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5장 : 탈출
#116
에르난은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며 말을 달렸다. 그의 뒤에 앉은 레이테는 남편의 허리를 꽉 붙잡았다. 워낙 말의 속도가 빨라, 거의 그에게 매달려 가는 듯했다.
부부를 쫓아오는 말발굽 소리가 점점 커졌다. 추격자의 수가 늘어난 것이다.
적을 확인하고자 뒤를 힐끔 쳐다보던 레이테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에 경악했다.
“꺅!”
화살은 그녀의 등에 닿았다.
하지만 날카로운 것이 부딪히는 충격만 느껴질 뿐, 레이테는 상처를 입지 않았다. 갑옷 덕택이었다.
“괜찮습니까?”
“화살이 날아왔어요! 갑옷 덕택에 무사해요!”
“다행입니다. 그런데 화살을 쐈다고요? 제정신인가?”
에르난은 기가 막혔다. 적에게 부부는 생포해야 할 존재이지 죽여서는 안 된다. 활을 잘못 쐈다가 큰일 나면 어쩌려는 거지?
‘아니. 애초에 지금 상황 자체가 정상이 아니잖아?’
아내에게 흉갑뿐만 아니라 투구도 씌우는 편이 좋았을까? 에르난은 뒤늦게 후회했다. 날아오는 화살이 레이테의 머리를 맞추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문제는 하나 더 있었다.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아내의 은발이었다.
워낙 눈에 띄는 머리카락이 화려하게 흩날리다 보니, 적은 은발을 표적 삼아 쫓아오는 듯했다. 그렇지 않으면 순식간에 늘어난 추격대의 숫자를 설명하기 힘들다.
‘투구로 가렸어야 했나……!’
하지만 이미 늦었다. 에르난은 더 빠르게 말을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레이테, 꽉 잡아요!”
언덕을 내려가자 리스보아 시가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길이 복잡하니 적을 따돌려 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희망을 품으며, 에르난은 갑자기 달려오는 말에 놀라 물러서는 사람들을 지나쳤다.
* * *
시가지의 골목으로 숨어든 부부는 잠시나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안전하지 않기는 그곳 또한 마찬가지였다. 시내의 길은 당연히 헤젤인이 더 잘 안다.
레이테는 지나가는 물장수에게 머리핀을 떼어주며 물을 샀다. 물을 마시는 데에는 과분한 대가지만 따질 겨를이 없었다. 부부는 목을 축이고 다시 말에 올라탔다.
“군인들이 은발 여자를 찾으면 모른 체하시오.”
출발하기 전, 에르난은 어색한 헤젤어로 물장수에게 말했다. 물 몇 잔을 팔고 금세공 장식품을 받은 물장수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시내 밖으로 나가는 길을 묻자 물장수가 친절하게 방향을 안내해 주었다.
그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정말로 추격대에게 따라잡혔을지도 모른다. 겨우 성문을 빠져나온 에르난은 말의 속도를 높였다.
장애물이 없는 길이니, 적의 추격도 거세어질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맹렬한 말발굽 소리가 금방 들려왔다.
“에르난! 몸을 숙여요!”
레이테가 다급하게 소리 질렀다. 에르난이 몸을 굽히자마자, 그의 위로 화살이 슝 지나갔다.
“계속 쏘고 있어요! 일어나지 말고 그대로 말을 몰아요!”
에르난은 초조해졌다. 설령 아내나 자신이 화살을 피한다 해도, 말은 맞을 수 있다. 말이 넘어지면 끝장이었다.
부부의 앞에 강이 나타났다. 나무다리를 순식간에 건넌 에르난은 검을 휘둘러 다리를 고정한 끈을 끊어 버렸다.
“됐어요! 적들이 멈췄어요!”
레이테가 외쳤다. 에르난은 눈앞에 보이는 숲 안으로 뛰어들었다. 이대로 숲을 돌파하면 적을 일단은 완전히 따돌릴 수 있다.
그런데 말의 속도가 갑자기 느려졌다. 너무 무리한 모양이었다. 에르난은 말을 다독였으나, 결국 말은 몸을 휘청거리더니 옆으로 쓰러졌다.
“레이테!”
에르난은 몸을 돌려 아내를 꽉 안은 채로 바닥을 굴렀다.
“으윽!”
등에 가해지는 충격으로 에르난은 순간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아, 하아……. 에르난! 괜찮아요?”
가쁜 숨을 몰아쉬는 레이테가 남편을 일으켜 앉혔다. 여전히 그녀를 붙잡은 에르난의 팔이 떨렸다.
“조금만……, 조금만 있다가 갑시다.”
몸을 비틀거리는 에르난이 말했다. 레이테는 고개를 끄덕이고 남편을 자신의 몸에 기대게 했다.
한시가 급한 것은 부부 모두가 알고 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완전히 체력이 소진된 상태였다. 몇 시간이나 말을 몰던 에르난은 더욱 그랬다.
더군다나 말은 아예 기절해 있었다. 저 말을 더 타고 가기는 무리다.
“다친 데는 없나요?”
“바닥에 부딪혔더니 아프긴 하지만,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신은?”
“괜찮아요.”
두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는 어딜까?’
레이테는 헤젤어를 공부하며 함께 배웠던 헤젤의 지리에 대한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리스보아 근교에 숲이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말을 타고 건너왔던 강은 리스보아 외곽에서 여러 줄기로 갈라져 남으로 흐르는 강이 틀림없다.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리스보아 성곽 너머에 해가 걸려 있었다.
‘동쪽으로 나온 건가? 나쁘지 않아.’
남쪽과 서쪽은 바다다. 북쪽으로는 길이 잘 닦여 있으니 부부를 찾는 이들도 그만큼 많을 것이다.
‘여왕이 첩자 노릇을 할 것도 아닌데 왜 세세한 지리까지 배워야 하냐며 불평했었는데, 이렇게 사용하는 날이 오는구나.’
그저 공부를 더 시켜 사람을 괴롭히고 싶었던 것 아니냐며 시스로네스에게 대들던 어린 시절의 일이었다.
‘시스로네스……, 괜찮을까?’
추기경은 교회 세계의 고위 귀족이나 마찬가지인 존재이며, 또 시스로네스 자체가 여왕의 최측근이다. 죽이기에는 거물이다.
하지만 시스로네스는 왕이 아니었다. 이용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면, 그는 죽을 수도 있다.
‘안 돼!’
레이테는 몸을 떨었다.
“부인, 춥습니까?”
“아, 아녜요. 다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지 걱정되어서…….”
“……무사하길 바라야지요.”
에르난은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헤젤을 찾은 사크틸라와 바르시나 사람의 수는 적지 않았다. 그들이 모두 죽임당했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동시에, 그들이 모두 무사하리라는 장담도 할 수 없다.
“누구라도 좋으니 우리 사람을 좀 만나면 좋을 텐데, 그러지 못한다면 우리끼리라도 일단, 일단…….”
“일단 사크틸라로 돌아가는 편은 어떨까요? 여기는 적국이에요.”
“그러면 나는 결국 몸값을 지불하지 않고 귀환하는 셈이 되는군요.”
에르난이 피식 웃었다. 정말로 그렇게 된다. 레이테도 쓴웃음 지었다.
“해가 다 지기 전에 숲을 빠져나가, 밤을 지낼 곳을 찾읍시다.”
에르난이 일어났다. 그는 몸을 휘청거렸으나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아내에게 손을 내밀었다.
약하게 굴 시간이 없었다. 레이테는 남편의 손을 잡고 지쳐서 무거워진 몸을 일으켰다.
* * *
숲을 빠져나오는 데에는 생각보다 시간이 꽤 걸렸다. 다행히 언덕 아래에 마을이 보였다.
에르난은 자신의 망토를 풀어 아내에게 둘러 주었다.
“괜찮아요. 춥지 않아요.”
“추위 때문이 아닙니다. 당신의 머리카락을 가려야 해요.”
“아……!”
고개를 끄덕인 레이테는 망토에 달린 후드를 쓰고 그 안으로 머리카락을 집어넣었다.
물장수에게 머리핀을 준 탓에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정돈하기가 쉽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이런 식으로 방해꾼처럼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벗겨지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어.’
부부는 마을을 향해 걸어갔다.
“아 참, 에르난. 되도록 당신은 말을 하지 말아요. 당신의 헤젤어는 외국인이라는 느낌이 너무 또렷해요. 대화할 일이 있다면 내가 하겠어요.”
사크틸라는 헤젤과 충돌과 교류를 반복해 왔다. 그래서 사크틸라의 지배계층 대다수는 수준급의 헤젤어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레이테도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그녀에게는 바르시나어보다 더 쉽게 느껴졌다.
“아니요. 당신이 나섰다가 위험해질지도 모릅니다. 그냥 내가 사크틸라인인 척하겠습니다. 사크틸라인을 헤젤에서 보기는 썩 어렵지 않다는데요.”
“맞기는 해요.”
비록 전쟁 직후라 해도 말이다.
“집안의 반대를 피해, 사크틸라에서 도망쳐온 연인인 척하면 되겠지요.”
“네?”
“그……, 소설에서 흔히 나오는 것 있잖습니까. 사랑의 도피라고 하던가?”
“…….”
이런 상황에서 소설 이야기를 할 여유가 있나? 남편에게 핀잔을 주려던 레이테는 곧 입을 다물었다.
아마 에르난은 긴장을 덜기 위해 일부러 저렇게 말하는 것일 터다.
따지고 보면 부부에게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레이테의 집안사람인 숙부는 두 사람의 결혼을 원하지 않았다. 결국 둘은 숙부에게서 도망쳐 결혼했다.
“좋아요. 잘 부탁해요.”
레이테는 방긋 웃으며 남편을 끌어안고 가볍게 키스했다.
* * *
부부는 해가 완전히 지고 나서야 마을에 도착했다. 왕도인 리스보아에서 멀지 않은 곳인데도, 마을은 시골 분위기가 물씬 났다.
작은 여관으로 들어가기 직전, 에르난은 레이테가 머리카락을 제대로 가렸는지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자신의 옷소매에 달린 단추 하나를 뜯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귀족들이 시골 여관에서 보석을 숙박비로 계산하던데…….”
“그러면 당신은 세상 물정을 안다는 뜻인가요?”
레이테가 키득키득 웃었다.
에르난의 말대로, 하룻밤 숙박비로 사파이어 단추를 건네받은 여관 주인은 놀라움을 넘어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부부를 바라보았다.
“……숙박을 하려면 이름이 필요합니다.”
주인이 말했다. 에르난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숙박객의 이름을 묻는 여관은 본 적 없다. 레이테를 구하러 가는 길에 들른 바르시나와 사크틸라의 여관은 모두 그랬다. 헤젤이라고 다를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주인은 부부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낌새를 느끼고, 유사시 그들의 정보라도 팔아넘길 생각일 것이다.
“에르나…….”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에르난데스.”
무심코 이름을 그대로 말할 뻔하던 에르난은 그것을 성으로 바꿔 말해 위기를 넘겼다.
“이름도 알려 주십시오.”
“……곤살로. 곤살로 에르난데스다.”
에르난은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사크틸라 사람입니까?”
“그래.”
“아내분께서는요?”
레이테라고 불렀다가는 큰일 난다. 에르난은 간간이 동명이인을 찾을 수 있는 이름이지만, 레이테는 그렇지도 않았다.
아내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에르난이 고민하는데, 레이테가 입을 열었다.
“이사벨.”
주인 뒤편의 벽에 예언자의 어머니인 성녀를 그린 성화가 붙어 있었다. 성녀의 이름은 이사벨이었다.
가짜 이름 두 개를 장부에 기록한 주인은 부부를 방으로 안내했다.
“아내가 답답한 곳을 싫어하니, 창이 넓은 방으로 주게.”
무슨 일이 생기면 창문을 통해서라도 도망칠 수 있어야 한다.
고맙게도 주인이 안내한 방에는 창밖으로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 나무를 타고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소화가 잘될 만한 것으로 적당히 가져오게. 그리고 말도 두 필 구해 오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주인이 방문을 닫고 나가자, 부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침대에 풀썩 쓰러졌다.
“하아…….”
식사를 가져다 달라고 했으나, 먹기도 전에 잠들 것 같았다.
“이사벨.”
에르난이 아내를 불렀다. 레이테는 풉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진지합니다, 이사벨.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안전한 곳으로 갈 때까지 당신은 이사벨이고 나는 곤살로입니다.”
“네. 알았어요, 곤살로.”
분명히 배우자를 부르는데 지금과는 다른 이름을 쓰니 재미있다.
피식피식 웃음 짓는 아내가 귀여웠다. 에르난은 후드 안으로 손을 넣어 아내의 머리를 받치고 키스했다.
입술을 통해 느껴지는 온기는 그러잖아도 나른한 몸을 완전히 풀어지게 했다. 그대로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똑똑 났다.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문이 열리고 주인이 들어왔다.
“그쪽 바닥에 내려놓게. 알아서 가져갈 테니.”
에르난이 말하자 주인은 그릇을 내려놓았다. 방을 나가려던 그의 눈이 레이테에게 고정되었다.
에르난은 눈을 찌푸리며 주인에게 어서 나가라고 손짓했다. 주인은 꾸벅 인사하고 방을 나갔다.
‘어디서 침대에 누운 남의 아내에게 시선을 줘?’
식사를 할 기운도 없다. 아내의 얼굴이나 감상하며, 일단 오늘 하루는 일찍 마감하는 편이 좋겠다.
에르난은 다시 아내에게 키스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에르난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에르난?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에르난이 안아 든 탓에 반쯤 벗겨진 후드 사이로, 아름다운 은빛 머리카락이 흘러나와 침대 위를 수놓고 있었다.?*#117*
동이 트자 어딘가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부부는 동시에 침
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벌써 일어났습니까?”
