니다. 무슨 일인지요? 기분 좋은 일이라는 건 알겠습니다.”
“맞아. 멋지게 승리하고 돌아왔거든. 그리고 자네도 왔지! 겹경사야.”
에르난의 말대로, 경사가 겹친 아라고 왕궁의 밤은 기쁨으로 터져나갈 것 같았다.
왕은 자신의 옆자리에 친구를 앉혔다. 그는 옛 제국의 황제가 썼을 법한 크고 호화로운 잔에 술을 가득 따라 프란세스크에게 건넸다.
프란세스크는 잔을 한참 감상하다 술을 마셨다.
“제가 바르시나를 오래 떠나 있긴 했나 봅니다. 이런 골동품이 어색하다니……. 사크틸라에서도 부족할 것 없이 대접받았고, 심지어 사육제까지 즐기고 왔는데 말입니다.”
프란세스크는 정말로 얼떨떨했다. 만찬회장은 눈이 어지러울 만큼 요란하게 꾸며져 있었고, 귀가 아플 만큼 소란스러웠다. 상황이 상황인 지라 모두 평소보다 흥분해 있다. 그렇다 해도 굉장했다.
“사크틸라에도 사육제가 있습니까? 놀랍군요.”
코른 후작이 물었다. 그의 얼굴에는 비웃음 비슷한 것이 떠올라 있었다.
“사크틸라도 사람 사는 동네지요. 놀기 좋아하는 건 똑같습니다. 설마 후작께서는 그 사람들이 일 년 내내 기도만 하는 줄 아셨습니까?”
사크틸라인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겠다. 프란세스크는 여왕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반쯤 장난삼아 한 말이었다.
‘하지만 조금 진지하게 그 문제를 생각해 봐야 할지도 모르겠어.’
무엇이 틀렸는지도 모른 채 아무렇지도 않게 튀어나오는 조롱은 서로의 거리를 더 멀게 할 뿐이다.
* * *
연회장 분위기가 워낙 좋아서, 에르난은 자신이 아예 이곳에서 아침을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래도 좋았다.
술기운 탓인지 시간이 늦은 탓인지, 에르난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를 깨운 이는 프란세스크였다.
“폐하, 침실로 가셔야지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뭘 안내할 것까지야……. 괜찮네.”
“안 괜찮습니다.”
에르난은 프란세스크에게 이끌려 침실로 이동했다.
내키지 않는 걸음이었다. 특히 오늘처럼 기분 좋은 일이 많은 하루에 찬물을 끼얹어 마무리하고 싶지 않았다.
에르난은 마지못해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몇 걸음 걷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세상에…….”
방에는 레이테의 초상화 두 점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하나는 결혼 전 받았던 그림이다. 에르난은 꽤 오랜 시간 동안 그 그림만 보면서 아내와의 만남을 기다렸다.
다른 하나는 처음 보는 그림이었다. 머리를 짧게 자른 아내의 모습이었다.
과거 그림과 비교해 보니, 레이테는 머리 모양만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눈매가 훨씬 날카로워졌으며, 웃는 표정 또한 마냥 부드럽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훨씬 자연스럽고 생기가 넘친다. 아름다움이야 여전하고.
잠시 망설이던 에르난은 그림 앞으로 다가가 손을 뻗었다. 까끌까끌한 캔버스, 현실의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여왕께서는 제게 이런저런 선물을 주셨습니다. 사실상 이 그림의 운반에 대한 대가라고 봐야겠지요. 사크틸라에서 한 달 동안 머물렀던 이유는 치료와 회의뿐만 아니라 초상화 제작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랬군……. 무사히 가져와 줘서 고맙네.”
“그림으로라도 아내를 만나니 기분 좋으시지요?”
좋다. 동시에 서글프다. 에르난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 전에는 여왕의 초상화를 침실에 두고 자주 보셨잖습니까. 새 초상화도 그렇게 하시지요. 제발 침실에서 주무시라는 소리입니다.”
“……뭔가 들은 말이 있나 보군.”
“예. 시종장과 잠깐 이야기를 나눴는데, 폐하를 좀 어떻게 해 달라고 애원을 하더군요. 잠을 제대로 안 주무신다고. 옛날처럼 그림 보고 잠들었다가 일어나서 그림 보십시오.”
프란세스크는 에르난의 어깨를 토닥이고 침실 밖으로 나갔다. 방에는 에르난 혼자 남았다. 에르난은 의자를 가져와 그림 앞에 놓고 앉았다.
“레이테.”
에르난은 멍하니 그림을 바라보며 아내를 불렀다. 그림을 바라보는 검은 눈이 서서히 요동쳤다.
* * *
새벽의 파루 항구는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원래 파루는 이렇게까지 적막한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최근 사크틸라와 바르시나 모두 해상 감시를 철통같이 하는 바람에, 헤젤의 배가 바다를 오가기 무척 힘들어졌다. 아예 운항을 포기하는 경우도 부쩍 늘었다.
인적이 드문 그곳에, 한 남자가 슬그머니 나타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새벽 공기가 꽤 차가웠으나, 그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가득했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어느 배로 향했다. 선원의 도움을 받아 배에 올라탄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후우…….”
긴장이 풀리자, 다리가 후들거리며 몸이 휘청거렸다. 선원이 그를 부축해 주었다.
“고맙네. 그런데 조금 살살 잡아 주면 안 되나? 조금 아프군.”
그러나 선원은 남자를 더 꽉 붙잡았다. 수상함을 느낀 남자는 고개를 휙 돌려 주변을 살폈다. 그 순간, 사방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뭐, 뭐야!”
나타난 사람들이 남자를 포위했다. 남자가 도망치기 위해 몸부림쳤으나 선원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끼이익. 선장실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밖으로 나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사촌.”
“브, 브라간사 공작…….”
남자가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헤젤의 왕위를 계승하실 분께서, 몰래 어디를 가십니까?”
“계, 계승이고 뭐고 나는 모르는 일이야! 그냥 보내줘! 헤젤을 떠나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죽은 듯이 살겠다!”
남자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브라간사는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국왕 폐하께서 위독하시니 다음 왕위에 앉아 왕국의 혼란을 바로잡으실 분이 필요합니다.”
“몰라! 나는 내가 왕위 계승권을 가질 정도의 혈통인 줄도 몰랐어! 공작, 당신도 몰랐지 않았나. 그냥 나를 없는 사람으로 여기면 안 되나?”
“불가능합니다. 제가 눈감는다 해도 당신의 계승권은 사라지지 않으니까요. 어차피 다른 귀족들도 당신을 찾느라 바쁩니다. 그러니 제가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아, 안 돼…….”
병사들은 남자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브라간사의 ‘보호’ 아래 처하게 될 운명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숨만 쉴 뿐 시체나 다름없는 삶을 강요받다가, 가장 끔찍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남자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몸을 덜덜 떨던 그의 눈에, 브라간사가 허리에 찬 검이 보였다. 남자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장검이 아니라 허리띠에 살짝 걸쳐놓은 단검이었다.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병사들을 뿌리치고 브라간사에게 달려들었다.
남자는 브라간사의 단검을 뽑아 들었다. 당황한 브라간사는 황급히 자신의 망토를 끌어당겨 몸을 방어하려 했다.
쓸모없는 움직임이었다. 남자의 목적은 브라간사를 향한 공격이 아니었으니까.
남자는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은 채, 자신의 배에 단검을 쑤셔 넣었다.
“잠깐! 지금 무슨 짓이야!”
브라간사가 경악하여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그는 황급히 남자의 배에서 단검을 뽑아내고 상처 부위를 옷으로 틀어막았다.
그러나 남자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렸으며, 피는 멈추지 않고 흘러나왔다.
“젠장! 당장 이놈을 살려내! 살려내란 말이야!”
브라간사의 처절한 외침은 남자가 얼마나 성공적으로 자신을 찔렀는지 증명하는 것과도 같았다.
흐릿해진 눈앞에 자신을 닮은 아기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윽고 남자는 완전히 눈을 감았다.?#134
넓은 회의실에 있는 사람은 브라간사뿐이었다. 그는 탁자에 팔꿈치를 괴고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의 앞에는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죽은 남자의 품에서 나온 편지였다.
자신은 헤젤의 왕위 계승자이며, 생명의 위협을 느껴 사크틸라로 망명하고 싶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편지의 수신인은 사크틸라와 바르시나의 여왕 레이테다.
헤젤에서 발송하면 가로채일 위험이 있으니, 사크틸라에 도착하면 보낼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는 분명히 사크틸라로 도망치려 했다. 그가 탄 배는 사크틸라로 향하는 배였다.
브라간사는 이미 1년 전, 비슷한 수법에 당한 경험이 있었다. 레이테와 에르난을 눈앞에서 놓치지 않았나. 또 당할 생각은 없었다.
철저하게 항구를 오가는 배를 감시한 결과, 몇 달 동안 브라간사를 골치 아프게 했던 왕위 계승자를 드디어 확보하는가 싶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사태가 터졌다.
‘자살이라니!’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점점 가까워져 왔다. 회의실 문이 벌컥 열렸다.
“브라간사 공! 왕위 계승자를 살해하다니 무슨 짓이오!”
귀족들이 우르르 회의실로 들어왔다. 한동안 왕궁에 그림자도 비추지 않던 원로 귀족들이었다.
브라간사는 주먹으로 탁자를 쾅 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살해라니! 그는 내 앞에서 자살했습니다! 나는 그를 살리려 최선을 다했고요!”
“그가 왜 죽음을 택했겠소? 누구 때문인데! 그게 살해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오!”
“……누굽니까?”
“그, 그야……!”
브라간사를 상대하던 귀족은 브라간사의 살기등등한 기세에 말을 더듬었다. 브라간사는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기세로 귀족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누군지 아시는 모양인데, 왜 말을 못 하시는지?”
“…….”
회의실에 들어온 귀족들은 브라간사를 적대하면서도 두려워했다. 그들은 브라간사에게 정면으로 맞서다가 자신들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브라간사에게는 군대가 있다.
‘일을 내 책임으로 몰아서 공세를 펼칠 생각으로 왔겠지.’
전면적으로 브라간사를 적대하지 못한다 해도, 왕궁까지 찾아온 이상 저들은 그냥 돌아가지 않으려 할 것이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돌파해야 한다.
“사크틸라.”
브라간사가 말했다.
“이 편지를 보십시오. 그는 헤젤을 버리고 사크틸라로 망명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계획이 발각되자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극단적인 선택을 해 버렸지요. 사크틸라행을 택하지만 않았다면 이런 사태도 없었을 거라는 말입니다.”
“이보시오, 공작. 그가 왜 사크틸라로 망명하려 했겠소. 편지에서도 생명의 위협을…….”
“사크틸라는 ‘또’ 우리의 왕이 될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갔습니다!”
항의를 덮어 버리듯, 브라간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해역을 봉쇄해 헤젤의 상업을 마비시키고, 두 차례나 왕위 계승자를 살해했지요. 사크틸라는 헤젤을 말려 죽이고 있습니다!”
브라간사에게는 어지간한 난관은 밀어내 버릴 방법이 하나 있었다. 다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다.
설령 귀족 다수가 반대한다 해도, 브라간사는 자신이 소유한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전쟁을 밀어붙일 수 있다. 최소한의 명분과 적당한 논리만 있으면 된다.
그로서도 이 방법은 되도록 쓰고 싶지 않았다. 지나치게 번거롭고 위험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지만.
“왕실의 일원으로서, 나는 헤젤을 무너뜨리려 하는 사크틸라를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습니다. 사크틸라는 자신들이 저지른 짓에 대한 죗값을 치러야 할 거요!”
사크틸라 여왕과 같은 색을 가진 눈이 음산하게 번뜩였다.
* * *
헤젤이 사크틸라를 다시 침공하기로 했다는 소식은 정보원이 애써 캘 필요조차 없었다. 브라간사가 대놓고 포고문을 발표했기 때문이었다.
중한 일이다 보니, 헤젤에서 일하는 정보원이 직접 사정을 설명하고자 사크틸라에 돌아왔다. 레이테는 긴급히 회의를 소집했다. 그녀는 먼저 포고문을 받아 읽었다.
엔히크 왕자를 잃은 지 겨우 2년이 지난 지금, 사크틸라는 또다시 헤젤의 왕위 계승자를 죽게 했다. 국경은 폐쇄되고 바다는 막히면서, 돈과 물자의 흐름이 완전히 멈춰 버렸다. 심지어 우리의 생명줄, 테주 강까지 막아 버린다는 소문이 돈다.
국왕 폐하께서 위독하시어 왕국이 불안한 틈을 타 사크틸라의 그 여자는 헤젤을 자기 손아귀에 넣기 위해 가장 비열한 방법을 쓰고 있다. 헤젤의 백성을 굶겨 죽이고, 이 땅을 황폐화시키려 한다.
우리의 삶을 지키기 위해, 평화를 위해 모든 헤젤인은 칼을 들고 투쟁해야 할 것이다.
“여왕도 아니고 그 여자…….”
레이테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만 연거푸 반복했다.
브라간사는 작정하고 헤젤인을 선동하고 있다. 정말로 침략을 걱정해야 할 쪽은 사크틸라이건만, 교묘하게 잘도 사실을 왜곡했다.
죽었다는 왕족은 사크틸라로 망명하려 했다. 하지만 레이테는 편지를 받지도 못했으며, 그런 왕족의 존재도 몰랐다. 편지 자체도 도움 요청뿐인 내용이었다. 이것을 가지고 억지를 부리는 브라간사가 대단할 정도다.
게다가 경제 질서를 어지럽힌 쪽은 헤젤이다. 사크틸라는 질서를 되살리기 위해 규제를 택했다. 헤젤도 규칙을 정해 체계적인 상업 활동을 하면 된다. 하지만 당국에서는 제도를 정비해 상인들을 관리하는 대신, 모조리 사크틸라 탓으로 돌리는 길을 택했다.
가장 기가 막힌 내용은 강을 막는다는 소문이다.
“강을 막아? 지류가 몇 개인데 말이 되는 소리인가? 지도만 봐도 불가능한 것이 뻔한 이야기인데, 대체 왜 이런 소문이…….”
“헤젤인들은 테주 강이라고 부르는 타호 강은 사크틸라를 지나 헤젤로 흐르잖습니까. 그러다 보니 상류에서 강을 막는다는 이야기가 퍼져 있습니다. 소문의 근원을 알아보니, 지난 사크틸라 침공 때 참전한 병사들에게서 나온 이야기였습니다.”
정보원이 답했다. 사크틸라에 왔던 군인이라면 브라간사 휘하다.
“헤젤 귀족들은 필사적으로 반대한다지만, 결국 브라간사는 자기 뜻대로 할 겁니다. 침공은 시간문제지요.”
아르파가 말했다. 그는 북부에 있는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지 않고, 보수공사를 마친 오누바 근처 요새의 사령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포고문까지 발표하며 일방적으로 사크틸라 탓을 하지만, 정작 사크틸라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의도가 참 뻔한걸.”
레이테는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사크틸라와 대화를 하다가 그 단계에서 문제가 해결되면 브라간사는 곤란해진다. 그의 목적은 전쟁 그 자체일 테니.
“브라간사가 대화할 마음이 없다 해도, 일단 사크틸라는 꾸준히 그와의 협상을 시도해야 합니다.”
팀파노의 말에 레이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이 터져서 좋을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브라간사는 전쟁을 원한다. 사크틸라는 그를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 2년 전 패배의 상흔이 아직도 사크틸라 곳곳에 남아 있다.
“굳이 상업 문제를 걸고 넘어서니, 그 문제를 집중적으로 협상하는 편이 좋겠지.
당장 협상단을 꾸려 헤젤로 파견하겠네. 팀파노 후작, 공을 대표로 임명하지.”
“예, 폐하.”
“그리고 남서부 국경지대 전역의 방위를 강화하시오. 특히 지난 전쟁 때 헤젤에게 사실상 이용당한 오누바를 주의해야 하네. 헤젤과 가까운 위치에 있는 데다, 브라간사가 말하는 해상 봉쇄는 오누바의 통제 강화에 따른 일이지 않나. 이곳을 칠 가능성이 높아.”
레이테는 차근차근 지시를 내렸다.
* * *
팀파노는 하던 일을 다른 이에게 넘기고 곧바로 헤젤로 떠났다. 브라간사는 협상단의 방문 자체가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팀파노가 무슨 말을 해도 입을 꽉 다물고 대충 들어 넘기기 마련이었다.
브라간사가 일부러 그런 태도를 보인다는 것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화가 난 사크틸라 사절이 사고라도 치면, 전쟁의 명분을 강화하는 핑곗거리가 될 것이다.
팀파노는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브라간사에게 질려 버렸다.
‘차라리 브라간사를 반대하는 귀족들과 연계해 브라간사를 죽일까…….’
팀파노는 이를 제안하는 편지를 여왕에게 보내고 싶어 손이 근질거렸다. 교착 상태를 벗어날 방안을 궁리하다 떠오른 것이지만, 팀파노는 진심으로 그것이 끌렸다.
동생을 죽인 진짜 원수는 프란세스크도 에르난도 아닌 브라간사 공작이니까.
그래도 그는 참아야 했다. 여왕의 명령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지금 브라간사가 죽으면 헤젤 정국은 혼란에 빠진다. 사크틸라에 어떤 식으로 불똥이 튈지 예측조차 할 수 없게 된다.
결국 팀파노는 참고 또 참으며 브라간사를 대화로 이끌어내고자 기를 썼다.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여왕 폐하께서는 회담을 개최하여 두 나라 상업의 상생 방안을 논의하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공께서 승낙만 하면 됩니다.”
“좋은 방법입니다만, 실효성이 없습니다.”
회담 제안을 열 번쯤 했을 때였다. 브라간사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실효성이 없다니요? 여왕께서 직접 회담을 주재하실 겁니다.”
“바르시나.”
“예?”
“사크틸라가 아무리 헤젤과 공조하려 해도, 더 동쪽에 있는 바르시나가 길을 틀어막으면 무용지물입니다. 그런데 바르시나는 헤젤과 타협할 마음이 조금도 없어 보이는군요. 얼마 전, 바르시나는 해적 소탕이랍시고 많지도 않은 헤젤 선박을 모조리 공격해 침몰시켰습니다.”
“…….”
팀파노도 그 일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사크틸라를 향해 부리는 억지와 달리, 바르시나와의 문제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이것이 사크틸라의 제안을 어떻게 거절할지 한참 고민하던 브라간사가 내놓은 답이었다. 팀파노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 * *
브라간사는 왕의 거처로 향하는 긴 계단을 올랐다. 그는 방금 전 마친 면담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 있었다.
‘겨우 한숨 돌리는군.’
머리를 쥐어짜다시피 해서 겨우 만들어낸 핑계는 바르시나였다. 난처해 하는 팀파노 후작의 얼굴을 보며, 브라간사는 자신의 대처가 간신히 성공했음을 깨달았다.
바르시나는 정말로 핑계일 뿐이었다. 당분간은 아예 바르시나와 엮이지 않는 편이 좋다.
브라간사는 바르시나의 공격에 대응할 여력이 없었다. 바르시나는 너무 멀었고, 바다 위에서 헤젤은 약자였다.
따라서 팀파노에게 바르시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썩 좋은 수는 아니었다. 자칫하면 사크틸라와 바르시나가 다시 손을 잡을지도 모른다. 이는 헤젤에 분명한 악재다.
하지만 설령 그렇게 된다 해도 브라간사에게는 눈앞의 위기 모면이 우선이었다. 사람들의 관심사를 전쟁으로 돌리고, 승리를 통해 정계를 완전히 장악하고 권력을 공고히 다져야 한다.
사크틸라와 바르시나가 다시 연합한다 한들 당장 헤젤을 침공할 일도 없다. 자기들끼리의 관계를 조율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테니.
불안요소라면 에르난의 원군 파병이다. 그는 군대 양성에 바쁘다는 모양이다.
그래도 파병은 어지간해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바르시나는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다. 그 같은 수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군사 행동을 신중히 할 것이다.
“허.”
자신이 생각하고도 우스웠다. 지나치게 낙관적이지 않나. 현실은 마땅한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서 체제 안정을 위해 택하는 고육책에 더 가깝다.
거기에 헤젤이라는 나라의 운명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왕이라면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아야 하겠지.’
대체 자신은 무엇을 위해 이 지경까지 왔나?
브라간사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눈앞의 골칫거리를 해결하기에도 바쁜데 그런 것까지 생각할 여유는 없다.
무엇보다, 그 문제를 깊게 고민했을 때 마주하게 될 답이 두려웠다.
“들어가십시오.”
브라간사는 더 이상 생각하기를 관두고, 벨류 왕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오랜만에 왕을 만나러 왔다.
“폐하, 잘 지내셨습니까?”
“…….”
벨류의 답은 없었다. 왕은 브라간사에게 답할 마음이 없겠지만, 그럴 기력조차 없다. 그는 오늘 밤 세상을 떠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몰골이었다.
“헤젤의 영광을 위해, 사크틸라 원정을 떠날 겁니다. 그런데 군대의 국외 파병에는 왕의 서명이 필요하잖습니까.”
브라간사는 가져온 서류를 벨류의 앞에 놓았다.
“팔을 움직이기 힘드실 테니 제가 돕겠습니다.”
브라간사는 잉크를 가득 묻힌 펜을 벨류의 손에 살며시 쥐여 주었다.
벨류는 얌전히 펜을 받아드는 것 같다가, 갑자기 팔을 휙 들고 브라간사를 향해 펜을 던져 버렸다.
“……아직 기력이 좋으십니다, 폐하.”
브라간사는 벨류를 노려보았다가 자신의 옷을 확인했다. 옅은 회색조의 옷에 검은 잉크가 너저분하게 튀어 있었다.
“이런 데에 힘 낭비하지 마십시오.”
브라간사는 왕의 손에 다시 펜을 쥐여 주었다. 이번에는 벨류가 멋대로 굴지 못하도록, 그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리고 억지로 왕의 손을 움직여 서명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브라간사는 서류를 뺏어 나가 버렸다.?#135
전쟁을 막기 위해 팀파노 등을 헤젤로 보냈지만, 그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레이테도 움직여야 했다.
2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여왕은 여름 내내 쉬지 못하고 전쟁 대비를 위해 바쁘게 일했다.
지금은 그때와 큰 차이가 하나 있다. 남편이 없다는 점이다.
“조금 더 높이 걸어 주세요. 폐하, 이만하면 될까요?”
여왕의 처소 단장에 바쁜 시종들은 카테리나의 지시에 따라 그림을 벽에 걸었다. 에르난의 초상화였다.
위엄 넘치는 몸짓과 자신만만한 표정에서는 지난날 패전의 흔적을 전혀 읽을 수 없었다. 갑옷 위에 붉은 외투를 덧입은 차림새는 바르시나 취향의 화려함 대신 절도가 느껴졌다.
배경의 소품 중에서도 무기가 눈에 띄었다. 벽 한쪽에 기대진 화승총이었다. 바르시나가 국왕의 주도하에 총병 양성에 열심이라는 사실은 사크틸라에도 전해져 있다.
에르난이 어떤 각오로 바르시나에서 지내는지, 그림 한 장으로 완벽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림 속 남편은 군인의 모습이다.
대다수 귀족들은 부부가 결국 이혼하리라 믿었기에, 에르난의 초상화를 영 못마땅하게 여겼다. 하지만 대놓고 반발하는 사람은 없었다. 눈앞에 닥친 전쟁에 비하면 그런 문제는 사소한 일이었다.
레이테는 이 그림을 이스팔리스를 떠나기 직전에 받았다.
남편과 떨어져 지낸 지도 일 년 반이 더 지났다. 에르난의 모습은 레이테의 기억과 별 차이가 없었다. 마치 어제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익숙하던 모습 그대로다.
그림을 가져온 세르지의 말에 따르면, 에르난은 잠시 수염을 기르기도 했다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림으로 그렸더니 영 이상해 보여서, 도로 밀어 버렸다고 한다.
“수염이 하루 이틀 만에 멋있는 모양이 나오는 것도 아니건만, 폐하는 참을성이 너무 없습니다……라고 리세우 공이 말했는데, 여왕 폐하께 꼭 이 말을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레이테와 함께 세르지의 이야기를 듣던 카테리나가 한숨을 푹 쉬었다.
“……세스크, 대체 왜 그런 바보 같은 이야기를…….”
세르지도 카테리나도 프란세스크와 함께 바르시나에 갔지만, 카테리나는 금방 사크틸라로 돌아와 레이테의 곁을 지켰다. 그러나 세르지는 두 나라를 계속 오가며 이런저런 연락을 담당했다.
“아니.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들어서 좋은걸요.”
레이테는 피식 웃으며 다시 그림을 보았다. 그림에는 수염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에르난은 그림과 함께 편지도 보내왔다. 일상적이지만 따스한 이야기와 함께,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곳저곳 다니며 일하느라 바쁘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초상화는 운반하기 용이하도록 너무 크지 않게 제작했습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꼭 함께해 주십시오.
그래서 레이테는 오누바에 오면서 그림을 챙겼다. 헤젤과의 일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여왕의 궁정은 이스팔리스에서 오누바로 이동했다.
귀족들은 여왕의 오누바행을 말리려고 애썼다. 레이테의 안전 때문이었다.
“헤젤은 오누바부터 노릴 것이 뻔합니다. 그들에게 가장 익숙한 곳인 데다 점령했을 때의 이득도 높으니까요. 오누바는 농성을 대비해야 합니다. 폐하께서 계시기에 위험합니다.”
“선두에서 직접 군대를 지휘하는 왕도 많은데, 내가 이 정도도 못 한다면 말이 안 되지 않나? 내 안전이라면 경들에게 맡기겠어.”
레이테는 물러서지 않았다.
군대를 지휘하는 왕은 정말로 많았다. 레이테의 아버지가 그랬고, 다른 왕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레이테의 머릿속에 떠오른 왕이라면 역시 남편이다.
에르난처럼 직접 전투에 참여할 수는 없더라도, 레이테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싶었다.
단장된 처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여왕은 주요 지휘관들과 함께 오누바 곳곳을 둘러보았다.
도시는 전쟁 준비에 한창이었다. 레이테는 각종 현황을 보고받고 병사와 시민들을 격려했다.
시가지와 성벽을 살핀 다음,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항구였다.
“헤젤은 분명히 바다 쪽에서도 오누바를 노릴 것입니다. 하지만 그를 막겠다고 항구를 완전히 봉쇄한다면 오누바 사람들에게는 그만 살라는 소리가 됩니다. 극단적인 위기에 처하지 않는 한, 이곳에는 배가 오가야 합니다.”
헤젤에서 돌아온 팀파노는 오누바 항구를 관리하고 있었다.
“그러면 해역 감시를 철저히 해야겠군. 헤젤에게 뚫리지 않도록.”
“예. 실은 그 문제로 폐하께 드릴 제안이 있습니다.”
팀파노는 무척 긴장한 얼굴이었다. 레이테가 고개를 끄덕이자, 팀파노는 심호흡을 한 다음 말했다.
“열심히 대비 중입니다만, 사크틸라의 해상 전력으로는 불안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니 바르시나의 도움을 받으면 어떻겠습니까?”
“어……?”
“병력 지원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크틸라 상선의 대다수가 해군에 동원될 테니, 사크틸라의 자체적인 수송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를 보충하기 위해 바르시나와 거래를 하는 겁니다.”
레이테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방금 이야기를 한 사람이 팀파노가 맞나? 여왕을 수행하던 귀족들도 모두 놀라 입을 떡 벌렸다.
“브라간사는 폐하의 대화 요청을 거부하면서 그 이유가 바르시나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대화할 마음이 없으니 둘러댄 핑계라고 볼 수 있으나, 완전히 거짓도 아니겠지요. 브라간사가 사크틸라 원정에 성공한다면, 그다음은 바르시나를 노릴 겁니다. 헤젤의 활로를 찾기 위해서든, 또다시 전쟁을 수단 삼아 자신의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서든요.”
팀파노의 말은 모두 옳다. 사크틸라가 잘못되면 바르시나도 위기에 빠진다는 논리는 에르난의 생각이기도 했다.
“그 점을 내세워 바르시나에게 저렴하게 물자를 공급받도록 협상하자는 뜻인가?”
“예. 물론 사크틸라와 바르시나가 현재 어떤 관계인지는 압니다. 그렇지만 합리적으로, 필요한 부분에서는 손을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구보다 바르시나를 증오했던 팀파노가 지금은 바르시나와 협력하자고 말한다.
희망이 보인다.
“좋아.”
레이테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바르시나 왕실은 보통 겨울을 아라고에서 보내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올해는 달랐다. 왕은 이미 여름부터 아라고에서 지내고 있었다. 국왕의 주도 하에 육성하는 군대가 아라고 근처에 주둔하기 때문이다.
에르난은 시내의 왕궁과 외곽의 병영을 바쁘게 오갔다. 무더위에 시달리느라 모든 일을 때려치우고 싶을 때도 많았다. 그래도 직접 훈련하는 병사들에 비하면 덜 힘든 것이라 생각하며 겨우겨우 버티고 있었다.
대규모 훈련을 참관하고 아라고로 돌아온 에르난을 기다리는 반가운 손님이 있었다. 대륙에서 오랜만에 돌아온 콜롬보였다.
“여름에 아라고 쪽에서 지내는 건 못 할 짓이네. 죽을 맛이야. 바닷가에서 휴가라도 즐기는 게 아니라면 다시는 여름에 오지 않겠어.”
에르난은 유리 그릇에 놓인 얼음 하나를 집어 입 안에 넣었다. 혀로 얼음을 데굴데굴 굴리며 시원함을 즐기다가 얼음이 어느 정도 녹자 아예 오독오독 씹었다.
“말씀은 당장이라도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처럼 하십니다만……,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요?”
콜롬보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에르난은 죽어가는 소리를 하며, 얼음을 먹느라 입을 오물오물하고 있다. 하지만 얼굴 아래의 몸은 대단히 절도 있는 자세로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날 선 긴장감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그가 얼마나 진지하게 군대 일에 몰두했는지 느껴질 정도였다.
“무더위로는 사크틸라 남부가 더하다던데요. 폐하께서는 지난 전쟁 때 여름 내내 그곳을 돌며 모병을 하셨다 들었습니다만?”
“아, 그랬네. 객관적으로 느끼기에도 그곳이 훨씬 덥긴 했어. 하지만 그때는 레이테가 있었잖아. 레이테…….”
아내의 이름을 읊으며, 에르난은 얼음을 하나 더 입에 넣었다.
