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2장 : buen camino
#079
헤젤 사절단이 돌아간 후, 부부는 아라고를 떠날 채비를 시작했다.
소득은커녕 망신만 안고 돌아가는 사절단에게 부부는 대략적인 논의사항과 함께 회담 일시와 장소를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5월 31일. 사크틸라 서쪽 국경 도시 바다호스.
아라고를 출발해 바다호스까지 가는 동안, 두 왕은 크고 작은 도시와 요새를 들러 백성의 삶을 살필 것이다. 왕의 존재와 위엄을 가시적으로 보여야만 한다.
삼 개월 동안의 순회 일정을 받아 본 부부는 나란히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봄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날짜를 잡아가면서 시간을 벌었는데도 이런 일정이라니…….”
에르난의 중얼거림에 시스로네스가 말했다.
“애초에 유람이 아니잖습니까?”
여왕도 가만히 있는데 팔팔한 사내자식이 무슨 불평불만이야, 얌전히 일이나 해.
에르난의 귀에는 이렇게 들렸다.
“빠듯한 일정인 것은 사실입니다. 회담 일정에 맞추려다 보니 어쩔 수 없지요. 그래도 두 분 폐하께서는 아직 젊으시니 충분히 소화 가능하실 겁니다. 나이가 들면 열심히 돌아다니고 싶어도 못 한답니다.”
글쎄요, 젊은 사람에게도 무리 같은데요.
고개를 절레절레하는 레이테의 얼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시스로네스는 그것을 보았으면서도 모르는 체했다. 그는 여왕에게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기까지 했다.
‘나한테만 타박이고 레이테는 봐준다 이거지…….’
하지만 그의 말은 모두 옳았다. 특히 나이가 들면 못 돌아다닌다는 말은 그랬다. 대주교 자신부터가 왕의 수행단에 참가할 수 없었으므로. 그는 아라고에서 더 쉬다가 따로 이동해 사크틸라 중부에서 왕의 일행과 합류할 계획이다.
다른 나이 든 귀족과 관료들도 시스로네스처럼 중간에 합류하거나, 아예 회담에만 참석하는 식으로 각자의 일정을 정했다.
따라서 왕의 수행원 대다수는 젊은이였다. 고위 귀족의 자제, 왕이 눈여겨보는 신진 관료, 황금 양모 기사단원. 기사단은 왕의 호위를 담당한다.
마침 기사단원 한 명이 초췌하기 그지없는 꼴로 집무실에 들어왔다.
“세상에, 세스크. 자네가 이렇게 지친 모습은 평생 처음 보는 것 같아.”
“저도 사람입니다, 폐하…….”
프란세스크는 바르시나에 다섯 명 있는 공작 중 유일하게 왕의 일정 전체를 수행한다. 그는 바르시나에서의 일정과 바르시나인 수행원의 관리도 맡는다.
바르시나에서의 일정은 한 달 정도다. 그동안 거치는 주요 도시는 다섯 개. 많지는 않으나 그 다섯 곳의 현안은 엉망진창이었다. ‘지역의 자치권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우메가 방치한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것들을 생각하니 두통이 올 것만 같다. 에르난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테가 조용히 그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레이테는 탐브레 사망 후 어수선한 사크틸라 북부의 수습을 하느라 바빴던 경험이 있다. 에르난도 아내와 함께하기는 했지만, 부부 사이가 서먹하던 때라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제는 반대 상황이 되었다. 에르난이 주도적으로 일을 진행해야 한다. 부부 사이는 더없이 좋다.
“내가 저지른 짓도 아닌데 왜 골머리를 앓아야 하나……, 천국에 계실 선왕을 막 욕하고 싶으시죠?”
“어쩌겠나. 수습은 해야지.”
프란세스크의 물음에 에르난은 씁쓸하게 웃었다.
아버지의 무책임함에 화를 낼 만한 여유는 없다. 그리고 아버지가 정말 천국에 갔을지도 확신하지 못하겠다.
“출발 전까지 다 읽어 보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프란세스크가 보고서를 건넸다. 아라고 남쪽의 도시, 타라코의 해안 요새 건설에 대한 보고서였다.
타라코는 순회를 시작하여 처음 들를 규모 있는 도시다. 아니, 정확히는 규모가 있었던 도시로, 지금은 폐허가 되어 있다.
* * *
쾅! 대포 소리가 크게 울리자 바다에 부표 삼아 띄운 조각배가 가라앉았다.
국왕 일행은 바다에서 오는 적을 요격하는 요새의 훈련을 참관 중이었다. 등 뒤에서 왕이 지켜보는지라, 포병들의 얼굴에 긴장이 가득했다.
레이테는 대포에 관심이 많은 듯 포술장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에르난은 요새 사령관에게 말했다.
“해적 출현은 요즘도 계속되는가?”
“이전보다는 뜸합니다, 폐하.”
타라코는 아라고에서 멀지 않고 바다가 아름다워 사람들의 휴양지로 사랑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에르난이 아는 이 지역의 현실은 해적의 소굴이었다. 근처를 오가는 선박이 실제로 약탈당하는 사례도 있었다.
해적을 토벌하고 요새를 쌓고 군사를 배치하는 등의 조치는 너무 늦게 이뤄졌다. 자우메의 소극적인 태도 때문이었다.
아들은 아버지를 지역 귀족의 눈치나 보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으로 기억했다. 하지만 그런 자우메도 자신을 시해하려던 세력에게는 가차 없었다. 왕은 반역자를 철저하게 응징하고, 그들의 거점인 타라코도 완전히 파괴했다.
그리고 지극히 자우메답게, 아예 이 도시를 외면하는 방식으로 끝까지 보복했다. 에르난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었다.
자우메는 요새 건설에도 관심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요새로 오면서 지나쳤던 타라코의 구 시가지가 에르난의 눈앞에 자꾸 아른거렸다. 삼십여 년 전 반란의 상흔이 마치 어제 일처럼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파괴된 길과 건물은 전혀 복구되지 않았다. 주민이 돌아오는 대신 해적과 밀수꾼이 들끓었다. 그들을 쫓아내고 도시 복구를 시작했으나 옛날의 모습을 찾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에르난은 아버지가 보였던 이런 식의 냉정함에 떨었던 때가 종종 있었다.
무관심. 살아남은 자를 죽이지 않고도 세상에서 지우는 행위.
에르난의 반려, 두 나라의 왕관을 쓴 여자도 그런 일을 당할 뻔했다. 아마 비슷한 시도는 평생 그림자처럼 레이테를 따라다닐 것이다.
레이테는 어느덧 성벽 너머 바다를 보고 있었다. 바다는 황폐한 육지 따위는 알 바 아니라는 듯이 마냥 평화로웠다.
“여유가 생기면 바다가 잘 보이는 곳에 작은 별궁이라도 세워 볼까요?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 당신도 이 아름다움을 소유할 자격이 있으니까.”
“이미 제 것인걸요.”
레이테는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였지만, 살짝 웃음 지은 얼굴에는 고마움이 드러나 있었다. 목소리 또한 햇볕만큼이나 따스했다.
이미 제 것이란, 공동 왕위를 통한 소유를 뜻하겠지. 하지만 에르난은 좀 더 눈에 보이고 사적인 형태로 그녀에게 이곳을 주고 싶었다.
“그래도 좋은 생각이에요. 왕궁을 지으면 왕실이 더는 이 지역을 버리지 않는다는 확실한 표현도 되겠지요. 그렇죠?”
아. 그렇게 되나.
사랑하는 이에게 사크틸라와는 다른 이 바다를 선물하고 싶다는 마음만 앞서, 미처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못했다. 에르난은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궁전을 짓는 것도 미래의 일이다. 현재의 타라코는 아직 폐허였기에 국왕이 하룻밤을 청할 만한 곳은 아니었다. 밤은 다른 마을에서 보내기로 되어 있다.
해가 다 지기 전에 마을에 도착하고자, 일행은 다소 무리해서 속도를 내 이동 중이었다. 그리고 무너진 도시 근처의 길이 잘 닦여 있을 가능성은 당연히 없었다.
“우욱!”
레이테는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토기를 진정하는 데에 정신이 없었다.
남편이 그녀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등을 토닥이거나 물을 주는 것이 전부다. 물론 많이 특이한 방법이 하나 있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 그걸 하면 난 길바닥에 버려질 거야…….’
틀림없다. 에르난은 검은 천 같은 것을 찾으려다 곧바로 관뒀다.
“지금이라도 말에 오르는 건 어떻습니까?”
“아니, 버티겠어요. 말을 타려면 준비한다고 또 한참 멈춰야 하잖아요. 빨리 도착해서 제대로 쉬는 편이 낫죠…….”
레이테는 마차가 속도를 꽤 낸다 싶으면 곧바로 괴로워했다. 말을 타면 이보다 빠른 속도도 비교적 잘 버티던데, 마차의 덜컹거림은 힘든 모양이었다.
“하아, 이런 식으로 삼 개월…….”
아내의 목소리는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에르난은 아내를 품에 안고 살살 등을 쓰다듬었다.
“이런 이야기를 지금 해도 될까 모르겠지만…….”
“안 하면 안 될까요?”
남편이 할 말을 짐작했는지, 레이테가 애처롭게 사정했다.
아아, 부인. 그런 식으로 말하면 당신이 지금 멀미를 하든 말든 놀리고 싶어 미칠 지경이 된단 말입니다.
에르난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다.
“회담 끝내고 사크틸라 남부도 순회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당신을 밖으로 던지면 제 멀미가 멈출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레이테가 고개를 번쩍 들어 남편을 노려보았다. 안색은 창백하지만 눈빛만은 살벌했다.
“미안합니다. 사랑해요.”
에르난은 아내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 말이면 모든 게 다 용서되는 줄 알죠?”
“당연하죠.”
그는 반대쪽 뺨에도 입을 맞췄다. 레이테는 한숨을 쉬었다. 하얗게 질려 있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다음에는 최대한 여유로운 일정을 짭시다. 애초에 이번이 회담일에 맞춰 국경까지 가려다 보니 무리한 겁니다.”
“들르는 도시를 좀 줄였어야 했나 후회 중이에요.”
여왕은 욕심이 많았다. 그녀는 되도록 많은 사람과 만나기를 원했다.
“지금이라도 줄일 수야 있습니다. 왕이 힘들어서 안 되겠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우리는 왕이니까 제멋대로 해도 됩니다. 백 일 뒤에 들를 도시에 그냥 안 가겠다고 통보해도 누가 항의 못 합니다.”
“괜찮아요. 그래도 나는 최대한 여러 곳을 가고 싶어요. 바르시나도, 사크틸라도 아예 처음 들르는 도시가 대부분이니까.”
레이테는 여러 차례 심호흡하며 몸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때, 마차의 속도가 점점 줄었다.
마차가 멈춰 서자 시종 한 명이 말했다.
“따라오는 짐마차 중 하나의 바퀴가 빠졌다고 합니다. 수리에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는다지만……. 이대로 기다릴까요, 아니면 먼저 움직이고 뒤따라오라 할까요?”
원래 이런 경우에는 왕에게 물을 필요도 없다. 짐마차가 알아서 수습하고 따라올 일이다. 그럼에도 굳이 멈춰 선 것은 레이테의 괴로움을 위가 뒤집힐 만큼 잘 아는 어느 기사의 연민 가득한 배려일 터다.
한 명 더 있었다. 악명 높은 뱃멀미 같은 것은 전혀 없으면서 유독 마차의 흔들림에만 약한 사람.
“쉬었다 가지. 리세우 공에게 그렇게 전달하게.”
“알겠습니다, 폐하.”
프란세스크를 비롯한 황금 양모 기사단원 여럿은 일행의 가장 앞에서 왕의 깃발을 들고 이동 중이었다.
잠시 후, 마차 문이 열렸다. 카테리나가 사탕과 음료 등을 건넸다. 에르난이 아내 대신 그것을 받으며 물었다.
“세스크는 아직도 마차 멀미가 심합니까?”
“네…….”
원래는 꽤 신나게 오빠를 놀리는 말을 했을 카테리나는 고개만 살짝 끄덕이고 안타까운 눈으로 여왕을 바라보았다.
멀미에 지칠 대로 지친 레이테는 결국 쓰러지듯 잠들었다.
에르난은 편지를 쓰고 있었다. 마차의 흔들거림이 심해 글씨를 쓰는 게 쉽지는 않았다.
편지의 내용은 타라코를 지원할 예산을 더 편성하라는 지시였다.
아라고 지역의 귀족은 바르시나에서 가장 세력이 강했다. 더군다나 해적과 밀수꾼의 존재는 해상 무역의 의존도가 높은 바르시나에는 치명적인 문제다. 그러니 이것은 무리 없이 의회를 통과할 것이다.
아버지의 흔적은 생각보다 더 처참하고 씁쓸했다. 그가 저지른 일을 자신이 바로잡아야 하는 상황이 에르난은 다소 불쾌했다. 마치 자신이 지은 죄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내가 원해서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지도 않았건만.’
하긴. 왕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일은 많다. 두 나라의 서로 다른 바다, 자연 환경이 그렇다. 부모도, 성별도 마찬가지다.
성별을 떠올리자 여러 가지가 생각나 답답해졌다.
불공정했던 결혼 계약서의 역설. 모든 의례에서 남편을 아내에 우선한다던 합의. 여왕의 존재를 지우려 들었던 헤젤의 전략.
세상의 법도가 자신을 부정하는 것 같다던 아내의 말도 떠올랐다.
그 아내는 곤히 잠들어 있다. 저물어가는 해의 붉은 빛을 받은 그녀의 은발이 신비로운 색을 띠었다. 에르난은 그것을 살며시 손에 쥐었다.
이렇게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이를 남편의 옆에 온전하게 세우려면 얼마나 많은 힘이 필요할까? 애초에 가능은 할까?
에르난은 쓰게 웃었다.?
#080
순회를 시작한 지 약 한 달 만에 왕의 일행은 바르시나의 수도인 살두비아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일정은 도착한 지 사흘째, 살두비아를 떠나기 전날의 의회 출석이었다.
타라코의 재건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전에 해 두었으나, 실질적인 집행을 위해서는 의회의 동의가 필수였다. 그를 위해서는 왕이 직접 의회에 참석해야 했다. 에르난은 물론이고, 레이테 또한 바르시나의 군주로서 그 자리에 함께했다.