에르난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그를 바라보는 아내의 눈은 거의 풀려
있었다. 사실 아내를 바라보는 그의 눈도 다를 바 없었다.
“당신이야말로…….”
레이테가 하품했다. 에르난도 마찬가지였다. 부부는 나란히 옆으로 기대앉았다.
“해가 제대로 뜨기 전까지 조금이라도 더 자요.”
“어제 종일 말을 달렸는데 안 힘들어요? 더 자요.”
부부는 졸린 눈을 깜박거리면서 졸음을 참았다. 상대에게 더 자라고 말하지
만, 누구도 다시 눕지 않았다.
“……당신 설마 안 잤습니까?”
“그러는 당신은요?”
레이테의 머리카락을 들키고 말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부부는 불안에 사로잡
혔다.
몸의 피로는 풀어야 하니 자리에 누웠지만, 쉽게 잠들지 못했다. 침대가 삐거
덕거리거나 밖에서 바람 부는 소리만 들려도 잠이 깼다.
그래도 배우자는 쉬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레이테와 에르난 모두
그런 착각을 한 채로 밤을 새운 것이다.
하아. 두 사람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눈을 감으면 바로 잠들 수 있을 것 같지만, 긴장한 탓에 그렇지도 않다.
결국 그들은 잠을 포기하고 침대 밖으로 나왔다.
레이테는 드레스의 소매를 연결한 끈을 좌우에서 하나씩 빼서 둘을 매듭지어
연결했다. 그것으로 머리를 묶었지만, 끈이 가늘고 약해 영 안심할 수 없었다.
“차라리 빨리 이곳을 떠나는 편이 좋겠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에르난이 레이테에게 후드를 씌워주면서 머리를 건드렸더니
단숨에 머리카락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미치겠군.”
그리하여 레이테는 고개도 숙이지 못하고 뻣뻣한 자세로 아침 식사를 해야만
했다.
돌덩이처럼 딱딱하고 거친 빵은 우유에 푹 담가서 불려 먹어야 한다. 하지만
우유를 흘릴까 봐 레이테는 빵을 살짝만 적셔 바로 입 안에 넣었다.
턱이 아프고 목도 메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있는 식당이라 어쩔 수 없었다.
물론 방에서 식사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에르난은 여관 주인과 만나려 했
고, 남편과 떨어져 있는 쪽이 레이테로서는 더 불안했다.
“두툼한 겨울옷 몇 벌, 빵과 술, 지도를 구해 오게.”
에르난은 주인에게 보석 하나를 더 건네고 여행에 필요한 물건을 주문했다.
“아, 검도 한 자루 부탁하네.”
어제 썼던 커다란 검은 숲에 버리고 왔다. 지나치게 큰 전쟁터용 장비를 마을
에서 들고 다니면 이목을 끈다.
‘이렇게 말하면 되나? 문제없겠지?’
레이테를 처음 만나러 갈 때, 에르난과 동행했던 프란세스크는 이런 식으로
여관을 통해 여행 물품을 마련했다. 직접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꼬리가 밟히
면 곤란하다면서.
이상한 물건을 부탁하지는 않았으나, 어제 일로 예민해진 에르난으로서는 이
것마저 수상하게 보이지 않을까 불안했다.
‘프란세스크는 괜찮으려나.’
조금 쓸데없는 걱정 같기도 했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 무사할 사람이다.
하지만 요령 좋은 프란세스크야 그렇다 쳐도, 다른 사람은?
상황을 알 수 없으니 답답했다. 그렇다고 섣불리 누군가에게 물어볼 수도 없
었다. 의심받지 않아야 하니까.
“급하지 않다면 하루 더 머물렀다 가시면 어떻겠습니까? 다 장만하고 나면 밤
이 될 것 같습니다만.”
“완벽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빨리 준비 가능한 것만 적당히 마련해 주게.”
“알겠습니다.”
주인이 밖으로 나가자 에르난은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혹시 그가 누군
가를 불러오는 건 아닐까?
하지만 장거리 여행에 필요한 물자는 마련해야 하니, 일단 기다릴 수밖에 없
다. 에르난은 아내의 맞은편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부부는 아무 말도 없이 빵만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두
사람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후우, 숨 막혀요…….”
며칠이나 더 이런 식으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부부는 침대에 앉아 서로에게 몸을 기대고 꾸벅꾸벅 졸았다. 도무지 안심하고
누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 * *
여관 주인은 정오를 알리는 성당의 종소리가 울리고 나서야 돌아왔다. 그가
마련해 온 여행 물품은 적당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질 좋은 물건으
로 가득했다.
‘내 헤젤어가 이상해서 적당히 해 달라는 말을 못 알아들었을까? 아니면 그냥
적당함을 모르는 사람인가……?’
“점심 식사를 준비할 테니 드시고 가시지요.”
도망치는 중만 아니라면 후하게 지불한 대금에 따른 친절이라 생각할 수 있
다. 하지만 에르난은 주인이 다른 마음을 품은 것은 아닌지 자꾸 불안했다.
그냥 갈까 말까 망설이던 에르난은 결국 레이테와 함께 식당으로 갔다. 정상
적인 식사를 언제 또 할 수 있을지 모르니 먹어 두는 편이 낫다.
“세뇨르. 혹시 리스보아로 가십니까?”
주인이 식사를 가져다주며 물었다.
“……그렇네만.”
이 마을은 리스보아에서 가까우니, 그곳으로 간다고 하는 편이 자연스러울 것
이다.
“으음, 그쪽으로는 안 가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크게 난리가 났다고 합
니다.”
“무슨 일이기에?”
“브라간사 공작이 무력으로 왕궁을 점령했다고 합니다. 공작과 정적 관계인
귀족은 물론이고 국왕 폐하까지 감옥에 가뒀다던데, 어떻게 국왕 폐하에게 그
럴 수가…….”
에르난의 눈이 크게 떠졌다. 레이테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
었다.
‘왕을 감옥에? 그자가 제정신인가?’
“외국 사절단이 왕을 만났다고 들었는데, 그런 일이 일어나도 괜찮나?”
에르난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주인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으니, 이참
에 조금이라도 정보를 얻는 편이 낫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검을 사러 갔다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에게 들은 이
야기라서요. 그 녀석들은 용병이지 궁정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아닌지라……. 빨
리 준비해 달라고 하셨는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늦어졌습니다. 죄송합니다,
하하.”
용병. 불길한 단어였다.
레이테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에르난도 손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문이 열리고 검을 찬 남자 여럿이 들어왔다.
“아, 이제 오는군. 일은 잘 끝났나?”
주인은 그들을 반갑게 맞았다. 자리를 잡은 남자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도저히 못 찾겠어.”
“동쪽으로 가며 추격하라고는 하는데, 이러다가 국경을 넘는 건 아닐지 몰라.”
“이제 시작인데 너무 걱정 말게.”
“하지만 사크틸라 국경은 정말 금방 나타난다고. 지난 출병 때도 순식간에 갔어.”
에르난과 레이테는 조심히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 모두 얼굴이 굳어 있
었다. 새로 들어온 손님의 말이 심상치 않았다.
짐은 말에 모두 실어 두었다. 타고 출발만 하면 된다. 부부는 가슴을 졸이며
눈에 띄지 않게 조심히 발걸음을 옮겼다.
“일단은 배부터 채우지 그러나? 그건 그렇고, 리스보아 일을 궁금해하는 사크
틸라 분이 있으니 자네들이 설명 좀 해 주게. 에르난데스 씨, 아까 제가 만났
다는 친구들입니다. 직접 이야기를 들어 보시지요.”
주인의 말에 용병들의 시선이 일제히 부부를 향했다.
“……괜찮네. 갈 길이 머니 이만 가 봐야겠어.”
에르난은 그들을 상대하지 않고 레이테를 데리고 나가려 했다. 하지만 한 남
자가 에르난에게 물었다.
“사크틸라인이오? 그렇다면 혹시 오는 길에 은발 여자를 본 적 없소이까?”
“어?”
여관 주인의 시선이 레이테에게 향한 순간, 에르난은 그녀의 손을 꽉 잡고 밖
으로 뛰쳐나갔다.
“은발이라면 저쪽 부인이…….”
“뭐? 이보시오! 잠깐만!”
여관 주인의 어리둥절한 목소리, 용병들이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나며 의자 끌
리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뒤를 돌아볼 틈은 없었다. 아내가 말에 타는 것을 도운 에르난은 자신의 말에
올랐다.
레이테가 먼저 출발하자, 에르난은 근처에 있던 다른 말의 옆을 지나가며 발
로 찬 다음 그녀를 따랐다.
놀라서 날뛰는 말을 용병들이 진정시키는 사이, 부부는 전속력으로 말을 몰아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 * *
얼마나 말을 달렸을까? 석양이 질 무렵이 되어서야 부부는 쉴 수 있었다.
어제 숲을 빠져나올 때는 급한 마음에 말을 버려야 했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다. 말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 부부는 지도를 살펴보며 머리를 굴렸다.
어떤 식으로든 쫓아올 용병들에게서 벗어나는 데에 집중하다 보니, 부부는 자
신들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일단, 동쪽으로 난 길을 통해 사크틸라에 가는 건 위험해요.”
레이테가 말했다.
용병들은 동쪽, 사크틸라 방향으로 가라는 명을 받았다고 했다. 브라간사는
부부가 헤젤을 탈출하려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사크틸라로 가는 최단거리 경로인 만큼 감시도 삼엄할 테고.”
“실제로 우리를 발견했으니 더 할 겁니다.”
“조금 멀지만 차라리 남쪽으로 쭉 내려가 항구에서 배를 타는 건 어떨까요?”
지도 위에 레이테의 손가락이 그리는 길을 본 에르난은 잠시 말이 없었다. 동
쪽으로 가는 것에 비하면 많이 먼 길이다.
“여기, 파루 항은 사크틸라와 헤젤의 사이가 어지간히 악화하지 않는 한 사크
틸라인도 비교적 자주 오가는 곳이에요. 그러니 브라간사의 감시를 피해 배를
탈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봐요.”
“갈 길이 멀면 또 그만큼 위험도가 높아집니다. 하지만 딱히 다른 방안이 떠
오르질 않는군요. 당신 말대로 합시다. 일단은 쉴 곳을 찾아야 할 텐데. 오른
편으로 해가 지고 있으니 남쪽으로 내려온 것 같기는 합니다만…….”
에르난은 하늘을 보았다가 시선을 내려 주변을 살폈다.
눈에 바로 들어오는 것은 나무였다. 추격자를 따돌리고자 일부러 나무가 많은
곳을 택해 돌아다닌 탓이다.
에르난은 눈을 찡그리며 그 사이를 살폈고, 멀리 보이는 회색 물체를 발견했다.
“저쪽으로 가 봅시다. 뭔가 있군요.”
부부는 다시 말에 올라탔다.
* * *
에르난이 발견한 것은 버려진 수도원이었다. 수도원의 겉모습은 멀쩡했으나,
내부는 엉망진창이었다.
곳곳에 먼지가 수북했고, 가구의 대다수는 부서져 있었다. 특히 거대한 책장
이 무너져 온갖 기도서가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책을 챙기지 못한 걸 보면, 머물던 수도자들은 이곳을 급히 떠난 모양이었다.
부부는 잠을 잘 만한 곳을 찾아 수도자들의 방으로 가 보았다. 습기가 많은
곳인지 바닥 곳곳에 이끼가 끼어 있고 곰팡이가 핀 이불에서는 숨이 막힐 만
큼 케케묵은 냄새가 났다.
“……안 되겠네요. 그나마 소성당의 장의자가 멀쩡했으니, 거기서 자죠.”
소성당은 의자만 있는 휑한 곳이었다. 벽의 제단마저 장식이 거의 다 뜯겨 나
가 있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장식을 살펴보던 에르난은 수도회의 문장을 발
견하고 말했다.
“이 수도원은 카르멜로 수도회 소속이었나 봅니다. 레이테, 지도에 카르멜로
수도원이 있나 봐 주십시오.”
날이 제법 어두워졌다. 레이테는 종이에 코를 박다시피 하며 지도를 살펴보았다.
“잠시만요……. 아, 있어요!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달렸는데, 리스보
아 남동쪽으로 제법 내려왔네요.”
레이테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카르멜로회는 헤젤에서 세가 강하지도 않고 왕실과도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
라서 몇 년 전 내란 때 반군의 편을 들었어요. 결국 수도회 전체가 강제 추방
당해 지금은 사크틸라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지요.”
“엉망인 꼴을 보아하니, 이곳도 왕의 군대가 휩쓸고 지나간 모양입니다.”
“그랬겠지요. 군사들이 약탈도 제법 한 것 같고. 브라간사의 군사였으려나?”
“브라간사? 아, 반란 토벌에 공을 세우면서 공작의 힘이 강해졌다고 들은 기
억이 있는데 그게 이 일입니까?”
“그럴 거예요.”
부부는 잡담을 주고받으며 장의자 여러 개를 연결했다. 여분 망토를 그 위로
덮으니 그럭저럭 침대 비슷한 모양새가 났다.
“하룻밤 지내기에 딱 좋군요.”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얼른 식사를 합시다.”
에르난이 비스킷을 가져와 아내에게 건넸다. 여관에서 먹었던 것보다 더 퍽퍽
했지만 허기진 배는 그것마저 반가워했다.
식사를 마치자 밖은 완전히 깜깜해졌다. 어둠을 밝힐 만한 초는 없었고, 하늘
이 흐린 탓에 달빛도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난방도 없이 겨울밤을 보내기는 쉽지 않았다. 얇은 담요는 물론, 옷자락이 풍
성한 드레스까지 덮을 만한 것은 모조리 꺼내 덮어야 했다.