“부부가 함께 지내는 것이 더위 극복에 무슨 도움을 줍니까?”
“모든 면에서 그냥 다 좋아.”
“예, 예에…….”
콜롬보는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며, 에르난은 자신의 얼굴이 꽤 굳어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유쾌하게 대꾸한다고 했건만 표정을 감추지 못한 것이다.
아내와 떨어져 지낸 지 일 년 반이 넘었다. 서글픈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감정을 흘릴 만큼 에르난은 여유롭지 않았다. 그는 두 번째 얼음을 빠르게 해치우고, 콜롬보의 반응을 못 본 것처럼 밝은 어투로 말했다.
“장사가 천직인 것 같은데, 모험같이 불확실한 일 말고 이대로 이 바닥에 뼈를 묻는 건 어떤가? 자네가 그럴 마음만 있다면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네.”
“싫습니다. 장사 할 생각이었으면 그냥 집을 안 떠나고 아버지 일을 물려받았겠지요.”
‘쳇. 안 통하는군.’
콜롬보는 바르시나 왕실과 계약하여 총기 공급을 담당하고 있었다. 장사 수완이 워낙 뛰어나, 바르시나에서도 대륙에서도 그의 평판은 무척 좋았다.
탐험 같은 일에 레이테의 돈이 버려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은 여전하다. 그럴 돈이 있다면, 차라리 수도원을 하나 짓는 편이 낫겠다. 에르난에게는 쓸모없어도, 레이테에게는 보람찬 지출일 것이다.
물론 콜롬보의 재능이 아까운 부분도 분명히 있었다. 그는 에르난의 기대 이상으로 일을 잘하고 있다.
“왕궁으로 오는 길에 페레트 경을 만났습니다. 훈련을 처음 시작할 때보다 장전 속도가 두 배가량 빨라졌다고 한껏 자랑을 하더군요. 폐하께서 무척 신경 써 주신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국왕 직속으로 새로 만든 군대의 관리는 페레트가 맡고 있다. 총병을 중심으로 창병과 기병 등이 더해지는 구성이다 보니, 페레트는 콜롬보와도 꽤 친한 관계가 되어 있었다.
“두 배라니. 대륙 본토에도 그 정도로 속도를 낼 수 있는 군대는 없을 겁니다. 대륙에서 제가 보았던 총병은…….”
콜롬보가 이야기를 막 하려던 찰나였다. 왕의 비서가 들어와 말했다.
“폐하. 사크틸라에서 사절이 왔습니다.”
“사크틸라?”
에르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콜롬보. 다른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지.”
에르난은 빠른 걸음으로 알현실로 향했다. 정말로 사크틸라인들이 와 있었다.
바르시나와 사크틸라는 동맹만 잠정적으로 해체되었을 뿐, 국교 자체를 단절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분위기상, 두 나라가 이전처럼 가깝게 교류하기는 힘들었다.
간혹 사크틸라에 연락할 일이 생기면, 에르난은 세르지에게 그것을 맡겼다. 그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꾸준히 바르시나와 사크틸라를 오가고 있었다.
세르지를 통한 연락은 당연히 비공식적이다. 에르난은 바르시나로 돌아온 이후, 사크틸라 외교관을 상대한 일이 없었다.
사절은 두 명이었고 그중 하나는 에르난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팀파노 후작이었다. 프란세스크가 반가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간결한 인사를 마친 팀파노는 부부의 문장으로 봉인된 문서를 에르난에게 건넸다. 여왕의 친서였다.
나의 남편, 에르난에게
아내는 시원시원한 필체로 빠르게 글을 쓴다. 하지만 별것 아닌 이 부분이 유난히 예쁘게 다듬어진 것을 보며 에르난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부부가 떨어져 살게 되면서, 안부를 묻는 사적인 편지만 몇 번 주고받았다. 사절을 통해 전달받는 공식 문서는 처음이다. 그래서 긴장한 것일까?
하지만 긴장해야 할 부분은 지금부터다. 사절을 파견할 만한 사안이라면 보통 일이 아닐 테니.
첫머리에는 사심이 가득 담겼으나, 본문에는 그런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럴 수 없는 내용이므로. 에르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졌다.
편지를 다 읽은 에르난이 중얼거렸다.
“어느 정도 예측은 했다만 이렇게나 빨리…….”
“바르시나에는 전쟁 소식이 알려지지 않았습니까?”
팀파노가 물었다. 전쟁이라는 말에, 도열한 귀족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후작도 알겠지만, 바르시나에는 헤젤 소식이 좀 늦게 들어오는 편이오.”
에르난은 쓴웃음과 함께 말했다. 그는 잠시 다른 귀족들의 반응을 살폈다. 사크틸라 사절 일행에게 불만의 눈길을 던지는 이가 적지 않았다. 또 전쟁에 바르시나를 휘말려 들게 할 거냐는 식이다.
“이 편지에는 원군 요청 같은 내용이 없소. 헤젤이 사크틸라를 상대로 다시 전쟁을 일으킬 거라는 말과, 브라간사가 헤젤에서 발표했다는 포고문 내용이 전부요.”
“폐하, 저희는 바르시나에 병력을 요청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팀파노도 좋지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재빨리 말했다.
“여왕 폐하께서는 바르시나의 안위를 염려해 저희를 파견했습니다. 브라간사는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바르시나마저 끌어들이려고 합니다.”?
#136
“브라간사가 바르시나를 끌어들인다?”
에르난이 말했다. 바르시나 귀족들도 의아한 눈치였다. 그들은 사크틸라가 바르시나를 전쟁에 끌어들인다고 비판하므로.
“문제의 포고문이 발표된 이후, 저는 브라간사를 회유하기 위해 헤젤에 갔습니다. 여왕께서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브라간사와 직접 만날 의지도 있으십니다. 하지만 브라간사는 그것이 무의미하다고 했습니다. 사크틸라가 헤젤에 유화정책을 취한다 한들, 바르시나는 절대 그러지 않을 테니 헤젤은 여전히 피해를 본다는 것입니다.”
“……뭐?”
“전쟁을 일으키려는 브라간사의 의지는 확고합니다. 명분이 부족하니, 바르시나를 핑계 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와 직접 만난 제가 보았을 때……, 단순한 핑계라며 넘길 말은 아니었습니다. 헤젤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즉, 언젠가 바르시나에게도 칼을 들이대리라는 뜻인가?”
에르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바로 이런 상황을 염려했기에, 왕은 시종일관 사크틸라와의 동맹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지난 전쟁 때, 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헤젤을 상대하러 갔다.
“헤젤은 이미 폐하를 포로로 삼았던 전적이 있습니다.”
“사절이라는 자가 국왕 폐하를 모독하는 거요?”
코른이 버럭 외쳤다. 팀파노는 코른의 반응이 의외라는 듯 놀란 얼굴을 했다. 그가 알기로 코른 일파는 왕과 썩 우호적인 관계가 아니다.
그 모습을 본 에르난은 쓴웃음을 지었다.
코른 같은 자들은 여전히 에르난의 정책에 불만이 많다. 왕의 힘이 비대해지는 것을 경계한다.
하지만 그들도 바르시나인이며 왕을 섬기는 귀족이다. 왕국에 대한 자부심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그 방향이 현재 왕인 에르난과 다소 다를 뿐.
코른은 에르난이 아닌 바르시나 왕에 대한 모독을 항의하는 것이다.
에르난은 손을 살짝 들어 뭔가 더 말하려던 코른을 제지했다.
“후작이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예민하게 그럴 필요 없지 않나. 팀파노, 바르시나까지 온 것은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만은 아닐 듯한데.”
“예. 사크틸라를 도와주십시오.”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리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나서 반발하는 이는 없었다.
브라간사가 바르시나를 적대시한다면 바르시나도 대책을 세워야만 한다.
바르시나 입장에서, 사크틸라는 바르시나와 헤젤 사이에 위치해 방벽 역할을 한다. 방벽에 이상이 생기면 곤란하므로, 그를 막기 위해 바르시나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수도 있다.
이는 지난 전쟁 때 에르난의 주장이기도 했다. 다수의 바르시나인이 왕의 주장을 반대했다. 하지만 지금은 헤젤이 진짜로 바르시나를 걸고넘어지려 하지 않나.
에르난은 씁쓸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자신의 주장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기뻐할 일도 아니었다. 위기가 다가오는 것이므로.
“도움이라……, 그런데 병력 요청은 아니다?”
“예. 사크틸라도 자체적으로 많은 준비를 했고, 일단은 괜찮을 것으로 예측됩니다. 더군다나 바르시나 군의 파병은 양측에 여러 모로 부담이 되겠지요.”
에르난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크틸라에 당장 파병하는 것은 그로서도 내키지 않는 일이다.
바르시나의 군사력은 아직 안정되지 않았다. 귀족들은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파병을 반대할 것이다. 에르난은 아직 바르시나에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물론 자신의 힘으로 브라간사를 무찌른다면 더없이 완벽한 복수가 된다. 패배가 양국의 분열, 그리고 아내와의 이별에도 결정타였던 만큼 브라간사에게 승리하면 그것들을 모두 제자리에 돌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 다시 실패할 수는 없으니까.
“사크틸라는 파병이 아니라 거래를 원합니다.”
“무슨 거래?”
“사크틸라에 필요한 각종 물자 공급을 바르시나 상인에게 맡기고자 합니다. 바르시나의 상인은 이런 분야에 무척 뛰어나지 않습니까?”
의외의 제안이었다. 또한 마다할 이유도 없다.
팀파노는 원조가 아니라 거래라고 말했다. 한 나라를 상대로 하는 대규모의 거래다. 바르시나에는 이득이 되는 일이며, 파병보다 위험도도 낮다.
에르난은 귀족들을 힐끗 살펴보았다. 벌써 머릿속에서 주판이라도 두들기는지, 표정이 싹 바뀐 이들이 보였다. 오래전부터 사크틸라를 상대로 장사를 하던 가문 사람들이다.
그들 중 하나가 팀파노에게 물었다.
“바르시나 상인과 물자를 거래한다는 건, 사크틸라 자체에서의 보급에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까?”
“헤젤은 오누바를 노릴 것으로 예측되며, 사크틸라는 그곳의 사수에 집중하려 합니다. 여왕 폐하의 궁정도 아예 오누바로 이동했고요. 상선은 거의 대부분 해군에 징집될 테니, 수송력이 아무래도 떨어질 것입니다.”
에르난은 팀파노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놀라 되물었다.
“레이테가?”
바르시나에 사절을 파견할 만큼, 사크틸라는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있다. 사크틸라를 지키기 위해, 레이테는 여왕으로서 가장 현명한 선택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걱정이 앞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 * *
바르시나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팀파노는 흡족해하며 돌아갔다. 사크틸라와의 거래 건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에르난은 사크틸라에 판매할 물건의 목록과 가격 등이 적힌 문서를 살폈다. 워낙 양이 많아 한참을 읽어도 끝이 안 난다.
“폐하, 포도주 한잔하시지요. 사크틸라에 보낼 상품이니, 여왕 폐하께서도 같은 걸 드시지 않겠습니까?”
깨알 같이 적힌 글자 위로 술잔이 불쑥 나타났다. 에르난이 고개를 들어 보니 외출복 차림의 프란세스크가 와 있었다.
“고맙네.”
에르난은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프란세스크는 특별한 물건인 것처럼 말했으나, 아라고 근처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든 평범한 포도주다. 내내 살피던 서류에 그렇게 적혀 있다.
하지만 레이테가 마실 것이라 하니 단맛이 괜히 더 느껴지는 듯했다.
“여태 사크틸라에 개입하지 말자고 주장하던 자들도 피해를 보지 않을 방식이라면 한순간에 바뀌더군.”
“대륙주의자고 뭐고, 돈벌이를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답니까.”
“리세우 공작가도 배를 세 척이나 띄운다던데, 자네도 사크틸라에 가나? 동생도 보고?”
“아닙니다. 헤젤에 가려고요.”
술잔을 만지작거리던 에르난의 손길이 멈췄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헤젤이라니, 무슨 소리야!”
“브라간사가 바르시나를 언급한 이상, 바르시나는 더 적극적으로 헤젤의 정보를 수집해야 합니다. 우리는 헤젤이 사크틸라를 침공한다는 소식을 팀파노를 통해 이제야 알았지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까? 그러니 제가 가서 좀 알아보겠습니다.”
“하지만…….”
에르난은 친구를 말리고 싶었다. 고문 후유증은 거의 평생을 간다고 들었다. 프란세스크는 겉보기만 멀쩡할 뿐이다.
물론 누군가는 가야 한다. 슬프게도 프란세스크만큼 적임자도 없었다. 에르난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무리하지 말게.”
“예. 또 바닷물 차오르는 감옥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프란세스크는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르난은 한숨을 내쉬다가, 친구에게 다가가 그를 안아 주었다.
* * *
여름이 지나고 가을도 다 끝나갈 무렵, 헤젤군이 오누바 근처에 나타났다.
첫 전투는 오전동안 내리던 비가 그치자 시작되었다. 비가 온 탓에 공기가 습하다 보니, 양군 모두 대포의 작동이 원활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공성 측이 불리할 수밖에 없다. 브라간사는 적당한 선에서 첫날 공격을 마치려 했다. 마침 해도 저물고 있었다.
그때 성문이 열리고 사크틸라 병사들이 밖으로 나왔다. 브라간사는 다급히 아군의 후퇴를 지시했으나, 움직임이 굼뜬 일부는 그대로 사크틸라에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사크틸라군은 만족하며 오누바 성안으로 돌아왔다. 성안에서는 여왕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수고 많았네. 좋은 시작이야.”
기습전을 치른 병사의 수는 많지 않다. 레이테는 일일이 그들의 손을 잡고 격려했다.
소수의 군사를 내보내 빠르게 적을 치고 돌아오는 방식은 사크틸라군에게 가장 익숙한 전술 중 하나였다. 레이테도 이론은 배워서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조금 전 돌아온 아르파 공작 휘하의 병사들은 그런 전술에 대단히 능숙했다.
그러나 실제로 펼쳐지는 전투를 지켜보았더니, 시작부터 끝까지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아군은 생각보다 더 많은 적군을 상대하며 그들의 깊숙한 곳을 쳤고,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왔다. 레이테는 자신의 긴장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하려 애썼다.
‘이런 상황에 익숙해져야 해.’
레이테는 주먹을 꽉 쥐어 마음을 다잡았다.
왕궁으로 돌아오자마자, 군사 회의가 열렸다.
“헤젤이 포위 태세를 완전히 갖추는 데에 시간이 얼마나 더 걸리지?”
“날씨가 궂은지라 일주일 정도는 걸릴 것입니다. 오늘처럼 방해 작전이 성공한다면 더 늦출 수도 있습니다.”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아르파의 목소리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렇게 되기 전에 브라간사와 한 번 만나면 좋을 텐데…….”
레이테가 중얼거렸다. 사크틸라의 기본 방침은 장기전에 돌입하지 않고 사태를 종결하는 것이다.
하지만 브라간사는 협상할 의지가 없을 것이다.
“조금 모험이긴 하지만……, 내가 직접 성 밖으로 나가 브라간사를 만날까 싶네. 늦기 전에 억지로라도 그와 대화해 볼 필요가 있어.”
“폐하께서 직접? 안 됩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대화는 저희가 대신 하겠습니다.”
귀족들의 반발은 거셌다. 레이테는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경들과 병사들이 고생하는 모습을 뒷짐 지고 구경이나 하려고 내가 오누바에 온 줄 아나?”
“구경이라니요. 폐하의 존재가 군사와 시민들의 사기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이 굉장합니다.”
팀파노가 말했다. 다른 지휘관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동의했다.
레이테도 그 점은 느끼고 있었다. 여왕은 전쟁에 있어 초보자다. 그러나 왕이 백성을 지키고 함께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보이면 사기 진작에 큰 도움이 되었다.
레이테는 남편에게 선물 받았던 갑옷을 다시 입었다. 효과는 확실했다. 왕만이 뿜어낼 수 있는 상징성의 힘은 컸다.
하지만 그녀는 그 정도로 만족할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서 전쟁을 빨리 종결시켜야 한다. 공성전이 길어질수록, 외부와의 교류가 거의 차단된 수성 측은 인간적인 생활이 힘들어진다.
“브라간사가 완전히 미쳐버리지 않는 한, 왕을 죽일 일은 결코 없어. 그렇게까지 판을 키우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오늘 작전을 수행하는 병사들을 보니, 빠르게 퇴각하는 솜씨가 제대로더군. 그러니 설마 내가 위험에 빠져도, 돌아올 수는 있으리라 보네.”
“……폐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호위는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아르파를 시작으로, 지휘관들은 결국 여왕의 요구를 수락했다.
* * *
다음 날도 오전에는 비가 내리다 오후가 되어 그쳤다. 습하고 바람이 많이 부는 날씨였다.
갑옷을 입으면 통풍이 잘되지 않기 때문에 상당히 더워지기 마련이었다. 여름에는 열사병을 조심해야 할 정도다. 그러나 오늘은 찬 바람이 갑옷 사이로 파고드는 바람에 뼛속까지 시렸다.
여왕 일행이 성 밖으로 나오자, 성문을 감시하던 헤젤 군사들은 빠르게 전투태세를 취했다.
그러자 여왕의 앞에 선 기수가 깃발을 높이 쳐들었다. 교전 의사가 없음을 표현하는 흰 깃발이었다.
헤젤군이 움직임을 멈추고, 그 사이에서 갑옷을 입은 기사가 나타났다. 부대의 지휘관인 모양이었다.
사크틸라 측의 기수가 외쳤다.
“사크틸라의 레이테 여왕 폐하께서 브라간사 공작과 대화를 원하신다!”
“여왕?”
지휘관은 놀란 눈으로 레이테를 바라보았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잠시 후, 갑옷 위에 브라간사 공작의 문장이 그려진 겉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났다. 사크틸라 기사들이 여왕을 뱅 에워쌌다.
“오랜만입니다, 여왕 폐하.”
들리는 목소리는 역시 브라간사의 것이었다.
브라간사가 투구를 벗었다. 적의 가득한 두 눈이 레이테를 향했다. 전쟁터에서 적장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가까운 막사에 들어가서 이야기합시다. 밖은 추우니까요.”?
#137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레이테와 브라간사는 서로를 마주 보며 앉았다. 레이테의 호위와 브라간사의 장교들이 두 사람의 뒤에 섰다.
‘또 갑옷이라…….’
브라간사는 여왕의 갑옷 차림을 이미 한 번 봤었다. 여왕이 포로가 된 남편의 석방 협상을 위해 헤젤을 방문했을 때였다.
지금은 그때보다 갑옷이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머리 모양 탓일까? 아니면 칼이나 창을 휘두르지 않을 뿐이지 사실상 최전선에 나선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 때문일까?
“이렇게 마주 앉아 대화하기도 오랜만이네요.”
여왕이 말했다. 석방 협상도 어느덧 2년 전 일이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던 브라간사는 문득 깨달았다.
‘아니, 잠깐. 그걸 말하는 게 아닌 것 같은데…….’
그는 여왕과 단둘이 마주 보고 대화했던 적이 있었다. 사크틸라 여왕이라는 존재를 처음 만났던 3년 전.
그때 여왕은 숙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었다. 모험과도 같은 결혼을 했고, 남편을 이용해 숙부를 제거했다.
껍데기만 아름답고 우아할 뿐인, 왕관 쓴 애송이.
당시 브라간사는 여왕이 그런 존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3년이 지난 지금, 얌전한 아가씨는 제법 그럴듯해 보이는 왕이 되었다. 겉모습뿐만 아니라, 실제 행동도 그렇다.
‘……그냥 죽였어야 했어.’
여자는 혈통 조건이 맞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고작 두 살 때에 왕위에 올랐다. 당시 브라간사는 마치 자신의 것을 빼앗긴 듯한 상실감을 느꼈다.
분노는 브라간사를 충동질했다. 레이테를 죽여 버리자고. 하지만 그는 참았다.
‘그래. 그때는 참았지.’
하지만 레이테의 경우와 달리, 그가 결국 참지 못한 때도 있었다.
엔히크. 헤젤의 왕위 계승자였던 사촌은 레이테만큼이나 별 볼 일 없는 인간이었다. 그런데 엔히크는 레이테와 그 남편을 만나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왕관을 물려받게 될 미래에 긍정적인 의지까지 더해지면 어떻게 될까? 브라간사에게는 불가능한 미래를 걸어가려는 사촌을 향한 질투는 점점 커졌다. 결국 브라간사는 일을 저질렀다.
충동적으로 명한 암살이었다. 그런 것치고는 머리가 잘 돌아갔다. 암살자를 입막음하고, 일을 사크틸라에 뒤집어 씌웠으니까.
하지만 역시 참았어야 했다. 그 일 이후, 브라간사는 갈 길을 잃고 폭주하듯 살았다. 지금 일으킨 전쟁 또한 마찬가지다.
살기 위해서,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서 발악할수록 늪에 빠져드는 것 같다.
“서로 큰 피해를 입기 전에, 평화로운 방법으로 사태를 진정시키고자 합니다.”
브라간사는 레이테의 보라색 눈을 바라보았다. 브라간사의 것과 색은 같으나 풍기는 인상이 전혀 다르다.
승리를 확신하는 찬란한 눈빛이다.
브라간사는 차마 그것을 마주할 수 없어 고개를 돌려 버렸다.
* * *
레이테는 자정이 다 되어서야 침실에 들어왔다. 그녀는 거의 쓰러지다시피 침대에 누웠다.
바쁜 하루였다. 브라간사를 만나고 돌아오니 바르시나 선박이 입항해 있었다. 레이테는 바르시나 상인들을 만났다. 상인 중에는 유력 가문 출신이 적지 않았다. 바르시나인들이 사크틸라와의 거래에 관심을 보인다는 증거다. 좋은 징조였다.
상인들과의 만찬 후에는 회의에 참석해 보고를 받았다. 전쟁 외 다른 분야의 업무도 처리했다.
‘피곤해…….’
레이테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잠이 들기는커녕, 낮의 일이 떠올라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결국 레이테는 눈을 도로 뜨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브라간사와의 대담은 성과 없이 끝났다. 생산적인 대화는 거의 나누지 못했다. 브라간사는 시종일관 비협조적인 태도로 ‘바르시나 때문에 사크틸라를 믿을 수 없다’는 식의 주장만 반복했다.
어느 정도는 예상한 일이었다. 그에게 협상할 의지가 있었다면 진작 팀파노와 대화를 나눴을 테니까.
새삼스레 팀파노의 인내심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대화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니.
전황을 변화시킬 성과는 없지만, 다른 쪽의 성과는 있다. 레이테 개인에게는 전쟁 못지않게 중요한 성과였다.
‘이제는 브라간사가 두렵지 않아.’
호위를 잔뜩 데려갔기 때문만은 아니다. 레이테는 브라간사를 대하는 마음에서 공포가 사라졌음을 느꼈다.
오랫동안 레이테는 브라간사가 껄끄러웠다. 그녀의 왕위를 넘볼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는 레이테의 자리를 탐내기도 했다.
하지만 벨류 왕에게 반기를 든 이후, 브라간사의 행보는 혼돈 그 자체였다.
브라간사는 왕위를 원한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추해지는 모습을 보며, 레이테는 브라간사가 왕관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혈통 문제를 떠나서, 그릇이 안 된다.
정권을 장악하는 데에 실패했기 때문에 전쟁으로 난국을 타개하려는 것 아닌가. 눈앞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멋대로 내던진다. 지도자로서 최악의 수다.
브라간사도 자신의 행동이 썩 떳떳하지 않다는 것쯤은 알 것이다. 오늘 만남에서 레이테를 압도하던 과거의 오만한 기세는 찾기 힘들었다.
그는 여왕과 대면하는 상황 자체를 불편해했고, 빨리 대화를 끝내고 싶어 했다. 초조한 감정을 숨기지도 못했다. 억지로 전쟁을 일으킨 그는 한계에 몰려 있다.
“그런 남자에게 패배한 탓에, 나와 당신이 헤어졌네요.”
레이테는 벽에 걸린 남편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이제는 그를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들어요. 그에게 승리하면, 당신과 다시 만나게 될까요?”
레이테의 시야가 순식간에 뿌옇게 변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은 눈물을 흘릴 때가 아니다. 눈물은 승리, 기쁨, 재회의 몫으로 아껴 두어야 한다.
그날이 어서 오기를. 레이테는 손으로 눈물을 슥 닦고 다시 침대에 누우려 했다.
똑똑.
침실 문을 작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이지? 레이테는 슈미즈를 끌어올려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폐하, 리세우 공작이 뵙기를 청합니다.”
문밖에서 시녀가 말했다. 레이테는 의자에 걸쳐놓은 가운을 입고 침실 밖으로 나왔다.
바르시나에서 온 상선 중에는 리세우 공작가 소유의 배도 있었다. 하지만 프란세스크는 없었다. 그가 왔더라면 만찬 때에 만났을 것이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여왕 폐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하지만 레이테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남자는 틀림없는 프란세스크였다.
“오랜만이네요, 공작. 만찬 자리에서 못 본 것 같은데……?”
“예. 공식적으로 저는 사크틸라에 오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카테리나에게도 비밀로 해 주십시오.”
“카테리나에게? 서운해할 텐데요.”
“제가 헤젤에 간다는 것을 알면 난리를 칠 테니까요. 바르시나에서 놀고먹는 중이라 생각하게 놔두려 합니다.”
“헤젤이라고요?”
레이테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프란세스크가 자유의 몸이 되어 사크틸라 땅을 밟았을 때가 올해 초였다. 돌아온 지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다시 헤젤에 간다니?
“바르시나의 정보력이 형편없어 제가 가는 수밖에 없겠더군요. 유의미한 정보를 입수하면 폐하께도 연락드리겠습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리스보아에는 사크틸라인 정보원이 많아요. 그들과 손을 잡아도 좋을 거예요.”
“바르시나인인 저를 받아줄지 모르겠습니다만……. 하긴, 지금은 헤젤이 공동의 적이니 적당한 선에서 협력할 수 있겠군요.”
프란세스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크틸라는 오래전부터 헤젤과 적대관계였기에, 헤젤에 파견한 첩자의 수도 많고 조직도 잘 되어 있다.
“헤젤에 가기 전에 이곳에 들른 이유는 사크틸라와 바르시나의 거래가 잘 되는지 보기 위해서인가요?”
“그런 일은 왕께서 파견한 감독관의 업무지요. 그냥 바르시나 배를 타고 편히 움직이려고 그랬습니다. 동생도 보고요. 오후 내내 성당에서 여왕 폐하께서 승리하게 해 달라며 기도하더군요.”
“그렇게 봤으면서 인사도 안 나누고 간다니…….”
“별수 없지요. 아, 그리고 여왕 폐하께 전해 드릴 소식도 있습니다. 대륙에서 온 소식인데요.”
“대륙?”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깜박이던 레이테는 문득 깨달았다.
국왕 부부의 이혼 허가를 받아오겠다는 이유로 대륙 본토에 간 사람이 있다.
“시스로네스.”
레이테가 중얼거리자 프란세스크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따로 연락받으시겠지만, 제가 전달받은 그분의 근황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열심히 놀고 계신답니다.”
“그래요?”
“유명 유적과 성지를 순례하고, 갖은 예술품을 수집하며, 온갖 분야의 명사들과 교류하는 등……. 즐거운 노후생활 아닙니까?”
레이테는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잘 지내고 있구나.’
국왕 부부의 이혼 허가를 받기 위해 시스로네스가 대륙으로 떠난 지도 2년이 다 되어간다. 레이테는 시스로네스가 간간이 보내는 편지로 그의 행적을 알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받았던 편지에는 교황을 알현했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죽기 전에 교황을 뵐 수 있게 해 주신 여왕께 감사드린다면서, 여왕과 사크틸라의 영광을 기원하는 긴 기도문까지 호들갑스럽게 적어 보낸 편지였다.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받은 두 번째 편지는 시스로네스와 신학자들의 논의에 대한 내용이었다. 부부왕의 이혼이 가능한지 교회법을 따져보기 위해서였다. 전문적인 표현이 한가득한 편지였으나, 학자들이 신학 지식뿐만 아니라 고전에 대한 소양도 탁월한 덕택에 즐거운 만남이었다는 문장이 본론 같았다.
이혼 청구 소송을 내기까지는 거의 1년이 걸렸다. 시스로네스는 세심하게 소송을 준비하느라 어쩔 수 없었다고 해명했다.
시간이 한참 흐르고, 첫 재판을 했다는 편지가 왔다. 추기경은 열심히 이혼의 필요성을 주장했으나 돌아오는 반응이 시원찮았다고 한다. 승소를 위해 끝까지 노력하겠다는 다짐이 무척 장황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이혼 소송은 지금까지 교회 법원에 계류 중이다.
귀족들은 이혼 건의 느려터진 진행에 답답해했다. 하지만 절차상의 문제는 전혀 없다.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시스로네스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아주 잘 알았다. 올바른 절차를 따르되, 최대한 시간을 질질 끈다. 최종 목표는 이혼 허가를 받지 않는 것이다.
“재판이 길어진다길래, 지루한 시간 보내지 마시라고 여비를 좀 보냈답니다. 알차게 쓰고 계시는 모양이에요.”
“아무래도 대륙 본토 사람들은 반도 일을 잘 모르잖습니까? 그래서 반도 이야기를 듣고 싶은 사람들이 추기경을 계속 찾는다고 합니다. 경험이 풍부하고 학식도 뛰어나니 무척 인기가 많다는군요.”
“이 기회에 사크틸라가 그쪽에 좀 더 알려지면 좋겠네요. 아예 사크틸라 공관을 설치하면 어떠려나…….”
“좋은 생각이십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면 하셔야겠습니다. 사크틸라 소식이 그곳까지 가는 데에 시간이 많이 걸릴 테니, 제 정보원을 통해 추기경에게 이런저런 사정을 좀 전했지요.”
“헤젤이 침공한다?”
“예. 그러니 추기경은 이제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고 바쁘게 움직일 겁니다.”
아마 시스로네스는 사크틸라로 돌아오려 할 것이다. 물론 그가 옆에 있다면 든든하겠으나, 레이테는 그의 귀환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았다.
추기경은 한평생을 사크틸라 왕실에 봉사했다. 그러니 이제는 좀 즐기며 살기를 바랐다. 시간 끌기라는 전략은 부부를 위한 것이지만, 시스로네스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시스로네스는 이혼 문제를 어떻게 정리할까?