오늘 레이테는 즉위를 승인받을 때 입었던 상복과 달리, 색이 또렷한 드레스를 입고 금빛 왕관을 썼다.
헐렁하게 몸을 다 덮고 팔만 뺀 정복 차림의 남성들 사이에서 홀로 다른 옷을 입은 레이테는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이질적인 존재의 드레스를 감상하는 의원들의 시선은 썩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래도 왕은 왕이라고, 레이테를 쫓아낸다거나 그녀의 말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이 정도는 참을 만하지.’
안건 처리는 별문제 없이 진행되었다. 에르난이 요청한 타라코의 재건도 승인되었다. 하지만 의결을 마쳤는데도 의원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거의 잡아먹을 기세로 에르난을 바라보았다. 에르난은 흠칫 놀랐다가 금방 이유를 깨달았다.
이제 왕은 바르시나를 떠난다.
살두비아 이후 일정은 사크틸라행이다. 사크틸라에서 회담에 참석한 다음에는 사크틸라 남부를 순회한다.
즉, 바르시나는 최소 반년 동안 국왕이 부재하게 된다. 바르시나인은 에르난이 레이테와 결혼하러 갔을 때도 왕자를 귀환시키라고 난리를 쳤는데, 이런 상황을 반길 리가 없었다.
“역시 국왕 폐하께서 ‘직접’ 오시니 모든 일이 쭉쭉 잘 풀리는군요!”
어느 귀족이 외쳤다. 직접이라는 말에 유달리 힘이 들어가 있었다.
“폐하께서 안 계시면 국정을 정상으로 운영할 수 있을지 걱정이 큽니다.”
다른 귀족의 말에 에르난은 하마터면 자리에서 일어나 윽박지를 뻔했다.
‘왕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수십 년을 잘 해 먹었으면서!’
선왕의 의회 출석은 대단히 형식적이었다. 실제로 국정을 이끌어 가는 이는 각 지역의 고위 귀족들이었다. 자우메는 그들에게 거의 간섭하지 않았다.
물론 에르난은 아버지처럼 자발적인 허수아비에 가까운 존재로 살 생각이 전혀 없었다.
“회담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리겠습니다, 폐하.”
훨씬 더 정중하게, 그러나 누구보다 직접적으로 말하는 이도 있었다.
“폐하, 저희를 목자 없는 양으로 만들지 말아 주십시오.”
안 어울리게도 성서를 들먹이는 자까지 나타났다. 더는 못 들어 주겠다. 에르난은 여왕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이만 폐회하겠소.”
“폐하!”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내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 * *
살두비아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은 오랜만에 하는 부부만의 식사였다.
순회란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기 위한 행위다. 하지만 다시 바쁘게 이동하기에 앞서 부부는 한 끼니 정도는 단둘이서 편히 먹고 싶었다.
피곤함에 찌든 부부는 한창 식사 중에는 말도 거의 하지 않았다. 두 왕은 정말로 배가 고팠다. 허기를 채우고 느긋하게 후식을 즐길 때가 되어서야 에르난이 말문을 열었다.
“가관이더군요. 특히 마지막의 성서 언급이 대단했습니다. 당신을 의식한다고 한 말인 듯한데, 정작 그들은 끝까지 왕을 한 명만 부르더군요.”
“그래도 그들 나름대로 애절하던걸요.”
“애절이라니. 나도 안 속는데 당신이 속으면 곤란합니다. 당신은 나한테만 속으세요…….”
“마지막 말은 못 들은 걸로 하겠고요. 나도 안 속아요. 속기는 무슨, 속셈이 너무 뻔해서 웃음을 참느라 혼났답니다.”
레이테는 피식피식 웃으며 건포도 케이크를 한 입 먹었다.
“바르시나 분들에게 미안해서 어쩌나. 아마 난 당신을 이곳으로 돌려보내기 싫을 것 같거든요.”
“어째서?”
“당신은 아내와 떨어져서 지내고 싶은가요?”
단둘이서 식사하기에는 꽤 큰 식탁이라 팔을 뻗어도 상대에게 닿지 않는다. 에르난은 자리에서 일어나 맞은편에 앉은 아내에게 갔다. 그는 아내가 케이크를 집어 먹지 않은 쪽의 손을 잡고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나도 마찬가지예요.”
에르난이 이만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레이테는 남편의 손을 놓아 주지 않았다. 에르난이 의아해하자 그녀는 짓궂게 웃음 지었다.
“사크틸라에 가면 당신이 바르시나로 못 돌아오도록 붙잡아 감금이라도 해 버릴까요?”
“그러면 우리 왕을 포로 취급하느냐면서 난리가 날 겁니다.”
“오해 살 이야기 그만하죠. 남부 순회까지 하느라 바르시나를 꽤 오래 비우겠지만, 정말 사크틸라에 가둬둘 생각은 없으니까.”
레이테는 에르난의 손을 놓아 주었다. 식탁 앞에 앉은 이는 부부 둘 뿐이지만, 완벽하게 둘만의 식사라고 할 수는 없다. 시중을 드는 자들이 있으므로. 레이테는 궁인이 퍼뜨리는 소문에 전처럼 예민하지는 않으나, 공연한 이야기가 떠도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회담 참석을 위해 나라 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는 문제라고 할 수 없으니까 참을 뿐이지, 그들은 당신이 들으면 좀 우스울 만큼 별별 걱정을 다 하고 있을 겁니다.”
부부는 장난삼아 대화를 나눴지만, 바르시나인은 꽤 심각하게 이 상황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들은 왕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염려한다. 그렇게 사크틸라에 왕을 빼앗기고, 종국에는 바르시나 자체마저 빼앗길까 봐 두려워한다.
에르난은 이것이 지나친 비약이라고 생각했다. 정확하게 언제라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바르시나의 왕인 그는 다시 바르시나로 돌아올 것이다.
다만 아내의 말대로, 그녀와 떨어져 지내고 싶지는 않다.
“다시 이곳에 올 때는 같이 오면 되지요. 당신도 바르시나의 왕이잖습니까?”
“아, 그러면 되는 걸 왜 생각을 못 했을까요.”
레이테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케이크 한 조각을 집어 남편의 입에 넣어 주었다.
“마저 식사를 즐길까요? 당분간 이렇게 느긋하고 우아하게 차려 먹기는 힘들 테니까.”
* * *
왕의 일행은 살두비아를 출발하여 계속 서쪽으로 이동했다.
국경까지의 길은 비교적 평탄한 편이었다. 하지만 비가 쏟아지면서 일정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마차 바퀴가 진흙탕에 박혀 움직이지 못하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나흘이나 내리던 비는 겨우 그쳤지만, 지체된 일정을 만회하기 위해 일행은 새벽부터 말을 달려야 했다. 날이 저물기 전에 사크틸라 국경을 넘어야 한다.
“멈춰요!”
한창 도로를 질주하던 중, 마차 안에서 여왕이 외쳤다. 마차 옆에서 말을 몰던 프란세스크는 그 목소리를 듣고 마부에게 멈출 것을 명했다.
마차가 멈추자마자 문이 열렸다. 레이테가 밖으로 뛰쳐나오면서 반쯤 울부짖었다.
“국경까지는 이제 말만 타겠어요!”
시녀들이 다가와 그녀에게 물을 건넸다. 레이테는 물을 순식간에 마시고 심호흡했다.
이어서 에르난도 마차 밖으로 나왔다.
“두 분 다 말에 오르시는 겁니까?”
프란세스크가 그에게 물었다.
“그래. 아내와 함께 있는 쪽이 좋거든.”
에르난은 레이테가 말에 타는 것을 도와준 다음 자신의 말에 탔다.
“많이 피곤하실 텐데요.”
“잠을 많이 못 잤을 뿐이지 별문제 없어.”
에르난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눈에는 오히려 눈 밑이 거무스름해진 친구가 더 힘들어 보였다.
프란세스크는 바르시나 영토 내에서 왕의 수행을 총괄했다. 국경을 넘으면 그도 짐을 덜게 될 것이다. 사크틸라에서는 수행 책임자도 사크틸라인이 맡는다. 프란세스크는 기사단원만 관리하면 된다.
일행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멀미에서 해방되니 졸음이 레이테를 찾아왔다. 그녀는 남편과 가벼운 잡담을 나누며 졸음을 쫓으려 애썼다. 어제 들렸던 성에서의 만찬회가 지나치게 늦게 끝나는 바람에 부부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런데 부부의 앞에서 말을 타고 가던 프란세스크의 몸이 갑자기 옆으로 기울어졌다.
“세스크!”
에르난이 외치자 프란세스크는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자칫하면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공작, 마차가 비었으니 들어가서 쉬세요.”
레이테가 말했다.
“괜찮습니다, 폐하. 국경에 곧 도착하는데…….”
“그 전에 낙마 사고가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되는걸요.”
프란세스크는 난처했다. 여왕의 걱정은 고맙지만 그에게는 조금 다른 문제가 있었다. 여왕이 아까까지 고생하던 생리 현상.
아무래도 여왕은 프란세스크도 멀미에 약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해.”
하지만 에르난은 다르다. 왕은 친구에 대해 아주 잘 안다.
“폐하, 저기…….”
“어서 쉬어. 명령이야.”
그럼에도 명령이라고까지 말하는 건 정말 친구가 걱정되어서일까, 아니면 그저 놀리고 싶은 것일까?
프란세스크는 떨떠름한 기분을 안고 마차에 들어가 앉았다. 왕이 타는 마차답게 내부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의자는 무척이나 푹신했다.
하지만 이런 환경에서도 여왕은 멀미로 고생했고, 프란세스크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더군다나 일정을 맞추기 위해서 일행은 곧 엄청나게 속도를 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차는 인정사정없이 덜컹덜컹 흔들렸다.
피로가 심하기는 했는지 등받이 달린 의자에 앉자 바로 잠이 쏟아진다. 동시에 속이 울렁거린다. 프란세스크는 미칠 지경이었다.
졸다 깨기를 수차례 반복하던 프란세스크는 이제 더는 못 참을 지경이 되었다. 그냥 나가자. 그때, 마침 마차가 멈춰 섰다.
프란세스크는 즉시 문을 열었다. 그리고 어리둥절하며 눈을 껌벅이는 세르지 피로시와 마주쳤다.
“폐하께서 이제 나를 깨우라고 하시던가?”
“예? 예…….”
세르지는 마차가 멈추자마자 프란세스크가 밖으로 나와 조금 놀란 듯했다. 프란세스크는 세르지의 어깨를 토닥이고 국왕 부처가 있는 대열 앞쪽으로 걸어갔다. 그를 본 에르난이 히죽 웃었다.
“잘 잤나?”
“……여왕 폐하의 배려로 과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프란세스크는 여왕에게 고개를 숙여 정중하게 감사를 표함과 동시에 그 옆의 남자를 향해 마음속으로 이를 갈았다.
화려한 차림을 한 무리가 일행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사크틸라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왕의 앞에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두 분 폐하, 사크틸라에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모두 오랜만이에요.”
여왕이 말했다. 바람이 많이 불 뿐 주변 풍경은 여태 지나쳐 온 벌판과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고국에 돌아온 레이테는 기분이 좋았다.
왕을 맞이하러 온 사크틸라 귀족 중에서는 에르난과 프란세스크의 눈에 익숙한 이들도 많이 보였다. 그중에서 심발로 백작이 프란세스크를 알아보고 그에게 다가왔다.
“리세우 공,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사크틸라에 왔으니 수행단의 책임자는 사크틸라인이 맡는다. 기사단원 중 지위가 높은 귀족이 그 역할을 하는데, 사크틸라 측에서 고른 인물이 심발로였다.
심발로는 황금 양모 기사단의 일원으로 처음부터 낙점되었던 사크틸라 측 귀족이었다. 그러나 아라고에서 먼 영지에 머무르던 그는 창단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이제 에르난을 만났으니, 적당한 곳에서 그는 기사단원으로 임명될 것이다.
“대열 뒤쪽은 아직 바르시나 땅에 발을 디디고 있으니 저는 뒤로 물러나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백작.”
앞으로의 길이 유별나게 편해질 일은 없지만, 일단 격무는 덜게 되었다. 프란세스크는 환히 웃으며 심발로와 악수했다.
“이제 마차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악수를 마친 프란세스크는 두 왕을 향해 물었다. 국경을 넘었으니 서둘러서 움직일 필요도 없다. 여왕도 마차를 탈 만할 것이다.
레이테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에서 내렸다. 에르난도 마찬가지였다.
“세스크, 난 이제 편안하게 잘 거야. 아내가 무릎베개해 준댔거든.”
에르난은 마차에 오르다 말고 갑자기 프란세스크를 향해 말했다. 프란세스크가 다른 기사에게 무언가 말하려던 차였다.
레이테는 남편을 억지로 마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여왕은 프란세스크에게 표정으로 미안함을 전했다.
“자네가 잠을 설친 건 베개가 없어서 그래. 억울하면 결혼이라도 하든…… 윽!”
앓는 소리를 끝으로 왕의 말은 끊겼다. 에르난은 그가 끔찍하게 사랑하는 베개의 구두에 발이라도 밟혔을 것이다.
프란세스크는 픽 웃었다가 기사에게 말했다.
“자네는 바르시나인이야. 동맹도 중요하지만 바르시나의 이익이 최우선이지.”
기사는 아라고에서 국왕 부부의 호위를 맡아 리세우 저택까지 따라갔던 자였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프란세스크가 말을 이었다.
“심발로 백작을 철저하게 감시해.”?
#081
사크틸라에서는 수행단의 책임자만 바뀌는 것이 아니었다. 귀족들은 그대로 왕을 따르지만 허드렛일을 하는 일꾼의 적잖은 인원이 사크틸라인으로 교체된다.
교체하는 기준은 사크틸라어 가능 유무였다. 사크틸라어를 구사하는 바르시나인은 어디까지나 상류층이 대다수였다. 따라서 대부분을 바르시나로 돌려보내고, 새 일꾼과 임시직 관리 등을 고용해야 했다.