옷더미에 파묻히다시피 한 채로, 부부는 서로를 꼭 안고 억지로 눈을 감았다.
몸을 맞대야 체온을 유지할 수 있을뿐더러, 어둠 속에서도 서로의 존재를 느
끼며 그나마 안심할 수 있었다.
지난밤과 마찬가지로, 작은 소리만 나도 에르난은 몸을 뒤척였다.
레이테는 눈을 떴다. 물론 보이는 것은 없었다. 점점 자신이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 구분하기도 힘들어졌다.
레이테는 몸을 떨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추위와 공포 앞에서 약해지는
몸과 마음을 남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118*
남편의 모습이 어슴푸레하게나마 눈에 들어오자, 흐리멍덩하던 레이테의 의식
은 번뜩 깼다.
“하아…….”
레이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밤새 꼭 안고 함께 있었지만 마치 그가 사
라진 것은 아닐까 불안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긴장이 풀리고 나서야 임시로 만든 침대가 딱딱하고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었
다. 레이테는 몸을 일으켰다.
이불, 아니 옷더미 밖으로 나오니 오한이 들 만큼 추웠다.
레이테는 망토 하나를 집어 몸에 두르려 했다. 하지만 옷 아래 파묻힌 채로
잠든 에르난을 보고서는 망토를 도로 그에게 덮어 주었다.
편히 쉴 상황은 아니지만, 에르난은 무방비해 보일 만큼 잠에 푹 빠져 있었
다. 밤새 몸을 뒤척였으니 아마 새벽이 되어서야 쓰러지듯 잠들었을 것이다.
살짝 찡그린 표정은 잠자리가 편치 않음을 짐작하게 했다.
귀여우면서도 안쓰러운 모습이었다. 레이테는 남편을 안고 입을 맞추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아예 의자 밖으로 나와 버렸다.
‘겨우 잠들었을 텐데 깨우고 싶지는 않아.’
레이테는 의자 옆에 둔 짐을 뒤적거렸다. 물주머니를 꺼내 목을 축였다. 언제
물을 보충할 수 있을지 모르니 아껴 마셔야 했다.
물을 마신 다음에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대충 빗었다. 평소 같으면
시녀들이 긴 시간을 들여 고급 빗으로 다듬어주던 머리카락이다. 하지만 지금
은 시녀도 빗도 없었다.
어제 하루를 정신없이 보낸 만큼, 머리카락은 엉망진창이었다. 살살 빗으려
했지만, 적지 않은 머리카락이 손에 감겨 뽑혀 나왔다.
레이테는 손에 엉겨 붙은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또 들었던 머리카락은 흉한 모습으로 레이테의 손에 엉
켜 있었다.
레이테는 살면서 자신과 같은 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
다. 사크틸라에서 까마득하게 먼, 대륙 본토의 북쪽 왕국 출신이라는 그녀의
어머니가 은발이었다지만, 레이테는 그 모습을 초상화로만 봤을 뿐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의 레이테는 할머니 같은 머리 색이라며 불평했다고 한다. 가
발을 쓰고 싶다거나, 염색약을 구해 달라고 하는 등 시스로네스를 괴롭혔다는
모양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런 투정은 쏙 들어갔다.
또렷한 계기가 있었다기보다는, 자연스러운 깨달음으로 인한 것이었다.
다소곳하게 모은 손. 기계적이지만 고분고분하게 끄덕이는 고개. 그리고 길게
늘어뜨린 은색 머리카락.
자신이 해롭지 않은 존재임을 의식적으로 내보여야만 레이테의 삶이 조금이나
마 안전해졌다.
색소가 옅은 이 머리카락은 레이테를 무해한 아가씨처럼 보이게 했다. 더군다
나 어머니는 무척 온화한 사람이었다고 하니.
반듯한 직모인지라 차가운 느낌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 정도야 일부를 부
드럽게 땋거나 화사한 액세서리를 착용하면 충분히 가릴 수 있었다.
레이테가 자랄수록 숙부의 압박이 강해졌다. 무엇이든 좋으니 그로부터 자신
을 지켜야 했다.
‘그래서 한다는 게 머리카락 기르기였다니. 완전 말도 안 되는 얘기잖아.’
레이테는 작게 코웃음 쳤다. 옛날 일을 떠올리니 이제야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당시 레이테가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숙부는 조
카의 의욕을 가장 경계했으니까. 검만 잡아 보려 해도 손을 잘라 버릴 기세였
지 않나.
그런 상황에서 생존을 위한 소극적이지만 꾸준한 발악의 흔적이 이 은색 머리
카락이었다.
‘생존이라…….’
우스웠다. 살아 보겠다고 이용하던 이것이 지난 이틀 동안 부부를 위협했다.
‘상황이 이렇게 변하기도 하는구나.’
그 순간, 손에 있던 머리카락이 허공으로 뜨더니 그대로 흩어져 버렸다. 두툼
한 망토가 레이테에게 덮이며 펄럭였기 때문이었다.
“어라, 일어났나요?”
레이테는 뒤를 돌아보았다.
“품에 당신이 없으니까 잠이 확 깨더군요.”
에르난은 뒤에서 레이테를 껴안았다. 그는 얼굴을 살짝 비비적거렸다. 뺨에
닿는 머리카락의 감촉이 기분 좋았다.
아내의 은발은 밝은 햇빛을 받으면 반짝반짝 빛났다. 그렇지 않고 지금처럼
어두울 때는, 차분하고 우아한 인상을 주었다. 아울러 은근히 느껴지는 차가
움은 보는 이를 살짝 긴장시키기도 했다.
반면에 촉감은 부드럽기만 하다. 그 차이가 참 좋았다.
가만히 온기를 느끼던 레이테가 문득 말했다.
“에르난, 부탁이 있는데요.”
“말씀하십시오.”
“내 머리카락 좀 잘라 주세요.”
뭐? 에르난은 고개를 들었다.
“무슨 말입니까……?”
“왕궁에서 탈출할 때부터 계속 이 머리카락은 우리 안전을 위협했어요. 길고
눈에 띄는 이런 머리카락은 궁정에서 고고하게 살 때나 필요하지, 지금은 쓸
모가 없네요. 자꾸 후드 밖으로 빠져나와 곤란한 상황만 만들잖아요?”
부부가 잠을 청했던 장의자 한쪽에는 에르난의 검 두 자루가 놓여 있었다. 길
고 짧은 검이 각각 하나씩이었다. 레이테는 그중 단검을 집어 남편에게 건넸다.
“부인, 저기…….”
“이런 일까지 부탁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내가 직접 자르자니, 검을 제대로
다룰 자신이 없어서.”
에르난은 일단 검을 받아 들었다. 그는 멍한 얼굴로 아내를 바라보았다. 레이
테는 남편의 표정을 못 본 척, 의자에 앉아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겼다.
“잘 자를 필요는 없어요. 후드 안에 넣기 편하면 그만이니까. 얼른 끝내고 준
비해서 여기를 떠나도록 해요.”
에르난은 오랫동안 망설였다. 아내의 의지는 확고했고, 현실적으로 틀린 말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내의 아름다움을 이런 식으로 망쳐야 하는 현실이 끔찍했다. 이렇게
까지 해야 하는 원인은 다름 아닌 에르난 자신이었다.
‘애초에 내가 전투에서 져 포로가 되지 않았더라면…….’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온갖 말도 안 되는 상황은 없었을 텐데.
하지만 일은 이렇게 되었다. 에르난이 지금 해야 하는 일은 아내와 함께 안전
히 이 나라를 빠져나가는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날이 밝고 있었다. 레이테의 말대로 빨리 출발해야 했다.
에르난은 한 손에 검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아내의 머리카락을 쥐었다. 두
손 모두 심하게 떨렸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 에르난은 검을 머리카락에 가져다 대었다.
혹시라도 레이테에게 상처를 내지 않을까 주의하며, 에르난은 검을 천천히 움
직였다. 머리카락 한 뭉치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
자르고 나서야 보니, 반듯하지 않고 사선으로 잘렸다. 아무리 잘 자를 필요는
없다지만, 조금이라도 보기에 단정하게 자르고 싶었다.
에르난의 생각과 달리, 레이테의 머리카락은 잘려나갈수록 비뚤비뚤 엉망이
되어 갔다.
지독하게 허망했다. 레이테라는 여자에 대해 에르난이 가장 먼저 흥미를 가졌
던 부분이 바로 은색 머리카락이었다.
아내만의 그 독특한 상징을 자신의 실수 때문에, 자신의 손으로 잘라내고 말
았다. 그녀를 망가뜨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데도 아내는 아름다웠다.
볼품없는 모양이 되었다 해도, 아침 햇살을 받은 은색 머리카락은 반짝거렸
다. 등을 꼿꼿이 펴고 앉은 아내의 뒷모습은 그 자체로 우아했다.
짧게 잘린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난 하얀 목덜미가 에르난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단검을 내려놓고 목덜미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차가운 손끝에 온기가 느
껴졌다.
“다 됐나요? 고마워요.”
레이테가 말했다. 그 순간, 에르난은 아내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오열했다.
* * *
벨류 왕이 조카에게 구속된 지도 나흘이 지났다. 왕궁을 장악한 브라간사는
예전부터 자주 머물던 방을 집무실 비슷하게 이용했다.
헤젤 귀족들은 브라간사의 과감한 행동과 군사력에 기가 질려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은 세력을 모아 브라간사를 몰아내려 할 것이다.
그 대비의 일환으로, 브라간사는 적잖은 수의 귀족을 인질로 삼은 상태였다.
또한 주변국과의 협상을 위해서, 헤젤을 방문한 외국인을 인질로 잡아 둘 필
요도 있었다. 그중 가장 가치가 큰 인질은 사크틸라와 바르시나의 두 왕이어
야 했다.
“……이후로는 흔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일단 동쪽으로 향하는 길을 모두 뒤
지라고 명해 두었습니다.”
혼란 속에서 탈출한 부부왕은 꽤 영리하게 움직이는 듯했다. 다른 일행과 합
류했을 가능성도 지울 수 없다. 왕뿐만 아니라 적잖은 숫자의 사크틸라와 바
르시나 귀족 또한 왕성에서 도망쳤으므로.
“각하, 제 생각에는 남쪽 항구도 감시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두 왕은 각하
께서 동쪽을 살핀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목적지를 바꿨을 수도
있지요.”
“일리 있는 말이군. 그렇게 하도록.”
빨리 잡아야 할 텐데. 브라간사는 초조해졌다.
다른 귀족들의 동향 등에 대한 보고까지 마치고, 브라간사는 숨도 돌릴 겸 집
무실 밖으로 나왔다.
늘 개미떼처럼 사람으로 북적거리던 왕궁 복도는 썰렁했다. 내일이 성탄절이
거늘, 축제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하나같이 집구석에 숨어 덜덜 떨고 있겠지.’
그는 텅 빈 왕궁 모습이 싫지 않았다. 궁정인들은 브라간사가 지나가기만 해
도 수군거리며 소문을 만들기에 바빴다. 그 꼴을 보지 않아도 되니 속이 다
시원했다.
적당히 바람을 쐰 브라간사는 몸이 추워지는 것을 느끼고 집무실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곧 생각을 바꾼 그는 반대편 복도로 향했다.
그곳에는 벨류 왕의 처소가 있다. 처소 입구는 브라간사의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불편한 점은 없으십니까, 폐하?”
벨류는 브라간사의 인사를 무시했다. 브라간사도 딱히 답변을 기대하지 않았다.
“폐하께서는 내일 성탄절도 이곳에서 보내셔야겠습니다. 성당에도 다녀오지
못하게 된 걸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대신 내일은 사제를 보내도록 하지요.”
“필요 없다.”
“그러십니까?”
브라간사는 코웃음을 쳤다.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벨류는 입을 다물어 버렸고, 브라간사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브라간사는 대충 인사하고 밖으로 나왔다.
애초에 브라간사는 왕과 진지한 대화를 나눌 마음이 없었다. 다만 고고한 척
하는 벨류가 얼마나 무너져 내렸나 확인하러 왔을 뿐이었다.
바르시나의 왕은 두 달 동안의 포로 생활을 하면서 눈에 띄게 망가지지는 않
았다. 물론 조금 수척해진 모습은 보였으나, 아직 젊고 체력도 좋다 보니 거
기까지였다.
하지만 벨류 왕은 달랐다. 그는 며칠 사이 순식간에 늙어 버린 것 같았다.
‘겉모습이 변한 속도에 맞춰, 죽을 때도 빨리 오면 좋겠는데.’
하지만 당장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벨류가 지금 죽어 버린다면 그 뒷일은 브
라간사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벨류가 죽어도 브라간사가 왕이 될 수 없다. 귀족들은
족보를 뒤져 왕위라고는 알지도 못하던 누군가를 데려와 그 자리에 앉힐 것이
다. 계승법이 그랬다.
‘그 법을 바꿔야지.’
어렵지 않다. 귀족들이 법을 따르는 이유는 대단한 정의감이 있어서가 아니라
질서에 순응해야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해서라면 그 질서는 얼
마든지 바꾸고도 남을 사람들이다.
성탄절이 지나면 금방 새해가 온다. 그 일은 새해부터 본격적으로 할 것이다.
며칠 남지 않은 연말에 브라간사가 하려는 일은 따로 있었다. 결혼이었다.
1층으로 내려온 브라간사는 중정을 가로질러 그의 신부가 되어야 할 여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조카와의 결혼은 브라간사도 썩 내키지 않았다. 리리우 공주의 가치는 왕의
손녀라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 가치가 너무나 절대적이었다. 브라간사에게 간절히 필요한 정통성
을 조금이나마 더해 줄 수 있으니까.