* * *
한창 전쟁 중이라 해도 대축일에는 전쟁을 멈추는 것이 같은 신을 믿는 이들 사이의 암묵적인 약속이었다.
오누바를 두고 공방을 벌이는 두 세력의 성탄절 풍경은 꽤 대조적이었다.
성내에서는 레이테 여왕이 사비를 털어 병사와 시민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항구를 통해 바르시나에서 구입한 물자가 들어오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시는 전시인지라 넉넉한 살림은 아니다. 그래도 고기와 빵, 술을 나누며 잠시나마 웃고 떠들 만한 여유는 있었다.
반면 성을 포위한 헤젤군의 성탄절 식사는 형편없었다. 작은 고기조각 두어 개를 넣은 수프가 초췌한 몰골의 병사들에게 배급되었다.
사크틸라 공략을 위해 출정한 지도 두 달째, 헤젤군의 상황은 영 좋지 않았다.
보름 넘게 몰래 파던 땅굴이 있었다. 그런데 어제, 작업하던 병사의 실수로 화약이 터지는 바람에 땅굴이 무너져 내렸다. 적잖은 수의 병사들이 사망하거나 큰 부상을 입었다.
불행한 사고였다. 병사들의 사기가 풀썩 꺾였다. 하지만 전장에서 이런 사고는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 극복될 것이다.
병영을 흉흉하게 하는 진짜 문제는 돈이었다.
브라간사와 병사들은 왕실에 고용된 형태로 전쟁을 치르고 있다. 그런데 브라간사의 반대자들이 무슨 수를 썼는지, 그들은 여태 급료를 한 푼도 받지 못했다. 브라간사가 급료 지불을 재촉하는 편지를 몇 번이나 왕궁으로 보냈으나 소용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왕궁으로 직접 가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총사령관이 전장을 비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올해가 다 끝나도 소식이 없으면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지도 모르겠군.’
초조해하던 브라간사에게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뜻밖에도 그의 어머니, 테레자가 쓴 편지였다.?
#138
사랑하는 아들에게
로렌소, 네가 사크틸라 토벌을 떠난 지도 벌써 두 달이 되었다. 건강히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리스보아에는 연일 기록적인 폭설이 계속되고 있단다. 폭설 피해가 워낙 커서 도시 복구에 긴급히 예산이 편성되었지.
아마도 네가 의아해할 부분, 왜 병사들의 급료 지불이 늦어지는지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까?
글쎄, 충분하지 않겠지. 하지만 일단 이곳의 명분은 그렇다. 너도 잘 알겠지만, 전쟁에 대한 궁정의 여론이 워낙 좋지 않으니 말이다. 그리고 네가 한 번이라도 리스보아가 어떻게 됐는지 본다면 납득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본다. 그만큼 난리가 났으니까.
왕좌는 사실상 공석이고, 도시는 눈에 뒤덮여 마비되었다. 위기를 헤쳐 나갈 구심점조차 없는 상황에서 우리의 힘을 밖에 분출할 때가 아니라는 데에 사람들의 의견이 모이고 있지.
나도 동감한다. 네가 무엇 때문에 전쟁을 고집했는지 충분히 짐작한다만 굳이 적지는 않으마. 너를 꾸짖으려는 것이 아니라, 기회를 주고 싶어 이 편지를 썼으니까.
지난날, 네 앞에서 자살했던 남자를 기억하겠지. 그가 죽는 바람에 왕위를 이을 사람이 없어져 이 전쟁까지 오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 사실은 틀렸다. 그에게는 이제 곧 돌이 되는 아들이 있다. 아기는 내가 보호하고 있단다.
리리우가 왜 왕궁을 나가 수도원으로 갔겠느냐? 너와 결혼하고 싶지 않아서? 전에도 말했다시피 너와 그 아이의 결혼은 내가 절대로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아무리 제멋대로 군다 한들, 어미의 명을 거역하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아기는 리리우와 다른 수도자들의 보살핌을 받고 있단다. 이것은 나와 리리우, 그리고 이제는 너까지 셋만 아는 일이지. 다른 귀족들은 아직 그 아이의 존재를 모른다.
국왕 폐하의 뒤를 이을 사내아이가 존재한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지난 2년 동안 멈춰 버린 시계를 다시 돌아가게 할 수 있단다. 나는 그 일을 내 아들이 해 주었으면 한다.
우리는 왕실의 일원으로서, 왕국의 보전을 위해 봉사해야 할 의무가 있다. 네가 그 의무를 아직 잊지 않았기를 바란다.
돌아와 왕의 신하로 명예롭게 살거라.
“…….”
편지를 다 읽은 브라간사는 거친 숨소리만 내뱉을 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상황이 생각지도 않은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죽은 자에게 아들이 있었을 줄이야.
‘이제 곧 돌이 된다……? 내가 죽은 후계자를 찾으러 다니기 시작한 때가 그보다 더 오래되었던가.’
어떻게 아기가 어머니에게 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죽은 남자는 의도적으로 아들을 숨긴 것이 틀림없다. 브라간사의 눈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까지, 남자는 그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쾅!
브라간사는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몸이 덜덜 떨렸다.
‘이럴 수는 없어!’
후계자의 죽음은 브라간사에게도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경쟁자가 사라져 기쁘기는커녕 앞일이 막막하기만 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사태를 추슬러 여기까지 왔다.
더 이상 대리 왕을 세울 마음은 없다. 전쟁에서의 승리를 동력으로 직접 그 자리에 앉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뜻은 달랐다.
왕의 신하로 명예롭게 살거라. 마지막 문장의 의미가 허수아비 왕을 세우라는 뜻일 리가 없다. 왕좌를 욕심내지 말고 왕국의 재건에 생을 바치라는 소리다.
브라간사도 어머니가 그에게 협조적이지 않다는 것쯤이야 잘 알았다. 아들을 만나자마자 뺨을 후려치지 않았나.
그녀의 매정함은 거기까지였다. 그녀 역시 왕족이므로, 세력을 모으는 일이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아들의 반대에 선다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테레자는 차마 아들을 반역자로 몰지 못했다.
그러니 이런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그릇된 길을 걷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서.
늪에서 빠져나갈 마지막 기회다. 브라간사의 직감이 말했다.
“……이제 와서?”
그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브라간사는 아들을 살리려고 애쓰는 어머니의 사랑이 결코 기쁘지 않았다.
그의 욕망과 가능성은 어머니에게도 부정당했다. 바보 취급 받는 것 같기도 했다.
테레사는 아들에게 왕의 신하로 살라고 했다. 그녀가 보호하는 아기를 새 왕으로 섬기라고 했다. 시스로네스가 두 살배기 공주를 새 왕으로 이십 년 동안 모셨듯이.
하지만 이제 브라간사에게 그런 삶은 불가능하다. 한 번 높은 곳을 바라보기 시작한 이상, 더는 눈을 낮출 수 없다.
돌아갈 수도 없다. 귀족들은 물론이고, 어머니도 이제 그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편지는 그러기 전 마지막 애원이다.
‘어차피 극한까지 오지 않았나. 이대로 끝을 봐야지.’
브라간사는 편지를 구겨 바닥에 던져 버렸다.
* * *
성탄절이 지나면 금방 새해가 온다. 레이테에게는 남편 없이 맞는 두 번째 새해였다. 외로움을 더듬을 여유도 없이, 새해 첫날부터 여왕과 사크틸라인들은 전투에 시달려야 했다.
튼튼하게 지은 성은 적의 공격을 비교적 잘 막아내는 편이었다. 그러나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성은 없다. 연일 퍼부어지는 헤젤의 공세는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했다.
전쟁 경험이 많은 아르파 같은 자는 사람들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공성전은 인내심 싸움입니다. 브라간사는 초조함을 견디지 못하고 자충수를 두는 겁니다.”
레이테는 그의 말을 들으며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덤덤한 모습이지만, 여왕 역시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다.
망설이던 레이테는 결국 입을 열었다.
“……공의 말이 옳아. 하지만 브라간사 같은 자가 그 정도를 모를까? 불안함이 지워지질 않아.”
이런 말은 되도록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편이 좋다. 하지만 불길했다. 브라간사는 극단적인 선택을 반복해 왔다. 또 어떤 방향으로 튈지 모른다.
1월이 다 끝나갈 무렵, 불안의 정체가 드러났다.
사크틸라군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헤젤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레이테도 이런 상황에 익숙해졌다. 포탄이 어지간히 가까이 날아오지 않는 한, 자리를 떠나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해가 다 저물어가는 시각이었다. 오늘따라 헤젤의 공격은 유독 매서웠다. 들것에 실려 나가는 아군 부상병의 수가 너무 많았다.
“폐하! 항구 쪽을 보십시오!”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레이테는 뒤를 돌아보았다. 항구에는 배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며칠 전 바르시나의 상선대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별문제 없어 보인다. 레이테의 시선은 더 먼 바다로 움직였다. 이윽고 그녀의 눈이 요동쳤다.
“맙소사…….”
한 무리의 선단이 오누바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거리가 멀어 그들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군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사크틸라 선박은 최근 오누바 밖으로 나간 일이 없으며, 바르시나 배는 며칠 전 모두 입항했으므로.
그렇다면 남은 답은 하나뿐이다.
“헤젤.”
레이테의 중얼거림과 거의 동시에, 헤젤 선박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대포를 발사한 것이다.
* * *
항구를 지키는 병사는 많지 않았다. 오누바 내 병력의 대부분은 성벽 방어에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해안 포대에는 늘 일정 병력을 배치해 놓는다. 그들은 빠르게 대응 포격에 나섰다.
팀파노는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병사들을 배에 승선시켰다. 그 자신도 배에 탔다.
위험하니 뒤로 물러나 있으라는 부관들의 만류가 있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곧 피아식별 자체가 힘들어질 것이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라도 직접 앞에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선원의 탑승은 빠르게 이뤄졌다. 그러나 팀파노가 탄 함선은 다른 배들과 엉켜 움직이지 못했다.
항구에 배가 너무 많았다. 보급품을 실은 바르시나 선단이 예정보다 일주일 정도 일찍 도착한 탓이다.
쾅! 포성이 점점 더 크게 들렸다. 집중 포격을 받은 배 하나가 침몰했다. 팀파노는 부관을 불러 명했다.
“배를 이동시키려고 탔던 선원들이 있을 걸세. 그들을 구출해야 해!”
팀파노는 당혹스러웠다. 이 시간대의 공격은 사크틸라뿐만 아니라 헤젤에게도 위험한 행동이다. 브라간사는 사크틸라 침공을 위해 바르시나 핑계를 댔지만, 정말로 바르시나를 자극할 생각은 없을 것이다. 적을 늘리면 좋지 않으므로.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바르시나 선박을 잘못 공격할 수도 있지 않나?
항구를 급습했다고는 하나, 헤젤 함선의 수는 사크틸라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적다. 포격으로 항구를 마비시키고 적당한 때에 빠져나가는 쪽이 옳은 전술일 것이다. 밤이 되어가는 지금은 더욱 그랬다.
그런데 헤젤 병사들은 자신들이 공격한 배에 올라타려 한다.
“후작 각하!”
팀파노의 배를 향해 다가온 보트에서 어떤 남자가 외쳤다. 어두워 얼굴은 잘 보이지 않으나 익숙한 목소리였다. 팀파노는 깜짝 놀랐다.
그가 잘못 듣지 않았다면, 목소리의 주인은 바르시나인이다. 여러 차례 오누바를 오가는 바르시나인 중 항구를 관리하는 팀파노와 안면을 쌓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
보트에 탄 사람들은 선원들의 도움을 받아 갑판으로 올라왔다. 그중 하나가 팀파노에게 다가와 악에 받친 목소리로 외쳤다.
“헤젤 놈들이 내 배를 침몰시켰습니다! 저놈들은 미쳤어요! 바르시나 선박까지 공격한다고!”
* * *
항구 깊숙한 곳으로 미처 피난하지 못한 배들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브라간사는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성벽 방어에 몰두하던 사크틸라군은 우왕좌왕했고 헤젤은 적은 수의 배로도 꽤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사크틸라는 바다를 통해 물자를 보급받는다. 헤젤의 해상 전력으로는 그 보급로를 차단하기 힘들었다. 얼마 전 바르시나에게 크게 당한 탓이다.
하지만 적의 원활한 보급은 전쟁을 길어지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이다. 어떤 식으로든 보급로를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보급품을 실은 바르시나 선단이 입항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브라간사는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항구를 치기로 했다. 바다가 결코 안전한 운송로가 아님을 알려 주기 위해서다.
전쟁에 휘말리기 싫어하는 바르시나는 그 정도 경고로도 충분히 주춤할 것이다.
물론 바르시나 선박을 직접 공격해 보급품을 뺏는 쪽이 제일 효과적이다. 헤젤군의 부족한 물자도 보충할 수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위험한 전략이었다. 자칫하면 바르시나가 사크틸라와 아예 손을 잡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적이 늘어나서는 안 된다. 브라간사는 하루빨리 이 전쟁을 끝내고 헤젤로 돌아가고 싶었다.
물론 승자의 모습으로. 어머니가 원하는 충신 노릇을 할 생각은 없다.
“공격대가 돌아오는 대로 출발하라.”
브라간사는 명령을 내리고 선장실로 들어왔다. 다른 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잠시 눈이라도 붙일 생각이었다.
어차피 사크틸라는 쫓아오지 못한다. 억지로 추격대를 보내기에는 밤중이라 효율이 떨어지니까. 저들은 눈앞의 화재 수습에 집중할 것이다.
얼마든지 승리할 수 있지 않나. 포위전 특성상 시간이 걸릴 뿐이다.
브라간사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하, 각하. 일어나십시오.”
부관의 목소리에 브라간사는 간신히 눈을 떴다. 몸이 뻐근했다. 잠깐 쉬려 했을 뿐인데 꽤나 깊은 잠에 빠졌던 모양이다.
“다 돌아왔나? 꽤 늦은 것 같군.”
“예. 그런데 각하께서 직접 처벌하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브라간사는 갑판으로 나왔다. 포승줄에 묶인 선원들이 줄지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브라간사가 얼굴을 찌푸리자 부관이 설명했다.
“저들은 돌아오라는 명령을 무시하고 상대 선박의 약탈과 선원 살해에 몰두했습니다. 그 때문에 하마터면 사크틸라의 공격을 받을 뻔하기도 했습니다.”
한심한 일이다. 브라간사는 한숨을 쉬었다. 잠들기 전 꽤 좋았던 기분이 도로 나빠졌다. 그 반응을 본 부관이 조심스레 말했다.
“사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만…….”
“말하라.”
“저들이 약탈한 배는 바르시나의 상선입니다. 어떤 이유인지 바르시나 배가 예정보다 일찍 오누바에 와 있었던 겁니다.”
브라간사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139
자국 상선이 헤젤에게 공격받았다는 소식을 받은 바르시나는 발칵 뒤집혔다. 사크틸라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국왕의 앞에 엎드려 말했다.
“폐하, 저희는 더 이상 헤젤인과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습니다!”
“이번 일은 우연한 오해도, 단순한 해적질도 아닙니다. 우리는 사크틸라 해군이 아니라 바르시나 상인이라고 설명했는데도 그들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물자를 약탈할 생각에 무고한 바르시나인을 죽이기까지 했단 말입니다!”
유독 피라도 토할 기세로 외치는 남자가 있었다. 에르난에게도 낯익은 얼굴이었다. 대륙에서 헤젤로 돌아가려는 엔히크의 배와 엮이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던 바르시나 상선의 선장이었다.
벌써 3년도 넘은 과거의 일이었다. 당시 국왕 부부는 그 일을 양국의 오해로 인한 불상사라 결론지었다. 정치적 계산이 다분한 마무리였으니, 선장 입장에서는 다소 억울할 만도 했다.
‘운이 나쁘군. 더 나쁜 일을 겪다니.’
에르난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
“분명 헤젤 군대의 공격이었나?”
“예. 해적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무엇보다 브라간사 공작의 깃발이 걸린 배가 있었습니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분명히 봤습니다!”
격양된 외침은 거짓이 아니었다. 생존자들과 함께 바르시나에 온 세르지는 여왕의 편지를 에르난에게 건네주었다. 편지 내용은 상인들의 증언과 동일했다.
편지 속에서 아내는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브라간사가 약탈을 방조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든 듯했다.
에르난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어둠 탓에 상황 파악을 못 했을까? 아니면 민간 선박의 약탈을 용인할 정도로 헤젤군의 사정이 좋지 않나?
어느 쪽이든 브라간사에게 어울리는 모습은 아닌 듯했다. 전장에서의 브라간사는 전문가다. 저런 실수를 저지를 만한 뜨내기가 아니었다.
물론 상황이 많이 변했다. 반역을 저지르면서, 그는 계속 극단적인 선택을 반복해 왔다. 이번 전쟁 자체도 그랬다.
브라간사는 어디까지 한계에 몰려 있을까.
“왕께서 군대를 파견해 헤젤을 무찔러 주십시오! 지켜보기만 하실 때가 아닙니다!”
울먹이며 외치는 다른 남자는 헤젤의 공격으로 배를 잃은 사람 중 하나였다. 에르난이 정확히 본 것이 맞다면, 저자는 대륙주의자 일파다. 그런 사람의 입에서 헤젤을 공격해 달라는 말이 나온다.
군대 양성과는 별개로, 에르난은 전쟁 개입에 대단히 신중한 태도를 취해 왔다. 지난날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제는 나서야 하나?’
바르시나는 실제로 공격당했다. 그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 피해를 입고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일까. 지난 전쟁 때에는 타국의 이해관계에 엮이지 말자며 바르시나의 참전을 극구 반대했던 이들도 지금은 아무 말이 없었다. 더 이상 사크틸라만의 일이 아니게 되었으므로.
다음 날, 파병 문제를 논의하고자 대표위원회가 소집되었다. 왕이 개회를 선언하자마자, 페레트가 앞으로 나섰다.
페레트의 신분이나 직위는 이런 자리에 참석할 만큼 높지 않다. 그러나 오늘 회의는 군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자리다. 그런 만큼 현재 바르시나 군대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의 의견을 들을 필요도 있었다.
“헤젤은 무고한 바르시나인을 죽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폐하, 폐하의 군대는 이럴 때를 위해 훈련해 왔습니다. 저희는 준비되어 있으니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에르난은 고개를 끄덕였다.
페레트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알았다. 물론 문제 될 태도는 아니었다. 파병 자체는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니까.
“또한 국왕 페하의 친정을 제안드립…….”
“친정이라니!”
페레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맞은편에서 고함이 들렸다.
“지난 전쟁 때 왕께서 어떤 일을 당하셨는지 알면서 친정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거요? 경이 무사했으니 다들 무사한 줄 아나 보지?”
공석에서 부끄러운 과거를 대놓고 지적당하자, 페레트는 얼굴을 찌푸리며 상대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상대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페레트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반박할 말을 고르는 듯했다. 그러나 코른이 끼어드는 바람에 그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폐하, 이번 사태는 지난번과 차원이 다릅니다. 바르시나를 위협한 헤젤에게 단호한 대응을 해야겠지요. 다만 페레트 경이 주장하는 국왕 폐하의 친정은 신중하게 결정해야 합니다. 폐하의 안전, 그리고 전쟁 바깥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라도.”
페레트를 공격할 줄 알았더니, 코른은 그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에르난만 바라보며 말했다.
원인이 어떻든 또 사크틸라 일에 휘말려 드는 셈이므로, 코른 같은 자에게 파병은 내키지 않은 선택이다. 하지만 반대할 수도 없다. 코른 일파는 그 정도를 조절하는 쪽이 현실적이라고 판단한 듯했다.
“전쟁 밖이라니?”
“전쟁은 사크틸라 땅에서 하게 됩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사크틸라와 손을 잡아야겠지요. 하지만 바르시나는 사크틸라와 거리를 둬야만 합니다. 지금 폐하께서 사크틸라에 가시면 진행 중인 일과 관련된 불필요한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
진행 중인 일이 무엇인지 물을 필요는 없었다. 국왕 부부의 이혼 소송을 가리키는 것이다.
시스로네스는 바르시나에도 재판 진행 상황을 알리는 편지를 꾸준히 보내왔다. 얄미울 만큼 간략한 편지였다.
일의 진행은 더뎠다. 시스로네스의 태도가 불성실하다며 분통을 터뜨리는 이가 적지 않았다. 시스로네스를 돕기 위해 사절을 추가로 파견하겠다는 소동이 일어날 정도였다.
시스로네스는 바르시나의 친절 아닌 친절을 사양했다. ‘바르시나는 성좌에 별 영향력이 없으니 괜히 짐만 됩니다.’라는 이유였다. 비꼬는 기색이 역력한 반응이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바르시나는 세속적인 성향 탓에 종교계와 별로 인연이 없으니까. 결국 사절 파견은 무산되었다.
하지만 소동이 잠잠해졌다고 하여 귀족들의 관심까지 사라지지는 않았다.
“눈앞의 일만 보지 마시고 길게 생각하십시오, 폐하.”
에르난을 응시하는 코른의 얼굴은 비장함이 느껴질 정도로 진지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왕의 친정만은 막겠다는 의지였다.
* * *
회의장 밖으로 나온 페레트는 씩씩대며 복도를 걸었다.
‘도움이 안 되는 인간들 같으니라고!’
왕은 틀림없이 친정에 관심이 있다. 그러나 반대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강경한 주장을 하지 못했다. 지난날의 패배 때문에라도 신중할 수밖에 없다지만 답답한 노릇이었다.
결국 가장 중요한 사항, 사크틸라에 파병하겠다는 결정만 내리는 것으로 의논이 끝났다. 이후에는 대표위원회의 원래 안건인 세금 논의가 시작되었다. 그러자 귀족들은 노골적으로 페레트에게 눈치를 주었다. 볼일 봤으니 이만 나가라고.
페레트는 곧바로 왕궁을 떠나 병영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이곳에 더 있고 싶지 않았다.
자기들끼리의 연결이 견고한 귀족 무리에 그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다. 사크틸라에 가게 되었으니 제대로 공을 세우는 데에 집중하는 편이 낫다.
‘드디어 훈련의 성과를 보일 때다.’
페레트는 흥분에 몸을 살짝 떨었다. 보란 듯이 승리해 자신을 무시하던 자들의 콧대를 꺾을 생각을 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페레트 경?”
밖으로 나오자마자 페레트는 세르지와 마주쳤다.
“대표위원회에 간 것 아니었습니까?”
세르지의 질문에 페레트는 눈을 팍 찌푸렸다.
“일이 끝나서 나왔는데, 경이 무슨 상관인지?”
페레트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세르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페레트는 세르지가 싫었다. 명문가 출신의 철없는 도련님은 참으로 대충 사는 인간이었다. 그렇게 살아도 큰 문제가 없었다.
‘지금도 고작 편지 배달이나 한다지?’
세르지의 손에는 편지가 들려 있었다. 그의 손가락에서 빛나는 보석 반지가 페레트의 눈에 들어왔다. 가만 보니 옷차림도 무척 화려했다.
“나는 경처럼 한가하지 못해서 말이야. 궁정은 난리가 났는데 경은 새 옷도 지어 입고 꽤 여유가 넘쳐 보이는군. 마치 그……, 황금 양모 기사단을 결성하기 직전 같달까?”
느긋하게 세르지를 붙잡고 시비를 걸 때가 아니었다. 그러나 페레트는 짜증을 참을 수 없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경 같은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 열심히 자기를 뽐내던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떠올랐거든.”
“……전장에서 도망치는 것보다는 덜 우스꽝스럽겠죠.”
“누가 들으면 경이 최전방에서 피 터지게 싸운 줄 알겠어. 전투에 참가하기는커녕 사고 쳐서 감옥에 갇혀 있던 주제에.”
“페레트 경, 뭔가 착각한 모양인데요. 폐하께서는 경이 좋아서가 아니라, 대신할 사람이 없어서 경을 기용하신 겁니다. 탈영한 군인을 누가 믿는다고.”
이미 회의에서 과거 일을 지적당하며 망신을 당했기 때문일까? 페레트는 더 이상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코웃음을 치고 말했다.
“그게 중요한 거요, 도련님.”
“뭐?”
“다른 사람은 불가능한,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말이야. 집안에서 주는 것만 받아먹고 살아도 되는 경에게는 별로 필요 없는 부분이려나? 새 외투 잘 어울리는군. 나는 바빠서 이만.”
페레트는 세르지의 옆을 지나가면서 팔로 그를 강하게 쳤다. 세르지는 눈을 부릅뜨고 페레트를 노려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페레트가 멀리 사라지고 나서도, 세르지는 우두커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제대로 맞서지 못한 자신이 한심했다.
“세르지, 거기서 뭐 하느냐?”
코른 후작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회의가 끝난 모양인지, 그는 다른 귀족들과 함께 있었다.
“저택에 돌아갈 테니 같이 가자꾸나.”
“예.”
세르지는 조용히 숙부의 뒤를 따라갔다.
* * *
왕궁을 빠져나온 마차에는 코른과 세르지 외에도 귀족 두 사람이 함께 탔다. 코른과 친한 대륙주의자들이었다.
“파병은 막을 수 없소. 이번에는 제대로 헤젤을 응징해야 하니까. 하지만 왕을 보낼 수는 없어!”
코른을 시작으로, 어떻게 왕을 말려야 할지 한참 대화가 이어졌다. 세르지는 조용히 그것을 듣기만 했다.
“……그런데, 폐하의 마음은 이미 사크틸라에 간 것처럼 보입니다.”
“그게 문제일세.”
코른이 한숨을 내쉬었다.
마차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세르지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이번에 왕께서 승리하신다면 지난날의 패배를 설욕하는 것 아닙니까? 바르시나의 쓰러진 위신을 다시 세울 수 있을 텐데…….”
세르지는 숙부가 자신에게 호통을 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코른은 호통 대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이 맞다. 하지만 한 번 당해 본 우리로서는 걱정하지 않을 수 없지. 안전히 확실히 보장된 선택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왕은 신경 쓰지 않는 척하지만……, 이참에 여왕과 재결합하려 할 수도 있어.”
“으음, 재결합이라 말하기에는 아직 이혼도 안 했는데요.”
세르지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코른이 버럭 외쳤다.
“아무튼 그게 문제라는 거다!”
“예, 예…….”
“확실히 그 결혼부터 일이 다 꼬여 버렸어. 대륙 본토로 진출해야 하는 이때, 계속 반도 일에 발목이 잡혀 있지 않으냐. 안타깝게도 바르시나에는 양쪽 다 신경 쓸 만한 힘은 없어.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데, 우리의 답은 더 넓은 대륙이어야 한다. 이번 파병으로 다시 반도의 일에 발을 깊이 담그면 곤란해.”
세르지는 숙부의 말을 가만히 들었다. 그의 말은 타당했다. 하지만 세르지는 뭔가 기분이 나빴다.
왜 기분이 나쁜지 표현할 만한 식견이 그에게는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이 숙부의 의견을 반대한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창밖으로 항구가 보였다. 아라고 항구는 오늘도 분주했다. 매달 정기적으로 떠나는 대륙행 선단이 출항 준비에 바쁜 듯했다.
대륙행 선단. 문득 뭔가를 떠올린 세르지는 벌떡 일어났다.
“여기서 내리겠습니다.”
마차가 멈췄다. 세르지가 마차에서 내리자, 코른은 문을 닫기 전에 말했다.
“요즘 분위기가 뒤숭숭하니 적당히 놀다 들어오거라.”
“……예.”
마차가 떠났다. 세르지는 한숨을 쉬었다. 페레트나 숙부나, 그를 한량으로 보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은 불가능한,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했지.’
세르지는 이를 악물고, 배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140
집무실 책상 위에는 새로 주문한 장검이 놓여 있었다. 에르난은 그것을 한참 바라보았다.
검은 왕의 것치고 장식이 꽤 단순했다. 실전에서의 효율성에 집중해 제작했기 때문이다.
‘이 검을 쓸 수 있으려나.’
몇 주에 걸친 출정 준비가 다 끝났다. 내일, 왕의 군대는 사크틸라로 떠난다. 놀랍도록 빠른 준비였다. 헤젤의 만행에 분노한 상인과 선주들이 적극적으로 원정을 지원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만 보아도, 지난 전쟁에 비하면 이번에는 엄청난 지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왕의 출전은 다른 문제였다.
에르난은 사크틸라에 가고 싶었다. 브라간사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아내가 걱정되어 참을 수 없었다. 레이테는 잘 버티고 있다지만,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억지로 우긴다면 못 갈 것은 없다. 하지만 감정만으로 결정할 일은 아니었다.
지금 출전해서 판세를 뒤엎을 수 있나? 그게 옳은 결정일까? 패배하면 돌이킬 수 없을 것이며, 승리한다 해도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코른 후작 등은 마음이 상당히 급한 듯했다. 그들은 매일같이 에르난을 찾아와 대놓고 왕의 출정을 반대했다.
신기하게도, 그들의 모습은 익숙했던 호통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신 그들은 왕에게 애원했다. 그 정도로 필사적이었다.
“폐하께서는 분명히 여왕과의 이혼을 결정하셨습니다. 이제 서쪽 반도는 그만 돌아보십시오.”
코른은 암묵적으로 쉬쉬하던 이혼이라는 말까지 거리낌 없이 했다.
이혼. 빌어먹을 이혼. 에르난은 주먹 쥔 손으로 책상을 쾅 내리쳤다.
시스로네스의 시간 끌기는 효과적으로 진행되었다. 문제는 이쪽이었다. 이렇게 빨리 전쟁이 다시 터지고, 일이 급박하게 흐를 줄은 몰랐다.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과감해질까, 조금 더 참을까. 에르난은 자리에 앉아 눈을 살짝 감았다. 머릿속을 정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복도에서 쿵쾅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에르난이 눈살을 찌푸리는데, 집무실 문이 열리고 시종이 다급한 걸음으로 들어왔다.
“폐하!”
“무슨 일인가?”
눈을 뜬 에르난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러나 시종이 답할 필요도 없었다. 발소리가 성큼성큼 가까워지더니, 진홍빛 옷을 입은 노인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시스로네스였다.
“오랜만입니다, 폐하.”
놀란 에르난의 눈이 커졌다.
대륙에서 이것저것 즐기며 잘 살았다더니, 시스로네스는 에르난이 기억하던 모습보다 훨씬 팔팔해 보였다. 그는 잡아먹기라도 할 기세로 에르난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일단 받으십시오.”
시스로네스는 에르난의 손에 돌돌 말린 종이 한 장을 쥐여주었다.
