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울에 비친 왕관-12화 (12/15)

3부 3장 : 승자의 기회

#091

땅거미가 지고 어둑어둑해질 때쯤, 두 왕과 귀족들은 바다호스 성으로 돌아왔다. 즉시 대책 회의가 열렸지만 사람들은 굳은 얼굴로 앉아만 있었다.

침묵이 길어지면서, 에르난은 바르시나 귀족들의 시선을 느끼고 조금씩 짜증이 났다. 그들은 에르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뻔했다. 왕이 화를 낼 것이 분명한 말을 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에는 어쩐지 늘 코른이 나서기 마련이었다.

“폐하. 이 사건은 ‘사크틸라의 일’입니다. 바르시나가 간섭해서는 안 됩니다.”

할 말을 마친 코른은 곧바로 일어나 회의실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를 따라 다른 귀족 몇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멈춰. 두 번 다시 왕을 보지 않을 생각이라면 그대로 나가고.”

오싹한 에르난의 협박에 코른을 비롯한 이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이 일을 구실삼아 헤젤이 사크틸라에게 무력을 행사한다면, 바르시나 또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소. 동맹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사크틸라가 패배하게 된다면 그다음 차례는 바르시나니까.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게 아니라면, 도망갈 생각 말고 사크틸라 소행이 아니라는 증거나 찾아!”

성난 목소리에 귀족들은 물론이고 시스로네스나 레이테마저 놀란 얼굴로 에르난을 바라보았다.

코른은 에르난을 잠시 노려보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다른 이들도 머뭇거리며 자리로 돌아오자, 이번에는 프란세스크가 일어났다.

“엔히크의 인장을 갖고 있던 그 남자가 누구인지 아는 분 계십니까?”

답은 없었다. 프란세스크는 작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저는 압니다.”

깜짝 놀란 사람들의 눈길이 모두 프란세스크를 향했다. 에르난도 마찬가지였다.

“그걸 왜 지금 이야기하지?”

“그자의 신원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면, 그냥 알려지지 않는 편이 낫기 때문입니다.”

프란세스크는 사크틸라 관리 행세를 하던 남자와 딱 한 번 만났던 상황을 설명했다. 사크틸라 영토로 막 들어왔을 때의 일이다.

“이후 꾸준히 행방을 알아봤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관리라는 사실도 가짜였고요. 저는 혹시라도 밀정이 두 분 폐하께 위해를 가하지 않을까, 그것만 걱정했지 엔히크와 연관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확실히 헤젤은 모르는 편이 좋겠군.”

에르난은 고개를 끄덕였다. 헤젤이라면 그 사실을 핑계 삼아 정말로 사크틸라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울 것이다. 아무리 가짜라 해도 사크틸라 관리의 모습을 했으므로.

“헤젤이 몰라야 한다는 폐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리세우 공, 그런 일이 있었다면 우리와도 공유했어야 하지 않습니까? 사크틸라가 도울 수 있었을 텐데요.”

한껏 신경질 난 목소리의 아르파 공작이 말했다. 그는 탐브레 토벌에 참여해 혁혁한 공을 세웠던 사크틸라의 귀족이다.

아르파의 지적이 옳기는 했다. 프란세스크는 수상하다는 것을 느끼자마자 밀정이 정말 사크틸라의 관리가 맞나 확인했을 것이다. 이런 일은 사크틸라의 협조를 구하는 편이 좋다.

그러나 프란세스크는 단독으로 일을 진행했다. 에르난은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심발로 때문인가.’

프란세스크는 심발로를 의심하고 있다.

“밀정은 사크틸라 관리 행세를 했습니다. 애초에 파고들 틈을 보인 사크틸라의 허술함이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코른이 빈정거렸다. 바르시나 탓을 하다니, 용납할 수 없다는 식이다.

아르파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무장이지 논쟁에 뛰어난 이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코른의 말이 딱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밀정으로 인해 위험에 처할 수도 있는 바르시나의 두 분 국왕 폐하께서는 사크틸라의 왕이기도 하십니다. 다른 일에서는 서로 의견이 충돌할 수 있다 해도, 두 분의 안전을 지키는 일만큼은 어떤 상황에서도 손을 잡아야 합니다.”

머뭇거리는 아르파를 대신해 말한 사람은 팀파노 후작이었다. 팀파노 역시 말다툼에 적극적인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온건한 그의 표현은 분위기를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어쨌거나 이제는 헤젤이 군사를 끌고 온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지금 급한 일은, 헤젤에 대항할 현실적인 준비지요.”

여태 조용하던 시스로네스가 말했다.

의외다. 에르난은 추기경이 코른에게 지지 않고 바르시나를 비꼬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현 상황을 많이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모양이다. 말다툼할 시간도 없다는 듯.

“두 분 폐하, 이 지역의 현안을 되도록 빨리 처리하고 어서 이스팔리스로 가시기를 권유 드립니다. 여기는 헤젤과 너무 가까우니 안전한 곳에 계셔야 합니다.”

이스팔리스는 회담을 마치고 순회할 예정이었던 사크틸라 남부에서 가장 큰 도시다. 방어에도 대단히 유용해 과거부터 쭉 헤젤과의 싸움에서 본진 역할을 했다.

레이테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옳은 말씀이에요. 서두르겠어요. 자, 그러면 이만 다들 쉬시지요. 힘든 하루였네요.”

에르난도 아내를 따라 일어났다. 휴식도 휴식이지만, 소모적인 논쟁을 막을 필요가 있었다. 내부 분열이 일어나면 곤란하다.

의도가 어떻든 프란세스크가 책임을 피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 가장 중요하고 급한 일이라 볼 수는 없었다.

부부가 돌아서 밖으로 나가려는데, 심발로의 목소리가 그들을 멈춰 세웠다.

“아 참. 한 가지만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슨 일이지?”

에르난은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프란세스크에게 들은 것이 있다 보니 긴장하고 만다.

“죄, 죄송합니다…….”

심발로는 난처한지 말을 더듬었다.

“다름이 아니라, 아직 해결하지 못한 대포 밀수 문제가 마음에 걸립니다. 상황이 이러니 하루빨리 진상을 파악하고 거래를 막아야 한다고 보는데요. 그러니 날이 밝는 대로 먼저 남부로 내려가 이 문제를 조사하고 싶습니다. 이스팔리스 서쪽을 직접 둘러볼까 합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그렇군.”

에르난은 무안해졌다. 옳다 못해 무척 바람직한 요청이었다.

“합당한 의심이군요. 허락하겠어요.”

“감사합니다, 폐하.”

레이테가 답하자 심발로는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오늘은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고, 그보다 더 많은 의문에 사로잡혔다. 이만 머리를 식혀야겠다. 아내를 가볍게 끌어안은 에르난은 회의실 밖으로 나가려 했다.

“심발로 백작.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딱딱하기 그지없는 프란세스크의 목소리를 들은 에르난은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엔히크 왕자와 무슨 약속을 했습니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심발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박였다.

‘보는 사람이 많은데 괜찮나?’

에르난은 긴장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왕이 완전히 자리를 뜨지 않았으므로, 귀족들은 아직 나가지 않고 회의실에 남아 있었다.

심발로는 조사를 위해 내일 당장 남부에 간다고 했다. 프란세스크는 급한 마음에 그를 붙잡은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뒷감당하기 난처해질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오늘 프란세스크는 거듭된 사건 탓에 불안정해 보였다. 그가 괜한 실수를 하지 않도록, 에르난은 일단 상황을 무마시키고 따로 자리를 마련해 추궁하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프란세스크의 말이 더 빨랐다.

“미노리카에서 왕자를 초대했던 연회 때 이야깁니다. 바르시나에게 뭔가를 숨기겠다고 하셨지요. 그게 무엇인지 말씀하십시오.”

“예?”

심발로는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에 빠졌다.

에르난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의심스러운 부분은 당연히 알아내야 한다. 하지만 직접 묻더라도 왕인 그가 묻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들었다’고 하면서.

“아……, 이런.”

심발로의 미간이 점점 구겨졌다. 곧 그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허……. 하하……. 세상에, 허. 리세우 공. 그러면 여태 공께서 저를 편하게 대해 주신 이유는 그런 것이나 캐려던 것이었습니까?”

백작은 실소를 멈추지 않으며 몸을 비틀거리다가 의자를 꽉 붙잡고 섰다. 왕이 지켜보고 있으니 어떻게든 평정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

“공께서는 헤젤에 관심이 많으시더군요. 그래서 제게 질문하면 가능한 한 열심히 알려드렸습니다. 그랬던 것처럼 궁금하면 대놓고 물어보셨어야지요.”

프란세스크의 눈이 흔들렸다. 심발로의 격양된 반응에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기는 어렵지 않았다.

“출항 준비를 위해 헤젤의 배를 점검했더니, 대륙에서 만든 신기한 물건이 많이 있었습니다. 왕자의 수집품이라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왕자와 나누다 보니, 헤젤에서도 적게나마 대륙 물건을 구할 수 있는 비공식적인 방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헤젤인이 설마 그 경로로 사치품만 사겠습니까?”

결국 대포 밀수 문제로 다시 이야기가 돌아온 가운데, 에르난은 무척 당황했다. 그는 심발로의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었다. 왕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본 내용이었다.

“바르시나에 숨기겠다던 말은, 당시 미노리카 사람들이 엔히크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으니 잠시 입을 다물어 주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왕자는 조용히 헤젤로 돌아가고 싶어 했으니까요.

제가 의심된다면 하다못해 당신의 왕과 상담이라도 해 보지 그러셨습니까? 왕께서는 이미 다 보고받으셨거든요.”

보고서의 주요 내용은 회담 제안에 대한 헤젤 왕실의 반응이었다. 여기에 심발로는 자신이 엔히크와 지내며 보고 들은 이야기도 함께 실었다.

그중에는 헤젤의 밀수에 대한 작은 단서를 얻었다는 내용도 있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이제 뭘 하려 했는지 아십니까? 공을 불러 내일 함께 가지 않겠냐고 제안을 할 생각이었습니다. 당신을 믿었으니까! 멍청하게도!”

노성을 터뜨린 심발로는 성큼성큼 걸어 밖으로 나가 버렸다. 팀파노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프란세스크를 잠시 바라보았다가 동생을 따라 나갔다.

회의를 시작할 때보다 더 어색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프란세스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일단 심발로를 쫓아가려 했다.

“우리는 동맹인 줄 알았는데, 사크틸라만 그렇게 생각한 모양입니다.”

하지만 아르파의 말을 들은 프란세스크는 몸을 흠칫거리며 멈춰 섰다. 아르파를 비롯한 사크틸라 귀족들은 한 번씩 프란세스크를 노려보며 자리를 떴다.

* * *

레이테는 남편의 팔에 머리를 기댔다. 감은 눈을 뜰 기운조차 없을 정도로 피곤한데도 도무지 잠들 수 없었다.

에르난이 몸을 뒤척이더니 아내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해 왔다.

“안 자요?”

“부인이야말로.”

레이테는 남편을 안아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포근한 느낌이 기분 좋았다. 하지만 불안한 느낌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헤젤과 전쟁을 치를지도 모른다니, 막막했다. 하지만 그에 앞서 레이테의 피부에 닿는 걱정거리는 심발로와 프란세스크의 일이었다.

심발로는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고, 그 모습을 본 사크틸라 귀족들도 비슷한 듯했다. 그런 감정의 골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까.

물론 레이테 자신도 프란세스크의 일이 당혹스러웠다.

“뭐라 말해야 하나……. 답답하네요. 그냥 기가 막히도록 모든 운이 나빴을 뿐이라 생각하면서도, 무척이나 서운하기도 하고.”