이 작업은 국경을 넘은 지 사흘이 지나 도착한 성에서 이뤄졌다. 떠날 사람과 새로 들어오는 사람, 구경하러 온 근처 주민까지 섞여 성내는 온통 시끌벅적했다. 카테리나는 그 인파를 뚫고 황금 양모 기사단원이 머무는 저택으로 들어갔다.
저택의 중정 역시 사람으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카테리나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프란세스크보다 조금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아가씨, 찾는 분이라도 있으십니까?”
남자는 카테리나를 모르는 것 같지만, 카테리나는 그를 알고 있었다.
“팀파노 후작 각하시지요? 저는 여왕 폐하의 시녀인 카테리나 아레니스 데 리세우입니다. 리세우 공작이 제 오빠랍니다.”
“반갑습니다. 공작을 만나러 오셨습니까?”
“네. 사크틸라에서도 기사단원 관리는 계속 한다기에 여기 있을 줄 알았는데…….”
“공작께서는 아마도 제 동생과…… 아, 저기 오는군요.”
프란세스크와 심발로가 나란히 중정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입이 찢어질 기세로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세스크!”
카테리나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팀파노와 심발로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프란세스크가 동생에게 다가왔다.
“카테리나? 아, 백작. 제 동생인 카테리나입니다. 카테리나, 이 분은 심발로 백작.”
“여왕 폐하의 시녀이시지요? 반갑습니다.”
심발로가 가볍고 경쾌한 동작으로 카테리나의 손에 입을 맞췄다.
“무슨 이야기가 그렇게 재밌는 거야?”
팀파노가 동생에게 물었다.
“별건 아니고, 회담에 브라간사가 참석할지 안 할지 진지한 내기…… 흠흠, 아니 의논을 했는데…….”
“어떻게 브라간사를 털어 볼지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프란세스크가 깔끔하게 답했다. 카테리나가 픽 웃었다. 말이 좋아 음모지, 짓궂은 장난 수준일 터다.
조금…… 아니, 실은 많이 심한 장난이겠지만.
“후작께서도 들으셨습니까? 아라고에서의 일로 벨류 왕이 잔뜩 화가 나서, 귀족들이 다 보는 가운데 조카인 브라간사의 뺨을 때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과연 맞은쪽이 오른쪽일까 왼쪽일까 토론했지. 형은 어느 쪽일 거라고 생각해?”
“응,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토론이라고 생각해. 공작께서는 이런 녀석과 잘도 놀아 주시는군요.”
카테리나는 한숨 쉬었다. 그야 프란세스크니까 저런 대화를 하며 놀아 주는 것이다. 저런 한심한 이야기로 시간을 때우는 사람이 오빠 말고도 세상에 있었다니.
“카테리나, 너는 여기까지 무슨 일이지? 여왕 폐하를 따라 요새에 갔을 줄 알았는데?”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는 수백 년 전에 세운 커다란 요새가 있었다. 수행단이 인원을 교체하는 동안 두 왕은 요새를 시찰하러 갔다.
“여왕을 모실 사크틸라인 시녀들도 새로 왔거든. 그 사람들 만나고 오는 길이야. 저, 심발로 백작 각하. 바쁜 일이 아니면 오빠를 데려가도 괜찮을까요?”
“그러시지요. 저도 이제 수행단에 참가하니 앞으로 자주 뵙겠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오빠를 대신해서 잘 부탁드려요.”
인사를 마친 남매와 형제는 각각 흩어졌다.
남매는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 저택 밖으로 나왔다. 말먹이로 쓸 건초를 실은 짐마차가 줄지어 대어진 것이 보였다. 그 줄의 끄트머리, 성벽이 있는 곳까지 가서야 남매는 걸음을 멈췄다.
“어떤 것 같아?”
목소리를 낮춘 프란세스크가 물었다.
“너도 들었다시피 형제는 목소리가 완전히 달라. 형 쪽은 꽤 중후한 편이고 동생 쪽은 다소 높은 어조지.”
카테리나는 잠시 고민하다 조심스레 말했다.
“아무래도 심발로 쪽이 좀 더 수상하긴 해. 들었던 목소리가 정확히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팀파노처럼 무게감 있는 느낌은 아니었던 것 같아. 뭣보다 심발로는 왕자와 함께 헤젤까지 다녀왔잖아? 뭔가 아는 것도 더 많겠지. 아까는 그 사람이랑 무슨 얘기를 했던 거야?”
“심발로는 엔히크와의 친분을 계속 자랑하더군. 왕자와 자신의 취미가 잘 맞는다면서 말이야. 그리고 헤젤까지 왕자를 데리고 가면서 이래저래 얻어들은 정보가 많으니 회담 때 자신도 도움이 될 거라고 자신하던걸.”
“정보가 뭔데?”
“회담을 기대하라고만 말하더군. 그러다가 브라간사 이야기가 나온 거야.”
카테리나의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떠올랐다. 후우, 프란세스크는 한숨 쉬었다. 심발로와의 대화는 즐거웠으나 별 성과가 없었다.
“일단 심발로가 내 업무를 인계받았으니, 이런저런 이유로 계속 살피기는 편하겠지. 감시도 따로 붙여 뒀고. 이건 팀파노도 마찬가지야.
심발로는……, 사람 자체는 솔직히 괜찮았어. 회담장에 도착하기까지 심심할 일은 없을 것 같아.”
동생에게 답하며 프란세스크는 건초 더미를 한 아름 어깨에 이었다.
“뭐 해?”
먼 곳을 살피던 프란세스크는 동생의 물음을 듣고 자연스럽게 답했다.
“여기까지 온 김에 내 말 먹이 좀 확보해 두려고. 먹성이 장난 아니거든.”
“……너무 비실비실하고 식사량도 적어 강행군을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상인에게 속은 것 같다. 출발할 때 동생에게 이렇게 얘기했던 것 같은데요, 공작님.”
카테리나가 삐죽거렸다. 그녀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우리는 지금 같은 일을 하는 중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버릇처럼 자기 일 숨기는 건 관두면 안 돼?”
그녀의 목소리는 눈매만큼 날카롭지 못했다. 오히려 서운함이 역력했다. 오빠의 거짓말이 뻔히 보이기 때문이었다.
프란세스크는 바르시나 최고의 명문가에서 공작위를 이을 계승자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의 천성은 대귀족에 썩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품위 있는 학문 대신 온갖 잡기를 습득하는 데에만 열심이었다. 천재적이라 할 만큼 빠른 외국어 습득만이 예외였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들의 귀족답지 않은 성향에 대해 무척 걱정했다. 그는 사랑받는 아들이지만 집안의 골칫덩이였다.
하지만 지금, 프란세스크는 공작이라는 신분에 걸맞게 왕의 최측근이면서도, 그에게 대단히 잘 어울리는 일을 한다.
가족들만큼이나 프란세스크를 잘 알던 에르난은 일찌감치 친구에게 첩자 비슷한 일을 맡겼다. 프란세스크는 그것을 즐겼다.
그가 집에 들어오는 날은 점점 줄었다. 비밀 유지랍시고 자기 일을 숨기는 습관도 생겼다.
그러나 지금은 동생도 오빠와 같은 목적으로 수행단에 참가했다. 불상사를 막기 위해 수상한 사크틸라인을 감시하고 정보를 캐내야 한다.
“……내 말은 비실비실한 게 맞아. 하지만 사기당한 건 아니었어. 보기와 달리 힘이 좋더라고. 시원시원하게 잘 달려. 미안해. 일부러 그런 건 아냐. 그냥 무심코…….”
프란세스크는 건초를 메지 않은 쪽의 손으로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알아. 앞으로나 그러지 말아줘.”
“그래. 미안……, 아! 혹시 이걸 가져가려면 장부에 표시해야 하나?”
동생에게 사과하던 프란세스크가 갑자기 그녀의 뒤를 향해 외쳤다. 한 남자가 그들을 향해 오고 있었다.
“그렇습니다만……, 누구신지?”
단정한 옷차림에 장부를 든 모습은 하급 관리 같았다.
바르시나인 중에서도 사크틸라어가 가능한 사람만 수행단에 남는다. 하지만 외국인이기에 어쩔 수 없는 특유의 어색함이 말투에서 느껴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남자의 사크틸라어 발음은 자연스러웠다. 사크틸라인일 것이다.
“바르시나의 리세우 공작이다.”
“아, 공작 각하!”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프란세스크를 바라보던 관리의 표정이 단번에 바뀌었다.
“각하, 이런 게 필요하면 하인을 보내시지 여기까지 직접 오실 줄은…….”
“아무튼 가져가겠으니 기록해 두게.”
“예, 예. 물론이지요. 혹시 더 원하시면 얼마든지 가져가십시오. 보시다시피 넘칠 만큼 많아서요. 아, 혹시 무겁지는 않으십니까? 제가 대신 들어 드릴까요?”
“됐어. 일 보게. 보아하니 위에서 물량 확인이나 시킨 듯한데.”
“맞습니다. 출발이 다가오니까요. 공작 각하, 조심히 가십시오. 부인도요.”
카테리나가 풋 웃었다. 관리는 그녀를 공작의 부인이나 애인으로 생각한 모양인데, 차림새가 고급스러우니 귀족이라 판단한 듯했다.
프란세스크가 동생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남매는 걷기 시작했다. 한동안 조용히 걷기만 하던 프란세스크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카테리나, 그거 알아?”
“뭘?”
“이 성은 외진 곳에 있어서 물자를 구입하고 싶어도 없어서 문제야. 다음 목적지에 가서야 보급이 정상적으로 가능하지. 건초는 보기에만 많아 보일 뿐, 대규모 수행단에게는 빠듯한 양이야. 그런데 넘치기는 뭐가 넘친다는 걸까?”
뭐? 카테리나는 홱 뒤를 돌아보았다. 물량을 확인해야 한다던 관리의 모습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 * *
국경을 넘어 사크틸라로 들어온 지 삼 주 하고도 하루 더한 날. 왕의 일행은 강가에 세워진 도시에 도착했다.
반도 중앙부에 들어서면서 황량한 땅만 지나왔기에, 수행원들은 강이 흐르고 활력이 넘치는 도시를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수행원들을 기쁘게 하는 소식은 또 있었다.
“내일은 쉽시다.”
에르난이 말했다. 만찬회장은 수행원들의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내일을 염려할 필요가 없어진 그들은 피로 따위 모른다는 듯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이 도시에서 왕이 특별하게 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순회 길도 어느덧 절반을 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쯤 쉴 때도 되었다.
“괜찮겠어요?”
이렇게 묻는 레이테도 얼굴은 웃고 있었다.
“모두 기뻐하잖습니까. 당신도 마찬가지고. 물론 저도 그렇습니다.”
레이테는 고개를 끄덕이며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다들 신이 나 있었다.
만찬은 순회를 시작하면서 대접받은 식사 중 가장 호화롭고 맛도 좋았다. 부부는 저택의 주인인 후작을 비롯한 사크틸라 귀족들과 열심히 대화를 나눴다.
만찬회를 파하고 침실에 들었을 때는 이미 자정이 한참 넘은 시각이었다.
“폐하, 이쪽 문을 열고 가면 목욕실이 나옵니다. 어머니께서 목욕을 워낙 좋아하셔서 정말 예쁘게 꾸몄답니다.”
새로 합류한 시녀가 레이테에게 말했다. 그녀는 이곳 저택의 주인인 후작의 딸이었다.
“그래요? 내일은 오랜만에 목욕다운 목욕을 할 수 있겠네요.”
순회 동안에는 이전처럼 편안한 목욕을 즐길 수 없었다. 아무래도 왕궁보다 환경이 열악할 수밖에 없으니.
레이테는 기분 좋게 웃으며 침대에 누웠다. 푹신푹신하니 기분이 좋아 저절로 눈이 감겼다.
‘에르난은 뭘 하기에 아직도 안 오지?’
푹 자고 싶다. 하지만 동시에 남편에게 안기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일정이 바쁜지라 기절하다시피 잠드는 날이 적지 않았다. 그렇지 않더라도 다음 날의 이른 출발을 위해 바쁘게 잠을 청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내일은 쉬기로 했으니까…….’
그때 문이 열리고 에르난이 들어왔다.
“세상에. 대체 얼마 만에 왕이 왕처럼 잘 만한 곳에서 자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침실을 둘러본 에르난이 감탄했다. 그동안 워낙 시골만 들른 탓이다. 침실은 온갖 섬세한 타일 장식과 가구가 가득했다. 에르난은 침실을 한 바퀴 빙 둘러본 다음 아내의 옆에 누워 그녀를 껴안았다.
“여기까지 오느라 많이 피곤했지요? 푹 쉽시다.”
레이테는 남편의 나른한 목소리가 듣기 좋으면서도 살짝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그래……. 일단 자자. 피곤하니까.’
“잘 자요.”
침실에는 두 사람뿐인데도 에르난은 비밀스러운 말을 건네는 것처럼 속삭였다.
“편안히 쉬어요, 레이테. 오늘 밤은.”?
#082
성당의 종소리와 짹짹 울리는 새소리가 레이테의 의식을 깨웠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아직 해가 다 뜨지 않아 주변은 어둑했다.
“이르지만 좋은 아침입니다, 세뇨라.”
낮고 또렷한, 익숙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짙게 스며들었다.
에르난이 침대 밖에 서서 아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화려하게 정장을 갖춰 입고 있었다. 오늘은 휴일이 아니었던가? 레이테는 영문을 몰라 멍한 눈만 깜박였다.
문득 그녀는 지금 상황이 낯설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르난이 말했다.
“일 년 전 오늘, 대략 이 시간에 우리가 처음 만났지요.”
“아.”
‘일부러 그때 한 말을 반복하다니.’
물론 그 말을 듣는 레이테의 기분은 일 년 전과 완전히 달랐다. 당시는 에르난이 무서웠지만, 지금은 사랑스럽기만 하다.
“어라, 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사크틸라어 단어를 틀리지 않았네요.”
“‘부인’은 사크틸라어로도 바르시나어로도 똑같이 ‘세뇨라’라고 부릅니다, 부인.”
맞다. 레이테는 까르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 년 전의 그녀는 미혼의 아가씨였지만, 지금은 저 남자의 아내다.
에르난은 아내의 몸을 살짝 일으켜 주었다. 베개에 기대어 편히 앉은 레이테는 남편의 옷차림을 제대로 감상했다.