“설마…….”
종이를 펼치는 에르난의 손이 살짝 떨렸다. 가장 윗부분에 그려진 그림이 제일 먼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삼중관과 열쇠가 그려진 문장. 교황의 상징이다.
결혼은 전능하신 신 앞에서 맹세하는 영원한 언약이다. 이 맹세는 절대로 해소할 수 없다.
단, 결혼에 요구되는 조건이 올바르게 성립하지 않았을 경우에 한해서만 결혼 자체를 무효화할 수 있다.
그러나 사크틸라와 바르시나의 왕 에르난과 레이테의 결혼에서는 어떠한 하자도 발견할 수 없었다.
따라서 두 사람의 이혼은 불가능하다.
에르난은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성좌의 판결이…… 정말로 이렇게 난 겁니까? 위조문서 같은 것은 아니겠지요……?”
“위조라니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다. 틀림없는 진짜입니다.”
에르난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다시 보아도 사실이었다.
부부의 이혼을 바라는 사람이 많으므로, 이 판결에 대한 반발은 클 것이다. 하지만 뒤집을 수는 없다. 이 문제는 이것으로 끝이다.
에르난은 벅차오르는 기쁨에 시스로네스를 끌어안으려 했다. 그러자 시스로네스는 살짝 뒷걸음질 쳤다.
“……사람을 민망하게 하는군요. 뭐, 어쨌든 좋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라 할 것 있겠습니까. 오히려 대륙에서 더 오래 지낼 줄 알았는데 그러지 못해 아쉽습니다. 판결을 빨리 내 달라고 재촉하느라 눈치도 많이 봤고요.”
시스로네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에르난은 피식 웃고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일단 앉으시지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그러십니까? 전쟁 소식에 귀국을 준비하다가, 폐하께서 많이 급하시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둘러 왔습니다만……. 별로 안 그런 모양입니다?”
“예?”
“저와 한가롭게 대화를 나눌 때는 아닌 것으로 압니다. 출정이 코앞인 것 같던데.”
“…….”
아무래도 시스로네스는 사크틸라와 헤젤 사이의 전쟁은 물론 바르시나가 파병하게 되었다는 사실까지 아는 모양이었다.
“맞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에 조금 골치 아픈 부분이 있습니다.”
“폐하의 친정을 말씀하십니까?”
“모르는 일이 없으십니다.”
에르난은 헛웃음을 지었다. 이혼 건이 해결되어 다행이다. 하지만 해결해야 할 문제는 여전히 많았다.
답답한 상황을 추기경에게 털어놓자니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라면 뭔가 해결책을 제시할지도 모른다.
긴 이야기가 될 것이다. 에르난은 자리에 앉으려 했다.
“폐하!”
그러나 시스로네스가 버럭 소리 지르며 에르난의 팔을 꽉 붙잡았다. 에르난이 순간 통증에 눈을 찌푸릴 정도로.
“과거를 설욕할 좋은 기회입니다. 뭘 망설이십니까? 몇 년 전 패배인데 계속 붙잡혀 지내실 겁니까?”
시스로네스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아, 그래요. 폐하께서 무슨 고민을 하시는지 압니다. 그런데 폐하, 가장 원론적인 부분을 생각하시지요. 당신은 사크틸라와 바르시나의 주인인 국왕 폐하이십니다! 당신의 사람들과 땅을 버리시렵니까? 눈앞에 닥친 위기는 그겁니다! 폐하를 붙잡을 핑곗거리도 사라진 마당에 뭘 고민하십니까?”
에르난의 귀가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한 소리였다. 아니, 울리는 것은 귀만이 아니었다. 가슴도 함께 요동치는 듯했다.
아직도 참아야 하는가? 그렇지 않았다.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됨으로써, 에르난의 존재는 확실해졌다. 그는 왕이다. 바르시나의 왕이며, 또한 사크틸라의 왕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할 일은 확실했다.
“……예하, 나를 잡고 질질 끌어서라도 갈 기세입니다.”
에르난은 팔을 살짝 흔들며 말했다. 시스로네스가 워낙 꽉 붙잡은 탓에, 정말로 팔이 아팠다.
“아시면 빨리 채비나 하십시오.”
에르난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시스로네스는 그를 붙잡은 손을 놓았다. 에르난은 책상 위에 놓인 검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 * *
선장실 한가운데의 회의용 탁자 위에는 반도 남부의 지도가 펼쳐졌다. 에르난과 다른 지휘관들이 그 주변에 둘러서 있었다.
“사크틸라는 기존대로 오누바 성의 방어를 맡고, 우리는 성 밖 요새에 주둔할 것이다.”
에르난은 손에 쥔 지휘봉으로 오누바 근처의 요새를 가리켰다.
“그렇다면 사크틸라 군대와 합동으로 전투를 하지는 않는 겁니까?”
지휘관 중 한 사람이 물었다.
“기본적으로는 그렇네. 저번 전쟁의 경험으로 보아, 두 나라의 군대는 별로 잘 어울리는 편이 아니었어. 더군다나 기술 차이도 나지 않는가. 우리 쪽 총병을 효율적으로 운용하려면 우리끼리 움직이는 편이 낫네. 공성전보다는 야전에 적합한 부대가 아닌가. 사크틸라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원한다면 요새를 빌려주겠다고 했어.”
군대를 보내겠다는 연락에 사크틸라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렇게 되리라 예상한 듯, 사크틸라가 보내온 편지에는 바르시나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편지의 말미에는, 두 나라의 군대가 작전은 공유하되 전투 수행은 합동 부대를 운용하지 않고 각자 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여왕 폐하의 의견이라는 말과 함께.
이는 양국의 여론과 현실을 감안한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무조건적인 연합은 이미 실패를 겪었다. 그러니 적당히 거리를 두어 협력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협력하기 위해서는, 두 나라의 군대에 대한 신뢰가 필수적이다. 따라서 에르난은 아내의 제안이 기뻤고, 또 안심이 되었다.
레이테는 괜한 허세를 부릴 사람은 아니다. 그녀는 사크틸라만의 힘으로 성의 방어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또한 바르시나군이 독립적으로 작전을 수행할 만한 능력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에르난 역시 바르시나만의 힘으로 전투를 수행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물론 사크틸라도 마찬가지다.
손을 잡되, 전투는 별개로 수행한다는 방식은 총병 부대를 지휘하는 페레트에게도 반가운 일이었다. 골치 아픈 사크틸라인을 신경 쓸 필요 없이 훈련한 것을 펼쳐 보일 수 있으므로.
회의가 끝나자, 페레트는 갑판을 한 바퀴 돌면서 주변을 살폈다.
바르시나 병사를 태운 함대가 아라고를 출발한 지도 며칠이 지났다. 곧 목적지인 오누바에 도착한다.
바르시나 선박이 헤젤에게 공격당해 침몰했으며, 이 일이 참전의 원인이 되었다. 다시 배가 공격받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었다. 갑판에는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끝나면 이번에는 정말로 청혼할 겁니다.”
고개를 치켜들고 돛대를 살피던 중이었다. 어딘가에서 속삭임이 들려 왔다.
페레트는 고개를 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쩐지 귀에 익숙한 목소리다 싶더니, 세르지였다. 그는 이 배의 원래 선장이라는 대륙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세르지를 본 순간, 페레트의 표정이 팍 구겨졌다.
세르지는 또 왕에게 칭찬을 받았다. 바르시나가 파병을 논의하는 사이, 그는 대륙으로 가서 시스로네스를 데려왔다. 그의 가문이 소유한 빠른 배와 숙련된 선원 덕택에 추기경은 신속하게 반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혼이 불가능하다는 판결문을 가지고.
그로 인해 왕의 참전까지 일이 쭉쭉 진행되었으니, 왕으로서는 기분이 좋지 않을 수가 없다. 전쟁이 끝나면 세르지는 큰 상을 받을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페레트 경.”
세르지는 페레트를 발견하고 그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의기양양한 목소리였다,
“국왕 폐하를 위해 봉사하느라 수고가 많으십니다.”
“알면 갑판에서 소란 피우지 마시오.”
“시끄럽던가요? 조심한다고 했는데……, 죄송합니다. 경께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거든요. 오히려 감사해야지.”
“감사할 일이 뭐가 있다고.”
“있고말고요. 경께서 제게 큰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국왕 폐하를 위해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경처럼 군인으로 일하지는 못해도, 다른 봉사는 충분히 가능하더군요. 뭔지 아십니까?”
시스로네스를 데려온 일을 가리키는 것이 뻔했다. 세르지는 자랑할 준비가 다 되었다는 듯 함박웃음을 지었다.
“……사고나 치지 마시오. 하긴, 바르시나군 단독으로 움직일 테니 사크틸라인과 다툴 일은 없겠군.”
“예, 예. 얌전히 지내겠습니다.”
세르지는 휘파람을 불며 일행과 함께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재수 없는 놈. 페레트는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 * *
염려하던 헤젤의 공격은 없었다. 바르시나 함대는 무사히 오누바에 입항했다.
“폐하?”
항구에서는 팀파노 후작이 바르시나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에르난을 보더니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 원군이 오는 줄만 알았지, 왕이 직접 참전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오랜만일세, 후작.”
“이런, 여왕 폐하께서는 성벽 보수 현장을 살피러 가셨습니다. 바르시나군맞이는 제가 할 테니 다녀오시라 했는데, 그러지 말았어야 했군요……. 폐하는 물론이고 추기경께서도 오셨건만.”
팀파노가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에르난이 기대에 찬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 그런가? 부인께서는 정말 열심히 일하시는군. 좋은 일이야.”
에르난은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아쉬움이 드러나 있었다.
“지금 당장 여왕께 연락하겠습니다. 금방 오실 겁니다.”
팀파노는 전령을 불러 여왕에게 다녀오라 명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인물이 그를 붙잡았다.
“됐습니다, 후작. 연락하지 마십시오.”
“예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시스로네스의 얼굴에는 몇 년 만에 사크틸라에 돌아왔다는 기쁨 같은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전쟁을 앞둔 이의 긴장만이 나타났을 뿐이었다.
“폐하, 한시가 급하니 당장 전장으로 가셔야지요. 시간 낭비 하실 때가 아닙니다.”
“시간 낭비라니. 양국의 사령관끼리 만나는 건 당연하지 않습니까?”
에르난은 불쾌함에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시스로네스는 마치 에르난이 아내를 만나 시시덕거리기나 할 생각뿐이라고 보는 듯했다.
“어차피 별도로 작전을 수행하자고 협의가 되어 있잖습니까?”
“아니, 그렇다 해도 아내와 인사 정도는…….”
“저는 두 분 폐하께서는 영원한 부부라는 증명을 받아 왔지요. 이혼은 불가능하다고.”
시스로네스는 에르난의 코앞으로 다가와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당장 에르난을 공격하기라도 할 것처럼 살기 어린 기세였다.
“제가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서요. 그러기 위해 바르시나가 필요한 거고. 송구하지만, 여왕 폐하에게 쓸모 있지 않으면 당신은 그분의 남편으로 있을 필요가 없소. 그런데 이혼은 안 된다고 하니, 이기지 못한다면 그냥 죽으시오. 아내 발목 잡는 남편 하지 말라는 소리요. 네놈이 여왕의 남편으로서 가치가 있다는 걸 승리로 증명하란 말이야!”
“예, 예하! 진정하십시오!”
거친 언사에 놀란 팀파노가 시스로네스에게 다가가 그를 붙잡았다. 사크틸라의 추기경에게 모욕당하는 왕을 본 바르시나인들이 사크틸라에 불만을 품게 되면 곤란했다.
시스로네스는 팀파노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손이 팀파노를 붙잡았다. 에르난이었다.
“폐하?”
“괜찮네, 후작.”
에르난의 표정은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오랜만에 사크틸라에 와서 잠시 기분이 들떴지만, 추기경의 말씀이 옳지. 고견 감사합니다, 예하. 자, 다들 들었겠지. 곧바로 요새로 이동한다.”
“정말로 여왕을 안 만나고 가신다고요? 괜찮으시겠습니까?”
팀파노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 들었지 않나? 레이테는 승리한 후 만나겠어. 어차피 금방 끝날 테니 상관없네.”?
#141
성벽의 보수란 단순히 적의 포격을 맞아 구멍 난 부분을 틀어막기만 하는 작업이 아니었다. 여러 차례 공방전을 벌이며 터득한 요령을 활용하여 구조 변경까지 함께 이뤄졌다.
여왕은 그것을 설명한 설계도를 보고 있었다. 설계도를 읽는 건 쉽지 않았으나, 공사 감독의 설명을 따라 차근차근 살피니 그럭저럭 이해할 만했다.
“그러면 일꾼을 더 보내도록 지시……, 어.”
설계도 위로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레이테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며칠 동안 맑았던 하늘이 또 흐려져 있었다. 근처에서 대기하던 카테리나가 다가와 레이테에게 망토를 덮어 주었다.
“우기인 겨울도 다 끝났고 이제 3월인데, 여전히 비가 너무 자주 내리는걸. 그래도 맑을 때 공사가 많이 진행되었으니 다행이야.”
“예. 폭우가 쏟아지지 않는 한 마무리 작업에는 문제없습니다.”
“그래도 빨리 끝내는 편이 좋겠지. 일꾼을 더 보내라고 지시하겠네.”
“감사합니다, 폐하.”
감독과의 대화를 마친 레이테는 곧바로 말에 올라타 항구로 향했다. 잠시 짬을 내어 공사현장에 왔지만, 지금쯤이면 바르시나 함대가 입항했을 것이다.
예상대로 항구는 바르시나 함선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함대의 규모에 비해 보이는 사람은 적었다.
한쪽에 모여 있던 바르시나군의 지휘관들이 여왕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역시 함선의 수에 비해 적은 인원이었다.
지난 전쟁에서 패배를 겪은 후, 바르시나 군대는 거의 재탄생이라 불러야 할 만큼 대대적인 개편이 이뤄졌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대다수 지휘관은 레이테도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물론 눈에 익은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여왕 폐하.”
“페레트 발란시오 경이었던가? 오랜만인걸. 경이 바르시나군을 총지휘한다고 들었네.”
남편이 페레트를 기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레이테는 무척 놀랐었다. 불명예스럽게 도주한 자를 재신임하다니, 그 정도로 페레트의 능력이 출중한가?
“아, 그랬었지요. 하지만 조금 달라졌습니다. 총사령관의 지휘봉은 제가 아니라 왕께서 갖고 계십니다.”
“왕이라니……, 설마 에르난?”
레이테는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에르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왕께서는 본대를 이끌고 곧바로 성 밖 요새로 향하셨습니다. 여왕 폐하께 인사를 드리기 위해 저희만 남은 것입니다.”
페레트가 말했다.
‘의욕이 넘치는걸?’
어쩐지 에르난의 모습이 상상되어서 레이테는 피식 웃음 지었다. 레이테에게 남편의 첫인상은 자신감이 넘쳐 여유까지 느껴지는 모습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아내도 만나지 않고 가다니. 그 점은 조금 섭섭했다.
“여왕께 인사도 안 드리고 갔다니…….”
여왕을 수행하는 사크틸라 귀족들도 수군거렸다. 레이테는 그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눈치를 보냈다. 이제 막 바르시나군이 도착했는데, 벌써 갈등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다.
팀파노가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실은 추기경이 워낙 닦달해서…….”
“추기경? 시스로네스가 왔나?”
“예. 마침 오는군요. 선장 한 사람이 추기경께 자기 배를 축복해 달라고 부탁해서 거기에 다녀오는 겁니다.”
팀파노의 시선을 따라가니, 작은 배에서 시스로네스가 내리고 있었다. 레이테의 표정이 단숨에 밝아졌다.
“시스로네스!”
“여왕 폐하!”
레이테는 추기경에게 다가가 그의 반지에 입을 맞춰 인사하려 했다. 그러나 시스로네스가 레이테의 앞에 무릎 꿇는 것이 더 빨랐다.
“일을 마무리 짓고 귀환하겠다는 연락은 받았어요. 그렇다 해도 이렇게 빨리 돌아올 줄이야! 혹시 바르시나 함대와 함께 온 건가요?”
“그렇습니다. 폐하, 많이 야위셨군요. 그래도 잘 지내시는 듯해 기쁩니다. 무척 열성적으로 업무에 임하신다 들었습니다.”
시스로네스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를 바라보는 레이테도 마찬가지였다. 눈가에 고인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레이테는 계속 눈을 깜박거려야 했다.
“뭐……, 노력은 했답니다. 예하께서 내게 많은 걸 가르쳐 준 덕택에 가능했지요.”
울먹거리던 시스로네스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남편이나 고해 사제의 도움 없이도 훌륭하게 나라를 이끌어온 여왕을 보니 가슴이 뿌듯했다.
레이테는 시스로네스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한참 웃음을 주고받았다.
“아 참, 하러 가신 일은 어떻게 되었나요?”
기쁨으로 벅차오른 마음이 조금 진정되고 나서야 레이테는 물었다. 시스로네스의 모습을 보니 결과를 짐작할 만도 했다. 그렇지만 제대로 답을 듣고 싶었다.
“송구하오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이혼 요청은 거절되었습니다. 두 분 폐하의 결혼은 완벽하게 적법하므로 영원히 풀 수 없는 언약이라 이혼할 수 없다고 합니다. 교황 성하 명의의 판결문도 가져왔으니 천천히 살펴보시지요.”
그 순간, 레이테의 눈에서 억지로 참고 있던 눈물이 한 방울 흘렀다. 레이테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감정을 추스르려 애썼다.
눈물은 더 흘리지 않고 참았다. 그러나 붉게 상기되는 얼굴은 통제할 수 없었다.
“정말로 수고 많으셨어요. 감사…… 합니다.”
눈앞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이혼 문제에 중립적인 척, 무관심한 척할 필요는 더 이상 없다. 송구하다, 안타깝다는 시스로네스의 표현도 사실상 장난이나 다름없다. 레이테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기분 좋게 시스로네스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그러면 이제 남편과…… 아, 에르난. 에르난은 바로 성 밖으로 향했다고 들었는데, 예하께서 그걸 재촉했다고…….”
닦달했다는 팀파노의 표현으로 보아, 시스로네스는 에르난에게 꽤 험악한 말을 쏟아냈을 것이다.
“예, 제가 그랬습니다.”
“왜죠!”
레이테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루빨리 전쟁을 끝내라는 뜻이었습니다. 물론 이는 여왕 폐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분 폐하는 언제나 동등하시니 말입니다.”
동등하다는 말을 얼마 만에 듣더라. 레이테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공성전은 방어가 탄탄한 성을 두고 싸우는 특성상 지난한 소모전이 될 수밖에 없긴 합니다. 그렇다고 성을 방치하고 무작정 공세에 나설 수도 없지요. 오누바는 버려서는 안 되는 거점이고, 또 성안의 사람들도 지켜야 하므로. 그런데 이제 성 밖에서 운용할 수 있는 군대가 생겼습니다. 효율적으로 쓰셔야지요.
폐하께서는 승리하실 일만 남았고, 오로지 그것에만 집중하셔야 합니다. 승자가 되셔서 마찬가지로 승자가 된 남편을 만나십시오. 지난날 패배자의 모습은 완전히 씻어낸, 승리한 왕이 되십시오.”
* * *
바르시나군은 동쪽 성문을 통해 오누바 밖으로 나왔다. 신기하게도 성벽을 완전히 포위했어야 할 헤젤군이 보이지 않았다.
“헤젤군은 급료 지불이 제때 이뤄지지 않아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브라간사는 오누바 공격만큼이나 병사들을 달래는 데에 열심이고요. 그러다 보니 주력 전선이 아닌 이런 곳은 포위가 허술한 편입니다.”
길을 안내하는 사크틸라 귀족이 에르난에게 설명했다.
“그렇다 해도 헤젤군이 정말 안 보이는걸.”
“아침 일찍 전투가 한 차례 있었습니다. 여왕께서 바르시나군이 움직이는 데에 지장이 없도록 길을 만들어 두라고 지시하셨거든요.”
고맙기도 하지. 에르난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는 곧 서글픈 기분에 사로잡혔다. 고맙다는 인사조차 못 하다니.
‘눈 딱 감고 몇 시간만 자존심을 버릴걸 그랬어…….’
시스로네스가 워낙 매섭게 그를 밀어붙이는 탓에, 에르난은 오기가 생겨 곧바로 성 밖으로 나왔다. 보란 듯이 순식간에 이겨 주마.
그런 마음으로 패기 넘치게 움직인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에르난은 지금 후회하고 있었다. 아내를 만났어야 했다.
레이테. 에르난은 소리 내지 않고 입술만 움직여 아내를 불러 보았다. 이름마저 사랑스럽지. 에르난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를 소리 내어 부르고, 품에 안고, 입을 맞추고 싶다. 다시 협력하게 되었으니 잘 부탁한다고 손을 내밀어 악수도 꼭 하고 싶다. 갑옷을 입고 나란히 말에 타는 것도 좋겠다. 얼마나 뿌듯할까.
에르난은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된 이상 정말로 빨리 끝내 버릴 테다.
“요새로 가는 길이 마치 산책로 같군요.”
왕의 뒤를 따르던 에르난의 부관 중 한 사람이 사크틸라 귀족에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에르난은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경사로 양옆에 보기 좋게 수풀이 우거져 있다.
“예. 원래 이 근방은 봄이면 사람들이 꽃구경을 나오는 곳입니다. 날이 더 따뜻해지면 장미가 잔뜩 피거든요. 지금 향하는 요새도 경관이 좋기로 명성이 자자합니다. 바르시나 분들의 취향에 맞을 테니, 지내는 동안 심심함은 덜할 겁니다.”
“아름다워서 나쁠 건 없지만, 요새는 요새다운 기능이 우선이지요. 우리는 여행객이 아니라 군인인지라.”
어깨를 으쓱거리는 사크틸라 귀족에게 부관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크틸라 귀족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에르난은 재빨리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네. 여왕께서 주변 요새 정비에 대단히 신경 썼다고 들었거든. 지금 가는 요새도 백 년 넘은 낡은 구조를 최신식으로 개조한 곳이 아닌가? 사크틸라가 꼼꼼히 준비했고, 바르시나는 철저히 훈련했으니 안전할 걸세.”
“맞습니다, 폐하.”
에르난의 찬사에 귀족의 표정이 비로소 풀어졌다. 부관은 왕의 의도를 깨달은 듯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안심할 수가 없군.’
지난 연합 때에 비하면 나은 분위기라지만, 두 나라 사이의 신경전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이 부분을 정말로 조심해야 한다.
경사가 조금씩 가파르게 변하면서 요새가 가까워졌다. 바르시나 군대가 가까이 다가가자 요새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해자를 건너는 다리에 서서, 에르난은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 오누바 성곽이 보였다.
저곳 어딘가에서 레이테는 필사적으로 제 일을 할 것이다. 그 빛나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며, 에르난은 말을 몰아 성안으로 들어갔다.
* * *
헤젤 병영의 연병장에는 장창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그곳에는 한 하급 장교의 머리가 효수되어 있었다.
급료 지불을 가장 강경하게 요구하던 그는 귀족 출신인 데다 병사들 사이의 평판도 좋았다. 사령관인 브라간사는 되도록 그를 건들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반란을 일으킬 기미가 보이자 별수 없었다. 브라간사는 그를 처형했다. 이틀 전 일이었다.
이후 병영의 분위기는 기존보다 더 살벌하게 가라앉았다.
그런 가운데, 바르시나 군대가 오누바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올 것이 왔군.’
오누바 항구를 치면서 바르시나의 배와 사람들마저 공격하고 말았다. 브라간사는 진노하여 관련자들을 처벌했다.
브라간사는 그들의 목을 바르시나로 보낼 생각까지 했었다. 바르시나를 공격할 마음이 없음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공개적으로 그랬다가는 사크틸라를 공격할 명분이 애매해진다. 브라간사는 모든 일이 바르시나 때문이라는 주장으로 이곳까지 왔으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브라간사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바르시나의 개입을 대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마저 헤젤군 내부의 상황이 좋지 않아 만족스럽게 이뤄지지 못했다.
“바르시나군은 북쪽 요새로 이동했습니다.”
정찰대의 장교가 브라간사에게 설명했다.
“아침부터 뜬금없이 성 동쪽을 뚫으려 한다 싶었더니 그런 이유였군.”
헤젤은 사크틸라군의 기습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처형한 귀족이 원래 지휘했던, 분위기가 뒤숭숭한 부대를 그곳에 배치해 둔 탓이었다.
오누바 동쪽은 전략적 가치가 적어 헤젤도 사크틸라도 최소한의 병력만 배치했다. 그런 곳에서 당할 줄은 몰랐다.
‘시작이 좋지 않아.’
바르시나의 육군 전력은 헤젤이나 사크틸라에 비하면 보잘것없다. 하지만 에르난 왕은 적극적으로 대륙의 총기를 도입했다. 브라간사가 먼저 하려 했지만 실패한 일이다.
에르난을 제대로 상대할 수 있을까. 브라간사는 불안해졌다. 그는 침착한 모습을 보이려 애쓰며 명령을 내렸다.
“군사를 나눠 요새 쪽으로 보내야겠군. 바르시나 군을 먼저 처리해야 한다.”
#142
에르난은 군사를 이끌고 요새에 자리를 잡았지만 농성전을 할 마음은 없었다. 이곳은 바르시나군의 안전한 주둔지일 뿐이었다.
사크틸라가 어찌나 보수를 잘해 뒀는지, 요새는 원래 있던 구식 해자를 제외하면 오래된 느낌이 거의 들지 않았다. 이는 병사들의 사기 안정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벌판에 병영을 세우고 주둔하는 것보다 환경도 한결 쾌적하다.
시설을 살피고 지휘관들의 보고를 받다 보니 요새에서 보내는 첫날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날 밤, 에르난은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바르시나군의 계획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편지에는 대략적인 사항만 적고, 자세한 설명은 내일 아침 편지를 가지고 오누바에 갈 장교가 하게 된다.
일단 안부 인사로 시작하자. 에르난은 자신과 바르시나군이 무사히 요새에 도착했다는 말부터 썼다. 이어서 아내도 만나지 않고 가서 미안하다는 문장을 쓰고 나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사크틸라에서의 첫날밤이 이런 식일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재회의 기쁨에 마냥 흥겹고 뜨거운 밤을 보내리라는 기대는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에르난은 놀러 온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조금. 조금은 기대해도 되는 것 아니었나.
“으으……, 망할 시스로네스…….”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펜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물론 시스로네스는 부부의 관계 유지를 위해 누구보다 노력한 사람이다. 안다. 그래도 지금 상황은 너무했다.
일단 이기자. 그리고 시스로네스에게 복수하자.
“좋아. 브라간사 다음은 시스로네스야. 가만두지 않을 테다.”
에르난은 실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편지를 썼다. 손을 어찌나 빠르게 움직였는지, 펜이 움직이며 종이를 사각사각 긁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바르시나와 사크틸라 모두 힘을 내서 평화를 되찾읍시다. 부인과 사크틸라의 승리를 기원하며, 나와 바르시나 또한 승리로 보답하겠습니다.
편지를 마친 에르난은 펜을 내려놓았다. 기지개를 켜며 창밖을 바라보니, 달이 뿌옇게 번져 보일 정도로 밤하늘이 흐렸다.
내일은 비가 올 모양이다.
* * *
에르난의 예상대로, 다음 날은 비가 내렸다. 빗줄기가 가늘고 부슬부슬한 봄비였다.
“병사들의 적응을 위해 간단한 훈련을 할 생각이었습니다만…… 송구합니다.”
“자네가 송구할 게 뭐가 있나. 날씨가 안 도와주는 걸 어떡해.”
여왕을 만나고 오느라 뒤늦게 요새에 합류한 페레트는 민망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에르난은 별일 아니라는 듯 가벼운 투로 답했다.
날씨는 사람의 힘으로 조절할 수 없으므로, 비가 내리면 내리는 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실망으로 가슴이 쓰린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비 오는 날에는 화승총을 사용할 수 없다. 총을 쏘기 위해서는 심지에 불을 붙여야 하니까.
따라서 비나 눈이 자주 내리고 습한 겨울은 총병을 운용하기에 그다지 적합한 때가 아니었다. 다행히 이제는 봄이다. 날씨도 점점 건조해질 것이다.
“비가 올 수도 있지. 자네도 병사들도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는데, 너무 무리하지 말게.”
그러나 비는 멈추지 않았다.
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며칠째 계속 비만 왔다. 하루 종일 오는 것은 아니지만 수시로 오락가락하며 습한 날씨가 계속되었다.
봄답게 기온은 점점 오르는데 비는 그치지 않는다. 후덥지근한 기운에 군사들은 쉽게 짜증을 냈다.
“다행이라면 날씨 때문에 불쾌해하는 사람이 우리 군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헤젤 군의 사기도 엉망인 듯합니다. 방어 시설이 제대로 보수되지 않은 것은 육안으로 보일 정도였고, 감시도 그다지 삼엄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만도 하겠군. 헤젤이 오누바를 포위한 지도 3개월이 지났네. 슬슬 지칠 때야.”
에르난과 지휘관들은 헤젤군 주둔지 근처를 살핀 정찰대의 보고를 받았다.
“폐하, 이 기회에 적의 본진을 바로 치는 건 어떻습니까?”
페레트가 말했다. 그는 패배했던 지난 전쟁 때에도 가장 적극적인 공격을 주장했던 사람이다.
적극성의 바탕에는 자신감뿐만 아니라 출세욕 또한 있다. 에르난은 적당히 페레트를 통제해야 했다.
“아니. 그건 위험하네. 아무리 허술해 보여도 브라간사는 브라간사야. 어떻게든 분위기를 추슬러 대응하겠지. 욕심을 참고, 우리에게 유리한 곳으로 적을 끌어들이는 편이 나아.”
페레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시간을 끌 생각은 없어. 날이 개는 대로 출전할 것이다.”
* * *
바르시나인의 신앙심은 별로 깊지 않다. 하지만 전쟁같이 목숨이 달린 상황이라면 병사들도 절대자에게 의지하고 싶기 마련이었다.
일요일 이른 아침. 요새 내의 작은 성당에서는 바르시나 불량 신자들의 엉터리 기도가 힘껏 울려 퍼졌다.
‘레이테가 들으면 경악했을 소리들이군.’
에르난은 병사들의 가장 앞에서 그들과 함께 기도 같지 않은 기도를 했다. 왕이 한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큰 위안이 된다.