에르난은 느릿느릿한 손짓으로 아내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그 역시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영 떠오르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고서야 에르난은 입을 열었다.

“의도를 떠나서 결과만 놓고 생각해서……, 세스크에게는 근신 처분을 내리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래야 서로의 충돌도 줄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네요. 하필 지금 우리끼리 싸우면 곤란해지니까요.”

레이테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작은 안도감을 느낀 에르난은 다시 아내의 머리카락을 만지는 데에 집중했다. 손끝에 닿는 사랑스러운 감촉이 답답함으로 꽉 찬 그의 머릿속을 말랑말랑하게 안정시켜 주기를 바라며.?

#092

헤젤의 벨류 국왕 폐하께 사크틸라와 바르시나의 왕 에르난과 레이테가 드립니다.

엔히크는 우리 부부와 이베로 반도의 미래를 함께 이끌 인재였을 뿐만 아니라 사적으로도 진정한 친구였습니다. 그의 때 이른 죽음에 우리는 큰 슬픔에 잠겼습니다만, 국왕 폐하의 상심만 하겠습니까.

우리 부부는 엔히크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의 안식을 위해 매일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장례식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고 조문단을 대신 보내는 것을 양해해 주십시오.

남은 우리는 고인의 유지를 이어가야 합니다. 국왕 폐하께서도 부디 아들의 꿈을 이루어 주십시오. 그는 진실로 평화를 원했습니다.

비극으로 끝나버린 회담일로부터 약 3주 후, 왕과 그 일행은 사크틸라 남부에서 가장 큰 도시인 이스팔리스에 도착했다.

이스팔리스의 왕궁에는 헤젤에 다녀온 조문단이 부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국왕 일행보다 하루 일찍 이스팔리스에 왔다는 조문단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왕자의 장례식에는 참석했나요?”

“다행히 늦지 않게 도착했습니다. 벨류 왕도 만나 두 분 폐하의 친서를 전달했습니다. 벨류는 대단히 침울해 보였고, 일단 저희를 손님으로 맞아는 주었습니다만…….”

“리스보아에서 이곳까지 일주일은 더 걸릴 텐데 우리보다 일찍 이곳에 오다니, 그곳 분위기가 많이 험악한 모양이로군.”

브라간사를 비롯한 헤젤인들은 ‘가만두지 않겠다’는 분위기를 노골적으로 풍기며 돌아갔다. 상황이 그러니, 조문단이 화를 입지 않고 돌아온 것만도 다행일 지경이다.

“그렇습니다, 폐하. 저희는 리스보아에서 사흘을 머물렀다가 거의 도망치듯 나와야 했습니다. 두 분 폐하의 친서에 대한 벨류 왕의 답장은…… 없습니다.”

“그래요……. 어려운 길을 다녀오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조문단을 치하하는 여왕의 목소리는 침울했다. 그들이 물러가자, 시스로네스가 여왕에게 말했다.

“사크틸라가 배후라고 노골적으로 지목하는 대신, 의심을 유도하는 길을 택한 모양입니다.”

제대로 된 증거가 있다면 왕자의 사인을 밝힐 수도 있고 책임을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불가능했기에, 헤젤의 의심은 점점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흐르는 듯했다.

“그날 브라간사의 대처가 수상쩍어 보였다는 이야기라도 전했어야 했나.”

엔히크의 죽음에 브라간사가 연관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왕자의 시신을 지나치게 빨리 옮긴 처사는 이해하기 힘든 면이 없지 않았다. 조금 비열하지만, 현재 상황에서는 어떻게든 헤젤 내부의 분열을 유도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왕이 그 말을 믿겠습니까? 불난 집에 기름만 더 얹은 꼴이 났을 겁니다. 전하지 않기를 잘했습니다.”

추기경의 말이 옳다. 에르난은 고개를 끄덕이고, 조문단 뒤편에 서 있던 전령에게 물었다.

“바르시나에서는 무슨 일인가?”

부부를 기다리던 이는 조문단만이 아니었다. 바르시나에서 온 전령도 있었다. 그는 에르난에게 편지를 건넸다. 바르시나 대표위원회의 귀족들이 보낸 편지였다.

발송일은 약 열흘 전. 바다호스에서 출발한 바르시나 측 회담 참석자가 살두비아에 도착하지도 않았을 때다.

‘급보는 받았을 테니 그것만 가지고 논의해서 보낸 건가. 빠르기도 하지.’

사실 무슨 일 때문에 왔는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회담 당일, 바르시나 귀족들은 ‘이 사건은 사크틸라의 일’이라고 선을 그으려 했다. 본국에 있는 귀족들도 마찬가지일 것이 뻔했다.

하지만 편지는 상상 이상으로 직설적이고 건방진 내용이었다.

사크틸라 남부에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다는데, 왜 우리 왕이 사크틸라가 저지른 사고를 수습해야 하는가? 왕은 사크틸라의 용병대장인가? 바르시나가 피를 흘려야 할 이유가 있나?

“…….”

에르난은 다 읽은 편지를 아내에게 주었다. 편지를 읽기 시작한 레이테는 곧 눈을 잔뜩 찌푸렸다.

“다른 편지가 하나 더 있습니다.”

전령은 새 편지를 에르난에게 건넸다. 뜻밖에도 블랑슈가 쓴 편지였다.

왕이 바르시나를 비우자, 블랑슈는 아들의 부탁대로 섭정이 되었다. 그녀는 바르시나의 일을 보고하는 편지를 왕에게 주기적으로 보냈다. 지난 편지를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아무래도 이것은 그와 다른 내용일 듯했다.

편지는 블랑슈가 썼다고는 믿기 힘들 만큼 단호한 어조였다.

바르시나의 두 왕이신 에르난과 레이테 폐하께 드립니다.

엔히크 왕자의 죽음이 알려지면서, 바르시나의 귀족들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회담에 참석한 귀족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나, 이곳 분위기는 이미 사크틸라가 사고를 저질렀다고 생각합니다.

살두비아나 아라고, 아니면 사크틸라에서 가까운 다른 도시도 상관없습니다. 어느 곳이라도 좋으니, 최소한 에르난 폐하께서 바르시나에 잠시 오셔서 귀족들을 직접 설득하실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분위기가 많이 좋지 않은 모양이네요…….”

남편에 이어 블랑슈의 편지를 읽은 레이테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에르난이 말했다.

“어머니의 말씀이야 맞습니다. 나도 차라리 직접 만나서 한바탕하는 편이 속 시원하겠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없잖습니까?”

“그렇습니다, 폐하. 바르시나까지 다녀오는 데에 걸리는 시간, 귀족들을 만나 설득하는 시간이 결코 적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바르시나에서는 폐하께서 사크틸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갖은 수를 쓰겠지요.”

시스로네스의 지적이 옳았다. 이런 분위기라면, 왕을 감금해서라도 사크틸라로 돌려보내지 않으려 할 것이다.

“멍청한 작자들.”

에르난의 입이 비틀렸다. 바르시나어임이 분명했던 욕설에 레이테가 놀라 남편을 바라보았다.

“사크틸라 일이니 놔두자고? 정말로 사크틸라가 뚫리면 다음 차례가 어디인지 모르나? 단체로 눈이 멀어서 지도 읽을 줄도 몰라?

동맹을 대체 왜 맺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허구한 날 바다는 우리 것이라며 노래 부를 줄만 알지, 그걸 지키려고 하는 게 뭐가 있어! 엔히크에게 망신을 줬으니 당분간 별일 없을 거라는 꿈이나 꿨겠지. 그 엔히크가 죽었는데, 이제 헤젤이 무슨 눈치를 본다는 거야!”

“진정해요, 에르난.”

레이테가 남편을 가볍게 안고 그의 몸을 토닥였다. 흥분해 잔뜩 소리쳤던 에르난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후우, 애초에 헤젤은 사크틸라 남부를 전부 공격할 필요도 없습니다. 접경지대에서 가까운 항구 몇 개만 점령하면 끝 아닙니까? 그것만으로도 바르시나의 바다는 난장판이 될 겁니다. 막아 주는 사크틸라가 없으니까.”

“그러게요…….”

한숨을 쉬기는 레이테도 마찬가지였다.

타국의 일, 반도의 이해관계에 휩쓸릴 수 있다. 결국은 사크틸라의 식민지가 될지도 모른다.

이것이 바르시나에서 레이테를 반기지 않는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그리고 현재 국면은 그들의 걱정이 괜한 것만은 아니라고 말하는 듯했다.

두 왕이 사크틸라 남부로 내려온 이유는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서이므로.

“여왕 폐하, 심발로 백작이 뵙기를 청합니다.”

머리를 식히기 위해 물을 한 잔 마시던 에르난의 손이 멈칫했다. 레이테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심발로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심발로는 모자를 벗어들고 무릎을 꿇어 여왕의 손에 입을 맞췄다.

“어서 와요. 조사는 성과가 있었나요?”

“제가 조사를 간다는 사실이 알려진 모양인지, 뭔가 숨기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일단 뭔가 있기는 한 듯한데……, 몇 번 더 다녀와야 확실할 듯합니다.”

“그래요. 고생 많았으니 며칠이라도 쉬다가 가세요. 이번에도 혼자…… 가나요?”

레이테의 목소리는 무척 조심스러웠다. 심발로는 잠깐 얼굴을 굳혔다가, 아무렇지 않은 듯 답했다.

“정확히 혼자는 아닙니다. 현지에 정보원도 몇 명 구해 뒀고, 제 휘하의 기사들도 있으니까요.”

“그렇군요. 다음 조사에서는 성과가 있기를 바랄게요.”

레이테가 씁쓸히 웃었다. 심발로에게는 여태껏 보지 못했던 냉랭한 기운이 느껴졌다.

보고를 마친 심발로가 돌아서 나가는데, 알현실에 있던 귀족 중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프란세스크였다. 그는 고개를 가볍게 숙여 심발로에게 인사했다.

심발로는 그 인사를 무시했다.

* * *

남부 사크틸라의 여름은 살갗이 익어 버리지 않을까 걱정될 만큼 햇볕이 뜨거웠다. 한낮에는 밖에 나갈 엄두조차 낼 수 없어 꼼짝없이 실내에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공식적으로 이때는 휴식 시간이었다. 남부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낮잠을 청한다고 했다. 하지만 왕까지 낮잠을 잘 여유는 없었다.

왕의 방문이 오랜만인 남부에는 왕이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레이테는 전투적으로 보고서를 읽어야 했다.

에르난은 일주일 가까이 낮잠 시간을 편지 하나를 쓰는 데에 썼다. 바르시나에 보낼 편지였다.

되도록 빨리 완성해 보내고 싶었지만 질질 끌고 말았다. 할 일이 많은 탓에, 업무 진행이 멈추는 한낮이 아니면 글에 매달릴 시간이 없었다.

더군다나 내키지 않는 말을 하면서 필사적으로 포장하려니 속도는 더욱 더뎌질 수밖에 없었다. 귀족들을 달래기 위한 글이므로.

“급히 돌아올 필요는 없네. 귀족들의 동향을 주시하고, 그들을 진정시켜 주게나.”

“알겠습니다, 폐하.”

간신히 완성한 편지는 프란세스크에게 건네졌다. 그는 왕의 전령으로 바르시나에 가게 되었다.

공작이나 되는 사람을 외국 왕실도 아니고 자국 귀족들에게 보낸다는 건 조금 이상하다. 하지만 프란세스크는 기꺼이 이 일을 받아들였다. 그는 사크틸라를 떠나 있는 편이 나았다.

작별인사를 마치고 복도로 나온 프란세스크는 반대편에서 다가오는 여왕과 마주쳤다.

“여왕 폐하.”

“리세우 공. 바르시나에 간다고 들었는데요.”