아이만 낳게 하고 수도원으로 보내 버릴 생각이지만, 상대가 공주이므로 약간
의 겉치레를 차릴 필요는 있었다.
그 시작으로, 브라간사는 어제 청혼하는 편지를 써 공주에게 보냈다. 이제 그
답변을 들으러 갈 차례였다.
그런데 뜻밖의 목소리가 브라간사를 붙잡았다.
“로렌소!”
검은 옷을 입은 여성이 맞은편에서 성큼성큼 걸어왔다. 브라간사는 경악한 얼
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를 잃은 열세 살의 브라간사를 왕에게 의탁한 이후, 왕궁에는 단 한 번
도 오지 않았던 어머니, 테레자였다. 왕이 누나를 싫어한 탓이었다.
“어머니? 왕궁에는 무슨 일로…….”
브라간사는 일단 인사를 건네려 했다. 하지만 테레자는 인사를 받는 대신, 아
들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119*
찰싹!
브라간사의 고개가 옆으로 홱 돌아갔다. 테레자의 손은 매서웠다. 그녀는 귀
가 아플 만큼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아들에게 소리 질렀다.
“네놈이 미쳤구나! 반역이라니!”
반역. 지금껏 누구도 직접 입에 담지 않은 단어였다.
브라간사는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그러나 테레자의 외침은 거침없었다.
“이 나라를 파탄 내라고 내가 너를 왕궁으로 보낸 줄 알았느냐?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네가 아직도 현실을 모르는구나!”
브라간사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뭐라 말한들 어머니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애초에 그녀를 설득시킬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이런 소란은 곤란하다. 입을 다물고 엎드려 숨죽이는 이들이 기어 나
오면 안 된다.
더군다나, 가만히 듣고 있다가는 알리고 싶지 않은 이야기까지 밖으로 나올
기세였다. 어쩌면 테레자는 아들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어머니, 날이 추운데 밖에서 이러지 마시고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제 방이
가까우니 그곳에 가서…….”
브라간사는 테레자의 어깨를 가볍게 안았다. 아들을 향해 사나운 기세를 내뿜
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도 없게 깡마른 몸이 브라간사의 손에 잡혔다.
테레자는 아들의 손을 곧바로 뿌리쳤다.
“됐다. 널 보러 온 것이 아니야! 왕께서는 어디 계시느냐? 그분을 뵈어야겠다!”
“원하신다면 안내해 드리겠으나, 폐하께서 어머니를 만나실지는 모르겠습니다.”
브라간사가 나지막이 말했다.
테레자가 몸을 흠칫거렸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왕은 누나를 만나지 않을 것
이다.
남매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브라간사는 정확한 원인을 몰랐다. 아마 두 사람
모두 고집이 강하고 감정 표현을 거침없이 하는 성격이니 충돌이 잦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벨류는 지금 테레자의 아들에 의해 감금당한 처지다.
“그러면 리리우는 어디에 있지?”
“무슨 일로 찾으십니까?”
“애초에 리리우와 성탄절을 보내려고 온 것이야! 엔히크까지 세상을 떠나 버
리니 그 아이가 너무나 외로워하더구나.”
“공주를 만나 보셨습니까?”
브라간사의 영지는 리스보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고, 테레자는 그곳에서
지낸다.
“왕궁이야 이십 년 만이지만, 리스보아에는 종종 왔지. 리리우가 왕실 수도원
에서 지낼 때 몇 번 만났다.”
“연락을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오신 줄도 몰랐습니다.”
“너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 이렇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하고! 어
떻게 네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브라간사는 테레자의 말을 끊어 버렸다. 공개적인 곳에서 이런 대화는 그만하
고 싶었다.
날씨는 쌀쌀하고 분위기도 좋지 않아 중정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창문 안쪽이나 위층 난간 등에서 모자를 바라보는 눈들이 제법 있었다. 그들
에게 먹이를 던져주고 싶지 않았다.
리리우의 방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왕의 처소와 마찬가지로, 리리우가 머무
는 곳도 브라간사의 병사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브라간사는 직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의자에 앉아 있던 리리우가 브
라간사를 보고서는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다.
“리리우!”
뒤이어 들어온 테레자가 리리우에게 달려가 그녀를 껴안았다.
“미안하구나. 네가 결혼을 무서워해서 싫어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단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괜한 짓을 했어. 그동안 힘들었지? 괜찮아. 결혼 따위 하지
않아도 돼.”
브라간사와 리리우의 결혼을 처음 제안한 엔히크는 브라간사의 어머니에게도
연락해 허락을 받아냈다. 테레자는 무척이나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했다.
리리우가 싫어하는 줄도 모르고.
리리우는 테레자의 품에서 엉엉 울었다. 테레자도 눈물을 글썽거렸다. 조카손
녀를 토닥여 주던 그녀는 아들을 돌아보고 외쳤다.
“썩 꺼져! 이곳에 두 번 다시 들어올 생각 말거라! 결혼도 절대로 허락하지
않아! 이 아이에게 이상한 짓을 했다가는 내가 너를 죽일 것이야!”
매섭기 그지없는 폭언에 리리우도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빈말이 아니라는
듯, 아들을 노려보는 테레자의 눈빛은 살기등등했다.
“…….”
브라간사는 말없이 고개만 살짝 숙여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 * *
프란세스크는 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았다. 바닥에는 아직 바닷물이 남아 있었
기에 엉덩이가 축축해졌지만 별수 없었다. 다리가 아파 더는 서 있고 싶지 않
았다.
그가 지내는 리스보아 왕궁 지하의 감옥은 밀물 때 바닷물이 상당히 들어온
다. 무릎 정도까지 찬다던데, 실상은 더했다. 만조 때는 앉아 있을 수도 없을
정도였다. 프란세스크는 밀물과 썰물에 따라 앉았다 섰다를 반복해야만 했다.
‘조금 더 빠지면 누워서 잘 수 있겠군.’
바닷물의 수위에 따라서 프란세스크는 잠도 짧게 끊어 자야 했다. 귀에 물이
들어오는 느낌이 들면 벌떡 일어나는 식이었다.
‘그냥 지금 잘까? 피곤한데…….’
밤을 새우며 취조를 받았다. 도망친 바르시나와 사크틸라인의 행방에 대한 질
문을 받았지만 프란세스크는 할 말이 없었다. 그도 모르니까.
감방으로 돌아오니 이미 무릎까지 바닷물이 차 있었다. 일부러 잠을 못 자게
하려고 노리고 늦게 끝낸 것이 틀림없었다.
못 참겠다. 프란세스크는 바닥에 누우려 했다. 그때 덜그럭거리는 요란한 소
리와 함께 감방 문이 열리고 브라간사 공작이 들어왔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찰박거리는 물소리가 났다. 브라간사는 부츠에 튄
물을 보고 얼굴을 구겼다.
“우리 밤새 같이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벌써 또 무슨 일이신지? 사람을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잠은 좀 자게 해 주면 좋겠는데.”
프란세스크는 벽에 등을 기대고 빈정거림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예의 따위 차
릴 필요는 없었다.
간수가 들어와 작은 의자를 프란세스크의 앞에 놓고 나갔다. 브라간사는 그
의자에 앉았다.
“공께서 어떻게 지내나 그냥 궁금해져서 말이야.”
“많이 바쁘셔야 할 공작님이 한가하신 모양이네. 뭐, 이렇게 지내고 있지. 헤
젤인의 창의력에는 경의를 표해야겠어. 바르시나에는 이런 고약한 감옥은 없
어. 조수의 높이 차이가 심하지 않아서 그러겠지만.”
“세상 바다가 모조리 제 것인 척하는 바르시나에 이 정도도 없다고?”
브라간사는 입가를 비틀며 차게 웃었다.
‘즐거워할 줄 알았는데.’
표정을 보아하니 브라간사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또 무슨 짓을 하려나.
브라간사는 전쟁에서 승리했으면서도 마땅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배척당했다.
그렇게 쌓였던 분노가 터져 버린 지금, 브라간사는 과격한 행동을 서슴지 않
고 했다. 반역을 저질러 버린 상황에서 온갖 것에 신경을 곤두세우니 더 그랬다.
이를테면 자신을 미끼로 다른 이들을 탈출시킨 프란세스크를 향한 폭력이라든
가. 프란세스크는 어제 맞았던 배가 도로 아파 오는 것만 같았다.
사실 그것은 어느 정도 프란세스크가 유도한 면도 있었다. 고통을 참고 몸을
희생하면, 감정이 격해진 브라간사가 내뱉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보아하니 아직도 못 찾은 모양이네? 나 같으면 이제 슬슬 사크틸라 국경에
도착했을 텐데.”
반응은 금방 왔다. 브라간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귀족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그냥 둘 생각이다.”
“오호. 그러면 이제 내 취조도 끝인가? 잠자리 좀 사람이 지낼 만한 곳으로
바꿔 주면 좋겠는데 그럴 것 같지는 않군.”
“꿈도 꾸지 마라.”
“역시.”
기대도 안 했다. 프란세스크는 왕이 아니니까. 극진한 대접을 받을 이유가 없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탈출시켰다는 이유로, 브라간사는 프란세스크를 험하게
다뤘다. 물론 프란세스크는 이렇게 될 줄 알고 일부러 잡혔다.
‘무사히 돌아갔으려나…….’
모두가 탈출할 수 없다면, 포로가 되어도 잘 버틸 만한 사람이 남는 편이 낫
다. 프란세스크는 쫓아오는 병사들을 상대하며 다른 사람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 주었다.
마지막으로 보냈던 사람은 혼자서 무려 병사 열 명가량을 상대하려던 시스로
네스 추기경이었다. 프란세스크는 그가 자살하려는 줄 알았을 정도였다.
마차에 올라타던 추기경은 프란세스크에게 국왕 부부가 먼저 탈출했다는 사실
을 알려 주었다.
프란세스크는 여태껏 브라간사에게 두 왕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아 참, 두 분 폐하께서는 어찌 지내시나? 설마 아직도 두 분을 못 찾았나?”
“어차피 그들이 어디로 갈지는 뻔해. 지름길은 봉쇄해 버렸으니 남쪽 항구로
가서 배를 타려 할 테지. 귀한 손님이시니 직접 모시러 다녀올 생각이다. 돌
아오면 네놈부터 먼저 그분들을 뵙게 해 주지.”
“배려심도 깊으셔라. 꼭 그렇게 해 주게. 그런데 일단은 좀 자면 안 될까? 물
이 빠진 시간은 소중하거든.”
어느덧 바닥의 물이 다 빠져 있었다. 브라간사는 딱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조금이라도 자 두는 편이 좋겠지. 귀족들을 보내준다고 해서 네게 물
을 것이 없지는 않으니까.”
프란세스크는 왕의 최측근이다. 브라간사는 이 기회에 그를 통해 최대한 많은
정보를 쥐어짜려 할 것이다. 귀족들을 보내주는 건, 그에게 집중하겠다는 신
호이기도 했다.
“아, 그런데 말이야.”
뒤돌아 나가던 브라간사를 프란세스크가 멈춰 세웠다.
“괜찮겠나? 당신이 왕궁을 떠난 사이 누가 와서 빈집털이라도 하면 어떡해?”
왕을 직접 찾으러 가겠다니. 좋지 않은 징조였다. 부부가 위험에 처하거나 탈
출에 실패할 수도 있다.
프란세스크로서는 떠나는 브라간사를 붙잡을 수 없다. 하지만 그를 조금 흔들
어 두는 정도라면 어렵지 않았다.
“하긴. 여기 있으니까 눈치가 많이 보이지? 왕도 공주도 멀쩡히 살아있는데
억지로 왕궁의 주인 행세 하려니 피곤하긴 하겠네.”
허. 브라간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다시 프란세스크에게 다가온 그는 자신이
앉았던 의자를 손에 들었다.
‘망할 놈.’
프란세스크는 이를 악물고 눈을 감았다.
퍽! 의자가 머리에 내려쳐지자 프란세스크는 의식을 잃었다.
* * *
“드디어 왔군.”
에르난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눈앞에 바다가 펼쳐져 있다. 새해 첫날. 부부는 헤젤 남단의 항구에 도착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제대로 잠을 잔 날이 없을 정도로 조마조마한 나날을 보
냈다. 다행히도 별일은 없었다. 변장이 꽤 효과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신부님, 이제 배를 알아보겠습니다.”
에르난은 그의 옆에 선 검은 수도복 차림의 아내에게 말했다.
레이테가 입은 수도복은 일주일 전, 하룻밤을 보냈던 수도회의 옷이었다. 머
리를 자르고 짐을 챙겨 떠나려는데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레이테가 남자 옷을 입게 된 이유는 위장 효과 때문이었다.
성직자에게 시비를 거는 사람은 거의 없다. 후드를 벗지 않아도 누구도 의심
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묵언 수행 중이라는 핑계로 말을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러면 옷
을 입은 사람이 여자라는 사실도 감춰진다.
서품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사제인 척해서 작은 체구에 대한 의심도
지울 수 있었다.
에르난은 사제의 심부름꾼이 되었다.
“도시에 왔으니 오늘 밤은 좋은 곳에서 잡시다. 그동안 잠자리가 하나같이 험
악해서 많이 죄송했습니다.”
커다란 후드에 가려져 또렷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레이테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에르난은 당장 아내를 껴안고 입을 맞추고 싶어졌다. 하지만 이곳
은 사람이 바글거리는 길 한복판이다.
“숙소를 잡기 전에, 말부터 파는 편이 좋겠습니다. 아니,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배를 먼저 구한 다음 말을 파는 편이 좋을까요?”
레이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선착장으로 향했다. 크고 작은 배가 상당히 많이 있었다. 저것 중
하나쯤은 사크틸라로 갈 것이다.
사크틸라행 배를 어떻게 찾아야 할까? 에르난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동시
에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사크틸라어가 들리길 바라며.