엉망진창이었던 미사를 마치고 성당 밖으로 나오니, 습한 공기와 흐린 하늘, 조금 강한 바람이 에르난을 맞이했다. 그나마 전날 밤부터 비가 그친 것이 다행이었다.
“폐하!”
맞은편에서 한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에르난에게 다가왔다. 정찰대의 지휘관이다.
“헤젤군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오누바 성이 아니라,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바르시나의 참전이 꽤 거슬리긴 했던 모양이군. 좋아. 우리도 움직인다!”
에르난은 다소 과하게 들릴 만큼 호쾌한 목소리로 외쳤다. 불안감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였다.
때가 좋지 않다.
아직은 바르시나군의 주력 무기인 총을 안정적으로 사용할 만한 날씨가 아니었다. 연이어 내린 비로 날씨가 습한 탓에 화약의 상태가 좋지 않을 것이다.
‘브라간사는 일부러 이때를 기다렸을지도 몰라.’
그는 에르난보다 먼저 화승총에 관심을 보인 사람이다. 총기를 본격적으로 도입하지 못했다 해도, 무기의 특성은 그럭저럭 알 것이다.
비가 오면 화승총은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총의 무력화를 노리겠답시고 그런 궂은 날에 움직이면 병사들이 금방 지친다. 헤젤군의 사기가 좋지 않다고 하니, 브라간사로서는 지나친 모험은 피하는 듯했다. 대신 여건이 나아지자 곧바로 군사를 움직인 것이다.
에르난은 군사 일부를 이끌고 요새 밖으로 나왔다.
오누바 근방은 평야 지대지만 크고 작은 강줄기가 대단히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렇다 보니 바르시나군의 대형도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말에 탄 에르난은 기대 어린 흥분과 불안이 반반씩 뒤섞인 분위기의 총병들을 잠시 바라보았다. 저들의 실전 배치는 이번이 처음이다.
정오 때쯤 되자, 바르시나군과 헤젤군은 서로의 모습이 보일 만큼 가까워졌다.
내부가 얼마나 곯아 있든, 헤젤군의 선두에 보이는 기병대가 겉으로 뿜어내는 위압감은 상당했다.
저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 본격적인 돌격에 앞서 대포의 포격이 오가는 사이, 맞은편의 적군을 바라보는 에르난의 마음은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겉모습은 달랐다. 위엄 넘치는 갑옷을 입고, 화려하게 치장한 말에 탄 왕의 모습은 오만할 만큼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모두가 긴장할 지금, 사령관이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헤젤의 기병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르난이 손에 든 지휘봉을 살짝 들자, 페레트가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공격 준비!”
열을 맞춰 선 병사들이 총구에 화약과 총알을 장전하고 자세를 잡았다.
“발포하라!”
탕! 총성이 일제히 울렸다. 총구에서 뿜어져 나온 연기가 자욱한 가운데, 총을 쏜 병사들은 대열의 뒤로 이동했다. 그러자 두 번째 줄이었던 병사들이 앞으로 나와 사격했다. 여태까지 훈련한 대로의 움직임이었다.
일정 수준 이상의 화력을 내려면 병사들이 대규모로 한꺼번에 총을 쏘아야 한다. 그리고 지체없이 연사가 이어져야 한다. 하지만 화승총의 재장전은 대단히 번거롭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
에르난은 화승총의 느린 장전 속도를 보완하기 위한 방법을 페레트 등과 한참 의논했다.
그 결과 총병을 여러 열로 배치하는 방법이 고안되었다. 선두열의 병사들이 발포 후 대열의 가장 뒤쪽으로 가면, 다음 줄의 병사들이 곧바로 이어 사격한다.
헤젤 기병들은 눈에 띄게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갑옷으로 온몸을 무장한 기사가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날붙이의 공격에는 끄떡도 없던 갑옷이지만, 총알은 그것을 뚫고 기사의 몸에 상처를 입혔다.
말 또한 총에 맞아 쓰러졌다. 설령 총에 맞지 않았다 해도, 요란한 총성에 놀라 멈춰 서거나 날뛰며 대열을 흩뜨렸다.
‘좋아!’
상황을 지켜보는 에르난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완벽한 공격은 아니었다. 총을 쏘아도 불발되는 경우가 드문드문 보였다.
그래도 저 정도면 성공적이다. 적군에서 가장 위협적인 존재인 중장 기병을 효과적으로 제압하지 않나.
하지만 이는 에르난의 착각이었다.
“공격 준비…… 어서! 빨리하지 못하나!”
페레트의 말투가 점점 거칠어졌다. 시작은 차분했으나, 공격이 계속 이어지면서 헤매는 병사들이 점점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병사들의 잘못이라고만 할 수는 없었다. 그보다는 총이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탓이었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화약은 제구실을 하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바람까지 점점 강해졌다. 명중률이 조금씩 떨어졌으며, 총을 쏘기도 전에 방아쇠 쪽의 화약이 바람에 흩날려 버리기까지 했다.
그러는 사이 헤젤의 기병대는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브라간사는 선발대가 쓰러지는 것을 보았을 텐데도 기병을 물리지 않고 계속 진격시켰다. 에르난은 그 전략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나, 곧 생각이 바뀌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던 거야!’
날씨가 좋지 않으니, 어느 정도 피해를 입는다 해도 기병대가 화승총의 공격을 돌파할 수 있으리라 본 것이다.
기병대가 가까이 다가오자 바르시나 병사들은 당황했다. 저들과 정면으로 부딪치면 총병대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어떡해야 하나? 아군 기병대의 대다수는 요새에서 대기 중이다. 이런 상황을 예측하지 못하고 데리고 나오지 않은 것이다.
이를 악물던 에르난은 창병대를 떠올리고 그들을 투입하라고 명령했다. 장창이라면 기병의 움직임을 견제할 수 있다. 그렇게 시간을 버는 동안 총병대는 후퇴해야 한다.
그러나 바르시나군 창병의 숫자는 많지 않았다. 적의 기병대를 완전히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총병대는 간신히 후방으로 물러날 수 있었다. 적잖은 병사가 적의 공격에 쓰러진 뒤였다.
“폐하! 퇴각해야 합니다!”
페레트가 다가와 외쳤다. 고개를 끄덕이는 에르난의 표정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 * *
다음 날, 바르시나군은 전사자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렀다. 장례식에 참석한 에르난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는 지난밤 한숨도 못 잤다.
‘앞으로 괜찮을까? 승리할 수 있을까?’
왕은 불안에 잠식당해 있었다.
전멸은 아니었다. 급히 투입한 창병 덕택이었다. 요새로 돌아와서 확인해 보니, 생각보다는 많은 수가 살아남았다. 치명적인 피해는 아니고, 더 싸우는 데에 무리 없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패배는 패배였다. 에르난은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한 번 전투에서 진다고 하여 그것이 전쟁 자체의 패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승리로 끝났던 탐브레 토벌 때에도 자잘한 패배는 여러 차례 겪었다.
더군다나 어제 전투는 애초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지도 않았다. 서로가 상대의 간을 보기 위한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지난 전투의 충격적인 패배가 문제였다. 2년 하고도 5개월이 더 지난 일이지만 에르난은 한순간도 그때를 잊지 못했다. 왕 주제에 포로로 잡혔던 치욕의 기억이다.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일단 이기고 봐야만 했다.
에르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재빠르게 손으로 얼굴을 가려 햇빛에 눈이 부신 척했다.
얄궂게도, 아군을 괴롭혔던 날씨는 이제 완벽하게 맑아져 있었다. 밝게 갠 하늘에서는 사크틸라 남부다운 강렬한 햇볕이 내리쬐었다.
하늘에게마저 조롱당하는 것 같았다.
* * *
바르시나군의 패배 소식을 듣고서도 레이테의 표정에는 별 변화가 없었다.
“남편은 무사한가?”
여왕이 물었다. 헤젤군이 성문에 돌격해 왔으나 무사히 물리쳤다는, 이제는 거의 일상이 되어 버린 보고를 들었을 때와 똑같은 목소리였다.
“예, 왕께서는 상처 하나 입지 않으셨습니다.”
“다행이군.”
감정을 죽인 반응이었으나, 그녀의 눈빛에는 안도하는 기색이 스쳤다.
레이테의 가슴은 떨리고 있었다. 에르난도 무사하고, 병력 피해가 심하지도 않다니 다행이었다. 하지만 에르난은 실질적인 피해 이상의 충격을 받았을 것이 뻔했다.
그가 무너지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 잠시 생각하던 레이테가 말했다.
“전투 경과를 들어보니, 기병대의 방어에 창병이 효과적이었던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폐하.”
“바르시나 군대는 총병 위주로 구성했기에 창병의 수가 적다고 알고 있네. 그러니 사크틸라군 창병을 좀 보내면 어떨까 싶은데. 우리는 공성전을 치르고 있기에 창병이 많이 필요하지 않아.”
여왕의 말을 들은 바르시나 전령은 난감한 듯 얼굴을 굳혔다. 배석한 사크틸라 지휘관들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사크틸라와 바르시나는 목적만 같을 뿐 각자 작전을 수행하기로 했지. 하지만 필요할 때는 협력해야 하지 않을까?”
“……즉답을 드리기 힘듭니다. 돌아가서 의논해 보겠습니다.”
“물론이야. 답변 기다리겠네.”
여왕의 말투는 조심스러웠다. 협력 결과 파멸하고 말았던 지난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바르시나만의 힘으로 헤젤을 상대하기는 무리 같았다. 에르난은 승리해야 한다. 사크틸라와 바르시나의 평화를 위해, 또 에르난 자신이 패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143
또 패배하는 건 아닐까?
지휘관과 일반 병사를 가리지 않고 바르시나군 전체에 이런 공포가 단숨에 퍼져나갔다.
그런 상황에서 창병을 지원하겠다는 사크틸라의 제안이 들어왔다. 이에 대한 지휘관들의 반응은 대체로 비슷했다.
“총병대가 안심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창병의 수를 늘리는 편이 좋습니다. 장창 전술이야 어느 나라나 비슷하니 크게 혼란스럽지도 않을 겁니다. 하지만…….”
“페레트 경의 말대로 아군의 방어력 강화에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그렇지만…….”
지휘관들은 하나같이 끝까지 발언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에르난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차마 못 하는 말이 무엇인지 물을 필요도 없었다. 에르난도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아내의 제안은 대단히 적절했다. 아군의 약점 보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사크틸라 병사이지 않나?
지난 전쟁에서 바르시나와 사크틸라의 연합군은 패배했다. 패배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양국의 군대가 화합하지 못하고 물과 기름처럼 겉돌았던 문제가 컸다.
그런 상황의 반복을 피하기 위해, 이번에는 아예 군대를 따로 운용하고 있다. 그런데 다시 연합군을 구성한다? 과연 이번에는 지난번과 같은 갈등이 없으리라 장담할 수 있나?
지휘관들은 이런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연합이 이뤄진다면, 일반 병사들도 같은 불안을 느낄 것이다.
물론 머리는 연합의 필요성을 빠르게 받아들였다. 본국에 남아 있는 귀족이라면 정치적 맥락을 고려해 군사를 받지 말자고 주장하겠으나, 전장의 지휘관은 다르다.
과거의 패배로 인한 중압감에 짓눌려 있는 만큼, 그들은 승리가 간절했다. 사크틸라와 본격적으로 손을 잡아서라도 일단 이기고 싶다. 지휘관들은 입을 모아 창병을 지원받았을 때의 장점을 이야기했다.
동시에 과거의 중압감이 문제였다. 과거가 반복될까 두려운 마음에 차마 제안을 받아들일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이다.
‘내가 강하게 밀고 나가면 이들은 나를 따를 것이다.’
에르난은 확신했다. 이미 다른 바르시나인들도 이성적으로는 지원군의 필요성을 인정하니까.
하지만 불안하기는 에르난도 마찬가지였다.
망설임이 길어지면 안 된다. 그러나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
헤젤은 바르시나군이 머무는 요새를 꾸준히 공격했다.
공격에 대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요새는 대단히 잘 정비되어 있어 어지간한 공격에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성벽 위에서 밖을 향해 총을 쏘면 무척 효과적인 방어가 가능했다.
또한 헤젤에게는 바르시나군을 총공격할 여력이 없다. 오누바를 포위해야 하므로.
그런데 자잘한 수비전이 반복되면서, 에르난은 상황이 이렇게 된 이유가 헤젤의 병력 부족 때문만은 아님을 깨달았다.
‘나를 이곳에 묶어 두려는 거야.’
브라간사는 바르시나의 총병이 야전용이라는 사실을 눈치챈 듯했다. 그래서 요새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는 애초에 요새를 점령할 생각이 없다.
에르난과 그의 군대는 작은 성 하나를 지키자고 사크틸라에 온 것이 아니었다. 밖으로 나가서 공격해야만 한다.
다른 지휘관들의 의견도 비슷했다. 공격하자.
하지만 바르시나만의 힘으로 요새 밖에서의 승리를 보장할 수 있을까?
* * *
군주의 결정이 가진 무게는 대단히 중했다. 따라서 신중함은 필수였다. 하지만 레이테는 결정을 계속 미루는 에르난의 태도가 답답했다.
동시에 남편이 안타깝고 불쌍했다. 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할 만큼 부담감에 시달리고 있다는 뜻이니까.
“예하께서 바르시나군이 머무는 요새에 한 번 다녀오면 어떨까요?”
레이테는 시스로네스를 불러 말했다.
시스로네스는 당장 요새에 가서 전투 준비를 하라며 에르난을 들볶았던 사람이다. 그때 같은 기세로 다시 에르난을 보채면, 아니 설득하면 괜찮지 않을까?
레이테의 생각과 달리, 시스로네스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곳에 가지 않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바르시나인을 괜히 자극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가요? 하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기다려야지요. 결정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초조해지지 마십시오.”
의외였다. 시스로네스라면 에르난의 귀에 대고 윽박질러서라도 일을 진행하자고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추기경의 말이 옳다. 억지로 연합해 봤자 좋은 결과를 못 낼 것이다. 지난 패배가 그를 증명하지 않았나.
협력은 자발적으로, 상대를 존중하며 이뤄져야 한다.
“그동안 사크틸라는 사크틸라가 할 일을 하면 됩니다.”
“그래요……. 우리는 우리의 적을 없애야겠지요.”
헤젤은 바르시나를 공격하기 위해 전력을 둘로 쪼갰다. 그래서 오누바 포위는 약해져 있다. 적극적인 공세에 나설 때다.
“바르시나는 등장만으로도 우리에게 기회를 주었군요.”
“맞습니다. 기회를 주고받으며 이용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협력 아니겠습니까?”
* * *
오누바를 포위한 헤젤군의 전력은 전보다 눈에 띄게 약화되어 있어요. 당신과 바르시나 덕택이지요. 브라간사는 사크틸라보다 바르시나를 상대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으니까요.
그만큼 헤젤에게 당신의 군대는 위협적인 존재라는 뜻이겠지요? 브라간사의 공격을 막느라 바르시나군이 고생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나와 사크틸라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반격에 나서려 해요. 이 전쟁을 끝낼 겁니다.
총공격에 나설 것이나, 일부 병력은 만약을 대비해 남겨 두겠습니다. 바르시나에 도움이 되리라 믿어요.
기회를 준 바르시나에 감사를 전합니다. 바르시나의 승리와 평화 또한 기원합니다.
레이테의 편지를 읽는 에르난의 눈이 요동쳤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 고마움과 부끄러움이 한 번에 몰려왔다.
사크틸라 전령이 여왕의 편지를 가져오자, 에르난은 각오하고 그것을 열었다. 원군을 받을지 안 받을지 결정을 내리라는 재촉일 것이 분명하다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달랐다. 레이테는 자신의 계획을 알리며 남편에게 감사를 표했다. 바르시나의 걱정을 조롱하는 대신 그것을 품에 안고 위로하며 존중했다.
‘기회를 준 바르시나라니.’
이런 식으로 표현할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레이테는 남편을 믿어준다.
그는 깨달았다. 신뢰는 불안과 공포를 이긴다.
“잠깐 기다리게! 사크틸라에 병력을 요청하겠어.”
에르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돌아가려는 사크틸라 전령을 도로 불러 세웠다.
* * *
레이테는 자신의 갑옷을 만지작거렸다. 갑옷은 서쪽으로 저무는 태양의 빛을 받아 번쩍거렸다.
내일 출전 때, 이것을 입을 수 있을까? 배웅을 위해서가 아니라, 병사들과 함께 성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
여왕은 그들을 지휘하고 싶었다.
물론 혼자서는 무리다.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레이테는 망설이고 있었다.
단순히 경험을 쌓거나 구경이나 하겠다는 마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여왕의 의지를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여왕은 싸움을 할 줄 모르니까.
‘시작하기에 많이 늦었다 해도 검술을 배워야 했을까. 이제는 내 팔다리를 자르겠다고 나타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탐브레가 세상에서 사라진 지도 몇 년이 되었다. 하지만 칼을 손에 쥔다고 생각하면 여전히 막연한 두려움이 몰려온다. 레이테는 한숨을 쉬었다.
“폐하, 많이 긴장되시나요?”
한숨을 쉬자마자 들려오는 목소리에 레이테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카테리나가 와 있었다.
“걱정 마세요. 잘 하실 거예요.”
“고, 고마워요…….”
“갑옷이 참 멋지게 빛나지요? 낮 동안 시녀들이 정말 열심히 닦았답니다. 내일 입으시는 데에 지장 없도록 완벽하게 준비했어요.”
“아…….”
레이테가 말을 더듬거리자 카테리나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화승총은 갑옷을 뚫는다지만, 헤젤군이 총을 쓴다는 말은 못 들었어요. 더군다나 사크틸라 최고의 기사들이 폐하를 지킬 테니, 안전은 걱정 마시고 멋지게 승리하세요.”
카테리나는 여왕이 갑옷을 입고 전장에 당연히 나가는 줄 아는 모양이다. 레이테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회의실로 가실까요?”
“그, 그래요.”
레이테는 회의실로 향했다.
출전을 앞둔 상황에서, 회의는 어느 때보다 긴장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커다란 회의용 탁자를 지도가 덮었다. 그 위에는 병력 배치를 논의하기 위한 말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며칠째 이어지던 논의도 이제 마무리 단계다.
“……이런 식으로 선회하면, 헤젤군의 측면을 공략할 수 있습니다. 브라간사도 없으니 가능할 겁니다.”
“하지만 이쪽은 강과 너무 가까워. 혹시라도 아군이 밀리면 위험할 것 같은데.”
“그렇군요. 폐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흐음……, 부대를 둘로 나누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훨씬 안정적일 겁니다.”
“그렇게 하도록.”
참전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들 사이에서, 사령관인 여왕은 가장 미숙한 존재였다.
하지만 레이테는 그들과 거리낌 없이 전술을 논의했다. 그녀는 듣기만 하는 방관자가 아니었으며, 그녀를 무시하는 사람도 없었다.
레이테는 알 수 있었다. 귀족들은 여왕의 말을 경청했다. 단순히 레이테가 여왕이기 때문에 예의를 차리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런데 여기 언덕 말이야. 가뜩이나 기병대의 수도 많지 않은데 이쪽까지 따로 빼 배치할 필요 있나?”
지도를 살피던 레이테가 한 곳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르파가 답했다.
“당연히 따로 빼야지요.”
“그, 그런가?”
레이테는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역시 아직은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싶었으나 순식간에 민망해졌다.
여왕의 어색해하는 기색을 눈치챈 시스로네스가 말했다.
“폐하, 이 부대는 폐하의 호위입니다.”
어? 레이테의 눈이 크게 떠졌다. 호위를 배치한다는 것은 곧 여왕의 출전을 의미하지 않나.
“혹시 규모가 너무 작아 불안하십니까? 폐하의 말씀대로 기병대의 수가 많지 않아 불가피하게 이럴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개개인의 실력은 탁월한 최정예들이니 안심하시고…….”
“아, 아니. 괜찮네. 내가 잠시 착각했어.”
아르파가 대단히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하자, 레이테는 손을 내저으며 부정했다.
제군과 함께 출전하고 싶다. 레이테는 이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꺼내도 괜찮을지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이 무색하게 이미 모두가 여왕의 참전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긴장해서 그러네. 아무래도 성 밖에서의 전투는 처음이니까. 그래도 경들이 잘 해 주리라 믿어.”
레이테는 지휘관들을 둘러보며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두 눈이 아주 살짝 물기를 머금은 채로 반짝 빛났다.
* * *
레이테는 고해소의 문을 열고 들어가 무릎을 꿇었다. 잠시 후, 촘촘한 격자 창문 맞은편에 인영이 나타났다. 레이테가 성호를 그으며 기도하자 시스로네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의 자비를 굳게 믿으며, 그동안 지은 죄를 사실대로 고백하십시오.”
“……저는 한 국가의 왕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평화와 백성의 안전에 소홀했습니다.”
숨죽은 듯 고요한 가운데, 창문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은 레이테의 속삭임만이 울려 퍼졌다.
“내전으로 이 땅을 황폐화한 것으로도 모자라 벌써 두 번이나 타국의 침략을 허용했습니다. 전쟁의 원인을 한 가지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지만, 군주의 무능함이 치명적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요. 제가 공부를 게을리하고 경험이 부족하여…….”
“폐하.”
점점 빨라지던 레이테의 중얼거림이 멈췄다.
“없는 죄를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죄입니다.”
“예?”
“그리고 군주가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다면, 그건 개인 성격의 문제를 넘어서 나라의 운명에 영향을 끼치는 치명적인 약점이 됩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레이테는 눈을 떴다.
“일단 성사부터 마칩시다. 보속으로는 남편과 함께 오누바에 성당을 지어 봉헌하십시오.”
“네……?”
고해소에 앉으면 건너편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시스로네스는 레이테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손을 펴 들고 사죄경을 외웠다.
순식간에 성사를 끝낸 그는 목에 건 영대를 벗어 내려놓고 말했다.
“폐하, 출전하지 않을 생각이셨습니까? 회의 때 보니, 폐하의 출전을 전혀 생각하지 않으셨더군요.”
“그, 그게 아니라…….”
직설적인 물음에 당황한 레이테는 말을 더듬거렸다.
“……내게 실질적인 능력이 없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내가 전장에 가도 되나 망설였어요.”
“폐하의 실질적인 역할이 무엇입니까? 칼을 들고 전투에 참여해야 합니까? 저는 수십 년 동안 전쟁터에 여러 차례 갔으나 단 한 번도 제 손으로 직접 적을 공격한 일이 없습니다. 제가 실전에서 검을 사용했던 적은 딱 한 번뿐이었습니다.”
레이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헤젤 왕궁에서 탈출할 때의 일을 말하는 것이다.
“전쟁의 본 목적은 적의 살상이 아닙니다. 그것이 최소화되어야 바람직하다는 사실쯤은 잘 아시잖습니까.”
“그렇지요…….”
“폐하께서는 모든 사크틸라인의 구심점입니다. 이는 단순히 왕이신 폐하를 높여 이르는 의례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모두 폐하를 그렇게 생각하며 믿고 따릅니다. 여태까지, 그리고 특히 지난 몇 개월 동안 여왕 폐하께서 이 나라를 위해 얼마나 땀을 흘렸는지 알고 있으니까요.”
#144
오누바 대성당 앞 광장은 군사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말을 탄 기사들이 가장 앞에 있고, 그 뒤로 검과 방패, 혹은 창을 든 보병들이 섰다.
종이 울리고 잠시 후 성당 문이 열렸다. 지휘를 맡은 귀족들이 차례차례 나와 줄을 맞춰 섰다.
여왕은 성직자들과 함께 가장 마지막에 밖으로 나왔다. 햇빛을 받아 마치 은처럼 빛나는 갑옷 위에 여왕의 문장을 수놓은 커다란 망토를 두른 여왕의 모습은 위엄 넘치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맑은 하늘과 따사로운 햇살, 그와 대비되는 긴장 가득한 병사들의 모습을 잠시 바라본 여왕은 뒤로 돌아 성직자를 향했다.
“사크틸라의 승리와 영광을 위해 축복해 주십시오.”
여왕이 무릎을 꿇었다. 지휘관과 병사들, 그리고 출정식을 구경 나온 사람들도 모두 그녀를 따라 무릎을 꿇었다.
사제는 여왕에게 성수를 뿌린 뒤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의 기도를 외웠다.
축복이 끝나자 여왕은 말에 올라탔다. 여왕의 망토처럼 문장을 수놓은 천으로 꾸미고 일부분은 갑주를 입힌 말은 대단히 화려한 모양새였다.
말에 올라탄 레이테는 눈을 살짝 감고 심호흡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긴장과 부담감 사이에, 은근한 흥분이 함께 몰려온다. 레이테는 눈을 번뜩 뜨고 손에 든 지휘봉을 치켜들어 앞으로 뻗었다.
그와 동시에 일제히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고,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차마 요새 밖으로 나올 생각을 못 하는 바르시나군의 모습을 보며, 브라간사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만하면 됐다. 한동안은 저들을 묶어둘 수 있을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바르시나군을 이참에 완전히 섬멸하고 싶었다. 하지만 바르시나군과 싸우며 시간과 힘을 낭비할 때가 아니었다. 오누바 공략이 우선이다.
“나는 이만 오누바로 돌아가겠다. 자네는 여기 남아 계속 바르시나군을 감시하도록.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가면 총의 공격을 받으니 거리를 적당히 유지해야 할 것이다.”
지휘관에게 명령을 내린 브라간사는 말에 올라탔다. 종자가 다가와 투구를 건넸으나 받지 않았다. 날이 더워 투구를 쓰면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비가 내렸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뜨겁고 건조한 한낮이었다. 움직이고 싶지 않은 시간대지만 한시가 바쁘니 돌아가야 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사크틸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브라간사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을 움직이려 했다.
그때 멀리서 이쪽을 향해 빠르게 달려오는 말이 보였다. 헤젤의 깃발을 손에 든 전령이었다.
“각하!”
전령의 심상치 않은 기세에 브라간사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사크틸라 군사가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바르시나에 보내는 원군 같습니다!”
전령이 손으로 언덕을 가리켰다. 높이 세운 장창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
‘사크틸라가 바르시나에 원군을 보낸다고?’
불가능한 일이다. 두 나라의 관계를 생각하면 분명히 그랬다. 바르시나에게 요새를 내어준 것만도 사크틸라의 엄청난 양보였으며, 협력은 거기까지일 줄 알았다.
브라간사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그 순간, 요새의 문이 열렸다.
* * *
“돌격! 돌격하라!”
지휘관의 외침에 따라, 거대한 창을 든 기병대가 거침없이 돌진했다.
성문 근처를 지키던 헤젤 병사들은 제대로 반격조차 하지 못하고 급습에 당하기만 했다. 바르시나군이 나올 것이라고 전혀 예측하지 못한 탓이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바르시나군은 성벽 위에서 대충 대포와 총만 쏘며 헤젤군을 쫓아냈다. 첫 전투의 패배 후 바르시나는 늘 그런 식이었으며, 특히 최근 며칠은 더 의욕이 없었다.
하지만 이는 헤젤군을 방심시키기 위한 바르시나측의 책략이었다.
원군을 받겠다고 오누바에 연락하자마자, 사크틸라는 자신들의 일정을 알려왔다. 엿새 뒤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나가 총공격을 개시한다는 계획이었다. 바르시나에 보낼 원군은 그 직후 파견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날이 왔다.
바르시나 기병대는 혼란에 빠진 헤젤군을 손쉽게 무찔렀다. 그렇게 만들어진 틈으로 바르시나군이 우르르 빠져나왔다.
“사크틸라군과 합류하라!”
검을 뽑아 든 왕이 외쳤다.
바르시나군은 요새를 버리고 사크틸라 지원군이 있는 언덕 쪽으로 완전히 이동한다. 더는 시간을 끌지 않고 헤젤군을 공격하기 위해서다.
또한 바르시나가 이 정도 적극성을 보이면, 브라간사는 차마 오누바 성 쪽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에르난을 상대해야만 한다. 에르난은 아내의 짐을 덜어줄 생각이었다.
브라간사에게 직접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남은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는 에르난만의 감정은 아니었다. 지난 패배를 설욕하고 싶다는 생각은 바르시나군 전체가 공유하고 있다.
“폐하, 이곳까지 직접 나오시다니……!”
사크틸라군을 이끄는 사람은 아르파 공작이었다. 그는 바르시나군이 나타나자 반가워했다가 에르난을 보더니 깜짝 놀라며 말에서 내려 다가왔다.
놀라기는 에르난도 마찬가지였다.
“아르파 공? 여왕을 도와야 할 사람이 왜 이곳에 온 거요?”
“그 여왕께서 폐하를 도우라고 하셨습니다. 브라간사가 바르시나군을 공격하니, 이왕이면 오누바 쪽으로 오지 않게 좀 붙잡아 주면 좋겠다고요.”
아내의 생각도 자신과 같았다. 에르난은 웃음을 터뜨렸다.
“일단 요새로 돌아가시지요. 저희가 엄호하겠습니다.”
“아니, 돌아갈 생각이었으면 안 나왔지. 그곳에 있으면 질질 끄는 전황만 반복될 뿐이야. 브라간사를 끝장낼 생각으로 나온 거네. 그래서 원군을 요청했고.”
“그러면 어디로 가시려는 겁니까?”
“저기일세.”
에르난은 먼 곳에 보이는 마을을 가리켰다.
“헤젤군이 이 지역에 나타나자 주민들이 떠나 지금은 빈 마을이라고 알고 있네. 오누바 성에서 되도록 멀어져야 해.”
“괜찮은 곳이로군요. 하지만…….”
마을 반대편, 헤젤군 쪽을 바라본 아르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습격을 받고 흩어졌던 헤젤군이 다시 모여 전열을 정비하는 모습이 보였다.
굼뜨게 움직이면 저들에게 잡힐 것이다. 바로 움직여야 했다. 아르파는 곧바로 말에 올라타 사크틸라 병사들에게 이동을 지시했다.
급박한 상황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므로, 행군은 비교적 빠른 속도로 이뤄졌다.
바르시나군이 앞장서고, 장창을 든 사크틸라 원군이 대열의 맨 뒤에서 따라왔다. 기병대가 따라붙을 경우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헤젤의 기병대가 금방 쫓아왔다.
“폐하, 더 속도를 내야 합니다!”
아르파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무리 방어 목적으로 병사를 배치했다지만, 쫓기는 상황에서는 피해가 클 수밖에 없다.
“총병대 일부를 후미로 보내 사크틸라군을 지원하겠습니다. 먼 곳에서 적을 공격하면 될 겁니다.”