“예. 어린 기사들 단속은 잠시 접어 두고, 어르신들 달래러 갑니다.”

프란세스크가 가벼운 투로 답했다. 여왕은 가볍게 웃음 지었으나 그녀의 얼굴은 마냥 밝지만은 않았다.

여왕의 뒤에 있는 카테리나의 표정은 더 어두웠다. 오빠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가는 살짝 젖어 있었다.

“오빠…….”

“나만 덜 더운 동네로 도망가서 미안. 살두비아가 춥다 싶을 때면 다시 도망쳐서 내려올 테니 그때 보자.”

여왕에게 말할 때보다 더 유쾌한 목소리였지만 그러기에 더 구슬프게 들렸다.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게 프란세스크의 얼굴은 수척했고 눈은 짙은 수심에 차 있었다.

그는 동생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 두 사람을 지나쳤다. 카테리나는 멀어져 가는 그를 한참 바라보았다.

“이제 오빠는 도망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나오겠죠……. 아, 죄송합니다!”

무심코 말하던 카테리나가 화들짝 놀라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여왕에게 이런 말을 하면 안 된다.

“괜찮아요. 리세우 공은 중요한 일을 하러 간 거예요.”

사크틸라 귀족들은 프란세스크에게 냉담했다. 대놓고 그에게 시비를 거는 이도 있었고, 심발로처럼 아예 그를 무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심발로의 형인 팀파노가 그나마 프란세스크에게 정중하게 대한다는 점은 아이러니했다.

물론 프란세스크에게 호의가 있어서 팀파노가 그러는 것은 아니다. 전쟁을 준비하는 지금, 내부 갈등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들 팀파노처럼 행동해 주면 좋을 텐데.’

위기가 다가오건만 내부 분위기가 엉망이다. 레이테는 속이 탔다. 어떻게 해야 할까?

레이테는 남편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에르난은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골치 아픈 편지를 겨우 완성하고 나니 긴장이 풀린 모양이다. 레이테가 가까이 다가갔는데도 그는 기척을 느끼지 못하고 잠에 빠져 있었다.

‘깨우지 않는 편이 나으려나.’

레이테는 남편의 뺨에 입술을 살포시 가져다 댔다. 깨우지 말자고 생각하면서도, 곤히 잠든 그를 보니 그냥 지나치기 아쉬웠다.

남편의 반응은 없었다. 다행이면서도 아쉬웠고, 무엇보다 안타까웠다. 그는 정말로 지쳐 있었다.

“…….”

그리고 지친 것은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레이테는 남편의 맞은편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바로 눈앞에 잠든 남편이 보여서일까. 그녀의 눈꺼풀도 순식간에 내려앉았다.?

#093

바다호스에서 헤젤과의 회담을 마친 뒤 예정된 일정은 사크틸라 남부 지역의 순회였다. 부부는 원래 계획과는 완전히 달라진 형태와 목적으로 여름 동안 남부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이스팔리스 동쪽으로 강줄기를 따라 올라가면 사크틸라 남부에서 손꼽히게 오래된 도시 코르두바가 나타난다. 이곳 근처에는 부부가 만나야 할 중소귀족들의 영지가 많았다.

왕궁이 있는 코르두바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들른 성의 연무장에서는 검과 둥근 방패를 든 병사들의 훈련이 한창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훈련은 몇 시간째 계속되고 있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병사들 사이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성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낸 남녀 때문이었다. 인근에서 징집된 농민이 대다수인 병사들로서는 살면서 한 번 볼까 말까 한 사람, 그들의 왕이었다.

부부는 병사들이 자신을 바라보자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자 병사들은 왕에게 향한 눈을 허둥지둥 돌려 열심히 훈련하는 척했다. 봄에 받았던 열광적인 환호와는 딴판이었다.

“……이렇게 더운 날에도 훈련에 열중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군요.”

병사들의 반응에 당황한 영주가 어쩔 줄을 몰라 하자 여왕이 말했다.

“아, 예……. 그렇습니다, 폐하. 그래도 가을이 슬슬 오기는 할 모양인지 이번 주 들어서는 한결 더위가 꺾여서 병사들도 덜 힘들어합니다. 그러니 저렇게 의욕……이 넘치는 것이겠지요.”

더위가 가셨다고 말하지만, 영주의 이마에서는 땀이 흘렀다.

에르난은 쓴웃음을 지었다. 쩔쩔매며 상황을 무마하려는 영주도 딱했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아내도 딱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병사들의 반응은 훈련에 매진하는 바람직한 상황과는 거리가 있었다. 처음 보는 왕이 신기하기는 한지 힐끗거리는데, 그 눈길 속에서 원망을 읽기는 어렵지 않았다.

“힘들겠지만 훈련에 힘을 다해 주시오. 그리고 이왕이면…….”

아내를 따라 태연하게 말하려 했는데, 결국 말을 얼버무리고 말았다. 하지만 영주는 에르난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금방 알아차렸다.

“걱정 마십시오, 폐하. 모병 또한 순조롭고, 무기 수급도 조금 버겁기는 하지만……, 아니 괜찮습니다.”

그는 조금 어두워진 낯빛으로 억지웃음을 지었다. 에르난은 민망함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릴 뻔했다가 억지로 참았다.

왕은 백성의 마음을 살피고 격려해야 할 텐데, 지금 그들은 백성의 피를 짜내고 있다. 전쟁 준비를 해야 하니까. 전쟁에는 사람과 돈이 많이 든다.

군공을 세워 출세할 야망을 품은 일부 기사들을 제외하고, 전쟁을 반가워하는 이는 없었다. 자신의 보금자리를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일 뿐이었다.

‘출세할 야망이라면 나야말로 만만치 않았는데.’

에르난은 자신이 사크틸라에 처음 오던 때를 떠올렸다. 그는 아내 대신 전장에 나가 영웅이 되어 사크틸라의 실질적인 권력을 잡을 생각이었다.

‘유치한 몽상이었지.’

전쟁은 기사의 명예를 빛내는 무대였다. 소설 속에서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어느 정도는 그랬다. 헤젤에 승리한다면 에르난은 그가 꿈꾸던 대로 영웅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전쟁은 애초에 그 불씨 자체를 만들지 않았어야 옳다. 모든 일이 꺼림칙하게 돌아가는 지금 상황에서는 더 그랬다.

* * *

일주일의 순시를 마치고 돌아온 코르두바 왕궁에서는 바르시나인들이 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탐브레를 토벌할 때와 달리 이번에는 바르시나도 참전한다.

알현실에 들어온 바르시나 지휘관들이 두 왕을 바라보는 시선은 영 호의적이지 않았다. 레이테는 속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원래 그 정도 적대감이야 레이테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생각대로 풀리는 일이 없는 현 상황에서는 저런 것마저 감당하기 힘들어졌다.

그래도 가장 앞에 선 남자는 조금 달랐다. 세심하게 주변을 살피는 모습은 경계보다 호기심이 더 강해 보였다.

‘저 사람이 페레트 발란시오일까?’

에르난은 헤젤 해적을 소탕할 당시 바르시나 함선의 지휘관 중 한 명이었던 페레트에 대해 아내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에르난은 그가 주목하는 인물을 선발해 황금 양모 기사단을 만들었다. 하지만 젊은이를 선발한다는 취지의 기사단에 합류시키기에 삼십 대 후반은 너무 많은 나이였고, 형평성을 고려해 결국 탈락시켰다고 했다.

페레트는 군대보다는 수상한 연금술에 몰두하는 공방에 있는 편이 어울려 보이는 인상이다. 에르난은 그가 화약류를 다루는 데에 재주가 많아 보인다고 했다.

“페레트 경. 잘 오셨소.”

에르난은 그를 꽤 반갑게 맞았다.

바르시나의 대귀족들은 군사를 보내라는 왕의 명령을 무시했다. 에르난은 예상했던 일이라면서 다른 이들을 부르기로 했다. 바르시나 귀족의 주류인 대륙주의자가 아닌 소수파에 속하는 하급 귀족이다.

“오랜만입니다, 폐하, 저희의 왕을 온전히 외국인 손에만 맡길 수는 없지요. 불러 주셔서 영광입니다.”

물론 대륙주의자가 아니라 하여 현 상황을 긍정적으로 여기라는 법은 없었다.

‘바르시나 귀족은 정말 다 저러나? 왜 하나같이 미운 소리를 못 해서 안달이람.’

하지만 결국 병사를 모아 사크틸라에 오지 않았나. 불평은 해도 명령은 따를 것이다.

“바르시나인이 없지는 않아. 기사단원들이 있지.”

“아, 그자들은…….”

페레트는 힐끗 주변을 돌아보았다. 드문드문 보이는 바르시나인을 확인하던 그의 눈이 세르지에게 닿았다. 그는 피식 웃고 다시 에르난을 바라보았다.

“제대로 된 군인이 폐하를 보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레이테는 세르지가 험상궂은 얼굴로 소리 없이 입만 움직여 뭔가 말하는 것을 보았다. 아마 욕설일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를 싫어하는 게 틀림없다.

“그래도 기사단은 순회 내내 우리를 잘 호위해 줬어요. 설립된 지 이제 겨우 반년이라 아직은 훈련이 더 필요할 뿐이랍니다. 일단은 바르시나에서 먼 길 와 줘서 고마워요. 나도 남편도 여러분께 거는 기대가 큽니다. 함께 힘을 합쳐 이 난관을 잘 극복해 봐요.”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 같다. 레이테는 적당히 수습하고 알현을 끝내 버렸다.

* * *

코르두바 왕궁은 사크틸라가 이 근방을 점령하기 전에 존재했던 이교도 왕국 때 지어졌다. 그래서 반도의 일반적인 유행과도, 바르시나에서 유행하는 복고적인 옛 제국 양식과도 다른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특히 중앙의 연못과 그를 둘러싼 정원수의 조합이 그랬다. 사자 조각상의 입을 통해 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면 시원한 기분이 들기 마련이었다.

또한 화도 가라앉는다. 남편과 함께 정원을 산책하던 레이테는 알현실에서 느낀 황당함을 마구 쏟아내는 대신 차분히 말했다.

“말 잘 들을 사람을 불러온 줄 알았는데……. 아니, 그래도 일단 와 줬으니 다른 사람들보다는 낫겠지요. 맞나요?”

“그렇습니다. 아마 바르시나에서 출발할 때 고초를 많이 겪어 예민해진 모양입니다. 세스크가 보낸 편지에 따르면, 이런 틈에 구차하게 출세할 생각이냐고 비웃음을 꽤 샀다고 하니.”

“고생이 많았겠네요. 하지만 걱정이 좀 되는군요. 같은 바르시나인끼리도 저러는데 사크틸라와 함께 움직일 때는 어떨지…….”

하아. 레이테가 한숨 쉬었다. 편하게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정말 단 하나도.

“두 분 폐하.”

일정한 거리를 두고 왕의 뒤를 따르던 시종 중 한 명이 가까이 다가왔다.

“시스로네스 추기경이 도착했습니다. 집무실에서 기다리라고 할까요?”

“아니, 이곳으로 모셔 오세요. 정원이 더 시원해요.”

잠시 후, 회색 수도복에 상체를 덮는 망토만 붉은색으로 차려입은 추기경이 나타나 부부에게 인사했다.

“두 분 폐하, 건강히 지내셨습니까?”

“우리는 별일 없어요. 예하야말로 괜찮으신가요?”

부부가 남부 이곳저곳을 누비던 여름 내내, 시스로네스는 그들과 떨어져 지냈다. 그도 처음에는 억지를 부려서라도 왕을 수행하려 했다. 하지만 이스팔리스 근교에 전염병이 돌면서, 추기경도 덜컥 병에 걸려 버렸다.

“저는 이제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운 좋게도, 병 자체가 심하지 않았으니까요.”