“리스보아는 안 간다고요? 난감하네…….”
사크틸라어는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다만 그 억양이 사크틸라인 같지
는 않았다.
‘바르시나인인가?’
그렇다면 더 잘된 일이다. 에르난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향했다. 한 남자가
선원과 대화 중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리스보아에 가십니까?”
에르난은 사크틸라어로 말하며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는 서글서글하
게 웃으며 사크틸라어를 쓰던 남자를 바라보았다.
“예, 그렇습니다만……. 어?”
남자가 에르난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에르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에르난은 이 남자를 알았다. 미노리카 섬에 갔을 때 만났던 모험가 콜롬보였
다. 콜롬보도 에르난을 알아봤는지 놀란 얼굴을 했다.
도망쳐야 하나? 에르난은 망설였다. 이곳은 사람이 많아 자칫하면 괜한 이목
을 끌 수 있다. 결국 그는 환하게 웃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콜롬보 씨! 여기 계셨군요! 항구를 한참 뒤졌습니다!”
에르난은 콜롬보의 팔을 잡아끌었다.#120
재작년 가을, 헤젤과의 문제를 해결하러 에르난이 아내와 함께 미노리카 섬에 갔을 때였다.
미노리카는 대륙 본토와 이베로 반도의 교류의 거점이다. 그런 탓에 항구는 일 년 내내 활발했으며, 별별 이상한 사람을 다 볼 수 있었다.
엔히크를 떠나보내던 날 아침, 에르난을 찾아온 콜롬보는 그런 이상한 사람 중 하나였다.
“자금을 지원해 주신다면 서쪽 바다와 그 너머의 땅을 탐험하여 도와주신 것의 10배를 벌어 오겠습니다. 폐하께서는 황금빛 신세계의 주인이 되시는 겁니다!”
콜롬보는 에르난이 질릴 정도로 끈질기게 달라붙으며 자신에게 개척 비용을 대 달라고 했다.
에르난은 반도로 향하는 배에 그를 태워 쫓아내 버렸다. 서쪽 바다를 직접 보면 탐험을 하겠다는 허무맹랑한 소리가 쏙 들어갈 것이다.
이후 에르난은 콜롬보의 소식을 듣지 못했고, 그에게 관심도 없었다.
그랬는데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날 줄은 몰랐다.
“저, 저기……. 잠시만, 폐…….”
“조용히 따라와!”
콜롬보가 ‘폐하’라는 말을 하려 하자, 에르난이 그를 노려보았다.
“일단 다른 곳으로 가서 이야기하지.”
에르난은 한 손으로는 아내를, 다른 손으로는 콜롬보를 잡았다.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야만 했다.
하지만 사람이 지나치게 많았다. 레이테가 말을 끌고 오느라, 인파를 뚫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에르난은 어느 남자와 꽈당 부딪혔다.
“윽!”
“죄송합니다.”
에르난은 빠르게 사과하고 지나갔다. 남자가 에르난을 부르는 것 같았으나 에르난은 그것을 무시했다. 사소한 말다툼을 할 여유는 없었다.
한참을 걸은 끝에야, 에르난은 좁고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는 아내의 손을 놓은 다음 콜롬보를 벽에 몰아붙였다. 그러고는 단검을 꺼내 콜롬보의 목에 겨눴다.
“헉……!”
“소리 지르는 순간, 그리고 내 이름이나 칭호 같은 것을 말하는 순간 이 칼이 그대로 자네 목을 뚫어 버릴 거야. 알겠나?”
“예, 예! 예…… 알겠습니다, 폐…… 아니, 으……, 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찌르지 말아 주세요!”
당황한 콜롬보는 그의 모국어로 답하며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 서쪽 끝의 반도, 그곳에서도 가장 서쪽 나라에서는 들을 일이 없는 대륙 본토의 말이었다.
“그 말도 쓰면 안 돼. 사크틸라어로 답하게.”
“예, 폐…… 아니 시뇨레. 어, 이건 아닌데. 그러면 뭐지? 시뇨르……?”
“……세뇨르.”
어리둥절해 하며 상황을 지켜보던 레이테가 중얼거렸다.
“아, 감사합니다, 신부님. 세뇨르, 제발 살려 주세요…….”
콜롬보의 허둥지둥하는 모습에 에르난은 한숨을 푹 내쉬며 칼을 거뒀다.
“뭐죠?”
레이테는 무심코 물었다가 몸을 흠칫거렸다. 그녀는 남자 수도자의 옷을 입고 있었다. 목소리를 내면 곤란했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 목에 칼이 대어진 콜롬보는 레이테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는 에르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다시 한 번 말하는데, 절대로 내가 누구인지 말해서는 안 되네. 알겠나?”
“네, 물론입니다!”
콜롬보의 몸은 불쌍하게 보일 정도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에르난은 그를 일으켜 세웠다.
“이곳에 온 지 얼마나 되었나? 어디에서 머물고 있지?”
“여관이요…….”
“거기로 가는 편이 낫겠군. 안내하게.”
* * *
콜롬보가 머무는 방은 항구가 잘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었다. 에르난은 활짝 열린 창문을 닫았다. 아직 대낮이지만 방 안은 어두컴컴해졌다.
“밖에서의 일은 미안하네. 급한 마음에 어쩔 수 없었어.”
“아, 아닙니다. 폐하께서 어찌 제게 사과를……, 헉!”
“여기에는 우리 셋뿐이니 방금 전의 실수는 넘어가 주지.”
“감사합니다…….”
콜롬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날씨가 꽤 쌀쌀하지만, 그의 이마에는 땀이 맺혔다.
“신부님, 이 사람은 콜롬보라고 합니다. 미노리카에서 만났던…… 자칭 모험가입니다.”
에르난이 말했다. 모험가라는 말을 듣자, 레이테는 콜롬보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에르난뿐만 아니라 엔히크까지 귀찮게 했던 사람이라 했던가. 얼핏 기억이 났다.
레이테의 눈이 콜롬보와 마주쳤다. 방이 어두운 데다 레이테가 후드를 깊게 눌러썼기에, 콜롬보 쪽에서는 레이테의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콜롬보는 레이테가 누구인가 싶어 관찰했지만, 에르난은 아내를 소개하지 않았다. 레이테의 존재는 되도록 알려지지 않는 편이 좋다.
“리스보아로 가려 하던데, 무슨 일인가?”
에르난이 콜롬보에게 물었다.
“폐……, 아니 나리께서 넓은 아량으로 사크틸라의 배를 태워 주셨지요. 배는 사크틸라에서 멈췄습니다. 반도에는 처음 온 건데요, 제게는 반도가 바다만큼이나 미지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사크틸라를 꽤 오래 여행했지요. 두 분 폐하께서 행차하시는 모습도 본 적이 있습니다.”
“오호.”
“실컷 여행을 하다가 이제 헤젤에 가려고 사크틸라 남부로 내려왔는데 하필 전쟁이 터지더라고요.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 제가 머물던 성은 순식간에 헤젤군이 점령해 버렸습니다. 그러다가 어찌어찌 기회가 되어 헤젤군의 사령관을 만났는데, 서쪽 바다를 탐험하고 싶다는 제 말에 무척 관심이 많더군요.”
“사령관이라면……, 혹시 브라간사 공작?”
“예.”
의외였다. 감성이 메마른 것처럼 보이던 브라간사가 콜롬보의 몽상에 관심을 보이다니.
“제가 신세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기만 하면, 더는 사크틸라나 바르시나와 싸우며 동쪽으로 진출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아……, 과연.”
에르난은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테도 마찬가지였다.
부부가 생각하기에 콜롬보의 주장은 허무맹랑했다. 그러나 헤젤의 입장은 조금 다르다. 일이 잘만 풀리면 억지로 동쪽 진출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공작이 자네를 후원한다고 했나?”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전쟁으로 바쁘니까, 리스보아에서 만나자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헤젤에서 편히 지내라며 소개장도 써 줬습니다.”
“전쟁은 가을에 끝났는데, 왜 아직도 리스보아에 가지 않은 거지?”
“이곳도 처음이라 신기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공작의 소개장 덕택에 어딜 가도 꽤 대접을 받았거든요.”
“소개장? 혹시 지금도 그걸 갖고 있나? 보고 싶은데.”
“예, 잠시만요…….”
콜롬보는 침대 옆에 둔 자신의 짐꾸러미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레이테와 에르난은 말없이 서로의 눈빛을 교환했다. 두 사람의 눈은 모두 의욕적으로 빛났다.
브라간사의 소개장. 이것은 부부에게 좋은 방향으로 이용할 수 있는 물건이다. 브라간사와 인연이 있는 척하면 의심을 받지 않고 헤젤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있습니다.”
콜롬보가 에르난에게 종이를 건넸다. 소개장 끝에 적힌 브라간사의 서명은 진짜였다. 에르난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저기, 세뇨르…….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콜롬보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왕에게 함부로 질문하면 무척 무례한 행위가 된다. 하지만 그는 궁금증을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에르난은 어떤 설명도 하지 않고 자신이 궁금한 것만 말했으니까.
‘이 소개장을 이용하려면 콜롬보를 붙잡아둘 필요가 있어.’
또 에르난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콜롬보와 헤어지지 않는 편이 나았다.
“리스보아에서 터진 일을 모르나? 이곳까지 소문이 퍼지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예. 제가 헤젤어를 잘 못 해서요……. 어색하게나마 대화를 나눌 수는 있는데, 여기 사람들 말이 너무 빨라 알아듣기 어렵습니다.”
“그러면서 여태 잘도 여행했군.”
“그야 공작의 소개장을 써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사크틸라어를 잘하는 귀족 계층이었으니까요.”
콜롬보가 민망한 듯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브라간사 공작이 반란을 일으켰어. 왕을 감금하고 난리가 났지.”
“예? 어떻게 그럴 수가. 리스보아 왕궁에는 이미 다른 왕이 감금되어 있다던데요? 사크틸라의……, 아.”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콜롬보의 입이 떡 벌어졌다.
“폐하, 혹시 도망치셨…….”
“그렇게 부르지 말라 했을 텐데.”
“히익! 죄송합니다!”
콜롬보가 고개를 연신 숙이며 사과했다.
말실수가 끊이지 않는 이 사람을 믿어도 괜찮을까? 물론 믿음과 무관하게 콜롬보는 에르난을 알아본 그때부터 부부의 일에 휘말린 셈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콜롬보는 바르시나인도 사크틸라인도 아니었다. 에르난이 명령을 한다고 따라야 할 의무가 없다.
어떻게 할까. 에르난이 망설이는데, 레이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콜롬보 씨, 당신은 서쪽 항로 개척을 원한다지요?”
에르난은 깜짝 놀랐다. 콜롬보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수도복을 입은 레이테를 바라보았다.
“어라, 여자? 신부님이 아니십니까?”
“남편은 당신 제안이 내키지 않았나 본데, 브라간사가 흥미를 보였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나도 관심이 생기네요.”
“남편? 잠깐, 설마 여…….”
“거기까지.”
에르난이 끼어들었다. 콜롬보의 입에 여왕이라는 말이 올라오면 곤란했다. 레이테는 피식 웃음 짓고 말했다.
“딱 한 번만 이야기할게요. 콜롬보, 나는 사크틸라와 바르시나의 여왕입니다. 당신에게 제안을 하나 하고 싶은데요.”
“말씀하십시오, 폐……, 신부님……?”
콜롬보는 신부님이라 말하며 에르난을 슬쩍 쳐다봤다. 에르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당신과 함께 사크틸라로 갈 거예요.”
“예?”
“사크틸라로 돌아가면, 당신의 탐험을 지원하겠어요.”
“레이테?”
에르난이 저도 모르게 아내의 이름을 불렀다. 콜롬보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레이테를 바라보았다.
“좋은 성과를 확신할 수는 없지만, 해 볼 만한 도전 같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사크틸라로 갈 수 있게 당신이 도와줘야겠어요.”
* * *
부부는 콜롬보가 머무는 여관에 방을 하나 얻었다. 그들은 성직자와 하인 행세를 하고 있다. 따라서 여관 주인은 두 개의 방을 내어 주려 했다.
“방은 하나만 주십시오.”
에르난이 말하자 주인이 이상하다는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레이테를 수도사로 위장시킨 이후, 방을 얻을 때마다 비슷한 시선을 받아왔다. 성직자가 하인과 한방을 쓰는 게 흔한 일은 아니므로.
“……신부님께서 몸이 불편하셔서, 제가 계속 근처에서 돌봐드려야 합니다.”
에르난은 계속 이런 식으로 말했다. 그리하여 부부는 작은 1인용 침대가 두 개 있는 방을 안내받았다.
“……이거 참, 침대가 아니라 완전히 소파잖아.”
에르난이 투덜거렸다.
“계속 이런 침대에서 잤는걸요. 이제 와서 불만인가요?”
“일단 한숨 돌렸으니, 조금이라도 당신이 편히 지냈으면 싶은 생각이 들어서. 당신도 침대가 많이 불편했잖습니까?”
“그건 그래요…….”
레이테가 침대에 털썩 앉았다. 좁은 침대는 딱딱하기까지 했다. 에르난은 자신의 침대에 가지 않고 그녀의 옆에 앉았다.
“콜롬보가 나를 알아본 이상 그를 놓아줄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그를 붙잡겠다고 괜한 약속을 한 것 아닙니까? 물론 무작정 우리를 도우라 하면 안 했을 것 같지만.”
“흥미가 생기는 건 사실이에요. 사크틸라의 바다는 좁은걸요. 더 넓은 바다를 개척하면 좋죠.”
“동쪽 바다는 바르시나가 장악했으니까 서쪽을 가져야겠다?”