페레트가 말했다. 아르파는 잠시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난 전쟁에 대한 그의 기억 속에서 페레트는 사크틸라에 가장 비협조적인 사람 중 하나였다.
아르파의 시선을 눈치챈 페레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딱히 사크틸라군을 아끼는 마음으로 도우려는 것은 아니다. 사크틸라군이 버티지 못하면 바르시나 군사가 피해를 입을 뿐이라 그렇다. 원군은 총병대를 보조하기 위해 왔으니까.
페레트는 왕의 허락만 기다리며 당장이라도 명령을 내릴 기세였다. 하지만 에르난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투는 하지 않는다. 저들을 상대하면 적의 술수에 말려드는 걸세. 우리는 더 빨리 움직여야 해.”
“그렇지만 보병은 이 이상 속도를 못 냅니다.”
페레트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에르난도 알았다. 도망치기 위해서는 말이 달리는 것과 비슷한 속도로 움직여야만 한다. 그런데 지금 그가 이끄는 군사의 적잖은 수가 보병이었다.
애써 나온 보람도 없이, 이대로 전투를 치러야만 하나?
에르난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과연 현실성이 있을까? 하지만 다른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에르난은 곧 마음을 다잡고 말했다.
“보병들을 말에 태우도록.”
“예?”
“보병들의 무장이 가벼운 편이니, 말 한 마리당 두 명씩은 더 태울 수 있을 걸세. 그 정도면 말도 그럭저럭 속도를 낼 수 있겠지.”
듣도 보도 못한 명령에, 지휘관들은 할 말을 잃고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왕을 바라보았다. 급박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침묵이 잠시 찾아왔다.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폐하…….”
가장 정신을 빨리 차린 사람은 아르파였다.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보병을 태운다고…… 쳐도, 사크틸라군은 어떡합니까?”
귀족인 기사가 평민과 함께 말을 타라는 것부터가 일단 기이했다. 그래도 이는 급박한 상황에서 택할 수밖에 없는 고육지책이라 볼 수도 있다.
문제는 사크틸라다. 바르시나 병사만이라면 에르난의 명령을 따를 수 있었다. 하지만 사크틸라군은 보병의 수가 압도적으로 기병보다 많았다. 애초에 바르시나 총병을 보조하기 위해 보낸 장창병이다.
아르파의 지적에 에르난은 당황하여 사크틸라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그것까지는 차마 생각하지 못했다.
에르난은 고민 끝에 답했다.
“……바르시나 기사의 말에 타시오. 그렇게 하면 말이 부족하지 않겠지.”
“예?”
“진심이십니까?”
바르시나 지휘관들이 경악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르난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자신의 입으로 내린 명령이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아군끼리 말에 탄다 해도 불만이 있을 텐데, 서로 간의 앙금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두 나라의 사람이 함께 말을 탄다니. 말 위에서 싸움이나 나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러나 병사를 이끌고 나온 이상,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겨야만 한다.
왕은 지휘관들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사크틸라 병사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지휘관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따랐다.
에르난은 가장 먼저 보이는 사크틸라 병사들을 불렀다.
“자네, 여기 올라타게. 아, 자네도.”
“폐, 폐하? 여기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 말에 타라는 소리야.”
헉. 지휘관들이 놀란 숨을 삼켰다. 병사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당장 올라오라니까. 명령이야!”
“예……? 예!”
병사들은 주변의 눈치를 보면서, 엉거주춤한 움직임으로 에르난의 뒤에 탔다. 널찍하던 말 위가 금세 좁아졌다. 불편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넘어지지 않으려면 앞사람의 허리를 잡아야겠군.”
“폐, 폐하를 붙잡으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놓치지 않도록 꽉 잡게.”
왕의 바로 뒤에 탄 병사는 쩔쩔매며 왕의 허리를 붙잡았다.
‘말 위에서 이런 식으로 나를 잡을 사람은 레이테뿐일 줄 알았는데…….’
에르난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며 외쳤다.
“당장 보병들을 말에 태우게! 어서!”
왕이 먼저 나서 직접 병사를, 그것도 사크틸라인을 자기 말에 태웠다. 지휘관들은 하는 수 없이 기병에게 명령을 내렸다. 기사들은 난처해 하면서도 보병을 자기 말에 태웠다.
“전속력으로 움직인다! 출발!”
바로 앞에서 왕의 외침이 쩌렁쩌렁 울리자, 에르난의 말에 탄 병사들이 놀라 몸을 움찔거렸다. 에르난은 피식 웃음 지었다가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 * *
브라간사는 언덕 너머로 멀어져 가는 바르시나와 사크틸라 연합군의 모습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기가 막혔다. 저런 수법으로 아군을 따돌리고 도망칠 줄은 몰랐다.
그는 꼼짝없이 에르난을 상대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여왕의 군대에 맞서겠답시고 이곳을 떠나면, 헤젤군은 결국 부부에게 포위되고 만다. 에르난이라도 확실히 제압해서 길을 열어 둬야 한다.
솔직히 부부끼리, 두 나라끼리 연계가 이렇게 잘 될 줄은 몰랐다.
그동안 두 나라의 사이를 벌려놓으려고 애썼던 헤젤의 모든 노력은 부질없었던 것이다.
레이테. 에르난.
그가 원했던 것을 하나씩 뺏어간 부부는 이제 브라간사라는 존재를 완전히 세상에서 지워 버리려 한다.
“간악한 연놈들 같으니라고…….”
죽여 버릴 테다. 브라간사는 작은 목소리로 욕을 내뱉으며 손에 닿는 검을 꽉 붙잡았다.
#145
아침 일찍 군사를 이끌고 나갔던 아르파는 저녁 무렵 본대로 귀환했다.
병사들을 해산시키자마자 그는 의사를 찾아갔다. 며칠 전에 입은 상처가 다시 터졌기 때문이었다.
치료를 받고 막사 밖으로 나오니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그는 기지개를 켜며 뻐근한 몸을 풀었다. 열흘 동안 거의 매일 자잘한 전투를 치르며 바쁘게 돌아다녔더니 몸에 성한 곳이 없었다.
이제 왕에게 보고하러 갈 차례다. 발걸음을 옮기던 아르파는 페레트와 마주쳤다.
“이제 돌아오십니까, 각하?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 페레트 경. 고맙소. 보병 훈련은 다 끝났나 봅니다?”
“예. 폐하께 보고 드리러 가시겠지요? 저도 같이 갑시다.”
두 사람은 왕의 막사로 향했다. 마침 왕의 막사에서 한 귀족이 나오더니 두 사람에게 인사하고 지나갔다. 공병대의 지휘관이었다. 아르파는 멀어져 가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페레트에게 말했다.
“오는 길에 보니 오솔길 쪽 참호가 무척 감쪽같더군요. 존재를 미리 알지 않는 한 어지간해서는 알아차리기 힘들어 보였습니다. 바르시나군 공병의 수준이 이 정도라니……, 대단히 놀랐습니다.”
연합군은 버려진 마을 근처에 빠른 속도로 방어선을 구축했다. 병사들은 어지럽게 얽힌 물길과 언덕, 작은 숲, 오솔길 등을 따라 참호를 파고 장애물을 세웠다. 대포도 곳곳에 배치되었다.
이 과정에서 바르시나 병사들이 보이는 솜씨는 굉장했다. 지난 전쟁 때, 모든 분야에서 굼뜨고 허술했던 모습과는 완전히 반대였다. 아르파는 진심으로 그들에게 감탄했다.
“놀라운 것이라면 각하의 군공만 하겠습니까? 오늘 작전도 대성공이라던데요.”
“벌써 소식을 들으셨습니까? 허허, 좀 잘 되기는 했습니다.”
페레트가 말하는 작전이란 헤젤의 정찰 방해를 위한 교란이었다.
복잡하게 구축한 방어선은 최대한 들키지 않아야 전투 때 그 효과를 발휘한다. 이를 위해 에르난이 택한 방법은 전형적인 사크틸라식의 유격전이었다. 가볍게 무장한 병사가 빠르게 적을 기습하고 빠져나가면서 적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다.
대략 4년 전, 에르난은 탐브레 후작을 토벌하면서 사크틸라의 이런 전술을 수차례 경험하고 익혔다. 다만 지금의 에르난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적을 공격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왕은 이 임무를 아르파에게 맡겼다. 사크틸라인인 아르파는 당연히 이런 전법에 익숙했고, 주변 지리에도 밝았다. 그는 대단히 효과적으로 작전을 수행했다. 아르파가 이끄는 부대는 거의 매일같이 헤젤군을 농락했다.
지휘는 사크틸라인이 맡았지만 그 아래의 병사는 바르시나인이 많았다. 다행히 아르파는 바르시나 병사들을 잘 통솔했으며, 무엇보다 병사들이 그를 잘 따랐다.
바르시나 병사들은 아르파에게 호의적이었다. 보병을 말에 태웠던 그 기이한 도주 때, 아르파가 자기 말에 바르시나인 병사를 태웠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였다.
아르파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병사들이 뒤섞인 정신없는 상황에서 아무나 붙잡아 태우다 보니 그렇게 되었을 뿐이었다. 국적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보병을 무조건 태우라는 것이 왕의 요구이기도 했다.
그러나 작은 우연은 마음의 벽을 허무는 데에 큰 효과를 발휘했다.
연합군 내에는 이런 식의 긍정적인 분위기가 꽤 감돌고 있었다. 모험과도 같았던 도주의 성공은 군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군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첫 전투의 패배에 의기소침했던 지난날이 거짓말 같을 정도다.
아르파와 페레트는 왕의 막사로 들어갔다. 왕은 의자에 앉아 군사 배치 계획이 표시된 지도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을 보더니 지도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르파 공! 오늘도 수고 많으셨소. 브라간사는 우리가 무엇을 준비했는지도 모르는 채로 전투에 임하겠지. 모두 공의 헌신 덕택이오.”
“감사합니다, 폐하.”
“페레트 경, 마지막 훈련은 무사히 마쳤나?”
“예! 훈련 기간이 짧긴 하지만 병사들은 그만큼 더 열심히 했습니다. 기대하셔도 될 겁니다.”
페레트는 의기양양하게 답했다. 진지를 구축하는 동안, 바르시나의 총병과 사크틸라의 창병이 함께 움직이는 훈련이 그의 감독 아래 진행되었다.
아르파와 페레트는 자신들의 일을 간단하게 보고했다. 에르난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것을 들었다.
보고를 끝낸 두 사람은 막사 밖으로 나갔다. 에르난은 다시 지도를 펼쳐 들었다. 하지만 전령이 들어오는 통에 도로 내려놓아야 했다.
“여왕 폐하께서 보낸 서신입니다.”
레이테의 편지는 짧았다. 상당히 거칠게 휘날려 쓴 필체가 인상적이었다.
글씨만 보면 레이테에게 무슨 위기라도 닥친 것 같다. 하지만 실상은 반대였다. 총사령관 없이 사크틸라의 대군을 상대하는 헤젤은 명백히 밀리는 모양새다.
급하게 쓴 흔적이 역력한 글씨는 아마도 레이테에게 시간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전령은 여왕이 얼마나 꼼꼼하게 각 부대의 상황을 확인하며 바쁘게 일하는지 이미 몇 번이나 에르난에게 알려 주었다.
사크틸라의 승리는 시간문제입니다. 당신과 바르시나 또한 그러겠지요.
편지는 대단히 자신만만한, 그리고 묘하게 도발적인 문장으로 끝났다. 에르난은 풋 웃음을 터뜨렸다.
바르시나의 승리는 어떨까? 시간문제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번에는 틀림없이 승리한다. 에르난은 강한 확신이 들었다.
* * *
이른 새벽이었다. 에르난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더는 못 누워 있겠다. 그는 옷을 갖춰 입고 막사 밖으로 나왔다.
한기가 느껴질 만큼 서늘한 새벽 공기에 에르난은 몸을 살짝 떨었다. 이윽고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팔을 잡아당기며 뻐근한 몸을 풀었다.
두렵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긴장까지 없지는 않다. 그런 탓에 밤새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에르난은 가벼운 걸음으로 군영 내를 산책했다. 밤새 보초를 선 병사들의 모습만 간간이 보였다. 왕이 나타나자 그들은 화들짝 놀라며 사크틸라어로 말했다.
“폐하……!”
“수고가 많네.”
사크틸라 병사였나. 에르난은 사크틸라어로 답하며 그들을 지나쳤다.
군영 내를 한 바퀴 돌고 나니 근처를 둘러보고 싶어졌다. 말에 오른 에르난은 호위기사 몇 사람만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구덩이와 목책 등이 곳곳에 보였다. 에르난은 그것들을 지나쳐 야트막한 언덕 위로 올라갔다.
동쪽 하늘이 조금씩 밝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저쪽으로 가면 오누바가 있고, 아내가 있다.
물론 이곳에서는 오누바에서 싸우는 병사들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에르난은 애초에 오누바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헤젤을 상대하고자 군사를 이끌고 나왔으므로.
아내와 가까이 있고 싶은데 도로 멀어져 간다. 그러나 이는 앞으로 두 번 다시 떨어지지 않기 위한, 마지막 헤어짐일 것이다.
에르난은 다시 만날 그녀의 모습을 눈앞에 그려보며 빙그레 웃음 지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무언가를 발견한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곧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졌다.
“당장 돌아가야겠군.”
지평선 끄트머리에서 군사들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었다. 헤젤의 군대가 틀림없었다.
* * *
바르시나군과 헤젤군은 오후가 되어서야 상대의 모습을 완전히 확인할 수 있었다.
아니, 사실 헤젤 입장에서는 바르시나군을 완전히 보았다고 할 수 없었다. 아르파가 지휘한 부대의 활약으로 헤젤군은 주변 정찰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은 양군 사이에 수없이 만들어진 참호의 존재를 몰랐다.
그 점을 이용해야 하니, 무리하게 앞으로 나설 필요는 없었다. 헤젤군의 돌격을 유도해야만 한다. 하지만 브라간사는 적극적인 돌격을 망설이는 모양새였다.
“안 나오는군요.”
페레트의 말에 에르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만도 하지. 나라면 정찰도 불완전한 상황에서 저런 식으로 대규모 군사를 끌고 나오지도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브라간사는 여유가 없는 모양이군.”
“되도록 빨리 이쪽을 해결하고 사크틸라를 상대하러 갈 생각이지 않겠습니까?”
“맞네. 하지만 우리는 저들을 안 보내줄 거지. 포격을 시작하게.”
에르난이 명령하자 연합군은 대포를 발사하기 시작했다.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포격을 주고받고 나면 돌격병을 보내기 마련이다. 바르시나는 그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물론 창칼을 직접 부딪치기 전, 적군을 사전 제압한다는 포격의 본래 목적도 잊지 않았다. 아무리 대응책을 마련했다고는 하나, 적의 기병이 위협적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그들이 화승총의 사정거리에 들어오기 전까지 수를 최대한 줄여야 했다.
헤젤군도 연합군을 향해 대포를 쏘았다. 목책과 방벽이 포격을 맞아 무너지며 곳곳으로 파편이 튀었다. 쓰러지는 병사의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적의 매서운 공격에 비하면 아군의 피해는 적은 편이었다. 전방의 병사 대다수가 참호 속에 숨어 있기 때문이었다.
포탄이 참호 속으로 정확히 들어오는 운 나쁜 상황이 생기지 않는 한 병사들은 무사했다. 헤젤군이 참호의 존재를 모르기에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도 않았다.
한 차례 쏟아지는 포격을 버텨낸 연합군은 다시 적을 향해 대포를 발사했다. 펑! 펑! 포탄이 땅에 떨어지면서 흙먼지가 잔뜩 일어났다.
먼지가 가라앉자, 헤젤의 기병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온다! 사격 준비!”
페레트는 총병대를 이끌고 앞으로 나갔다. 창병이 그들의 뒤에 붙어 따랐다.
장전을 마친 병사들이 손가락을 방아쇠에 걸고 적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사이에도 포격은 계속되었다. 사격 직전까지 적의 수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적이 점점 가까워졌다. 이제 곧 총을 쏘아야 할 때다. 페레트는 사격을 명령하려 했다.
그 순간.
쾅! 콰쾅!
귀가 먹먹해질 만큼 커다란 폭발음이 옆에서 울렸다.
무슨 일인지 고개를 돌려 확인해 보기도 전에 연기와 충격파가 페레트와 군사들을 덮쳤다. 페레트는 옆으로 튕겨 나가며 말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크윽!”
땅바닥에 부딪힌 충격에 페레트는 숨이 턱 막히고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하지만 주변에서 들리는 비명과 신음이 심상치 않았다. 그는 놀라 굳은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다리에 유독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뭔가 파편이 박힌 모양이었다.
쓰러진 병사와 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뒤편으로, 새까맣게 타버린 포대가 보였다. 주변은 온통 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화약이 폭발한 것이다.
폭발에 휘말린 병사는 대부분 대포 주위의 포병들이었다. 페레트는 그들과 가까운 곳에 있어 휩쓸린 것이었다. 대부분 총병은 일단 무사해 보였다.
불행 중 다행이라 생각하며 페레트는 자신의 병사들에게 다가가려 했다. 헤젤군이 코앞까지 왔으니 공격 명령을 내려야 한다.
그러나 한 걸음을 채 못 옮기고 페레트는 몸을 비틀거렸다.
“페레트 경!”
쓰러지려던 페레트를 누군가가 받쳐 들었다. 페레트가 고개를 들어 보니, 아르파가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르파의 뒤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왕이 보였다.
“죄송합니다, 폐하. 당장 공격을…….”
“공격 이전에 경은 당장 치료를 받으시오! 여봐라, 페레트 경과 다른 부상자들을 빨리 데려가 치료하라!”
에르난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곧, 병사 여럿이 다가와 페레트를 업어 들었다.
병사들에게 업히면서도 페레트는 주변 상황을 확인했다. 총병들은 폭발에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는 기색이었다. 망설이지 말고 당장 적을 공격하라고 그들에게 외쳐야 했다.
그러나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페레트는 의식을 잃었다.
* * *
에르난은 페레트를 비롯한 부상자들이 실려 나가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그의 머릿속도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여유 부릴 때가 아니었다. 왕은 총병대에게 향했다.
페레트의 부관이 병사들을 추스르려 애썼으나, 그 자신도 폭발에 꽤 당황했는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헤젤군이 다가오고 있어. 어서 공격하게!”
“예, 예……!”
폭발음이 어찌나 컸는지, 이쪽을 향해 오던 적군의 말도 소리를 듣고 놀란 모양이었다. 달려오는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져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말의 속도가 늦춰지지 않았다면 그대로 저들의 공격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대포는 쓸 수 없다. 화승총만으로 저들을 저지해야 한다.
그러나 다시 줄을 맞춰 서고 총을 겨누는 병사들의 모습은 무척 불안정해 보였다. 폭발 때문에 겁을 먹은 모양이었다.
저런 식으로는 이길 수 없다. 에르난은 말에서 내려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가까이 있는 병사가 든 총을 빼앗아 들었다.
“폐, 폐하?”
에르난은 다가오는 적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총의 묵직한 무게가 그대로 에르난의 가슴에 부담으로 전해졌다. 에르난은 잠시 숨을 멈춘 다음, 방아쇠를 당겼다.
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어깨가 살짝 흔들렸다. 잠시 눈을 찡그렸던 에르난은 곧바로 눈을 뜨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헤젤의 기수가 몸을 휘청거리더니 말에서 떨어졌다. 에르난의 총에 맞은 것이다.
에르난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총을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말에 올라타 외쳤다.
“보라! 우리는 이 먼 곳에서 적을 얼마든지 무찌를 수 있다! 물러서지 마라! 내가 앞장서 그대들과 함께할 것이다! 모두 공격하라!”
#146
탕탕! 탕!
첫 번째 일제 사격은 조금 어수선한 상태에서 이뤄졌다. 그러나 총에 맞아 쓰러지는 적의 모습을 보며 병사들은 자신감을 되찾았다.
“공격 준비!”
왕의 외침에 두 번째 줄의 병사들이 앞으로 나서 총을 들고 적 기병을 조준했다. 병사들의 준비가 끝나자, 왕이 다시 소리쳤다.
“발포하라!”
탕! 이번에는 마치 한 사람이 쏘는 것처럼 동시에 총이 발사되었다.
됐다. 에르난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페레트의 부관에게 말했다.
“이제 총병대는 자네가 지휘하게.”
“예, 폐하!”
에르난은 말을 몰아 야트막한 언덕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는 전투의 전반적인 상황을 살필 수 있다.
폭발에 놀라 주춤거리긴 했으나, 헤젤의 기병대는 다시 속도를 높여 다가오고 있었다. 연합군이 폭발 사고로 혼란에 빠졌으리라 판단하고 의기양양하게 돌격하는 듯했다.
하지만 아군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총병대는 물러서지 않고 적 기병을 향해 반복적으로 사격했다. 그러다가 적이 가까이 다가오자 양옆으로 갈라져 후퇴했다.
총병의 뒤에 있던 장창병이 앞으로 나왔다. 밀집한 창병이 사람 키의 몇 배는 되는 길이의 창으로 막아서자 적 기병은 그들을 돌파하지 못했다.
‘됐어!’
상황을 지켜보던 에르난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총병과 창병을 혼합해 구성한 방진은 대단히 효과적이었다. 일반적으로 보병은 기병의 공격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신식 무기와 창을 조합하여 보병으로도 기사들을 제압할 수 있게 되었다.
사크틸라와의, 레이테와의 협력으로 일군 성과다. 에르난은 기쁜 마음에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눈이 잠시 먼 곳으로 향했다. 오누바 방향이었다.
‘레이테는 별일 없겠지?’
에르난은 아내를 믿었다. 자신도 하는 일을 아내가 하지 못할 리 없다.
그래도 걱정이 안 된다면 거짓말이다. 그는 브라간사를 어서 무찌르고 아내를 도우러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에르난의 시선은 다시 눈앞의 전장으로 돌아왔다.
“와아아아!”
적과 맞서기 위해 달려 나가는 아군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당장이라도 전쟁을 끝낼 듯 자신만만한 기세였다.
전투 초반에 투입되는 기병은 기선제압에 목적이 있으므로 대단히 매섭게 돌격해 온다. 그렇게 돌격해 오는 적을 막아냈으니, 아군의 사기가 치솟는 것도 당연했다.
선발대가 저지당했음에도 브라간사는 움츠러들지 않고 병사를 더 투입시켰다. 단단한 방어를 병력으로 압도할 생각인 듯했다.
그런 대응은 언뜻 옳은 방식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연합군이 공들여 만든 장애물을 생각하지 않고 취하는 행동이다.
‘아르파와 그의 병사들이 고생한 보람이 있군.’
브라간사는 연합군이 무엇을 준비했는지 모른다. 에르난은 명령을 내렸다.
“총병을 방벽 쪽으로 더 투입하게. 아무것도 모르고 전진하는 적을 열렬히 환영해 줘야지.”
정면에서 공격해 오는 적은 총병과 창병이 조합한 밀집대형으로 상대한다. 하지만 이제 헤젤은 다른 방향으로도 군사를 보낼 것이다. 그들을 상대할 때였다.
* * *
헤젤군 병사 일부는 연합군의 측면을 칠 요량으로 옆으로 빙 돌아 개울을 건넜다. 그들 앞에는 무성하게 우거진 수풀이 유난히 많이 나타났다. 주변 지형 자체가 물도 풀도 복잡하게 엉켜 있긴 하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풀과 나무로 덮어 위장한 방벽 뒤에서 칼을 든 사크틸라 병사들이 나타나 헤젤군을 공격했다.
헤젤군은 기습에 큰 피해를 입었다가 정신을 차리고 맞서 싸우려 했다. 하지만 이미 사크틸라군은 모습을 감춘 뒤였다.
어디로 숨었는지 모르겠다. 헤젤군이 당황하는 가운데 느닷없이 총성이 울렸다. 경사를 따라 교묘하게 파놓은 참호에서 적을 기다리던 바르시나군 총병이었다.
“일단 물러나 전열을 정비한다!”
연합군이 온갖 장애물과 구덩이 등을 이용해 곳곳에서 헤젤군을 농락하자, 브라간사는 뒤늦게 돌격을 중지시켰다. 연합군을 정면으로 뚫을 기세였던 그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약해졌다.
정찰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기에 함정에 당하는 상황은 어느 정도 각오했으나, 이 지경으로 치밀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연합군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멀리 바르시나 국왕의 깃발이 보인다 싶더니, 어디선가 우르르 연합군이 나타났다.
앞서가던 부대의 지휘관이 급히 달려와 외쳤다.
“각하! 연합군이 아군을 포위했습니다!”
브라간사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전진하면 얼마나 있을지 모르는 장애물과 복병을 상대해야 한다. 하지만 후방도 적에게 막혔다. 그것도 왕이 이끄는 정예군이다. 지금 헤젤군은 그들과 정면으로 부딪칠 여력이 없다. 적잖은 병력을 잃었으며, 사기 또한 저하되어 정상적인 전투를 치를 수 없다.
퇴로를 찾고자 필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브라간사의 눈에, 멀리 남쪽 방향의 벌판이 들어왔다. 무엇을 숨기려 해도 쉽지 않은 황무지에 가까운 땅이었다.
아무리 연합군이 곳곳에 장애물을 설치했다지만, 저 먼 곳까지는 가지 못했을 것이다. 준비 시간이 많지 않았으니까.
“남쪽으로 돌파한다!”
브라간사는 명령을 내렸다.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저곳까지 가는 수밖에 없었다.
헤젤군은 필사적으로 움직였으나 그 속도가 더뎠다. 부상병이 많고, 사기도 떨어진 탓이었다.
브라간사는 답답했다. 에르난이 했던 것처럼 보병을 말에 태우기라도 해야 할까? 헤젤군은 연합군에 비해 기병의 수가 많은 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가뜩이나 기병대는 피해가 큰 탓에 브라간사를 향한 불만이 상당할 텐데 평민을 태우라고 했다가는 무슨 반발이 일어날지 모른다.
죽고 사는 문제가 달린 상황에서 이런 체면을 따져야 한다니. 분통 터지는 일이었다. 에르난은 이러지 않았다.
‘…….’
브라간사는 자신이 명령을 과감하게 내리지 못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는 떳떳하지 못했다. 부족한 명분으로 자신만을 위해 군사를 일으켰으니까. 생각하지 않으려 했으나 그것이 사실이었다.
“각하! 저쪽에 군대가 나타났습니다!”
브라간사는 불안한 눈길로 부관이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헤젤군이 가려던 벌판의 측면에 사람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었다.
“바르시나 왕은 저 먼 곳까지 군사를 배치했단 말인가!”
지휘관 중 한 명이 외쳤다. 그의 표정은 절망으로 가득했다.
허. 브라간사는 맥없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적이 나타난 방향으로 가면 오누바 성이 나온다. 저들은 에르난의 군사가 아니다. 레이테의 사크틸라군이다.
사크틸라군은 헤젤군을 발견하더니 빠른 속도로 돌격해 왔다. 적의 기세등등한 진격을 보며, 브라간사는 성을 두고 싸우던 아군이 어떻게 되었는지 깨달았다.
그들은 패배했다.
“아무래도 여기가 내 무덤이 될 모양이군.”
브라간사는 중얼거렸다. 헤젤군은 완벽하게 포위되었다.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온갖 억지를 쓰며 무리한 끝에 도달한 것은 결국 패배이며 죽음이었다.
자신은 살아남지 못한다. 브라간사는 확신했다.
지난 전쟁 때 에르난이 죽지 않은 이유는 그가 살아 있어야 정치적인 가치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브라간사는 죽는 편이 사크틸라와 바르시나에게 유리할 터다.
‘헤젤에서도 내 죽음을 반기겠지.’
슬퍼할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아들을 살리려 애쓴 그의 어머니뿐일 것이다.
“가, 각하! 돌파를 하든 항복을 하든 택하셔야 합니다!”
부관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브라간사의 귀에는 웅웅거리는 소리로만 들릴 뿐이었다.
브라간사는 멍한 눈으로, 자신의 숨을 조여 오는 적의 무리를 바라보았다. 가장 앞에 왕의 깃발이 보였다. 뒤에서 헤젤을 쫓아오고 있을 에르난은 어느덧 사크틸라군과 합류해 있었다.
어떻게 헤젤군을 앞질러 합류한 것일까. 놀랍다 못해 이상한 상황이었다. 브라간사는 곧 깨달았다.
“……여왕인가.”
본래 아내와 남편은 조금씩 다른 형태의 상징을 쓴다. 하지만 에르난과 레이테는 동일한 문장을 사용했다.
저 깃발의 주인은 에르난이 아니라 레이테다.
핏줄 하나를 제외하고는 무엇보다 브라간사보다 잘난 것이 없어 보였던 여자.
‘몇 번이나 죽이고 싶었던 것을 참고, 결국은 늘 후회했지.’
브라간사의 입가가 비틀려 올라갔다. 그는 발을 움직여 말의 배를 찼다.
“각하? 어디 가시는 겁니까!”
브라간사는 자신을 부르는 부관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여왕의 깃발을 향해 말을 달렸다.
* * *
사크틸라 여왕 레이테는 진격하는 군사들의 가장 앞에서 달리고 있었다.
갑옷을 입고 말에 타 전력 질주하는 기분이 마냥 시원하지만은 않았다. 일단 투구 속이 답답해 숨쉬기 조금 힘들었다. 더군다나 이곳은 전장이다. 죽음이 너무나 가까이 있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되는 곳.
참모들은 여왕에게 변고가 생길까 걱정했다. 시스로네스 등은 적이 가까이 다가오면 반드시 후방으로 빠져야 한다고 여왕에게 신신당부했다. 유사시 아예 레이테를 끌어서 데리고 갈 기세로, 그들은 여왕의 뒤에 바짝 붙어 따라오고 있었다.
어차피 레이테는 전투가 벌어지면 물러날 생각이었다. 병사들을 방해할 수는 없다. 결코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승리감에 잔뜩 고양되어 있었다. 사크틸라 병사들의 사기도 최고였다.
오누바를 두고 몇 달 동안 벌어졌던 공방전은 사크틸라의 승리로 끝났다. 적의 병력이 분산된 틈을 노려 나선 총공격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하지만 아직 성으로 돌아가 축배를 들 때는 아니었다. 헤젤군은 남아 있고, 그들과 싸우는 남편의 군대가 있다.
축배는 에르난과 함께 들 것이다. 여왕은 군사를 이끌고 그들이 있는 이곳으로 왔다.