시스로네스는 이전에 만났을 때보다 오히려 더 안색이 밝고 건강해 보이기까지 했다.

에르난은 슬며시 미소 지었다. 프란세스크는 기왕 바르시나에 돌아왔으니 약이나 잔뜩 구해야겠다면서 추기경에게 별의별 것을 잔뜩 보내 버렸다. 그 약들의 효능이 좋았나 보다.

“모병에 고생이 많으셨다 들었습니다. 제가 했어야 할 일인데 송구합니다.”

“아니. 이런 상황에서는 몸이 좀 고생하더라도 왕이 직접 얼굴을 비쳐 호소하는 편이 낫습니다.”

시스로네스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에르난의 말이 옳았다. 설령 추기경이 있었다 해도 부부가 무더위 속에서 여기저기 다니기는 마찬가지였을 터다.

“전염병은 이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슬슬 두 분께서도 이스팔리스로 돌아갈 채비를 하셔도 되겠습니다. 사실상 이제는 다 잡혔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팀파노 후작은 아직도 회복이 덜 되어 고생 중이지만…….”

“팀파노? 많이 심각한가요?”

레이테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전염병은 부부가 이스팔리스를 떠난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창궐했다. 뒷정리를 위해 아직 이스팔리스에서 머물던 팀파노와 심발로 형제는 나란히 병이 옮아 꼼짝없이 그곳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동생 쪽은 금방 회복했으나 형은 힘들어하는 기색이었습니다. 출전하기에는 무리 같으니 후방 임무를 맡기셔야 할 겁니다.”

에르난은 이왕이면 형제가 함께 전장에 나가기를 바랐다. 팀파노가 있으면 심발로가 바르시나인을 향해 내보이는 냉랭함이 어느 정도 덮어질 테니까.

여름 동안은 심발로의 행동에 간섭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장에서는 달라져야 한다. 군기가 흐트러져서는 안 된다.

* * *

국왕 일행이 먼저 이스팔리스에 당도했으며, 며칠 후 바르시나의 군대도 도착했다. 사크틸라 귀족들도 군사를 이끌고 모여들었다.

여름 동안 병이 돌아 을씨년스러웠던 이스팔리스는 가을이 다가오면서 다시 활력을 되찾았다. 병을 피해 도시에서 먼 곳으로 갔던 사람들도 돌아왔다.

도시의 활기는 긴장을 버티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도시 어디에서나 군인을 쉽게 볼 수 있었으며, 이스팔리스에서 헤젤은 그다지 먼 거리도 아니었다.

매일매일 새로운 소문이 서쪽에서 흘러들어 왔다. 헤젤군의 규모에 대한 소문은 점점 그 크기를 불리더니 병력이 무려 십만 명이나 된다는 말까지 나왔다.

“당연히 말도 안 되지요. 아예 그 나라 왕도 리스보아를 통째로 들어서 사크틸라로 온다면 모를까.”

매일 아침 국왕과 참모들이 모이는 회의 자리에서, 레이테는 단호하게 소문을 일축했다.

“지금부터는 우리 군에 악영향을 줄 수 있는 어떤 것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악의적으로 나쁜 소문을 퍼뜨리는 무리가 있을 수 있으니 그들을 색출하십시오.”

에르난이 시스로네스에게 말했다. 시스로네스는 지난 탐브레 토벌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에르난을 수행하지 않고 레이테의 곁에 남는다.

“예, 폐하.”

시스로네스가 답했다. 에르난은 이제 시선을 돌려 회의실 탁자 위의 지도를 바라보았다. 헤젤 군사가 드디어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는 첩보가 오늘 새벽 들어왔다.

사크틸라와 바르시나도 움직일 때가 온 것이다.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빠르게 대처할 수 있도록, 아군도 이제 국경으로 이동합시다. 일단 거점을 사수하되, 상황을 봐서 조금 더 적극적으로 진군하는 방안을 고려하는 편이 좋겠소. 그리고 이곳은…….”

이곳저곳에 흩어진 크고 작은 성 아래, 바다에 면한 항구가 있었다. 에르난의 손이 그곳을 가리켰다.

“오누바…….”

지도에 적힌 이름을 읽는 레이테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오누바는 예전부터 헤젤과의 싸움에서 보급기지 역할을 톡톡히 했다고 들었습니다. 요새에 군사를 배치하고, 지휘부는 이곳으로 옮기는 편이 좋겠는데, 어떻게 보시는지?”

“좋은 선택이십니다. 오누바는 육지와 바다 양쪽 면에서 중요한 관문이지요. 한동안 전쟁이 없어서 상거래도 활발해졌으니 물자 수급에 더욱 유용할 겁니다.”

팀파노가 말했다. 그의 가문은 사크틸라 남부 곳곳을 소유했고 이 지역의 사정에도 제법 밝았다.

오누바 주변에 대한 팀파노의 분석이 이어졌다. 에르난은 팀파노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런 나머지, 에르난은 불안하게 흔들리는 아내의 눈을 보지 못했다.?

#094

나흘 뒤 출정이 결정되면서, 에르난은 종종 작년 여름 일을 떠올렸다. 그가 레이테의 남편이 되어 처음 나갔던 전장이었다.

그때와 지금은 많은 것이 달랐다. 군의 규모도 더 크고 구성도 복잡했다. 내부 분위기는 오히려 지난번보다 좋지 않다.

하지만 에르난이 가장 난처하게 느낀 차이점은 아내 레이테의 태도였다.

“그것 가지고 괜찮겠습니까?”

에르난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수척한 얼굴의 레이테는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이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부부의 점심 식탁에는 바싹 구운 고기, 갓 구운 빵, 신선한 포도, 얼음을 넣어 시원하게 한 술 등이 차려져 있었다.

하지만 레이테는 어느 것에도 손대지 않았다. 먹어도 소화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탓이었다.

결국 레이테에게는 다른 음식이 주어졌다. 물과 식초, 올리브유를 섞고 부스러기에 가깝게 작게 부순 빵과 오이를 넣은 수프였다. 레이테는 부드러운 수프나 겨우 삼켰고, 그것마저 다 먹지 못했다.

“속이 좀 메슥거려서…….”

아내가 식사를 힘겨워하는데, 에르난이라고 입맛이 돌 리가 없다. 그도 손에 쥔 나이프를 내려놓으려 했다.

“더 드세요.”

그 순간, 방금까지 기운이 하나도 없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단호한 아내의 말이 에르난을 멈춰 세웠다. 완곡한 권유도 아닌, 날카로운 명령조였다.

“전쟁……을 치를 사람이라면 든든히 먹어야 해요.”

마지못해 나이프를 고쳐 잡은 에르난은 손으로 찢는 편이 빠를 만큼 고기를 얇게 썰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도 음식이 얹힐 것 같았다.

전쟁이라 말할 때 뚜렷하게 떨리던 아내의 목소리는 알아채지 못한 체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전투를 앞두고서는 누구나 긴장한다. 직접 전투에 참여하는 군인은 물론이고, 그들의 가족이나 주변 사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레이테의 긴장은 지나친 면이 있었다. 음식을 먹지 못하고 잠도 설쳤다. 작은 것에 예민하게 굴어, 그녀를 잘 아는 카테리나도 난처해 하는 기색이었다.

에르난은 힘겨워하는 아내의 부담을 덜어 주고 싶었다. 하다못해 군사 회의에라도 아내를 참석시키고 싶지 않을 지경이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회의가 열리니 긴장의 끈을 도저히 놓을 수 없게 된다.

불가능한 일이다. 부부는 공동왕으로서 동등한 결정권을 갖는다. 실질적인 군 지휘를 에르난이 맡는다고 하여 레이테가 회의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그 균형이 깨진다. 레이테가 가장 싫어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점심식사 후 회의가 시작될 때에도, 에르난은 아내를 처소로 돌려보내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헤젤군의 주둔지 위치를 보아, 아마 강을 피해 올라올 의도로 보입니다.”

“요새에 병력을 더 보내고, 기습을 반복해서 헤젤의 진군을 멈추도록 하세요.”

여왕의 명령을 들은 심발로가 에르난을 힐끗 보았다. 에르난은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폐하. 그러면 이쪽 부대를 보내서…….”

여왕은 남편과 심발로가 주고받은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에르난뿐만 아니라 지휘관 모두가 여왕의 예민함을 느끼고 있었기에 조심스럽게 그녀를 대했다. 심발로도 마찬가지였다.

친화력이 좋던 심발로는 프란세스크와의 일 이후 바르시나인과 소원해졌다. 에르난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탐브레를 토벌하던 당시 에르난에게 가장 호의적이었던 사크틸라 귀족이 심발로였다. 그래서 에르난은 이 상황이 더 안타까웠다.

두 나라가 연합한 만큼, 내부의 갈등 자체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이 심각해지면 곤란하다.

다행히 심발로는 바르시나를 향한 미움으로 인해 판단력이 흐려질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팀파노가 동생을 붙잡아 주는 덕도 있을 것이다.

팀파노는 바르시나와 사크틸라 사이를 어색하게나마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했다. 동생 일 때문에라도 그 역시나 바르시나를 썩 좋게 보지 않을 텐데, 대단한 자제력이었다.

“폐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페레트가 물었다. 잠시 생각하던 에르난은 고개를 꼿꼿이 들었다.

“이제 전투는 피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 내일 아침 출발합시다.”

그는 아내에게 시선을 두지 않으려 애쓰며, 귀족들을 향해 말했다. 그러나 자신의 옆에 앉은 아내가 화들짝 놀라 몸을 움찔거리는 것은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라도 알 수 있다. 레이테는 남편의 출전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었다.

* * *

그날 저녁, 에르난은 레이테와 함께 미사에 참석했다. 사실 요즘은 매일 아내를 따라 성당에 갔다. 출전을 앞두고 갑자기 신앙심이 샘솟은 것은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라도 레이테의 걱정을 덜어 주고 싶었다.

“폐하.”

미사가 끝나고 처소로 돌아가려는데, 시스로네스가 에르난을 불렀다. 제의를 벗은 그는 기다란 보라색 띠를 목에 걸치고 있었다. 보라색 띠는 고해성사를 할 때 맨다.

“전장에 나가기 전에는 모든 죄를 참회하고 깨끗이 씻어내야 마땅합니다.”

“갑자기 무슨…… 아니, 알겠습니다.”

뜬금없는 고해성사라니.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거절하면 레이테가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고해는 사제와 일 대 일로 한다. 레이테를 먼저 돌려보내고, 에르난은 고해소에 들어갔다. 이런 자리에 얼마 만에 앉아 보는지. 케케묵은 냄새가 답답했다.

작게 난 그물창 너머의 방에 시스로네스가 들어와 앉았다.

“지은 죄라면 많기는 한데, 갑자기 고해하라 하시니 뭐라 말할지 막막하군요. 그리고 지금 같은 때에 7일간 금식하라는 식의 보속을 받으면 곤란합니다.”

에르난은 솔직하게 말했다. 빨리 끝내고 아내에게 가고 싶었다. 많이 불안해하니, 오늘 밤은 따뜻하게 안아 주고 싶다.

그런 근성으로 대체 뭘 하겠냐고 꾸짖는 소리를 들을 것 같지만 별로 상관없다.

“그러면 제 이야기를 들으십시오.”

시스로네스는 호통 대신 의외의 말을 꺼냈다. 어리둥절하던 에르난은 곧 깨달았다. 시스로네스는 고해성사가 아니라, 에르난과 단둘이 할 말이 있어 이곳으로 부른 것이다.

‘레이테가 아니고 나와? 신기한 일이군.’

