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4장 : 빼앗은 자들의 감옥
#098
헤젤의 왕도 리스보아는 항구 도시였다. 왕궁도 바닷가에 있었다. 에르난의 처소는 그 궁내에서도 꽤 높은 곳이었다.
넓고 깨끗한 방에는 커다란 창을 통해 빛이 환하게 들어왔다. 바깥의 바다도 무척이나 잘 보였다.
‘손님 대접에 꽤 신경을 썼군.’
방을 둘러본 에르난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이 방에 들어오기 전, 에르난은 왕실 집사에게 왕궁 곳곳을 안내받았다.
“자유로이 이곳 생활을 즐겨 주십시오. 폐하의 안전을 책임질 호위만 동행하시면 됩니다.”
집사는 참으로 선심이 넘쳐나는 말을 남겼다. 그가 말한 호위는 지금 방문 앞을 지키고 있다. 에르난이 절대로 혼자서는 나갈 수 없도록.
호위병, 아니 감시병은 에르난과 눈이 마주치자 묵례를 보냈다.
예의 바르기도 하지. 에르난은 문 맞은편에 난 창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시원하게 펼쳐진 바다는 개운하기보다는 오싹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저 너머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밝고 넓은, 긍정적인 기운으로 가득한 이곳은 악질적으로 훌륭한 감방이었다. 모든 것이 개방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폐하, 따라오십시오.”
방문이 열리고 시종이 들어왔다. 에르난은 잠자코 그의 뒤를 따랐다. 시종이 안내한 곳은 목욕실이었다.
욕조에 가득한 물은 기분 좋게 따뜻하고 향도 좋았다. 에르난을 씻기고 옷을 입혀 주는 시종들은 정중했다.
하지만 이런 환대는 선의에 따른 행동은 아닐 것이다.
에르난은 헤젤의 왕을 만나기로 되어 있다. 시내에서 펼쳐지는 개선 행진에 왕이 참석할 동안, 왕의 전리품은 깔끔하게 다듬어지는 것이다.
‘개선 행진에 나를 참석시킬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은 의외야.’
패전국의 왕을 보란 듯이 행진에 참여시켜 모욕을 주며 즐거워할 줄 알았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하지만, 현 처지에서 피할 수 없는 일이라 여겼다.
하지만 헤젤은 에르난에게 수치를 안기지 않았다. 대신에 처소를 안내하고 몸을 씻겼다.
끔찍한 사태 하나를 피한 것은 다행이다. 하지만 선명하게 드러나는 적의보다, 꽁꽁 숨겨져 진의를 파악하기 힘든 적의가 더 무서운 법이다.
* * *
헤젤의 왕 벨류는 이미 세상을 떠난 에르난과 레이테의 부모보다 더 일찍 태어난 사람이었다. 에르난이 알기로는 거의 십 년 정도 차이가 난다.
주름진 얼굴과 숱이 많이 빠진 하얀 머리카락. 다소 야윈 몸은 등이 살짝 굽어 있기까지 하다.
많이 늙어 버린, 볼품없는 생김새라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판단하기를 거절하는 듯 그의 눈은 날카롭게 빛났다.
“돈 에르난. 당신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반갑소.”
벨류는 왕좌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몸이 불편해서 그럴 것이라는 식의 위안은 부질없었다. 벨류는 자신의 위치를 잘 알기에 그대로 앉아 있을 뿐이다. 그는 승자, 에르난은 포로였다.
“저 역시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도 악수조차 하지 않다니. 에르난은 이를 살짝 악물었다.
노쇠한 얼굴이 미소 지었다. 젊었을 때에는 꽤 냉혹한 기운을 풍겼을 것 같은 웃음이었다. 아들 엔히크보다는 조카 브라간사를 연상시킨다.
“로렌소가 그대를 잘 챙겨주었나 모르겠소.”
처음 듣는 이름이지만, 맥락상 브라간사를 가리키는 듯했다. 접견 자리에서 조카를 작위 대신 이름으로 부르다니 의외였다.
‘그럴 정도로 친해 보이지는 않는데.’
에르난은 자신을 향하던 아버지의 연민 어린 시선을 기억했다. 비록 에르난은 부담스러워했지만, 어쨌거나 왕은 아들에게 애정을 보였다.
벨류와 브라간사 사이에는 그런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부자 관계가 아니라서? 하지만 에르난은 엔히크보다 브라간사가 벨류를 더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엔히크는 소심했지 냉정하지는 않았으므로.
벨류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브라간사는 유난히 사치스러운 옷을 입고 있었다. 개선 행진 때 입은 것인 모양이다. 행진 때에는 즐거워했을지도 모를 얼굴이 지금은 다소 부자연스럽게 굳어 있었다.
“공작 덕택에 편히 올 수 있었습니다. 한 가지를 제외하고요.”
“호오, 그게 무엇인지?”
“사크틸라를 떠난 지 열흘이 지났습니다만, 아직 본국에 어떤 연락도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무사하다는 사실은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에르난은 그동안 가장 답답했던 것을 바로 꺼냈다.
“그 일은 지금부터 할 것입니다. 정식으로 사절을 파견해야지요.”
벨류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브라간사가 끼어들었다.
“당연히 그래야지. 하지만 간단한 소식조차 전하지 못했다니 너무 매정하지 않으냐?”
“……송구합니다.”
브라간사는 딱딱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를 바라보는 벨류의 눈도 차게 가라앉아서, 조카를 대한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두 사람은 사이가 좋지 않다. 에르난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아니, 어느 정도는 이미 예상할 만한 관계이기는 했다. 브라간사가 협상 준비 작업을 완전히 망치고 귀환하자 벨류가 무척이나 화를 냈다고 하니까. 그리고 엔히크의 죽음에도 브라간사의 관리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브라간사는 군공이 뛰어나 헤젤에서의 영향력도 제법 크다는 것 같았는데. 꼭 그렇게 볼 수만은 없을지도 모른다. 조금 전 승장으로서 개선 행진을 한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그를 대하는 왕의 태도는 냉담했다.
‘어쩌면 둘 사이의 균열을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이곳에 얼마나 머물러야 할까?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기간이 짧든 길든, 에르난은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낼 생각은 없었다.
* * *
접견 때 느꼈던 어색함은 이어지는 만찬 자리에서도 계속되었다.
애초에 에르난은 편히 음식을 즐길 처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불편한 기류 탓에 더 괴로운 자리가 되고 말았다. 차라리 행군 때 감시병이 보는 앞에서 식사하던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식사를 마치고 처소로 돌아오니, 종이와 펜, 잉크가 작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에르난을 뒤따라 들어온 시종이 말했다.
“왕께서는 내일 바로 사크틸라에 사절을 보낸다고 하셨습니다. 사절 편에 편지를 보낼 수 있으니, 원하시면 작성해 주십시오.”
“고맙네.”
에르난은 외투를 벗고 곧바로 책상 앞에 앉았다.
리스보아까지 오는 동안 그렇게나 쓰고 싶던 편지였는데, 막상 펜을 드니 뭐라고 써야 할지 막막했다.
어차피 이 편지는 레이테가 받기 전에 헤젤이 먼저 읽어 볼 것이다. 에르난의 모든 행동은 감시당하고 있다.
누가 보아도 별 상관이 없는 말을 써야 한다. 그렇다고 진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하는 나의 아내, 레이테에게.
연락이 늦어 미안합니다. 당신은 잘 지내고 있습니까? 내 걱정을 많이 했을 텐데, 일이 이렇게 되어 유감입니다. 내 어리석음으로 희생된 이가 적지 않습니다. 그들의 안식을 위해 기도해 주면 좋겠습니다.
나는 리스보아 왕궁에 도착했고, 벨류 왕의 환대를 받았습니다. 이 궁은 바닷가에 지어졌는데, 내가 머무는 방에서는 특히 바다가 무척 잘 보입니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아내와 함께 바다를 보았던 지난 일들이 절로 떠올랐다. 사크틸라와 바르시나에 이어, 헤젤의 바다도 함께 볼 날이 올까?
그러지 않는 편이 낫다. 이곳은 적국이다. 정복이라도 하지 않는 한 올 이유가 없다.
‘바다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레이테를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보고 싶다. 그리움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순간적으로 손이 떨리며 잉크 방울이 종이에 떨어졌다.
‘벌써 이러면 곤란한데.’
긴 시간을 버틸 각오로 마음을 갈무리해야만 한다. 헤젤의 사절 파견은 왕관 쓴 포로의 몸값을 본격적으로 계산해 보자는 뜻이다. 만만치 않은 금액을 요구할 것이 뻔하니, 협상은 꽤 오랫동안 이뤄질 것이다.
금전 문제 이상으로 이 사태를 장기화할 요인이 또 있다. 전투에 패배하기 직전까지 에르난을 괴롭혔던 바르시나와 사크틸라 양국의 갈등이었다.
얼마나 엉망이 될까. 생각만 해도 괴로웠다.
‘레이테가 혼자서 버틸 수 있을까?’
우리가 다시 만날 때까지, 힘든 시간이겠지만 기다려 주십시오. 나는 반드시 돌아갈 것입니다.
좀 더 감정을 담아 쓰고 싶었지만, 한심한 처지에서 그렇게 했다가는 구차함만 더해질 것 같다. 더군다나 그런 나약함의 흔적을 아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본다고 생각하면 불쾌했다.
‘원래는 누가 보든 말든 신경 따위 쓰지 않았는데.’
오히려 아내와의 사이를 일부러 과시하려 애쓰기도 하지 않았던가.
‘답답하군.’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감정부터 차분히 가라앉혀야 적국에서의 포로 생활을 견딜 수 있을 텐데. 지금은 지켜보는 눈이 거슬려 한숨조차 편히 쉴 수 없었다.
* * *
에르난이 쓴 편지는 시종을 통해 당연하다는 듯 브라간사에게 전달되었다.
‘따분할 정도로 아무 내용이 없군.’
감시를 지나치게 의식한 편지는 솔직히 조금 우스웠다.
여왕이 이것을 본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어쩌면 안심은커녕 걱정만 더 커질지도 모르겠다. 에르난이 몸을 사리는 기색이 역력하니까.
그렇다면 참 재미있을 것이다.
편지를 쥔 브라간사의 손이 멈칫했다. 그냥 보낼까?
“…….”
잠시 고민하던 브라간사는 곧 편지를 찢어 난롯불 속으로 던져 버렸다.
눈치를 많이 본 탓에 오히려 잡다한 것 없이 그리움만이 솔직하게 느껴지는 편지였다. 그 산뜻한 감정이 불쾌했다.
* * *
냉정하게 따져보면, 에르난이 죽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레이테의 생각도, 다른 귀족들의 생각도 그랬다.
신분이 높은 자일수록 죽이지 않고 살려야 이득이 되었다. 두둑한 몸값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왕이라면 그 값은 더욱 올라간다.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은 이미 몇 차례 조사했다. 많은 사망자의 시신을 거뒀으나 에르난의 흔적은 갑옷 파편조차도 찾을 수 없었다.
“헤젤은 작은 요새 몇 개만 차지했을 뿐, 걱정하던 오누바 약탈은 일어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철수하는군요. 충분한 이익을 얻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겁니다.”
레이테는 시스로네스의 분석에 동의했다. 에르난은 브라간사의 군대와 함께 헤젤에 갔을 확률이 높다.
머리는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지만, 가슴은 계속 걱정으로 타들어 갔다. 보름이 넘도록 아무 소식이 없었다.
따라서 헤젤에서 사절이 찾아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 레이테는 기쁠 정도였다. 사절이 가져왔을 소식이 얼마나 나쁜 내용일지 뻔한데도 그랬다.
“돈 에르난은 저희 왕이신 벨류 폐하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고 있습니다. 정성껏 대접할 것이니 여왕 폐하께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개를 빳빳이 든 사절은 무척 거만하게 말했다. 선심이라도 베푸는 듯한 태도였다.
일단 레이테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무사하구나.
“다만 그분의 거취 문제는 아무래도 이야기가 많이 필요할 듯합니다.”
“……어떻게 하기를 원하죠?”
“사크틸라와 바르시나에서 저희 쪽으로 사절을 파견해 주셨으면 합니다. 헤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거절할 권리는 없었다. 승자인 헤젤이 에르난을 붙잡고 있으므로. 사크틸라와 바르시나가 불리한 입장일 수밖에 없다.
“좋아요. 되도록 빨리 사절단을 꾸려 보내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폐하.”
사절과의 만남은 순식간에 끝났고, 레이테는 회의실로 향했다. 찬 공기가 흐르는 복도를 걸으며 레이테는 머리가 조금씩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거짓말로도 좋은 상황이라 할 수 없지만, 에르난의 무사함은 확실히 보장받았다. 다만 안심하며 쉴 여유는 없었다.
에르난을 데려오기 위한 협상을 해야 한다. 그에 앞서 해결, 아니 최소한 봉합해야 할 일도 있었다.
패전으로 인해 대놓고 갈라진 사크틸라와 바르시나의 사이를 다시 이어 붙여야 한다. 이것을 해결해야 에르난을 무사히 데려올 수 있을 것이다.
“바르시나인들의 멍청한 행동으로 이 사태가 일어난 겁니다. 공동 책임인 척 몰아가지 마시지요!”
고성이 회의실 밖에서도 또렷하게 들렸다. 레이테는 눈을 질끈 감았다. 독기 어린 외침은 팀파노 후작의 것이었다.?
#099
“당신네 사정에 우리 왕을 억지로 휘말리게 했으면서 무슨 개소리야!”
레이테도 알고 있었다. 패전과 에르난의 실종 소식이 전해지면서, 사크틸라와 바르시나 귀족 사이에 오가는 말은 노골적으로 험악해졌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잠시 걸음을 멈칫하던 레이테는 곧 문 앞에 선 시종에게 눈짓했다. 문이 열리고 레이테가 들어가자, 조금 전까지 서로를 죽일 듯 노려봤을 두 나라의 귀족들이 여왕에게 인사했다.
“모두 소식을 들었겠지만, 에르난은 헤젤에 있어요.”
레이테는 그들 사이에 오간 대화를 못 들은 척 말했다.
“에르난의 석방을 위해 양국이 공조하여…….”
“폐하.”
여왕의 말을 끊고 끼어든 이는 바르시나 귀족이 아니었다. 사크틸라인인 팀파노 후작이었다.
아르파를 시작으로 지휘관과 병사들은 조금씩 이스팔리스로 돌아왔다.
사크틸라와 바르시나 모두 사상자가 많았으나, 에르난과 엇갈려 요새로 퇴각한 일부 바르시나군은 비교적 무사했다. 그들과 함께, 이런저런 이유로 아예 출전하지 않고 오누바에 남이 있던 자들도 돌아왔다.
생존자 중 팀파노의 동생인 심발로 백작은 없었다.
사망자 수습을 시작하면서, 심발로의 시신도 발견되었다. 심발로는 갑옷과 무기를 완전히 약탈당한 채로 다른 기사들과 뒤섞여 쓰러져 있었다. 등에 난 커다란 상처는 여러 차례 도끼에 찍힌 흔적인 듯했다.
그날 이후, 감정을 억누르면서 바르시나와 화합하는 모습을 보이려 애썼던 팀파노는 점점 변했다.
“바르시나의 왕을 데려오는 일보다, 사망자를 추모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일이 우선이지 않습니까?”
레이테는 당황했다. 에르난을 아예 사크틸라의 왕으로 여기지도 않는다는 식의 표현이다.
“내일 장례식이 있습니다. 여왕께서도 참석하신다는 걸 잘 알면서 그렇게 말하면 곤란합니다만.”
시스로네스가 꽤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팀파노를 향한 눈빛이 꽤 엄격했다.
“……그렇군요.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송구합니다, 폐하.”
“…….”
팀파노의 화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점점 정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르시나 귀족들은 팀파노를 향해 노골적인 조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그래도 팀파노는 시스로네스처럼 지적을 하면 수용한다. 하지만 바르시나인들은 어떨까? 레이테는 그들과 충돌하지 않으려 애썼다.
바르시나인이 사크틸라에 계속 머무는 이유는 오로지 에르난 때문이다.
그들에게 레이테는 에르난의 곁에 있을 때에만 의미 있는 존재였다.
* * *
다음 날 아침. 레이테는 장례식 참석 준비를 위해 일찍 일어났다. 입맛이 없어 아침 식사 대신 차만 가볍게 한 잔 마시는데, 카테리나가 그녀의 오빠와 함께 나타났다.
“여왕 폐하.”
오랜만에 만나는 프란세스크는 몇 달 전 바르시나로 떠날 때만큼 어둡고 수척한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때보다 더 나쁘다. 바르시나로서는 이보다 최악일 수 없을 정도로.
“바르시나는 사람을 보내는 일은 늘 빠르네요.”
“왕을 되찾아 오려면 현실적으로 두 나라가 협력해야 합니다. 감정이 어떻든 간에요.”
“그런 식으로 귀족들을 설득했나요?”
“글쎄, 설득이라 하긴 뭣하고……, 주장은 하고 왔습니다.”
프란세스크의 주장은 별로 효과가 없었을 것이다. 레이테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사크틸라에게 더 끌려다닐 수는 없다거나, 그런 반응이지 않던가요?”
“사크틸라가 책임져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습니다. 둘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차이가 있지요.”
레이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자는 사크틸라를 완전히 배제하려 하지만, 후자는 그럴 수 없다. 여러 의견이 맞서는 사이, 프란세스크는 조금 막무가내로 사크틸라행을 택했을 것이다.
“카테리나에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오늘은 전사자들의 장례식이 있어요. 사크틸라, 바르시나 가리지 않고 모든 전사자를 추모하는 자리이니 공도 참석하면 좋겠네요.”
“들었습니다, 폐하. 실은 그에 맞추려고 조금 서둘러서 왔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황금 양모 기사단원의 희생도 적지 않아요. 기사들은 당신을 상당히 잘 따랐으니, 그들에게도 위로가 될 거에요.”
“물론입니다. 하나하나 작별인사를 해야지요…….”
프란세스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 * *
기사단원 대부분은 장례 미사를 치른 이스팔리스 대성당 내의 묘역에 안장되었다. 마지막까지 왕을 위해 싸운 기사들을 예우하여 왕실에서 마련해 준 것이다.
기사단원 모두가 이곳에 묻히지는 않는다. 유족의 요청을 받은 일부 바르시나인은 이제 고향으로 돌아간다. 프란세스크는 그들을 따라가지 않고 대성당에 그대로 남았다.
대성당은 터무니없이 컸다. 한 지붕 아래에 있는 공간이거늘, 미사를 치른 예배당에서 기사단의 묘소까지는 제법 걸어야 했다.
이렇게 큰 성당을 만들다니, 사크틸라인은 미쳤다는 생각이 잠시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 덕에 기사들이 쉴 자리도 있는 것이다.
기사들이 누운 석관의 뚜껑이 닫히기 직전, 프란세스크는 잠시 망설이다 관에 누운 자를 바라보았다. 차마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아 여태 눈을 감고 기도만 했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은 보고 싶었다.
심발로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깔끔하게 닦고 수의를 입으니 처참한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목에 걸린 황금 양모 목걸이가 빛났다. 프란세스크는 혼란스러웠다. 과연 심발로에게 이 기사단은 명예의 상징이었을까?
‘내가 망쳐 버렸지.’
바르시나에서 지내는 동안, 프란세스크는 숱하게 생각했다. 어떻게 행동했어야 옳았나?
에르난은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라며 친구를 위로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 생각하지만, 인정할 수 없었다.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벌어진 상황이 너무나 좋지 않았으므로.
프란세스크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심발로를 죽음으로 몰아넣지 않았다. 하지만 인과관계를 하나씩 따져보면, 결국 프란세스크의 불신과 기만에 닿고 만다.
그런 사고는 프란세스크만의 것은 아니었다. 관을 붙잡고 오열하는 남자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후작 각하, 이만 동생을 쉬게 해 주십시오.”
사제는 팀파노를 달래려고 애썼다. 다른 기사들이 팀파노를 일으켜 세웠다.
기사들의 부축을 받아 걷던 팀파노는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렸다.
“리세우.”
프란세스크의 몸이 움찔 떨렸다.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천천히 몸을 돌리니, 팀파노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잘도 오셨군.”
팀파노의 붉게 충혈된 눈은 공허해 보이면서도 살기등등했다. 당장 검이라도 뽑아 들 기세였다.
소란을 일으킬 수는 없다. 프란세스크는 그에게 정중히 인사하고 자리를 떠나려 했다.
“당신의 그 잘난 왕이나 만나지, 사크틸라는 왜 왔나? 여기에서 알짱거리며 시간 낭비하지 말고 당장 헤젤로 꺼져. 한심하게 포로나 된 주제에, 왕이라는 이유로 적지에서도 편안하게 잘 지낸다지? 왕이 좋긴 좋군.”
“말씀이 과하십니다.”
프란세스크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자신을 탓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프란세스크 자신도 그러고 있었으므로. 하지만 왕을 모욕하면 팀파노가 곤경에 빠질 수 있다.
“내가 과해 봤자 당신 왕보다 더하겠소? 오늘 떠나보낸 수많은 병사들의 죄가 뭔지 아나? 그놈의 명령을 따랐다는 거야! 출전 직전에, 나는 동생을 불러서 신신당부했지. 전쟁터에서는 감정을 죽이고 명령만 따르라고. 그 결과 보기 좋게 떼죽음 당했어!”
점점 목소리가 커지던 팀파노는 화를 참지 못하고 기어이 검을 뽑아 들었다.
“세상에……!”
깜짝 놀란 카테리나가 놀란 숨을 들이마셨다. 오빠를 조용히 따라온 그녀는 묘소 구석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위험하다. 후작은 정말로 프란세스크를 공격할 생각이다.
카테리나는 팀파노를 말려볼 생각에 그들에게 뛰어들려 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카테리나의 팔을 강하게 붙잡았다.
“안 됩니다. 아가씨가 끼어들었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라요.”
오누바에서 돌아온 세르지였다. 카테리나는 놔 달라는 뜻에서 그를 노려보았지만, 세르지는 손을 놓지 않았다.
“각하, 여기는 성당입니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난처해 하는 사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점점 소란이 커지면서, 기사들이 팀파노를 붙잡고 말리려 애썼다.
“이거 놔요…… 아!”
세르지와 실랑이하던 카테리나가 프란세스크 쪽을 보았다가 깜짝 놀라 외쳤다.
말리는 자들을 기어이 뿌리친 팀파노가 프란세스크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가차 없이 검을 휘둘렀다.
* * *
전사자가 워낙 많았기에, 미사 이후 장례 절차는 여러 곳에서 같은 시각에 진행되었다.
귀족들은 그가 소속된 가문이나 기사단 등에서 묘를 마련해 주지만, 일반 병사들은 성당 근처 묘지에 함께 묻힌다.
그들을 예우하는 차원에서 여왕은 이곳에 왔다. 예식은 추기경이 직접 주례한다.
관 위에 흙이 덮이고 묘비가 세워졌다. 기도가 이어지고, 흐느끼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폐하.”
시녀 한 명이 작은 목소리로 레이테를 불렀다. 레이테가 눈을 뜨고 옆을 돌아보니, 프란세스크와 함께 기사단의 묘소에 갔을 카테리나가 와 있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말릴 수 있는 분이라고는 폐하밖에 떠오르지 않아서……. 부탁드려요. 오빠 좀 살려 주세요…….”
카테리나가 울면서 말했다.
프란세스크로서는 팀파노를 공격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으면 죽이려고 작정한 공격에 당하고 만다. 프란세스크는 허리에 찬 검을 뽑고 그에게 맞섰다.
팀파노를 무장해제시키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팀파노의 검을 쓰는 실력이 워낙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프란세스크의 검이 훨씬 짧았다. 결국 그는 공격을 막아내기에 급급했다.
“진정하십시오, 후작!”
팀파노의 움직임이 얼마나 매서운지 다른 이들은 차마 끼어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말로 팀파노를 진정시키려 했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공격해 오는 칼날을 겨우 미끄러뜨린 프란세스크는 재빨리 팀파노의 손목을 쳐 검을 떨어뜨리게 했다.
팀파노는 떨어진 검을 다시 주워들려 했다. 하지만 다른 기사가 먼저 검을 가져가는 바람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돌려줘!”
기사들에게 붙잡혀 몸부림치던 팀파노가 제단 위에 있던 촛대를 집어 들더니 프란세스크를 향해 던졌다. 검집에 검을 꽂아 넣던 프란세스크는 갑자기 날아오는 것에 얼굴을 맞고 말았다.
프란세스크는 얼굴을 붙잡고 뒷걸음질 치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흘러나왔다.
“안 돼!”
여왕을 데리고 온 카테리나가 그 모습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팀파노!”
그리고 여왕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기가 막힌 상황이 레이테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동안 누구보다 감정을 자제해 오던 사람이 팀파노였다. 동생의 사망 소식을 접한 뒤로 불안한 모습을 보였지만, 이 정도까지 망가질 줄은 몰랐다. 레이테의 충격은 컸다.
카테리나가 오빠에게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 레이테는 팀파노에게 다가갔다.
“엄숙해야 할 자리에서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인가요!”
레이테가 말했다. 그러자 잠시 멍해진 얼굴로 여왕을 바라보던 팀파노가 버럭 외쳤다.
“폐하!”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대단히 위협적이었다. 팀파노를 다그치려던 레이테가 오히려 놀라 몸을 움찔거렸다.
“정신 차리십시오! 폐하께서는 사크틸라의 왕이십니다!”
프란세스크를 죽일 기세였던 팀파노의 살벌한 눈이 이제는 여왕을 향했다.
“필요에 의해 바르시나의 왕과 결혼하고 그곳의 여왕 또한 되셨으나, 폐하의 나라는 사크틸라입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 올바르게 판단하시지요! 고작 패배자인 남자 따위에게 잡혀 계실 겁니까!”
여태껏 들어보지 못한 수준의 폭언에 레이테는 눈앞이 새하얘지는 듯했다.?
#100
붕대를 풀자 시야가 확 트였다. 프란세스크는 눈을 몇 번 깜박여 빛에 적응한 다음, 얼굴을 이리저리 돌리며 거울 속의 자신을 확인했다.
오른쪽 관자놀이 근처로 상처와 멍이 나 있었다. 팀파노가 던진 촛대에 맞은 흔적이다. 의사의 말로는 흉터가 남을 것이라고 한다.
“이만하면 꽤 나아졌네. 붕대는 그만 둘러도 되겠어. 일주일째 강제로 한쪽 눈으로만 보며 살려니까 답답해서 원.”
“안 돼.”
카테리나는 오빠의 투정을 무시하고 새 붕대를 집어 들었다.
천만다행으로 눈을 빗겨 맞았지만, 상처를 감싸다 보면 결국 눈까지 가려지고 만다. 한쪽 눈이 가려지자 좁아지는 시야가 답답했다. 하필 요즘은 좌우를 유심히 살펴야 할 때라 더 그랬다.
“이따 밤에 하면 안 될까?”
프란세스크는 붕대를 감으려는 동생을 붙잡았다.
“이래저래 눈치를 좀 살펴야 하는 자리니까.”
“오늘도 가?”
카테리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프란세스크는 동생을 가볍게 토닥여 주고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입었다.
의사에게 쉬라는 말을 들었지만, 프란세스크는 매일같이 왕궁을 나가 시내에 다녀왔다.
왕실의 이스팔리스 체류가 길어지자, 왕을 수행하던 바르시나인의 일부는 아예 시내에 집을 빌리기도 했다. 지극히 바르시나답게, 그들의 저택은 항구와 거래소 근처에 있었다.
요즘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사크틸라와의 장사 대신 정치 사안에 대해 활발히 의논했다. 에르난의 석방 문제였다.
프란세스크는 그 자리에 참석하고 싶지 않았다. 왕에 대한 논의를 왕궁 밖에서 한다. 이는 사크틸라를 무시하겠다고 작정한 행위다.
하지만 그는 여왕의 명령을 받았다.
“바르시나인들이 뭘 생각하고 어떻게 하려는지 살펴주세요.”
저택에 모인 사람들도 프란세스크의 목적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는 여왕에게 신임받는 편이므로.
하지만 프란세스크는 쫓겨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바르시나인들은 프란세스크를 통해 여왕에게 자신들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오늘은 에르난의 일을 논의하기에 앞서, 아침부터 궁정을 시끄럽게 했던 이야기가 먼저 나왔다.
“들으셨습니까? 페레트 발란시오가 바르시나에 나타났다는군요. 죽은 줄 알았는데, 그냥 탈출해서 바르시나에 간 겁니다.”
“헤젤의 포위를 뚫은 것만은 대단하군요. 하지만 영 모양이……. 왕의 군인이란 자가…….”
페레트의 소식을 반가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크틸라인들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비웃기 바쁘더이다. 큰소리만 떵떵 치더니 아무것도 못 하고 도망쳤다고.”
바로 이것이 문제였다. 바르시나인이 보기에도 페레트의 행위는 비겁했다.
“한심한 놈. 근본 없는 용병이나 할 짓을 했습니다.”
평소 아무 말도 하지 않던 프란세스크의 험악한 소리에 다른 이들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페레트의 소식을 듣고, 프란세스크는 정말로 화가 났다.
프란세스크가 바르시나에 있을 때, 페레트는 그를 찾아와 왕에게 봉사하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마침 에르난은 사크틸라로 올 만한 군인을 찾고 있었다. 프란세스크는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페레트가 출병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랬는데 비겁하게 도망이나 쳐? 그놈이 지휘했어야 할 병사들은 고생 끝에 퇴각해서 사크틸라인 눈치나 보며 이곳에 머물러 있는데?’