레이테가 싸울 줄 모른다는 사실은 모든 병사들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앞장서 병사들을 이끄는 레이테의 모습은 사크틸라인의 머릿속에 각인된 위대한 왕과 다를 것이 없었다.
“폐하, 브라간사의 군사입니다!”
부관이 다가와 말했다.
“알고 있네. 이만 자리를 내주지. 모두 돌격하라!”
레이테는 명령을 내리고 말을 옆으로 돌렸다. 호위기사가 곧바로 그녀의 양옆에 따라붙었다.
옆으로 물러난 레이테는 다시 말을 돌려 전방을 바라보았다. 사크틸라의 기병들이 일제히 돌격하면서 흙먼지가 가득 일었다. 말발굽이 땅을 울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헤젤군은 사크틸라군의 등장에 당황한 모습을 보였으나 곧 필사적으로 맞섰다. 그렇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싸움은 곧 난전이 되었다.
레이테는 병력을 더 투입하라고 지시했다.
브라간사가 저곳에 있다. 그를 제압하면 이 전쟁은 끝난다.
검과 검이 부딪쳤다. 기합과 비명이 뒤섞여 들렸다. 쓰러진 시체 위로 다른 시체가 또 쓰러졌다. 성 밖으로 나와 전면전을 치르면서, 레이테는 이런 끔찍한 광경을 몇 번이나 보았다.
절대 익숙해질 것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레이테는 몸을 떨면서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래야 올바른 판단을 내려 군사들을 지휘할 수 있다.
또한 병사들의 모습을 머릿속에 깊이 각인해야만 했다. 저들이 흘리는 피를 헛되이 여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여왕은 고개를 꼿꼿이 들고 정면을 응시했다.
뒤엉켜 싸우는 병사들 사이에서, 검은색 갑옷을 입고 말에 탄 사람 하나가 유독 눈에 띄었다.
갑옷을 덮은 덧옷에 그려진 문장을 보고, 레이테는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브라간사!”
브라간사는 병사들의 틈을 뚫고 레이테를 향해 돌진했다. 여왕을 호위하는 기사들이 그를 막아섰다. 브라간사는 난폭하게 검을 휘둘러 기사들을 말에서 떨어뜨렸다.
주위의 사크틸라 기사들이 모조리 몰려왔다. 그러나 브라간사는 미친 듯이 움직이며 그들을 해치우고 단숨에 레이테의 앞까지 왔다.
투구에 작게 난 눈 구멍 안으로, 음산하게 번뜩이는 눈이 레이테와 마주쳤다.
브라간사는 검을 치켜들었다. 칼날이 햇빛을 받아 날카롭게 번쩍였다. 레이테는 눈을 질끈 감았다.
“레이테! 안 돼!”
어딘가에서 에르난의 외침이 들렸다. 그와 동시에, 총성 또한 함께 울렸다.
#147
탕! 탕!
연달아 터지는 총성에 뒤이어, 무언가가 레이테의 어깨에 내리쳐졌다. 레이테는 몸을 움츠렸다.
통증이 느껴지긴 했으나 잠깐이었다. 참을 만한 고통이었다.
그때야 레이테는 깨달았다. 자신은 갑옷을 입고 있다. 갑옷 틈새를 파고들어 찌르지 않는 한, 검은 결코 그녀를 해칠 수 없다.
그리고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레이테는 조심히 눈을 떴다.
브라간사의 몸이 바로 앞에 보였다. 그는 손에 검을 쥐고 있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진 것은 검인가? 레이테가 두리번거리는데, 브라간사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더니 그녀를 향해 쓰러졌다.
화들짝 놀란 레이테는 몸을 뒤로 젖히며 말고삐를 당겼다. 말이 몇 걸음 뒤로 물러서자, 브라간사는 그대로 자신이 탄 말에서 떨어지며 땅에 쓰러졌다.
“레이테!”
하얀 말에 탄 기사 한 명이 급히 다가오더니 말에서 내렸다. 온몸을 갑옷으로 가리고 있지만, 레이테를 부르는 목소리는 틀림없는 에르난이었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레이테를 바라보았다. 아내가 무사한 것을 확인한 에르난의 어깨가 탁 풀렸다.
아내를 향해 걸음을 옮기려던 에르난의 발끝에 브라간사가 닿았다. 에르난은 잠시 그를 내려다보다가, 곧 몸을 굽혀 그의 투구를 벗겼다.
새하얗게 질린 브라간사의 얼굴이 드러났다. 브라간사는 강렬한 햇빛에 눈을 찌푸렸다가 천천히 눈을 뜨고 에르난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이겼소…….”
힘없이 중얼거린 브라간사는 기침을 하며 피를 토했다. 그의 등이 닿은 땅 주변에도 피가 흘러나와 있었다.
“총이…… 대단하긴 하군. 바르시나 총병은 평민이었던가……?”
브라간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었다.
“폐하의 군사는 참 대단하오. 기사와 함께 말에 타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귀족을 단번에 죽음으로 몰아넣는군.”
힘겹게 말을 마친 브라간사는 탄식을 내뱉었다. 그의 숨소리는 상당히 거칠어져 있었다. 헐떡거릴 때마다 입에서 피가 더 흘러나왔다.
“왕좌를 욕망하던 자에게 내리는 신의 답인가 보지.”
에르난이 답했다. 브라간사는 맥없이 코웃음을 쳤다.
“바르시나인 주제에…… 신 같은 소리 마시오. 웃기지도 않는군. 그저 나를 제물로 세상이 바뀌는 것일 뿐이겠지.”
에르난이 도입한 새로운 무기와 그 운용 체제는 앞으로의 세상에 꽤 큰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브라간사의 군인으로서의 직감이 확신했다.
그동안 일반 병사는 갑옷을 입고 말에 탄 귀족을 죽일 수 없었다. 하지만 총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브라간사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상대가 쏜 총에 맞아 죽음의 문턱을 넘으려 한다.
전장은 총을 든 그들의 지배하에 놓이고, 기존의 기사들은 도태될 것이다.
그런 미래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이제 브라간사와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그는 분했다. 의식이 흐려지는 중에도, 그가 원하던 것을 빼앗은 이들이 더 빛나는 미래가 너무나 또렷하게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에르난을 선구자라 부르고, 에르난은 어떤 식으로든 지금보다 더 드높여질 것이다. 물론 그의 아내도 마찬가지다. 총기의 활용은 결국 두 사람의 합작품이었다.
브라간사는 힘겹게 시선을 돌려 말에 탄 레이테를 잠시 올려다보았다. 여왕의 갑옷이 마치 그녀의 머리 색처럼 서늘하면서도 눈부시게 빛났다.
투구 안쪽의 눈도 그렇게 빛날 것이다. 자신과 닮았으면서도 언제나 더 맑게 빛났던, 그래서 역겨운 여왕의 눈과 혹시라도 마주칠까 봐 브라간사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이미 시야가 흐려졌기에, 설령 눈이 마주친다 해도 보이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허억, 윽…….”
브라간사는 점점 숨을 쉬기 힘들어졌다. 그나마 겨우 숨을 쉬면 그때마다 신음을 흘리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아팠다. 고통에 몸이 경련했다.
몸부림을 치던 그의 손끝에 뭔가가 스쳤다. 무엇인지 볼 수는 없지만, 브라간사는 그것이 검이라고 생각했다. 서늘하고 단단한 느낌이 드니 맞을 것이다.
“……폐하.”
쉭쉭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브라간사는 힘겹게 말했다. 에르난과 레이테 중 누구를 부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 칼로……, 하다못해…… 당신이 끝을…….”
브라간사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는 어떻게든 검을 쥐어 왕에게 넘기려 했다.
손끝이 검에 닿으려는 순간, 브라간사의 몸이 경직되었다. 그리고 다시는 움직이지 못했다.
* * *
“……시신을 옮기도록. 헤젤에 돌려보낼 수 있게 하라.”
에르난이 말했다.
병사 여럿이 다가와 브라간사를 들어 날랐다.
레이테는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브라간사의 갑옷 한쪽이 이상하게 찌그러진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저게 뭐지?’
레이테는 곧 깨달았다. 일반적인 공격으로는 갑옷이 저런 식으로 손상될 수 없다. 총에 맞은 흔적일 것이다.
그녀의 시선은 바닥에 떨어진 총알로 향했다. 브라간사가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잡으려 안간힘을 썼던 것이었다.
총성은 두 번 울렸다. 두 발 중 하나는 브라간사에게 정확하게 명중해 갑옷을 뚫고 들어가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다른 하나는 방향이 안 맞았는지 거리가 멀었는지, 갑옷을 찌그러뜨리기는 했어도 뚫기까지는 못한 모양이다. 그대로 갑옷에 박혀 있다가, 브라간사가 쓰러질 때 떨어져 나간 것이다.
칼과는 생김새가 완전히 다른데도, 브라간사는 그것을 칼이라고 했다. 그렇게 믿고 싶은 모양이었다.
누구인지도 모를 평민 병사에게 죽는 자신의 처지가 싫었던 것일까? 왕의 손에 생을 마감한다면 조금은 덜 치욕스러운가? 죽는 마당에 그게 무슨 소용인지 모르겠다.
높은 곳을 집요하게 갈망했던 브라간사의 삶은, 결국 자신보다 낮은 익명의 존재에 의해 초라한 종말을 맞이했다.
물론 레이테는 브라간사를 쏜 병사를 익명으로 남겨둘 마음이 없었다. 누가 쏘았는지 알아내어 정당한 포상을 내릴 것이다.
브라간사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겠지만.
“레이테.”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남편의 목소리에 레이테는 고개를 돌렸다. 에르난이 말에 탄 레이테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에르난.”
레이테가 남편의 이름을 부르자, 그는 아내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자연스럽게 그 손을 잡고 말에서 내려오려던 레이테는 순간 멈칫했다.
‘드레스도 아니고 갑옷 차림인데 좀 우습나?’
갑옷 입은 전사가 귀부인처럼 에스코트를 받으며 말에서 내린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레이테는 곧, 투구에 가려져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을 미소를 지으며 남편의 손을 잡고 말에서 내려왔다.
어차피 그녀의 삶은 온통 세상이 들어 보지 못했을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남편과 왕위를 공유하는 아내. 나라를 통치하고 전쟁을 지휘하는 여왕. 거기에 사소한 한 가지를 마음대로 더할 뿐이다.
말에서 오르내리기 쉽도록 두는 계단이 없었기에, 에르난은 결국 아내를 거의 안다시피 해야만 했다. 갑옷까지 입었으니 무게가 상당할 텐데도 그는 가뿐하게 레이테를 내려 주었다.
아내의 양발이 땅에 닿자, 에르난은 그녀를 놓았다. 그리고 몇 발짝 뒤로 물러서 투구를 벗었다.
답답하던 숨이 확 트이자 에르난은 머리를 가볍게 털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투구를 왼손에 든 그는 환히 웃으며 다시 아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더없이 밝은 미소 가운데 붉게 빛나는 눈이 무척 잘 어울렸다. 레이테는 당장 그를 껴안고 싶었다.
그녀가 발걸음을 옮기려는 그때, 에르난은 아내를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아……!”
레이테의 입에서 작은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잊을 뻔했다. 세상이 들어 보지 못한 것에 이 악수도 빼놓을 수 없다.
악수는 기사들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법도였기에, 기사가 아닌 레이테에게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행위였다. 하지만 에르난은 아내를 자기 세계 밖의 존재라며 배척하지 않았다.
부부는 서로의 손을 잡고 흔들며 과거의 두려움과 적의를 떨쳐냈다. 그 이후,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며 서로를 향한 신뢰를 표현했다.
그러니 부부의 인사는 당연히 이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레이테도 투구를 벗었다. 비로소 시야가 확 넓어지며 남편도, 주변도 모두 또렷하게 보였다.
그녀 역시 남편만큼이나 환하게 미소 지었다. 남편을 바라보며 반짝이는 눈에는 곧 눈물이 고여 촉촉해졌다.
레이테는 곧바로 남편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승리를 축하해요.”
어떤 인사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레이테는 조금 수줍어하며 당장 떠오르는 것을 말했다.
“보고 싶었다는 말을 먼저 할 줄 알았는데.”
에르난이 중얼거렸다. 레이테는 풋 하는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지만 여러 면에서 부인답달까요. 사실 너무나 듣고 싶은 말이었습니다. 또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지요. 당신의 승리 또한 축하합니다. 보고 싶었습니다, 레이테.”
“나도 마찬가지예요. 너무나 보고 싶었고, 다시 만나서 정말로 기뻐요.”
서로를 맞잡은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부부는 모두 갑옷을 입고 있었기에, 장갑 또한 금속판을 댄 것이었다. 서로 맞닿는 손바닥 부분은 평범한 장갑이긴 하다. 그래도 두껍고 거추장스러웠다. 온기 같은 것을 느끼기는 힘들었다.
그렇다면 온기는 다른 곳을 통해 느끼면 된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 순간, 그들은 왼손에 든 투구를 땅에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양팔로 서로를 껴안았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딱딱한 갑옷끼리 부딪쳤다. 하지만 갑옷은 그들의 포옹을 막을 수 없었다.
에르난이 살짝 허리를 굽혀 레이테에게 이마를 맞댔다. 코도 닿았다. 사랑하는 이의 눈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두 사람의 입술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상대의 따뜻한 숨결을 느끼면서, 부드러운 입술과 입술이 닿았다.
부부는 단숨에 서로에게 녹아들었다.
“와아!”
국왕 부부의 격렬한 키스를 본 병사들이 함성을 질렀다. 얼마나 소리가 컸던지, 부부가 순간 몸을 움찔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부부는 곧 태연하게 서로의 입술을 탐했다.
잠깐 놀라기는 했으나 어색해할 필요는 없었다. 많은 사람들의 앞에서 부부는 이미 여러 번이나 친밀감을 표현해 왔다.
정치적 연대를 상징하기 위해서든, 넘쳐나는 애정을 과시하고 싶어서든 이제는 정말로 상관없게 되었다.
어차피 둘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더는 떨어지지 않고 영원히.
부부는 숨쉬기가 힘들 지경이 되도록 키스를 나눴다.
“하아…….”
레이테가 잠시 숨을 고르는 거친 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웠다. 에르난은 장갑을 벗어 던지고, 맨손으로 아내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부드러운 살결, 그 위를 한줄기 눈물이 지나갔다. 에르난은 손끝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그는 아내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기뻐서 그런 줄은 알지만, 울지 말아요.”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내가? 울고 있단 말입니까?”
“몰랐나요?”
레이테도 장갑을 벗더니 남편의 눈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훑자, 에르난은 비로소 자신이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요. 나도 기뻐서 그렇습니다.”
에르난은 겸연쩍게 웃으며 다시 아내에게 입을 맞추려 고개를 가까이 댔다. 입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두 분 폐하.”
부부의 바로 옆에서 시스로네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순간에 방해라니 제정신인가! 에르난은 눈을 뜨고 옆을 노려보았다. 레이테도 원망하는 눈길로 시스로네스를 흘겨보았다.
시스로네스는 부부의 공격에 개의치 않고 거의 레이테의 키만 한 깃대를 그들에게 내밀었다. 사크틸라 왕과 바르시나 왕, 즉 부부의 문장이 그려진 깃발이 매달려 있었다.
“받으시지요. 승리는 모두와 함께 축하해 주십시오.”
아. 부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온통 기쁨에 겨워 즐거워하는 병사들뿐이었다.
부부는 함께 깃대를 받아들고 높이 치켜들어 흔들었다. 바람이 불며 깃발이 보기 좋게 펼쳐져 펄럭였다.
“와아아! 두 분 폐하 만세!”
다시 한 번 큰 함성이 터져 나왔다.
“사크틸라 만세!”
“바르시나 만세!”
병사들은 목이 터져라 자기 나라의 이름을 외쳤다. 서로 다른 두 나라의 이름이 한꺼번에 나오고 있으나, 그것은 어색함 없이 잘 어울렸다.
부부는 승리의 환호성 속에 파묻히며 다시 한 번 입을 맞췄다.
에필로그
#148
헤젤과의 전쟁이 끝난 지도 약 4개월, 뙤약볕에 구워져 버릴 것 같은 한여름의 8월에는 일과를 일찍 시작해야 한다.
특히 사크틸라와 바르시나의 왕, 에르난과 레이테 부부는 해도 뜨기 전에 일어나는 부지런함을 보였다. 업무를 시작하기 전, 부부만의 여유를 즐기기 위해서였다. 덥지 않을 때 보내는 가장 뜨거운 시간이었다.
“읏……, 아! 읏! 으흐읏! 으응!”
깊은 곳까지 찔러 들어오는 자극에 레이테는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움직임에 맞춰 함께 허리를 흔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힘이 허리에 도저히 들어가지 않을 만큼, 남편이 퍼붓는 자극이 너무 강했다. 그를 안고 있는 팔다리도 힘이 풀려 버릴 것 같았다.
에르난이 입을 맞춰 왔다. 혀가 들어오고 타액이 뒤섞였다.
“흐응…….”
입술을 탐하는 부드러운 움직임에 레이테는 녹아내릴 것 같은 기분이 되어 나른한 신음을 흘렸다. 요란할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부딪쳐 오던 에르난의 움직임도 그에 맞춰 느긋하게 변했다.
움직임만 느려졌을 뿐, 에르난의 욕망은 더욱 농밀하게 레이테의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그녀는 더 버틸 수 없었다. 다리의 힘이 먼저 풀리고 쾌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몸은 부르르 떨렸다.
에르난의 움직임이 다시 빨라졌다. 레이테는 팔로 간신히 남편을 붙잡으며 신음했다.
“하읏, 흐아……. 으읏! 응! 흐읏!”
레이테의 귓가에 들리는 남편의 헐떡이는 숨소리도 점점 커졌다. 그는 아내를 꽉 껴안고 힘껏 허리를 쳐올려 사정했다.
“헉……, 후우…….”
가쁜 숨을 몰아쉬던 에르난은 천천히 아내의 위에서 내려왔다. 레이테가 팔을 뻗어 그에게 안겨들었다.
“당신이 나를 너무 사랑해 주는 탓에, 아침부터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어요.”
“당신이 너무 사랑스러운 게 문제입니다.”
에르난은 아내를 안고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두 사람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와 신음으로 가득했던 침실에는 이제 나른한 숨소리만 들렸다.
에르난의 손이 열기가 남아 있는 아내의 부드러운 몸을 쓸었다. 등에서 허리로, 또 엉덩이로 손이 점점 내려가면서 말랑한 감촉이 에르난을 자극했다.
다시 살을 섞고 싶다. 지금 몇 시일까. 괜찮을까?
에르난은 고개를 살짝 들어 밖을 확인하려 했다. 굳게 닫힌 나무 창문 사이로 햇빛이 들어오는 것 같지는 않았다. 방에는 여전히 촛불이 켜져 있다.
레이테는 봉긋한 가슴을 남편의 가슴에 비벼 왔다. 그녀의 손도 남편의 허리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유혹하는 몸짓이 사랑스러웠다. 엉덩이를 더듬던 에르난의 손이 아내의 가슴으로 향했다.
그때, 누군가 침실 문을 조심히 두들겼다.
똑똑.
남편의 손길에 저절로 신음을 흘리려던 레이테가 입을 딱 다물었다. 에르난은 고개를 들고 문을 바라보며 눈을 부릅떴다.
문은 손가락 하나도 집어넣기 힘들 정도로 슬쩍 열렸다. 그 좁은 틈으로 사각형으로 접힌 편지 하나가 들어와 바닥에 살포시 놓였다.
그리고 문이 스르륵 닫혔다.
“아무래도 우리가 일어났다는 걸 알았나 보네요. 아예 자고 있었으면 들어와서 놓고 나갔을 텐데.”
문 쪽으로 몸을 살짝 돌린 레이테가 말했다. 에르난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카테리나였을 것이다. 그녀는 정말로 눈치가 좋았다.
“음, 그런데요……. 참 대단했네요.”
“뭐가 말입니까?”
“바닥 좀 보세요.”
에르난은 몸을 좀 더 일으켜 침대 밖 바닥을 바라보았다. 온갖 서류가 무질서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분명히 우리…… 눈 뜨자마자 했던 것 같은데…… 언제 저걸 침대 위에서 치운 거람.”
“기억 안 납니까? 나도 당신도 가차 없이 팔을 휘두르며 침대 밖으로 내던져 버렸는데.”
서류는 부부가 지난밤에 침대 위에서 살피던 것이었다. 봐야 할 양이 너무 많아 일거리를 침실까지 들고 왔다. 그러고는 그것을 살피다가 잠들었다.
그래서 새벽에 눈을 떴을 때, 부부는 종이를 치워 버리고 곧바로 몸을 겹쳤다.
아까는 급한 마음에 그랬지만, 저 서류들은 마구잡이로 내던져도 될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분실이라도 하면 난감해질 일이 많았다.
일단 저것들을 제대로 정돈해야 마음이 편해지겠다. 두 사람 모두 같은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부부는 주섬주섬 종이를 주워 탁자 위에 모았다. 서류는 참 많기도 했다. 지난밤의 고생이 떠올라 괜히 서글픈 마음도 들었다.
정리를 끝내고, 레이테는 문틈으로 들어온 편지를 가져왔다.
“이건 침대에서 읽죠.”
“그럽시다.”
부부는 침대 위로 올라가 이불을 덮고 누웠다. 정사를 나눌 때는 뜨거웠던 몸이 식으니 조금 추웠다.
에르난이 아내 쪽으로 팔을 뻗었다. 레이테는 남편의 팔을 베개 삼아 누웠다. 그리고 편지를 열었다.
리스보아에서, 7월 20일
가장 고귀하신 두 분 국왕 폐하께 당신들의 종 프란세스크가 보냅니다.
“리세우 공의 편지네요!”
레이테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실로 오랜만에 받는 프란세스크의 편지였다.
전쟁은 끝났으나 프란세스크는 여전히 헤젤에 있다.
뒤늦게 오빠가 헤젤에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카테리나는 그가 돌아오면 가만두지 않겠다면서 벼르고 있다. 동생이 그럴 것을 알기에 프란세스크가 일부러 안 온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왔으나, 사실 프란세스크는 일이 바빠 헤젤을 떠날 수 없었다.
브라간사가 죽고 전쟁이 끝났다. 왕실이 폭삭 무너지다시피 한 헤젤이 어떻게 변할지, 그 상황을 누군가는 계속 지켜봐야 했다.
물론 사크틸라에서 파견한 첩자의 수는 꽤 많았으며, 그들이 알아낸 것은 바르시나와도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바르시나인들은 같은 바르시나인이 입수한 정보를 더 신뢰하는 경향이 있었다.
벨류 왕이 오늘내일한다는 소식은 매번 전해질 테니 이제 식상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정말입니다. 그는 완전히 의식불명에 빠졌고, 사제들은 장례식과 다음 왕의 즉위식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다음 왕이 될 사람에 대한 소식은 이미 받으셨겠지요? 모두가 놀라더군요. 테레자 공주가 후계자를 보살피고 있을 줄 아무도 몰랐던 겁니다.
그런 테레자 공주가 현재 헤젤 왕실과 정국을 이끌고 있습니다.
그녀는 헤젤의 혼란을 빠르고 단호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결혼 후 왕궁을 떠나 오랫동안 은둔 생활을 했다는데, 그래도 벨류와 한 핏줄이 맞긴 한 모양입니다. 귀족들을 휘어잡는 모양새가 보통이 아닙니다.
헤젤을 엉망으로 만든 사람이 누구인데 그 어머니에게 나라를 맡기냐는 반발이 꽤 있었습니다. 그러자 테레자는 아들의 시신을 왕실 성당의 무덤이 아니라 고향으로 보내 버렸습니다.
브라간사 공작의 어머니가 아니라, 왕실의 어른으로서 질서를 바로잡겠다는 의지로 보입니다. 별일 없는 한, 새 왕이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계속 그녀가 섭정을 하겠지요.
당분간은 헤젤의 사정을 살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니 저도 계속 헤젤에 머무르며 소식 전하겠습니다.
아울러, 조만간 결혼을 할 것 같은데 두 분 폐하께서 너그러이 허락해 주시길 간청드립니다.
편지를 다 읽은 에르난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결혼? 아무리 정국이 정국이라지만 도통 헤젤에서 돌아올 생각을 안 하는 이유가 이래서였나.”
“뭔가 이상한데요. 귀족이 왕에게 결혼 허락을 받는 건 그냥 의례적인 일이잖아요. 하지만 간청이라는 말까지 하는 것을 보아 상대가 평범한 사람은 아닐 듯한 느낌이…….”
“예. 사고를 칠 테니 미리 각오하고 있으라는 예고 같아 보입니다. 대체 누구길래…….”
“어쨌거나 편지 내용에 따르면, 우리는 앞으로 테레자 공주를 주시할 필요가 있어요. 어린 왕의 섭정이 얼마나 막강해질 수 있는지는 내가 잘 알죠.”
레이테가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 아침 회의 주제가 나왔군요. 슬프지만 해가 뜨는 모양입니다.”
창문 틈으로 슬며시 들어오는 빛을 보며 에르난이 한숨을 쉬었다. 이불을 걷고 누운 몸을 일으키는 동작이 느릿느릿했다.
“……벌써.”
레이테도 허망하다는 듯 중얼거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주섬주섬 옷을 입으며 투덜거렸다.
“일하러 가기 싫어요.”
“어디 경치 좋은 곳에 별장이나 세웁시다. 거기로 도망가게.”
“지금 시작하면…… 내년에나 가겠네요. 하아.”
결국 레이테도 한숨을 쉬었다. 전쟁으로 인해 중단되었던 모든 일을 몰아서 하다 보니, 일 년 중 가장 더운 이 시기에도 쉬는 날이 없었다.
에르난은 아내의 뒤에 서서 슈미즈에 달린 끈을 당겨 묶어 주었다. 조금 부스스한 머리도 간단히 정돈해 주었다.
어차피 시녀들이 제대로 정리해 줄 테니, 지금은 손으로 넘기기만 하면 된다. 길이가 길지 않아 이만하면 충분했다.
귀부인은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묶어 올려야 한다. 하지만 그런 모양을 만들기에 레이테의 머리는 너무 짧았다.
얼마 전, 레이테는 또 머리를 잘랐다.
헤젤에서 도망치며 처음 머리를 자를 때처럼 긴 머리 때문에 목숨이 위험한 상황은 아니다. 그렇다고 여왕의 머리가 단정치 못하다며 못마땅해하는 나이 든 귀족들을 향한 반항도 아니었다.
‘다시 기를까 생각했지만 그때까지 못 버티겠어요. 짧지도 길지도 않은 길이로는 뭘 해도 마음에 안 들고 불편하기까지 하다고요.’
그저 레이테 본인이 어중간한 상태를 답답하게 여겨서일 뿐이었다.
에르난은 어느 쪽이든 좋았다. 솔직히 그의 눈에는 아내가 마음에 안 든다고 했던 머리 모양마저 예뻤다.
머리를 정돈한 에르난은 아내의 목덜미에 가볍게 키스했다.
레이테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조금 수줍은 웃음을 짓고 있을 것이다.
잠시 후 레이테는 뒤로 돌아 남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발꿈치를 들고 팔로 남편의 목을 끌어안았다.
에르난이 몸을 굽혀 아내를 안자, 레이테는 그에게 키스했다.
질척거림이 가득한, 당장 침대로 가고 싶어 안달이 난 키스였다. 에르난은 아내를 그대로 들어 올리려 했다. 침대로 갈 것이다.
그러자 레이테가 입술을 떼고 고개를 저었다.
“……일해야죠.”
에르난은 한숨을 쉬었다. 시간이 야속했다. 그는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아내를 바라보았다.
여름에 입는 얇디얇은 슈미즈는 밝은 곳에서 보면 몸의 윤곽이 아른아른 보여 대단히 매혹적인 느낌을 준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창문을 열지 않아 그런 것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에르난의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다. 양 가슴의 한가운데가 살짝 튀어나와 있었다.
에르난은 히죽 웃음 지으며 옷 위에서 유두를 쥐었다. 튀어나온 것을 살짝 누르며 비틀자 레이테가 신음했다.
“흐읏! 마, 만지지 마요!”
“일하자는 사람이 여기가 이렇게 되어 있으면 어떡합니까?”
그러자 레이테는 자신의 다리를 살짝 들어 남편의 허리 아래에 가져다 대고 눌렀다.
“그럼 이건 뭐죠!”
어느새 부풀어 단단해진 것에 레이테의 허벅지가 비벼졌다. 생각지도 않은 자극적인 마찰에 에르난은 순간 주저앉을 뻔했다.
“읏……. 아, 부인. 이러면 곤란한데 너무 좋…….”
좋아 미칠 것 같다. 도발적으로 남편을 올려다보는 아내의 표정마저 좋았다. 당장 아내를 갖고 싶다. 에르난의 눈에서 욕망이 번뜩였다.
그 순간 레이테는 다리를 내렸다.
“……그래요. 이러면 곤란하죠…….”
레이테는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 햇빛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으으으…… 나가기 싫어.”
부부는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며 침실 밖으로 나갔다.
* * *
아침 일찍부터 내리쬐는 뙤약볕 탓에, 회의장에 자리 잡은 귀족들은 벌써 기운이 다 빠져 보였다. 하지만 회의가 시작되자 모두 열성적으로 임했다.
중앙에 앉은 국왕 부부는 너무나 말끔하고 총명해 보였다. 일하러 가기 싫다며 침실에서 앓던 모습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헤젤에 새 왕이 즉위하고 어느 정도 안정이 된다 싶으면, 다시 삼자회담을 추진해 보고자 하네.”
레이테가 말했다.
양자가 아니라 삼자다. 전후 처리를 위해 부부는 계속 오누바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회의실에는 사크틸라와 바르시나 귀족이 모두 자리했다.
사크틸라와 바르시나는 여전히 별개의 나라이며, 서로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 하지만 공동 대응이 필요한 경우에는 거침없이 함께 모였다.
두 나라 사이의 교류도 더 적극적으로 이뤄졌다. 오누바에는 바르시나 상관이 들어왔고, 바르시나인의 집단 거주지도 생겼다.
바르시나는 아예 에르난이 어디에 가더라도 그를 따라다니며 닦달할, 아니, 보좌할 평의회를 만들어 버렸다. 고위 귀족이 주축이 된, 사실상의 이동식 궁정이었다.
그중 한 사람, 코른 후작이 물었다.
“회담이 열릴 경우, 헤젤의 대표는 테레자 공주가 되는 겁니까?”