레이테는 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군주의 지배를 받는다 하여, 두 나라가 모든 것을 공유하지는 않는다. 바르시나의 바다에서 사크틸라인은 헤젤인과 다를 바 없는 이방인이다.
“욕심도 많으셔라. 사크틸라는 이미 넓은 땅을 가지지 않았습니까?”
“그렇기는 하죠. 하지만 당신을 따라 바르시나에 갔을 때 마주했던 바다. 섬. 그 역동적인 모습은 꽤 인상적이었답니다. 사크틸라도 그런 미래를 갖게 되면 좋겠네요.”
“나쁘지는 않습니다. 아니, 사실 꽤 좋은 일이지요.”
에르난은 아내의 어깨를 가볍게 안았다.
콜롬보의 모험심이 딱히 믿음직스럽지는 않지만, 레이테의 욕심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사크틸라로 돌아가면 많이 바빠지겠다.
‘돌아가면…….’
사크틸라와 바르시나 입장에서는 두 왕이 모두 행방불명된 상황이다. 난리가 났을 텐데,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을까?
“사크틸라나 바르시나로 편지라도 보낼 수 없을까요? 배를 구할 때까지 여기에서 얼마나 머물러야 할지 모르는데, 소식이라도 먼저 전하는 편이 낫지 않으려나.”
레이테도 에르난과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자칫하면 우리의 흔적이 발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긴 하네요……. 돌아간 이후에는 어떻게 될까요? 왕이 무사하니 다 괜찮다는 식으로 좋게 끝날 것 같지는 않아요. 솔직히.”
에르난은 한숨을 쉬었다. 아내의 말이 맞다. 돌아가면 에르난은 패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물론 왕이 처벌받을 일은 없다. 하지만 패배로 인해 잃은 것이 너무 많았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치러야 한다.
#121
당장의 탈출도 걱정이지만, 돌아간 다음의 일을 생각하니 레이테와 에르난의 마음은 무거워졌다. 결국 부부는 그날 밤도 불안함에 잠을 설쳤다.
“으…….”
풀리지 못한 피로 탓에 몸이 괴로운 아침이었다. 왕궁을 탈출한 이후 먹은 식사 중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것이 눈앞에 있었지만, 에르난은 입맛이 하나도 없었다. 아침 식사고 뭐고, 그냥 자고 싶다.
맞은편에 앉은 레이테도 넋이 나가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수도복을 입고 후드를 쓴 그녀는 아예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신부님!”
졸음에 취해 있던 부부를 깨운 이는 콜롬보였다. 그는 에르난의 옆에 앉아 부부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어젯밤에 두 분께서 쉬는 동안, 저는 여기저기 다니면서 이야기를 좀 들어 봤습니다.”
“헤젤어가 힘들다고 하지 않았나?”
“예, 힘듭니다. 하지만 현재 상황을 파악해야 도망치는 데에 유리하니까요.”
“쉿! 도망이라는 단어는 쓰지 말게.”
에르난이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그래도 두 분께서 궁금해하실 만한 것을 듣기는 했습니다. 사크틸라와 바르시나 귀족들은 대부분 헤젤을 탈출했다는 모양입니다. 심지어 노령의 추기경마저 무사히 돌아갔다는군요.”
“하아…….”
레이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특히 시스로네스가 봉변을 당하지 않은 듯해서 기뻤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대신 잡힌 사람이 있다더군요.”
“브라간사가 잔뜩 괴롭히겠군.”
“그런 모양입니다. 무서운 이야기들을 들었거든요. 밀물 때 이마까지 바닷물이 차오르는 지하감옥이라든가…….”
이마까지 물이 차오른다는 건 과장일 것이다. 사람이 살아남을 수 없으니. 정말이라면 그곳은 감옥이 아니라 사형장이다.
“오늘은 배를 본격적으로 알아보겠습니다. 어제 살피니, 동쪽으로 가는 상선이 좀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쯤은 우리를 태워 주지 않을까요?”
“그러길 바라야지.”
콜롬보는 순식간에 식사를 마쳤다. 깨작거리던 부부와는 완전히 반대였다.
“바로 항구로 나가 보려는데요, 두 분께서는 여기 계실 겁니까?”
에르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여관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들어왔다.
에르난은 무심코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금방 관심을 끊었다. 혹시 군인이 아닌가 싶었으나 그런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한 명은 여자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부부와 콜롬보가 앉은 곳에서 멀지 않은 자리를 잡았다.
“떠나기 위해서 적당히 모이? 먹이? 대기해.”
남자가 투박하다 못해 엉터리인 헤젤어로 말했다.
그것을 들은 에르난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남자의 어조가 꽤 높은 편이라 몇 배는 더 바보같이 들렸다.
“예? 무슨 말인지?”
종업원이 어리둥절해 하는 것은 당연했다.
“어, 그러니까…….”
“식사만 할게요.”
일행인 여자가 말했다. 남자보다는 훨씬 그럴듯한 헤젤어였다.
소리 나지 않게 웃던 에르난은 문득 무언가를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어쩐지 낯설지 않은 목소리였다.
“휴우, 감사합니다. 헤젤어 진짜 미치겠네…….”
“그냥 이런 건 제가 한다고 했잖아요.”
“어떻게 아가씨에게 그런 일을 시킵니까? 안 됩니다.”
남녀의 대화 소리는 무척 작았지만, 에르난에게는 그 내용이 또렷하게 들렸다. 실로 오랜만에 듣는 바르시나어였다.
“매번 헤젤어 때문에 어쩔 줄을 모르는 당신과 그걸 봐야 하는 나의 고통을 먼저 생각하면 안 되나요? 제발 좀…….”
가만히 들어 보니, 여자의 목소리는 에르난도 아주 잘 아는 사람의 것이었다. 아내의 시녀이자 친구의 동생, 카테리나였다.
“그, 그렇습니까……?”
그리고 민망해하는 남자는 세르지 피로시다.
에르난은 흥분을 억누르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도록.
레이테와 콜롬보가 무슨 일이냐는 눈으로 에르난을 올려다보았다. 에르난은 머리를 맞대고 속닥거리는 남녀에게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에르난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예? 나요? 나는 헤젤어를 잘 못……, 어?”
바르시나어와 헤젤어를 섞어 말하며 쩔쩔매던 세르지가 에르난을 알아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세상에, 정말로 폐…… 읍읍!”
카테리나가 황급히 세르지의 입을 틀어막았다. 놀란 눈으로 에르난을 바라보던 카테리나의 눈이 그의 뒤로 향했다.
검은 수도복을 입은 사람이 있었다. 커다란 후드를 머리에 써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카테리나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카테리나는 세르지를 붙잡은 손을 놓고 일어나 레이테에게 다가갔다.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으나, 레이테가 일부러 변장했다는 것은 확실했다. 카테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레이테는 말없이 그녀를 안았다.
* * *
에르난이 소파 같다고 투덜댔던 침대는 정말로 소파가 되었다. 한 침대에는 부부가, 다른 침대에는 카테리나와 세르지, 그리고 콜롬보가 앉았다.
“두 분 모두 무사하셨군요!”
카테리나가 감격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레이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입가에는 웃음이 걸려 있었다.
“두 사람을 여기서 만나다니.”
에르난이 말했다. 그도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바르시나와 사크틸라 사람들은 헤젤을 탈출했다고 들었는데, 카테리나 양은 어떻게 이곳에 온 겁니까? 그것도 세르지 경과 함께.”
신기한 조합이었다. 세르지가 카테리나를 졸졸 쫓아다니지 못해 안달이라는 것쯤은 알았다. 하지만 카테리나는 세르지를 싫어한다는 것 같았는데?
“으흠, 그것이…….”
세르지가 목청을 가다듬고 말했다.
“황금 양모 기사단의 일원으로서, 저는 저 자신의 안전보다 두 분 폐하의 안전을 위해 명예롭게 목숨을 바쳐야만 합니다. 마침 카테리나 아가씨도 같은 생각을 하셨기에, 저희는 사크틸라로 탈출하지 않고 두 분 폐하를 찾기로 했습니다.”
세르지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연설이라도 하는 듯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자기가 말하고도 부끄러운지, 눈동자를 한곳에 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옮기기에 바빴다.
레이테는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비웃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세르지의 태도는 과장된 아부와는 조금 달랐다. 왕보다는 카테리나를 더 의식하는 것 같았다.
‘카테리나에게 멋있어 보이고 싶은 걸까?’
“어……, 세르지 경의 말은 사실이에요. 폐하께서 무사하신지도 모르는데 저희만 탈출할 수 없었어요.”
카테리나가 말했다.
“결과적으로는 지금 우리를 만났지만, 위험한 선택을 했군요. 나와 레이테가 탈출했다면, 우리를 만나지 못하면 어쩌려 했습니까?”
“모르겠어요…….”
카테리나가 고개를 푹 숙였다. 급한 마음에 대책 없이 저지른 짓일 터다. 카테리나는 흥분하면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었다. 리리우에게 다짜고짜 대들었던 일도 그랬다.
세르지가 카테리나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어째 세르지답지 않은 듬직한 모습이었다.
레이테는 그 모습이 신기했다. 세르지가 정말로 왕을 염려하는 마음에 도망치지 않은 것인지는 모른다. 오히려 카테리나를 그냥 둘 수 없어서 남았다고 하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대단히 위험한 선택이다. 그럴 정도로 세르지는 카테리나를 좋아하는 걸까.
카테리나를 대신해, 세르지가 에르난에게 설명했다.
“영영 헤젤에 있을 수는 없으니 이만 돌아가자며 아가씨를 설득해 이곳으로 왔습니다. 사크틸라에 가는 배가 있다고 들었거든요. 그랬는데 어제 항구 근처에서 폐하를 보았습니다.”
“나를?”
“급히 어딘가에 가시는 듯했는데, 저와 부딪히셨습니다. 하지만 저를 알아보지 못하시더군요. 이후 저희는 두 분을 찾으러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습니다.”
콜롬보를 데리고 갈 때인 모양이었다. 그때 에르난이 부딪힌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고, 에르난은 그들을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우리도 사크틸라행 배를 찾아 이곳에 왔네.”
“그러십니까? 제가 두 분 폐하를 호위하겠습니다!”
세르지가 눈을 빛내며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조용히 해요!”
카테리나가 세르지의 팔뚝을 찰싹 때렸다. 세르지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츠렸고, 레이테는 다시 웃었다. 두 사람 사이가 꽤 친밀해진 것 같다.
“그래. 부탁하네. 어째 세르지 경에게는 계속 도움을 받게 되는군. 경의 충심에 감복했소.”
“국왕 폐하……!”
세르지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에르난은 늘 세르지를 전략적으로 대했다. 왕과 대륙주의자 귀족 세력의 연결고리로서 괜찮은 가치를 지녔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에르난은 세르지에게 관대했고, 지금처럼 듣기 좋은 소리도 해 줬다.
물론 지금 말이 아주 거짓은 아니다. 무사히 돌아가기만 한다면 우연이든 뭐든 세르지의 공은 굉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왕을 위하는 충심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아. 우리 사람들을 탈출시킨 의인이 누구인지 아는가? 다른 이들을 도망치게 한 대신 브라간사에게 붙잡혔다는데.”
에르난은 콜롬보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고 물었다. 세르지와 카테리나의 안색이 단숨에 어두워졌다.
“누구인지 아는 모양이군.”
“그게…….”
세르지가 머뭇거리는데, 카테리나가 별안간 울음을 터뜨렸다. 그 반응으로, 부부는 의인이 누구인지 곧바로 깨달았다.
“맙소사, 세스크…….”
에르난이 중얼거렸다. 충격에 굳은 왕의 표정을 본 카테리나의 울음이 주체할 수 없이 커졌다.
“흑, 어흑……, 오빠, 오빠 어떡해요. 죽으면 어떡해요……? 흐윽!”
레이테가 자리에서 일어나 카테리나에게 다가갔다. 레이테는 카테리나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리세우 공은 무사할 거예요. 나와 에르난이 꼭 그를 구할 거예요.”
수도복을 입은 사람이 여자라는 사실이 들통나지 않도록, 레이테는 되도록 말을 하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흐느끼는 카테리나를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카테리나 양, 세스크는 어지간한 상황에서도 무사히 버틸 만한 능력이 있는 친구입니다.”
에르난도 카테리나에게 다가가 그녀를 토닥이며 말했다.
“지금이야 나와 레이테도 도망자 신세지만 일단 사크틸라로 돌아가면 왕으로서 세스크의 송환을 정식으로 요구할 수 있습니다.
콜롬보, 항구에 가 배를 구해 보겠다고 했던가? 함께 가지. 세르지, 경은 여기에 남아 레이테를 지켜 주게. 카테리나 양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에르난은 콜롬보만 항구로 보내고, 그 자신은 아내의 곁에 있을 생각이었다. 레이테를 혼자 둘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일행이 늘어났으니 안심하고 다녀올 수 있다.
사실 세르지를 항구로 데려가기는 난감하기도 했다. 그의 헤젤어 실력은 전혀 도움이 안 되니까.
콜롬보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르난은 작은 탁자 위에 놓은 망토를 집어 걸쳤다.
“좋은 소식 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
에르난은 아내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고 콜롬보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 * *
“죄송해요, 폐하. 여태 잘 참았는데…….”
카테리나는 에르난과 콜롬보가 나가고도 한참을 더 흐느꼈다. 겨우 진정한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레이테에게 사과했다.
“가족이 그렇게 되었는데 어떻게 참아요.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기쁘기도 해요. 폐하께서 무사하시잖아요.”
카테리나가 힘겹게 웃어 보였다. 억지는 아니었다. 카테리나는 정말로 기뻤다.