다시 만나면 가만두지 않을 테다. 프란세스크는 이를 갈았다.
“이제 그만 국왕 폐하의 일을 논의해 봅시다. 많은 분들께서 염려하시는 대로, 우리가 헤젤을 직접 상대하기에는 불안 요소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프란세스크는 살짝 눈을 찌푸렸다. 사크틸라의 간섭은 거절한다. 이곳에 모인 이들의 의견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당장 바르시나에는 헤젤어를 제대로 하는 사람조차 드물다.
“그런데 조금 다르게 생각해 봅시다. 사크틸라의 힘을 빌린다고 크게 달라질 일이 있습니까? 현 상황에서 여왕이 뭘 하겠습니까?”
“없습니다. 그 여자는 남편이 옆에 있어야 일을 하거든요.”
듣는 귀가 있는 줄 뻔히 알면서도 노골적으로 여왕을 비난한다. 여왕이 이 말을 듣는다 한들 어떻게 하지 못하리라는 확신에 따른 표현이다.
‘하지만 에르난이 있지.’
에르난은 아내를 저렇게 모욕하는 자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프란세스크는 지금 말하는 자들의 이름을 기억해 두자고 다짐했다.
“사크틸라인은 왕의 명령만 기다리지만, 명령을 내릴 여왕이 아무것도 할 줄 모릅니다. 따라서 사크틸라가 없다고 아쉬워할 이유는 없습니다.”
‘정말 에르난 혼자서 순회를 다니고 전쟁을 준비했다고 생각하나? 하긴, 여왕이 무엇을 하는지 관심조차 두지 않았을 테지.’
물론 전쟁 참여라는 가장 눈에 잘 띄는 행위는 에르난이 독점하는 영역이었다. 후방에 있는 여왕이 상대적으로 한가해 보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만만하게 볼까? 아니면 사크틸라를 배제하자는 주장에 힘을 싣기 위해 저런 말을 하나?
여왕도 답답하겠다. 프란세스크는 그녀가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르난은 사크틸라 귀족에게 모욕받는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
프란세스크는 깨달았다. 그렇다면 왜 반대 경우는 불가능할까?
* * *
해가 질 무렵, 레이테는 왕궁으로 돌아온 프란세스크의 보고를 받았다.
“바르시나의 협상가들이 도착하는 대로 헤젤로 갈 예정입니다. 그들과 합류해 이동하기 편하도록, 조만간 오누바로 떠날 것이고요.”
“……그렇군요. 수고했어요.”
한숨을 쉴 기력도 없었다. 이 사실은 곧 사크틸라 귀족들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잘 가라고 인사하려나?
“바르시나 단독으로는 절대로 국왕 폐하를 데려오지 못합니다.”
마침 집무실로 들어오던 시스로네스가 말했다.
“폐하, 차라리 바르시나인들을 직접 만나십시오. 물론 그들이 협조적이지는 않겠으나, 일단 붙잡으셔야 합니다.”
레이테는 답하지 않았다.
시스로네스의 말이 옳다. 하지만 어떻게?
미노리카 섬에서 두 나라의 화합을 주장했던 과거의 일이 신기루 같았다. 지금 바르시나인은 그때처럼 너그럽게 레이테의 의견을 경청할 생각이 없다.
“폐하. 저는 팀파노 후작을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시스로네스가 말했다.
팀파노는 성당에서 난동을 부리고 여왕에게 대든 죄로 왕궁 출입을 금지당하고 시내의 저택에 연금되어 있다.
“폐하께서는 그를 동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왕께 저지른 무례는 처벌받아 마땅한 일이니까요.”
대귀족에 대한 처벌로는 다소 과하다는 의견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팀파노는 여왕에게 불경죄를 지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았다.
팀파노 본인도 그 사실을 인정하고 순순히 처벌을 받아들였다.
그날 이후 더 가라앉을 데가 없을 줄 알았던 궁정의 분위기는 아예 침몰하다시피 했다. 사크틸라인과 바르시나인은 서로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는 아예 자기들끼리만 모여 앞날을 의논한다.
레이테는 자신이 점점 소외되어 감을 느꼈다.
남편은 적국에 포로로 잡혀 있는데 하루하루 시간만 흐른다. 레이테는 속이 터질 노릇이었다.
“바르시나인들에게도 같은 식으로 하십시오. 폐하에게 충성해야 할 의무를 외면하는 자들이지 않습니까? 그들이 반항하면 처벌하십시오.”
“내게 충성할 의무라. 그들은 의무라고 생각하지 않을걸요.”
시스로네스는 계속 바르시나를 정면으로 상대하라고 권한다. 하지만 레이테는 자신이 갈등을 더 악화시킬까 봐 불안했다.
레이테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한숨을 쉬었다.
“폐하. 사크틸라인과 바르시나인이 서로를 미워하는 가운데, 그들 모두의 공통된 주장이 하나 있습니다. 뭔지 아십니까? 여왕께서 이 문제에 발을 빼 달라는 것입니다. 바르시나 측의 의견은 조금 전 들으셨고, 사크틸라 쪽에서는 돈 에르난을 그냥 버리자는 말까지 나옵니다.”
팀파노도 그런 식으로 말했다. 언제까지 에르난에게 잡혀 있을 거냐고.
레이테는 그런 의견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에르난은 내 남편이에요! 패배했다는 이유로 남편을 헌신짝처럼 버리라고요?”
“결혼을 왜 했나 생각해 보십시오. 폐하께서 사크틸라의 주인다운 힘을 되찾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를 위해 돈 에르난의 도움을 구했지요.
또한 되찾은 힘은 남편과 바르시나에 빼앗기지 않고 최대한 폐하께서 갖고 계셔야 합니다. 그를 위해 얼마나 애를 써서 결혼 계약서를 만들었는지, 벌써 잊으셨습니까?”
시스로네스의 목소리가 매서웠다. 레이테는 조금 놀란 눈을 뜨며 그를 보았다. 숙부에게 추궁당하던 과거가 잠깐 떠오를 정도였다.
그때는 대꾸도 하지 못하고 듣기만 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잊기는 무슨! 내가 예전 모습으로 돌아갈 것처럼 보이나요?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글쎄요. 적어도 계약서는 잊으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 남편이 없는 폐하께서는 힘을 상실하셨고요. 귀족들의 행태를 보고서도 발만 구르고 계시지 않습니까?
팀파노의 말이 틀리지 않습니다. 이곳에 있지도 않은 패배자에게 붙잡히셨군요.”
뭐야? 레이테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시스로네스가 이런 말을 하니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시스로네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죠! 남편이 있든 없든 내가 사크틸라의 주인입니다! 바르시나인을 처벌하라고요? 그 이전에 사크틸라인인 당신이야말로 국왕 모독죄로 왕궁 출입을 금지당하고 싶나요? 팀파노처럼?”
“알겠습니다. 나가 보겠습니다.”
“그러시죠! 당장…… 아니, 잠깐!”
분노에 차 소리를 지르던 레이테는 당황해 말을 멈췄다.
나가란다고 정말 나가?
“폐하를 위해서라도 지금 당장 나가야겠습니다만.”
시스로네스는 깊게 허리를 숙여 레이테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집무실을 나가고자 문을 향해 걸었다.
“멈춰요! 정말 출입을 금지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적당히…….”
레이테가 그를 쫓아가자 시스로네스가 멈춰 섰다. 그는 돌아서 레이테를 바라보았다.
“아. 나가서 귀족들 좀 데려오려 했습니다. 아무래도 폐하께서 그들을 보고 싶어 하실 것 같아서요.”
“……어?”
레이테는 할 말을 잃고 눈만 껌벅였다.
“아, 리세우 공도 나가시지요. 저는 사크틸라인들을 부르러 가니, 공께서는 바르시나 귀족들을 모아 오셔야겠습니다.”
원래 여왕과 대화를 나누던 사람은 프란세스크였다. 그런데 갑자기 들어온 시스로네스가 그녀와 다투는 바람에, 프란세스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둘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아, 네……. 그러지요.”
프란세스크가 어색하게 답했다.
바르시나 귀족을 데려오라는 말을 듣고, 레이테는 시스로네스가 왜 귀족들을 모으려는지 깨달았다.
두 나라의 주인답게 그들을 이끌어라. 시스로네스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왕께서 포로가 된 유례없는 사태 앞에서, 모두가 혼란에 빠졌습니다. 저희에게는 구심점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두 나라를 한데 모아 지휘할 수 있는 사람은 왕뿐이지요.
한 분은 자유를 박탈당하셨습니다. 하지만 다른 분이 계십니다. 두 나라를 한데 모아 지휘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지요.”
“……알현실에서 만나도록 해요.”
“예, 폐하.”
시스로네스는 여왕에게 다시 인사한 뒤 집무실을 떠났다. 프란세스크가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 * *
알현실은 사크틸라와 바르시나의 귀족, 성직자로 가득 찼다. 레이테는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옆자리가 빈 왕좌에 앉았다.
생각 이상으로 많이 모였다. 대립 국면에 양쪽 모두 피로를 느껴서일까.
바르시나 귀족들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한 명도 빠짐없이 왔다.
바르시나의 힘만으로 에르난을 데려오자는 말이 나왔다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에 가깝다. 바르시나인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몸값은 마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헤젤을 상대로 협상을 하려면 사크틸라의 협력이 필수다.
“헤젤에 협상단을 파견하겠어요. 국적과 무관하게 에르난의 석방에 힘을 보탤 수 있는 이를 선발하겠습니다.”
제각기 다른 생각과 감정을 지니고 있으나, 모두의 시선은 여왕을 향한다. 레이테는 그들에게 완전한 신뢰를 받는 군주는 아니었다. 하지만 저들을 이끌어갈 사람도 레이테뿐이다.
“그리고 헤젤에는 왕인 나도 갑니다.”
따라서 레이테는 자신의 강력한 의지를 저들에게 보여야 했다.?
#101
오늘 저녁도 에르난은 왕궁 밖으로 나섰다. 행선지는 늘 같았다. 시내의 브라간사 공작 저택이었다.
브라간사는 거의 매일같이 만찬회를 열어 에르난을 초대했다.
“어서 오십시오, 폐하. 오늘 하루는 어떠셨습니까?”
깍듯한 인사와 함께 브라간사가 에르난을 맞았다. 그의 여유로운 웃음과 친절한 목소리에 에르난은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별일 없네. 바깥 경치나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지.”
“책을 원하신다기에 시종이 전해 드렸다고 들었습니다만. 독서는 어찌하시고요?”
아. 표정 관리하기 힘들다. 에르난은 억지웃음을 무너뜨릴 뻔했다.
“내 헤젤어 실력이 변변찮아서 말일세. 이곳에서 바르시나어 서적을 보기는 힘들겠고, 사크틸라어로 읽을 만한 것을 구해 주면 고맙겠군.”
“이런, 제가 폐하께 너무 무심했습니다. 송구합니다.”
“……그럴 수도 있지.”
에르난이 받았던 책은 헤젤어로 써진 성서였다. 무심은커녕 철저한 계산 끝에 나온 선택임을 에르난은 의심치 않았다.
까막눈은 아니지만 긴 글을 독해하기에는 버거운 에르난의 헤젤어 실력. 그리고 종교에 무관심하거나 호의적이지 않은 바르시나인의 취향.
이것들을 한데 어우르는 모독이 아닌가.
에르난은 이제 꽤 익숙해져 버린 복도를 지나 연회장에 들어갔다. 큰 편은 아니지만 대단히 화려하게 꾸며진 곳이다.
다른 참석자들과도 간단한 인사를 나눈 에르난은 자신의 자리에 가 앉았다. 브라간사의 옆자리였다.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브라간사는 고풍스러운 술잔에 직접 술을 따라 에르난에게 건넸다.
“음식을 드시기 전에, 헤젤에서 요즘 가장 유행하는 포도주부터 대접해드리려 합니다. 특별히 제가 가장 아끼는 잔에 따랐으니, 드셔 보십시오.”
브라간사는 에르난을 만날 때마다 자신의 수집품을 자랑했다. 그가 보여 주는 모든 물건은 대륙에서 들여온 것이었다.
헤젤에서 대륙 본토로 가려면 바르시나의 바다를 통과해야 한다. 이 문제로 바르시나와 헤젤은 여러 갈등을 겪었다.
하지만 브라간사는 넘쳐나는 대륙의 물건을 뽐내며 그 사실을 조롱했다.
더군다나 수집품을 소개받을 때, 에르난의 반응도 문제였다.
“……잔이 참 아름답군. 옛 제국의 물건이 아닌가? 황제가 이런 형태와 테두리 장식을 선호했다지.”
술잔도, 그 안에 담긴 포도주의 황금 빛깔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에르난의 입맛은 뚝 떨어졌다.
수집품의 진가를 알아보고 칭찬하자니 브라간사의 조롱에 굴복하는 꼴이 된다. 하지만 모른 체할 수도 없었다. 그러면 바르시나의 왕은 예의도 교양도 없다고 비웃음을 사게 된다.
“맞습니다, 폐하. 바르시나의 주인답게 역시 역사와 예술에 조예가 깊으시군요.”
이미 몇 번이나 당해 놓고, 또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에르난은 억지로 포도주의 맛을 보았다.
진귀한 잔에 따라 내었으니 포도주 또한 평범하지는 않을 것이다.
포도주는 달았다. 문득 아내가 좋아하는 헤레스가 생각났다.
‘레이테…….’
매일 화려한 생활을 보내는 포로는 사실상 광대나 다름없지 않나.
이런 우울을 브라간사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에르난은 포도주를 다시 한 모금 마셨다.
“보기보다 꽤 강하지요?”
브라간사가 묻자 에르난은 고개를 끄덕였다. 브라간사는 에르난의 잔에 포도주를 다시 채워 주었다.
“이 술은 뱃사람들이 고안해 냈습니다. 대륙에서 헤젤까지 오는 데 시간이 워낙 오래 걸리잖습니까. 포도주를 오래 보관하기 위해서 궁리를 하던 중, 증류주를 섞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술도 상하지 않고, 맛 또한 달콤해져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항해자의 지혜였군.”
“예. 그런데 항해와 관련된 것은 역시 바르시나가 헤젤보다 발전하지 않았습니까? 바르시나에서는 항해할 때 어떻게 포도주를 마시는지?”
이제야 에르난은 진짜 미소를 지었다. 썩은 포도주나 마신다고 안타까운 척 빈정거릴 생각이었겠지. 하지만 달랐다.
“바르시나에서는 포도주를 일부러 가공할 이유가 없네. 항구에 들러서 보급하면 그만이거든.”
“바르시나가 누비는 바다는 꽤 넓다던데, 그렇지도 않나 봅니다?”
“그럴 리가, 넓지. 다만 바르시나는 넓은 바다만 가진 것이 아니라, 섬도 많이 가졌다네.”
브라간사가 미간을 찡그렸다. 에르난은 꽤 상쾌한 기분으로 포도주를 마실 수 있었다.
“맛이 좋군. 마음에 드는 술이야.”
사실 에르난은 단맛 나는 술을 선호하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레이테가 생각나는 맛이다. 더군다나 브라간사를 골려 줬더니 기분까지 좋아졌다. 입맛도 도로 생긴다.
브라간사는 금방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으나, 속은 꽤 뒤집혔을 것이다.
“……그러십니까? 폐하의 취향에 맞으셨다니 기쁩니다. 몇 병 더 처소로 보내드리지요. 아, 지금 드신 그 잔도 함께 드리겠습니다.”
“고맙네.”
때때로 브라간사는 자신의 수집품을 에르난에게 선물했다.
그래서 에르난의 방에는 인체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조각상, 눈이 아프도록 무늬가 섬세한 화병 등이 하나씩 늘어났다. 이제 술잔도 추가되었다.
자신의 귀한 물건을 손님에게 선보이고 선물까지 한다. 참으로 너그럽고 정성이 넘치는 대접이다.
“이제 식사를 하시지요.”
포도주로는 더는 뭘 하려는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에르난의 잔은 술이 거의 바닥났으나, 브라간사는 술을 더 따르지 않았다.
예의 바른 척하다가 이런 식으로 무례를 저지른다. 우연은 아닐 것이다.
에르난을 대하는 브라간사의 태도는 겉만 그럴싸하지 유치한 면이 없지 않았다. 그는 에르난을 패배시킨 군인으로서 자신의 우월을 증명하고 싶은 듯했다.
하지만 소소한 조롱 따위에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 오히려 패배감만 더 느끼지 않을까?
물론 브라간사로서는 이런 식으로 에르난을 상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전쟁에 패배해 포로가 되었다고는 하나 에르난은 왕. 브라간사가 멋대로 모욕해도 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치졸하긴.’
에르난은 피식 웃고 식사를 시작했다. 그의 앞에는 대구 요리가 놓여 있었다. 촉촉하고 짭짤한 대구와 겨자 소스의 조합이 좋았다.
“오늘 사크틸라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조만간 대표를 꾸려 파견하겠다고 합니다.”
“그렇군.”
에르난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꾸하고 식사를 이어갔다. 하지만 기대감으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돌아갈 날이 조금은 가까워졌다.
브라간사는 더 이야기하지 않고 빵을 먹었다. 달리 전할 말은 없는 듯했다.
레이테가 쓴 편지라거나.
‘……안 갔군.’
남편이 쓴 편지를 받았다면 레이테는 반드시 답장을 할 것이다. 하지만 소식이 없는 것을 보니 편지는 아예 레이테에게 가지도 않은 모양이다.
‘편지에 이상한 내용은 없었는데.’
왜 안 갔을까? 이유는 모른다. 다만 편지가 가지 못한 것은 틀림없이 브라간사의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폐하. 궁에서만 지내기 답답하지 않으십니까?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내일 교외로 사냥이라도 나갈까요?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식사를 마칠 때쯤, 브라간사가 말했다.
“거절할 수밖에 없어 유감이군. 내일은 벨류 왕께서 주최하시는 만찬회에 가야 하는걸.”
“예……?”
브라간사는 당혹스런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만찬에 함께한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왕의 초대를 받은 것이다.
브라간사만 빼고.
‘대단한걸.’
에르난은 놀랐다. 왕과 브라간사의 사이가 편치 않은 것은 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조카를 따돌릴 줄이야.
벨류 왕과 에르난이 만날 일은 많지 않았다.
쇠약해 보이는 인상과 달리 그는 여전히 정력적으로 일하는 왕이었다. 요즘은 의회에 출석하느라 바쁘다는 모양이다. 매일 손님을 대접할 여유가 있는 브라간사와는 달랐다.
애초에 브라간사가 에르난을 데리고 이럴 수 있는 것 또한, 벨류가 그에게 별다른 일을 맡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르난의 눈에도 보일 만큼 홀대가 계속되는데, 브라간사라고 벨류를 좋게 생각할 리 없다.
그 관계는 에르난의 흥미를 끌었다.
“아, 사냥을 오전에 다녀오면 어떨까? 가볍게 바람이나 쐬고 돌아와 연회장에 함께 가세.”
왕이 초대하지 않았다 해도, 에르난이 브라간사와 함께 연회장에 간다면 브라간사를 막을 사람은 없다.
‘되도록 당신 숙부와 사이가 더 나빠지면 좋겠어.’
리스보아에 와 벨류 왕을 만난 이후, 에르난은 줄곧 생각했다. 어쩌면 왕과 브라간사의 관계를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는 에르난은 물론이고 바르시나와 사크틸라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단결된 적보다는 분열된 적이 훨씬 상대하기 쉬우므로.
* * *
리스보아 왕궁의 대연회장은 사람으로 가득 찼다.
마침 정기적으로 소집하는 의회의 회기도 끝났다. 지방에서 온 대표들이 돌아가기 전, 왕은 그들까지 연회에 불러 모았다.
에르난은 벨류 왕과 함께 상석에 앉았다. 벨류는 헤젤의 귀족들을 에르난에게 한 명 한 명 소개해 주었다. 오래 머물다 갈 테니 얼굴을 익혀 놓으라는 듯이.
소개를 마치자 음악 소리가 커졌다. 사람들은 짝을 지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벨류는 에르난에게도 춤을 권했다. 에르난은 거절했다.
“마땅한 파트너가 없어서 그러시오?”
헤젤의 귀족은 잔뜩 소개받았으나, 기이하게도 왕족은 없었다. 브라간사만 대각선 방향의 식탁 앞에 불편한 얼굴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벨류의 두 아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딸은 결혼해서 왕궁을 나갔을까? 형제자매도? 하지만 단 한 명의 가족도 없는 것은 의외였다.
심지어 리리우 공주도 보이지 않았다.
에르난이 리스보아 궁에 온 지도 벌써 2주가 지났다. 그동안 에르난은 한 번도 리리우를 만나지 못했다.
‘조금 이상하군.’
“사냥을 격하게 하고 왔더니 피곤해서요. 죄송합니다.”
어쨌거나 춤을 출 생각은 들지 않았다. 대신 왕과 그 조카를 관찰할 생각이었다.
“죄송할 것까지야. 춤이야 다음 기회에 추면 되잖소. 일찍 쉬셔야 할 텐데 이런 자리에 불러 민망해지는군.”
“이 정도야 괜찮습니다.”
오랜만에 사냥을 갔더니 무척 피곤했다. 벌써 말을 타는 감이 떨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브라간사의 움직임이 거친 탓이 더 컸다. 브라간사는 포악하다는 표현을 해도 될 만큼 무자비하게 짐승을 사냥했다. 사실 에르난은 브라간사를 쫓아다니기에 바빴다.
브라간사가 에르난에게 굴욕을 주려고 일부러 험하게 움직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왕에게 화가 많이 나서 그랬겠지.’
벨류와 브라간사는 한자리에 모이는 일도 드물었다. 에르난이 벨류와 처음 만났던 그 날 이후 오늘이 처음이었다.
검은빛을 띤 멧돼지 고기가 식탁 위에 올랐다. 에르난이 말했다.
“브라간사 공작이 오늘 사냥한 멧돼지입니다. 공작의 사냥 실력이 굉장하더군요.”
에르난의 눈길이 브라간사에게 향했다. 아내와 미묘하게 비슷해 보이면서도 다른 보랏빛 눈이 그와 마주쳤다.
브라간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에르난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버렸다.
하지만 그는 에르난과 벨류의 대화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공작을 아라고에서 만났을 때, 친교를 다지고자 한 번쯤은 사냥을 나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지요. 아내가 불편해할 것 같아서…….”
실은 사냥을 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에르난은 진심으로 아쉬웠던 척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셨구려. 오늘이라도 그 아쉬움을 해소해서 다행이오.”
벨류는 내색하지 않지만, 에르난은 그가 아라고에서의 일에 얼마나 분노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 기억을 좀 상기하게 해 줄 생각이었다.
“아쉬움이 많았던 만남이었습니다. 저로서는 잘해 보려고 애썼습니다만…….”
“폐하.”
에르난의 등 뒤에서 앳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르난은 말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새빨간 드레스를 입은 리리우였다.?
#102
“어서 오너라, 리리우. 오랜만에 보니 더 사랑스러워졌구나.”
벨류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녀를 가볍게 포옹했다.
“자, 에르난 왕께도 인사해야지. 오랜만에 뵙지 않느냐.”
“예……. 오랜만이에요, 폐하.”
리리우는 드레스 자락을 잡고 살짝 무릎을 굽혔다. 에르난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일어나 인사했다.
공주는 키가 부쩍 자라 있었다. 하지만 앳된 얼굴과 풍성한 금발은 그대로였다.
고혹적인 빛깔의 붉은 드레스와 머리에 꽂은 화려한 보석 핀은 아름다웠으나, 어쩐지 그녀에게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살짝 숫기 없어 보이는 얼굴이 어색함을 더했다.
“리리우는 그동안 리스보아 근교의 수도원에 요양을 가 있었소. 왕께서도 아실 그 일로 마음고생이 심했던지라. 그래서 나도 몇 달 만에 손녀를 만나는 거요.
지난주가 열일곱 살 생일이라서 궁에 돌아오라 했더니, 조용히 지내고 싶다며 굳이 생일이 지나고 오는군. 마냥 어리광만 부리던 아이였는데, 이제 많이 성숙해졌지.”
벨류는 다소 수다스럽게 손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재잘재잘 떠들던 리리우의 예전 모습이 순간 엿보이는 듯했다.
브라간사에게 보인 태도 때문이었을까? 에르난에게 벨류는 친절한 척하는 냉정한 제왕이라는 인상이었다.
하지만 손녀에게는 다른 모양이다. 더군다나 리리우는 벨류에게 유일하게 남은 직계 가족이다.
“그렇습니까. 생일 축하드립니다, 공주.”
“가, 감사합니다.”
에르난은 가볍게 축하인사를 건넸다.
“이제 자리에 앉자꾸나. 이쪽으로 오너라.”
시종이 의자를 들고 와 벨류가 손짓하는 곳에 놓았다. 에르난과 벨류 사이였다. 리리우는 머뭇거리며 그곳에 앉았다.
“리리우. 에르난 왕께 술이라도 한 잔 따라 드리거라.”
“……네.”
분위기가 이상했다.
어울리지 않는 붉은 옷을 입고 옆에 찰싹 달라붙다시피 한 상태에서 술 시중을 든다. 접대부나 할 만한 짓이 아닌가.
리리우는 어찌할 줄 몰라 당황하는 얼굴이었다. 그녀가 든 술병이 떨렸다.
에르난은 벨류를 힐끗 보았다. 벨류는 흐뭇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분명히 흐뭇하다고 표현할 만한, 기쁨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그 감정은 손녀를 향하는 것 같지 않다.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쳤다. 벨류는 분명 웃고 있거늘, 마주친 눈은 무섭도록 차가웠다.
그 순간 에르난은 깨달았다.
저것은 자신의 계획대로 일이 되어 만족하는 웃음이다.
에르난은 벨류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포로로서 벨류의 손아귀에 있는 처지다.
‘이용당하는 건 나야.’
에르난은 순간 벌떡 일어날 뻔했다. 하지만 그 충동을 가까스로 참고, 일단 술잔을 들었다. 계속 팔을 떠는 리리우가 안쓰러웠으니까.
“감사합니다. 전하.”
리리우가 술을 다 따르고 병을 식탁에 내려놓을 때까지, 에르난은 지극히 공손한 태도로 그녀를 대했다. 결코 공주의 시중을 받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바람에, 술의 맛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벨류는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이지?’
그의 목적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왕의 명령을 받은 브라간사가 아라곤에서 했던 일. 그 목적은 바르시나와 사크틸라의 분열이었다.
헤젤의 전쟁 승리에도 두 나라의 분열은 상당한 기여를 했다. 분열이 계속되어야 헤젤에 이롭다.
바르시나의 왕을 어떤 식으로 이용해 두 나라의 갈등을 부추길까?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 방법은 수없이 다양할 것이다.
“……들어가겠습니다.”
술잔을 든 채로 생각에 빠져 있던 에르난은 옆에서 들리는 리리우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공주는 벨류와 뭔가 대화를 나눈 것 같았다.
에르난이 어리둥절해 하는 모습을 보이자, 벨류가 친절하게 설명했다.
“리리우가 많이 피곤한지 일찍 들어가 쉬겠다고 하오.”
“아, 그러십니까. 편히 쉬십시오, 전하.”
리리우는 피곤하기보다는 불안한 것처럼 보였다. 벨류는 왜 손녀가 이런 식으로 행동하도록 하는 걸까?
“내 손녀를 공경해 주시는 모습에 감격했소.”
“과찬이십니다.”
“리리우, 왕께서 적적하실 테니 네가 잘 모셔 드리거라.”
“네…….”
에르난은 눈을 살짝 찌푸렸다. 뭔가 말하는 방향이 이상하다.
인사를 마친 리리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연회장 밖으로 나갔다. 에르난은 리리우가 사라진 방향을 보는 척하며 시선을 돌렸다.
잠깐이나마 벨류를 눈앞에서 보이지 않게 해 숨을 돌리고 싶었다.
그때 에르난의 눈에 브라간사가 들어왔다. 그는 벨류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 * *
벨류는 기분이 좋은지 에르난에게 끊임없이 술을 권했다. 에르난은 거절할 도리가 없어 계속 술을 마셨다. 벨류를 상대하며 그의 의도를 읽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긴장을 많이 한 탓일까. 술을 꽤 마셨는데도 에르난은 취하지 않았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연회가 끝나자 긴장이 풀리면서, 순식간에 취기가 오른 것이다.
‘이용이고 뭐고……, 머리가 아파 먼저 죽겠군.’
에르난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걸었다. 빨리 방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걸음걸이는 점점 느려지고 몸은 비틀거렸다.
‘일단 낮에는 꼼짝도 하지 말고 쉬어야겠어. 그리고 저녁에는 브라간사를 만나자. 초청은 없었지만 만나러 가겠다고 하면 거절하지 않겠지.’
어지러운 가운데에서도 에르난은 내일 할 일을 생각했다. 방에 도착하면 그대로 쓰러져 잠들 것 같아서였다.
브라간사는 벨류의 가신이지만, 그의 아군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어 보인다. 오늘 일로 에르난은 확신했다.
따라서 벨류가 자신에게 뭔가를 하려 한다면, 브라간사를 이용해 벨류에게 대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폐하.”
눈을 반쯤 감고 계단을 오르던 에르난은 뜬금없이 들리는 여자 목소리에 눈을 떴다.
그의 방문 앞에 시녀 몇이 서 있었다. 에르난을 찾아올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다.