“22년 전, 오누바 근방에서 헤젤과의 마지막 전투가 있었습니다. 저도 왕의 고해사제로서 그곳에 갔지요. 왕께서는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으셨고, 결국 회복하지 못하셨습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지만, 이어질 내용은 짐작할 수 있었다. 22년 전 사크틸라의 왕은 레이테의 아버지였다.

“여왕 폐하께서는 너무 어릴 때의 일이라 기억하지 못하실 겁니다. 하지만 선왕께서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세상을 떠나셨는지, 그 사실은 명백히 알고 계십니다. 내일 폐하께서 향하실 곳은, 여왕께서 가족을 잃은 곳입니다.”

“……그래서 레이테가 그토록 불안해했던 겁니까?”

시스로네스는 부정하지 않았다.

“좀 빨리 알려 주시지 그랬습니까? 그랬으면 다른 곳으로 군사를…… 아니, 전략상 그럴 수는 없지요.”

“이런 이야기를 여왕께서 계실 때 할 수 있겠습니까? 여왕께서는 줄곧 남편과 함께 계시니 고해성사 구실로 겨우 자리를 만든 겁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일찍 안다고 해서 폐하께서 여왕께 무엇을 해 주실 수 있습니까?”

에르난은 답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변하는 것도 없다. 더군다나 레이테는 자신이 그런 이유로 예민해졌다는 사실을 남편이 안다면 무척 수치스러워 할 것이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있지요,”

시스로네스가 말했다.

“절대 죽지 말라는 뜻에서 말씀드린 겁니다. 여왕께서 어떻게 지금까지 버티셨는데, 그분을 무너뜨릴 수는 없습니다. 폐하께서도 인간이시니 죽음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번 전쟁에서만은 안 됩니다.”

협박과 애원이 뒤섞인 목소리에서는 물기가 살짝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나도 살아서 아내를 다시 보고 싶은지라 절대 죽을 생각은 없습니다. 물론 죽고 사는 일이 마음대로 되지는 않지만, 아직 할 일이 더 있으니까요. 적어도 여왕의 후계자는 만들어주고 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하께서도 그걸 바라겠지요?”

에르난은 짐짓 아무것도 아닌 듯 쾌활한 투로 말하고 고해소 문을 열어 나왔다.

그는 성당 밖으로 나갈 때까지 여러 차례 뒤를 돌아 고해소를 바라보았다. 시스로네스는 밖으로 나오지 않고 계속 고해소 안에 있었다.

좁은 곳에 홀로 앉은 추기경이 무엇을 하는지 알 것 같으면서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에르난이 아는 시스로네스의 모습에 나약함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 * *

요즘 레이테는 아침에 일어나는 것을 싫어했다. 늦잠은 없었고, 움직임이 유별나게 굼뜨지도 않았다. 남편을 꼭 붙잡고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들려 하는 짧은 시간이 있을 뿐이었다.

에르난은 아내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레이테는 금방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현실을 도피하고 싶어 허우적대기에는 왕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출전일 아침은 그조차도 없었다. 맑게 뜬 보랏빛 눈을 본 에르난은 숨이 막히는 듯했다.

“아침부터 날씨가 무척 좋네요.”

아내의 키스는 놀랍도록 산뜻했다. 더 깊게 입 맞추고 싶은 욕망을 차마 꺼내기 민망할 정도였다.

아침 식사에서 레이테는 여전히 수프를 먹었다. 하지만 작지 않은 그릇을 깔끔하게 비웠으며 우유도 한 잔 마셨다.

에르난은 그때야 자신이 우유에 입도 대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음식을 먹지 않은 쪽은 자신이었다. 그는 허겁지겁 식사를 마쳤다.

지난 출정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레이테는 남편이 갑옷을 입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지막에 목걸이를 걸어 주는 것도 같았다. 황금 양모 펜던트가 달린 기사단의 목걸이였다.

부부는 밖으로 나왔다. 병사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여왕은 에르난에게 왕관을 씌워 줬다. 그리고 남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남편의 어깨를 살짝 붙잡은 가녀린 손도, 다소곳하게 감긴 긴 속눈썹도, 촉촉하고 따뜻한 입술과 흘러내리는 은빛 머리카락도 모두 우아했다. 그간의 불안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모습을 보이기 위해 얼마나 감정을 눌러 담았을까. 에르난은 아내의 의연함이 자랑스러우면서도 안타까웠다.

* * *

팀파노는 기사단의 목걸이를 동생에게 걸어 주었다. 그는 동생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이 목걸이를 다시 벗을 때까지, 네게 개인적인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 거야. 돈 에르난은 바르시나인이지만 네 지휘관이고 사크틸라의 왕이지. 너는 그의 기사고. 무조건 왕을 따르고 지켜야만 한다.”

입술을 살짝 깨물던 심발로는 곧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군대가 오누바로 떠나고, 이스팔리스 왕궁의 넓은 회의실은 여왕과 추기경, 극소수의 귀족만이 자리를 채웠다. 나머지는 텅텅 비어 있었다.

레이테는 허전함을 느꼈다. 특히 자신의 빈 옆자리가 신경 쓰였다.

“오늘 떠난 이들이 금방 돌아오리라 믿으며……, 우리는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일 하나를 확실히 끝내고자 해요.”

“헤젤의 대포 밀수를 말씀하십니까?”

시스로네스의 물음에 레이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군이 대륙에서 들여온 신식 대포의 포격을 맞으리라는 사실은 확실해요. 이미 흘러간 것은 어쩔 수 없다 해도, 더 이상의 보급은 차단해야겠지요.”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폐하, 그 일은 원래 제 동생의 임무였습니다. 그러니 전장으로 떠난 그를 대신해, 제가 조사하고 싶습니다. 전투를 하는 것도 아니니 그 정도는 몸에 무리도 없을 겁니다.”

팀파노가 일어나 여왕의 앞에 무릎 꿇었다. 건강 탓에 전장에 나갈 수 없다는 부끄러움과 중요한 일을 여전히 해결하지 못했다는 부담감 때문인지 그의 표정은 무척 비장했다.?

#095

“폐하, 저희의 병력은 적지 않습니다.”

오누바 외곽 요새에서 열흘째. 매일 밤 열리는 회의는 이제 페레트의 말로 시작하는 것이 당연해져 버렸다.

페레트는 매일 비슷한 소리를 했다. 하지만 오늘은 좀 더 구체적이고 훨씬 짜증스러웠다.

“바르시나와 사크틸라, 두 나라의 군이 모였잖습니까. 연합입니다, 연합. 사크틸라 군만 싸우는 게 아니고요. 바르시나 군의 존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폐하는 어느 나라 왕이십니까?”

그리고 지극히 바르시나답게 직설적이고 버르장머리 없었다.

술자리에서 험담을 늘어놓을 때나 할 것 같은 말을 왕에게 직접 하는 모습에, 사크틸라인은 여전히 적응하지 못했다. 그들은 입을 떡 벌리고 페레트를 바라보았다.

조금 빨리 정신을 차린 쪽은 아르파였다. 그는 화를 꾹꾹 눌러 담으며 페레트를 향해 말했다.

“페레트 경. 전쟁은 숫자만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중장 기병의 수가 헤젤이 월등하오. 그 실질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동력을 살려 유격 활동을 반복하는 쪽이 시간은 걸려도 효과가 확실합니다.”

“제 말은 왜 병력을 활용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폐하. 바르시나에는 여전히 파병에 부정적인 자들이 많습니다. 반대를 무릅쓰고 이곳까지 온 폐하의 병사들을 외면하지 말아 주시지요.”

“외면을 자초하는 건 당신들이야! 거북이로 군대를 만들어도 당신들보다는 빠르겠더군! 그따위 기동력으로 무슨 작전을 수행한다는 거요?”

아르파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페레트에게 삿대질하며 외쳤다.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페레트는 고함을 지르는 대신, 피식 비웃음을 짓고 말했다.

“속도를 말씀하시다니 우스운 일입니다, 공작. 무슨 쥐가 치즈 갉아먹는 것도 아니고, 그런 식으로 깔짝거리며 공격하다가 어느 세월에 헤젤을 무찌릅니까? 여기에서 성탄절도 새해도 맞이하겠군요. 이 지역은 추위가 거의 없다더니, 그래서 겨울에도 전쟁합니까? 아예 봄…….”

적당히 좀 해! 참다못한 에르난이 손으로 탁자를 쾅 쳤다. 페레트는 입을 다물었고, 아르파는 자리에 앉았다.

“현실적으로 헤젤의 기병을 상대하려면 유격전이 최선이오.”

에르난은 페레트를 노려보았다. 이 문제를 더는 물고 늘어지지 말라는 경고였다.

“물론 페레트 경의 말에도 일리가 있소. 우리는 두 나라의 연합군이니, 서로 힘을 합해야 하지 않나.”

자신이 말해놓고도 씁쓸했다. 힘을 합하기는 무슨, 하루하루 다툼만 늘어났다.

출정 전부터 바르시나와 사크틸라의 사이는 벌어져 있었다. 그러나 전장에 나오자 작전에 대한 시각의 차이로 갈등은 더 심해졌다.

에르난이 택한 전술은 작년에 그가 사크틸라 북부에서 겪으며 배웠던 소규모의 유격전이었다.

바르시나군은 이런 방식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들은 제대로 된 회전 하나 치르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이 전법이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기동력의 문제로 바르시나군이 소외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사크틸라인이 에르난에게 환호하냐면, 그것 역시 아니었다. 그들은 에르난이 억지 주장만 반복하는 자기 나라를 감싼다고 여겼다.

“기습작전은 그대로 유지하고, 헤젤의 포병대를 무력화할 방안을 구상해야 하오. 대륙 대포를 밀수한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렇게 많이 확보했을 줄이야. 자칫하면 우리 요새가 돌파당하지 않을까 염려되는군.”

“옳은 말씀이십니다, 폐하. 전면전을 각오하더라도 그쪽부터…….”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 하셨소? 전면전은 무슨 전면전이야!”

페레트가 은근히 말하자 아르파가 신경질적으로 외치며 다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페레트고 아르파고 모조리 감옥에 던져 넣고 싶다. 진심이었다. 두 나라에서 가장 목소리가 큰 사람들이니까.

물론 불가능한 소망이었다. 그들이 목소리가 큰 것은 이유가 있었다. 두 사람은 각 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강력한 부대를 이끌고 있다.

갈등은 각오했던 일이다. 두 나라의 차이로 인한 오해도 생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까지 꼬인 것은, 헤젤군이 생각보다 훨씬 탁월한 능력을 지녀서다.

브라간사는 놀라울 정도로 사크틸라의 지형에 익숙했다. 에르난의 도발에 쉽게 걸려들지 않는 것이다.

더군다나 군대의 편성도 헤젤 쪽이 훨씬 유리한 입장이었다. 그들은 압도적으로 많은 기병을 보유했다.

연합군의 기병대 수는 보잘것없었다. 황금 양모 기사단의 경우, 기병대다운 전력은 아니었다. 그들은 왕의 호위만 맡는다.

사크틸라는 복잡한 지형을 이용해 소규모로 치고 빠지는 전투를 선호했다. 그런 탓에 기병보다는 가볍게 무장한 보병이 더 발달했다. 사크틸라인이 기사에 열광하는 이유는, 기사가 드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바르시나는 육군의 발달이 해군보다 못했기에, 역시 그 수준이 떨어졌다.

헤젤의 기병이 마음먹고 돌격하면 연합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 상황을 피하고자, 바르시나가 보기에는 비겁한 수를 쓰게 된 것이다.

에르난도 답답했다. 이 전술이 얼마나 시간을 많이 잡아먹고 지루한지는 이미 작년에 배울 만큼 배웠다.

“사크틸라가 바르시나를 얼마나 무시하는지 이제 잘 알겠군요!”