안에 입은 흰 슈미즈가 넉넉히 보이는 겉옷은 옷감의 색이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금빛 장식이 화려했다. 품이 넉넉한 외투, 그것과 같은 색상의 모자도 멋있었다. 손에 낀 가죽 장갑도 잘 어울렸다.
마지막으로 황금 양모 기사단의 목걸이가 당당하게 빛나며 위엄의 방점을 찍었다.
“그렇게 입으니 근사하고 좋네요. 잘 어울리고 멋있어요. 그런데 오늘 일정이 있던가요?”
“없습니다. 그러니 아쉬운 것을 좀 풀어 볼까 싶어서요. 기억하실까 모르겠지만 일 년 전 오늘은 날씨가 엉망이었습니다. 그래서 추레한 행색으로 당신을 처음 만나야 했는데, 그게 계속 아쉽더군요.”
투덜투덜 답하며 에르난은 아내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레이테는 그가 무엇을 할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손이 레이테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에르난은 아내의 은발을 언제나 좋아했다.
정성스레 머리카락을 만지는 손은 사실 장갑을 끼고 있으니 머리카락의 감촉을 느낄 수 없다. 하지만 에르난은 기분이 좋은 듯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그는 다른 손으로 침대를 붙잡고 아내에게 밀착했다. 레이테는 그를 거부하지 않았다. 레이테가 그의 어깨를 붙잡자 에르난은 곧바로 입술을 포개 왔다.
집요하게 엉켜오는 혀의 움직임은 살짝 거친 데가 있었다. 레이테는 금방 숨이 가빠졌다.
그런 데다 황금 양모 펜던트가 앞으로 처지면서 레이테의 넉넉하게 파인 슈미즈 사이, 가슴골을 건드렸다. 차가운 감촉을 느낀 레이테는 움찔거리며 몸을 떼어냈다.
“이것도 아쉽던가요? 아무리 작정하고 결혼하러 왔다지만 처음 만나는 여성에게는 조금 과한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과해 봤자 저는 원래 무례하니까.”
무례하다니?
조금 뜬금없게 들리면서도 어색하지 않은 말이었다. 뭐였더라. 레이테가 과거의 기억을 뒤적이는 사이 에르난은 완전히 아내의 위로 올라탔다.
“시스로네스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어머? 이런 날, 이런 자리에서 당신이 그 이름을 꺼내다니 놀랍네요.”
지금 분위기는 에르난이 아내를 덮치기 직전이다. 이런 순간에 가장 싫어하는 사람 중 하나일 것이 분명한 이름을 제 입으로 부르다니. 신기했다.
“대주교가 당신에게 미래의 남편이 마음에 드냐고 물었다면서요?”
“맞아요.”
“당신이 뭐라고 답했는지 기억하십니까?”
레이테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잘 모르겠다. 대신 시스로네스가 그녀에게 했던 말만 떠올랐다.
‘반려와의 사랑은 레이테라는 인간의 삶에도 무척 중요합니다.’
그 말을 들었던 밤에는, 자신에게 사랑 따위 고려할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옳았다.
“시스로네스가 친절하게 알려 주더군요. 에르난 왕자는 난폭하고 무례했다고.”
“……아.”
맞다. 그랬다. 레이테는 확실하게 기억이 났다.
“작년에 당신이 내게 했던 이런저런 짓을 떠올려 봐요. 당연히 그렇게 답할 수밖에 없……!”
그때 남편의 손이 레이테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갑자기 찾아온 자극에 놀란 레이테는 하던 말을 멈췄다.
“아내를 구하겠다고 몇 날 며칠 밤 동안 비를 맞으며 말을 달리고, 목숨을 걸고 잠입하고, 변장도 하고, 피도 보고. 하여간 별짓을 다 했는데 사랑의 키스는커녕 난폭하고 무례하다는 평뿐이라니. 오로지 당신만 바라보고 찾아왔던 저는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에르난의 표정은 하나도 상처받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의 검은 눈에는 핏빛이 아른거렸다. 오랫동안 노리던 먹이를 드디어 붙잡은 맹수 같았다.
“진짜 난폭함과 무례함이 무엇인지, 당신에게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뭐? 레이테가 대꾸할 새도 없이, 그녀의 가슴을 쥐었던 손이 이번에는 슈미즈를 붙잡았다. 에르난은 거의 잡아 뜯듯이 그것을 벗겼다.
어딘가 찢어졌을지도 모른다. 레이테는 허망한 듯 자신이 입던 옷을 바라보았다.
“옷 걱정할 여유가 있습니까? 잠옷 정도야 새로 사면 됩니다.”
“잠깐, 우리 지금 순회 중이에요. 이럴 때는 늘 물자가 빠듯……!”
장갑 낀 손이 레이테를 짓누르고 레이테는 도로 침대에 눕혀졌다.
에르난은 다시 아내의 가슴을 쥐고 난폭하게 손을 놀렸다. 맨손 대신 차갑고 까끌까끌한 가죽 장갑에 감싸진 레이테의 가슴은 남편의 마음대로 문질러지고 짓눌렸다.
“읏……. 아프잖아요!”
“아, 미안합니다.”
에르난의 손이 멈췄다.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몸을 살짝 일으켜 입고 있는 외투를 벗어 침대 밖으로 던졌다. 고급스러운 벨벳 외투는 벽에 부딪혔다가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상의는 다 벗지 않고 절반 정도만 매듭을 풀었다.
그는 이어서 허리띠도 풀어 마찬가지로 멀리 던졌다. 아내의 가슴을 농락하던 가죽 장갑도, 보석 단추를 단 모자도 어딘가로 날아갔다.
기사단의 목걸이는 마구 집어 던지는 대신 비교적 얌전하게 침대 밖으로 미끄러뜨렸다.
‘완벽하게, 엄청나게 신경 써서 입어놓고 결국 벗는 모습을 보여 주려고 이런 거야?’
시중도 받지 않고 멋대로 벗어 던진다. 무례함을 가르쳐 주겠다더니, 이런 건가? 다 벗고 나면 무슨 짓을 할까?
남편을 올려다보는 레이테는 어처구니없어하면서도 묘한 호기심이 생겼다.
충분히 예상 가능할 일이 이어질 것이다. 그런데 어쩐지 평범하게 넘어갈 것 같지 않다.
“레이테, 나야 무례한 인간이니 그렇다 치는데, 당신도 대단합니다. 눈을 반짝이면서 남편이 탈의하는 모습을 지켜보다니.”
“일부러 보여 주고 있잖아요!”
남편의 손이 다시 그녀의 가슴을 쥐었다.
“장갑이 좋아요? 맨손이 좋아요?”
“……당신 온기가 좋아요.”
“그냥 맨손이라고 말해도 되는데, 어쩌면 이렇게 사랑스럽게 답하실까.”
에르난은 부드럽게 웃음 지었지만, 아내의 감촉을 즐기는 그의 손놀림은 사나웠다.
“흐응……, 읏!”
“그렇게 예쁘게 말하면 제 마음이 약해질 줄 알았습니까?”
한참 가슴을 만지던 에르난은 손을 아래로 내려 아내의 굴곡진 허리를 쓸었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옷을 벗기 시작했다.
부부를 몇 차례나 난감하게 했던, 상하의를 연결하는 끈은 무척 느슨하게 묶여 있었다.
‘정말로 작정을 했구나.’
그녀의 예상대로, 에르난은 순식간에 끈을 풀었다. 하지만 그다음은 레이테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에르난은 하의를 다 벗지 않고 조금만 끌어 내렸다. 즉, 단단하게 곧추선 그의 성기가 바깥으로 드러날 정도까지만.
“나는 당신을 밖도 안도 모조리 탐하려는데.”
레이테의 다리를 잡은 에르난이 허벅지를 혀끝으로 살짝 핥았다. 레이테는 자극에 신음했다.
“당신은 내가 주는 것을 그저 받으면 됩니다. 강조하는데, 오로지 받기만 하세요. 남편을 탐하는 행위는 허용치 않습니다.”
“무슨……, 흐앗!”
기둥이 레이테의 안으로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레이테는 비로소 남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에르난은 알몸 상태의 아내를 안았다. 하지만 레이테에게 닿는 남편의 맨살은 단 두 군데였다. 그녀를 붙잡은 손. 그리고 난폭하게 아내의 안을 누비는 기둥.
“핫, 으흣, 하……. 앗, 아, 흐앗!”
한 곳에 신경이 쏠릴 수밖에 없다. 그 제한된 상황이 레이테의 흥분을 부채질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레이테가 느낄 수 있는 쾌감은 그것이 전부였다.
레이테는 남편과의 결합이 좋았다. 그가 깊숙한 곳으로 들어오면 언제나 짜릿했다.
그 짜릿함은 레이테의 안에 들어차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딱딱하게 긴장한 엉덩이도, 팽팽하게 당겨져 움직이는 허벅지도 있었다.
에르난의 등에 팔을 두르면, 그것 역시 하반신에 지지 않게 단단해졌다. 다리 사이를 드나드는 것과 흡사하게 빳빳이 선 그의 유두가 몸에 닿을 때도 레이테는 흥분했다.
하지만 지금, 레이테는 성기의 결합 외의 어떤 것도 느낄 수 없었다.
“에르난, 흐읏, 옷 좀…… 흐응, 흣, 당신, 더……!”
레이테는 남편의 옷을 쥐어뜯을 기세로 붙잡고 신음했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정말 한참을 참았단 말입니다. 두 달은 되었나?”
두 달이라는 말을 할 때, 에르난은 허리를 강하게 쳐올렸다.
“하으읏!”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미칠 듯이 바빴잖습니까? 당신을 안더라도 차마 무리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당신 남편이 아무리 난폭하고 무례한 사람이라 해도, 아내를 배려할 줄은 알아서요. 하아……, 당신 정말로 음란하고 맛있어요.”
미리 준비라도 했나 싶을 만큼 술술 말하는 중에도 에르난은 멈추지 않고 허리를 흔들어 댔다. 그의 상기된 얼굴은 희열로 가득했다.
‘배려 좋아하시네!’
오늘 일정은 없다. 완벽한 휴식이다. 쉬자는 의견은 에르난이 냈다.
노렸다. 틀림없이 노렸다. 남편은 일정을 걱정할 필요 없이 아내에게 복수할 날만 기다려 왔던 것이다.
“부인, 지금 막 머리를 굴리면서 난폭하고 무례한 남편의 계산에 경악, 아니 감탄하고 계시지요?”
“아…… 흐응, 제발……, 흣! 하앗! 하읏!”
“제발 다음에 무슨 말을 하려던 겁니까? 혹시 용서를 구하려고요? 이제야? 안 하셔도 됩니다. 당신 말대로 나는 난폭하고 무례한 사람이 맞으니까.”
정신을 잃을 듯 퍼부어지는 쾌감 속에서도 레이테는 남편이 목말랐다. 그를 온전히 느끼고 싶다.
“앗, 으흥! 그게 아니고……! 당신 옷……! 옷 좀 제발! 아, 하아, 아, 으으……, 흐아앗!”
결국 갈증을 채우지 못한 채로 레이테는 절정에 몸부림쳤다. 그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뜨거운 욕망이 그녀의 안으로 쏟아졌다.
긴장이 풀린 에르난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레이테는 쏟아지는 졸음을 참으며 남편을 노려보았다.
“당신이 내 남편만 아니었더라면, 이런 난폭한 겁탈행위는 죽어 마땅한 것으로…….”
“겁탈은 난폭하든 아니든 겁탈입니다만.”
남편의 답은 당연한 말이지만 대단히 얄밉게 들렸다.
“그리고 옷 벗어 달라고만 했을 뿐, 단 한 번도 싫다는 소리 없이 안도 밖도 나를 안기에 바빴으면서 겁탈은 웬 겁탈입니까. 저 또 상처받습니다.”
점점 감기던 레이테의 눈이 번뜩 떠졌다.
“무슨 뜻인지 알았어요? 알았으면 벗을 것이지!”
“왜요? 당신은 받기만 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아직 빼지 않은 남편의 욕망이 다시 부풀더니 레이테의 안쪽을 꽉 채웠다. 레이테는 몸을 흠칫 떨었다.
“잠깐만요. 에르난……!”
“착각하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당신과 나의 교합이 아닙니다. 오로지 내가 당신께 퍼붓는 겁니다. 이 정도는 되어야 진짜 난폭하고 무례하다고 부를 만하지 않습니까?”
에르난이 다시 허리를 쳐올렸다. 여전히 옷을 입은 채로.
* * *
엉켜 있던 몸이 노곤하게 축 늘어졌다. 부부는 나른하게 풀린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폭하고 무례한 남편 에르난 씨…….”
“대놓고 들으니까 기분이 무척 묘해지는군요. 뭐, 앞으로 더 힘내서 열심히 난폭하고 무례한 남편이 되겠습니다.”
레이테는 대꾸할 힘도 없는 듯했다. 그녀의 보랏빛 눈은 열에 녹아 진득진득해진 사탕 같아 보였다.
사탕이라니. 에르난은 그것을 핥고 싶은 충동을 견디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아내를 안아 들었다.
“에르난, 난 이제 진짜로…….”
“씻으러 갑시다. 아침마다 챙기잖습니까. 더군다나 아침부터 무리했으니 피로도 풀어야지요. 이 성의 목욕실이 잘 꾸며져 있다고 들었습니다.”
순회 중에는 제대로 된 목욕을 거의 할 수 없었다. 가볍게 씻는 것이 전부일 때가 대다수였다.
“아, 나도 시녀에게 들었어요. 그리고 무리한 줄은 잘 아는군요.”
“물론입니다.”
에르난은 마치 레이테처럼 뻔뻔하게 답하고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레이테는 편안한 목욕을 기대하며 빙그레 웃었다.
그 순간, 과거의 기억이 번뜩 떠올랐다.
에르난과 처음 만났을 때 목욕실에서 뭘 했더라??
#083
침실에서 연결된 목욕실은 널찍하고 채광이 잘 되었다. 벽을 가득 채운 이국적인 문양의 타일 장식이 아름다웠다. 욕조를 채운 물에서는 좋은 향이 났다.
기대 이상으로 예쁜 공간이었다. 레이테는 감탄했다.