“무슨 일인가?”
시녀들은 대답 대신 에르난이 방으로 들어갈 수 있게 길을 비켜 주었다.
에르난은 더 묻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묻는다고 대답할 것 같지도 않았으며, 에르난도 더는 생각할 기력이 없었다.
‘일단 자자. 일어나면 생각해 봐야겠군.’
방문이 닫혔다. 에르난은 그대로 침대에 가 쓰러지려 했다.
그런데 침대 맞은편 벽난로 앞에 놓인 의자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에르난이 눈을 몇 번 깜박이자 사람의 모습이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에르난은 정신이 확 들었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공주?”
크림색 슈미즈 차림의 리리우였다.
“죄…… 죄송, 정말 죄송해요, 폐하. 여기 있기만 하다가 갈게요. 정말이에요.”
리리우는 울먹거리며 몸을 움츠렸다. 에르난은 리리우에게 다가가 곧바로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돌아가십시오. 공연한 소문이 납니다.”
일단은 리리우를 방 밖으로 내보내야겠다. 그리고 날이 밝으면 어떻게 된 일인지 제대로 알아보자.
에르난은 그렇게 판단했다. 하지만 이미 늦고 말았다.
“……어차피.”
리리우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소문은 날 거예요. 제가 이곳에 오는 걸 본 사람들이 있는 데다가…….”
목격자라면 방문 앞에 시녀들이 있었다. 에르난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리리우는 말끝을 흐리더니 눈을 내리깔았다. 차마 에르난을 마주 볼 수 없는 듯했다. 그녀는 떨리는 팔로 의자를 꽉 붙잡았다. 절대 나갈 수만은 없다는 듯.
“연회장에서 뵈었을 때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만, 이제야 뭔가 맞춰지는군요. 어차피 소문은 난다? 공주와 나 사이에 염문설이라도 나라는 겁니까?”
“……죄송해요.”
연회장에서부터 리리우의 태도는 불안해 보였다. 이런 일을 이미 예정했던 것이다.
리리우는 일련의 상황을 내키지 않아 한다. 지금 에르난이 아무리 당황했다 해도 그 정도는 눈치챌 수 있다. 공주는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하지 않나.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여왕님이 좋아요. 정말이에요. 두 분 폐하께서 행복하면 좋겠어요.”
믿는다. 지금 리리우의 말이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는 아니다. 원래 리리우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일 뿐이다.
“……그렇지만 할아버님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어요. 죄송해요. 저도 이 이상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게요. 그러고 싶지 않아요.”
리리우는 흐느꼈다. 그러는 중에도 울음소리가 커진다 싶으면 그녀는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바깥으로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에르난은 비틀거리며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일단 억지로라도 리리우를 끌어낼까 싶었다. 하지만 소용없다.
벨류의 계획이라니. 아침이 밝으면 이미 궁정 전체에 소문이 퍼질 것이다.
최악이다. 그가 에르난을 이용해 뭔가 하리라는 예상은 했지만 이런 식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설마하니 이미 결혼한 왕에게 제 손녀를 던져줄 줄이야.
‘사크틸라에도 이 일은 순식간에 전해지겠지.’
브라간사가 중간에서 가로막고 정보를 차단하는 탓에, 에르난은 바르시나와 사크틸라의 상황을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예상은 해 볼 수 있다.
헤젤에서 사절을 파견한 시기에 비해, 사크틸라에서 온 답장은 꽤 늦은 편이었다. 그사이 큰 갈등이 있었으리라는 것쯤은 쉽게 짐작 가능했다.
왕의 뜬금없는 염문설이 전해지면 그 갈등은 더 깊어지고 만다.
문제는 두 나라의 갈등에만 있지 않다. 에르난에게는 더 치명적이고 끔찍한 일이 있다.
‘레이테…….’
아내는 소문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믿을까? 모른다. 하지만 그 소식은 아내를 가슴 아프게 할 것이다.
‘예민한 레이테는 크게 동요하겠지.’
헤젤의 노림수는 그 동요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에르난은 벨류와 브라간사의 사이를 갈라놓을 생각을 했다. 그들을 이용하려 했다.
그런데 정작 이용당하는 쪽은 에르난이었다.
‘어떡해야 하지.’
에르난은 이를 악물었다. 뭔가 해야만 하는데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조용한 가운데, 리리우의 훌쩍이는 소리만 드문드문 들렸다.
레이테가 좋다고 말하는 이 소녀는 적국의 공주다. 에르난은 잠시 망설이다 그녀를 불렀다.
“……전하.”
리리우가 고개를 들어 에르난을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저와 아내의 행복을 바란다면, 지금부터라도 제게 협조해 주십시오.”
협박으로 들릴 만큼 나직하고 서늘한 목소리에 리리우는 몸을 흠칫 떨었다.
“무리한 요구를 할 마음은 없습니다. 궁금한 것을 좀 알고 싶을 뿐입니다.”
“조, 좋아요. 말씀하세요.”
꽤 고민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리리우는 말을 더듬거리기는 했어도 금방 에르난의 제안을 수락했다.
에르난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무엇을 물어야 할까.
질문은 질문자의 관심사를 드러낸다. 따라서 묻기만 해도 에르난이 무엇에 주의를 기울이는지 알리는 셈이 되고 만다.
묻는다 해서 원하는 수준의 답변을 얻으리라 장담할 수도 없다. 리리우는 공주로서 대접은 받지만 권력은 없다. 더군다나 반년 가까이 왕궁을 떠났다지 않았나.
‘아, 그래.’
“벨류 왕께서 공주를 왕궁으로 부른 까닭은 저 때문입니까?”
“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어떻게 한 명뿐인 손녀를 이런 식으로 이용할 수 있습니까? 너무 가혹합니다.”
이런 질문을 당사자에게 하는 것 또한 가혹하다. 에르난은 리리우에게 미안해졌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든 벨류의 속셈을 더 파악하고 싶었다.
“그건……, 브라간사 때문일 거예요.”
에르난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브라간사에 대한 것도 물론 궁금했다. 차근차근 물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벌써 그의 이름을 들을 줄은 몰랐다.
“저는 어쩌면 브라간사와 결혼할지도 모르거든요.”
에르난이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103
“저와 브라간사의 결혼을 추진한 사람은 숙부님이었어요…….”
엔히크가? 에르난은 엔히크와 브라간사 모두를 알지만, 두 사람을 함께 만난 일은 없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어땠을까.
“공작은 아버지와 사이가 무척 좋았거든요. 그러니까 그 딸인 제게도 잘 해 주리라 생각한 것 같아요. 아마도.”
“벨류 왕께서는 내켜 하지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만.”
“네. 할아버지는 제가 외국 왕족과 결혼하기를 바라셨어요.”
바르시나의 왕자라거나. 에르난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 어쩌면 헤젤인 남편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브라간사만 아니면 될 뿐.
“하지만 숙부님은 제가 외국에 가지 않고 헤젤에서 지내는 편이 좋겠다고 하셨어요. 숙부 말이 맞는걸요. 외국에 여행은 가 보고 싶어도 아예 살기는 좀…….”
에르난은 엔히크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다.
레이테가 바르시나에서 겪은 고초가 적지 않다. 권력을 가진 여왕이 그러한데, 곱게만 자란 공주가 텃세를 견딜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문제는 곧 없는 일이 되었어요…….”
엔히크가 죽었으니까.
“부끄러운 일이지만, 헤젤에 온 지 몇 주는 되었는데도 아직 엔히크가 잠든 곳에 가 보지도 못했습니다.”
헤젤은 적국이고, 엔히크는 헤젤인이다. 하지만 에르난은 엔히크가 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레이테도 비슷하게 생각할 것이다.
포로가 되어 헤젤에 오면서, 에르난은 온통 적에 둘러싸여 지냈다. 긴장을 놓아서는 안 된다.
핑계나 다름없지만, 그래서 엔히크에게 신경 쓰지 못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지내며 조금 이상한 느낌은 받았습니다. 누구도 엔히크를 입에 담지 않더군요. 물론 좋은 일이 아니니 그러겠습니다만…….”
“아녜요. 잘 보셨어요. 숙부님 이야기를 싫어하거든요…… 그 사람.”
“브라간사입니까?”
리리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왕궁에서는 누구나 할아버지와 공작의 눈치를 봐요. 상황에 따라서 어느 한쪽의 편을 들거나, 또 바꾸기도 하고요.”
“지금은 왕의 편을 들 때인 모양입니다. 브라간사가 전쟁에서 승리해 돌아왔는데도.”
“네……. 그런 것 같아요.”
왕이 브라간사를 얼마나 심하게 견제하면 이런 상황이 될까.
바르시나라면 몰라도, 사크틸라에서는 절대 없을 일이다. 전쟁에서 이긴 군인이 왕의 외면을 받는 수모라니.
“제가 수도원에서 지내게 된 건, 그 혼담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기 때문이에요…….”
리리우의 말이 이어졌다.
“여름이 끝나갈 때쯤이었어요. 브라간사가 결혼 이야기를 꺼내더라고요. 숙부님이 제안할 때는 그도 별로 내켜 하지 않아 했는데.”
사촌 형제의 딸과 결혼할 마음이 드나? 에르난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실 왕족의 결혼에서 그 정도의 거리라면 아주 드문 경우도 아니기는 했다. 극단적으로는 조카와 결혼하려 한 탐브레도 있다.
그런 기형적인 결혼이 이뤄지는 이유는 모두 동일했다. 권력 때문이다.
‘브라간사는 왕관을 원하나?’
헤젤은 모계 계승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어머니가 헤젤 왕족인 브라간사가 왕위를 이을 일은 없다.
원칙이 그렇다. 하지만 후계가 없는 상황이라면, 왕의 손녀사위가 왕위를 주장하지 못할 만한 위치는 아닐 것이다.
사실 그 정도는 힘으로 어떻게든 뒤엎을 수 있지 않나. 더군다나 브라간사의 힘은 사람의 목숨을 직접 끊을 수 있는 군사력이다.
“공주에게는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생전의 엔히크가 간절히 원하는 일이었다……. 저는 더 들을 수가 없어 수도원에 가 버렸어요. 할아버지도 저를 안 막으셨고요.”
“어찌 보면 잘 가셨습니다. 계속 왕궁에 계셨으면 상황은 더 안 좋아졌을 테니까.”
가을부터 시작된 전쟁에서 브라간사는 승리했다. 브라간사의 결혼 요청에 힘이 더 실리기에 충분했다.
“네. 군대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조용히 지냈어요. 그런데 며칠 전, 왕궁으로 돌아오라는 할아버지의 명을 받았고……. 죄송합니다. 정말로……. 할아버지의 명령은 절대적이라 거부해서는 안 돼요.”
비교적 차분해져 있던 리리우는 다시 훌쩍이기 시작했다.
‘조카에게는 못 주지만 이미 결혼한 포로에게는 주겠다?’
에르난이 이혼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리리우의 처지는 고작 정부이지 않나. 물론 에르난은 이혼할 생각도, 정부를 들일 생각도 없었다.
그저 기가 막혔다. 어떻게 손녀를 이렇게나 함부로 대할 수 있지?
연회장에 다른 왕족이 보이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더군다나 할아버지의 명대로 하지 않으면 혹시…… 혹시라도 브라간사와……. 죄송해요. 그 사람은 무서워요. 전부터 그랬지만 숙부님이 떠나고 나서는 더……. 자기가 왕궁의 주인인 것처럼…….”
리리우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꼈다.
에르난은 긴 한숨을 쉬었다. 리리우는 거듭 사과를 반복하지만, 다른 행동은 하지 않는다. 이 방에서 나가려고도 하지 않는다.
단순히 벨류가 무서워서 하는 행동은 아니었다. 반복된 사과에는 그녀의 자발적인 선택에 대한 미안함도 있는 것이다. 브라간사를 피하고 싶으니까.
“……알겠습니다. 이만 처소로 돌아가십시오.”
“폐하, 제발……!”
“이런 말 드리고 싶지 않지만……. 배우자가 아닌 이상 날이 밝을 때까지 동침하는 일은 드뭅니다.”
“……아.”
끔찍했다. 염문이 돌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자신의 무력함이 싫었다. 공주에게도 이런 말은 들을 만한 것이 못 된다.
“제가 이 방에 들어온 순간, 공주와 왕께서 원하시는 목적은 달성했습니다. 그러니 이제 저를 쉬게 해 주시지요.”
에르난의 지친 얼굴을 본 리리우는 머뭇머뭇 일어섰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도울게요.”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마십시오.
에르난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리리우는 조용히 방을 나갔다.
“미안합니다, 레이테…….”
에르난은 침대 위에 누워 힘없이 중얼거렸다.
오늘 일이 불러일으킬 문제는 한둘이 아니겠지만, 가장 에르난을 아프게 하는 건 역시 아내였다.
오만하게도, 아내를 대신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던 때가 있었다.
생각은 변했다. 언제나 아내의 손을 잡고 함께하고 싶어졌다. 차근차근 그렇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에르난은 아내의 짐이 되어 버렸다.
* * *
헤젤에 갈 협상단은 여왕을 필두로 사크틸라와 바르시나 양국의 인물이 골고루 참여했다.
여왕은 아예 바르시나 본국에서 사람을 불러오기까지 했다. 사크틸라 여왕이 뭔데 바르시나인을 부르냐는 반발이 있었으나, 결국은 여왕이 요청한 인물 모두가 여왕의 명령을 따랐다.
프란세스크가 그들을 반쯤 납치했다는 말도 돌지만, 어쨌거나 바르시나인들은 자신의 의지로 사크틸라행을 택했다.
에르난을 되찾아야 한다는 목표는 동일하니까.
출발을 하루 앞두고, 바르시나 귀족 몇 명이 이스팔리스의 왕궁에 도착했다.
“날씨가 궂어 이제야 도착했습니다. 송구합니다, 폐하.”
못마땅한 부분이 많을 텐데도 바르시나인들의 말투는 꽤 진지했다. 레이테의 명령대로 하는 굴욕을 감수하고서라도 에르난을 되찾겠다는 의지다.
그 다음에는 사크틸라와의 관계를 끊으려 할지라도.
“괜찮습니다.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았어요.”
“의회의 결정 사항을 정리한 글입니다. 국왕 폐하의 석방을 위해 최대한 넉넉한 자금을 마련했습니다만, 사크틸라에서 도와주시리라 믿습니다.”
몸값을 깎는 데 협조해 달라는 뜻이다. 레이테는 고개를 끄덕이고, 코른 후작이 건네는 문서를 받아 들었다.
코른 후작. 에르난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그의 능력은 신뢰했다.
레이테는 에르난의 선택을 믿었다. 더군다나 코른은 아라고에서 헤젤의 사절단을 며칠 동안 농락하기도 했다.
그 경험으로 인해 삼국 회담에도 참석했다. 따라서 코른은 바르시나인 중 실질적인 협상에 가장 큰 기여를 할 것이다.
레이테는 코른이 건넨 것을 읽기 시작했다. 종이에 적힌 숫자를 본 레이테의 눈이 커졌다.
“……이걸 그대로 주면 헤젤은 바르시나를 만만하게 보겠지요.”
그리고 바르시나도 사크틸라를 만만히 볼 것이다. 큰소리 떵떵 치며 왕 행세를 했으면서 협상력은 보잘것없었노라고.
“헤젤인에게 바르시나는 무척 부유한 국가라는 인상이 있습니다.”
여왕에 이어 서류를 확인한 시스로네스가 말했다.
바르시나인들은 가벼운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헤젤도 알 건 아는군.
“좋아하실 때가 아닙니다. 그러니 헤젤은 작정하고 말도 안 되는 금액을 부르리라는 말씀을 드리려 했습니다. 왕국의 재정이 휘청거릴 정도로.”
“의회에서 준비한 금액도 이미 성 몇 개는 사고도 남을 수준입니다. 이것으로도 부족하다는 겁니까?”
코른이 물었다.
“물론이지요. 그러니 최선을 다해 봅시다.”
바르시나 귀족들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그들의 낯빛은 어두워져 있었다.
* * *
저녁 기도가 끝났지만 레이테는 처소에 돌아가지 않고 성당에 남았다. 오늘은 좀 더 오래 기도를 하고 싶었다.
내일 드디어 헤젤로 출발한다. 열흘 정도가 지나면 남편을 만날 수 있다. 거의 두 달 만이다.
탐브레 토벌 당시에도 레이테와 에르난은 두 달가량을 떨어져서 지냈다.
‘그때도 이렇게 힘들었나?’
모르겠다. 어쨌거나 두 달은 지독하게 긴 시간이었다.
상황이 나빠질수록 여왕이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버텨 왔다. 물론 그것도 마냥 성공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레이테는 두 나라 사람들을 모으고 협상 준비를 이끌었다. 흩어져서 제각기 부질없는 해결책을 찾던 이들은 이제 제법 함께 일하는 구색을 갖췄다.
“신이시여……. 당신의 아들 에르난이 무사하도록 당신께서 지켜 주소서.”
레이테는 작게 소리 내어 기도했다. 마음속으로 말할 수도 있지만, 그녀는 굳이 입 밖으로 말을 꺼냈다.
여왕은 사람들 앞에 의연함을 보여야 했다.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과하게 표출하면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감정적으로 동요하는 여왕은 그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다.
결국 순수하게 그리움만을 토로할 수 있는 시간은 기도할 때뿐이었다. 레이테는 이때만이라도 하고 싶은 말을 다 토해 내고 싶었기에, 언제나 직접 소리 내서 기도했다.
얼마나 기도를 했을까. 문득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벌써 시간이 다 되었나?’
시녀들은 레이테가 기도할 동안 그녀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잠을 자야 할 때가 되면 레이테를 불러 침실로 데려갔다.
레이테는 눈을 뜨고 앉은 몸을 일으켰다. 뒤를 돌아보니 카테리나가 와 있었다.
“폐하, 헤젤에 파견된 첩자의 보고서가 왔어요.”
“아, 출발 전까지는 뭐라도 한 번 더 보고하라 했더니, 적절한 때에 왔군요.”
카테리나는 레이테에게 편지를 건넸다. 편지의 봉인은 뜯겨 있었다. 이런 글은 여왕에게 오기 전에 왕명 대리인인 시스로네스가 먼저 확인하기 때문이다.
“무슨 일 있나요? 표정이 좋지 않군요.”
“그게……. 좀 이상한 뜬소문이에요. 그러니 너무 마음 쓰지 마셔야…… 해요.”
카테리나의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에 레이테는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깨달았다. 레이테는 조금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펼쳤다.
편지는 부쩍 활발해진 헤젤의 항구에 대한 보고로 시작했다. 에르난의 패배 이후, 사크틸라도 바르시나도 정상적으로 해상 감시를 할 수 없으니 당연한 현상이었다.
이어지는 소식은 수도원에서 지내던 리리우 공주의 귀환이었다. 리리우가 어느 남자와 밤을 보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런 것까지 적어 보낼 필요는……, 아.’
그 남자는 레이테가 조금 전까지 간절히 신에게 안전을 기원하던 자의 이름을 가졌다.
* * *
단장을 마친 레이테는 밖으로 나왔다. 귀족과 기사들이 그녀에게 인사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드디어 헤젤로 떠난다는 기대감과 흥분이 궁정에 감돌았다. 그러나 오늘은 칙칙한 하늘만큼이나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말에 오른 레이테가 고삐를 당겼다. 그것을 신호로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내를 벗어나자, 레이테의 근처에 있던 프란세스크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에르난을 구하러 가는 게 옳은 일이냐는 말이 다시 나옵니다. 그 소식이…… 벌써 다 알려졌더군요. 잘 아시겠지만 이런 소문은 전형적인 간계입니다. 폐하께서 넘어가시면, 모두가 넘어갑니다.”
프란세스크의 말이 옳다. 레이테는 소문에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믿고 싶지 않으니까. 거짓이어야만 하니까.
레이테는 주먹 쥔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두들겼다. 답답함이 해소되기는커녕, 오히려 숨이 더 막혀 왔다.?
#104
브라간사는 자신의 정을 뒤집어쓴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만족스러운 미소가 입에 걸린 시간은 짧았다. 그는 금방 질려 버렸다.
브라간사는 몸을 일으켰다. 그의 밑에 깔려 있던 여자는 브라간사의 시큰둥한 얼굴을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공주랑 하고 싶었어요?”
브라간사의 인상이 팍 구겨졌다.
“헛소리할 거면 나가.”
여자는 브라간사의 성기를 손에 쥐고 능숙한 손길로 만졌다. 조금 전까지 난폭하게 여자를 취했던 것이 다시 단단해졌다.
그녀는 창부가 아니었다. 국왕의 시종인 백작의 아내였다.
“진심으로 내가 그 꼬마를 원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물론이죠.”
여자는 짧게 답하고 혀끝으로 성기를 할짝거렸다. 브라간사는 여자의 뒤통수를 잡고 그녀의 입 안으로 거칠게 성기를 밀어 넣었다.
여자는 날이 밝아오려 하자 벌떡 일어나 도망치듯 나가 버렸다. 왕궁에서 밤새 근무한 남편보다 먼저 집에 돌아가야 한다는 이유였다.
혼자 남은 브라간사는 침대에 누워 멍한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최근 잔뜩 쌓인 짜증을 풀 데가 없어, 오래간만에 난잡한 정사를 즐기며 머릿속을 비웠다.
상대는 이전에 함께 방탕하게 놀던 여자였다. 처음 몸을 섞을 때는 수도원에서 갓 세속으로 나온 아가씨였는데 지금은 백작 부인이 되었다.
즉, 브라간사는 또 남의 여자를 취했다.
‘뭐 어때.’
궁정은 소문이 빨리 퍼진다. 하지만 그의 취향은 어차피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브라간사에게 대놓고 뭐라 할 사람도 이제는 없다. 사촌이 건전한 생활을 하길 바라던 잔소리꾼 형제는 모두 사라졌으니까.
벨류 왕도 브라간사의 취미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다. 하지만 그 문제로 브라간사를 직접 꾸짖는 일은 없었다.
그럴 법도 했다. 왕도 다를 바 없는 인간 같으니까. 배우자가 있는 남자와 밤을 보내라며 손녀를 침실에 밀어 넣지 않았나.
브라간사는 벌떡 일어났다. 겨우 잠재운 분노가 도로 치솟았다.
‘빌어먹을.’
브라간사는 협탁 위에 놓인 술병을 집어 들어 벽으로 던졌다. 벽에 부딪힌 유리병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붉은 포도주가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에 묻었다. 정복활동으로 이름이 높았던 황제가 가족과 잠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장면을 묘사한 태피스트리였다.
저것은 브라간사가 고향 저택에서 가져온 물건 중 하나였다. 따뜻한 겨울을 보내라면서 선대 사크틸라 왕, 알레한드로가 보낸 선물이었다.
‘하필 이걸 더럽히다니.’
사크틸라 왕. 브라간사는 한때 그 존재를 동경했다. 너그럽게 베풀 줄 알고 사려도 깊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런 꿈과 같던 존재가 현실, 아니 현실인 척하는 신기루로 변한 것은 브라간사가 열두 살 때의 일이었다.
* * *
오랜만에 사크틸라에서 손님이 찾아왔다. 수도사 차림을 한 젊은 사제였다.
로렌소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원래 아버지는 온 가족을 불러 사크틸라 손님을 맞이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손님과 단둘이 이야기하겠다며 아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아버지, 브라간사 공작 하이메는 부쩍 건강이 나빠진 상태였다. 몸이 아프면 여러 사람과 한 공간에 있을 수 없나?
의아해하던 로렌소는 결국 몰래 하이메와 손님의 대화를 엿듣고 말았다.
“거절하겠네.”
단호하고 진지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죽어가는 사람이 뭐가 탐나 왕위에 오른단 말인가?”
그때 로렌소는 죽어간다는 말보다 왕위라는 단어에 귀가 솔깃했다. 열두 살의 나이는 죽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에 아직 어렸다.
“내 아내가 헤젤 왕의 누이이니 평화가 올 것이라고? 신부, 우리 부부는 벨류 왕을 잘 안다네. 그를 믿지 말게나. 사크틸라를 잡아먹으려고 혈안이 된 자야.”
“하지만 왕좌를 비워둘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안타깝게도 지금 폐하께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왕좌를 비우기는 무슨. 알레한드로에게는 딸이 있지 않나.”
“공주는……, 아직 너무 어립니다.”
“무슨 소리! 레이테야말로 정당한 사크틸라의 군주가 되어야 하네. 그게 질서야.”
사제는 자꾸 하이메에게 왕위를 권했고, 하이메는 거듭 제안을 거절했다.
두 사람의 대화에 계속 등장하는 이름이 있었다. 레이테였다. 로렌소는 곧 레이테에 대한 몇 가지를 알 수 있었다.
두 살짜리 공주 레이테는 알레한드로의 딸이라서 왕이 될 자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세상에는 여자 왕도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로렌소는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런데 레이테가 왕자가 아니기 때문에, 사크틸라가 혼란스럽다는 모양이다.
하이메는 계속 레이테가 왕이 되어야 한다 말했다. 그러나 사제는 레이테가 왕이 되면 반역이 일어날 것이며, 결국 레이테도 죽게 된다고 했다.
같은 이야기만 자꾸 반복되자 로렌소는 지겨워졌다. 그리고 계속 듣다 보니, 아버지가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로렌소는 숨어 있던 커튼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말했다.
“그냥 받아들이세요. 레이테가 죽는다잖아요. 아버지도 왕족이니 왕이 될 수 있지 않나요? 그러면 저는 왕자가 되겠지요. 왕자가 있으면 사크틸라의 혼란도 해결되는 게 아닌가요?”
“로렌소!”
깜짝 놀란 하이메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제도 당황한 얼굴로 로렌소를 바라보았다.
하이메는 갑자기 일어나 머리가 어지러운 모양이었다. 그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러더니 하이메는 갑자기 바닥으로 쓰러졌다.
“아버지!”
로렌소는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 * *
그날이 하이메가 두 다리로 섰던 마지막 날이었다. 한때 사크틸라 최고의 용병대장으로서 전장을 지배했다던 남자는 이제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하루하루 죽음에 가까워져 가는 아버지를 보며, 로렌소는 이제 죽음이 무엇인지 조금씩 느끼게 되었다.
“오늘 사크틸라에서 편지가 왔단다.”
온종일 멍하게 자다 깨기를 반복하던 하이메는 침실에 자신과 아들만 남은 것을 확인하고 말을 꺼냈다.
“레이테 공주가 왕위계승자로 임명되었다는구나. 이제 겨우 두 살인데,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지.”
“그런가요.”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네게 하는 줄 아느냐? 그것도 단둘이 있을 때?”
“…….”
하이메가 쓰러지는 바람에, 로렌소가 들었던 아버지와 사제의 대화는 흐지부지된 것 같았다. 사제는 사크틸라로 돌아갔고, 다시 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의 대화는 로렌소의 머릿속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상하게도 지워지지 않았다.
“네 어머니가 말하더구나. 로렌소가 갑자기 부모의 가문에 호기심을 가지고, 또 여왕이라는 존재에도 관심을 보인다고. 며칠 전에는 헤젤에는 왜 여왕이 없냐고 질문했다지?”
“……네.”
어쩐지 분위기가 이상해서, 로렌소는 고개를 푹 숙였다.
헤젤은 사크틸라와 달리 여자는 왕이 될 수 없다고 법으로 정해 두었다. 어머니에게 들은 답변은 이랬다.
“아, 질문을 했다고 꾸짖으려는 건 아니다. 궁금한 건 해소해야 좋지. 다만 걱정이 된단다.”
하이메는 팔을 뻗어 아들을 토닥여 주었다.
“너는 내게 왕위를 받아들이라고 했지. 그건 말이다. 자칫하면 반역죄가 될 수도 있는 무서운 말이란다. 앞으로도 함부로 말하지 말거라.”
아버지의 손길은 따스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무척 엄격했다.
“그날 내가 만났던 사제는 어린아이의 말에 신경 쓰지 않는다며 별일 아닌 것으로 넘기더구나.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 너는 내 아들이니까. 자, 그 문제에 대해 할 말이 더 있다면 해 보려무나.”
잠시 생각하던 로렌소가 말했다.
“알레한드로 국왕 폐하는 좋은 분이세요. 아버지랑 어머니도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저는 아버지도 왕이 되면 멋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이메는 피식 웃었다. 어린아이의 순진한 생각이 귀엽기 그지없었다. 그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곧 그의 표정은 점점 굳어 갔다.
“더군다나 전에 왔던 사제가 말했잖아요. 레이테가 죽을 수도 있다고. 아버지가 왕이 되면 사크틸라에는 왕자가 생기니까 레이테에게도 좋은 일 아닌가요? 그리고 사크틸라가 혼란스럽지 않으려면 공주보다 왕자가 필요하다는 것 같았는걸요.”
“……그런 말은 절대 바깥에서 하지 말거라. 확실히 말하마. 우리는 왕이 될 수 없단다.”
“이유를 모르겠어요. 아버지도 어머니도 왕족인데 왜 왕이 될 수 없나요?”
로렌소는 이것이 제일 궁금했다.
“그건 지금 설명하기에 좀 복잡하구나. 하지만 너도 금방 알게 될 거다. 간단히 말하자면 법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지. 일단 지금은 하나만 기억하려무나.”
“……말씀하세요.”
로렌소는 조금 퉁명스럽게 아버지에게 대꾸했다. 그는 기분이 조금 상했다. 아버지는 자신을 너무 어린애취급 하는 것 같다.