“그런 식으로 말해도 안 속아! 음침한 바르시나 놈들 같으니라고!”

오늘 회의도 망했다. 에르난은 한숨을 쉬었다. 눈앞이 새까매졌다.

* * *

엉망진창인 회의가 어떻게든 끝나고, 심발로 백작은 자신의 막사로 돌아가기 전에 기사단의 병영을 찾았다.

기사들을 관리하는 역할은 원래 심발로만의 일이 아니었다. 함께 일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하지만 그는 참전하지 않았다.

‘혼자 하려니 힘드네.’

힘들면 자존심도 없어지는 걸까. 심발로는 프란세스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페레트가 좀 재수 없는 놈이긴 해. 공을 쌓아 출세하고 싶은 욕심에 멋대로 군을 끌고 왔으니. 하지만 이해는 되잖아? 그렇게까지 무리했는데 빈손으로 돌아가게 생겼는걸.”

모닥불 주변에 바르시나 기사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페레트는 없었다. 지나가는 사크틸라 기사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로 말하는 사람은 세르지였다.

“이왕 시작했으면 빨리 끝내야 정답이지 않나. 이게 무슨 전쟁이야. 애들 장난도 아니고.”

왕마저 비웃는 표현이다. 심발로는 세르지를 따끔하게 혼낼 생각으로 모닥불을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주변을 지나가던 다른 사크틸라 기사가 먼저 끼어들었다.

“말이 좀 지나치군. 바르시나는 제대로 겪어 본 것도 없으면서 왜 잘난 척만 하나?”

“그러는 경께서는 뭘 하는데요?”

세르지가 비웃으며 맞받아쳤다.

말이 오가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심발로가 재빨리 끼어들어 말렸기 때문은 아니었다. 세르지에게 주먹이 날아와서였다.

* * *

하다 하다 못해 이제 황금 양모 기사단에서까지 싸움이 벌어졌다는 보고에 에르난은 머리가 아파 왔다. 두 나라의 화합을 위해 만든 기사단이 아니었나?

“송구합니다, 폐하.”

심발로도 부끄러움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두 사람은 오누바 시내의 감옥으로 보냈습니다.”

적당한 처분이다. 에르난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무셔야 할 때 찾아와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네. 기사단 일은 시간을 가리지 않고 곧바로 보고하라 하지 않았나.”

에르난이 그렇게 명령한 이유는 프란세스크가 없어서였다. 혈기 넘치는 두 나라의 젊은 기사들을 심발로 혼자 감당하기는 쉽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일로, 괜한 염려가 아니었음이 증명되었다.

“리세우 공이 있었더라면 기사단 내 싸움은 막았을까요?”

의외의 말에 에르난의 눈이 크게 떠졌다. 심발로가 먼저 프란세스크를 언급할 줄은 몰랐다. 놀란 기색의 왕을 보고 심발로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곳으로 오기 전, 형님……, 팀파노 후작이 제게 당부했습니다. 개인적인 감정이 어떠하든 폐하를 따르라고요. 저도 그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승리를 위해서 두 나라는 협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점점……. 솔직히 제 탓인 것 같아 송구합니다.”

에르난은 당황했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심발로가 자신에게 이런 말을 꺼낼까?

“……그렇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 정작 자네와 팀파노는 정도를 지키지 않았나. 그리고 전술에 대한 의견 차이를 보면, 어차피 갈등은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드는군.”

“리세우 공이 아니라, 제 모자람이 부끄럽고 화가 났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심발로의 묵직한 한탄은 즉흥적인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와 프란세스크의 사이가 벌어진 지도 반년이 다 되어 간다. 심발로는 긴 시간 동안 고민과 후회를 해 온 것이다.

“자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전투가 끝나고 잠시 이스팔리스에 가서 세스크를 만나보는 건 어떨까? 슬슬 세스크를 사크틸라로 부를 생각인데, 분위기 때문에라도 이곳까지 오라 하지는 않고 레이테의 곁에 있게 할 생각이야. 레이테도 그게 좋겠다고 하더군.”

“아, 그건…….”

“무거운 짐은 빨리 덜어내는 편이 자네와 세스크에게도, 그리고 두 나라에도 좋겠지.”

심발로는 오랫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프란세스크를 다시 만날 자신은 없지만, 그렇게 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폐하.”

에르난은 권유를 했지만, 심발로는 그것이 명령이니 따를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자신의 망설임을 끝내려 했다. 그는 조금 밝아진 얼굴로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 * *

심발로를 생각하면 훈훈한 마무리였지만, 현실이 마냥 잘 흐를 리는 없었다. 기사단 내의 싸움은 지휘관들의 회의에까지 끌려 나왔다.

“젊은 기사들의 감정이 앞선 탓에 일어난 일입니다. 너무 마음에 두지 말아 주십시오.”

심발로는 사태를 키우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아니요, 젊은 기사들도 알 것은 다 압니다. 그들의 반응이야말로 가장 솔직하지요. 보십시오, 폐하. 전쟁은 빨리 끝내야 하는 것입니다.”

페레트는 분명 세르지가 자신을 험담했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하지만 공동의 적, 사크틸라 앞에서라면 그 정도는 눈감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전쟁은 빨리 끝낼수록 좋습니다. 그런데 경께서는 그 이유를 망각하신 것 같군요. 피해를 줄이기 위해 빨리 끝내려는 겁니다. 현 상황에서는 우리 몸을 사리는 쪽이 피해가 덜합니다.”

어제의 자신이 부끄러웠는지, 아르파는 입을 꽉 다물고 페레트와 바르시나인들을 노려보기만 했다. 그는 아예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는 작정인 듯했다.

대신 다른 사크틸라 귀족이 페레트에 맞섰으니 회의 분위기는 큰 차이가 없었다.

‘미치겠군.’

총지휘관인 왕이 이성을 잃고 화를 낸다면 군은 무너진다. 에르난은 다 엎어 버리고 싶은 마음을 또 억누르고 억눌렀다.

차라리 시스로네스에게 구박받던 작년이 나았다. 불쾌한 경험이었지만, 동시에 좋은 배움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었으니.

채찍질해 줄 어른의 존재가 그리워진다니. 에르난은 자신이 어린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스로네스가 없어지길 바랐으면서, 정작 그가 없으니 뭘 못한다는 건가?’

이래서는 안 된다. 에르난은 왕이고, 왕은 자신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

“어제 말했듯이, 대포 무력화가 우선이오. 그것에 집중한 다음, 상황을 봐서 전군을 진격하도록 하지.”

무엇보다, 양쪽에서 쏟아지는 압박에 에르난도 지쳤다. 그야말로 지금 상황을 누구보다 빨리 끝내고 싶었다.

* * *

에르난이 이끄는 사크틸라와 바르시나의 연합군이 출전한 지 약 삼 주가 지났다.

레이테는 하루의 대부분을 집무실에서 보냈다. 전장에서 보내는 보고를 곧바로 받기 위해서였다. 어차피 다른 일을 하려 해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녀가 방금 다 읽은 보고서는 나흘 전 팀파노가 보낸 것이었다.

전쟁이 터지면 그를 피해 멀리 이동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 상황을 이용해 돈을 버는 무리가 일부 있는데, 그중 하나는 무기상이다.

그런데 무기상 중 일부가 오히려 사크틸라를 빠져나갔음을 확인했고, 그들은 대륙과도 거래하고 있다고 한다. 팀파노는 그들을 쫓겠다고 했다.

실마리가 잡히는 듯하다. 다행이다.

저녁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레이테는 집무실을 나와 성당으로 향했다.

매일 아침과 저녁, 하루에 두 차례씩 시스로네스는 정성껏 미사를 올렸다.

“……정의와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사크틸라와 바르시나의 왕, 에르난을 축복하고 지켜 주소서.”

에르난을 괴롭히지 못해 안달인 것처럼 굴던 시스로네스지만, 지금 에르난을 위한 그의 기도는 무척 진지하고 간절했다.

사크틸라와 바르시나는 여러 악조건 속에서 갈등하고 있다. 하지만 승리를 기원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같다.

무사히 적을 물리쳐 평화가 찾아오기를. 그리고 남편과 벌써 이별하게 되는 일만은 없기를. 레이테도 눈을 감고 간절히 기도했다.?

#096

미사를 마치고 집무실에 돌아오자 새 편지 두 통이 도착해 있었다. 둘 다 에르난이 쓴 것으로, 하나는 레이테에게 보내는 개인적인 글이다.

레이테는 먼저 전황 보고에 대한 글을 읽고 시스로네스에게 그것을 넘겼다.

“왕이 꿋꿋하게 중심을 잡아야 하는데 이렇게 흔들리다니…….”

시스로네스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레이테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 그렇지만 시도해 볼 만한 도전이긴 합니다. 헤젤의 대포 스무 문을 한꺼번에 날려 버렸으니, 아군의 사기도 상당히 좋을 테고요.”

여왕의 반응을 보고 급히 덧붙이는 말 같은 느낌이었다.

”……전부 동의해요. 하지만 걱정되는군요. 반목하는 두 나라 사이에서 힘든 것은 알겠지만, 압박을 견디지 못해 성급하게 진격하는 것은 아닐까…….”

대륙의 최신 대포를 도입한 헤젤의 화력은 위협적이었고, 에르난은 그것의 격파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꽤 끈질기게 시도한 끝에, 헤젤의 포대 하나를 완전히 섬멸했다.

대단한 성과다. 승리의 기세를 몰아 전면적으로 공세에 나서는 것도 좋다. 그래도 불안했다.

“아군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여전히 중장 기병입니다. 왕께서도 그것을 모를 리 없으시니, 현명히 처사하실 겁니다.”

시스로네스는 그답지 않게 에르난을 감싸는 말을 했다.

아무래도 자신의 불안이 겉으로 많이 보이나 보다. 레이테는 씁쓸하게 웃었다.

“폐하, 팀파노 후작이 왔습니다.”

에르난이 쓴 다른 편지, 남편이 아내에게 보내는 글을 읽으려던 레이테는 그것을 도로 내려놓고 반갑게 팀파노를 맞으려 했다. 그런데 집무실로 들어오는 팀파노의 낯빛이 심상치 않았다.

“오누바입니다.”

팀파노는 다짜고짜 말했다.

레이테는 흠칫 몸을 떨었다. 팀파노가 여왕에게 말할 일이라면 하나뿐이다.

“사크틸라 남서부 지역 전체를 샅샅이 조사하려 했지만 오누바는 사실…… 제 가문과는 불편한 일이 있어 되도록 접촉을 피하고 싶던 곳입니다. 동생도 마찬가지였겠지요.”

“아, 이런…….”

시스로네스가 중얼거렸다.

“지난 이십여 년 동안 왕실의 통제가 약해지면서, 이 지역의 명문가들은 점점 세력을 넓혔지요. 그러다 보니 같은 땅의 소유를 주장하면서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몇 가지는 꽤 심각해서 왕실까지 중재 요청이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설마 그중 하나가 오누바에 대한 분쟁이고, 팀파노 후작의 가문이 그에 휘말렸다는 뜻인가요?”

왜 나는 여태까지 그것을 몰랐지? 레이테는 그렇게 물으려 했으나,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답은 알 것 같았다.

“그렇습니다. 탐브레는 그런 일을 귀찮아했고……, 분쟁은 해결되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렀지요.”

역시. 레이테는 이를 악물었다. 숙부가 세상에서 사라진 지 일 년이 넘었다. 하지만 그의 찌꺼기는 이곳저곳에 끈덕지게 붙어 있다.

“일이 해결되지 않아 두 가문은 아예 오누바에 대한 언급 자체를 회피하는 것으로 압니다. 맞습니까, 후작?”

시스로네스가 물었다.