에르난은 아내를 조심스럽게 욕조 안에 앉혔다. 물은 기분 좋게 따뜻했다.
하지만 레이테는 수상한 기분이 들었다. 적절한 시간에 완벽하게 준비된 욕실. 이것이 국왕 부처의 방문으로 잔뜩 기합이 들어갔을 성 사람들의 배려만으로 가능할까? 새벽부터 에르난이 저지른 짓을 생각해 보면 더욱 그랬다.
무엇보다 부부는 처음 만난 바로 그날, 목욕을 핑계 삼아 몸을 겹치지 않았나.
‘이것도 노렸구나.’
당시 상황을 떠올리면 황당하면서도 우스웠다.
남편의 계획은 단순했다. 어떻게든 여왕을 자신의 아내로 삼기 위해 무작정 저지르고 본다. 그리고 탈출 혹은 납치.
‘역시 난폭하고 무례한 게 맞네.’
그 흑심은 절반만 성공했다. 탈출은 성공했으나 욕실에서는…….
‘그래. 사실 아쉽기는 했어.’
물론 에르난에게는 아닌 척했지만. 이 사실은 지금도 밝히고 싶지 않다.
자신도 이러하거늘 남편은 오죽할까. 그는 분명히 아쉬웠던 과거를 해소하려 들 테니, 아무래도 평범한 목욕은 힘들 것 같다.
남편의 손이 레이테의 머리카락을 쥐었다. 그러면 그렇지. 레이테는 뒤이어 찾아올 자극을 기다렸다.
하지만 자극은 없었다. 머리를 말아 올리고 수건을 그 위에 돌려 묶는 어설픈 손놀림만 그녀를 건드릴 뿐이었다.
허술하게나마 머리 고정을 마친 에르난은 바가지에 물을 퍼 아내의 목과 어깨에 천천히 부어 주었다.
물줄기가 졸졸 흘러내리며 그녀를 간지럽혔다. 레이테는 얼떨떨했다. 이게 아닐 텐데.
“부인? 무슨 문제 있습니까?”
“그, 그런 건 아니고…….”
“문제없으면 계속 씻도록 하지요.”
에르난은 다시 바가지에 물을 담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이테는 물에 다 젖은 남편의 슈미즈 소매를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남편은 아직 옷을 입고 있다. 슬쩍 끌어내렸던 하의도 도로 올려 입었다.
“……당신 옷.”
“옷이요? 당신과 오늘을 보내기 위해 특별히 맞췄습니다. 잘 어울립니까?”
물론이다. 금색 수를 잔뜩 놓은 화려한 옷인데도 과한 느낌 없이 아주 잘 어울렸다.
하지만 남편은 저 옷으로 도대체 무슨 짓을 했던가. 벗는 모습을 대놓고 보여 주더니, 벗다 말고 혼자서만 배우자의 온몸을 탐하지 않았나.
‘그런 주제에 뭐? 나와 오늘을 위해?’
레이테는 남편이 든 바가지를 빼앗아 물을 남편에게 확 끼얹었다.
“윽!”
놀란 에르난이 신음했다. 레이테는 곧바로 물을 한 번 더 퍼부었다.
에르난의 머리카락, 여밈을 반쯤 푼 상의, 그 안의 흰 슈미즈, 바지와 신발까지 모조리 물에 젖었다.
“잠깐만요, 부인. 이 옷감은 물이 닿으면 망가져서 버려야 하는데…….”
레이테는 항의를 무시하고 물을 또다시 끼얹었다.
“이미 침대에서 제 땀에 젖어 상했을 것 같군요. 그리고 당신이 여러 번 한 말 있잖아요? 나는 왕이며, 바르시나가 가진 것은 돈뿐이다. 그러니 새로 맞추세요. 아, 아니면 가진 건 돈뿐인 바르시나의 여왕인 아내가 사 드릴 수도 있는데.”
레이테는 아예 일어나서 남편의 온몸에 물을 부었다.
“그러니 이미 다 망가진 옷 벗고 이리 들어오기나 하시죠? 작년에 우리가 뭘 했는지 기억 못 하나요?”
레이테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에르난은 이미 행동하고 있었다. 침대에서는 아내가 아무리 부탁해도 벗겨지지 않았던 옷이 순식간에 목욕실 바닥으로 떨어졌다.
신발까지 벗은 그는 욕조에 들어와 레이테의 뒤에 자리 잡고 팔로 아내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레이테는 그의 무릎 위에 반쯤 걸터앉게 되었다.
“당연히 기억합니다. 목욕에 맺힌 것이 있는 사람은 나뿐인 줄 알았는데, 당신도 마찬가지였군요.”
레이테는 깨달았다. 왜 옷을 입은 채 욕조에도 들어오지 않으면서 딴청이나 부리나 싶었더니!
아쉬웠던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제 입으로 말하고 말았다.
“관심 없는 척했을 때 제가 얼마나 상처받았는데요.”
“안 받았을 거면서!”
“받았습니다. 이건 당신이 아름답다고 말했던 것만큼이나 진심입니다.”
에르난은 벽에 걸린 주머니를 뒤적거려 비누를 꺼냈다. 그는 아내의 어깨 부근부터 비누칠을 시작했다.
딱딱하게 솟아오른 흥분 덩어리가 레이테의 등에 닿아 있었다. 그런데도 에르난은 느릿한 움직임으로 꼼꼼하게 비누를 칠해 주었다.
“당신이랑 같이 목욕을 하고 싶었지요. 뭐, 제 착각이었지만 말입니다.”
목덜미에 닿는 남편의 숨에 비누의 진한 꽃향기가 섞여들었다. 레이테는 나른한 숨을 내쉬었다.
등을 꼼꼼하게 훑던 비누는 옆구리를 타고 봉긋한 가슴으로 올라왔다. 미끌미끌한 것이 유두를 스치자 레이테는 몸을 흠칫거렸다.
갑자기 레이테가 움직인 탓에, 에르난의 손에서 비누가 미끄러져 욕조 안으로 퐁당 빠졌다.
에르난은 물 안으로 팔을 넣어 이리저리 휘저었다. 그렇지만 비누는 찾을 수 없었다.
“올리브유를 많이 넣어 만든 비누였을 테니 금방 녹아 버릴 거예요.”
레이테가 말했다. 그러나 에르난은 계속 팔을 휘저었다. 아니, 레이테의 다리를 쓸고 있었다. 비눗기에 미끌미끌한 손이 다리를 자극하자 레이테는 신음했다.
“흐응…….”
“당신 말대로 비누는 찾기 힘들겠습니다. 그러면 다른 일을 할까요? 우리가 진짜 아쉬웠던 것 말입니다.”
에르난은 아내의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당신의 주인이 될 사람이라고 나를 소개했습니다. 기억합니까?”
레이테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 말도, 붉게 빛나는 눈동자도, 당시 느꼈던 공포도 기억했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와 동등한, 즉 그녀보다 우월하지 않은 존재여야만 했다. 아내가 섬겨야 하는 남편이라면 곤란했다.
“사실 거짓말이었습니다.”
“뭐라고요?”
레이테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주인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레이테는 정말로 두려움에 떨었다.
그런데 거짓말이라니? 레이테는 고개를 홱 돌려 남편을 노려보았다.
“원래 하려던 말은 따로 있었지요. 지금이라도 말하고 싶습니다.”
“해 보시지요.”
에르난은 심호흡을 한 다음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 몸을 바치러 왔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에르난은 곧바로 입을 맞춰 왔다. 입술부터 바치겠다는 듯이. 레이테는 곧바로 그에게 잠식당했다.
머리가 빙그르 돌 것 같다. 입술이 떨어지자 레이테는 가쁜 숨을 내뱉으면서도 손을 뒤로 뻗었다. 그녀는 자신의 허리에 닿아 있던 기둥을 덥석 쥐었다. 에르난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
“읏…….”
“그런 말을 1년이나 묵혀 두다니 대단하네요. 늦었지만 허락하겠어요. 빨리 바쳐요.”
레이테가 몸을 살짝 들었다. 줄곧 그녀의 허리를 간지럽히던 것이 아래에서 위로 천천히 들어왔다.
레이테는 욕조 바닥을 짚고 있던 손을 더듬어 남편의 다리를 붙잡았다.
미끄덩하게 안쪽을 오가는 허리 아래의 욕망, 그리고 목덜미에 퍼부어지는 남편의 키스에 레이테는 몽롱한 쾌감에 휩싸였다.
“주인은 무슨. 그냥 이렇게 나를 바칠 걸 그랬나 봅니다.”
아내의 따뜻한 안쪽 살을 즐기며, 에르난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묶었던 수건을 풀었다. 긴 은발이 그녀의 등 뒤로 쏟아지며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이 자세로는 당신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어 아쉽군요. 하지만 머리카락이 무척 예쁘게 보이니까 괜찮습니다.”
“흐응……, 나는 당신의 온몸에 안겨 있는 걸로 충분해요.”
남편에게 기대어 안긴 채로 레이테는 느긋하게 그를 느꼈다.
몸을 바치겠다더니, 이토록 부드럽고 감미로울 줄은 몰랐다. 레이테는 나른한 신음을 흘렸다.
* * *
부부는 꽤 긴 시간 동안 서로를 안으며 물에 몸을 담갔다. 본능에 빼앗겼던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오고서야 그들은 겨우 욕조 밖으로 나왔다.
욕조와는 별도로 커다란 통에 물이 받아져 있었다. 두 사람은 그 물로 몸을 가볍게 헹궜다. 더운 기가 없어진 지 오래인 물이었기에 의식을 깨우기에 좋았다.
준비된 수건으로 가볍게 몸을 닦은 부부는 침실로 돌아왔다. 언제 놓고 갔는지 모를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그것을 깔끔하게 비운 뒤 기분 좋게 잠들었다.
어찌나 푹 잤는지, 레이테가 눈을 다시 떴을 때는 주변이 어두웠다.
레이테는 팔을 옆으로 뻗었다. 남편의 따뜻한 몸이 닿았다.
“일어났습니까, 부인?”
에르난은 그녀보다 먼저 눈을 뜬 모양이었다.
“벌써 밤이라니…….”
원 없이, 실은 지나칠 만큼 남편과 사랑을 나눴다. 체력도 시간도 걱정할 필요 없이 실컷 게으름 부렸다.
모두 순회 중에는 쉽게 누리기 힘든 호사였다. 하지만 허무한 기분도 살짝 들었다.
“자주 없는 휴일인데 방에만 있기 아깝지 않습니까?”
에르난도 아내와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가볍게 키스하고 몸을 일으켰다.
에르난이 먼저 침대 밖으로 나와 등불을 켰다. 방안이 한결 밝아졌다. 의자에 새 옷과 망토 등이 걸려 있었다. 레이테가 그것을 보자 에르난이 말했다.
“당신이 잘 동안 사람을 불러서 가져오라 했습니다. 일어나면 분명히 답답해할 것 같아서.”
“고마워요.”
“있는 옷은 다 입는 편이 좋을 겁니다. 봄이라 해도 이곳은 밤에 바람이 많이 불어 춥다더군요.”
“맞아요. 사크틸라 중부 고원은 다 이렇답니다.”
레이테는 새 슈미즈와 앞 여밈으로 된 에메랄드빛 드레스를 입었다. 비슷한 색의 후드가 달린 망토도 걸쳤다.
에르난은 검은 옷 위에 자수로 가득한 갈색 외투를 입었다. 새벽에 입었던 외투다.
“그래도 외투는 건졌네요. 여기서 벗은 덕택에. 모자랑 장갑도 무사하던가?”
“아, 아까는 너무했습니다. 외출조차 제대로 못 한 새 옷을 그대로 버려야 한다니.”
“당신이 얄밉게 구니까 그러죠!”
“같이 목욕하자는 말을 듣고 싶을 뿐이었는데…….”
옷을 다 입은 부부는 방 밖으로 나왔다. 경비를 서는 기사들이 왕을 보고 인사했다. 복도는 군데군데 불을 밝혀 움직이기 어렵지 않았다.
“이쪽으로 가면 탑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도시를 구경하기 좋다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안 보이겠지요. 그래도 가 봅시다.”
에르난이 앞장서고 그의 손을 잡은 레이테가 살짝 뒤를 따랐다. 모퉁이를 몇 번 돌자 계단이 나왔고 계단을 오르는 레이테의 숨이 가빠질 즈음 탑 꼭대기에 도착했다.
“아무것도 없지는 않네요.”
레이테가 말했다. 남편의 말대로 도시의 풍광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보면 별이 잔뜩 빛나고 있었다. 달빛도 밝았다.
바람은 꽤 거세게 불었다. 레이테의 후드가 바람에 벗겨지고 머리카락도 흩날렸다.
에르난은 그 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가 아내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1년 전 당신 계획이 이랬나요? 일단 안아서 당신의 것으로 만들고 본다……, 계획대로 했으면 성공했겠네요.”
처음 서로의 몸을 겹칠 때 시간이 조금 더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정말로 레이테의 말처럼, 에르난의 과거 계획처럼 여왕은 육체부터 남편의 포로가 되었을까?
“……아니, 성공 못 합니다.”
에르난은 고개를 저었다.
“왜요? 당신이랑 안으면 정말 좋은데……. 아, 혹시 또 이런 말을 유도하는 건가요?”
“그게 아니라.”
에르난은 풋 웃으며 손으로 아내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빗겨 주었다. 욕실에서는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반짝였던 머리카락이 지금은 달빛을 받아 은은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일 년 전에 말했잖습니까. 폐하를 뵙는 순간 사랑에 빠졌다고. 내가 먼저 당신의 포로가 되어 버렸던 겁니다.”
그는 아내를 안고 입술을 포갰다. 부부는 찬바람과 건조한 공기에 대비되는 따뜻하고 촉촉한 감촉을 오래도록 주고받았다.?
#084
짧은 휴식을 마치고 다시 출발한 왕의 일행은 사크틸라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 톨도스에 도착했다.
톨도스는 반쯤 축제 분위기였다. 도시는 수십 년 만의 경사, 새 추기경의 탄생으로 이미 들썩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국왕 부부까지 찾아왔다.