하이메는 그를 닮은 아들의 보랏빛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헛된 욕심을 품지 말거라.”
하이메의 진지한 얼굴에, 로렌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답했다.
하지만 의문은 계속 남아 있었다. 아버지는 왜 아들의 생각이 헛된 것인지, 제대로 알려 주지 않았다.
‘헛된 욕심이라…….’
다시 생각해 봐도 모르겠다. 왜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을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는 아들, 새 브라간사 공작을 데리고 왕도 리스보아로 와서 왕을 만나게 했다. 브라간사는 왕궁에서 사촌인 왕자들과 함께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는 처음부터 벨류 왕을 싫어했다. 어머니가 동생인 왕의 발밑에 엎드려 조카를 받아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을 봤는데, 좋아할 수가 없었다. 왕은 과거에 어머니와 크게 싸웠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는 왕에게 외면당했다.
브라간사의 왕궁 생활은 왕의 눈치를 보면서 시작했다.
공부를 하고, 사람을 사귀고, 정쟁에 뛰어들었다. 유명한 용병대장이었던 아버지를 닮아 보고 싶은 마음에 군인의 길을 걷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브라간사는 깨달았다.
아버지는 법을 따르라 했지만, 그 법은 힘으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힘만 있다면, 무엇을 꿈꾸든 그것은 헛된 욕심이 아니었다. 실현할 수 있으니까.
* * *
문제의 밤 이후, 에르난은 거의 방에 틀어박혀 지냈다. 답답함을 느낀 몸이 근질거릴 때면 창밖을 보며 넓은 바다로 나가는 상상을 했다.
매일같이 오던 브라간사의 초대도 더 이상은 없었다. 물론 에르난도 갈 생각이 없었다.
에르난처럼 브라간사 역시 벨류에게 이용당했다. 에르난보다 더 치욕스러운 형태로.
방에서 에르난이 할 일이라고는 독서뿐이었다. 성서는 읽지 않았으나, 다른 책은 주어지는 대로 무작정 읽었다. 시종이 도서관에서 대충 뽑아온 책이었다.
헤젤어는 읽기 힘들었지만, 공부를 한다는 마음으로 집중했다.
“잘 지내셨습니까, 폐하.”
그런데 브라간사가 에르난의 방에 찾아왔다.
웬일이지? 에르난은 읽던 책을 내려놓았다.
<가장 쉬운 바르시나어 입문>
브라간사의 시선이 책에 닿자, 에르난은 어깨를 으쓱이고 말했다.
“시종에게 아무 책이나 가져오라 했더니, 헤젤어로 써진 바르시나어 교본을 가져왔지 뭔가. 아무래도 내 헤젤어 실력이 많이 답답했던 모양이지.”
농담조로 말하긴 했으나, 이 책을 처음 받았을 때 에르난은 그대로 시종에게 책을 던질 뻔했다. 시종이든 도서관의 사서든 에르난을 조롱하려 작정한 것이 틀림없었다.
당황한 모습을 보여 그들을 즐겁게 해 주고 싶지 않아서 보란 듯이 책을 읽었다. 사실 읽어 보니 재미가 없지는 않았다.
“조신하게 계심은 바람직합니다만.”
브라간사는 차갑게 웃었다.
조신이라니. 우스운 말이었다. 하지만 틀리지도 않았다. 오해를 살 여지를 없애기 위해, 에르난은 이런 식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으니까.
“오늘은 저와 함께 나가셔야겠습니다. 폐하의 부인께서 오시거든요.”?
#105
에르난과 브라간사가 함께 알현실로 들어오자, 귀족들은 흥미롭다는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특히 브라간사를 보는 시선이 노골적이었다.
애처가라는 소문이 자자한 남자가 애인을 따로 만드는 것쯤이야 위선자라고 손가락질받기는 하겠으나 드문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남의 여자를 뺏으며 재미를 보던 남자가 반대로 자신의 여자를 뺏긴 일은 계속해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리리우는 브라간사와 결혼하지 않았다. 그러나 브라간사의 태도로 보아 결혼이 시간문제라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리리우의 의사가 어떻든 간에.
덕택에 사람들은 지금 상황을 더 재미있게 여겼다.
“어서 오시오, 에르난. 몸이 좋지 않아 계속 처소에만 머문다고 들었는데, 좀 어떻소?”
화려한 덮개로 장식한 단상 위의 왕좌에 벨류 왕이 이미 와 앉아 있었다.
“괜찮습니다.”
“로렌소가 그대에게 신경을 많이 써 준다기에, 시종 대신 그를 보냈소. 아무래도 그편이 왕께서도 더 편하지 않겠소?”
벨류는 흐뭇한 양 웃음 지었다.
‘고작 알현실에 가자고 부르는 데에 공작을 보내다니 무슨 속셈인가 싶었더니. 망신을 주려고 작정을 했군.’
브라간사는 화가 단단히 났겠지만, 에르난에게도 벨류에게도 감정을 분출할 수 없다. 둘 다 왕이니까.
벨류의 미소를 보니, 그는 지금 상황을 꽤나 즐기는 듯했다.
에르난의 자리는 왕좌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에르난이 의자에 앉자, 브라간사가 그의 뒤에 섰다.
마치 시종처럼.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폐하.”
몸을 살짝 굽힌 브라간사가 에르난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립니다만, 원활한 협상을 원하신다면 돌발적인 행동은 없어야 할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 죽이겠다는 양 살벌한 위협이었다.
에르난은 두렵지 않았다. 그의 귓가에 전해지는 속삭임에서는 떨림이 뚜렷했다. 에르난을 협박하는 척하지만, 실상 브라간사는 자신의 분노를 갈무리하기에도 버거운 듯했다.
물론 에르난도 긴장은 된다. 브라간사가 아닌 아내 때문이다.
두 달 만에 레이테를 만난다.
며칠 전, 여왕이 직접 협상단을 이끌고 헤젤에 온다는 소식을 받은 에르난은 진심으로 놀랐다.
생각보다 빨리, 이런 식으로 아내와 재회할 줄은 몰랐다.
아내는 깜짝 놀라도록 과감하게 행동할 때가 종종 있었다. 가장 가슴 졸였던 일은 미노리카에서 헤젤의 배에 오르려 했던 때였다.
지금은 그보다 더 위험한 도박일 것이다.
“사크틸라의 레이테 여왕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문지기가 우렁차게 외쳤다. 헤젤 귀족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철컹. 철컹.
금속판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갑옷을 입은 남자가 한 무리의 사람들을 이끌고 들어왔다. 아니, 갑옷은 입었으나 남자가 아니었다.
갑옷만으로는 성별을 구별할 수 없다. 투구를 써서 얼굴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저것을 입은 사람은 틀림없이 여자다.
사크틸라의 여왕, 에르난의 아내, 레이테.
그녀는 올해 초, 남편에게 선물 받은 갑옷을 입었다.
갑옷의 세밀한 장식, 겉옷에 수 놓인 사크틸라의 문장, 느슨하게 두른 망토의 무늬까지 모두가 금빛으로 빛났다.
투구에 덮여 있어 레이테가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에르난은 어쩐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으니까.
‘레이테!’
에르난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자 브라간사의 손이 거칠게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 손길을 뿌리치려던 에르난은 이내 참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여왕이 벨류의 앞에 섰다. 그녀는 천천히 팔을 들어 투구를 벗었다. 헤어네트가 투구에 걸려 함께 벗겨졌다. 긴 은발이 부드럽게 찰랑거리며 매끄럽게 윤이 나는 갑옷을 덮었다.
여왕은 왕좌에 앉은 벨류를 올려다보았다. 주눅 든 모습은 조금도 없었다.
에르난은 오만할 만큼 당당하게 빛나는 아내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벨류도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놀란 눈으로 레이테를 보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제가 사크틸라의 여왕, 레이테입니다.”
오랜만에 듣는 아내의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힘이 느껴졌다. 하얀 얼굴에 엷게 띤 미소는 우아함이 넘쳤다.
“……아, 이런 모습으로 오실 줄은 몰랐소. 과연 사크틸라의 왕다우시구려. 알레한드로 생각이 나기도 하고.”
브라간사가 몸을 흠칫거렸다. 그가 여전히 에르난을 붙잡고 있었기에, 에르난은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벨류는 왕좌에서 일어나 레이테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레이테의 손을 쥐고 가볍게 입을 대는 시늉을 했다. 레이테의 손은 쇠로 만든 장갑에 덮여 있었다.
“남편과는 오래간만의 재회이지 않소?”
벨류가 말하며 에르난을 돌아보았다. 그때서야 레이테도 에르난을 향해 몸을 틀었다.
천천히, 부부의 시선이 점점 마주 닿았다.
또렷하게 반짝이던 눈이 확연한 동요로 떨렸다. 두 사람 모두 그랬다. 에르난은 갑자기 울 것처럼 변해 버린 레이테를 보며 당황했으나, 이는 레이테 또한 마찬가지였다.
브라간사가 어떻게 하든, 에르난은 일어나 아내와 인사할 생각이었다. 이번에는 막을 생각이 없는 듯, 브라간사는 에르난을 붙잡은 손을 놓았다. 에르난은 아내에게 다가갔다.
“부인.”
레이테는 조금 엉거주춤한 동작으로 장갑을 벗었다. 맨살을 드러낸 손은 손등을 보이는 대신 옆으로 세워져 남편에게 내밀어졌다.
‘아, 그랬지.’
무심코 흰 살결에 입을 맞출 생각을 하던 에르난은 손을 마주 잡고 악수했다.
아무것도 쥐지 않은 손이면 될 뿐, 굳이 악수를 하면서 장갑까지 벗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맨손을 잡으니 온기와 단단한 의지가 확연하게 전해져 온다.
에르난은 온갖 감정이 울컥 치솟아 오름을 느꼈다.
“보고 싶…….”
에르난은 심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아내에게 말을 건네려 했다. 그러나 벨류의 목소리가 에르난의 말을 끊어 버렸다.
“여왕께서 의욕이 넘치시니.”
두 사람의 인사는 거기까지, 더 이상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야박하게 말 한마디 못 나누게 하는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회의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소만.”
보랏빛 눈이 흔들림을 딱 멈췄다. 레이테는 아주 천천히 벨류에게로 눈길을 옮겼다. 남편을 시야에서 떠나보내기 아까운 것처럼.
“에르난 왕께서는 이만 쉬시오.”
벨류가 말했다. 에르난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포로 협상의 당사자다. 협상 자리에 앉을 수 없으리라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대놓고 배척하는 말을 들으니 분노가 솟았다.
에르난의 그런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기를 벨류는 원할 터다.
“로렌소, 왕을 다시 처소로 안내해 드리거라.”
또한 브라간사에게도.
“……예. 가시지요, 폐하.”
브라간사의 어조는 침착했으나, 에르난은 그 안에 꾹꾹 눌러 담았을 감정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알현실 밖으로 나가면서, 에르난은 그때야 레이테와 함께 온 다른 인물들을 확인했다.
붉은 옷을 입은 시스로네스가 제일 눈에 띄었다. 추기경이야 당연히 올 줄 알았다.
바르시나인이 생각보다 많이 보였다. 그중에는 코른같이 본국에서 왔을 강경한 귀족들도 있었다. 어떻게 저들을 이곳까지 오게 했을까? 에르난은 놀랐다.
아내보다 더 오랜만에 만나는 프란세스크도 있었다. 에르난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조금 서글픈 듯한 미소를 지으며 묵례했다.
카테리나가 있고, 그녀를 지키듯 세르지가 옆에 섰다. 그가 착용한 황금 양모 목걸이가 에르난의 시선을 끌었다. 세르지 외에도 기사단원은 몇 명 더 보였다.
‘기사단은 끝장났을 줄 알았는데.’
막연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황금 양은 아직 산 사람의 가슴에서 고고하게 빛난다.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러나 의지를 공유할 산 사람도 아직 이렇게 남아 있다.
* * *
시종의 안내를 받아 회의실로 이동하는 내내, 레이테는 자신이 어떻게 걷는지도 몰랐다.
‘에르난……!’
남편은 꽤 수척해져 있었다. 포로인 주제에 화려한 생활을 즐기고 또 다른 여자까지 만들었다는 소문이 도는 남자에게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레이테는 마냥 안도할 수 없었다.
에르난이 잘 대접받고 지낸 것은 사실일 것이다. 첩자의 보고서에도 이미 여러 번 언급되었다.
그럼에도 저런 모습이라니.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레이테는 눈을 깜박이며 억지로 참았다.
정말로 냉철해져야 하는 자리에 가고 있으므로.
철컹. 철컹.
갑옷이 움직이며 금속판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어색하게 들렸다. 몇 번이나 입으며 걷는 연습을 했으나, 레이테는 이 소리가 여전히 남의 것 같았다.
떠날 채비를 하면서, 레이테는 갑옷을 챙기도록 지시했다. 영문을 몰라 눈만 깜박이는 카테리나에게, 레이테는 웃으며 말했다.
“적지 한가운데에 가는 거니 방어구를 입어야지요.”
벨류 왕은 에르난을 완전히 풀어주기 전까지, 즉 만족할 만한 대가를 받기 전까지는 부부의 만남조차 통제하려 들 것이다. 실제로 방금 전에도 그랬다.
하지만 남편이 선물한 갑옷을 입고 있으면 그가 자신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건 에르난과 함께한다는 선언이야.’
익숙하지 않아서 조금 답답하고 불편하긴 하지만.
회의실에는 긴 탁자의 양쪽에 의자가 줄줄이 놓여 있었다.
레이테는 안쪽 자리로 안내되었다. 난로의 열기가 가장 잘 전달되어 한겨울에도 춥지 않을, 무척 따뜻한 자리였다.
갑옷을 입고 있어 더워진다는 것이 문제지만.
레이테는 작게 한숨을 쉬며 망토로 난로가 있는 방향인 왼쪽 몸을 덮었다. 갑옷의 금속판은 직접 열을 받으면 감당할 수 없이 뜨거워져 천으로 덮어야 한다.
사크틸라와 바르시나가 함께 앉고, 맞은편은 헤젤의 자리다. 이미 몇몇 헤젤인이 앉아 있었으나, 빈자리가 제법 보였다. 벨류도 아직 오지 않았다.
“여왕 폐하를 기다리게 하다니…….”
팀파노가 조소했다.
그는 출발 직전까지 자택에 연금되어 있었으나, 헤젤을 잘 아는 인물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여왕과 동행하게 되었다. 시스로네스는 팀파노를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또한 그를 협상단에 포함시키자는 제안도 했다.
궁으로 돌아온 날, 팀파노는 다시 레이테의 앞에 무릎을 꿇고 사과했다. 하지만 아직 프란세스크와는 어색한 모양이고, 삐딱해진 모습 또한 여전하다.
빈자리가 하나둘씩 채워지고, 마지막으로 브라간사를 대동한 벨류가 나타났다.
레이테는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브라간사를 바라보았다. 그는 무언가 여유가 없어 보였다.
‘에르난은 돌아갔을까…….’
그는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까?
그 순간, 레이테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순식간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사실이라 믿고 싶지 않은 소문의 또 다른 주인공. 리리우.
‘알현실에는 없었지.’
회담장에도 리리우를 들이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이는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혹시 에르난과 함께 시간을 보내나?
‘……아냐.’
괜한 잡생각이다. 억측이다. 에르난을 믿어야지.
여태 마음을 비교적 잘 갈무리해 왔으면서 흔들리면 곤란했다. 레이테는 심호흡을 하며 불안에 쓰려 오는 가슴을 진정하려 애썼다.
“헤젤까지 와 주신 여왕 폐하, 그리고 사크틸라와 바르시나의 사절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벨류와 가까운 곳에 앉은 헤젤 귀족이 말했다.
“전쟁으로 인해 헤젤이 입은 직접적인 병력과 시설 피해. 전쟁을 준비하며 타격받은 국내 경제에 대한 보상. 전쟁 재발 방지를 위한 평화유지비. 그리고 에르난 폐하를 모시는 데에 든 비용 등을 종합하여…….”
잡다한 말없이 곧바로 돈 이야기부터 꺼낸다. 레이테로서도 이러는 쪽이 편했다.
‘얼마나 요구하려나.’
바르시나가 준비한 액수는 꽤 파격적이었다. 여기에 사크틸라도 돈을 보탰더니, 150만 두카도라는 거액이 모였다.
“……560만 두카도를 청구합니다.”
‘뭐?’
레이테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사크틸라 한 해 예산의 삼분의 일 정도는 될 것이다. 말도 안 되는 비현실적인 금액이었다.
“이런 미친…….”
다른 이들 또한 어안이 벙벙해진 가운데, 코른 후작이 바르시나어로 욕설을 내뱉었다.?
#106
첫 협상이 끝나고, 사크틸라와 바르시나 사람들은 영빈관의 회의실에 따로 모였다. 넋이 나간 얼굴의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 앉자마자, 코른이 버럭 외쳤다.
“미친놈들! 지옥에나 가 버려라!”
그는 사크틸라어로 말했다. 코른이 사크틸라에 우호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사크틸라인에게도 잘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사크틸라인들은 그의 말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테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현생의 즐거움에 모든 것을 바치며 사는 듯한 바르시나인이 사후 세계인 지옥 운운이라니.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겠다.
물론 그럴 만도 한 상황이었다.
헤젤은 터무니없이 높은 액수를 제시한 뒤, 친절하게도 구체적인 내역을 일일이 밝혔다. 별별 것이 다 나왔다. 심지어 에르난의 식사와 의복 비용, 시종의 봉급까지 청구했다.
“내 조카, 로렌소가 특히 에르난 왕을 살뜰히 챙겨주었다오. 왕께서 따분하지 않게 매일 연회를 베풀고 각종 여가를 함께했지. 하지만 그 금액은 포함되어 있지 않소. 순수한 호의로 대접했기 때문에, 자신의 돈으로 처리하겠다는구려.”
벨류는 대단한 선심이라도 쓰는 양 말하기까지 하며 레이테의 속을 긁었다.
“선왕 폐하 시절에 사크틸라가 헤젤에게 받은 배상금도 이보다는 적었습니다. 그 전쟁은 수년 동안 이어지면서 사크틸라 남부를 황폐하게 했었지요. 아시다시피 이번 전쟁의 기간은 한 달이 조금 넘습니다.”
시스로네스가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합니다. 사크틸라는 벨류 왕을 포로로 잡아 본 일이 없는지라.”
결국 일이 이 지경이 된 결정적인 이유는 에르난이 포로가 되어서다.
한 나라, 아니 엄밀히 따지면 두 나라의 주인인 남자를 가볍게 풀어줄 리 없다.
그렇다고 에르난을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헤젤은 이 상황을 너무나 잘 안다. 이번 기회에 작정하고 두 나라를 흔들어 놓으려는 것이다.
“일단 엔히크 왕자와 관련한 보상금부터 최대한 줄입시다……, 아니, 가능한 한 아예 없애야 합니다.”
전쟁은 엔히크의 죽음을 명분으로 일어났다. 승리한 헤젤은 당연하다는 듯 엔히크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다.
이것을 내면 정말로 그의 죽음은 사크틸라의 책임이 되고 만다.
엔히크는 자기가 죽어서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는 걸 알면 어떻게 생각할까.
“그리고 또……, 후우…….”
시스로네스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상상을 초월한 요구에 그 또한 냉정한 판단이 힘든 듯했다.
“당장 오늘 밤 연회를 치르는 데 드는 돈까지 청구하는 건 아닐까 모르겠습니다.”
팀파노가 빈정거렸다. 사크틸라, 바르시나 가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많았다.
“일이 쉽게 진행되지 않으리라고는 모두 예상하지 않았나요. 일단 오늘은 쉬고…… 아니, 조금 이따 연회장에서 만나도록 해요.”
레이테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갑옷을 벗은 여왕은 가벼운 드레스 차림이었다. 하지만 갑옷을 입었을 때보다 더 몸이 무거웠다.
“내일 이어질 두 번째 협상에서는 추기경의 말씀대로 엔히크와 관련된 사항을 공략하도록 하지요. 차근차근 진행해야 할 것 같네요.”
* * *
레이테는 처소로 돌아와 연회에 갈 준비를 했다.
이런 자리야 당연히 있기 마련이므로, 시녀들은 만반의 준비를 해 두었다. 갑옷을 입고 벨류와 처음 마주했을 때 보였던 당당함처럼 여왕을 빛나게 해야 한다.
하얀 피부를 깔끔하게 다듬고, 눈가와 뺨에 옅은 장밋빛을 더했다. 입술은 그보다 조금 진한 색으로 붉게 물들였다. 긴 속눈썹은 우아하게 말아 올렸다.
시녀들은 한참 동안 레이테의 머리카락을 빗었다. 향유를 조금씩 발라 가며 정돈한 머리카락은 보기 좋은 윤기가 흘렀다. 일부는 느슨하게 땋아 올려 기품을 더했다.
머리를 장식할 물건은 단 하나로 충분했다. 사크틸라의 왕관.
드레스의 푸른 빛깔은 청금석이라도 녹인 듯 아름다웠다. 이 색은 레이테의 은발과 잘 어울리는 데다, 하늘의 여왕으로 불리는 성모를 상징하며 여성의 고귀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옷의 색깔은 경건함을 상징하지만, 그 형태는 바르시나의 세속적인 유행에 따랐다.
소매를 반으로 갈라 안에 입은 하얀 슈미즈를 보이게 한다. 군데군데 사슬로 팔을 조여 봉긋한 선을 만들었으며 사슬에는 보석을 박아 화려함을 더했다. 소매 끝에는 레이스를 달았다.
가슴도 시원하게 파 하얀 피부를 과감하게 드러냈다. 그 위로 에르난에게 결혼 선물로 받은 목걸이를 걸었다. 보석을 워낙 많이 쓴 것이기에, 밤의 연회장을 환하게 밝히는 조명을 받으면 눈이 부시도록 반짝일 것이다.
목뿐만 아니라 귀와 손가락에서도 루비와 다이아몬드 등이 빛났다. 허리에 느슨하게 두른 벨트도 보석을 엮어 만들었다.
최근 이렇게 많은 보석을 한꺼번에 착용한 일이 없다 보니, 몸이 무겁다는 생각이 살짝 들 정도였다.
준비를 마친 레이테는 프란세스크의 에스코트를 받아 연회장으로 갔다.
먼저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여왕에게로 향했다. 헤젤 귀족 여성들은 여왕의 화려함에 기가 질린 듯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왕 폐하. 과연 남편께서 한눈에 반할 만하오.”
벨류가 다가와 인사하고 레이테를 자리로 안내했다. 레이테는 그의 손을 잡고 먼저 온 에르난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에르난이 입은 짙은 갈색 옷은 아내에 비하면 간소해 보였다. 그가 공식 석상에서 즐겨 착용하던 황금 양모 기사단의 목걸이도 보이지 않았다. 왕관은 물론 없었다.
레이테가 가까이 다가오자 에르난은 자리에서 일어나 모자를 벗었다. 레이테는 그에게 손을 내밀려 했고, 에르난은 그 손을 잡으려 했다.
“자, 이쪽에 앉으시오.”
하지만 벨류는 에르난을 지나쳐 자신의 옆자리로 레이테를 안내했다. 벨류를 중앙에 두고 레이테와 에르난이 좌우에 앉는 형태가 되었다.
‘우리가 부부라는 걸 온 세상이 다 아는데 같이 앉는 것조차 허용 못 한다니…….’
하지만 레이테는 따질 수 없었다. 벨류가 승자이기 때문에.
손을 잡지 못한 부부는 눈길만 서로 교환했다. 홀린 듯 아내를 바라보던 에르난의 눈빛은 이제 서글프게 변했다.
레이테는 자리에 앉을 때까지 남편을 향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세 나라의 왕이 한데 모인 경사스러운 자리이니, 즐거운 시간들 보내시길.”
벨류는 그의 좌우에 앉은 부부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의 말과 달리, 연회장은 즐거운 분위기와 거리가 멀었다. 상대에게 지지 않겠다는 듯 모든 사람이 한껏 멋을 냈으나, 자기들끼리 모여 소곤소곤 대화를 나눌 뿐이었다.
불편한 가운데에도 식사는 다행히 레이테의 입맛에 잘 맞았다. 부드러운 에그 타르트와 진하고 달콤한 포도주는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평화롭게 헤젤을 방문했다면, 정말 기분 좋게 즐길 수 있을 텐데.’
엔히크가 살아 있었다면 그런 방문도 가능성이 있지 않았을까? 리리우는 부부를 헤젤에 초대하기도 했었다.
‘……공주가 안 보여.’
사실 만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런 소문을 들었는데 어떻게 편히 리리우를 볼 수 있을까.
“리리우가 늦는구려.”
레이테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벨류가 불쑥 말을 꺼냈다. 레이테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놀란 기분을 숨겼다. 그 외의 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
벨류는 시종을 불러 뭔가를 지시했다. 리리우라는 이름이 들렸다. 공주를 데려오라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레이테는 타르트도 포도주도 마음 편히 즐길 수 없었다. 어떤 음식물이든 한 입만 넣으면 그대로 목에서 걸리는 듯했다.
식사를 아예 관두자니, 계속 대접하는 음식에 손을 대지 않는 것 또한 예의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에르난은 계속 아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다. 레이테는 억지로 음식을 먹고 음료를 마셨다.
속이 점점 답답해졌고 두통도 조금씩 느껴졌다.
심호흡을 하며 속을 진정시키는데, 리리우가 연회장으로 조용히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음악 소리에 묻힌 탓인지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식사를 멈추고 공주의 등장에 주목했다.
리리우의 옷차림은 레이테는 물론이고 다른 귀족들과 비교해도 초라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수수했다. 창백한 얼굴은 정말로 아파 보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폐하.”
벨류에게 인사하는 리리우의 몸이 살짝 휘청거렸다.
“아직도 몸이 안 좋으냐?”
“…….”
“네가 늦는 바람에 네 자리에 여왕 폐하를 앉게 했구나. 그러니 저쪽에 앉거라.”
벨류는 무척 엄격하게 말하며 에르난의 옆을 가리켰다. 시종일관 무덤덤한 표정으로 식사를 하던 에르난의 낯빛이 얼어붙었다.
“폐하. 이 자리에 공주가 앉아야 한다면 제가 움직이겠습니다. 공주는 당연히 폐하의 옆을 지켜야지요.”
레이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벨류는 난처해 하는 얼굴로 레이테를 바라보았다.
“맞는 말씀이지만, 여왕을 이 자리로 안내한 사람은 나요. 늙은이가 무안해지지 않게 그냥 계셔 주시면 안 되겠소?”
뭔가 억지처럼 들리지만, 레이테는 섣불리 벨류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무안하다는 말까지 쓰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망설이던 레이테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동요하지 말자.’
리리우는 단순히 에르난의 옆에 앉기만 할 뿐이다. 그 정도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니, 실은 문제가 된다. 이곳의 모든 사람들이 에르난과 리리우의 소문을 알 것이기에. 벨류도 마찬가지다.
‘왕이 그 소문을 낸 건가?’
리리우는 고개를 푹 숙이며 에르난의 옆으로 갔다.
“잠깐, 리리우. 그냥 가면 곤란하지. 여왕께 인사하거라.”
“아……, 네.”
리리우가 몸을 돌려 레이테를 바라보았다.
“오, 오랜만에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여왕 폐하. 와 주셔서 기뻐요.”
말과 다르게, 기뻐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누가 보아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리리우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애인의 부인이 나타났으니까? 아니, 이게 아닌데…….’
무심코 냉소적인 생각을 하던 레이테는 흠칫 놀랐다. 소문에 지지 말자고 다짐했으면서 이런 식이라니.
리리우는 레이테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리리우는 앉아만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벨류도 손녀에게 더 요구하는 것이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가만히 있기만 해도 레이테와 에르난, 그리고 리리우는 귀족들의 좋은 구경거리가 되었다.
리리우는 연회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또한 레이테와 에르난은 단 한 마디도 주고받지 못했다.
* * *
연회가 끝나고 처소로 돌아온 레이테는 시녀의 손길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옷을 벗어 던졌다.
몸을 꽉 조이던 옷을 풀자 비로소 숨이 트였다. 레이테는 심호흡을 하며 속을 진정시켰다.
카테리나가 그녀에게 물을 건넸다. 레이테는 물을 단숨에 마셨다. 하지만 답답함이 풀리기는커녕, 순식간에 메스꺼움이 몰려왔다.
“우욱……!”
어떻게 손쓸 새도 없이, 레이테는 구토하기 시작했다.
“폐하!”
한 번 쏟아내기 시작하자,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먹은 것을 다 게워내고도 부족한지, 맑은 액체까지 줄줄 흘러나왔다.
볼품없고 추하다. 온종일 보였던 당당하고 화려한 모습이 모조리 가짜 같았다.
협상은 시작부터 난항이었다. 연회는 레이테의 속을 완전히 뒤집어엎었다.
‘빨리 에르난과 돌아가고 싶어.’
대체 언제? 까마득하기만 했다. 그날이 올 때까지, 이 답답함을 얼마나 더 견뎌야 할까?
카테리나가 레이테를 가볍게 안아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위로의 손길에, 레이테의 붉게 충혈된 눈에서 눈물이 한 줄기 흘렀다.
* * *
시간이 한참 흐르고, 겨우 진정한 레이테는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침대에 누웠다.
“폐하, 이제 주무세요. 이제는 다 잘 될 거예요.”