“예. 그래서 어느 가문의 관리도 받지 않으면서, 오누바는 오히려 자유로운 항구로 성장했습니다.”

“자유롭게 밀수도 하고 말이죠……, 세상에.”

“송구합니다, 폐하. 제 불찰입니다. 껄끄러운 곳인 데다가, 지금은 연합군이 주둔하니 별 상관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크틸라를 빠져나간 무기상은 모두 오누바에서 장사를 했더군요. 밀수야 전쟁이 끝나도 그들이 돌아오지 않게 하면 됩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안 돼. 레이테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밀수업자의 상대는 헤젤이었습니다. 헤젤은 오누바와 그 인근을 제 터전처럼 잘 아는 겁니다.”

* * *

여왕은 편지를 썼다.

오누바는 문제의 밀수 거점이며, 헤젤은 그곳을 완전히 파악했을 가능성이 높음. 그러니 가능한 한 다른 지역으로 군을 이동할 것.

녹인 밀랍을 붓고 인장을 찍어 편지를 봉했다. 밀랍이 굳기를 기다리는 잠깐의 시간마저 지독하게 길게 느껴졌다.

편지는 곧바로 전령에게 건네져 오누바로 향했다.

그날 밤 레이테는 잠에 들지 못했다. 침대에서 한참을 뒤척이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연락은 보냈다. 지금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이스팔리스에서 오누바까지는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달리면 하루가 걸린다. 즉 레이테가 다시 보고를 받기까지는 최소한 이틀을 기다려야 한다.

‘이렇게 초조한데 어떻게 기다리지?’

뭘 하며 버텨야 할까. 답은 금방 떠올랐다. 아직 읽지 않은 남편의 편지가 하나 더 있었다.

레이테는 곧바로 침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졸린 눈을 비비며 난로 앞에 앉아 있던 시녀가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다. 레이테는 시중을 기다리지 않고 털이 달린 도톰한 가운을 직접 입었다.

“집무실에 다녀와야겠어요.”

복도로 나오니 몸이 저절로 떨릴 만큼 공기가 차가웠다. 레이테는 어깨를 살짝 움츠리며 걸었다.

집무실은 어둠과 적막 속에서 불쾌한 한기만 가득했다. 하루의 대부분 시간을 보내는 곳이거늘 지금은 낯설게만 느껴졌다.

레이테가 책상 서랍을 더듬거리자 시녀가 책상 위에 놓인 초에 불을 붙여 주었다. 레이테는 작은 촛불의 빛에 의지해 서랍을 열고 편지를 꺼냈다.

‘아무리 정신이 없었다지만 이걸 여태 잊었다니.’

레이테는 책상 위에 편지를 올려놓고 자리에 앉아 그것을 읽으려 했다. 시녀가 여왕이 앉을 의자를 뒤로 빼 주었다.

드르륵. 의자가 바닥에 긁히는 소리가 유독 거슬렸다. 조용히 좀 뺄 수는 없나? 레이테는 짜증을 내려다가 멈칫했다.

‘내가 예민해진 거야.’

침착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레이테는 잠시 숨을 고르고 자리에 앉으려 했다.

몸을 휙 돌리자 묵직한 가운이 펄럭였고, 뭔가가 옷에 닿았다.

“잠깐만요, 폐하!”

다급한 시녀의 외침을 들었을 때는 이미 팔에 닿았던 것이 엎어지고 난 뒤였다. 촛대였다.

하필 그것은 에르난의 편지 위로 떨어졌다.

레이테는 다급히 손으로 초를 치워냈다. 하지만 이미 불이 옮겨붙은 편지는 빠른 속도로 타들어 갔다.

“안 돼!”

레이테는 가운 자락으로 편지를 덮었다.

“괜찮으세요, 폐하?”

시녀가 레이테의 손을 쥐고 살폈다. 그때서야 레이테는 오른손의 통증을 느꼈다. 처음 초를 쳐내면서 불에 닿기라도 한 모양이다.

하지만 급한 쪽은 따로 있다. 레이테는 가운을 치우고 편지를 살폈다.

“아…….”

불은 꺼졌지만 편지는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아예 타서 사라진 부분에 까맣게 그을린 부분까지. 안에 적힌 내용은 거의 읽을 수 없었다.

유별난 내용은 없었을 것이다. 간단하게 안부를 물으며 보고 싶다는 정도의 내용을 담은 편지를 이미 몇 차례 받았다.

따라서 과민하게 반응하지 않아도 된다. 이런 편지는 앞으로 계속 올 테니까.

“……손을 치료받아야 할 것 같네요.”

그러나 몸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침착하게 행동하려는데, 부끄러울 만큼 목소리에 떨림이 묻어났다.

힘겹게 발걸음을 옮겨 처소로 돌아온 레이테는 시의의 진료를 받았다. 약한 화상이라 차가운 연고를 바르는 정도가 전부였다.

의사가 돌아가고 다시 처소에 홀로 남은 레이테는 성상(聖像)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어차피 잠을 자기는 틀렸고, 기도라도 할 생각이었다.

손이 욱신거렸다. 화상 때문이다. 그런데도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오른팔의 통증이 다시 떠올랐다.

팔은 멀쩡하다. 잘리는 일 따위 없다.

하지만 전장에 나간 다른 팔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은 두려움에, 레이테는 기도를 위해 모아 쥐었던 손을 풀고 팔을 움켜쥐었다.

* * *

양군은 오후가 되어서야 서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고, 첫 전투는 이미 해가 저물어갈 때쯤 시작되었다.

늦은 시각의 싸움이 연합군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날이 어두워지면 싸움을 계속하기 어렵다. 대규모 군대는 일단 철수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전투는 짧은 시간에 끝났다.

날씨도 연합군을 도와주었다. 밤이 되면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는 다음 날이 되어도 그치지 않았다.

이런 것들이 연합군에게 좋은 현상인 이유는, 불리한 싸움을 일단 멈출 수 있기 때문이었다.

“퇴각하는 편이 어떻겠습니까?”

전면전을 주장하던 페레트마저 이런 말을 했다. 사크틸라인 몇 명이 비웃는 소리를 냈지만,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대포의 위협에서는 벗어났지만, 창을 든 기병의 돌격을 막아내기는 역부족이었다. 실제로 부딪쳐 보니 아군의 희생이 예상 이상으로 컸다.

“…….”

그러나 반대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찬성하는 사람도 없었다. 마음으로는 모두 퇴각을 원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조차 쉽지 않았다.

헤젤의 준비는 철저했다. 그들은 사크틸라 땅인 이곳을 마치 헤젤의 영토인 양 잘 파악했다.

퇴각할 요새는 있다. 그런데 그곳으로 가는 길목은 매복에 취약한 지형이었다. 요새를 향해 오는 적을 상대하기 위해 그렇게 만든 것이다.

헤젤이 그곳마저 파악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퇴각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도박하듯 할 수밖에 없다.

“폐하.”

귀족들은 에르난을 바라보았다. 비록 지금은 귀족들에게 에르난이 썩 믿음직스러운 왕으로 보이지 않는 모양이지만, 결국 중요한 결정은 왕의 손에 달려 있다.

“퇴각……을 하는 척 저들을 속입시다.”

에르난은 고민 끝에 말했다.

“결국 우리는 소규모로 빠르게 공격할 때가 가장 효과적이었지. 지금 전투도 그 방식으로 바꿀 필요가 있소.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으니, 퇴각하는 척하면서 유리한 지점을 먼저 차지해 역공하는 편이 좋겠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귀족들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불안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으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요새로 향하는 길목까지 갔다가 방향을 바꾸면 좋겠습니다. 여기에서 두 갈래로 갈라지면 고지를 점령할 수 있습니다.”

아르파가 지도 이곳저곳을 가리켰다. 에르난은 그의 제안을 곧바로 수락했다.

회의는 그렇게 끝날 것 같았다.

“폐하, 만약 매복이 없다면 그대로 요새로 퇴각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페레트가 말했다. 순간 회의실은 침묵에 빠지고 밖에서 내리는 빗소리만 들렸다.

사크틸라인들이 화를 낼 시점이다. 에르난은 금방 눈치챘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또 다투면 정말로 곤란하다.

“좋은 제안이군요. 다만 안전이 확실하면 퇴각하고, 일단은 공격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심발로가 재빨리 말했다. 바르시나의 주장에 타당성이 있으나 조건부로 수용한다. 갈등이 터져 나오기 전에 급히 봉합하려는 시도였다. 이제 심발로는 두 나라의 반목을 줄이려 노력한다.

심발로가 고마웠다. 에르난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왕은 내부 갈등에 완전히 지쳐 있었다. 그래서 확실한 결정을 피했다.

하지만 그 태도는 여러 해석을 할 여지를 남기는 것이기도 했다.

* * *

마음은 급했으나 행군 속도는 기존과 큰 차이가 없었다. 병사들은 노력했으나 환경이 좋지 않았다. 비는 거의 다 그쳤지만 땅이 온통 진흙탕이 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안개가 잔뜩 껴 앞을 보기 힘들었다.

지난 토벌 때도 비슷한 기후조건에서 전투를 치렀다. 하지만 그때는 쫓는 입장이었지, 쫓기는 입장이 아니었다.

“아직 느리다! 더 빨리!”

바르시나어로 병사를 다그치는 외침이 들렸다. 페레트의 목소리 같았다.

바르시나군은 전투 경험이 적다. 더군다나 사크틸라는 외국이다. 낯선 땅의 험한 지형에서 경험 부족한 군대가 제 몫을 하기는 쉽지 않았다.

“폐하! 앞이 너무 안 보이는데, 이대로 퇴각하면 습격당할 수도 있어 위험합니다!”

아르파가 달려와 외쳤다.

“알고 있네. 원래 작전대로 하는 편이 그나마 낫겠군.”

“공격 역시 잘 보이지 않아 효과적으로 하기 어렵습니다. 전투에 유리한 장소를 선점하는 데에 집중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좋아. 전군, 방향을 바꿔서…… 어?”

팔을 들고 명령을 내리려던 에르난의 움직임이 멈췄다. 방금까지 근처에 있던 바르시나 병사가 보이지 않았다.?

#097

“어디 갔지?”

안개가 짙어 보이지 않을 뿐, 멀리 떨어진 것은 아니다. 그럴 것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세상에. 바르시나는 어디로 간 거지? 설마 퇴각로를 따라 요새로 간 건가?”

아르파도 당황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심발로와 그가 이끄는 황금 양모 기사단원들이 옆에서 불쑥 나타났다. 안개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다.

“바르시나군이 보이지 않아! 자네들은 먼저 거점을 확보하게! 나는 바르시나군을 찾아서 가지. 그들을 버릴 수는 없어!”

“안 됩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심발로가 에르난의 앞을 막아섰다.

“요새로 가는 길은 좁아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그런 위험한 곳에 가시면 안 됩니다.”

기사단은 당연히 전원 말을 타고 있다. 빠르게 다녀오기에는 그들이 훨씬 나을 것이다. 에르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단은 절반만 데리고 가겠습니다. 너희들은 국왕 폐하를 지키거라!”

심발로는 기사들을 이끌고 순식간에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에르난은 불안한 눈길로 안개를 응시하다 말을 돌렸다.

“출발!”

에르난의 외침에 이어 명령을 전하는 나팔 소리가 길게 울렸다. 안개 속에서 얼마나 보일지 알 수 없는 깃발도 펄럭였다.

목적지는 멀지 않다. 언덕을 올라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면 된다.

하지만 언덕을 다 오르기도 전에, 비명과 칼날이 부딪치는 소리가 먼저 에르난 일행을 맞았다.

“이쪽은 늦었습니다! 이미 헤젤이 먼저…… 윽!”