팡파르가 울려 퍼지고 꽃잎이 흩뿌려졌다. 거리는 행차를 구경하러 몰려온 사람으로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사람들은 근사한 황금빛 목걸이를 건 젊은 기사들에게 유독 환호했다.
“기사단이 환영받는 건 기쁘지만 좀 신기합니다. 이곳 사람들에게 기사는 환상의 존재라도 되나?”
기사단의 우두머리이자 왕인 에르난은 주민들이 건넨 꽃다발을 한 아름 안고 있었다.
“비슷할 거예요. 사크틸라 사람들은 기사도 소설을 무척 좋아하거든요. 특히 도시에서 인기가 많지요. 기사단원은 전부 젊고 옷도 잘 차려입었으니, 소설에서 나온 것처럼 느껴지나 봐요.”
아하. 에르난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내에게 몸을 더 기울여 말했다.
“기사 중의 기사인 호르헤 성인과 같은 존재로 여겨지는 인물도 지금 있지 않습니까?”
“잘 모르겠는데요? 오늘은 톨도스에 도착만 하면 되니 바쁘지 않다면서 아침이 되어도 아내를 안 놔 주려는 기사만 안답니다. 그 기사님 덕택에 준비가 늦어져서 제일 더울 때 이렇게 행차를 하게 되었네요.”
“……미안합니다.”
“뭐, 그 소문이 지금 분위기를 만드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고는 봐요.”
레이테는 시무룩한 얼굴을 한 남편의 뺨에 살짝 입을 맞췄다. 와아아! 레이테가 화들짝 놀랄 만큼 큰 환호성이 울렸다.
살두비아나 아라고 같은 바르시나의 대도시에서 행차할 때는 이렇게까지 열띤 반응은 없었다. 기분이 좋아진 에르난은 아내를 끌어안고 안고 깊게 키스했다. 더 크게 일어난 환호성에 취하며.
* * *
기분 좋게 시작했으나, 톨도스에서의 일정 자체는 에르난에게 내키지 않는 것이 많았다.
일단 시스로네스의 추기경 서임식이 있다.
서임식이 열리는 대성당은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바르시나인도 깜짝 놀랄 만큼 위압감 넘치는 장소였다.
다채로운 색유리를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빛은 신비로웠다. 실내 구역을 나누는 창살 문은 화려하게 세공되어 그 자체가 예술품이었다. 제단 뒤 벽면을 가득 채운 목각인형과 황금 장식도 압권이었다.
그리고 제단 앞에 무릎 꿇은 새 추기경의 위엄도 만만치 않았다.
예식용 사제복과 상반신을 덮은 망토, 술이 다섯 단이나 달린 거추장스러운 모자까지. 시스로네스는 추기경을 상징하는 진홍색으로 온통 뒤덮여 있었다.
교황의 특사가 그에게 추기경의 반지를 끼워 주는 것으로 의식이 끝났다. 시스로네스는 가장 앞자리에 앉은 국왕 부부에게 다가왔다. 부부가 무릎을 꿇자 그는 두 사람의 머리에 가볍게 손을 얹고 축복의 기도를 했다.
‘기어이 되었군그래.’
에르난은 시스로네스가 탐브레에게 보냈던 편지를 떠올렸다. 적의 폭주를 제어하려는 의도였겠지만, 어쨌거나 그는 정적에게까지 추기경이 되게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것을 떠올리면 쓴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축복을 내리는 시스로네스의 목소리는 웃음이 쏙 들어갈 만큼 엄숙하게 울렸다.
* * *
국왕 부부의 오늘 일정은 추기경 서임식 참석이 전부는 아니었다. 에르난의 입장에서는 더 껄끄러운 일이 남아 있었다.
“이것까지 부탁하지는 않을게요.”
레이테가 펜을 내려놓았다. 에르난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그것을 집어 들고 아내의 이름 왼편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괜찮습니다. 우리가 함께 일할 수 있을 때는 함께 해야지요.”
부부의 서명이 나란히 써진 서류에는 시스로네스에게 왕명 대리인의 직책을 수여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왕명 대리인은 왕의 인장을 소유하여 왕실의 모든 기록을 관리하는 사크틸라의 최고위 관리다.
시스로네스의 추기경 임명은 여전히 반갑지 않았다. 그에게 세속 권력까지 쥐여 줄 생각을 하면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에르난은 아내의 뜻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사크틸라는 수석 대주교가 왕명 대리인을 겸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솔직히 제 눈에는 성직자가 세속의 중요 직책을 맡는다는 사실이 좀 이상해 보입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사크틸라의 법도를 따를 뿐이고, 그것이야말로 지금 제일 중요한 일이겠지요.”
지난 이십여 년 동안, 탐브레는 왕의 인장을 무단으로 사용하며 편법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그렇게 흐트러져 버린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겠다는 뜻인데, 에르난이 더 관여할 수가 없다.
레이테가 그 세월의 피해자였기에 더더욱.
“맞아요. 당신 마음에는 들지 않을 텐데도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레이테가 남편의 손을 쥐고 쓰다듬었다. 조금 부끄러운 듯 주춤거리는 손짓에 에르난은 피식 웃음 지었다.
“두 분 폐하.”
방 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부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서명한 임명장을 수여하러 가야 한다.
두 사람은 대성당 소속 사제의 안내를 받아 회의실로 이동했다. 금장식을 아낌없이 사용한 회의실은 본당만큼이나 호화로웠다.
회의실 벽의 상단을 쭉 두른 그림이 에르난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성자의 수난이라는 전형적인 주제를 다룬 종교화는 사크틸라의 그림치고 대단히 사실적인 화풍이었다.
‘대륙에서 화가를 데려오기라도 했을까?’
아라고에서 국왕 부부의 초상화를 그렸던 대륙인 화가도 사크틸라에 다녀왔다고 했다. 이제 바르시나와 동맹을 맺었으니, 사크틸라도 대륙과의 교류가 더 많아질 것이다.
그림 아래에는 성직자의 초상화가 줄줄이 걸려 있었다. 톨도스의 역대 주교일 것이다. 오른쪽으로 시선을 옮길수록 주교의 옷차림이 점점 화려해졌다.
부부는 사크틸라 전통 문양으로 장식한 의자에 앉았다. 의자에 앉아서 보니, 들어왔던 문 위에도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하늘과 땅을 나눠 신과 인간의 세계를 표현한 그림이었다. 하늘에는 신이, 바로 아래 지상 세계에는 교단의 상징물이 있다. 그것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에 선인과 악인의 땅이 또렷하게 나뉘어 있었다.
‘신을 대리하는 교단이 지상의 중심에서 인간을 통제한다……, 성당에 걸릴 만한 그림이긴 하군.’
에르난은 자신이 저 그림에 들어간다면 어디에 위치해야 할지 잘 알았다.
하늘이야 그의 세계가 아니니 기꺼이 신에게 줄 수 있다. 그러나 땅의 한가운데는 자신이, 아니 정확히는 부부가 서야만 한다.
문제는 지금 막 두 왕의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은 진홍빛 옷차림의 성직자도 땅에 발을 딛고 산다는 점이다.
한쪽으로 좀 비켜 주면 좋을 것 같은데. 에르난은 마음속으로만 투덜거렸다. 물론 그가 비켜설 한쪽이 성직자에게 어울릴 선인의 세계일지는 별로 자신할 수 없다.
“알레한드로 히메네스 데 시스로네스 추기경. 톨도스의 대주교이며 사크틸라의 수석 대주교인 당신을 사크틸라의 왕명 대리인으로 임명합니다.”
여왕은 시스로네스에게 대리인의 직무가 적힌 두루마리와 왕의 인장을 담은 고풍스러운 장식의 상자를 주었다. 추기경은 그것을 받고 일어나 여왕에게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시스로네스는 두 왕 중 한 명에게는 진심으로 지극정성이다. 레이테와 관련된 사항에 한해, 그는 확실히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에게 인장을 맡기는 아내의 선택은 옳다. 잘 알았다.
에르난은 아내의 신하가 아니었다. 그녀의 남편이고 동료며, 같은 왕이다.
하지만 에르난은 자신이 여전히 시스로네스를 질투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억지웃음과 함께 박수를 쳤다.
* * *
왕궁에서의 만찬 자리는 축제를 방불케 할 만큼 시종일관 흥에 찬 분위기였다.
수십 년 만에 사크틸라에서 추기경이 탄생했다. 축하연을 열고도 남을 경사였다. 하지만 추기경 본인이 연회를 거부했다. ‘왕께서 오셨으니 왕을 우선 섬겨야 한다.’라는, 무척 기특한 이유였다.
에르난은 그의 충심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물론 그 충심은 레이테에게만 향해 있겠지만.
덕분에 부부는 일찍 처소에 들어와 쉴 수 있었다.
지은 지 오래된 왕궁은 봄이 한창인 5월 같지 않게 추웠다. 부부는 난롯가에 나란히 앉아 주전부리를 먹으며 잡담을 나눴다.
“내일이면 그 유명한 톨도스의 검과 갑옷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직접 볼 수 있다니, 왕 노릇도 할 만합니다. 하긴, 이 정도 잔재미도 없으면 어떻게 죽을 때까지 왕관을 쓰고 버티겠습니까. 매일이 일, 일, 일인데.”
에르난의 너스레에 레이테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내일은 일정이 바쁘다. 성곽을 순시하고, 제련소와 무기 공방에 들러 장인들을 격려한다. 원로 성직자들을 초대해 베푸는 연회도 있다. 톨도스는 반도에서 가장 훌륭한 무기를 생산하는 곳이면서, 동시에 종교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이 도시는 성당과 수도원투성이지만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사람들도 왕을 좋아해 주니 기쁘고, 또 과자조차 맛있습니다.”
에르난은 말랑말랑한 과자를 반으로 쪼개 하나는 아내의 입에 넣어 주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먹었다.
“당신의 검도 대부분 톨도스산이려나요.”
에르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가장 아끼는 검은 톨도스산이었다. 신년 연회 때 선물 받은 것들도 마찬가지다.
“내 것뿐만 아니라, 당신의 갑옷도 톨도스 공방에서 주문했던 겁니다.”
“적당히 대어 보니 몸에는 잘 맞더군요. 하지만 입을 일이 없는걸요.”
“그야 없는 편이 좋습니다. 전투용 옷이잖습니까. 하지만 요즘 갑옷은 워낙 멋있게 나와서, 그냥 입고 보기만 해도 꽤 즐겁습니다. 기사의 낭만 같은 것이랄까……, 아.”
내일 방문을 기대하며 신나게 떠들던 에르난의 목소리가 갑자기 멈췄다. 의문에 찬 레이테의 눈이 그를 향했다.
에르난은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 곳을 방문하는 게 당신에게는 혹시 부담스럽습니까?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아내는 날붙이를 두려워한다. 괜한 이야기를 꺼냈나? 에르난은 이를 살짝 악물었다.
“입 벌려 봐요.”
그러나 레이테는 과자 하나를 집어 남편의 입 앞에 가져다 댈 뿐이었다. 달콤한 향이 에르난의 코를 마비시킬 듯 강했다.
“걱정은 고맙지만, 가끔 보면 당신은 소심한 구석이 있다니까요? 가기 싫으면 일정에서 빼 달라고 진작 지시했겠지요.”
에르난은 놀랐다. 자신이 소심하다는 생각은 여태 해 본 일이 없었다. 더군다나 그 말을 아내에게 들을 줄이야.
하지만 모두 아내 탓이다.
“……당신 한정입니다. 자꾸 걱정되잖아요.”
에르난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투덜댔다. 레이테는 웃으며 남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정말 괜찮아요. 그러니 이제 과자를 먹으면 안 되나요? 팔 아파요.”
에르난이 얼떨떨하게 입을 살짝 벌리자 납작하고 작은 과자가 쏙 들어왔다. 냄새만큼이나 진한 단맛, 그리고 아몬드의 고소함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저는 이게 제일 맛있더라고요. 당신 입맛에는 지나치게 달까요?”
에르난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의 평소 취향에 비하면 엄청나게 달기는 했다. 하지만 아몬드와 잘 어울려 무척 맛이 좋았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당신이 더 달거든요.”
또 다른 과자를 집어 들던 레이테는 손에서 그것을 툭 떨어뜨렸다. 과자를 다 먹은 에르난이 입을 맞춰 왔기 때문이었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레이테는 잠시 몸을 멈칫했다. 하지만 곧 그녀는 남편을 꽉 껴안았다. 한창 과자를 즐기다가 섞은 남편의 입술은 무척 달았다.
에르난이 시작한 키스였으나, 레이테의 움직임이 훨씬 적극적이었다. 그녀는 어느 때보다 과감하게 혀를 얽어 왔다. 다디단 남편의 입술과 혀, 그 안쪽까지 모조리 먹을 기세였다.
“후……, 흐응…….”
입술과 입술 틈으로 타액이 살짝 흘러내렸다.
단숨에 몸이 달아오른 에르난은 아예 상체 전부를 옆으로 틀었다. 원래 달지만 지금은 더 달콤한 레이테의 입 안을 쓸면서, 에르난은 그녀의 드레스를 조심히 끌어 내리기 시작했다.?
#085
에르난은 아내의 몸을 더듬었다. 부드러운 살결은 과자처럼 진득하게 그의 손에 감겨들었다. 레이테는 졸라대듯 남편에게 몸을 문질러 왔다.
허리 아래에 점점 피가 몰리는 것을 느끼며, 에르난은 드레스의 치맛자락을 걷어 올렸다. 아니, 걷어 올리려 했다.
문밖에서 들리는 시종의 목소리만 없었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두 분 폐하, 시스로네스 추기경이 왔습니다.”
부부의 움직임이 그대로 멈췄다. 시간마저 함께 멈춘 듯했다.
이미 흥분으로 달아오른 몸이 이성을 되찾는 데에는 시간이 약간 필요했다. 그리고 이성보다는 숨을 쉬기 위한 본능이 먼저 움직였다.
“……하아.”
옷 밖으로 하얗게 드러난 레이테의 맨살이 에르난의 눈을 붙잡았다. 저것을 더 만지고 핥으며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옷자락을 올려주어야만 했다.
“당신 지금 머릿속으로 이것저것 막 욕하고 있죠…….”
레이테의 목소리는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에르난은 답하지 않았다. 긍정의 침묵이었다.