카테리나가 물수건으로 그녀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레이테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침대의 커튼이 쳐졌고, 시녀들이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
이제 그만 자고 싶었다. 내일부터는 냉정함을 잃지 말자고 레이테는 거듭 다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도통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머릿속이 여전히 복잡했다. 그만 생각해야 했다. 에르난을 하루빨리 이곳에서 데리고 나가는 것만 생각해야 한다.
‘에르난은 어떻게 지낼까.’
순간 그가 누군가와 함께 침대에 누운 모습이 떠올랐다.
‘아냐. 그럴 리 없어.’
하지만 자꾸만 특정 인물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잠깐만 이야기를 들어 주세요……!”
목소리? 레이테는 눈을 떴다.
틀림없이 리리우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레이테는 벌떡 일어나 침대 밖으로 나갔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왔죠? 돌아가세요!”
침실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카테리나의 고함소리가 울렸다.?
#107
레이테는 침실 문을 벌컥 열고 밖으로 나갔다. 시녀들이 깜짝 놀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몸을 잔뜩 움츠린 리리우가 있었다.
“죄송해요…….”
리리우는 레이테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푹 숙였다.
“제 잘못이에요. 죄송해요, 폐하. 잘못했어요.”
울먹거리는 소리에 레이테는 할 말을 잃었다.
이게 무슨 상황일까? 리리우는 무엇이 미안하다는 걸까?
물론 문제의 소문을 가리킬 것이다. 하지만 왜 이렇게까지 할까?
레이테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만약 소문이 진짜라면?
“여왕 폐하와 가고 싶은 곳이 있어요. 제발 저와 가 주세요.”
“뭐라고요? 뻔뻔하게 무슨 소리죠? 여왕께서 뭘 믿고 당신을 따라가라고!”
리리우의 애원에 답한 쪽은 레이테가 아니라 카테리나였다.
“민폐란 민폐는 다 저질렀으면서, 이제 또 뭘 하려고요? 그렇게 미안하다면 여기에서 헛소리하지 말고 당신 할아버지에게 가서 왕을 석방해 달라고나 하세요!”
쏟아지는 폭언에 리리우는 몸을 덜덜 떨었다. 씩씩거리는 카테리나는 거의 공주의 멱살을 잡을 기세였다.
“그럴 의지조차 없다면 입 닥치고 여기서 썩 꺼져!”
“카테리나!”
멍하니 서 있던 레이테는 카테리나의 입에서 욕설이 나오기까지 하자 정신이 번뜩 들었다.
레이테를 지켜보면서 분노가 쌓였을 카테리나는 이성을 잃고 그것을 표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한 나라의 공주다.
“품위 없이 뭐하는 건가요! 공주께 당장 사과하세요!”
레이테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놀라는 카테리나를 뒤로 하고, 레이테는 리리우에게 말했다.
“무슨 일인가요?”
여왕의 말투는 무척 차분했다. 차분하다 못해 아예 차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실제로도 레이테는 머리에 물이 끼얹어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모든 일이 너무나 엉망으로 돌아가면서 사람의 감정을 극한으로 몰아넣는다. 그녀는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적의에 휩쓸리지 않도록.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어디를 가자는 것인지요?”
“그, 그게……. 말씀드릴 수는 없고 일단 저를 따라와 주시면 안 될까요? 위험한 일은 절대 아니에요. 믿어 주세요…….”
“믿을 수 없어요. 이유가 뭔지, 공주께서도 잘 아시겠지요.”
레이테가 냉정하게 답하자 리리우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안절부절못하던 그녀는 갑자기 레이테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 일은 오해예요. 정말이에요. 그게, 그러니까……. 죄송해요. 폐하, 한 번만 저와 함께 가 주세요…….”
리리우는 무릎을 꿇고 훌쩍이기 시작했다.
리리우는 공주다. 레이테에 비하면 아직 어리지만, 이제 곧 성인이 된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평정을 잃고 자존심까지 버리는 듯한 행동을 하다니.
딱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너그러운 마음을 갖기에는 레이테도 한계에 몰려 있었다.
하지만 저런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레이테는 리리우를 일으켜 세웠다.
“좋아요. 어디로 갈 건가요? 안내해 주세요.”
“아, 감사합니다……! 저어, 죄송하지만 여왕 폐하만 따라와 주세요.”
리리우는 카테리나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카테리나는 역시 발끈해 뭔가 외치려 했으나, 다른 시녀가 눈치채고 그녀를 말렸다.
잠시 망설이던 레이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녀 없이 단둘이만 가자니, 솔직히 수상했다. 하지만 무슨 일일지 궁금증이 생기기도 했다.
* * *
레이테가 리리우를 따라 간 곳은 어느 여성의 방이었다. 처음에는 누구의 방인지 알 수 없었으나, 벽에 걸린 그림을 보고 이곳이 리리우의 처소임을 알 수 있었다.
완전히 어린애인 리리우와 리리우를 닮은 여성, 그리고 엔히크와 인상이 비슷한 남성을 그린 가족 초상화였다.
공주의 방이지만 시녀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레이테가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리리우가 말했다.
“지금은 시녀들이 이곳에 오지 않아요. 훨씬 더 시간이 늦어지면 올 거예요.”
“무슨 뜻인가요?”
“제가 이곳에서 자지 않겠다고 했으니까요.”
“…….”
레이테는 리리우의 말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나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죄송하지만, 이걸 입어 주세요. 후드까지 모두 쓰셔야 해요.”
리리우는 레이테에게 커다란 망토를 건넸다. 레이테는 뻣뻣한 몸짓으로 망토를 입었다.
두 사람은 다시 밖으로 나왔다. 리리우는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꽤 거침없이 걷기 시작했다.
한밤중이지만 복도에서 간간이 사람을 볼 수 있었다. 대다수는 경비병이었지만, 연회 참석자로 보이는 화려한 차림을 한 사람들도 있었다. 연회 분위기가 좋지 않아 제대로 즐기지 못해 아쉬운 자들이 여태 잠들지 않은 듯했다.
그들의 호기심 어린 눈길이 리리우를 향했다.
“어머, 또? 여왕이 왔는데도?”
속삭이는 소리도 들렸다.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이를 악물던 레이테는 곧 한 가지를 깨달았다. 지금 가는 곳이 어디인지 알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꽤 오래 걸었다. 인적이 드물어지고, 파도 소리가 조금씩 가깝게 들렸다. 레이테는 리스보아 왕성의 구조를 모르지만, 성의 구석진 곳으로 왔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계단이 나타났다. 하나하나 오를수록, 레이테는 자신의 예상이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에르난의 처소에 가는 거야!’
계단을 다 오르자 문이 나타났다. 문 앞에 선 경비병은 리리우를 보더니 문을 열어 주었다. 방 안의 사람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신경 쓰이니까 오늘 밤은 돌아가. 어차피 내 시녀가 왔고, 또 데리러 올 거야.”
리리우가 경비병에게 말했다. 긴장을 많이 했는지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경비병이 망설이자 리리우가 그를 노려보았다. 경비병은 하는 수 없이 인사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레이테는 리리우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에르난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폐하.”
리리우가 말했다. 잠시 후, 에르난이 뒤척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 밖으로 나온 그는 차가운 눈으로 리리우를 바라보았다.
“당장 나가십시오.”
“폐하, 그게…….”
리리우는 에르난의 기세에 겁에 질린 듯했다.
레이테는 저렇게 서늘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편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와 함께할 때의 남편은 사랑에 빠진 척하거나, 사랑에 빠져 있었으므로.
남편의 낯선 얼굴은 레이테에게 중요한 것을 알려 주었다.
레이테를 괴롭힌 그 소문은 틀림없는 거짓이다.
“에르난.”
레이테는 망토의 후드를 젖혔다.
리리우를 노려보던 에르난의 굳은 얼굴에 놀라움이 번져나갔다.
“맙소사, 레이테……. 레이테!”
레이테는 남편을 향해 다가갔다. 남편도 그녀에게 다가왔다. 두 사람은 어떤 방해도 망설임도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에르난이 손을 뻗었다. 레이테는 자신의 뺨에 살포시 닿는 남편의 손끝을 느꼈다.
그리고 부부는 서로를 와락 끌어안았다.
“에르난……!”
레이테는 남편의 넓은 품에 다시 안겼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의 가슴에 자신의 얼굴을 비볐다. 한때 너무나 당연하게, 원할 때라면 언제나 누려왔던 온기가 느껴졌다.
레이테는 고개를 들어 남편을 올려다보았다. 에르난이 환한 웃음을 지었다. 레이테는 그를 더 가까이 끌어당기며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남편의 입술이 부드럽게 그녀에게 닿았다. 황홀감에 사로잡히며, 레이테는 남편을 받아들였다.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에르난은 한 손으로 아내를 안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레이테는 온몸이 녹아내릴 듯한 따뜻함에 휩싸였다.
부부는 오랫동안 키스했다. 그동안의 목마름을 채우기에는 이마저도 부족했다.
‘당신을 더 느끼고 싶어.’
레이테는 남편에게 더 깊숙이 엉켜 들려다가 문득 무언가를 깨달았다. 이 방에는 부부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입을 다시 맞추는 대신, 레이테는 뒤를 돌아보았다. 울먹이는 리리우가 서 있었다.
레이테와 눈이 마주치자, 리리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공주…….”
“불편한 상황을 너무 피하고 싶은 바람에, 오해를 만들었고 또 오해의 해명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오늘 여왕 폐하를 보니 도저히 견딜 수 없어졌어요. 죄송해요. 두 분을 힘들게 해서 정말 죄송해요.”
애써 울음을 참는 듯, 리리우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레이테는 잠시 남편의 품에서 벗어나 리리우에게 다가갔다.
“괜찮다……라고 쉽게 말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지요. 하지만 공주의 마음은 잘 알겠어요.”
레이테는 리리우를 가볍게 토닥거렸다. 몸의 들썩거림이 조금씩 잦아들자, 리리우가 말했다.
“새벽에 다시 올게요.”
말을 마친 리리우는 살짝 인사하고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고, 계단을 내려가는 구두 굽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리리우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던 레이테의 뒤로 에르난이 다가왔다. 그는 아내를 가볍게 안았다.
레이테는 뒤로 돌아서 남편을 올려다보았다. 가만히 에르난을 지켜보던 그녀가 말했다.
“많이 수척해졌어요.”
낮에 보았을 때에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지금 직접 안아 보니 남편은 확실히 레이테가 기억하는 것보다 야위어 있었다.
“자유를 잃고 다른 이에게 목숨이 붙잡혀 휘둘려지는 건……, 그 자체만으로 몸이 바짝바짝 마르더군요. 아무리 물질적으로 부족함 없이 지낸다 해도 말이에요.”
에르난은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테는 지금의 그와 비슷한 일을 여러 번 겪었다. 여왕은 여러 차례 숙부의 포로나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애초에 감금당한 당신을 내가 구하러 가면서 우리가 만나게 되었지요. 그랬는데 지금은 반대가 되었다고 보면 되겠습니까?”
에르난은 피식 웃었다.
여러 고생이 많았지만, 이제는 당시 일을 떠올리면서 웃을 수 있다. 지금의 생활도 비슷한 존재가 될 날이 언젠가 올까?
그럴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에르난의 아내는 강한 사람이니까.
“걱정 끼쳐서 미안합니다. 당신 혼자 두 나라를 감당하느라 많이 힘들었겠지요. 고생이 많았습니다.”
에르난은 레이테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짧은 키스는 코와 양쪽 뺨에도 이어졌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입술이 겹쳐졌다.
입맞춤은 깊었다. 혀가 엉키고 입술이 상대를 탐하며 관능에 젖은 소리가 났다.
레이테는 자신의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실로 오랜만에 몸속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열기였다. 에르난도 마찬가지였다.
에르난은 아내를 천천히 안아 들었다. 침대로 향한 그는 레이테를 조심히 눕혔다.
그 위로 가볍게 몸을 겹친 에르난은 레이테의 맨살이 드러난 곳에 짧은 키스를 반복했다. 한쪽 손으로는 머리카락을 연신 쓰다듬었다.
진하지 않으나 여운은 긴 키스가 반복되었다. 레이테는 남편을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사랑하는 이의 체온을 더 느끼고 싶었다. 그녀의 손이 남편의 슈미즈 안으로 파고들었다.
두근두근 강하게 뛰는 심장 박동이 레이테의 손에 전해졌다. 환희와 기분 좋은 긴장이 느껴져 무척 사랑스러웠다. 레이테는 남편의 가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처음에 당신은 나를 구하기에 앞서 다른 일에 몸과 마음이 더 급해 보였지요.”
레이테가 키득키득 웃었다.
“지금 부인께서 그렇다는 말입니까?”
“글쎄요. 그냥 당신이 그립고, 일단 지금은 당신의 전부를 느끼고 싶을 뿐이에요.”
에르난의 손도 레이테의 옷 안으로 들어왔다. 슈미즈를 벗기는 에르난의 손길은 어쩐지 어설픈 데가 있었다. 그는 몇 번 헛손질을 반복했다.
사실 레이테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상대의 옷을 벗기려던 두 사람은 손이 완전히 꼬여 버렸다.
부부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서로를 마주 봤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대충 2개월 만일 텐데, 그동안 내게 배웠던 것을 모두 잊기라도 했습니까?”
“그건 모르겠고, 당신이 이런저런 악소문에서 모두 결백하다는 걸 확실히 알겠어요. 애인을 만들기는 무슨.”
“믿었습니까?”
“안 믿었어요. 하지만 불안한 생각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요…….”
“내가 똑바로 처신하지 못해 생긴 일입니다. 당신을 힘들게 하고 말았어요. 당신에게 미안한 일이 많지만, 특히 이 문제는 면목이 없습니다.”
에르난의 목소리가, 아내를 안은 팔이 떨렸다.
레이테가 바로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그의 눈도 흔들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피눈물을 흘릴 듯.
“괜찮아요. 그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해 주세요.”
빙긋 웃은 레이테는 남편에게 키스했다.?
#108
키스를 주고받으면서, 두 사람은 손을 더듬어 상대의 옷을 마저 벗겼다. 감춰져 있던 사랑스러운 몸을 다시 만질 수만 있다면, 어설픈 손짓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에르난은 아내의 온몸에 입을 맞췄다. 목에서부터 시작해 가슴, 허리, 손, 다리, 그리고 발끝까지. 그는 조금 집요하게 아내의 살을 빨아들였다.
이렇게 하면 레이테의 몸에 흔적을 남길 수 있었다. 옷으로 가려지지 않는 부분까지 자국을 남기는 짓궂은 짓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한가롭게 놀기나 하려고 헤젤에 온 것은 아니므로, 모든 일을 조심해야만 했다.
다소 자극적인 입맞춤과 함께, 에르난은 아내의 곳곳을 어루만졌다. 그의 손짓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조금이라도 손을 잘못 놀리는 일이 없도록.
남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손을 따라 밖으로 나온 열기가 레이테를 감쌌다. 잠시 잠들어 있던 몸의 기억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에르난은 이보다 더 장난스럽게 레이테의 가슴을 애무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훨씬 신중했다. 그는 가슴 전체를 부드럽게 주무르며 손을 빙글빙글 돌렸다.
“으응…….”
레이테의 입에서 흥분에 찬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에 답하듯, 에르난은 유두를 살짝 꼬집었다.
“하읏!”
손가락에 이어, 혀끝이 가슴에 닿았다. 에르난은 천천히 혀를 핥았다. 할짝거리는 음란한 소리가 레이테의 신음에 살짝 더해지며 두 사람의 흥분을 부채질했다.
가슴에 이어, 에르난은 아내의 다리를 들어 올렸다. 그의 손이, 그리고 숨결이 허벅지 안쪽을 건드렸다. 레이테는 허리를 움찔거렸다. 곧 느끼게 될 흥분으로 몸이 떨렸다.
사랑을 받을 기대에 잔뜩 젖은 곳에 에르난의 손끝이 닿았다.
“으읏.”
에르난은 원래 조금 다급하게 삽입하는 경향이 있었다. 직전에 뜸을 들이는 정도의 장난은 있지만, 길지는 않았다.
유별난 이유는 아니었다. 결합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끼리 맞닿을 때야말로 그는 온몸을 레이테와 겹칠 수 있었다. 온몸을 완전히 포개고 숨과 땀이 섞이는 순간이 좋아서일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성급함을 조금 눌러 담고 싶었다. 차근차근 레이테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다.
에르난의 손가락이 천천히 레이테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응, 하아…….”
레이테가 기분 좋은 신음을 흘리자 에르난은 손가락을 하나 더 늘렸다.
그는 기억을 되살리듯, 아내가 좋아하던 곳을 차근차근 자극했다. 반대편 손으로는 바깥에 드러난 민감한 곳을 만지작거렸다.
“앗, 으읏……, 하아!”
“당신 감촉은 따뜻하고 기분이 좋습니다.”
손가락이 더 깊이 들어오고, 움직임도 더 커졌다.
“하아, 읏, 아아…… 흐으읏!”
남편을 강하게 붙잡고 덜덜 떨던 레이테는 곧 절정에 몸부림쳤다.
“하아……, 으읏.”
레이테가 숨을 헐떡거렸다. 에르난은 기분 좋은 웃음을 짓고, 손가락으로 안쪽을 더 자극했다. 절정의 여운이 가시지도 않은 레이테는 다시 몸을 움찔거리며 발버둥을 쳤다.
“아, 에르난, 아……, 읏!”
“쩔쩔매는 당신은 무척 사랑스러워요.”
에르난은 입을 맞추며 아내의 몸을 완전히 덮었다. 그의 혀가 곧바로 레이테에게로 밀고 들어왔다. 조금 난잡한 소리가 함께 했다.
그동안에도 안쪽을 누비는 손가락의 움직임은 레이테를 계속 떨게 했다. 견디다 못한 레이테가 다리로 남편을 꽉 안았다.
에르난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당신을 더 깊게 안고 싶습니다.”
레이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안아 줘요…….”
에르난이 몸을 살짝 일으켰다. 그는 단단해진 욕망을 손에 쥐었다.
이미 한 차례 절정을 느끼고, 손으로 완전히 풀어진 몸은 매끄럽게 에르난을 받아들였다. 부드러우면서도 짜릿한 감각에 레이테는 물론이고 에르난도 전율했다.
“아앗…….”
남편이 자신의 깊숙한 곳을 가득 채웠다. 굉장히 오랜만에. 레이테는 그것만으로도 참기 힘들 만큼 흥분을 느꼈다.
사실 참을 필요도 없었다.
“아 응…… 앗, 으흣!”
에르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뜨거운 욕망은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하며 기분 좋은 곳을 찔렀다. 레이테의 신음은 더 커졌다.
“하아, 응! 으으읏…… 아, 하아! 읏!”
“하아……, 헉, 웃, 으읏……!”
에르난의 숨소리도 거칠었다. 그는 양손으로 레이테를 붙잡고 허리를 흔들었다.
조금 길었던 공백기를 허겁지겁 메꾸기라도 하듯, 두 사람은 서로를 탐닉했다. 레이테는 더 이상 남편을 껴안을 힘조차 팔에 남지 않을 때까지, 그를 강하게 끌어안고 몸을 흔들었다.
“앗, 아, 으읏! 아…… 흐읏, 에르…… 난, 아, 하앗!”
“흐읏, 레이테, 레이테, 허억, 읏!”
몸을 섞으면서 다급하게 상대의 이름을 반복해 부르던 때가 있었나? 사랑하는 이를 부를 때마다, 또 사랑하는 이가 부르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두 사람은 미칠 것 같은 흥분에 사로잡혔다.
“으앗, 아! 하아, 에르난, 아, 아아아! 흐앗, 흐으읏!”
에르난의 움직임이 더 격렬해지다가 일순간 멈췄다. 그는 팔로 레이테를 꽉 안고 사정했다. 레이테는 몸의 긴장을 풀면서 자신에게 들어오는 따뜻한 것을 느꼈다.
가쁜 숨을 내쉬던 에르난이 키스해 왔다. 아직 더 분출할 격렬함이 남은 듯, 그는 과감하게 아내의 입술을 탐했다.
“으응, 응…….”
에르난은 방금 사정을 하고 나른해진 허리도 천천히 움직였다.
레이테는 그가 조금만 움직여도 간지러웠고, 또 흥분했다. 레이테도 허리와 다리를 슬금슬금 움직였다. 그녀는 곧, 자신의 안쪽에 단단한 욕망이 다시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조금도 낭비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을 더 갖고 싶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예요.”
두 사람은 다시 격렬하게 움직였다.
* * *
에르난의 말대로, 조금도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레이테는 나른해진 몸을 겨우 일으켜 앉았다. 누워 있다가는 속수무책으로 잠에 빠져들 것 같았다.
‘대체 우리는 얼마나 목말랐던 걸까…….’
바쁘다는 이유로, 짧은 시간 동안 수차례 절정에 몸부림치고 남편의 정을 받아냈다.
조금 민망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만사를 제쳐놓고 몸부터 탐닉하다니.
‘하긴, 원래 시작부터 이랬잖아.’
옛일을 떠올리며 레이테는 지금 상황을 합리화해 보려 했다. 하지만 민망함은 그대로였다. 실은 지금도 그에게 더 안기고 싶으니까.
에르난은 누운 채로 팔을 뻗어 아내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습니다, 레이테. 사랑합니다.”
달콤한 말 다음에는 자극이 이어졌다. 에르난은 아내의 허리를 만지고 혀로 핥았다.
“읏…… 아, 에르난. 우리 이야기 좀 해요…….”
“이런 이야기보다 더 급한 일이 있습니까? 아니, 하긴…… 그렇군요. 있군요.”
레이테의 항의를 무시할 생각으로 한 말이었겠지만, 자충수 비슷하게 되고 말았다. 에르난도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기대어 앉았다. 대화를 하자고 했으나, 그들은 잠시 말없이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
“갑옷. 무척 잘 어울렸습니다.”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에르난이었다.
“나를 구하러 온 여신 같았어요.”
“고맙지만 그 말은 과분하네요. 전에도 말했을 텐데, 신은 하늘에 계신 한 분뿐이니…….”
“안 됩니다. 오늘 당신은 그렇게 불려도 됩니다.”
에르난은 손가락으로 레이테의 입을 가볍게 눌렀다.
“어떻게 갑옷을 입고 올 생각을 했습니까? 정말 놀랐습니다.”
“그야 멋있으니까요.”
두 사람은 동시에 풋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똑같은 과거를 떠올렸다.
탐브레 토벌군이 출발하던 날, 에르난은 전신에 갑옷을 착용했다. 당장 전투도 없는데 왜 불편하게 갑옷을 입느냐는 아내의 질문에 에르난은 무척 단순하게 답했다. 멋있다고.
즉, 갑옷 착용은 아군의 사기를 돋우는 데에 꽤 큰 역할을 한다. 반대로 적군의 기선을 제압할 수도 있고.
“당신의 선물이잖아요. 이걸 입으며 당신과 하나 된 기분을 느끼고 싶기도 했어요. 나를 위해서.”
“영광입니다, 부인.”
“하지만 그렇게 성공적이었던 것 같지는 않아요. 협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당신은 아나요?”
“모릅니다. 알려주지 않거든요.”
레이테는 첫 협상에서 오간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무덤덤하게 듣던 에르난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미쳤군.”
“방금 바르시나어로 말했죠? 코른 후작도 비슷한 말을 하며 헤젤을 욕했거든요.”
“아, 코른과 그 일당이 온 것은 상당히 놀랐습니다. 어떻게 그들을 데려왔습니까?”
레이테는 그동안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사크틸라와 바르시나 사이 어떤 갈등이 일어났으며, 또 임시 봉합이라 해도 어떻게 그들을 끌고 올 수 있었는지.
“……정말로 고생이 많았습니다. 당신은 훌륭한 군주입니다.”
“아니에요. 내가 잘했다면 애초에 그런 분열까지 가지도 않았겠죠.”
“당신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폐만 끼쳐 미안합니다. 심지어 편지 하나 제대로 보낼 수 없었지요. 몇 번 연락을 시도했지만, 전부 중간에 막히더군요. 정말입니다. 혹시 내가 아무 연락도 하지 않아 화가 났습니까?”
에르난은 아내의 머리카락을 나긋나긋한 손길로 쓸었다.
“아니에요. 나야말로 공식 연락 말고는 아무것도 안 했는걸요. 사적으로 뭘 하려고 해도 어차피 중간에 가로채일 테니까. 그런 식으로 내 마음을 다른 사람이 훔쳐보는 게 싫었어요.”
“하긴. 브라간사가 당신의 마음을 훔쳐본다고 생각하면 끔찍합니다.”
“브라간사?”
레이테의 목소리가 조금 날카로워졌다.
“아, 맞아요. 브라간사……. 당신이 이미 알지 모르겠네요. 당신이 패배한 이유.”
“그야 내가 지휘관으로서 능력이 부족해서 아니겠습니까.”
“그건 내가 뭐라 말하기 힘드네요. 다만 확실한 요인은 따로 있어요. 우리가 그렇게 찾으려 애썼던 헤젤을 상대로 한 밀수. 그게 바로 연합군이 주둔한 오누바와 그 주변에서 이뤄졌거든요.”
“……맙소사.”
“오누바는 헤젤군에게 낯선 적지가 아니었어요.”
“완전히 당했군.”
에르난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그는 여태까지 브라간사에게 농락 받은, 때로는 그를 농락한 이야기를 했다.
브라간사에 대한 이야기는 최근의 리리우 공주 일로도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왕과 브라간사는 사이가 매우 좋지 않습니다. 왕의 브라간사 홀대는 점점 노골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고요.”
“즉, 리리우 공주 일은 당신과 나 사이뿐만 아니라, 브라간사에 대한 모욕에도 목적이 있는 셈이로군요.”
“내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당신은 둘의 분열을 이용하려다 실패했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배상금을 깎아야 하는 현 상황에서……, 벨류와 브라간사의 사이를 갈라놓는 건 시도해 볼 만한 전략이라고 봐요.”
에르난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리리우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곳은 너무 멀었다. 가는 길에 반드시 누군가와 마주칠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일은 따로 있었다.
매일 밤 꾸는 악몽의 현실화. 그녀의 남편이 되겠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남자가, 정말로 일방적으로 그녀를 취하는 끔찍한 꿈이었다. 꿈속의 브라간사는 잠자는 리리우에게 갑자기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싫어……, 절대로 싫어.’
계속 그 꿈을 꾸면서 할아버지의 명령을 어기는 선택을 하기는 쉽지 않았다. 손녀마저 이런 식으로 이용하는 할아버지에게 질려 버렸지만, 그가 하라는 대로 해야만 브라간사와의 결혼을 피할 수 있다.
하지만 레이테를 다시 보니 더는 양심의 가책을 버틸 수 없었다. 그래서 저질러 버렸다.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섭다.
리리우는 레이테의 방으로 다시 향하고 있었다.
갈 곳이 없었다. 그곳에서 기다리다가 적당히 시간이 되면 레이테를 데리러 갈 생각이었다. 그때는 레이테의 시녀와 동행해도 좋을 것 같다.
‘아 잠깐……, 시녀.’
리리우보다 조금 나이가 많아 보이는 소녀를 레이테는 카테리나라고 불렀다. 카테리나는 시녀들 중 가장 리리우에게 화가 난 듯했다.
지금 가면 다시 그녀를 만날 것이다. 어떡할까.
‘차라리 사정을 설명하자.’
고민은 길지 않았다. 리리우는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109
프란세스크는 연회가 끝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처소로 돌아왔다. 사크틸라 측에서 미리 심어 놓은 첩자와 접촉해 이런저런 일을 논의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프란세스크 역시 연회 때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는 하인을 시켜 술과 빵을 간단히 챙겨오도록 했다.
대충 목을 축이고 기계적으로 빵을 씹으며, 그는 오늘 하루 동안의 일을 되새겼다.
거의 반년 만에 만나는 그의 왕은 그가 알던 어떤 모습보다 더 지쳐 보였다.
아예 갑옷을 입고 나타날 정도로 전투 의지가 넘쳐나는 아내를 보았으니 왕도 슬슬 기운을 차리리라는 기대를 했다. 하지만 연회에서의 일은 두 왕에게 모두 상처가 되었으리라.
프란세스크는 문제의 소문을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
에르난은 거리낌 없이 애인을 사귀던 아버지에게 지독한 환멸을 느꼈고, 그 취미만큼은 닮지 않겠다고 이를 갈던 사람이다. 아니, 애초에 아내에게 푹 빠진 그가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린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또한 리리우 공주도 그런 염문설의 주인공이 되기에는 부적절했다. 연회장에서 보았던 모습도, 내키지 않아 하는 기색이 또렷했다.
‘귀청이 따가울 정도로 나를 부르면서 재잘대던 어린애가 무슨 왕의 애첩이 된 척을 하겠다고…….’
물론 그 어린애도 제법 자라기는 했다. 엔히크의 죽음이 공주를 바꿔놓았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기댈 수 있는 어른이 없으니까.
‘첩자에게 듣기로는 브라간사가 그 역할을 대신할 생각인 모양이지만……, 끔찍하긴 하네.’
리리우는 브라간사를 어려워했다. 상황이 이렇게 된 지금은 더할 것이다. 딱하게도.
딱하다?
‘왕을 더 걱정해도 모자랄 판에 한가롭게 공주나 생각하다니.’
프란세스크는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쳤다. 그는 남은 술을 전부 잔에 따랐다. 이것만 비우고 자야겠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공작 각하, 계시나요?”