“모를 일이지. 공주가 실권을 잡고 있다면 그러겠지만, 헤젤은 사크틸라와 바르시나 같은 나라는 아니어서 말이야……. 누가 되든 간에 우리 부부와 비슷한 격을 갖추면 그만이네.”
에르난이 답했다.
“두 분 폐하와 비슷한 격을 갖춘 헤젤인이라면 당장은 테레자나 리리우 공주뿐입니다. 어쩌면 리리우 공주가 우리에게는 더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스로네스가 말했다. 부부는 그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테레자는 정치적 감각이 꽤 있는 모양이지만, 리리우는 그냥 아가씨다. 그런데 시스로네스는 왜 리리우를 말하는 것일까?
국왕 부부가 의아한 표정을 보이자, 시스로네스가 물었다.
“못 들으셨습니까? 공주와 리세우 공이 결혼한다던데요.”
#149
“뭐……?”
부부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양국의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경악한 그들의 반응을 보며 시스로네스가 껄껄 웃었다.
“저만 아는 일이었나 봅니다? 결혼식에 초대하겠으니 꼭 와 달라는 연락까지 받았는데.”
“누, 누가 말입니까? 세스크가?”
“예. 저는 최소한 폐하께서는 아실 줄 알았습니다. 폐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리세우 공이라고 들었는데……?”
에르난은 순간 배신감에 사로잡혔다. 프란세스크는 그가 섬기는 왕이자 20년 지기 친구인 남자 대신, 별로 믿지도 않는 종교의 늙은 성직자에게 결혼 이야기를 털어놓은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주먹 쥔 손을 부르르 떨던 에르난은 그러나 곧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헤젤에 파견된 사크틸라 첩자들의 우두머리는 시스로네스다.
즉, 프란세스크는 시스로네스에게도 결혼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시스로네스가 알아냈을 뿐이다. 그리고 프란세스크는 시스로네스가 자기 일을 알아냈다는 사실을 깨닫고 능청맞게 굴었을 것이다.
하아. 에르난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하는 마음인지 한심한 마음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잠깐이나마 분노한 자신이 민망하긴 했다.
“친구를 의심하시다니요, 폐하.”
시스로네스는 에르난의 모든 반응을 파악했다는 양 이죽거렸다.
재수 없는 놈! 에르난의 손이 다시 떨렸다.
“놀랍군요. 그런데 가능한 결혼이긴 합니까?”
“공작이 리리우 공주와 친해 보이긴 했는데…….”
귀족들도 프란세스크의 결혼 소식이 신기한지 옆 사람과 쑥덕거렸다.
나름 진중하던 회의의 분위기가 풀어져 버렸다. 하지만 나쁜 현상은 아니었다.
최근 부부는 이전보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회의를 진행하려 애쓰고 있었다. 두 나라의 귀족들이 한자리에 모인 만큼 불필요한 긴장을 줄이고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시스로네스는 그것을 알고 프란세스크 소식을 던졌을까?
“세스크는 도대체……! 아니, 나이를 생각해야지. 공주가 이제 스물한 살쯤 될 겁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에르난도 아내를 향해 몸을 기울이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리세우 공은 몇 살인데요? 나는 정확히 모르거든요. 당신보다 네 살 많았던가?”
“예. 세스크는 서른둘입니다. 열한 살 차이는 정략결혼에서나 하는 짓이지 연애에서 무슨…….”
레이테도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때, 시스로네스가 끼어들었다.
“리리우 공주는 아직 생일이 안 지나서 스물입니다.”
“……그런 거 안 알려 주셔도 돼요.”
레이테가 중얼거렸다.
“본인들이 좋다면 나이가 중요하겠습니까? 아니, 물론 나이는 중요하긴 하지요……. 흐음…….”
시스로네스는 말을 하다 말고 생각에 잠겼다.
“결혼식에 초대까지 받으셨다는 분이 왜 그러십니까.”
에르난이 투덜거렸다.
다른 중요한 일정이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 한, 가족도 아닌 그들의 결혼식에 왕이 갈 일은 없다. 그러니 프란세스크는 에르난에게 초대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알면서도 에르난은 괜히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레이테는 남편을 토닥이면서, 시스로네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심각해진 표정의 그에게 뭔가가 있어 보였다.
* * *
재개된 회의는 이런저런 일을 논의하다 보니 정오가 넘어서야 끝났다.
점심 식사를 마친 에르난과 레이테는 부부의 사실에서 휴식을 취했다. 방의 창문은 모두 닫혀 있었다. 햇빛을 가리기 위해서다.
한낮에는 너무 더워 일을 할 수 없다. 그러나 햇빛이 들지 않고 통풍이 잘되는 곳에 있으면 버틸 만했다.
그렇게 한낮에 쉬는 대가로, 부부는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일해야 했다.
바쁘게 돌아갈 이후 일정을 위해서라도, 평소에는 가볍게 낮잠을 자며 이 시간을 보내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달랐다.
아침에 못다 한 것을 마저 하겠답시고, 부부는 대단히 뜨거운 휴식시간을 보냈다.
의자에 에르난이 앉고, 그 위에 레이테가 남편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질척하게 몸을 섞으며 한 차례 남편의 정을 받아낸 레이테는 나른한 신음을 흘리며 그의 애무를 즐겼다. 남편의 등을 손으로 더듬거나, 가볍게 허리를 흔들기도 했다.
에르난의 옷은 상하의를 연결한 끈이 풀려 있었고, 레이테의 드레스는 끌어 내려져 어깨와 가슴이 훤히 드러났다.
에르난은 드러난 아내의 가슴 한쪽을 입에 머금고 혀로 살살 간지럽혔다. 다른 쪽은 손으로 어루만졌다.
“으응……, 하아…….”
다시 일을 해야 하니 너무 무리하지 말자. 분명히 이런 말을 나누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는 부부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져 버렸다.
그래도 슬슬 휴식시간이 끝나가는 느낌이 들어 레이테는 힐끔 시계를 확인했다.
그녀의 감이 맞았다. 이제 나가야 할 때다. 아쉽지만 충분히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냈으니 괜찮았다.
레이테는 남편의 머리를 가볍게 들며 말했다.
“이제 나갈 준비를 해야 해요.”
에르난은 유두를 약하게 깨물면서 동시에 허리를 쳐올렸다. 짓궂은 자극에 레이테가 움찔거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즐긴 다음, 그는 아내의 허리를 잡아 일으켜 주었다.
탁자 위에는 잔이 두 개 놓여 있었다. 에르난은 하나를 아내에게 건네고 다른 하나를 집어 들었다.
원래 잔 안에는 얼음이 들어 있었지만 진작 다 녹아 물이 되었다. 그래도 마시니 무척 시원해서 기분이 좋았다.
“고마워요. 항구에 나가야 하니 서둘러야겠어요.”
단숨에 물을 마신 레이테는 차가워진 입술로 남편의 뺨에 입을 맞췄다. 독특하고 짜릿한 느낌에 에르난도 그녀의 뺨에 키스했다.
“괜히 했네. 더 놀고 싶잖아요.”
레이테가 투덜거렸다. 귀엽기도 하지. 에르난은 다시 그녀에게 입을 맞추려다가 문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움직임을 멈췄다.
“두 분 폐하.”
카테리나가 꽤 큰 목소리로 부부를 불렀다. 공손한 목소리에는 어딘지 모르게 지친 기색이 느껴졌다. 부부는 민망한 듯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 * *
전쟁이 끝나고 에르난이 아내와 함께 오누바에 계속 머물면서, 이곳을 오가는 바르시나 선박이 대폭 증가했다. 그 선박들은 당연히 상선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특이한 선박이 출항한다.
“직접 배웅하러 와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두 분 폐하.”
연신 허리를 굽히며 국왕 부부에게 감사를 표하는 콜롬보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반면에 그를 바라보는 부부는 어색하기 그지없는 억지웃음을 짓고 있었다.
“사크틸라와 바르시나에 이어 신세계의 왕이 되실 두 분 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그에 보답하여 반드시 산더미 같은 보물과…….”
“살아서나 돌아오게.”
에르난이 맥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저를 걱정해 주시는 겁니까? 오오, 폐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콜롬보는 아예 대놓고 눈물을 흘렸다. 한숨을 쉬는 에르난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듯했다.
서쪽 대양 너머의 세계에서 금을 가져오겠다는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하던 콜롬보는 기어이 오늘 모험을 떠난다.
에르난은 진심으로 이런 일에 자신의 돈을 투자, 아니,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콜롬보는 에르난이 맡긴 일, 대륙의 신무기 거래를 너무나 잘 해 주었다.
고민하던 에르난은 장사를 위해 콜롬보가 일시적으로 몰던 바르시나의 배를 무기한 대여해 주는 형태의 지원을 했다. 약삭빠른 깍쟁이라며 시스로네스에게 비웃음을 샀지만 상관없었다.
심드렁한 에르난에 비하면 레이테는 더 적극적으로 콜롬보를 도왔다. 배의 개조 비용은 물론 항해에 필요한 각종 자금도 지원해 주었다.
콜롬보의 주장에 반신반의하기는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도박 삼아 해 볼 만한 도전이기는 했다.
바르시나는 동쪽 바다로 진출하며 상업적으로 대성했다. 그것을 본 레이테로서는 사크틸라의 바다 진출을 꿈꾸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왕이면 바르시나가 휘어잡고 있는 동쪽 바다 대신 새로운 무대를 개척하는 편이 좋다.
‘잘되어야 할 텐데.’
콜롬보는 무릎을 꿇고 대단히 정중한 몸짓으로 여왕의 반지에 입을 맞추며 인사했다.
그도 바보는 아니다. 레이테가 남편보다 그의 일에 관심을 더 보이고 투자도 많이 했다는 사실을 안다. 콜롬보는 거의 성모상이라도 바라보는 듯 여왕을 올려다보았다.
콜롬보와 함께 떠날 선원들도 두 왕에게 인사를 했다. 그중에는 에르난을 도와 바르시나군의 총기 도입에 가장 큰 공을 세운 남자, 페레트도 있었다. 그는 지팡이를 짚고 서 있다가 부부가 다가오자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무릎 꿇고 인사드리지 못해 송구합니다, 두 분 폐하.”
페레트는 화약 폭발에 휘말려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부상은 꽤 심각했고 그는 제대로 걸을 수 없는 몸이 되어 군대를 떠나야 했다.
에르난은 그가 승전의 가장 큰 공로자라고 치하하며 작위와 영지를 수여하고 연금도 지불했다. 비겁한 도망자에서 영웅이 된 페레트는 불편한 몸으로 더 고생할 필요 없이 편히 쉬기만 하면 되었다. 죽은 동생의 유산을 뒤늦게 정리하느라 바쁜 팀파노 정도를 제외하면, 다른 지휘관들은 이미 귀향하여 휴식을 즐기고 있다.
하지만 페레트는 별안간 콜롬보의 모험에 끼어들었다.
원래 페레트는 콜롬보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세르지와 친한 사람이니 딱 그와 같은 수준의 인간이라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콜롬보가 본격적으로 모험 준비를 하면서, 페레트는 콜롬보의 일에 관심을 보였다. 결국 군사학 서적을 함께 집필하자는 아르파의 제안마저 거부하고 항해에 참여하게 되었다.
“불편한 몸으로 괜찮겠나?”
“괜찮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드디어 모험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설렙니다.”
에르난의 물음에 페레트는 마치 소년처럼 눈을 반짝거리며 답했다.
사실 그의 마음속은 그다지 소년처럼 순수하지는 않을 것이다. 부부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보물을 발견하고 새 땅을 개척할 경우, 그것의 일부는 왕에게 바치기로 되어 있다. 왕의 자금을 지원받아 떠나는 모험이니 당연하다.
하지만 발견자의 몫은 분명히 있다. 페레트는 그것을 노린다. 기존 귀족과 경쟁할 필요 없는 완전히 새로운 땅이니까.
욕심에 끝이 없는 사람이다. 하긴, 그 욕심 덕택에 사크틸라와 바르시나가 승리하긴 했다.
“반드시 두 분 폐하께서 만족하실 만한 성과를 들고 오겠습니다.”
왕이 만족할 만한 성과면, 페레트에게도 그만한 보상이 주어진다. 페레트답다는 생각에 에르난은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이야 웃지만, 수익 분배 문제를 논의하면서 국왕 부부는 꽤 오랫동안 머리가 아팠다. 콜롬보가 어떻게든 자신의 몫을 더 남기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 집요함을 보며 에르난은 다시금 콜롬보가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상인으로서 재목이 아닌가. 그런데 모험 따위에 재능과 인생을 낭비하다니.
어차피 허탕 칠 것이 뻔한 모험이다. 에르난은 콜롬보의 기분이라도 덜 나쁘게 해 주자 싶은 마음에 콜롬보의 요구를 꽤 너그럽게 수용했다.
다만 레이테는 달랐다. 콜롬보의 모험 자금은 거의 그녀의 돈이었다. 그녀에게 모험은 현실의 일이었다. 레이테는 대단히 깐깐하게 협상에 임했다.
그 결과, 보물이든 땅이든 무엇이든 콜롬보가 획득하는 것의 대부분은 사크틸라 여왕이 소유하게 된다.
“무사히 항해하기만을 바랄 뿐이야.”
그런 레이테도 큰 기대는 없는 모양이지만.
콜롬보와 페레트 등에게 건네는 그녀의 말은 살아 돌아오라는 에르난의 이야기와 별 차이가 없었다.
인사를 마친 선원들은 배에 탔다. 돛이 펼쳐지고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콜롬보는 갑판에 서서 육지를 향해 팔을 높이 들어 흔들었다.
국왕 부부는 한숨을 쉬면서 그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 * *
지독하게 더웠던 여름이 끝나고 짧은 가을도 지나갔다. 날이 슬슬 추워지자 왕의 궁정은 바르시나의 아라고로 이동했다.
에르난은 8개월 만에 바르시나로 돌아왔다. 레이테에게는 거의 4년 만인 바르시나 방문이었다.
오랜만에 온 아라고는 전과 마찬가지로 따뜻한 곳이었다. 레이테를 대하는 바르시나 사람들의 태도도 이전보다 많이 부드러워졌다. 심지어 국왕 부부가 도착하던 날, 성대한 환영식이 열리기도 했다.
4년 전 겨울은 레이테에게 꽤 힘겨운 때였다. 바르시나인의 눈치를 보고, 후계자 출산에 대한 기대와 압박에 시달리고, 회담 문제로 브라간사와 신경전도 벌였다.
그때에 비하면 이번 겨울은 기쁜 마음으로 편안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는 레이테의 착각이었다.
#150
아라고에 도착한 이후 레이테는 계속 몸이 편치 않았다. 좋아하던 달콤한 음식조차 손이 안 갈 만큼 입맛이 사라지고 구역질도 했다. 결국 그녀는 새해 첫 일정으로 시의에게 진찰을 받았다.
연말에 일거리가 많아 피로가 쌓인 탓에 아픈 줄 알았는데, 시의는 뜻밖의 말을 해 왔다. 임신이라는 것이다.
그날 밤에는 사크틸라와 바르시나의 주요 귀족을 모두 초청한 신년 만찬회가 있었다. 양국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어느 때보다 성대하게 열린 연회였다.
목적과 달리, 양국 귀족들 사이에서는 묘한 신경전이 있었다. 봄이 오면 국왕 부부를 어느 나라로 모시느냐 하는 문제였다.
하지만 여왕의 임신 소식이 알려지고 출산 때까지 아라고에 머물기로 결정되면서 신경전은 무의미해졌다. 만찬회는 여왕의 임신을 축하하는 자리가 되었다.
그때만 해도 모두가 마냥 즐거웠다. 하지만 곧 혼란이 그들을 덮쳤다.
일단 왕실의 임신과 출산 자체가 두 나라 모두 대단히 오랜만에 맞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여왕의 임신이다. 왕의 비가 아닌 왕의 임신.
왕비는 출산 때까지 절대적인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아이를 무사히 출산하기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왕에게는 해야 할 일이 많다. 왕이 부재하면 사크틸라의 국정은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없다. 레이테도 쉴 생각이 없었다.
임신한 왕은 쉬어야 하나? 업무를 해야 하나? 이에 대해 명쾌한 답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누구도 겪어 보지 않은 일이었으므로.
“일어나세요, 폐하.”
서류에 한창 집중하던 레이테는 옆에서 들리는 박력 넘치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손에 든 서류를 떨어뜨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에르난의 계모, 블랑슈가 와 있었다.
블랑슈는 아라고 근방의 작은 도시에 머물고 있었다. 겨울을 보내기 위해 따뜻한 곳으로 왔으나, 국왕 부부에게 부담은 주지 않겠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레이테의 임신 소식이 알려진 지 하루 만에 그녀는 왕궁에 찾아왔다.
레이테는 블랑슈를 조용하고 고고한 여인으로 기억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당장 레이테를 집무실 밖으로 끌어낼 기세였다.
“귀하신 분께서 수태하셨는데 일을 한다니. 말도 안 됩니다. 무조건 쉬셔야 합니다.”
“……네.”
결국 레이테는 하루 종일 처소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 분이실 줄은…… 몰랐어요.”
그날 밤, 침대에 누운 부부는 블랑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아예 대놓고 혼이 났습니다. 임신한 아내에게 일을 시키다니, 네 아버지도 그런 못된 짓은 안 했을 거라면서…….”
“……우와.”
“정작 어머니께서는 출산 경험이 없으시지요. 아마 그렇기 때문에 더 당신의 임신에 놀라신 것 같습니다.”
에르난의 말이 맞았다. 몇 주 후, 사크틸라에서 어린 딸과 함께 온 손님의 반응은 블랑슈와 판이했으니까.
“폐하, 축하드려요!”
“조아나! 정말 오랜만이에요!”
조아나는 오랫동안 레이테를 보좌했으나 출산을 계기로 시녀 일을 그만두었다. 그러다가 경험자로서 임신한 여왕을 돕기 위해 아라고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조아나는 여왕이 정상적인 업무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폐하께서는 드디어 원하는 삶을 살고 계시잖아요. 왕다운 왕 말이에요. 그걸 포기하실 필요는 없어요.”
레이테는 가슴이 찡해졌다. 오랫동안 레이테를 보살핀 그녀는 레이테가 무엇을 원했는지 너무나 잘 알았다.
“그리고 제가 임신을 해 보니 지나치게 무리만 하지 않으면 괜찮겠더군요. 그러니 이런 엉망진창 뜨개질은 당장 그만두세요……. 보는 사람이 괴로워요…….”
조아나는 레이테의 손에 들린 정체불명의 털 뭉치를 뺏어 버렸다. 레이테가 블랑슈의 눈치를 보느라 억지로 하던 뜨개질이었다. 레이테는 자신에게 손재주가 얼마나 없는지 뼈저리게 느끼던 참이었다.
여왕의 강제 휴직은 몇 주 만에 끝났다.
사람들은 업무에 복귀한 여왕을 반가워했다. 동시에 그녀가 업무를 해도 괜찮은지 염려했다.
레이테 자신도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도 그 답을 알려주지 않았다.
“임신 여부를 떠나서, 당신은 좀 쉴 필요가 있었습니다. 지난 연말에는 정말 일만 하며 살았잖습니까. 이제 쉴 만큼 쉬었으니,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나는 그걸 도울 테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해도 괜찮아요.”
“……예.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남편이라고 답을 알 리가 없었다.
그래도 에르난은 자신의 말을 지켰다. 여왕은 몸이 힘들지 않은 선에서 업무에 복귀했고, 에르난은 아내가 무리하지 않도록 여러 면에서 그녀를 도와주었다. 바르시나 왕으로서 사크틸라 여왕에게 참견할 수 있는 영역에는 한계가 있었음에도.
모든 것이 어색하고 불확실했지만, 레이테는 남편과 함께 하루하루를 충실히 보냈다.
* * *
완연한 봄이다. 업무를 마친 에르난은 아내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의 손에는 갖은 꽃을 엮어 만든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내는 꽃을 선물 받으면 굉장히 좋아했다.
일주일 전인 4월 23일은 아내의 스물여덟 살 생일이었다. 여왕의 생일인 그날은 조르디 성인의 축일이기도 했다.
조르디는 사악한 용을 무찌르고 공주를 구한 기사 전설의 주인공이다. 5년 전, 에르난이 감금당한 레이테를 구해 결혼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선전하기 위해 비유한 성인이었다.
신앙심 없는 바르시나 사람도 멋진 전설의 주인공은 좋아한다. 마침 놀기 좋은 따뜻한 봄이기도 하니, 바르시나 곳곳에서 축제가 열렸다. 특히 아라고에서는 이날 연인에게 장미를 선물하는 풍습이 있었다.
에르난은 그 풍습에 따라 장미를 한 아름 준비해 아내에게 선물했다. 특별히 주문한 사크틸라산 장미였다.
“예뻐라……! 고마워요, 에르난.”
아내는 에르난의 기대 이상으로 기뻐하며 집무실 곳곳을 장미로 장식했다.
레이테는 찡그린 얼굴로 일을 하다가도 장미만 보면 활짝 웃었다. 카테리나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에르난은 아내에게 꽃을 자주 선물하자고 결심했다.
그래서 챙긴 새 꽃이다. 아내를 만날 생각에 즐거워하며 에르난은 그녀의 집무실로 들어가려 했다.
“그 광신도들 주장대로 이교도를 몽땅 추방하자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당장 돌아가서 다시 만들어 와!”
복도까지 울려 퍼지는 아내의 날카로운 외침에 에르난은 발걸음을 멈췄다.
‘별로 좋지 않을 때에 왔나.’
집무실 문이 열리고 수도복 차림의 젊은 남자가 밖으로 나왔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신부는 에르난을 보고 공손히 인사했다.
고생이 많다. 에르난은 말없이 신부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 여왕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레이테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손으로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
“부인.”
“어라, 에르난? 벌써 일이 끝났나요?”
남편을 본 레이테의 얼굴이 한순간에 밝아졌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남편에게 다가가자 에르난은 꽃다발을 내밀었다.
“이제 장미 말고 이것들을 보시지요.”
“고마워요!”
레이테는 한 손에 꽃다발을 들고, 다른 손으로 남편을 안았다.
잠시 입맞춤을 주고받은 부부는 집무실 한쪽에 있는 장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에르난이 워낙 자주 찾아오다 보니, 아예 그의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오면서 들으니……, 신부가 오늘도 신부다웠나 봅니다?”
“네. 평소와 똑같이 어설프고 물러 터졌어요.”
부부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여왕에게 서류를 올리러 왔다가 잔뜩 혼나고 돌아간 신부는 시스로네스의 후임이었다.
지난가을, 시스로네스는 국왕의 특사 자격으로 헤젤에 다녀왔다. 새 왕의 즉위를 축하하고 본격적으로 회담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아울러 그는 프란세스크와 리리우의 결혼식에도 참석했다.
“공주는 이미 리세우 공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입니다. 결혼식을 너무 빨리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더니 공작이 귀띔해 주더군요.”
일을 마치고 귀환한 시스로네스는 이런 충격적인 사실을 국왕 부부에게 알려주었다. 부부가 할 말을 잃고 침묵하는데, 그는 별안간 은퇴를 선언했다.
“급한 일은 모두 마쳤으니, 저는 이만 쉬고자 합니다.”
언젠가부터 시스로네스의 입에서 나이를 생각해야겠다는 말이 자주 나왔다. 레이테는 그것이 수상하다 생각했으나, 은퇴까지 이어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새해가 오기 전에 시스로네스는 왕궁을 떠나 수도원으로 갔다. 사크틸라가 아닌 바르시나의 수도원이었다. 은퇴한 추기경은 그곳에서 한 줌도 되지 않을 바르시나인 신학생을 지도했다.
시스로네스가 맡았던 왕명 대리인의 직무는 신임 사크틸라 수석 대주교에게 넘어갔다. 그와 별개로 시스로네스는 자신이 추진하던 갖은 교회 개혁을 이어서 할 젊은 사제를 왕에게 추천했다.
시스로네스가 굳이 그를 고른 이유는 사크틸라인과 바르시나인의 혼혈이기 때문일 것이다. 시스로네스는 여왕에게 신부를 소개하며 말했다.
“어리숙한 면이 있는 건 사실인데, 머리가 좋고 성실하니 폐하께서 참고 굴리시면 잘 따라올 겁니다.”
“굴…… 뭐라고요?”
시스로네스가 떠나고 새 신부가 온 지 넉 달째. 레이테는 아직 그가 못마땅했다. 시스로네스가 추천한 인물이니 일 년 정도는 참을 생각이지만 그다음은 모르겠다.
“이교도 추방이라니, 꽤 무서운 표현이 들리더군요. 무슨 일이었나 물어봐도 됩니까?”
에르난이 아내 대신 그녀의 머리를 꾹꾹 눌러 주며 물었다. 레이테는 눈을 감고 시원한 느낌을 즐겼다.
“지압 실력이 나날이 늘어나네요, 당신.”
“당신이 좋아하니까.”
“고마워요.”
레이테는 남편에게 기댔던 몸을 살짝 일으켜 그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고 신부와의 일을 설명했다.
“……사실 신부에게 좀 미안하긴 해요. 일부 극단주의자의 성화에 못 이긴 흔적이 역력한 제안서가 엉망이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 정도로 화를 낼 수준은 아니었으니까. 다만 오전에 있었던 회의의 짜증이 여태 풀리지 않은 탓에…….”
“아…… 이런. 그걸 생각하니 내 머리도 좀 눌러 줘야겠습니다. 생각만으로도 아파 오는군요.”
부부는 동시에 한숨을 푹 쉬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전쟁 같은 대외적인 일에 치여 살았다. 하지만 이제는 내치에 본격적으로 신경 쓸 때다.
그 시작은 사크틸라와 바르시나 전역의 농토 조사였다. 왕실의 힘이 잘 미치지 않는 곳에서는 지역 영주의 전횡으로 평범한 사람이 땅을 빼앗겨 농노가 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세금 징수도 엉망이었다.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필요한 일이지만 양국 모두 귀족들의 반발이 컸다. 특히 지방 귀족의 힘이 강한 바르시나가 그랬다.
부부는 물러설 마음이 없었다. 그런 탓에 귀족들과의 날카로운 설전이 연일 이어졌다. 오늘 오전의 회의도 그중 하나였다.
“뭐…… 반발할 줄 알고 시작한 일이니 어느 정도는 각오해야죠. 하지만 귀족들의 태도…… 그건 정말이지…….”
“무슨 태도 말입니까?”
쌍수를 들고 반대하는 모습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 에르난이 영문을 알 수 없어 눈을 깜박거리자 레이테가 버럭 소리 질렀다.
“내가 임신 때문에 예민해진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아……, 소리가 너무 컸네요. 미안해요. 귀 아팠나요?”
분에 겨워 외치고 나니 뒤늦게 민망해진다. 레이테는 남편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괜찮습니다. 그러니 더 만져 주십시오. 기분이 좋군요.”
에르난은 아내 쪽으로 머리를 기울였다. 그 모습이 귀여워 레이테는 남편의 귓가에 입을 살짝 맞춘 다음 말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겠지요. 예민해졌다는 걸 나도 느끼니까. 그런데, 내가 조금만 날카롭게 굴어도 ‘여왕께서 임신 중이라 예민해지셔서……’, 뭐 이런 식이더군요. 자기들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도 안 하고 내 핑계를 대는 거예요!”
레이테는 한바탕 말을 쏟아내고 남편에게 몸을 기댔다. 에르난은 아내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슬슬 불러오는 아내의 배에 그의 손이 닿았다. 그곳을 조심스레 어루만지며 에르난이 말했다.
“얘야, 들었겠지? 왕은 이러면서 산단다. 그래도 어쩌겠니. 너는 왕이 될 텐데.”
태어날 아이의 성별이 어떠할지, 또 왕위 계승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에르난은 당연하다는 듯 배 속의 아이를 미래의 왕이라고 말했다.
“지금은 편히 쉬려무나. 밖에 나오면 너는 아주아주 많은 공부를 해야 한단다. 왜냐면 네 아빠가 그랬거든.”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애한테 왜 벌써 부담을 줘요…….”
“왕은 모후의 배 속에서부터 만들어지는 겁니다.”
에르난의 목소리는 퍽 진지했다.
레이테는 남편이 어떻게 자랐는지 알 것 같았다. 그가 우수한 제왕 교육을 받았다는 말은 들었는데, 어린 시절부터 시달렸나 보다.
“오르쿠예라 백작이 찾아왔습니다.”
부부가 시시콜콜한 잡담을 주고받던 중, 집무실 문이 열리고 카테리나가 들어와 말했다.
오르쿠예라 백작, 세르지는 그동안의 크고 작은 공을 인정받아 백작위를 수여받았으며 얼마 전 카테리나의 남편이 되었다.
집무실로 들어온 백작은 국왕 부부에게 인사하기 전, 아내를 향해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민망해진 카테리나가 얼굴을 팍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제발 백작답게 근엄하게 좀……!”
하지만 국왕 부부는 개의치 않았다. 신혼이니 그러려니 싶었다. 그들은 백작이 얼마나 오랫동안 카테리나를 좋아하며 쫓아다녔는지 잘 알았다.
“두 분 폐하, 알현실로 가셔야겠습니다.”
“음? 누가 온 건가?”
“예, 콜롬보가 돌아왔습니다.”
세르지의 말에 부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들은 곧바로 알현실로 향했다.
“정말로 서쪽 바다 끝까지 갔을까요?”
“글쎄. 빈손이라면 우리를 찾아오지도 않겠지요. 이것 참……, 바르시나와 사크틸라만으로도 벅찬데 관리해야 하는 곳이 더 늘어나는 건가? 설마?”
레이테는 남편의 말을 듣더니 걸음을 멈췄다.
“말은 확실하게 해야지요. 콜롬보가 새 영토를 개척했다면, 그건 사크틸라의 땅이에요. 이유는 알지요?”
에르난은 웃음을 터뜨렸다.
맞다. 콜롬보가 받은 지원의 대다수는 사크틸라 자금이다. 바르시나와 사크틸라의 구분은 확실히 해야 한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같이 들읍시다.”
남편도 아내도, 그들의 소유물도 흡수되어 사라지는 것 없이 동등하게 공존한다. 에르난과 레이테의 결혼은 여태껏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형태의 결합이었다.
그렇기에 부부의 삶은 계속해서 크고 작은 새로운 것을 탄생시켰다.
이제 또 다른 새로움을 만나러 갈 차례다.
부부는 손을 잡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 F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