에르난에게 달려오며 외치던 사크틸라 귀족이 말을 다 잇지 못하고 말에서 떨어졌다. 갑자기 고꾸라지는 모습은 등 뒤에서 활을 맞은 것이 틀림없었다.

바르시나 병사들이 사라져 머뭇거리는 사이, 헤젤이 자리를 선점한 듯했다.

‘놈들은 이 지역에 대해 모르는 게 뭐지?’

“그러면 반대쪽으로…….”

“이쪽이 점령되었는데 반대편이라고 무사하지는 않을 겁니다. 폐하, 위험하더라도 길을 돌파해서 요새로 들어가는 편이 좋겠습니다.”

아르파의 목소리가 떨렸다. 위험한 수준을 넘어 아예 사지로 기어들어 가는 행위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에르난은 다시 말을 돌렸다.

요새로 향하는 길은 지도로 익혀 뒀던 것보다 더 멀게 느껴졌다. 안개 때문에 시야가 흐린 데다 적에게 쫓기는 중이기에 그럴 것이다.

비명이 한차례 울릴 때마다 뒤따라오는 말발굽 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방향을 안내하던 아르파의 말도 언젠가부터 끊겼다. 뒤를 돌아 확인할 여유는 없었다.

칼 부딪치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에르난은 말을 멈추고 칼을 뽑아 들었다.

전투는 에르난의 뒤가 아니라 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폐하!”

깃발이 흐릿하게 보이며 에르난을 향해 다가왔다. 왕의 옆에 바짝 붙어 이동하던 기사들이 경계하며 에르난을 둘러쌌다.

깃발은 사크틸라의 것이었다. 어깨에 화살이 꽂힌 심발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매복입니다! 돌아가십시오!”

그는 숨을 헐떡이며 쥐어짜듯 외쳤다.

“늦었어. 뒤에서도 헤젤이 쫓아오고 있네!”

심발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젠장, 그러면……. 아! 바르시나군의 일부는 헤젤을 뚫고 요새로 들어간 것 같았습니다. 저희가 어떻게든 보호해 드릴 테니 돌파해서…… 으헉!”

심발로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더니 말과 함께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 뒤로 거대한 창을 든 기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에르난을 지키던 기사들이 검을 휘둘렀으나 소용없었다. 창은 가차 없이 기사들을 꿰뚫었다.

도끼를 든 병사가 나타나 말에서 떨어진 기사들을 공격했다. 쓰러진 심발로도 몇 차례 공격을 받았다.

심발로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아, 안 돼!”

에르난이 외쳤다. 그 직후, 에르난의 등에 쿵 하고 부딪치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뒤를 돌아볼 틈도 없이 에르난은 말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엎어졌다.

숨이 막힐 것 같은 통증에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사람의 다리 같은 것이 에르난을 돌려 눕혔다. 그리고 달그락달그락 차가운 소리와 함께 에르난의 투구가 벗겨졌다.

창끝이 목에 닿았다. 에르난의 시선이 창을 따라 위로 올라갔다.

브라간사가 말 위에서 에르난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 * *

팀파노의 보고를 받고 에르난에게 연락한 지 나흘 밤이 지났다. 오누바에서 온 소식은 아직 없다.

여왕은 계속 잠을 설치고 있었다.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궁정 전체가 긴장에 빠져 있었다.

“폐하께서 의연한 모습을 보이셔야 모두가 냉정해질 수 있습니다.”

역시나 수프만 몇 수저 떠먹은 저녁 식사 자리에서, 시스로네스가 말했다. 레이테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추기경의 말이 옳다. 그래서 일요일인 다음 날 아침, 여왕은 일부러 왕궁을 나와 시내의 대성당으로 향했다.

소년들의 합창이 유독 아름답고 따뜻하게 들리는 미사였다. 하지만 그것도 레이테의 긴장을 가라앉히지는 못했다.

미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레이테가 가슴에 품은 불안을 놀리기라도 하듯 하늘이 맑았다.

여왕은 그 하늘보다 더 짙고 푸른 드레스를 입었다. 은발은 하얀 베일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베일 위에 쓴 왕관과 다이아몬드를 촘촘히 박은 목걸이가 햇빛을 반사해 찬란하게 빛났다. 말에 탄 여왕의 살짝 굳은 표정과 허리를 꼿꼿이 세운 자세는 위엄이 느껴졌다.

여왕의 행차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애초에 여왕의 수행원은 많지 않았다. 주요 귀족의 대다수가 에르난을 따라 전장에 갔기 때문이다.

그래도 거리에는 여왕을 보려는 시민들이 제법 모여 있었다. 누군가가 연주하는 류트 가락이 듣기 좋았다.

‘이곳은 평화롭구나.’

레이테는 살짝 웃음 지으며 손을 들었다. 구경꾼들에게 흔들 생각이었다.

“……어쩌면 약탈당했을지도 몰라.”

인파 사이에서 작지만 선명히 들려오는 어떤 말만 아니었다면.

“마차 세워요.”

레이테는 마차 문을 강하게 두드렸다.

“폐하?”

여왕의 맞은편에 앉은 카테리나가 말했다. 그녀는 바깥의 말소리를 듣지 못한 듯했다.

마차의 속도가 느려졌다. 레이테는 마차가 완전히 멈추기도 전에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마차 옆을 지키던 기사와 시녀들이 깜짝 놀라 여왕을 붙잡았다.

“약탈이라고 말하던데, 무슨 일이지?”

레이테는 시중을 뿌리치고 구경꾼들 쪽으로 가 한 남자를 붙잡았다. 남자는 여왕을 보고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여, 여왕 폐하…….”

“폐하께 설명하거라.”

남자가 어쩔 줄을 몰라 하자 뒤따라온 기사가 그를 다그쳤다. 화들짝 놀라 몸을 움츠리던 남자가 더듬더듬 말했다.

“저, 저는 오누바에서 작은 가게를 하는 사람입니다. 오누바에는 이전부터 헤젤인이 제법 많이 왔습니다. 저도 헤젤인을 상대로 장사를 했고요. 그 헤젤인들이 이제는 오누바를 약탈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걱정이 되어 중요한 것만 챙겨 식솔과 함께 급한 대로 친척이 있는 이곳으로 온 겁니다.”

여왕은 물론이고, 그 말을 들은 다른 사람들의 얼굴도 사색이 되었다.

뎅. 뎅. 뎅. 뎅. 뎅.

그때 종소리가 들렸다.

성당의 탑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아니었다. 정오를 알리는 종은 이미 십여 분 전에 쳤다.

더군다나 평범한 종소리는 이렇게 시끄럽지 않다.

뎅. 뎅. 뎅. 뎅. 뎅.

“폐하, 왕궁의 탑에서 치는 종이에요.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으니 어서 왕궁으로 돌아가셔야겠어요.”

카테리나가 다가와 말했다. 레이테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테는 자신이 무슨 정신으로 마차에 올랐는지도 몰랐다. 계속 들리는 종소리가 귀에 따갑게 꽂혔다.

왕궁에 도착한 레이테는 곧바로 알현실로 이동했다. 그곳에 여왕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안내하는 시종의 낯빛이 어두웠다.

“여왕 폐하…….”

빈 왕좌를 바라보며 서 있던 남자는 레이테가 들어오자마자 다리를 비틀거리며 어색하게 무릎을 꿇었다. 반쯤 누더기가 된 옷에 헝클어진 머리를 한 남자는 아르파 공작이었다.

아르파의 모습은 그가 전할 내용이 무엇인지 짐작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레이테의 손이 드레스 자락을 꽉 붙잡았다.

“죄송합니다, 폐하. 폐하의 군대가…… 패배했습니다.”

지켜보던 사람들의 탄식이 곳곳에서 들렸다.

끔찍했다. 레이테는 숨이 막힐 것 같은 느낌을 견디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병사들은 무사한가요?”

“기습을 당해 생존자가 많지 않습니다. 저는 그들을 간신히 모아 이스팔리스로 데려왔습니다.”

“그러면 에르난은?”

“…….”

아르파는 여왕의 시선을 피하며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에르난은 무사한가요? 대답하세요.”

“왕께서는…….”

짧은 머뭇거림은 길게 느껴졌다. 레이테는 어서 아르파의 답을 듣고 싶으면서도 그것이 두려웠다.

“행방을 알 수 없습니다.”

아르파의 답을 듣는 순간, 레이테는 현기증을 느꼈다.

“지금 국왕 폐하도 없이 혼자 돌아왔다는 소리요? 그게 말이 됩니까?”

누군가의 노성이 귀에 웅웅 울렸다.

* * *

행군을 시작한 지도 일주일이 넘었다. 이 정도라면 어떤 강인한 사람도 지칠 수밖에 없다.

브라간사도 마찬가지였다. 말을 탄 그는 자기 발로 직접 걷는 보병보다는 덜 피곤할 것이다. 하지만 하루 종일 말에 앉아만 있는 것 또한 고역이었다.

물론 다른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브라간사 역시 무거운 몸과 반대로 마음은 가벼웠다.

한없이 승리에 취해 있을 수만은 없었다. 기쁨의 원천인 어느 전리품 때문이었다.

지나치게 거물인 그 전리품, 아니 포로 탓에 골치 아픈 일이 여럿 생길지도 모른다. 행군 중에, 브라간사는 그에 대해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 포로는 자신에게 득이 될까 실이 될까?

이는 승리와는 별개의 문제다. 그리고 생각은 늘 딱히 유쾌하지 않은 방향으로 흐르기 마련이었다.

포로를 이용하고 싶지만, 브라간사가 그를 이용해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승리의 영광은 결국 왕의 손에 쥐여줘야 하니까.

기분 나쁜 결론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모은 사크틸라에 대한 정보를 적재적소에 이용해 승리를 만든 사람은 브라간사 자신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또 빼앗겨야 하는 것일까?

당연히 그랬다. 그는 왕을 섬기는 사람이므로.

‘역겹군.’

이런 식으로 낮 동안 쌓인 불쾌함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브라간사는 밤이 되면 포로를 찾아갔다.

귀하신 분께서 잘 계시는지, 또 그가 얼마나 초조해하는지 확인하고 나면 기분 좋게 잠자리에 들 수 있다.

물론 포로는 감정을 내보이지 않고 냉정함을 유지하려 애쓴다. 절대 그럴 리가 없는 상황인데도. 그 태연한 척하는 몸부림을 보는 것이 무척 즐거웠다.

“좋은 밤입니다. 불편한 데는 없으셨습니까? 식사는 입에 맞으시는지요?”

형식적인 인사를 마치면, 포로는 한결같은 요구를 했다. 본국에 연락해 달라.

“물론 연락해야지요. 하지만 왕성에 도착한 후 격식을 갖춰 정식 사절을 보내야 합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국왕 폐하의 일이니 말입니다.”

브라간사의 목소리는 나긋나긋한 데가 있었다. 흡사 어린아이를 다독이는 것만 같은 어투였다.

포로는 브라간사보다 아홉 살이 어렸다.

“격식은 필요 없소. 당장 연락을…….”

“안 됩니다, 폐하.”

브라간사는 매몰차게 포로의 말을 끊었다. 포로가 눈을 치켜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포로는 앉아 있었고, 브라간사는 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꽤 멋진 구도이지 않나. 브라간사는 웃음이 나올 것 같았으나 애써 참았다.

포로의 품위는 지켜줘야 한다. 포로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신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당신은 헤젤의 왕이 아니잖습니까? 저는 당신의 명령을 따를 의무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까지 참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대접받아 마땅할 신분의 사람이라 해도 포로는 포로다.

“왕이신 폐하를 극진히 모시려 합니다만,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폐하의 처지를 파악하셨으면 합니다.”

더군다나 사크틸라와 바르시나의 왕 에르난은 브라간사 자신이 사로잡은 포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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