여성의 목소리였다. 누구지? 프란세스크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살짝 열었다. 여왕의 시녀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지금 여왕 폐하의 처소로 저와 함께 가 주셨으면 해요. 좀 급한 일이…….”
시녀의 난처한 표정을 보니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 듯했다.
프란세스크는 곧바로 방을 나와 빠르게 걸었다. 시녀가 뒤따라오기 힘겨워할 정도였다.
여왕의 처소는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입구를 지키고 선 기사가 프란세스크를 보더니 곧바로 문을 열어 주었다.
“폐하, 무슨 일 있으십니…….”
방으로 들어선 프란세스크는 기가 막힌 광경과 맞닥뜨렸다.
‘리리우 공주?’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머리카락이나 몸집을 보니 리리우가 틀림없었다. 그리고 카테리나가 공주의 맞은편에 서 있었다. 동생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우는 것뿐인가요? 말을 좀 해 보란 말야!”
카테리나가 손을 치켜들었다. 동생이 무엇을 하려는지 깨달은 프란세스크는 재빨리 그녀를 붙잡고 공주와 떨어뜨렸다.
“카테리나! 너 제정신이야?”
프란세스크가 버럭 소리 질렀다. 무척이나 사나운 외침에 카테리나는 물론이고 리리우와 다른 시녀들까지 놀라서 프란세스크를 바라보았다.
“공주께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오빠도 알잖아! 저 여자가 무슨 짓을 했는지!”
“너는 그 바보 같은 소문을 믿는다는 거야?”
“……!”
오빠에게 지지 않고 맞서던 카테리나는 뭔가를 깨닫고 몸을 흠칫거렸다.
“그, 그게…….”
프란세스크는 한숨을 쉬었다. 동생이 왜 이러는지 그는 짐작할 수 있었다. 소문의 진위와 무관하게, 리리우가 여왕을 고통스럽게 했기 때문에 화가 났을 것이다. 그 화를 조절 못 하고 흥분하는 바람에 이 꼴이 되었다.
카테리나는 정신을 차린 듯했다. 프란세스크는 동생을 놓고 리리우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전하?”
“흑…… 으흑, 으윽…….”
다른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의자에 앉은 리리우는 한참을 흐느꼈다. 프란세스크는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울음소리가 잦아들자 카테리나가 다가왔다. 프란세스크가 옆으로 비켜서자, 그녀는 공주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공주 전하. 제가 막무가내로 흥분하는 바람에 전하께 폐를 끼쳤습니다. 이미 여왕께 주의를 받았는데도 다시 전하께서 오시니 순간적으로 화가……. 벌을 내려주시면 달게 받겠어요.”
“저기, 저……. 할 말이 있어서 온 거니까……. 내, 내 이야기 좀 들어 주세요.”
“차분히 말씀하십시오.”
프란세스크가 대신 답했다. 리리우는 심호흡을 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여왕 폐하께서는 북쪽 독방에 계세요. 내가 그곳으로 데려다줬어……요.”
프란세스크는 그녀가 자신을 대할 때 말투에 친근함이 지나쳐 난감했었다. 하지만 막상 리리우가 정중하게 말하자 오히려 어색했다.
“그곳은 에르난 폐하께서 머무는 곳이에요.”
“아……!”
카테리나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두 분 폐하께서 몇 달 만에 만났는데 제대로 대화도 하지 못하셨잖아요……. 할아버지께서 일부러 두 분의 접촉을 막는 것 같아서, 이런 식으로라도…….”
“죄송합니다, 전하!”
카테리나가 다시 사과했다.
“아니에요, 내가 오해 살 행동을 했으니까…….”
“카테리나의 잘못이 확실히 맞으니, 아니라고 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 아이는 제 동생입니다. 동생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제 불찰인 셈입니다. 동생은 용서해 주십시오.”
프란세스크가 무릎을 꿇자 카테리나는 부끄러운 나머지 고개를 푹 숙였다.
“괘, 괜찮아! 일어나요!”
리리우는 프란세스크의 태도가 당혹스러운 듯했다. 프란세스크는 작게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그는 주눅 든 동생의 등을 살짝 토닥여 주었다.
“저, 그리고…….”
문제의 소문에 대한 리리우의 설명이 이어졌다.
브라간사와의 결혼을 피하고 싶다면 에르난과 동침하라는 명령을 벨류 왕이 내렸다는 말이 나오자 모두가 헉하며 숨을 삼켰다.
프란세스크도 피가 식는 듯했다. 실제로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지만, 정말로 그럴 뻔한 셈이다.
“벨류 왕은 브라간사 공을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군요. 어째서입니까?”
잠시 생각하던 프란세스크가 물었다. 리리우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가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공작이 자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세요. 숙부님 일이라든가…….”
“……그렇군요.”
프란세스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리리우의 답을 통해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었다.
전쟁에서 승리했는데도 브라간사가 역할 수행을 못 한다고 생각한다니, 공작에 대한 불만이 상당한 듯하다. 물론 아라고에서의 일은 브라간사의 실책이 맞지만, 전쟁 승리는 그것을 덮고도 남을 공이지 않나?
또한 왕은 아들의 죽음에 조카의 잘못이 있다고 생각한다.
‘호위의 소홀함을 탓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혹시…….’
엔히크의 죽음 자체가 브라간사로 인한 일이지 않을까.
그날, 브라간사의 철두철미한 태도는 부자연스러운 면이 없지 않았다. 지나치게 서둘러 떠나려 하지 않았나.
프란세스크처럼 당시 충격에 제정신이 아니었던 사람도 의심할 지경인데, 벨류처럼 교활한 자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리 없다. 더군다나 조카를 싫어한다면 더더욱.
하지만 별다른 행동이 없는 것을 보아, 증거는 없는 모양이다.
“저기, 프란세스크 공.”
리리우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프란세스크를 불렀다.
“말씀하십시오, 전하.”
프란세스크는 리리우를 바라보았다. 공주는 그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하지만 물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숙부의 죽음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 상처를 다시 헤집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왕 폐하께서는 날이 밝기 전에 이곳으로 돌아와야 해요. 폐하를 데리러 가야 하는데 도와주세요…….”
도와달라니. 프란세스크가 기존에 알던 리리우라면, 다짜고짜 그를 붙잡고 따라오라고 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 잠깐이라도 주무시지요. 피곤하실 텐데.”
리리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다시 앉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시녀들이 이불을 가져와 덮어 주었다.
* * *
새벽녘이 되자 리리우는 겨우 일어나 프란세스크와 함께 에르난의 처소로 향했다. 레이테는 프란세스크의 호위를 받아 돌아갔고, 리리우는 태연한 척하며 자신의 방으로 왔다.
의자에 앉아 선잠을 잔 탓에 무척 졸렸고, 얼굴 또한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누구도 리리우의 그런 모습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분명히 이상한 소문이 또 퍼질 거야. 어떡하지…….’
리리우는 고민하면서도, 침대에 눕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
리리우가 다시 기력을 되찾았을 때는, 이미 한낮이 되어 있었다.
궁내에 소문이 돌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정원을 산책하러 나온 리리우는 쑥덕거리는 소리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에르난 왕도 대단하지. 아내가 직접 왔는데 어쩜…….”
“남편 말로는, 사크틸라와 관계를 청산하려는 포석이라던데요. 바르시나는 사크틸라의 전쟁에 휘말려 피해를 봤잖아요.”
“우리 공주께서도 그런 분일 줄은 몰랐지 뭡니까. 왕궁의 영원한 막내인 줄 알았는데. 기사들끼리는 그런 농담을 주고받거든요.”
담장 건너편에 공주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지, 한 무리의 남녀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공주께서도 어쩔 수 없지 않았을까요? 솔직히 에르난 왕이 잘생겼잖아요. 공주가 아니었더라면 제가 침실에 찾아가 봤을걸요.”
“어머, 사람 생각은 다 똑같네요. 저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이런, 기사님 앞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을까요?”
“괜찮습니다, 부인. 그보다 괜찮으시다면 부인의 아름다움을 숭배할 기회를 제게…… 아. 공주 전하.”
가관이다. 듣다 못한 리리우는 담장을 돌아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내가 뭘 한 줄 알고 멋대로 나를 부정한 여자로 만들죠?”
귀부인의 손에 입을 맞추려던 기사가 몸을 움찔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다른 사람들도 깜짝 놀라 리리우를 바라보았다.
“사과해요. 당장.”
또박또박하게 말한 리리우는 대화를 나누던 이들을 노려보았다. 머뭇거리던 그들은 기사를 시작으로 한 명씩 몸을 굽히며 사과했다.
“송구합니다. 전하. 실언을 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여러분이 긍지 높은 헤젤의 귀족이라면, 있지도 않은 일을 믿으며 헛소문을 내는 일은 없어야 할 거예요.”
드레스 자락을 펄럭이며 휙 돌아선 리리우는 정원을 빠져나왔다.
매몰찬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녀가 여태까지 왕궁에서 한 일이라고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귀여움받는 것뿐이었다. 이런 대화를 주고받기는 완전히 처음이다.
이상하고 어색하다.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이제는 단호하게 대처해야 해.’
드레스를 꼭 쥔 리리우의 양손이 떨렸다.
산책은 완전히 망쳤다. 저녁 식사라도 일찍 할 생각에, 리리우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모퉁이를 돌자마자, 맞은편에서 뚜벅뚜벅 걸어오는 브라간사와 마주치고 말았다.
브라간사는 아무 말 없이 허리를 굽혀 공주에게 인사했다. 리리우는 손을 내밀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입만 달싹거리며 서 있었다.
‘이 사람에게도 확실히 말해야 해……!’
하지만 굳은 얼굴과 어두침침하게 가라앉았으면서도 날카로운 눈은 리리우를 얼어붙게 했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브라간사는 무엇을 할까? 위기감을 느낀 그는 어떻게 나올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뒷걸음질 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
공주가 자신의 인사를 받아줄 마음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브라간사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리리우의 옆을 지나쳤다.
리리우는 살벌하게 느껴지는 그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110
두 번째 협상은 오후 늦게 시작되었다.
그러잖아도 전날 협상은 영 좋지 않은 전망을 남기며 끝냈다. 그런데 연회에서의 일, 또 오늘 낮 동안 퍼진 소문으로 인해 회의실은 한겨울인 바깥보다 더 사늘한 기운이 가득했다.
레이테는 의연한 모습을 보이려 애썼다. ‘에르난은 아내가 찾아왔는데도 공주를 만나 밤을 보냈다’라는 소문에 휘둘리지 않아야 했다.
정확히는, 소문의 진상을 알고 있다는 기색을 내비치지 말아야 했다.
* * *
“이제 날이 밝으면 당신과 나, 그리고 리리우 공주에 대한 악질적인 소문이 날 거예요.”
레이테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나른한 손길이 흠칫 멈췄다.
“적극적으로 해명해야 할까요? 실은 내가 이곳에 왔노라고? 당신과 나, 그리고 공주의 명예를 위해서라면 그래야 하겠죠. 또 이 문제를 빨리 해소해야 사크틸라와 바르시나의 갈등도 줄어들 거예요. 하지만 문제는 당신이에요. 당신은 아직 벨류의 포로니까.”
“벨류가 나를 처형할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승전한 조카를 홀대하거나 하나뿐인 손녀를 그런 식으로 이용하는 걸 보니……, 당신의 안전에 대해 안심할 수가 없어요. 다음에는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날지.”
헤젤은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는 나라다. 레이테는 어린 시절 역사를 배울 때부터 그런 소리를 들었다. 실제로 엮이니 실감하게 된다.
“……그렇다면, 날이 밝고서 시스로네스와 상담하는 건 어떻습니까?”
“시스로네스? 당신이 그런 말을 하다니 의외네요.”
“추기경은 당신에게 해가 되는 선택은 결코 하지 않을 겁니다.”
“극단적으로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 당신과 공주가 부도덕하다며 완전히 몰아갈지도 모르는데도?”
레이테는 진지하게 한 말이었는데, 에르난은 어깨를 살짝 들썩거리며 웃었다.
“재밌어요? 난 정말로 걱정된다고요.”
“괜찮을 거라고 봅니다. 당신을 위하는 것만큼이나 벨류의 의도에 말려들어 가기도 싫을 테니까요.”
레이테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남편과 헤어져 자신의 처소로 돌아온 레이테는 아침 기도를 알리는 종이 치자마자 성당으로 향했다. 기도와 이어지는 미사 시간이 이토록 지루하고 답답하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빨리 추기경과 상담해 이 일을 종결짓고 싶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모든 의식이 끝나고, 레이테에게 다가온 시스로네스는 꽤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걱정이 한가득했다.
에르난이 또 리리우와 밤을 보냈더라는 식의 소문을 이미 전해 들은 모양이다. 안절부절못하는 레이테의 모습은 그 소문에 충격을 받아서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의논할 중요한 일이 있어요.”
레이테는 지난밤의 진실에 대해 설명했다.
“당장 알리겠습니다.”
시스로네스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답했다.
“하지만 에르난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요?”
“그분께서는 여태까지 무사히 계셨으니, 앞으로도 어떻게든 잘 버티시면 됩니다.”
“…….”
레이테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시스로네스가 에르난을 어떤 식으로 취급하는지, 잠시 잊고 있었다.
“폐하, 보셨잖습니까. 당장 조금 전 기도 때만 해도 폐하를 힐끔거리는 헤젤 귀족의 시선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폐하께서는 그런 치욕을 당하시면 안 됩니다.”
부부보다 더 복잡하게 상황을 계산하리라 예상했던 시스로네스의 태도는 단호했다. 레이테가 오히려 당황할 정도였다.
어쩌면 에르난은 추기경이 이럴 줄 알고 상담하라 했을지도 모른다. 레이테는 남편을 걱정하는 마음에 망설일 테니까.
“리리우 공주는 앞으로 어떻게 한다 했습니까?”
“침묵은 하지 않겠다. 헤어질 때 이런 말을 듣긴 했어요. 하지만 그녀의 입장 상 적극적인 해명은 힘들 거예요.”
“그렇겠지요. 어젯밤은 아니었다고 하는 게 전부일 겁니다.”
답답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레이테라고 좋아서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에르난의 앞날을 장담할 수 없어서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폐하.”
레이테가 머뭇거리자, 시스로네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하루, 정확히는 오늘 회담만 지켜봐 주십시오. 왕과 브라간사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또 왕의 신변에 대한 일정 수준의 합의를 받아낸 다음 사실을 알리겠습니다.”
“……좋아요.”
* * *
하루의 유예를 얻은 시스로네스는 반드시 성과를 내려고 작정한 듯했다.
“사크틸라와 바르시나는 전쟁의 상흔을 치료하고 평화를 이룩하고자 헤젤을 도울 용의가 충분히 있습니다. 하지만, 돈 에르난과 관련된 사항은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어제 왕을 만나지 않았습니까? 그분께서 무사하신 것을 보고도 그렇게 말씀하시는군요.”
브라간사가 가시 돋친 목소리로 받아쳤다.
“아, 물론 어제 뵈었습니다. 그렇기에 인정할 수 없습니다. 왕을 왕답게 모셔야지요. 폐하께서 어딜 가신다고 방에 가둬만 두십니까?”
“가둬두다니. 그런 적 없습니다. 말씀이 과하십니다. 예하께서는 에르난 왕께서 현재 포로라는 사실을 명심해 주셨으면 합니다만.”
세상 모두가 에르난이 포로 처지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공석에서 입에 올릴 단어는 아니었다. 에르난은 왕이기 때문이었다.
“아니, 돈 에르난은 헤젤의 손님이오. 시정하겠소이다.”
따라서 벨류가 브라간사의 말을 부정한 것 자체는 이상할 일이 없었다. 오히려 상대에게 결례가 되지 않으려면 당연히 그래야 했다.
하지만 벨류가 과연 옳고 그름만을 따져 저런 말을 했을까?
‘브라간사는 여유가 없고, 벨류는 그걸 잘 이용하는걸.’
브라간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회의실에 들어올 때부터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 밤의 일은 그에게도 알려졌을 테니, 심기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닌 듯했다.
반면 벨류의 얼굴에는 여유가 넘쳤다. 이제 슬슬 에르난에 대한 압박을 풀어도 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 핑계로 몸값을 더 받는 편이 그에게는 이득이 될 것이다.
‘공주를 이용해서 사크틸라와 바르시나의 분열을 일으키는 데에는 성공했다고 생각하겠지. 간밤의 일로 초조해져서 이런 요청을 한다고 여길 테니까.’
일단은 벨류의 의도대로 되어갈 분위기이긴 하다. 헤젤이라는 공동의 적을 앞에 두고 있으므로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사크틸라인과 바르시나인이 서로를 불편하게 여기는 기류 정도는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오래 방치하면 결국 갈등은 수면 위로 올라올 것이다. 그전에 사태를 정리해야만 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시정인지 명확히 해 주면 좋겠군요. 그래야 계산하기에도 편하지 않겠어요?”
레이테가 말했다.
“옳은 말씀이시오. 여왕께서는 어떤 것을 원하시는지?”
“그 문제는 남편과 직접 협의하고 싶은데요. 남편의 이야기를 들어봐야지요. 내일 이어서 이야기를 나누면 어떨까요? 에르난도 이 자리에 함께 해서.”
* * *
두 번째 협상은 순식간에 끝났다. 벨류가 간단하게 요청을 수용함으로써 일단은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당장 눈에 보이게 변한 것은 없다. 리리우와 관련된 일을 해명하지도, 무지막지한 배상금을 깎지도 않았다.
금액이 금액인 이상 협상은 길어질 수밖에 없다. 답답해도 차근차근 한 단계씩 일을 진행해야 한다.
따라서 레이테는 바다가 보이는 정원을 거니는 내내 그녀를 따라다니는 호기심 가득한 눈길에 시달려야 했다.
수군거리는 소리도 들렸지만, 헤젤어라 알아듣기 쉽지 않았다. 애초에 레이테는 그런 대화를 애써 들을 마음도 없었다.
‘멋대로 소설이나 쓰고 있겠지.’
그런 시선을 받아가면서까지 레이테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하나였다. 에르난이 머무는 곳에서 보이는 정원이기 때문이었다.
레이테는 고개를 살짝 들어 건물 위층의 창문으로 눈길을 주었다. 창문 안쪽의 커튼이 살짝 흔들렸다.
커튼으로 몸을 숨기고 바깥의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의 모습을 상상하니 꽤 귀여웠다. 웃음이 절로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서글픈 상황이기도 하다.
‘오늘만 참으면 돼.’
내일 협상이 잘 진행된다면, 이런 식으로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진다. 일단 그것만으로도 한결 여유로워진다.
그리고 내일 남편과 함께한 협상 자리에서, 레이테는 사실을 밝힐 것이다.
* * *
브라간사 공작은 시내에 저택을 가지고 있지만 왕궁에서 머무를 때가 많았다. 하지만 오늘 그는 협상을 마치자마자 저택으로 돌아왔다.
불쌍하고 한심한 남자로 조롱받는 것도, 작정하고 그를 박대하는 왕도 지긋지긋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뻔히 알면서도 냉철한 모습을 보인 여왕도 불쾌했다. 자신과는 정반대였다.
온 세상이 자신을 바보로 만들고 있다.
하루 종일 눌러 담았던 짜증을 어떻게 터뜨릴지 고민하는데,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사크틸라의 추기경이었다.
브라간사가 응접실로 가보니, 시스로네스는 한쪽 벽을 장식한 도자기 타일을 감상 중이었다.
“예하.”
“아, 공작. 불쑥 찾아왔는데 맞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이런 걸 보니 반가워서요. 젊을 때는 어디를 가도 볼 수 있는 장식이었는데. 감상을 조금 더 해도 괜찮겠습니까?”
파란 유약으로 그림을 그린 도자기 타일은 원래 사크틸라의 유행이었다. 브라간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스로네스는 꽤 오랫동안 벽을 바라보았다.
“훌륭한 작품입니다. 좋은 구경을 했군요.”
감상을 다 마쳤는지 시스로네스가 돌아서서 말했다. 브라간사는 그를 자리로 안내했다. 자리에 앉은 시스로네스가 물었다.
“공의 모친께서 이런 장식을 좋아하셨다지요? 결혼식을 치를 때 관심을 갖게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지금도 좋아하십니다.”
“과연. 브라간사에 있는 공작저에서도 본 기억이 납니다.”
술잔을 집어 들던 브라간사의 손이 멈칫했다.
“그곳에 가신 적이 있습니까?”
그의 영지인 브라간사는 헤젤 북부의 시골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주변 경관이 수려한 편이긴 하지만 일부러 찾아갈 만한 곳은 아니다.
시스로네스가 브라간사를 빤히 바라보았다. 브라간사의 얼굴 이곳저곳을 꼼꼼하게 관찰하는 시선이었다.
“눈 색만 같은 줄 알았는데, 그래도 부친을 닮은 부분이 제법 있으시군요.”
나지막한 말은 어쩐지 소름이 돋았다. 브라간사는 떠오르는 생각을 무시하려 했다.
어린 시절, 아무것도 몰랐기에 내보일 수 있었던 투명한 욕망.
들키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이루지도 못할 소망을 품었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이 치욕스러웠기에.
“브라간사에는 이십여 년 전 한 번 갔습니다. 선왕 폐하의 말씀을 공의 부친께 전하기 위해서였지요. 무슨 말씀이었는지, 공은 알고 계시잖습니까?”
브라간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당신이…… 그때 그 사제입니까?”
“수도복을 입고 후드까지 쓰면 그 안의 사람은 알아보기 힘들지요. 더군다나 제가 딱히 이름을 밝히지도 않았으니, 모르실 수밖에 없습니다.”
가슴이 홧홧해지는 수치심이 먼저 브라간사를 쓸고 지나갔다. 그에 이어 찾아온 것은 두려움이었다.
이미 몇 차례나 만난 사이건만, 이제야 옛날이야기를 꺼내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테니까.
“짧은 만남이었습니다만, 공의 모습이 대단히 인상적이었기에 저는 그때 기억이 생생합니다.”
“……예하께서는 기억력이 좋으시군요.”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했다. 어린아이의 말에 사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하지만 거짓이었을까? 아버지가 굳이 거짓을 말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면 시스로네스가 감정을 숨긴 것인가?
당혹스러워하는 브라간사의 얼굴을 보며 시스로네스는 작게 웃었다. 브라간사는 그 웃음에서 엿보이는 여유가 불쾌했다.
그는 저런 웃음을 잘 알았다. 벨류가 자신의 조카에게 자주 보이는 웃음이었다.
“저도 한동안은 완전히 잊고 살았던 일입니다. 그런데 제 여왕께 청혼하셨으니, 어찌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111
몇 년 전, 이베로 반도를 뜨겁게 달궜던 문제 중 하나는 사크틸라 여왕 레이테의 결혼이었다.
당시 벨류는 미혼인 아들 엔히크를 여왕과 결혼시키고 싶어 했다. 하지만 엔히크는 부왕의 명을 거부했다. 부자는 심하게 다퉜고, 결국 늙은 왕이 직접 여왕에게 청혼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여왕이 미치지 않는 한 벨류와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 그 우스운 상황을 보고, 브라간사는 왕실의 다른 이들이 모르게 여왕에게 청혼했다.
벨류 같은 자도 청혼하는데 자신이라고 못 할 이유가 있냐는 자조적인 마음에서였다. 물론 그도 청혼이 받아들여지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어떤 반응도 없던 데에는 당황했다. 모욕감을 느끼기도 했다. 교류가 없었다고는 하나 친척이지 않나?
브라간사는 청혼서에서 자신이 여왕의 친척임을 밝혔다. 그럼에도 무시당했다.
“공의 그 청혼은 여왕께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제 선에서 폐기했지요.”
설마 그것이 아예 전해지지 않았을 줄은 몰랐다. 브라간사는 비로소 레이테를 만났을 때 그녀가 보였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여왕은 그를 모른 척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몰랐다.
“유감스럽지만 공께서도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당시 사크틸라의 상황에서, 왕위 계승권과 연관이 있는 사람이 또 등장하면 복잡해지거든요. 파장을 최소화하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시스로네스는 차분하게, 오래전 만났던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말했다.
“그걸 내가 왜 이해해야 합니까? 지난 일은 왜 꺼내는 것이고?”
브라간사는 초조하고 불안한 기색을 내비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시스로네스의 이미 다 안다는 식의 말과 표정은 그 시도 자체가 무익하다는 사실을 그에게 알려 주었다.
“혹시 아직도 그 자리에 관심이 있으신가 해서 말입니다. 듣자 하니, 공께서는 조금 독특한 취향을 갖고 계신다고.”
“……그래서 내가 포로의 아내를 뺏을 것이다? 마침 그 포로가 나와 혼담이 오가는 여자를 뺏었으니?”
브라간사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남편을 전장으로 보내고 혼자 남은 여왕을 만났을 때, 그는 여왕을 뺏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글쎄요.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정말 뺏고 싶은 것을 뺏을 수 없으니 화풀이 삼아 만만한 다른 사람을 뺏는 것 아닙니까?”
브라간사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순간적으로 숨이 막힌 줄 알았다.
저 남자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심지어 벨류보다 더. 벨류는 브라간사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거의 모른다.
“공께 여왕은 뺏어야 할 대상이 아니지 않습니까? 굳이 뺏는다면 그 옆, 아니면 여왕께서 앉으신 자리 자체겠지요.”
브라간사는 천천히 손을 뻗어 허리에 찬 검을 쥐었다. 이대로 검을 뽑아 추기경의 목을 치고 싶었다.
시스로네스의 말이 옳다. 아무것도 모르고 품었던 갈망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결정적인 계기는 사크틸라와 헤젤의 계승법 차이였다. 사크틸라에서는 가능한 여성의 계승이 헤젤에서는 인정되지 않았다.
따라서 벨류의 누나인 브라간사의 어머니에게는 어떤 기회도 없었다. 그저 가족을 도구 취급하는 동생에게 냉대받을 뿐이었다. 그 아들인 브라간사에게도 물론 기회는 없다.
헤젤과 사크틸라의 계승법이 서로 반대였다면? 딸밖에 없던 알레한드로의 뒤는 누가 이었을까? 아들을 모두 잃은 벨류의 후계자는 누가 될까?
그 어처구니없음이 브라간사를 빠져나올 수 없는 갈증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허망함은 다시 과거의 기억을 건드렸다.
그때 아버지가 왕이 되었다면?
아무리 법적으로 레이테가 왕이 될 수 있다지만, 여성 군주는 사크틸라에서도 예외적인 존재였다. 더군다나 당시 레이테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라도, 알레한드로는 사촌 동생을 왕으로 세우려 하지 않았나?
“…….”
오랫동안 쌓인 생각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지만, 브라간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야만 한다. 왕이라는 존재는 자신의 자리를 탐내는 이를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여왕의 옆자리를 차지한 남자를 사로잡고 공께서 얼마나 기뻐했을지 상상이 됩니다. 그러니 지금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참담하겠지요.”
검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물론이고말고. 참담해서 다 찔러 죽이고 싶은 심정이다.
에르난은 정말로 브라간사의 것을 빼앗은 남자다. 먼저, 레이테에게 주고 만 왕관의 옆자리를 가져갔다. 그 자리는 지금 에르난이 그러하듯이 사크틸라의 왕으로서 실권을 갖고 군림할 수 있는 자리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브라간사의 비뚤어진 욕구를 조롱하듯 그가 차지하려는 여자마저 에르난은 가져가 버렸다.
분명히 에르난은 브라간사에게 붙잡혀 왕궁에 가둬진 포로인데도.
“밤중에 왕궁 밖인 이곳까지 일부러 오셔서 사람을 조롱할 정성이라니 대단하십니다.”
손은 계속해서 검을 만지작거렸지만, 결국 브라간사는 빈정거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설마 제가 고작 그러자고 왔겠습니까? 벽타일을 보니 예전 생각이 났을 따름이지요.”
브라간사는 코웃음 쳤다. 전혀 믿을 수 없는 소리였다. 설령 사크틸라풍의 장식이 없었다 해도, 시스로네스는 어떤 핑계를 대서든 옛날이야기를 꺼냈을 것이다.
시스로네스도 브라간사가 설마 그 말을 믿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은 듯했다. 그는 허허 웃고 나서 말했다.
“저는 공을 도울 용의가 있습니다.”
“……돕다니?”
“사크틸라 왕좌는 물론 아닙니다. 하지만 공이 앉을 수 있는 다른 자리가 있지 않습니까?”
브라간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됐습니다. 돌아가시지요.”
더 들어서는 안 된다. 대화를 나눈 것만으로도 브라간사는 반역자가 될 수 있다.
딱히 벨류에게 왕으로서 충성하기 때문에 단호하게 대화를 끊은 것은 아니었다.
벨류가 죽도록 미워도 브라간사는 참아야만 했다. 벨류는 왕이니까. 지난 시절 브라간사의 어머니를 박대했던 벨류는 지금도 같은 인간이었다. 리리우를 다른 남자의 침실에 던져 넣었으니.
누이와 손녀에게도 그러한 자인데, 조카 따위는 내키면 아예 목숨을 끊을 수도 있다.
“늙은이를 쫓아내시렵니까? 그렇다면 저는 벨류 왕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눌 수밖에 없습니다.”
강제로라도 시스로네스를 밖으로 내보내려던 브라간사가 멈칫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제가 지금 이곳에 온 이유는, 사크틸라와 바르시나의 협상 상대 중에서 가장 말이 통할 사람이 공이라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공께서 대화를 거절하시니, 왕에게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성공적인 협상을 위해서 저는 제가 아는 모든 것을 왕에게 밝혀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눌 겁니다. 벨류 왕은 자신이 모르는 공에 대한 이야기에 꽤 흥미를 느끼지 않을까 싶군요.”