“수도사로 위장하셨을 줄이야. 정말 좋은 방법이에요. 폐하께서는 너무 아름다우셔서 한 번 뵙고 나면 잊을 수 없는걸요. 특히 은발을 숨겨야 하니까.”
“아, 그건 말이죠…….”
잠시 머뭇거리던 레이테는 머리에 쓴 후드를 뒤로 젖혔다.
“헉……!”
세르지가 소리 질렀다. 카테리나도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경악한 얼굴로 레이테를 바라보았다.
여왕의 길고 우아했던 머리카락은 어깨에 닿지도 않을 만큼 짧아져 있었다. 그것도 누군가에 의해서 강제로 잘렸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레이테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카테리나, 당신 말대로 머리카락을 숨겨야 해서 이렇게 됐답니다.”
#122
항구 근처의 어느 술집에서, 에르난과 콜롬보는 오늘 막 도착한 상선의 선장을 만났다.
두 사람이 굳이 이 선장을 고른 이유는 그의 배에서 내리는 짐 때문이었다. 에르난은 처음 보는 기다란 몽둥이 같은 것이었는데, 콜롬보는 그것이 대륙에서 발명된 지 얼마 안 된 무기라고 했다.
즉 그 짐을 싣고 온 배는 대륙에서 왔다.
에르난은 대륙에서 들여온 물건으로 가득했던 브라간사의 저택을 잊지 않았다. 그 정도로 물건을 수집했다면 단순히 돈이 많은 것이 전부일 리가 없었다.
브라간사는 바르시나와 사크틸라의 바다를 멋대로 휘젓는 세력과 한통속일 것이다.
그 예상은 적중했다. 콜롬보가 브라간사의 소개장을 선장에게 보여 주자, 데면데면하던 그의 태도가 돌변했다.
“공작 각하의 지인이셨구려. 제가 도와드릴 일이 무엇인지?”
“그……, 사정이 생겨서 사크틸라에 다녀와야 하거든요. 혹시 사크틸라로 가는 배를 좀 탈 수 있을까, 소개해 주셨으면 합니다.”
콜롬보가 더듬더듬 말했다.
“사크틸라? 무슨 일로 가시오?”
“어, 그게…….”
“마님께서 친정에서 출산하기를 원하십니다. 주인님께서 마님을 워낙 아끼셔서…….”
말을 잇지 못하는 콜롬보를 대신해 에르난이 나섰다. 그는 콜롬보의 하인인 척했다.
“오호, 부인이 사크틸라인입니까?”
“예…….”
“으흠. 사정은 이해가 갑니다만, 잘 아시겠지만 그쪽으로 가는 배는 워낙 비밀리에 떠나는 것인지라 좀…….”
선장은 마땅치 않은 눈치였다.
“그, 그게. 아내가 워낙 예민한 사람이라서……. 이런 상황에서 얼마나 고향이 그립겠습니까? 저도 객지 생활을 오래 해서 압니다.”
“객지? 아, 어디 출신이시오? 헤젤도 사크틸라도 아닌 것 같은데.”
“대륙 본토에서 왔습니다. 선장의 배에 실었던 물건 중에서도 저희 가문에서 제작한 것이 있겠지요……, 아마도.”
콜롬보는 아무렇게나 둘러댔다. 선장은 신기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십니까? 헤젤까지 먼 길을 오셨구려!”
“예…….”
“다음 주에 출항 예정인 친구의 배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 사업 이야기 좀 해 주시오. 오누바에서 물건을 싣고 오기만 했지, 생산자를 만나는 건 처음이라서.”
두 사람을 지켜보는 에르난은 훈훈하다는 듯 웃음 지었다. 하지만 그의 속마음은 완전히 딴판이었다.
‘대놓고 오누바라고 말하는군.’
오누바는 헤젤의 침략에 맞서고자 바르시나와 사크틸라의 군대가 주둔했던 곳이었다. 그곳이 헤젤과의 밀수 거점이라는 사실은 포로가 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조금 더 빨리 출발하는 건 없을까요?”
“많이 급하신가 보구려. 그러면 내일 출발하는 정찰선은 어떠신지? 아시다시피 그렇게 편한 배는 아니지만…….”
“아, 그래도 좋지요. 감사합니다!”
알기는 무슨, 콜롬보도 에르난도 선장이 말하는 정찰선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래도 콜롬보는 선장에게 감사인사를 했다.
“일단 저는 돌아가서 아내에게 출발 소식을 알려야겠습니다. 제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아……. 그러면 내일 항구에서 봅시다. 소개해 주겠소.”
콜롬보는 어서 자리를 뜨고 싶었다. 하지도 않는 사업 이야기를 선장이 꺼내면 곤란했다.
선장은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콜롬보를 붙잡지는 않았다. 콜롬보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장의 술값 정도는 대신 내줘야겠다. 그는 돈을 꺼내려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저기, 주인님.”
하지만 들려오는 목소리에 콜롬보는 얼어붙고 말았다.
아무리 위장이라지만, 사크틸라와 바르시나의 왕이 그를 주인이라고 부른다. 눈앞이 아득해진 콜롬보는 식은땀을 흘렸다.
“내일 타고 갈 배를 한 번만 보고 가면 안 되겠습니까? 마님께서 요즘 워낙 예민하신지라……, 미리 보고 준비를 하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어……. 그렇지. 하하하.”
콜롬보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에르난의 기지 덕택에, 두 사람은 내일 탈 배를 미리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왜 선장이 편한 배가 아니라고 말했는지 곧바로 깨달았다.
“그 배 말일세. 어선 같았지?”
배를 둘러보고 여관으로 돌아가는 길에, 에르난이 말했다.
“예. 고기잡이 철이 아닐 때 돛을 더 달아서 항로 정찰용으로 쓰나 봅니다.”
“아무리 그동안 사크틸라가 제대로 감시를 못 했다지만, 그 바다를 어떻게 크고 느린 상선이 지나다니나 싶었지. 그랬는데 이런 식으로 정찰한 후에 다니던 것이었군.”
“배 크기에 비해 돛을 많이 달았으니 속도는 빠를 겁니다. 으음, 내 탐험선에도 응용해 봐야지…….”
“탐험선?”
에르난의 미간이 구겨졌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이 남자는 괴상한 탐험을 하겠다고 아내의 돈을 뜯어낼 예정이다.
“자네 소유의 배가 있나?”
“지금은 없지요. 하지만 여왕께서 지원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
지금은 콜롬보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 지원만큼은 없던 일로 하고 싶다. 에르난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 * *
에르난과 콜롬보가 여관으로 돌아오니, 굳은 얼굴의 세르지가 그들을 맞았다.
“무슨 일 있습니까?”
콜롬보가 물었다.
“그게……, 일단 방으로 들어가서…….”
세 사람은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서 그들을 기다리던 레이테와 카테리나의 얼굴도 밝지 않았다.
세르지가 말했다.
“식사를 가지러 갔다가 짐꾼들의 대화를 들었습니다. 공작이 오니까 여유 부리지 말고 가서 마저 일하자고요. 그런데 아무래도 그 공작이…….”
“브라간사 같다?”
“예. 정확히 언제 오는지는 모르겠지만 대화 맥락상 금방 올 것 같습니다.”
에르난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쉬었다.
“후우……, 미치겠군. 배는 일단 구했는데, 내일 출발이야. 차라리 다른 지역으로 피신해야 하나? 당장 오늘 밤도 안심할 수가 없으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기에서 벗어나리라 장담할 수는 없다. 방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콜롬보.”
시간이 한참 흐른 뒤, 레이테가 입을 열었다.
“항해할 줄 알지요?”
“그렇습니다만…….”
“좋아요. 내일 탈 배를 먼저 우리가 점령해 버리죠. 콜롬보, 당신이 배를 조종해서 사크틸라로 가요.”
“예? 저기, 폐하…….”
경악한 콜롬보는 폐하라는 말을 입에 담고 말았으나, 그를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른 이들도 깜짝 놀랐기 때문이었다.
콜롬보는 당장이라도 일어나서 도망치고 싶었다. 여왕의 말은 옳은 것 같으면서도 말이 안 되었다. 처음 타는 배를 능숙하게 몰 수 있을 리가 없다.
“괜찮은 방법이군요. 콜롬보, 그렇게 하게. 아까 배도 보고 왔잖은가. 큰 배가 아니니 어렵지는 않을 거야. 나와 세르지 경이 자네를 돕지. 바르시나 남자들은 어렸을 때 항해 경험을 꽤 많이 쌓거든.”
에르난이 말했다. 다른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동의했다.
“설마, 그 정도도 못 하면서 돈을 대 달라고 한 건 아니겠지? 자네가 사기꾼은 아니라고 믿어.”
“……알겠습니다.”
거절할 수가 없다. 콜롬보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실력을 알지 못하는 콜롬보에게 배를 맡기다니, 도박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애초에 탈출한다는 상황 자체가 도박이다. 에르난은 불안한 얼굴의 콜롬보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일단 저녁 식사를 한 다음, 떠날 채비를 합시다. 항구 감시는 새벽이 제일 약하니 그때 가면 되겠지요.”
“새벽이? 신기하네요.”
레이테가 말했다.
“일단 항구에 배를 댔으니, 대다수 선원은 뭍에서 밤을 보낼 겁니다. 남은 사람들은 밤새 경계를 설 텐데, 해가 뜨려 하면 그들의 긴장이 풀어지기 마련입니다. 경계가 다 끝났다고 생각하게 되거든요. 그래서 내가 당신을 그 시각에 만나러 갔었지요.”
“아, 그랬군요.”
“꼭 그게 아니더라도, 이래저래 떠날 채비를 하다 보면 밤이 샐 겁니다.”
에르난의 말대로였다. 당장 떠나려는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 콜롬보와 세르지는 상점 이곳저곳을 돌면서 조금씩 물건을 샀다. 빵과 술, 담요, 무기 등이 차곡차곡 쌓였다.
“이만하면 괜찮지 않나요? 배가 무사히 출발만 한다면야 사크틸라까지 아주 먼 길은 아니니, 더 준비해 봤자 짐일 것 같습니다.”
모아온 빵을 자루에 간신히 다 쑤셔 넣은 콜롬보가 말했다.
“당신 말이 맞군요. 그런데 이제 와서 궁금한 거지만, 배는 어떻게 구했나요?”
“아, 그것 말입니다. 그러잖아도 우리가 위장을 할 필요성이 있다는 말을 하려 했습니다.”
레이테의 물음에 대답한 사람은 에르난이었다. 그는 낮에 선장과 만났던 일을 설명했다.
어쩌다 보니 에르난이 콜롬보의 하인 노릇을 했다. 그리고 콜롬보는 아내의 출산 문제로 급히 사크틸라에 가려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다면 콜롬보에게 아내가 필요하겠네요.”
“맞습니다. 일단 부인께서는 계속 신부님을 하시고……, 카테리나 양이 그 역할을 좀 맡아야겠습니다.”
카테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세르지와 함께 일행이 사용할 담요를 개고 있었다.
“하나 빼서 드레스 안에 넣든지 해야겠네요. 그러면 대충 임산부처럼 보이려나?”
유쾌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였지만, 카테리나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장난이 아니라 탈출을 위한 변장이니 긴장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저는 아가씨……, 아니 부인의 하인을 하겠습니다.”
세르지가 말했다. 그는 콜롬보를 흘겨보며 입술을 삐죽였다. 졸지에 좋아하는 여자를 다른 남자에게 빼앗긴 처지가 되어 버려서인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본 레이테가 작게 웃었다.
* * *
만약을 대비한 위장 역할을 만들며 웃음이 조금 오가기는 했으나, 일행은 밤새 긴장된 시간을 보냈다.
카테리나는 국왕 부부에게 잠시라도 잠을 잘 것을 권했다. 부부는 일단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았다.
에르난은 침대에 누워 있기도 불안한지, 결국 일어나 아내의 옆에 앉았다. 그는 레이테가 누워서도 쓰고 있는 수도복의 후드 안으로 손을 넣어 아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내의 머리카락은 자신이 잘랐던 것보다 더 짧아져 있었다.
“카테리나가 정리해 줬어요.”
에르난의 손이 멈칫하자 레이테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부인, 더 주무시지요.”
“잠이 안 오는걸요.”
머리를 쓰다듬는 에르난의 부드러운 손길에, 레이테는 조금씩 나른함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결코 잠들지 못했다.
일행은 그런 식으로 시간이 어서 가기만을 기다렸다. 한참이 지난 후, 에르난이 아내를 쓰다듬던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 봅시다.”
카테리나가 스르륵 몸을 일으켰고, 벽에 기대어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던 세르지와 콜롬보가 눈을 번뜩 떴다. 에르난은 아내가 일어나는 것을 도와주었다.
일행은 소리를 내지 않도록 조심하며 여관 밖으로 나왔다. 어두운 하늘이 조금씩 밝아오고 있었다.
부슬비와 함께 바람마저 강하게 불었다.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것처럼 추웠다. 옷을 여러 겹 껴입었음에도 일행은 몸을 떨며 걸었다.
항구에 도착한 일행은 순간 당황했다. 생각보다 항구에는 사람이 많았다.
“이 시간에 도착한 배가 있는 모양입니다. 다들 저쪽만 신경 쓰고 있으니 조용히 가면 괜찮을 겁니다.”
일행을 진정시키고자 에르난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에르난은 문제의 배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상선이라기에는 크기가 작은 것이 어째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이미 돛을 접고 깃발을 내린 상태라 무슨 배인지는 구분할 수 없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이 보트를 타면 되겠습니다.”
콜롬보가 작은 보트를 찾아 왔다. 일행이 탄 보트는 커다란 상선 뒤에 숨어 이동했다. 남자들은 노를 힘껏 저으면서도 소리 하나 내지 못했다.
보트가 배에 닿자, 선원 한 명이 다가왔다.