‘일부러 알고 이럴 때 찾아오나? 망할 인간.’
“실은 저도 마찬가지거든요…….”
침묵은 금방 깨졌다. 아내의 말에 에르난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이 시스로네스를 욕한다니 상상이 가지 않는데요, 뭐 이런 생각 하는 거죠? 하지만 저는 추기경을 정말 어렸을 때부터 알았던 만큼, 그에게 갖은 악담을 다 해 봤다고요.”
“그 악담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 이따가 제대로 이야기 좀 해 주시지요. 굉장히 궁금합니다.”
진심이다. 잊지 말고 반드시 들어야겠다. 에르난은 아내의 뺨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레이테가 작게 한숨 쉬었다. 아쉬움 가득한 그 숨결에는 달콤한 향이 아직 남은 듯했다. 그녀는 밖을 향해 말했다.
“들어오시라 하세요.”
시스로네스는 양팔에 꽤 도톰한 종이 뭉치 두 개를 끼고 들어왔다.
“늦은 시각에 죄송합니다, 두 분 폐하. 아무래도……, 제가 별로 좋지 않은 때에 온 것 같군요. 송구합니다.”
그때야 부부는 자신들이 여전히 찰싹 붙어 앉은 채임을 깨달았다.
“……알면 내일 오시지.”
에르난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동시에 그는 아내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슬그머니 의자를 들어 옮겨 남편과 살짝 떨어져 앉으려던 레이테는 그대로 남편에게 붙잡혔다.
“뭐, 뭐 어때요. 우리가 톨도스에 놀러…… 온 것도 아니고.”
레이테는 오죽이나 민망했는지 말을 더듬었다.
“두 분 폐하께 보여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씀대로 내일 해도 될 일이긴 합니다만, 솔직히 제가 내일이 오기를 도저히 기다릴 수 없어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내일을 기다릴 수 없다?
부부의 눈에 곧바로 호기심 가득한 빛이 떠올랐다. 추기경이 하룻밤을 채 버티지 못하고 왕에게 내밀 것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추기경은 들고 온 것을 부부에게 하나씩 건넸다.
레이테가 먼저, 에르난이 그다음이었다. 모든 의례의 순서는 에르난을 우선한다는 합의문의 내용 따위는 무시한다.
문서 첫 면에는 관습을 따라 거창하게 지은 제목이 적혀 있었다.
<세상의 창조주시며 사크틸라와 바르시나를 수호하시는 신의 위대한 뜻을 받들어 교단이 선하고 순수하고 올바른 길을 걷도록, 신의 종 알레한드로가 두 분 국왕 폐하께 드리는 제안>
* * *
두 왕은 긴 시간 동안 말없이 제안서를 읽었다. 시스로네스는 시종이 가져다준 의자에 앉아 부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부부는 추기경의 긴장한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적잖은 분량. 한 자 한 자 꼼꼼히 눌러 쓴 깔끔한 필체. 체계적이며 상세한 내용. 오랜 시간에 걸쳐 한참 다듬은 흔적이 역력한 글이었다.
에르난이 먼저 말했다.
“레이테, 당신은 어떻게 보십니까?”
“종교의식 절차의 전국적 통일과 보편적인 의식서의 발간. 일단 이것이 제일 마음에 드는군요.”
역시. 에르난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는 종이를 몇 장 넘겨 아내가 말한 부분을 펼쳤다. 에르난 또한 대단히 집중해서 읽은 부분이었다.
통합 의식서의 발간과 보급을 목표로, 전국의 의식 절차 수집, 현지 사제와의 긴밀한 협력 등의 방안이 적혀 있었다. 교단 내의 질서 확립을 위한 훌륭한 제안이다.
하지만 그 안에 숨겨진 것을 부부는 곧바로 읽어 냈다.
종교의식의 통일은 개인의 생활과 공동체의 통일까지 이뤄낼 것이다. 바르시나에서라면 그 효과가 미미할지도 모르나, 이곳은 사크틸라다. 모든 사람이 진심으로 신을 숭배하는 나라.
“사크틸라에는 질서가 필요하니까요.”
레이테가 말했다.
탐브레는 왕위를 탐냈으나 왕이 될 수는 없었다. 명분도 지지도 부족했지만, 여왕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다는 것 하나로 20여 년의 세월을 버틸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지지기반인 사크틸라 북부에 틀어박혀 있다시피 했다.
그동안 사크틸라의 넓은 땅은 사실상 방치되었다. 북부에서 멀어질수록, 즉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상황이 좋지 않을 것이다.
사크틸라 남부는 예로부터 헤젤과의 최전선이었다. 절대 방치해서는 안 되는 곳이다. 다행히도 헤젤은 내부 사정으로 혼란스러워 사크틸라를 엿볼 틈이 없었다. 운이 좋았다.
왕이 버린 땅이 어떻게 되는지, 순회를 시작하며 처음 들른 타라코는 그 적나라한 결과를 보여 주었다. 삼십 년 동안 방치된 폐허는 이제야 복구를 시작했다.
아마 사크틸라 남부는 타라코만큼 엉망은 아닐 것이다. 탐브레를 토벌할 때도, 지금의 순회 길에도 그곳 출신의 귀족이 있지 않나. 나름대로 살아남았다는 증거다.
다만, 이는 결국 남부가 왕실의 통제와 무관하게 각자도생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제는 왕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이 글은 추기경의 글인가요, 왕명 대리인의 글인가요?”
여왕이 물었다.
“저는 두 소명을 모두 받든 사람입니다, 폐하. 어느 것에도 소홀할 마음이 없습니다.”
이런 질문을 예상이라도 한 듯, 추기경은 단호한 어조로 답했다. 그는 이날이 오기를 기다린 것이다.
‘완전한 권력이 손에 들어오기까지 그 긴 시간을 버티다니. 대단하기도 하지.’
에르난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참았으면서 겨우 하룻밤을 더 못 참겠다는 점도 재밌었다.
“어차피 오늘 밤 모두 논의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되겠지요. 하지만 왜 내일을 못 기다리겠다고 말씀하셨는지 알 것 같아요. 이런 계획이 있다면 빨리 실행하고 싶어 누구라도 안달이 날 테니까요. 예하의 제안에 동의하며 적극 지원하겠어요.”
레이테의 목소리에서 흥분이 약하게 느껴졌다. 에르난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아내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 일은 왕권에 도움이 된다.
조금은 쓴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시스로네스를 향한 여왕의 신뢰도가 더 높아질 테니.
‘20년 대 20일, 여왕이 누구를 믿겠습니까.’
문득 프란세스크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20일. 결혼 직후에 들었던 모양이다.
같은 말을 지금 듣는다면 “레이테는 시간과 무관하게 둘 다 믿는다.”라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다.
하지만 20년 대 20일, 아니 21년 대 1년은 에르난이 절대로 시스로네스를 극복할 수 없다는 선고처럼 들리기도 했다. 경험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하라는 말인가?
절대로 극복할 수 없는 벽이라면 시스로네스에게도 있다. 그는 출세에 성공했지만, 결코 왕의 위에 설 수는 없다.
그럼에도 왕은 패배감에 속이 쓰라렸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깊이. 실력.
후우, 에르난은 작게 한숨 쉬었다.
“리세우 공에게 말해 둘 테니, 언제 한번 그와 따로 만나 보시지요. 실력 좋은 의사를 소개받을 수 있을 겁니다. 세스크 본인도 그런 쪽으로 이래저래 지식이 많으니 도움이 될 겁니다.
이 도톰한 종이뭉치가 예하께서 하려는 일의 전부는 아니잖습니까? 보아하니 이제부터 시작인 것 같은데, 건강관리 열심히 하십시오.”
정말이다. 아직은 더 살아 줘야 한다.
“폐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여왕과 함께한 자리이기 때문일까, 에르난의 진심을 느꼈기 때문일까. 추기경은 대단히 정중하게 답했다.
“두 분 폐하께서 모두 호응해 주시니 감격스럽습니다. 늦은 시간에 결례를 저질러 송구합니다. 이만 쉬십시오.”
그는 허리를 깊게 굽혀 인사하고 나갔다. 다시 부부만 방에 남자, 레이테가 곧바로 물었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요? 당신이 추기경을 걱정한다니, 실은 리세우 공이 독약에 일가견이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죠?”
“당신도 읽었잖습니까. 시스로네스의 제안은 왕과 이 나라에 도움이 됩니다. 저는 당신이 생각하기보다 훨씬 마음이 넓고 관대합니다. 아무리 상대가 나를 상품 취급할지라도, 저는 사람인 상대를 존중할 줄 알거든요.”
사실 프란세스크는 독약과 독초에도 일가견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말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
“그 넓은 마음과 관대함을 무려 시스로네스에게 베풀 만큼, 이 기획이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로군요.”
“그렇습니다. 아, 이 부분도 인상적이더군요.”
에르난은 종이를 뒤적거리다가 한 부분을 펼쳐 아내에게 내밀었다. 사크틸라와 바르시나 양국의 사제와 수도자를 교환해 교단에 활력을 불어넣자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교단의 활력도 활력이지만, 양국의 화합을 위한 지극히 성직자다운 방법이지 않습니까?”
“이제야 시스로네스가 성직자로 느껴지나 봐요?”
“뭐……, 그렇다고 칩시다. 아무튼 대단히 마음에 듭니다.”
사크틸라와 레이테에게 그토록 날을 세우던 바르시나 귀족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눈치조차 못 챌 것이다. 그들로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영역이므로.
피식 하는 레이테의 웃음소리를 끝으로 침묵이 찾아왔다.
레이테는 정면의 난롯불을 노려보며 한참 무언가를 생각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시스로네스의 제안은 하루 이틀 구상한 것 같지 않아요. 여기까지 오는 데 긴 세월이 걸렸구나, 새삼스레 다시 깨닫게 되네요.
여왕이 등극하면서 이 나라는 혼란에 빠졌지요. 아무리 내가 의도하지 않았다지만 사실이 그런걸요. 여태 안 죽고 버텼으니, 이제 20년 치 목숨값을 치러야겠지요. 여왕인 내 손으로 내 나라를 바로잡겠어요.”
여왕. 레이테는 무슨 일을 겪어도 여왕이라는 자신을 긍정했다. 성별을 원망할지언정, 왕인 자신을 원망하지 않는다.
다만 그 긍정은 확신일까? 집착일까? 에르난은 알 수 없었다. 알아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여왕이라는 확신을 흔들면 그녀는 무너질 것이다. 불길한 직감이 그렇게 말했다.
안 된다. 에르난은 아내를 놓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나는 진심으로 우리의 동맹이 오래오래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이왕이면 영원히. 당신은 어떻습니까?”
“바르시나의 땅이 좁기는 하죠. 하지만 지난번에 보니 바다는 참 넓던데. 욕심도 많으셔라.”
레이테의 놀림에 에르난은 멋쩍은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욕심이라면 아내도 만만치 않다. 에르난은 그 사실을 지적하려 입을 열었다.
그러나 과자 하나가 먼저 에르난의 입으로 쑥 들어왔다. 달콤함이 순식간에 입 안을 점령했다.
“동맹은 언제라도 깨질 수 있어요. 그 문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남편에게는 단 것을 주었으나, 정작 레이테의 말은 썼다. 하지만 과자를 다 먹은 에르난은 환히 웃음 지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 앉아 있는 레이테를 안아 들었다.
“안 깨지는 아주 평화로운 방법을 압니다. 시간은 들지만 확실하지요.”
“뭔데요?”
“한 명이 두 나라를 다 가지면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둘이고, 나는 당신이 없으면 못 살 것 같거든요. 그러니 한 명의 주인은 다음 세대의 몫으로 넘깁시다.”
진지한 목소리로 장황하게 말했다만, 에르난 자신이 느끼기에도 그 의도가 너무 뻔했다. 하지만 말 자체는 진심이다.
“이제 당신까지 나한테 압박을 주려고요?”
“압박은 아니고, 일찌감치 미래 대비를…….”
더 변명할 필요는 없었다. 투정을 부리면서도, 레이테의 손은 이미 에르난의 상의 매듭을 풀고 있었다. 에르난은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침실로 향했다.?
#086
마차를 타고 긴 시간 이동할 때, 레이테는 멀미로 인한 고생을 덜기 위해 일찌감치 자는 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남편과 함께 창밖 경치를 구경 중이었다.
굽이치는 강을 건너고 언덕을 오르자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톨도스를 떠나며 보는 마지막 풍경이다.
마차 밖 이곳저곳에서도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레이테는 이런 반응이 퍽 재미있었다.
톨도스를 좋아하게 된 바르시나인은 에르난만이 아니었다. 에르난만큼이나 환대받은 기사단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따분한 시골길 끝에 등장했던 대도시에는 고풍스러운 건축물과 번쩍이는 보물 등의 볼거리가 끊이지 않았다. 온갖 고급 무기마저 많아 지루할 틈이 없었다.
아직 서먹했던 두 나라 기사들의 사이도 꽤 친밀해진 듯했다. 지나치게 들뜬 그들을 단속하기 위해 프란세스크가 심발로 백작과 함께 시내를 순찰하며 고생했다지만.
톨도스의 풍경이 멀어지자 국왕 부부의 맞은편에 앉은 프란세스크가 순찰과 관련된 보고를 했다. 큰 사고는 없었으나, 밤을 꼬박 새운 그는 지쳐 있었다. 보고를 마친 프란세스크가 말했다.
“카테리나 서른 명을 돌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의 옆에 앉은 카테리나가 오빠를 노려보았다.
“기사단 정원은 단장을 포함해 서른한 명이잖아요. 공을 제외한 서른 명에 에르난도 포함된다는 뜻인가요?”
레이테가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물론입니다, 폐하. 무기 공방에서 돈 에르난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셨잖습니까.”
“아……, 하긴 그렇네요.”
“부인, 왜 납득하는 겁니까?”
에르난이 억울한 듯 말했다.
“당신이 뭘 얼마나 샀는지 생각해 봐요.”
레이테는 남편이 허리에 찬 단검을 손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무기 공방에서, 에르난은 어떻게든 왕의 근엄함을 유지하려고 기를 썼다. 하지만 초롱초롱 반짝이는 눈빛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결국 공방을 떠나기 직전, 왕은 이것저것을 많이도 샀다. 그는 남은 하루 내내 입이 귀에 걸려 있다시피 했다.