“지금…… 협박하는 겁니까?”
자리에 앉은 채로 브라간사를 올려다보던 시스로네스가 씩 웃었다.
시스로네스는 협상이라고 말했다. 애초에 그가 여왕을 따라 헤젤에 온 목적이 협상이니, 브라간사를 찾아온 이유 역시 근본적으로는 협상 때문이다.
“고작 배상금을 깎으려고 이러십니까?”
“고작이라니요. 공께서는 그 금액을 보고도 고작이라는 말이 나오십니까?”
하긴. 브라간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헤젤 내부에서도 지나치게 많이 요구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 배상금 중에서 공께 돌아가는 것은 단 1두카도도 없지요.”
벨류는 브라간사가 에르난을 대접하는 데 든 비용을 배상금에 포함하지 않았다. 순수한 호의 운운하면서.
“전쟁에서 승리해 엔히크 왕자의 원수를 갚고, 에르난 왕을 사로잡은 사람이 누구인데, 제대로 된 포상 하나 없단 말입니까?”
시스로네스는 노골적으로 브라간사를 부추기고 있다. 그런 줄 알면서도 브라간사는 시스로네스의 말을 막지 못했다.
“아 참, 공께 알려드리려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어차피 내일 다 알려지겠으나, 공께서는 피해를 본 당사자이니 먼저 말씀드리지요. 에르난 왕은 리리우 공주와 동침한 일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왕이 공주를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어제는 공주가 아니라 아내와 만나 밤을 보냈지요.”
“……뭐?”
“내일 벨류 왕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해도, 크게 변하는 건 없을 겁니다. 어차피 돈 에르난을 헤젤의 손님으로 대접하겠다고 한 이상, 소문은 이제 쓸모를 다했습니다. 벨류 왕이 우발적인 오해에 유감을 표하는 선에서 이 일은 끝나겠지요.”
벨류는 진심으로 미안한 척할 것이다. 한술 더 떠서 사과의 뜻으로 ‘부부’를 엄청나게 대접할지도 모른다. 손녀에게도 비슷하게 대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피해자임에도 당사자가 아닌 브라간사는 사과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소문의 쓸모는 무엇이었을까? 사크틸라와 바르시나의 분열? 하지만 그 실상이 얼마나 곪아 있든, 일단 두 나라는 여왕의 지휘 아래 한 편이 되어 헤젤에 왔다.
‘……그게 전부일 리가 없지.’
브라간사도 소문을 부추기던 왕의 행동이 자신을 겨냥한다는 정도는 알았다.
이 소동이 일단락된다 해도 그는 아무것도 보상받지 못한다. 궁정의 2인자로, 전쟁의 승리자로 빛났던 브라간사 공작은 이미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다.
“공작. 화가 많이 나시겠지만 침착하셔야 합니다. 벨류 왕은 핑계가 생기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잖습니까? 작은 반기 하나만 눈에 보인다 싶으면…… 그다음은 아시리라 믿습니다.”
“…….”
브라간사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시스로네스를 바라보는 그의 어두운 눈에 독기 어린 빛이 비쳤다.
“협상 때 여왕의 의연함에 감탄했는데, 그 감탄의 방향을 조금 바꿔야겠군요. 사실을 다 알면서도 비웃음을 하루 종일 그대로 받다니. 인내심이 대단합니다.”
브라간사가 빈정거렸다.
‘하긴, 갑옷을 입고 나타날 때부터 보통 의지가 아닌 것처럼 보이긴 했지.’
고작 가짜 소문 따위에 휘청거린 자신과는 격이 다르지 않나.
사크틸라에서 처음 만났을 때에도, 바르시나에서 다시 보았을 때에도, 그리고 지금도 그 여자는 만만했던 일이 없었다.
짙은 패배감에 브라간사는 헛웃음을 쳤다.
전쟁의 승리자였던 그는 온갖 것에서 패배감에 몸부림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승자가 될 수 있다는 유혹은 거절하기 힘들었다. 적의 술수에 말려드는 것이라 해도.
브라간사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고 물었다.
“……저는 사크틸라를 침공하고 승리를 거둔 사람입니다. 예하께서는 그런 일이 다시 없으리라 믿고 제게 이런 제안을 하십니까?”
“아, 헤젤은 원래 틈만 나면 사크틸라를 노리지 않습니까? 그러니 침공이 없으리라는 믿음은 애초에 없습니다.”
시스로네스가 싱긋 웃었다.
* * *
전날 밤에 여왕의 일로 잠을 이루지 못했던 프란세스크는 낮에 있었던 두 번째 협상에 참가하지 않고 처소에서 휴식을 취했다. 애초에 그의 일은 협상이 아니라 염탐이다.
낮잠을 실컷 자고 눈을 뜨니 해가 거의 저물어 있었다.
‘뭘 하지. 에르난이라도 만나고 올까.’
어차피 내일 협상 때 만나겠지만, 오늘 일을 미리 알려 주면 좋을 것이다.
‘……아니, 그 내용이야 이미 어떤 식으로든 전달되었을 텐데.’
프란세스크도 전해 들은 협상 내용을 에르난이 모를 리가 없다.
고민하던 프란세스크는 가볍게 차려입고 왕궁 밖으로 나왔다. 사크틸라와 바르시나 협상단의 동향은 일일이 감시당하고 있겠지만, 프란세스크에게 그 정도를 피하는 것쯤은 문제도 아니었다.
해가 진 리스보아 시내는 한산한 편이었다. 왕국의 수도치고는 조용한 도시였다. 좀 더 인적이 끊기면 파도 소리마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산책하는 기분으로 길을 걷던 프란세스크의 눈앞으로, 익숙한 남자가 지나갔다.
색이 어두운 망토를 둘렀지만, 프란세스크는 분명히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시스로네스 추기경이었다.
추기경은 프란세스크를 보지 못한 듯했다. 다급한 걸음으로 걷던 그는 어느 저택 앞에 멈춰 섰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그가 안으로 들어갔다.
프란세스크는 저택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의 눈에도 익은 문장의 부조가 정문 위에 새겨져 있었다.
‘브라간사 공작.’
그때 저택 한쪽의 창문이 밝아지는 것이 보였다. 프란세스크는 발소리를 죽이고 창가로 다가갔다.?
#112
요즘 리리우는 수도원으로 다시 갈지 말지 고민 중이었다.
세 번째 협상을 시작하면서, 회의장에 함께 앉은 부부왕은 리리우와 관련된 소문의 진상을 밝혔다. 사실을 확인하겠다고 벨류가 리리우를 불렀을 때, 그녀는 진심으로 두려움에 떨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간신히 답한 “소문은 거짓이에요.”라는 말에 할아버지는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유언비어에 고생이 많았다고 말할 뿐이었다.
‘누가 그 소문을 주도했는데.’
지긋지긋했다. 어쨌거나 소문이 일단락되었으니, 다시 왕궁을 떠나도 괜찮지 않을까?
수도원 생활은 지루하지만 왕궁에서 불안하게 사는 것보다는 낫다.
그렇다. 리리우는 여전히 불안했다. 소문은 해결되었으나, 그녀에게는 다른 문제가 남아 있었다. 진짜로 리리우를 가지려는 남자와의 일은 전혀 해결된 것이 없었다.
완전히 우습게 되었지만, 별일이 없었다고 하니 브라간사 공작은 다시 공주와의 결혼을 노리지 않을까? 이런 이야기가 다시 왕궁을 떠돌았다.
브라간사가 요즘 무엇을 하는지는 모른다. 협상에만 꾸준히 참가한다고 했다.
어쨌거나 리리우는 줄곧 시달리던 악몽이 현실화될까 긴장하며 매일 밤을 보냈다. 소문의 진상이 알려진 지 일주일이 지난 오늘 밤도 마찬가지였다.
‘……졸려.’
베개에 몸을 기대고 앉은 리리우는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며 졸고 있었다. 자고 싶지만 불안해서 그럴 수 없었다.
정말로 본능이 의식을 앗아가기 전까지, 리리우는 필사적으로 잠들지 않고 버텼다.
“전하.”
이런 식으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릴 때, 어떻게든 도망칠 수 있도록.
“!”
리리우는 벌떡 일어났다. 서랍장을 열고 단검을 꺼내 손에 쥔 리리우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문밖에서 난 소리인가? 아니면…….
“꺄악!”
창가에 나타난 남자의 그림자에 리리우는 놀라 소리 지르며 손에 든 검을 떨어뜨렸다.
똑똑. 남자가 창문을 두드렸다.
“전하. 죄송하지만 창문 좀 열어 주십시오.”
목소리는 남자가 맞았다. 다만 브라간사는 아니었다.
“어…… 프란세스크 경?”
리리우는 창가로 다가가 곧바로 문을 열어 주었다. 프란세스크는 가뿐히 몸을 움직여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 2층인데?”
“제가 전하라면 주변에 심은 나무를 정리하도록 시종들에게 명할 겁니다. 저 같은 사람이 나무를 못 타도록. 그런데 아무리 제가 열어 달라 했습니다만 너무 쉽게 열어 주시는 것 아닙니까?”
“프란세스크 경은 괜찮아…….”
리리우는 바닥에 떨어진 검을 발로 밀어내며 말했다. 프란세스크는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음 지었다.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검은 나를 지키는 무기가 아니라 나를 공격하는 무기가 됩니다. 그러니 만약의 경우에는 꽃병 같은 것을 이용하세요.”
“아…….”
“그리고 불안하시다면 호위 기사를 다른 이로 교체하는 편이 좋을 겁니다. 그 기사는 브라간사의 용병으로 오래 일했습니다.”
“정말?”
리리우는 깜짝 놀랐다. 그런데 프란세스크는 어떻게 그런 것을 다 알까? 리리우가 눈을 깜박거리자 프란세스크가 말했다.
“전하와 브라간사의 결혼 이야기가 왕궁 안에서 다시 떠돌길래, 며칠 동안 좀 알아봤습니다.”
“고, 고마워.”
브라간사는 사크틸라와 바르시나에게 적이다. 그의 정보를 캐내는 중에 리리우의 일도 알게 된 듯했다.
“그런 이유로 기사와 마주치기 난감해 창문으로 들어오고 말았습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리리우는 괜찮다고 답하려 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밤중에 창문을 통해 공주의 방으로 들어오는 일이 괜찮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히 괜찮다고 생각했다.
‘잠이 덜 깼나?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야…….’
“부탁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무슨 일인데?”
“저를 데리고 에르난 폐하께 가 주십시오.”
“어? 어째서……?”
리리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와 에르난의 염문설은 더 이상 없다. 사크틸라인도 바르시나인도 에르난을 만나러 방에 갈 수 있다. 아무도 막지 않는다.
하지만 부부왕은 여전히 서로 다른 처소를 사용했다.
벨류가 에르난을 손님이라고 표현했다는 이야기는 리리우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에르난의 처지가 본질적으로 포로라는 점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아직 몸값을 받지 않았으니까.
“물론 제가 그냥 가도 폐하를 뵐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이 벨류 왕에게 보고되겠지요.”
“몰래 가야 할 일이 있는 거야?”
프란세스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낮에 여왕께서 이곳에 다녀가셨지요?”
“응, 맞아.”
“남편에게 줄 헤젤어 책을 빌려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가져가지 않은 책이 있어 전하께서 대신 전달해 주러 간다고 치지요.”
“뭔가 엉성한 핑계네…….”
리리우는 머뭇거리면서도 망토를 꺼내 입었다.
프란세스크도 후드를 덮어 얼굴을 가렸다. 방을 둘러본 그는 책 두어 권을 꺼내 들었다.
“……후드로 얼굴을 가린 시종이라니, 의심받을 거야.”
“별일 없을 테니 괜찮습니다. 조금 서둘러서 갑시다.”
“내가 더 불안해지는데…….”
하지만 방을 나와 에르난의 처소로 향하는 동안, 리리우와 프란세스크는 단 한 사람과도 마주치지 않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심지어 에르난의 방문을 지켜야 할 헤젤인 경비병도 보이지 않았다.
“오늘 밤 유성우가 쏟아진다고 합니다. 밤하늘이 맑은 데다 달도 밝지 않아 잘 보일 것 같다고 했더니 하나둘씩 밖으로 나가더군요.”
전쟁 협상을 위해 외국인들이 많이 왔는데 유성우에 무너지는 경비라니. 리리우는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유성우라는 말에 리리우 본인도 귀가 솔깃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프란세스크가 에르난의 방문을 두들겼다.
“폐하.”
“세스크? 들어오게.”
에르난의 목소리가 들렸다. 프란세스크가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 전하. 저와 같이 들어가시지요.”
에르난은 프란세스크의 뒤를 따라온 리리우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리리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에르난에게 인사했다. 프란세스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리리우를 창가로 이끌었다.
“이 방은 아시다시피 왕궁 끄트머리에 있어서 주변에 시야를 가리는 건물이 없지요. 더군다나 높은 곳에 있다 보니 하늘을 보기에는 제격입니다. 여기에서 유성우를 구경하시다가, 제가 돌아갈 때 같이 갑시다.”
“아, 아……. 응. 고마워.”
리리우는 엉거주춤 창가로 다가갔다. 프란세스크의 말대로 밤하늘이 무척 잘 보였다.
“폐하, 비밀리에 말씀드릴 것이 있어 이 시간에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프란세스크는 사크틸라어로 말했다.
“아, 괜찮네. 그런데…….”
에르난이 리리우에게로 힐끔 시선을 주었다. 리리우는 하늘을 감상하는 척했으나, ‘비밀’이라는 단어를 듣고 긴장하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공주께서는 유성우를 구경하는 것일 뿐인걸요.”
프란세스크가 어깨를 으쓱였다. 에르난은 곧 친구의 의도를 깨달았다.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도, 공주에게 일부러 들려줄 생각이군.’
에르난의 헤젤어 실력은 썩 훌륭하지 못했다. 리리우의 바르시나어 수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최근 협상에서 이상한 점을 느끼지 않으셨습니까?”
“이상하다면 늘 이상하지. 헤젤은 양보할 생각이 없고, 우리는 순순히 돈을 지불할 생각이 없고. 늘 신경전만 벌이다가 다들 지친 상태로 끝나지 않나.”
프란세스크에게 맞춰, 에르난도 사크틸라어로 답했다.
“유독 강경하게 상대에게 양보하려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주로 목소리 큰 사람들이 그렇지. 시스로네스, 코른……. 헤젤 쪽에서는 브라간사. 아, 벨류는 오히려 타협할 생각이 꽤 있어 보이는데 브라간사 쪽이 무척 완강해.”
“그렇겠지요. 그리고 코른 후작의 경우, 폐하께서도 아시잖습니까? 그분은 원래 타협을 모릅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웃었다.
“그러면 시스로네스와 브라간사에 대해 할 말이 있다는 뜻인가?”
“예. 실은 두 번째 협상이 있던 날. 시내의 브라간사 공작 저택에서 두 사람이 만났습니다.”
프란세스크는 리리우를 힐끔 살폈다. 리리우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분명히 이쪽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것이다.
“추기경은 브라간사의 어린 시절에 대해 잘 아는 듯했습니다. 브라간사는 과거 이야기에 상당히 예민하게 반응하더군요.”
“무슨 이야기를 나눴길래?”
“전후 사정은 모릅니다. 다만 브라간사는 자신이 왕좌를 빼앗긴 처지라고 생각합니다.”
리리우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프란세스크는 그것을 못 본 척했다.
“사크틸라 왕좌 말인가? 헤젤은 바르시나처럼 여성 계승이 불가능하니 그런 생각을 갖게 된 모양이군.”
“그리고 헤젤의 왕좌에 대해서도 비슷한 마음을 가진 듯했습니다. 헤젤은 현재 왕위 계승자가 없으니까요.”
유성우가 쏟아지는지, “우와” 하는 감탄사가 창밖에서 어렴풋이 들렸다. 하지만 방 안은 적막에 잠겼다.
“시스로네스는 배상금을 받아 봤자 브라간사에게 돌아가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더군요. 브라간사는 꽤나 마음이 동했을 겁니다. 더군다나 왕에 대한 불만이 많을 테고.”
“그런 것치고는 배상금을 깎을 마음이 전혀 없어 보이던데.”
“시간 끌기지요. 두 사람이 따로 만나는 것을 몇 번 더 확인했습니다. 둘의 협의가 끝나면, 브라간사는 태도를 바꿀 겁니다.”
“그런 일이 있다면 적어도 레이테에게는 알렸어야지…….”
에르난은 완전히 모르는 일이었다. 레이테도 모를 듯했다. 레이테가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에르난에게 말해 줬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스로네스는 왜 그 일을 몰래 진행하려 할까?’
“브라간사가 대가도 없이 시스로네스를 돕지는 않겠지. 배상금의 일부를 브라간사에게 내어주겠다고 하던가?”
“그것도 없지는 않습니다만, 더 큰 약속이 있지요.”
“그게 뭔가?”
이제 리리우는 아예 고개를 돌려 프란세스크와 에르난을 보고 있었다.
“벨류가 브라간사를 싫어하는 것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브라간사도 벨류를 싫어합니다.”
프란세스크는 즉답을 피했다. 하지만 의미를 전달하기에는 충분했다.
“제가 알아본 바로, 일단 두 사람 사이에서만 오가는 논의입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모르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그래서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그래, 고맙네. 레이테와 이야기를 해 봐야 할 것 같아.”
할 말을 다 마친 프란세스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리우는 황급히 몸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는 척했다.
“전하, 유성우는 어땠습니까?”
프란세스크가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응? 좋았어. 폐, 폐하. 덕택에 좋은 구경을 했습니다.”
“아…… 그래요. 다행입니다.”
리리우와 에르난은 어색하게 말을 주고받았다.
“이만 돌아갈까요? 저도 용건을 끝냈습니다. 아 참, 폐하. 책을 몇 권 가져왔으니 읽으시지요.”
프란세스크는 리리우의 방에서 가져왔던 책을 에르난에게 건넸다.
리리우가 보지 못한 사이, 프란세스크는 책 안에 몰래 편지를 끼워 넣었다. 시스로네스와 브라간사의 일에 대해 프란세스크가 알아낸 더 자세한 것들이었다.
대화는 리리우에게 들려주기 위해 나눴을 뿐이다.
브라간사가 헤젤의 왕위를 탐낸다고.
“그럼 이만. 좋은 밤 보내십시오. 아침에 뵙겠습니다.”
프란세스크는 엉거주춤 일어난 리리우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두 사람은 계단을 내려가 아래층 복도를 걸었다.
“사람들도 슬슬 돌아올 겁니다. 여기서 갈라지는 편이 좋겠습니다.”
“안 돼.”
리리우는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
“어떻게 공주가 밤에 혼자 돌아다닐 수 있어? 방까지 데려다줘.”
공주는 밤에 혼자 돌아다닐 수 있다. 레이테를 에르난의 방에 안내했던 리리우는 혼자서 다시 레이테의 처소를 찾지 않았나. 따라서 리리우의 말은 억지였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프란세스크는 그녀의 명령에 가까운 부탁을 받아들였다. 애초에 그도 억지를 써서 리리우의 방에 들어갔고, 또 리리우를 데리고 에르난을 보고 왔으니까.
‘하나쯤은 억지를 받아줘도 괜찮겠지.’
그리고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리리우는 쓸 줄도 모르는 검을 꺼내 들 만큼, 두려움에 빠져 있었다.
공주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에르난과의 가짜 소문을 용인할 정도로 싫어하는 사람, 브라간사임이 틀림없다.?
#113
“경비병이나 시종들이 돌아오기 전에 빨리 갑시다.”
프란세스크는 리리우를 데리고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복도 반대편에서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무래도 나갈 때 또 창문을 이용해야 할 모양이다.
“편히 쉬십시오.”
방에 들어간 프란세스크는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을 열자 방 안으로 찬바람이 확 들어왔다. 리리우가 몸을 움츠렸다.
“저, 저기.”
“예?”
“추운데 창문 좀 닫아 줄래?”
프란세스크는 공주의 말이 단순한 부탁처럼 들리지 않았다. 아직 돌아가지 말라는 뜻인가? 그는 창문을 닫고 리리우에게 다가갔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도와줘. 하룻밤이라도 편안하게 자고 싶어.”
리리우는 무척이나 간절한 눈빛으로 프란세스크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공주가 제정신인가? 프란세스크는 당황했다. 그는 슬금슬금 공주에게서 멀어졌다.
“전하, 그건 좀…….”
“보초를 서 주면 안 될까? 누가 들어오지 않게.”
“……예?”
뒷걸음질 치던 프란세스크의 움직임이 멈췄다.
“나도 프란세스크 경의 부탁을 들어줬잖아. 그러니까 이번에는 내 부탁 좀 들어줘. 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무서워서 잠을 잘 수가 없어.”
“…….”
숙면을 취하고 싶다는 이야기건만, 프란세스크는 다른 쪽으로 해석하고 말았다. 밤중에 남녀가 침실에서 하는 일이라든가…….
‘미쳤군.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헤젤 궁정의 귀부인 중 일부는 바르시나의 젊은 공작을 향한 사적인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프란세스크는 그들을 무시했다. 적지 한복판에서 연애에 빠져 긴장을 푸는 일은 없어야 했다.
그래서 착각한 것일 터다.
“당신이 지켜준다면 안심하고 잘 수 있을 것 같아.”
다행히도 리리우는 프란세스크의 민망해하는 기색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프란세스크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고개를 끄덕이고 탁자 앞에 놓인 의자를 들어 문 쪽에 놓았다. 사실 일부러 문 앞에서 자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의자가 원래 있었던 곳은 공주의 침대와 너무 가까웠다.
“……무서운 게 뭔지는 안 물어봐?”
침대로 올라가려던 리리우가 뒤를 돌아보고 물었다.
“답하기 괴로우실 것 같으니까요.”
어차피 프란세스크는 리리우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았다.
리리우가 침대에 눕자, 프란세스크도 의자에 앉아 눈을 가볍게 감았다.
문밖에서 경비병들의 말소리가 조그맣게 들렸다. 중간에 놀다 왔지만 들키지 않아 신난다는 대화였다.
‘바보들…….’
저렇게 못 미더운 자들이 문을 지키니, 누가 들어오지 않을까 공주가 염려할 만도 했다.
“으, 으으…….”
얕은 잠에 빠졌던 프란세스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리리우의 신음 때문이었다.
프란세스크는 자리에서 일어나 공주에게 다가갔다.
똑바로 누운 리리우의 자세는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뻣뻣하게 뻗은 팔다리가 한 번씩 경련했다.
“흐윽, ……, 시…… 싫!”
무슨 악몽을 꾸는 걸까? 프란세스크는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대신, 리리우를 흔들어 깨웠다.
“아악…… 읍!”
리리우는 고함을 지르며 눈을 떴다. 프란세스크는 황급히 그녀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소리를 듣고 밖에서 사람이 들어오면 곤란해질 것이다.
“죄송합니다, 전하. 안 좋은 꿈을 꾸시는 것 같기에.”
프란세스크는 손을 치웠다. 리리우는 숨을 헐떡이며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 고마워.”
리리우는 부끄러운 듯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수줍어하는 목소리에는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프란세스크는 피식 웃음 지으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잘 자라는 말을 하려던 프란세스크는 문득 떠오른 생각을 말했다.
“전하, 그 사람이 싫으면 좀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편이 나을 겁니다. 물론 그러기 쉽지는 않겠으나, 가만히 있으면 정말로 그의 의도대로 끌려다닐지도 모르니까요. 적어도 이 문제에서 왕께서는 전하의 편이 맞을 겁니다.”
사실 프란세스크도 장담할 수 없었다. 벨류는 이미 손녀를 악질적으로 이용했으니까. 하지만 그가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리리우는 오늘 밤 들은 바르시나인 두 사람의 대화를 벨류에게 전해야만 한다.
잠조차 설칠 만큼 고통에 시달리는 모습에 놀라기도 했고. 누구라도 걱정할 수밖에 없지 않나.
“……날이 밝으면 할아버지를 찾아가서 이야기할 거야.”
한참 침묵하던 리리우가 말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아는구나.”
“무엇을요?”
“내가 누구를…… 아, 아니. 이만 잘게. 고마워.”
리리우는 몸을 웅크리고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밖이 밝아오고, 프란세스크가 창문을 열어 나갈 때까지 리리우는 신음을 흘리지도 잠에서 깨지도 않았다.
* * *
레이테는 아침마다 에르난의 방을 찾아갔다. 밤은 함께 보낼 수 없어도, 아침은 이런 식으로 같이 맞이한다.
이제 꽤 익숙해진 방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가자, 아직 잠에 빠진 에르난이 보였다. 레이테는 그에게 다가가 입을 맞췄다.
가볍게 입술을 맞댔다가, 혀를 살금살금 움직여 살짝 열린 남편의 입가를 간지럽힌다.
몸은 저절로 기울어져 에르난을 안지 않을 수 없다. 온몸에 전해지는 남편의 따뜻한 온기가 좋았다.
에르난이 몸을 뒤척였다. 곧 그의 팔이 레이테를 꽉 끌어안았다. 깊고 진한 키스가 이어졌다.
“안녕. 잘 잤어요?”
한 곳에서 따로 지내는 상황에서 비로소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남편은 생각보다 아침잠이 많은 사람이었다.
같이 잘 때는 전혀 몰랐던 부분이다. 레이테는 남편이 만지작거리는 손길이나 입맞춤 등으로 인해 잠에서 깨는 일이 잦았으므로.
“아무리 오늘은 협상도 없고 쉬는 날이라지만, 아예 늦잠인가요? 나랑 지낼 때는 그런 모습을 본 기억이 없는데. 헤젤의 침대가 많이 편한가 봐요?”
에르난은 히죽 웃으며 아내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게 아니라 당신이랑 있을 때가 어쩔 수 없는 겁니다. 당신과 함께 자는데 어떻게 몸이 달지 않을 수가…….”
“당신의 숙면을 위해서라도 가끔은 따로 자야 할 모양이네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아내를 끌어안은 팔의 힘이 더 강해졌다. 절대 놓지 않겠다는 간절함이 느껴질 정도로.
“장난이에요. 따로 지내는 건 지금으로도 족해요. 평생 치 각방 생활을 올겨울에 전부 몰아 하는 느낌인걸요.”
레이테는 남편의 등을 토닥거렸다. 에르난은 웃음소리를 내며 토닥이는 손길을 즐겼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고, 쟁반을 든 시종들이 들어왔다. 에르난은 몸을 일으켰다. 시종들은 탁자에 식사를 차리고 나갔다.
“부인. 어젯밤에 세스크가 이곳에 왔는데, 조금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식사를 마치자 에르난이 말했다. 나직한 목소리에 레이테는 썩 좋은 이야기가 아님을 짐작했다.
에르난은 시스로네스와 브라간사의 관계에 대해 프란세스크가 알아온 것들을 설명했다. 편안하게 오렌지 주스를 마시던 레이테의 얼굴이 조금씩 굳었다.
브라간사가 사크틸라의 왕좌를 빼앗겼다고 생각한다는 대목 때문이었다.
레이테가 브라간사를 처음 만났을 때는 탐브레 토벌이 한창이었다. 당시 그녀에게 남편은 숙부를 물리친 다음 상대해야 할 경쟁자였다.
그렇게 신경이 한창 예민해진 상태에서 만난 또 다른 친척은 마치 세 번째 경쟁자가 생긴 듯한 불안함을 레이테에게 주었다.
괜한 걱정이라 생각하며 무덤덤하게 넘기려 발버둥을 쳤던 것 같다. 하지만 괜한 불안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리고 헤젤 왕위에 대해서도 비슷한 마음을 가졌다는 모양입니다. 시스로네스는 그 틈을 파고든 것이고.”
“조금…… 위험한 거래가 아닌가 싶은데요.”
“내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일을 왕과 상의하지도 않고 추진한다는 건 걱정을 넘어서 경악스러울 정도고요.”
“…….”
레이테도 마찬가지였다. 완전히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이유가 있어서 그랬으리라 생각하지만, 조금……. 조금 씁쓸한 건 사실이네요. 나와 상의…… 아니, 보고라도 해 주면 좋았으련만.”
레이테는 말할수록 자신의 마음이 흔들림을 느꼈다. 아쉬움이 컸다.
시스로네스에게 여왕을 배신할 목적이 있다고는 생각도 할 수 없다. 애초에 그가 추진하는 일은 배신과는 완전히 반대 방향이다.
그렇다면 왜?
“추기경이 당신을 속이고 나쁜 일을 꾸민다는 건 솔직히 나도 상상이 안 갑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교착 상태를 벗어날 술수가 너무 더러워서 당신이 말려들지 않게 조용히 진행한다는 편이 더 믿을 만하겠습니다.”
“가당치도 않은 소리예요. 여왕은 여왕이지, 순결한 성녀가 아니잖아요? 만약 추기경이 내게 그런 책략을 의논했다면…….”
레이테의 말문이 닫혔다.
‘나는 그것을 허락했을까?’
아니다. 망설였을 것이다. 어쩌면 허락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나치게 위험해서도, 타국의 왕위를 흔들어대는 것이 너무 비열해서도 아니다.
‘혹시라도 브라간사가 왕위에 오르면 어떡하지?’
레이테는 깨달았다. 자신은 그때의 불안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시스로네스와 이야기를 해 봐야겠어요.”