“누구요? 이 시간에 무슨 일입니까?”
“연락 못 받으셨습니까? 오늘 사크틸라에 간다기에 이 배에 타기로 했는데요.”
에르난이 답했다.
#123
“아, 그건 알고 있는데 벌써 오십니까?”
선원은 의아한 눈길을 보내면서도 밧줄을 내려 일행이 배에 올라타도록 도왔다.
담요를 이용해 배를 부풀린 카테리나가 간신히 배에 올랐다. 그녀가 떨어지지 않게 아래를 받치던 세르지를 마지막으로 일행은 모두 배에 탔다.
“마님께서 일찍 일어나셔서요. 이 시간에 죄송합니다.”
에르난이 허허 웃으며 선원의 어깨에 팔을 걸었다. 선원이 마주 웃는 순간, 에르난은 팔을 당겨 그의 목을 졸랐다. 반대쪽 손으로는 선원의 입을 틀어막았다.
“으읍!”
“조용히 해!”
콜롬보가 검을 뽑아 선원의 목에 겨눴다.
“배에는 몇 명이나 타고 있지?”
에르난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선원은 덜덜 떨며 손을 들어 먼 곳을 가리켰다.
반대편 갑판에 선원 한 명이 보였다. 그는 구석에 앉아서 졸고 있었다. 검과 활이 선원의 옆에 놓여 있었다.
에르난은 선실 쪽으로 고갯짓하며 붙잡은 선원을 세르지에게 넘겼다. 세르지는 근처의 선실 문을 열고 선원을 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세르지를 따라 들어온 카테리나가 품에서 긴 천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세르지는 그것으로 선원의 입을 막았다.
“후우…….”
“잘했어요.”
카테리나가 세르지의 어깨를 토닥였다.
“에르……, 곤살로가 이곳에 있으라 하는군요. 두 사람도.”
레이테가 선실로 들어오며 말했다. 낯선 이름에 세르지가 어리둥절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곤살로? 윽!”
세르지를 토닥거리던 카테리나가 이번에는 팔꿈치로 그를 세게 쳤다. 눈치껏 가만히 있으라는 신호였다.
끙끙 신음하는 세르지는 정말로 아파 보였다. 하지만 그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검을 뽑아 선원에게 겨눴다.
“가만히 있어.”
칼날이 다가오자 선원은 몸을 떨면서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에르난과 콜롬보가 나타났다. 그들은 다른 선원을 동료의 옆에 앉혔다.
“이제 출발합시다.”
“이 선원들도 데리고 가나요?”
“아닙니다. 적당히 항구 밖으로 나가면 보트를 내려서 보내줄 겁니다. 지금 보내면 다른 사람을 불러올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얌전히만 있으면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다.”
에르난의 마지막 말은 선원들을 향한 것이었다.
선원들의 감시는 세르지가 맡았고, 에르난과 콜롬보는 배를 움직일 준비를 했다. 닻줄을 푸는 것까지는 어떻게든 몰래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돛을 펼치면 다른 이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없다.
“바람 방향이 좋으니, 금방 속도를 낼 수 있을 겁니다. 이 배는 작으니까 항구를 빠져나갈 때까지만 버티면 어떻게 도망칠 만할 것 같고요.”
콜롬보가 말했다. 온몸에 힘을 주고 키를 천천히 돌리는 그의 모습은 제법 그럴듯해 보였다.
“그런데요, 폐하. 이거 사실상 해적질 아닙니까?”
재회할 때만 해도 에르난에게 살려 달라고 싹싹 빌던 콜롬보는 이제 그에게 농담을 건넸다. 에르난이 그만큼 친밀하게 느껴지기 때문은 아니고, 긴장을 덜기 위해서였다. 콜롬보의 얼굴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그렇긴 하지. 후우……, 헤젤에 와서 별짓을 다 하는군.”
에르난은 한숨을 쉬었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 * *
브라간사가 탄 배는 리스보아를 떠난 지 며칠 만에 헤젤 남쪽의 파루 항에 도착했다. 애초에 먼 길도 아니었지만, 바람이 잘 도와주어 예상보다 빨리 올 수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각하.”
도시의 귀족들은 물론이고, 항구에서 머물던 큰 선박의 선장들도 모조리 나와 공작을 맞았다. 그들 모두 잠도 못 자고 브라간사를 기다리느라 얼굴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간단한 일만 보고 바로 리스보아로 돌아갈 것이다.”
“예, 그러시겠다는 연락은 받았지요. 원하시는 물건은 다 준비해 두었습니다.”
밤새 시달린 일꾼들은 이제 브라간사가 타고 온 배로 짐을 옮기고 있었다. 대륙에서 구입한 물건들로,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 개발된 무기의 견본이었다. 파루까지 온 김에 직접 받아가기로 한 것이다.
마중 나온 사람들이 한 명씩 자신을 소개했다. 브라간사는 심드렁하게 그것을 들었다.
이러는 시간도 아까웠다. 어서 항구를 뒤져서 에르난과 레이테를 찾아내고 싶었다.
“괜찮겠나? 당신이 왕궁을 떠난 사이 누가 와서 빈집털이라도 하면 어떡해?”
프란세스크에게 들었던 말이 자꾸 신경 쓰였다.
비참한 꼴로 감옥에 갇힌 주제에 입만 살아 있는 자의 말을 마음에 깊이 담아두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지적은 옳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다들 놀라 몸을 웅크렸지만, 그것은 오래 가지 못한다. 왕실의 위엄을 되찾겠다는 식의 핑계와 함께 브라간사를 향한 역공은 머지않아 시작될 것이다.
그 전에 불안요소를 하나라도 줄여 둬야만 한다. 가치가 높은 포로를 확보하고 전투 준비도 필요하다.
“……각하의 대륙인 지인도 잘 대접하겠습니다.”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던 브라간사는 고개를 들고 상대를 바라보았다. 대륙의 물건을 꾸준히 취급한다는 선박의 선장이었다.
“방금 뭐라고 했나? 대륙인?”
“예, 각하. 크리스토포로 콜롬보라는 사람입니다. 아는 분…… 맞으십니까?”
선장은 불안해하는 눈치로 물었다. 브라간사가 놀라는 모습을 보며, 혹시 자신이 콜롬보에게 속은 것은 아닌가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아, 알고 있네. 그 사람이 여기 있었군.”
브라간사가 말하자 그는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마침 잘 되었군. 그와 함께 리스보아로 가야겠어. 그가 어디에 머무는지 아는가?”
“리스보아요? 그건 무리일 듯합니다. 사크틸라인 아내의 출산이 가까워졌는데, 고향에 가기를 원한다더군요.”
브라간사는 피식 웃었다. 반도 이곳저곳을 휘저으며 여행을 다니겠다던 콜롬보는 그새 여자를 만나 결혼까지 한 모양이다.
“어쩔 수 없군. 그래도 만나 보기는 해야겠네.”
“예. 지금 바로 데려오겠습니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서 지내니까 금방 올 겁니다.”
선장은 자기 휘하의 선원들을 불러 콜롬보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아직 이른 새벽이므로 콜롬보는 자고 있을 것이다. 자는 사람을 일부러 깨워 나오게 하는 것은 꽤 무례한 일이지만 브라간사는 모른 척했다.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인사를 마치고, 브라간사는 리스보아에서부터 그를 따라온 병사들에게 시내 수색을 명했다. 그는 콜롬보를 만났다가 수색에 합류할 생각이었다.
콜롬보를 기다리는 동안, 브라간사는 주로 선장들과 대화를 나눴다.
“바르시나야 원래 그렇다 쳐도, 사크틸라 쪽 감시가 점점 심해져서 바다를 건너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부득이하게 가격을 올릴 수밖에 없었으니 양해해 주시지요.”
“그 문제라면 곧 해결될 것이오.”
부부왕을 붙잡으면 말이다. 물론 그들을 영영 헤젤에 잡아둘 마음은 없었다.
시스로네스가 자신에게 거래를 제안한 것만 보아도, 사크틸라와 바르시나가 배상금에 상당한 부담을 느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브라간사는 배상금을 대폭 깎아 주는 대신, 헤젤의 배가 자유로이 사크틸라의 남쪽 바다를 다니게 할 생각이었다.
두 나라 입장에서는 절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조건이겠으나 왕이 포로로 잡혀 있으니 결국은 수용할 수밖에 없다.
‘잘되어야 할 텐데.’
브라간사는 따뜻하게 데운 포도주를 마셨다. 날이 많이 추웠다.
상인들은 추위도 피할 겸, 브라간사를 거래소로 안내하려 했지만 브라간사는 굳이 밖에 서 있었다. 괜히 그들을 따라가면 시간을 버릴 것 같아서였다.
이런 날씨에 해가 아직 다 뜨지도 않은 시각이거늘, 벌써 돛을 내리고 출항하려는 배가 보였다.
‘부지런하기도 하군.’
콜롬보를 데리러 간 선원들도 저 배의 선원만큼 부지런했으면 좋겠다. 금방 온다던 사람들이 어째 늦어지고 있었다. 브라간사는 슬슬 짜증이 났다.
“저기……, 각하.”
마침 선원들이 나타났다. 그런데 콜롬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콜롬보 씨와 그 일행은 새벽에 일찍 나간 모양입니다. 여관 주인이 그들을 깨우러 갔는데 방이 비었다더군요.”
“그래? 많이 급한 모양이군. 송구합니다, 각하.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지요. 그들은 제가 구해 준 배를 탑니다. 데려오도록 하겠습니다.”
선장이 브라간사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브라간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배에 탔다면 차라리 내가 그쪽으로 가는 게 빠르겠군. 안내하게.”
“예……!”
선장이 앞장서고 브라간사는 그를 따라 걸었다. 그때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 나와 그들의 앞을 지나쳤다.
“누구야!”
“뭐야! 무슨 짓이냐!”
그들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공작이 있는데 무슨 짓이냐며 눈살을 찌푸리던 선장은 그들을 확인하더니 얼굴을 굳히고 물었다.
“무, 무슨 일이지?”
“누가 내 배를 훔쳤어!”
한 남자가 외쳤다. 선장의 친구인 그는 콜롬보가 탈 배의 선장이기도 했다. 그 배의 선장과 선원이 뛰쳐나온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브라간사가 고개를 홱 돌려 바다를 바라보았다. 아까 보았던 배는 돛을 다 펼친 참이었다.
갑판 위에서 두 사람이 항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막 해가 밝아오고 있어 그들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콜롬보 씨! 무슨 짓이오!”
브라간사의 옆에 있던 선장이 외쳤다. 그의 목소리가 배까지 닿을 리는 없다. 그저 다급한 마음에 외친 것일 뿐이다.
“배에 누가 탔는지 보이나?”
“잘 안 보이지만 저쪽 사람은 콜롬보와 체구가 비슷해 보입니다. 그 옆에 키가 더 큰 사람은 콜롬보의 하인일 테고요.”
“하인?”
그때 다른 인영이 나타나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가늘고 작은 체구였다. 새로 나타난 사람은 둘과 대화를 나누다가 브라간사 쪽을 힐끗 돌아보았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잠시 반짝거렸다.
“빌어먹을!”
브라간사가 버럭 외쳤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저 배를 쫓아가!”
브라간사는 막 출발하려던 보트에 뛰어들었다. 보트는 크게 흔들렸으나 떨어진 사람은 없었다.
“당장 출발해! 어서!”
브라간사는 노를 쥔 선원에게 윽박질렀다. 선원들이 놀라 힘껏 노를 저으며 빼앗긴 배를 향해 다가갔다. 브라간사는 뭍에서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 부하들에게 다시 외쳤다.
“내 배로 저걸 쫓으란 말이야!”
“아……, 예!”
그때서야 다른 사람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브라간사가 탄 보트는 죽을힘을 다해 노를 젓는 선원들 덕택에 그럭저럭 빠른 속도로 문제의 배에 가까이 다가갔다.
휘잉!
무언가가 보트를 향해 날아왔다. 선원 한 명이 소리를 지르며 쓰러졌다. 그의 몸에는 화살이 꽂혀 있었다.
브라간사는 얼굴을 높이 들어 배의 갑판을 바라보았다. 활을 든 남자가 보였다. 해도 거의 다 떴고 가까이 다가간 탓에 브라간사는 남자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에르난!”
“아예 안 마주치면 서로 마음고생 덜 하고 좋았을 텐데. 하지만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걸? 그간의 고생에 대한 작은 보답이랄까. 속이 꽤 후련해졌어.”
에르난은 유쾌하게 말하고 다시 활을 쐈다. 브라간사와 선원들은 보트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화살은 몇 번이나 그들을 향해 날아왔다.
“다시 보는 일 없길 바라네!”
에르난이 외쳤다. 브라간사가 몸을 들어 보니, 보트는 배와 조금 멀어져 있었다.
“위험하니 들어가시지요, 부인.”
에르난은 옆에 선 사람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브라간사가 보았던, 햇빛을 받아 빛났던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이었다.
어째서인지 그 머리가 짧아져 있지만, 틀림없는 사크틸라의 여왕이었다.
“쫓아가! 어서 쫓으란 말이야!”
브라간사는 목이 터져라 외쳤으나, 배와 보트의 거리는 점점 멀어졌다. 바람이 배에 유리하게 불고 있었다.
보트로는 쫓을 수 없다. 브라간사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타고 왔던 배는 출발 준비에 정신이 없었다. 선원들이 잔뜩 매달려 돛을 펼치고 있었다.
‘늦어!’
같은 바람을 받으면 부부왕이 탄 배가 훨씬 속도가 빠를 터였다. 그들의 배가 더 작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이미 거리가 벌어져 있으니, 그들을 따라잡기는 힘들어 보였다.
브라간사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해가 뜨는 곳을 향해 멀어져 가는 배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