* * *
시스로네스는 방에 없었다. 하인은 그가 어디에 갔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레이테는 차를 마시며 시스로네스를 기다렸다.
연일 이어지는 협상으로 분주했던 왕궁은 오랜만에 맞이한 휴일로 여유로운 분위기가 가득했다. 날씨마저 좋아 산책을 즐기는 사람도 적잖게 보였다. 한껏 차려입은 귀족들 사이에, 분주한 걸음으로 움직이는 리리우가 보였다.
‘무슨 일이지?’
리리우는 벨류 왕의 처소 쪽으로 사라졌다.
‘설마…….’
에르난은 시스로네스와 브라간사의 일을 리리우도 안다고 말했다. 헤젤 입장에서 브라간사는 반역을 도모한다 해도 될 정도이지 않나.
벨류 왕은 어떻게 대처할까? 레이테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당연히 반역자라면 엄벌에 처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사크틸라와 바르시나의 왕까지 머무르는 상황에서 큰 소란을 일으키면 어떤 식으로든 역공의 기회를 주는 셈이 될 수도 있다. 협상이 해결될 때까지 전략적으로 침묵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하지만 이도 저도 적절한 대처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
‘이러니까 나와도 미리 의논을 했어야지.’
레이테는 속이 탔다. 어느덧 빈 찻잔을 두 번이나 새로 채웠다. 그런데도 시스로네스는 오지 않았다.
‘잠깐, 혹시…….’
어쩌면 브라간사를 만나고 있지 않을까?
‘사람을 불러 브라간사를 찾아보는 편이 좋겠어. 리세우 공이면 괜찮으려나?’
레이테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문이 열리고 시스로네스가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폐하. 약속이 있어서 잠시 시내에 다녀오는 바람에 폐하를 기다리게 했습니다.”
“계속 무리하셨으니 오늘은 쉬는 편이 좋을 텐데요.”
“괜찮습니다, 폐하. 휴식은 사크틸라에 돌아가서 해도 됩니다.”
“예하의 말씀이 옳군요. 하루빨리 사크틸라로 돌아가면 될 일인데. 그래서 브라간사 공작과는 무슨 이야기를 나눴나요? 나도 알고 싶은데요.”
여왕에게 인사하고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시스로네스의 얼굴이 굳었다. 레이테가 그 이야기를 꺼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정말로 내게는 숨기려 했구나.’
레이테는 어렸을 때 엄격한 그에게 자잘한 반항을 꾸준히 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레이테는 시스로네스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점점 깨닫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서운함을 느껴 보기는 처음이었다.
“화가 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왜 내게 알리지 않고 그런 일을 하는지는 모르겠어요.”
“폐하, 그건…….”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을 듣고 싶어요. 예하께서 하는 일이 사크틸라와 나를 위한 것이라면 이야기해 주세요.”?
#114
“……폐하께서 브라간사를 직접 상대하게 되는 일은 되도록 피하고 싶었습니다.”
시스로네스가 말했다. 레이테는 몸을 흠칫거렸다. 그가 마치 자신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만 같았다.
실제로 레이테는 브라간사를 상대하는 일이 거북했다.
“어째서인가요……?”
“브라간사는 그 존재도 생각도 능력도 폐하께 위험한 자입니다.”
“사크틸라의 왕좌가 자기 것이길 바랐다지요?”
“……다 아시는군요.”
“그 정도가 전부예요. 예하께서 브라간사를 그런 존재로 여기게 된 이유는 뭔가요?”
시스로네스는 한숨을 쉬고, 과거에 자신이 브라간사와 만난 일부터 설명했다. 브라간사의 청혼 사실을 알게 된 레이테는 깜짝 놀랐다.
“세상에, 그런 일이…….”
브라간사의 청혼 자체도 경악스러웠으며, 자신이 그 일을 몇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그때부터 브라간사가 위험한 인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숙부 문제로 힘들어하는 폐하께 또 다른 친족의 위협을 알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브라간사가 공주와 함께 사크틸라로 찾아왔을 때, 많이 놀랐겠네요.”
“예. 극단적으로는 전선을 이탈해 폐하가 계신 부르고로 돌아가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럴 정도였다니. 하지만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왕위에 관심을 보인 여왕의 친척은 제 아버지처럼 용병대장이었다. 직접 운용할 수 있는 군사력이 있는 사람.
결국 시스로네스는 브라간사와 관련된 모든 일을 레이테에게 숨긴 셈이었다.
“폐하의 근심을 덜어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런 식이라면 제가 뭘 보고받겠나요?”
“폐하를 보호하기 위해서라 생각했습니다. 이번 일의 경우, 만약 잘못되더라도 저만 희생되면 그만이니까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헤젤의 왕위에 사크틸라의 여왕이 관여하려던 징후가 포착되면 다시 전쟁이 터지고도 남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아니잖아.’
“지금까지 살면서, 알게 되어 진심으로 다행이고 기쁘다고 생각한 사람이 둘 있어요. 하나는 남편이고, 다른 하나는 예하에요.”
“폐하의 남편께서 들으면 꽤 실망할 말씀이십니다. 추기경과 자신을 동일 선상에 놓는다고.”
시스로네스가 웃었다. 레이테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말해놓고 보니 그랬다. 시스로네스를 좋아하지 않는 에르난은 분명 서운해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이다. 두 사람이 없었다면 레이테는 여기까지 올 수 없었다.
“감사하게도, 지난 이십 년 동안 추기경께서 보호해 주어 저는 살아남았어요. 그런데 작년부터 많은 상황이 변했지요.”
숨을 죽이고 천천히 움직이던 시계가 한순간에 확 돌아갔다고 해야 할까? 레이테는 왕권을 되찾았고, 또 수많은 일을 겪었다.
“처음에 남편은 저를 이용할 생각뿐이었겠죠. 제가 그랬듯이. 하지만 이제 우리는 서로에게 진정한 동반자고, 그렇게 되는 데에는 일 년이 안 걸렸어요.”
작년 봄, 레이테는 에르난과 만났다. 그리고 겨울이 오기 전, 그녀는 남편에게 완전히 마음을 열었다.
많은 일이 있었으나, 남편을 사랑하게 되는 데에는 생각보다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예하께서는 아직도 저를 보호 대상으로만 여긴다는 것이 솔직히 조금…… 조금 서운하네요.”
여왕은 시스로네스를 믿었다. 하지만 시스로네스는 여왕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것일까.
브라간사 일을 숨겨 레이테를 보호하려 했다는 말은, 곧 그 문제를 레이테가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않나.
에르난이 전투에서 패배하고 헤젤의 포로가 되자, 사크틸라와 바르시나의 관계는 엉망이 되었다. 당시 어쩔 줄 몰라 쩔쩔매던 레이테를 다그쳐 일으킨 사람이 시스로네스였다.
진심으로 고마웠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여왕이 못 미더운 것일까?
“그 차이는 당연합니다, 폐하. 돈 에르난은 당신의 남편입니다. 하지만 저는 여왕을 섬기는 신하입니다.”
시스로네스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면서도, 고개를 살짝 돌려 여왕의 눈을 피했다.
시스로네스의 말대로, 그는 여왕의 신하다. 하지만 이십 년의 유대감이 고작 그것뿐이었나?
“……유감이네요. 그동안 저는 심정적으로 예하를…….”
“꺅!”
울컥해서 떨리는 레이테의 목소리는 밖에서 들려오는 비명에 멈췄다.
레이테와 시스로네스의 시선이 창가로 향했다. 그 순간, 쾅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유리창에 피가 튀었다.
“무, 무슨 일이죠?”
“뭔가 난리가 일어난 것 같습니다.”
시스로네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함치는 소리와 칼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시종을 불러야겠다. 레이테는 호출용 끈을 잡아당기려 했다. 하지만 시스로네스의 손이 그녀를 붙잡았다.
“주의를 끌 수 있으니 안 하시는 편이 낫겠습니다.”
시스로네스는 창가로 다가가 황급히 커튼을 쳤다. 피의 흔적을 가리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밖에서 안을 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인 듯했다.
“나머지 왕도 잡아와!”
분노에 찬 외침이 들렸다. 틀림없는 브라간사의 목소리였다.
* * *
오늘은 머리 아프고 지루한 협상이 없다. 대신 브라간사에게는 다른 일이 있었다. 붉은 옷을 입은 손님 맞이였다.
“지금 금액의 절반은 깎아야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다.”
며칠 전부터 추기경은 이런 식이었다. 이미 헤젤이 처음 제시한 배상금의 삼 분의 일 정도를 깎았는데도.
그에게 속은 걸까? 하지만 브라간사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시스로네스는 이런저런 정보를 내놓았다.
벨류 왕은 위가 약하니 무슨 허브를 어떤 식으로 달여서 제공할 수 있게 미리 준비해 두라는 말까지 나오자 브라간사는 혀를 찼다.
“저도 모르는 왕의 건강 상태는 어찌 아십니까?”
“물론 누구도 직접적으로 왕의 건강 이상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식습관 등 여러 가지를 종합해서 보면 위가 많이 안 좋은 듯하더군요.”
시스로네스의 말은 사실상 독살을 종용하는 것이었다. 영양제라도 추천해 주는 양 태연한 말투였으나, 그는 약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는 브라간사도 알 만한 독초의 이름을 불렀다.
“제가 대신 구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보상금의 일부를 물건으로 대체하면 들이기도 쉬워지지요.”
“…….”
내일 다시 열리는 협상에서 그 문제를 논의해 달라는 부탁으로 두 사람의 만남은 끝났다.
돈을 원하는 벨류가 그 제안을 달가워할 리가 없다. 왕을 어떻게 달래며 설득시켜야 한단 말인가.
브라간사는 잔뜩 짜증이 났다. 시스로네스 같은 놈이 성직자랍시고 섬기는 신은 틀림없이 악마일 것이다.
남은 하루는 적당히 여자라도 불러서 보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하인이 들어와 말했다.
“각하, 왕궁에서 사자가 왔습니다만.”
“왕궁에서?”
사자는 벨류가 조카를 부를 때 자주 보내던 시종이었다. 브라간사는 그를 이용해서 왕에 대한 정보를 얻기도 했었다. 탐욕이 많은 자라 두둑하게 돈을 채운 주머니만 건네주면 쉽게 가능한 일이었다.
혹시 도울 일이 없냐며 히죽히죽 웃던 평소와는 다르게,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국왕 폐하께서 지금 당장 공을 데려오라 하셨습니다.”
목소리마저 긴장이 역력했다. 브라간사는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다가 포기했다.
안절부절못하는 태도로 보아, 대강 짐작한 것은 있어 보였다. 하지만 왕이 단단히 침묵을 명한 듯했다.
브라간사가 인사말을 건네려는데도 당황하며 고개를 돌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틀림없었다.
‘뭔가 일이 있군.’
금방 떠오르는 일은 역시 시스로네스와의 관계였다. 어떤 식으로든 왕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브라간사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외출 준비를 하던 브라간사는 공작저에 머물며 그의 일을 돕는 부관을 불렀다.
“지금 바로 왕궁으로 갈 테니, 병사들 몇 명 불러 따라오라 하게.”
“예? 병사라니요?”
“……호위병이야.”
왕의 사자가 근처에 있는 것을 본 브라간사는 적당히 둘러댔다. 부관은 적당히 의미를 파악하고서 병사 ‘몇 명’을 부를 것이다.
벨류는 조카가 자신의 병사를 이끌고 왕궁에 들어오는 것을 싫어했다. 하지만 적당히 핑계를 대면 그만이니, 불안한 상황에서는 조심하는 편이 낫다.
그리고 브라간사의 불안감은 적중했다.
“이 자리가 그렇게 탐이 나서 내 아들을 죽였더냐?”
브라간사가 알현실에 들어가자마자, 왕좌에 앉은 벨류가 대뜸 물었다.
“송구합니다, 폐하. 제 호위의 미흡함으로…….”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고 막연하게 생각해 왔기에, 침착한 척하며 답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벨류는 절대로 엔히크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브라간사의 짓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쭉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의심이 어떻게 확신으로 바뀐 걸까?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 소리를 하는 게 아니지 않느냐!”
브라간사는 슬그머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왕의 주변을 지키는 기사와 귀족 몇 명이 보였다. 그리고 긴장한 얼굴의 리리우 공주가 있었다.
‘공주가 여기에는 왜 왔지?’
“네가 아무리 사촌들을 질투했다지만 설마 그럴까 싶었다. 증거가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후계자가 없어지면 네 차례가 될 줄 알았나 보구나. 그게 안 되니까 사크틸라인과 공모한 것 아니냐?”
들켰구나.
브라간사는 소름이 끼쳤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양 무릎을 꿇었다.
‘어떻게 새어나갔지?’
하인들은 철저하게 단속했다. 수시로 저택을 오가는 휘하 군인들마저도 브라간사가 시스로네스와 만났다는 사실은 몰랐다.
‘아니, 어쩌면…….’
시스로네스 자체가 범인일 수도 있다. 그는 처음부터 브라간사가 자신의 요구를 받아주지 않으면 왕에게 가겠다는 식으로 그를 협박했으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폐하의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이 있다면 반성하고…….”
“됐다. 반역자를 체포하라!”
벨류의 명령에 기다렸다는 듯 기사들이 브라간사를 붙잡았다.
“폐하,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십니다!”
브라간사가 외쳤다. 벨류는 손을 휙 흔들었다. 어서 데리고 나가라는 뜻이었다.
‘기회만 노리고 있던 거다.’
브라간사가 실질적으로 저지른 반역행위는 아직 없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엄격하게 보자면 그런 논의를 한 것 자체가 반역에 해당하지만.
벨류의 표정은 의기양양했다. 그는 아들을 언급했으나 그 때문에 비통해하지 않았다. 브라간사를 드디어 구속하게 되어 기뻐할 따름이었다.
“……후회하실 겁니다.”
왕을 노려보며 브라간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벨류의 옆에 선 리리우가 몸을 움찔거리며 떨었다. 그러나 벨류는 끄떡도 하지 않고 코웃음만 칠 뿐이었다.
브라간사는 기사들에게 이끌려 알현실 밖으로 나왔다. 죄인처럼 끌려가는 그를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바라보았다.
브라간사는 얌전히 기사들을 따랐다. 어디로 가는지는 뻔하다. 지하층의 감옥일 것이다. 만조 때는 무릎까지 바닷물이 들어온다는 소문이 자자한 곳이었다.
알현실에서 감옥까지 가려면 분수가 있는 커다란 중정을 지나쳐야만 했다.
그리고 중정에는 브라간사가 데려온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브라간사는 병사들을 발견하고 눈짓했다. 병사들은 자신들의 대장이 끌려가는 모습에 당황한 기색이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은 쉬웠다.
“으헉!”
몸을 힘껏 밀어 한 명을 넘어뜨린 브라간사는 재빨리 검을 뺏어 들어 그를 베어 버렸다. 다른 기사는 브라간사의 병사가 뒤에서 찌른 검에 쓰러졌다.
기사들은 왕의 호위를 담당하는 최정예지만, 그래 봤자 브라간사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기사는 쓰러지면서도 브라간사를 붙잡으려 했다. 브라간사는 그를 비웃으며 검 손잡이 끝의 뭉툭한 부분으로 그의 머리를 후려쳤다.
“꺅!”
브라간사를 구경하던 귀부인들이 비명을 질렀다.
지나가던 다른 귀족이 검을 뽑아 들고 브라간사에게 달려왔다. 브라간사는 망토를 벗어 그에게 던졌다.
시야가 차단된 귀족이 멈칫하는 사이, 브라간사의 병사들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몸 이곳저곳에서 피를 뿜었고, 벽에 몸을 부딪치며 기절했다.
“전부 따라와!”
브라간사가 외쳤다.
“왕을 잡으러 간다. 나머지 왕도 잡아와!”?
#115
쾅!
거친 소리를 내며 알현실 문이 강제로 열렸다. 독기어린 눈을 빛내며 사라졌던 브라간사가 병사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순간, 벨류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알현실에 남은 귀족과 기사들이 검을 뽑고 브라간사의 군사에 대항하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절반 정도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자 슬금슬금 항복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네놈이 미쳤구나.”
벨류는 왕좌 앞까지 다가온 브라간사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다면 제 군사를 먼저 뺏었어야지요. 하지만 부려먹으려는 옹졸한 마음에 그러지도 못하고. 여태 칼이 필요한 일이면 잘 이용하셨잖습니까?”
브라간사의 병사들은 벨류를 왕좌에서 끌어내릴 기세였다. 그 수치를 겪고 싶지 않은 왕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브라간사는 차게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병사 둘이 왕의 좌우 팔을 붙잡았다.
“아, 안 돼…….”
왕의 옆에 있던 리리우가 털썩 주저앉았다. 브라간사는 덜덜 떠는 공주를 억지로 일으켜 세워 병사들에게 넘겼다.
* * *
시스로네스는 책장으로 다가가더니 온몸으로 그것을 밀어냈다. 그러고는 벽과의 틈 사이에서 검을 꺼냈다. 일상적인 호신용으로 사용하는 검과는 다른, 완전히 전투용인 사람 키만 한 장검이었다.
레이테가 놀랄 틈도 없이 방문이 열리고 병사들이 나타났다. 시스로네스는 문을 향해 뛰쳐나가 검을 휘둘렀다.
부웅! 거대한 검이 공중을 가르는 소리가 위협적이었다. 그대로 검에 맞을 뻔한 병사들이 놀라 뒤로 물러섰다.
추기경의 움직임은 결코 노련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훈련을 받은 사람의 움직임처럼 보였다. 평생을 성직자로 살아온 사람이 어떻게 무기를 다루는 법을 배웠을까?
공격에 맞서려던 병사 하나가 기어이 검에 부딪혔다. 병사는 괴성을 지르며 몸을 비틀거렸다.
시스로네스는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러 병사를 넘어뜨렸다. 풀썩 쓰러진 병사가 죽은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폐하! 사크틸라인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설마 추기경이 그런 공격을 할 줄은 몰랐던 병사들이 당황하는 사이, 시스로네스가 레이테의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제 처소로 가요!”
레이테가 외쳤다. 여왕이 머무는 곳은 온전히 사크틸라인이 경호를 책임지고 있다. 추기경의 방에서 그다지 멀지도 않았다.
하지만 왕을 잡아오라던 브라간사의 명령 탓인지, 이미 그곳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바닥에는 피가 흐르고, 쓰러진 사람이 곳곳에 보였다. 낯익은 사람이 적지 않다. 레이테는 몸을 떨었다.
‘에르난은?’
이렇게 난리인데 남편이 무사할 것 같지는 않다. 급격히 찾아온 불안감에 레이테는 숨을 쉬기 힘들어졌다.
레이테의 방 앞 복도에는 헤젤식 검을 든 병사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시스로네스가 주변을 둘러보다가, 바로 옆에 있던 방의 문을 열고 레이테와 함께 그곳으로 뛰어들었다.
“꺅!”
“으윽!”
레이테는 시스로네스에게 밀쳐져 방안으로 던져지다시피 했다. 그녀는 바닥에 쓰러지는 대신, 누군가와 충돌했다.
“레이테!”
충격에 몸을 웅크리는 그녀를 안아 든 사람은 에르난이었다.
“무사했군요! 다행입니다.”
에르난은 아내를 껴안고 키스했다.
“세상에. 당신은 어떻게 여기에?”
레이테도, 방으로 들어와 문을 잠근 시스로네스도 깜짝 놀라 에르난을 바라보았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기에 곧바로 방을 나왔습니다. 당신이 걱정되어 이쪽으로 왔는데 병사들이 먼저 길목을 점령한 탓에 더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당신이 나타날 줄이야.”
“다행히 자리를 비우고 추기경을 찾아가 만나고 있었어요.”
“아……. 예하, 그건 뭡니까?”
에르난은 시스로네스를 향해 말했다. 정확히는 시스로네스가 든 검을 바라보았다.
“보시고도 모르십니까? 검입니다.”
“아무나 그런 검을 쓰지는 않는데요. 그건 전쟁터에서나 쓰는 중장비입니다.”
“제어만 할 줄 알면 사람을 호위하는 데에 제격이라기에 조금 배웠습니다.”
허. 에르난은 감탄했다. 거대한 장검은 휘두르기만 해도 무척 위협적이라 적을 쫓는 데에 탁월하다. 하지만 훈련받지 않은 사람이 그런 효과를 낼 수는 없다.
“……참모 노릇 하면서 입으로만 전쟁을 하는 줄 알았는데, 무기까지 다룰 줄은 몰랐습니다.”
“만약을 대비해야지요. 하지만 형편없는 실력이니, 이 검은 폐하께서 쓰시는 편이 나아 보입니다.”
에르난은 시스로네스가 건네는 검을 받아들었다. 그는 아내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압니까?”
“잘은 몰라요. 하지만 브라간사가 뭔가 일을 저지른 것 같아요. 복도의 병사들은 그의 부하일 거예요.”
“이게 무슨 난장판인지……. 일단 여기 오래 있으면 위험할 테니 아군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문제는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는 거지만.”
여왕과 사크틸라인의 거처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바르시나인의 거처라고 무사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두 나라 협상단의 수는 적지 않았다. 아무리 브라간사가 이상한 짓을 벌인다 해도 그들을 모조리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에르난에게 그랬던 것처럼, 포로로 잡는 편이 여러모로 유리하다.
“이 방은 창고로군요. 별도의 창이 없으니 들어왔던 문으로 나가야 합니다.”
시스로네스가 말했다. 한숨을 쉬며 방 안을 둘러보던 에르난은 눈에 익은 상자를 발견했다.
상자를 열어 보니, 그가 아내에게 선물한 갑옷이 담겨 있었다.
“레이테, 이걸 입는 편이 좋겠습니다.”
“네? 그렇지만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움직임이 불편한걸요. 오히려 방해가 될지도 몰라요.”
“다 입을 필요는 없습니다. 공격을 받을 경우 치명적인 부분만 가리는 편이 지금은 더 낫겠지요.”
에르난은 상자를 뒤적거려 흉갑을 꺼냈다. 레이테는 두 남자의 도움을 받아 상반신에만 갑옷을 입었다.
“당신은요?”
“나야 검이 있잖습니까. 공격이 곧 방어지요.”
이곳까지 오는 동안 시스로네스가 검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떠올린 레이테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추기경은? 레이테는 그를 돌아보았다.
“사실 만약을 위해 무장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 사태를 누가 어떤 목적으로 일으켰든, 두 분 폐하와 저를 죽일 마음만은 없을 겁니다.”
시스로네스는 씁쓸하게 웃었다.
‘맞는 말이지만 괜찮을까? 다칠지도 모르는데.’
에르난은 다시 방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쓸 만한 것이 있나 찾기 위해서였다.
이 창고는 여왕의 짐을 보관하는 곳인 듯했다. 무기류 대신 드레스나 장신구, 책이 보였다. 에르난은 보석이 달린 반지 몇 개를 꺼냈다.
“온통 이상한 일뿐이니, 어쩌면 다른 이들과 합류하지 못한 채 이 궁을 빠져나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비상금이 있는 편이 좋겠지요.”
아. 레이테는 고개를 끄덕이며 보석을 주렁주렁 엮은 목걸이를 목에 걸어 갑옷 안으로 넣었다.
“어디로 가야 할까요?”
“글쎄, 위험하겠지만 바르시나인이 지내는 곳으로 가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구든 좋으니 만나야지요.”
걱정이 가득한 얼굴과 달리, 에르난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아내를 안심시키고자 일부러 그러는 것이었다.
“길은 제가 안내하지요.”
시스로네스가 말했다.
그 순간, 방문이 덜컥거렸다.
“문이 잠겼군. 안에 누가 있는 것 같아.”
“시녀들은 거의 도망가지 않았나?”
헤젤어로 대화를 주고받는 소리가 들렸다. 레이테는 숨을 삼켰다.
“레이테, 뒤로 물러나요. 추기경 예하, 아내를 부탁합니다. 검을 쓰려면 아무래도 거리를 둬야 하니까.”
시스로네스가 레이테를 안아 들고 뒤로 물러섰다.
에르난이 문으로 다가갔다. 레이테는 불안한 눈으로 남편을 바라보았다.
“크악!”
문이 열리자마자 에르난은 검을 위에서 아래로 강하게 휘둘렀다. 공격이 튀어나올 줄 몰랐던 병사가 괴성을 지르며 쓰러졌다. 에르난은 다른 병사도 공격해 쓰러뜨렸다.
“갑시다!”
에르난이 외쳤다.
레이테와 시스로네스는 밖으로 나왔다. 소란을 들은 병사들 또한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에르난은 무서울 만큼 빠른 속도로 검을 휘둘러 병사들을 쓰러뜨렸다.
시스로네스가 사용할 때는 거대한 몽둥이를 휘두르는 느낌이었다면, 에르난은 정말로 검답게 적을 베어 넘겼다.
“바르시나인이 머무는 곳은 저쪽이지만, 헤젤 병사들이 진을 쳤을 겁니다. 밖으로 나갔다가 반대편으로 들어가는 편이 낫겠습니다.”
시스로네스가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에르난이 앞장섰다. 병사가 나타날 때마다 에르난은 그들에게 맞섰다.
에르난은 방어구 하나 착용하지 않았다. 레이테는 적이 나타날 때마다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공격이 방어라는 남편의 말은 옳았다. 거대한 검의 공격반경이 워낙 넓어 병사들이 쉽사리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
“후우……,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합니까?”
세 사람은 겨우 건물 밖으로 나왔다. 에르난이 숨을 헐떡였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길을 확인하던 시스로네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이런……. 아무래도 무리 같습니다.”
시스로네스의 시선이 향한 방향에는 병사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에르난, 궁을 빠져나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죠? 그러는 편이 좋겠어요. 이 난리에서 도망친 우리 사람들도 아마 이곳에 더 있지 않고 탈출하려 하지 않겠어요?”
레이테의 말이 옳다. 에르난이 고개를 끄덕이자 시스로네스가 말했다.
“밖으로 나가는 길은 제가 안내하지요. 저쪽으로 갑시다!”
세 사람은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금방 방향을 바꿔 다른 쪽으로 뛰어야만 했다.
“폐하! 공격은 조금만 하시고 저를 따라오십시오!”
시스로네스가 외쳤다.
실외는 좁은 복도와는 달리, 적이 무한정으로 몰려올 수 있다. 따라서 병사들에게 적극적으로 맞서기보다는 도망치는 편이 더 빨랐다.
세 사람은 이런 식으로 몇 번은 길을 바꿔야만 했다.
시스로네스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숨이 차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무리 브라간사를 만나러 여러 번 왕궁과 시내를 오갔지만, 그래도 이곳은 사크틸라가 아니다. 그는 왕궁의 모든 길을 완벽하게 알지는 못했다.
어디든 좋다. 무조건 밖으로 나가야 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시스로네스의 귀에, 말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마구간인가?”
세 사람과 멀지 않은 곳에 돌계단이 있었고, 그 아래에 말 여러 마리가 줄줄이 묶여 있었다.
마구간이 있다면, 밖으로 거의 다 나온 셈이다. 시스로네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두 분 폐하, 저 말을 타고 빠져나갑시다.”
부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전에, 한 번은 병사들을 상대해야 할 것 같은데.”
세 사람을 쫓는 병사의 수는 상당히 늘어 있었다. 말을 꺼내고 타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병사들을 물리쳐야만 했다.
거대한 검을 휘두르며 달린 에르난은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검을 치켜든 그의 팔이 후들거렸다.
“폐하, 제게 검을 주십시오.”
시스로네스가 말했다.
“계단까지 가는 건 무리니, 차라리 아래로 뛰어내리는 편이 좋겠습니다. 두 분 폐하의 안전이 우선이므로 저는 마지막에 내려가겠습니다.”
“……좋습니다.”
에르난은 시스로네스에게 검을 건네주었다. 늙은 성직자에게 호위를 맡긴다니, 떨떠름한 기분이 들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설마…….’
잠시 고민하던 에르난은 이를 악물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윽……!”
발에 닿는 충격이 상당했다. 에르난은 쓰러질 뻔한 몸을 간신히 가눠 위를 향해 외쳤다.
“레이테! 내가 받을 테니까 걱정 말고 내려와요!”
레이테는 심호흡을 한 다음, 눈을 질끈 감고 아래로 몸을 던졌다. 에르난은 온몸으로 아내를 받아 냈다.
“으앗!”
“괜찮습니까?”
레이테는 놀라서 소리를 질렀을 뿐, 다친 곳은 없었다. 부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병사들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시스로네스! 이제 내려와요!”
레이테가 외쳤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늙어 기력도 부족한 저는 두 분께 방해가 될 뿐입니다. 먼저 말에 올라 탈출하십시오!”
하지만 시스로네스는 부부를 보지도 않고 외쳤다. 그는 다가오는 병사들을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무슨 소리예요!”
레이테가 소리 질렀다. 그때, 에르난이 말을 가져왔다.
“레이테! 당장 타요!”
에르난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시스로네스가 검을 달라고 할 때, 에르난은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시스로네스는 탈출할 생각이 없는지도 모른다.
짐작대로였다.
그를 두고 가는 일이 옳은지 판단할 겨를은 없었다. 에르난은 아내를 안고 말에 올랐다.
“잠깐만요, 이대로 가면……!”
에르난은 몸부림치는 레이테를 꽉 안아 붙잡았다.
“돈 에르난, 여왕을 부탁하오!”
뒤를 힐끔 돌아본 시스로네스가 외쳤다. 그러고는 그는 병사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안 돼!”
아내의 처절한 외침을 무시하고, 에르난은 말을 몰아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