“어차피 전장에서는 말에 타시는데 보병용 중장비는 대체 왜 사셨습니까?”
프란세스크가 말하자 레이테도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은 사람 키만 한 거대한 양손 검을 보란 듯이 구입했던 것이다. 기마 상황에서 쓸 무기는 아니었다.
“필요 없는 것일수록 갖고 싶은 법이야. 멋있잖아. 왕이 돈 좀 쓸 수도 있지…….”
에르난이 투덜거렸다.
“당신이 어린아이처럼 신이 나서 어쩔 줄을 몰라 하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걸요. 덕택에 톨도스 사람들은 바르시나인이 얼마나 부유한지도 잘 알았겠죠. 당신도 그랬고, 다른 바르시나인들도 만만치 않았잖아요. 아, 물론 자신은 그렇지 않은 척하지만 실은 가장 많은 돈을 썼을 것 같은 리세우 공도.”
프란세스크는 여왕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실은 그야말로 별의별 무기를 다 샀고 어머니에게 선물하겠다며 이런저런 공예품까지 긁어모았다.
에르난은 그 모습을 즐겁게 바라보았다. 역시 아내는 내 편이야.
“그래도 부유함이라면 톨도스, 아니 사크틸라 교단도 만만치 않아 보였습니다. 내가 사크틸라의 왕관을 썼던 곳, 부르고의 대성당보다 화려한 성당 건물을 볼 줄이야.”
“너무 아름다웠어요. 방금 막 톨도스를 떠났지만, 꼭 다시 가고 싶어요.”
카테리나가 감격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프란세스크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름다운 것이야 물론 좋지만……, 시스로네스는 교단의 재정을 감사할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교단의 성직자인 그도 교단이 지나치게 부유하다고 보는 모양이던데.”
시스로네스의 개혁안에 적힌 내용 중 하나다. 레이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합당한 문제의식입니다. 하지만 추기경은 자기 자신부터 먼저 돌아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오늘 아침 미사 때 제의가 아주……, 놀랍도록 사치스럽더군요.”
인정할 것은 인정하되 공격도 놓치지 않는다. 완벽해. 에르난은 의기양양하게 웃음 지었다.
가만히 남편의 말을 듣기만 하던 레이테는 지극히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선물한 제의랍니다. 그동안의 충심에 대한 보답이자 추기경이 된 기념으로요.”
“…….”
결국 에르난도 한동안 아내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프란세스크가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렸다.
* * *
톨도스를 벗어나자 다시 황량한 고원이 펼쳐졌다. 왕의 일행은 순회를 시작한 이래 가장 삭막한 길을 지나고 있었다.
더군다나 낮의 햇볕이 점점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강해졌다. 마차에서는 햇살을 피할 수 있으니 괜찮다. 문제는 마차 밖의 사람들이었다.
“양심적으로 봄이 아니라 여름 회담이라고 합시다……. 지금도 날씨가 이 지경인데 5월 말일이라니, 그냥 여름이잖아요.”
기운이 다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린 프란세스크는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대충 닦았다.
그는 챙이 넓은 모자를 써서 얼굴에 닿는 햇빛만 겨우 가린 채였다. 옷과 영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어쩔 수 없다. 그늘도 없이 움직이자니 눈이 따가워 도저히 버티기 힘들었다.
“이럴 때는 쉬어야 정상 아닙니까?”
“바쁘니 별수 없지요.”
프란세스크의 투덜거림에 답한 이는 그의 옆에서 말을 모는 심발로였다.
“오늘 밤에는 반드시 폐하께 따질 겁니다. 5월 날씨가 2월이랑 똑같은 줄 알았느냐고. 순회를 뒤로 미루더라도 회담을 당기는 편이 나았어요.”
“그 소리를 몇 번은 하셨던 것 같은데, 아직도 말씀을 올리지 못한 겁니까?”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주변 귀족과 시장 등의 인사를 받고, 일을 처리하고, 그러고 바로 여왕과 함께 처소로 들어가 버리신단 말입니다.”
프란세스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날은 덥고 길은 지루하기만 하니 기사들도 도로 풀이 죽었습니다. 사크틸라에는 톨도스밖에 없냐며 불평도 하더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근방이 사크틸라에서 가장 낙후된 곳이 맞긴 합니다. 회담장까지 빨리 가야 하니 별수 없지요.”
“이미 아시겠지만, 바르시나 놈들이 영 참을성이 없어요. 견딜 줄을 모릅니다. 그러니 이상한 불평을 들으면 그냥 이해, 아니 무시하셔도 됩니다.”
“그야 잘 알지요. 공께서도 심심하니까 자꾸 저한테 오시잖습니까?”
“이런, 들켰군.”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씩 웃었다.
심발로 백작은 사크틸라 영토 내에서 수행단의 책임자다. 하지만 기사단원의 관리는 사크틸라에 넘어왔어도 여전히 프란세스크의 일이었다.
프란세스크는 심발로 또한 기사단원이라는 핑계를 들어 그와 붙어 다닐 때가 많았다. 두 사람은 잡담을 나누며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심발로가 눈에 들어간 땀을 닦는 동안, 그를 바라보는 프란세스크의 눈빛은 차가웠다.
심발로가 다시 눈을 뜨자, 프란세스크는 따분해 죽을 지경인 사람으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그는 한숨을 푹 쉬고 물었다.
“회담장에 도착할 때까지 볼만한 곳을 지나가기는 합니까?”
“옛 제국의 유적이 크게 하나 있긴 하지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우리는 그런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서.”
“거기만 지나면 바다호스는 금방입니다.”
회담이 열리는 국경에서 가장 가까운 성이 바다호스였다. 왕의 일행은 그곳에서 머물다가 회담 당일, 국경으로 이동할 계획이다.
“바다호스는 어떤 곳입니까? 듣기로는 요새가 꽤 철통 같다던데.”
사크틸라와 헤젤 사이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기에, 국경 지역에는 당연히 큰 요새가 있었다. 바르시나와의 국경에 큰 시장이 들어선 것과는 정반대였다.
“물론입니다. 아, 혹시 이것도 아십니까? 실은 그 요새, 수백 년 전에 헤젤인이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사크틸라가 점령해서 잘 써먹고 있지요.”
심발로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멀쩡한 성 놔두고 국경에 천막 설치해서 회담하자던 겁니까? 이 더워 죽을 날에? 뺏긴 영토에 가면 자존심 상하니까?”
“헤젤 놈들이야 그렇게 생각하고도 남죠. 뭐 국경에서 회담을 열게 된 것 자체는 엔히크 왕자의 제안이지만요.”
나왔다, 엔히크. 프란세스크의 눈이 빛났다.
“저도 들었습니다. 바다호스에서 회담을 열자는 통보를 받은 왕자가 이왕 하는 것 철저히 균형을 맞추자면서 제안해 왔다지요. 왕자는 꽤 철저한 면이 있나 봅니다?”
“으음, 딱히 그런 느낌은 아니었지만 두 분 폐하를 보고 뭔가 자극받았다는 느낌은 들더군요.”
“호오, 어떤 면에서?”
“그건…….”
* * *
회담 하루 전, 5월 30일. 왕의 일행은 새벽부터 바쁘게 움직였다. 한낮의 햇볕이 버틸 수 없이 강해졌기에, 한낮에는 이동을 멈추고 쉴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정오까지는 목적지에 도착해야만 했다.
“가뜩이나 낮에 쉬느라 이동이 느려졌는데, 당신이 유적지 더 보겠다고 시간만 안 끌었어도 어제 도착했을 거예요. 세상에, 겨우 하룻밤 자고 회담장 직행이라니…….”
멀미와 더위 중 무엇을 택할까? 레이테의 선택은 멀미였다. 남편에게 투정부리는 그녀의 표정은 넋이 나가 있었다.
사흘 전 일이었다. 고대 제국의 유적지가 있으니 구경이라도 하자며 그곳을 지나갔다. 일부러 쉴 여유까지는 없었다.
하지만 에르난은 기어이 일행을 멈춰 세웠다. 그는 열심히도 유적을 구경했다. 결국 일정은 더 늦어졌다.
“아니, 그 엄청난 것을 어떻게 지나치기만 한답니까?”
“제국식 극장이라면 미노리카에서 봤잖아요.”
“그보다 훨씬 더 원형이 잘 보존되었고, 훨씬 더 제국 정통 양식이었고, 훨씬 더…….”
레이테는 물통을 남편에게 내밀었다. 에르난은 말을 하다 말고 물을 한참 마셨다. 마차 안이라 햇볕은 피할 수 있으나, 갈증은 그를 힘들게 했다.
“사크틸라는 톨도스를 빼면 볼 일 없다며 투덜대던 바르시나 기사들도 그때는 다들 놀라더군요. 비록 이번 일정이 황무지를 많이 지나갈 뿐, 사크틸라도 굉장한 땅이 맞다는 걸 그들도 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긴, 바르시나 분들께서는 제국의 유적이 사크틸라에도 있다는 생각 자체를 안 했던 것 같더군요. 대체 사크틸라를 뭐라 생각…….”
살짝 비꼬던 레이테가 말을 멈췄다.
“아, 보이네요.”
물통을 다 비우고 반쯤 누워 있던 에르난이 몸을 일으켰다. 황량한 지평선에 성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레이테는 마차 문을 두들겨 시녀를 호출했다.
“물수건 좀 넉넉하게 가져와 줘요.”
“예, 폐하.”
물수건을 받은 레이테는 하나를 들고 남편의 얼굴을 닦았다. 옷 밖으로 드러난 목도 닦았다.
에르난도 물수건 하나를 들어 아내의 얼굴을 꼼꼼하게 닦아 주었다. 얼굴을 다 닦은 수건은 아래로 내려가 드레스 사이 파인…….
“거기까지만, 다 왔다니까요.”
레이테는 수건을 남편의 얼굴에 덮어 버렸다.
* * *
바다호스 성의 분위기는 긴장이 가득했다. 당장 전쟁이라도 치를 기세로 병사들의 군기가 바짝 잡혀 있었다. 부부는 곧바로 회의실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두 분 폐하.”
순회는 동행하지 않고 회담에만 합류하는 두 나라의 원로들이 국왕 부부를 맞았다. 경험 많은 귀족들은 젊은 왕을 대신해 실질적인 회담 진행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기다리느라 고생 많으셨소만, 시간이 없으니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부터 합시다.”
회담의 의제 자체는 브라간사를 통해 헤젤에 통보해 두었다. 헤젤에서 사크틸라를 거쳐 바르시나까지 이어지는 상로의 건설이 가장 중요한 안건이었다.
“세 나라 모두 왕이 직접 감독을 파견해야 해요.”
여왕이 말하자 바르시나 귀족 몇이 눈살을 찌푸렸다. 코른 후작도 어김없이 끼어 있었다. 레이테가 예상한 대로였다.
길이 지나갈 땅에 이미 주인이 있는데도 왕이 직접 관리를 파견한다. 영주 입장에서는 자신을 무시하는 행위로 여길 수 있다. 자치권을 중요시하는 바르시나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에르난도 그 반응을 의식했는지 아내의 의견에 적극 동의하기보다 침묵했다.
그는 바르시나의 왕이다. 내일 회담에서는 바르시나의 이득을 최대한 취하려 들 것이며, 그것은 사크틸라의 이익과 어긋날 수도 있다.
“헤젤이 사고 치지 않고 얌전히 상로를 이용할지가 관건입니다. 잘 닦인 길은 침략에도 용이하니까. 헤젤을 압박하는 게 우선입니다.”
불편한 문제는 일단 덮자는 듯, 시스로네스가 슬그머니 화제를 옮겼다.
“그러려면 2 대 1의 상황을 만들어야 합니다.”
에르난이 말했다. 세세한 견해 차이는 있을지언정, 두 나라가 제대로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것에는 모두가 동감할 것이다.
브라간사는 양국의 연합을 염려해 레이테를 배제하려다 실패하기도 했다. 그만큼 연합은 헤젤 입장에서 가장 기피하고 싶은 상황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먼저……, 무슨 일인가?”
무언가를 말하려던 시스로네스가 회의실에 들어온 시종을 보고 물었다.
“헤젤에서 사람이 몇 왔습니다.”
“이 더위에? 일단 좀 쉬라고 하세요. 회의 끝나고 만나죠.”
여왕이 말했다.
“그것이……. 엔히크 왕자도 같이 왔습니다.”?
#087
부부는 곧바로 밖으로 나와 엔히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오랜만입니다, 두 분 폐하.”
단정한 목소리는 진짜 엔히크였다.
그는 여왕의 손에 입을 맞춰 인사하려다가 문득 무언가 떠올랐는지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기억하다니. 레이테는 웃으며 그의 손을 마주 잡고 전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악수했다. 엔히크는 이어서 에르난과도 악수를 나눴다.
“더 일찍 오려고 했는데, 리리우가 동행하겠다며 하도 칭얼대는 통에 떼어내는 데 시간이 제법 걸렸습니다.”
더위에 고생했는지, 그의 얼굴은 땀에 절어 있었다.
“오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그런데 왜 벌써……?”
레이테가 물었다.
“내일은 마냥 화기애애하기는 힘든 자리니까요. 개인적으로 먼저 인사드리고 싶었습니다.”
사적 친분이라는 소리다. 썩 좋지 않은 사건을 계기로 만났으나, 엔히크와 부부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두 왕의 귀에 걸리는 말은 ‘마냥 화기애애하기 힘들다’는 부분이었다. 헤젤 측에서 무엇을 준비했는지 몰라도, 일이 쉽지 않으리라는 예고 같았다.
“일단 앉으시지요. 시원한 것이라도 마시며 이야기해요.”
* * *
내일 헤젤이 어떻게 나올지는 몰라도, 부부는 한 가지를 확실히 깨달았다. 엔히크는 자신이 나라를 대표해 나왔다는 상황에 큰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저와 동행했던 심발로 백작이 보고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부왕께서는 회담 제의를 받자마자 제게 참석을 명하셨습니다. 앞으로 두 분 폐하를 더 오래 상대할 제가 나서는 편이 좋겠다고 하셨지요.
배움이 짧은지라 일을 그르치지 않을까 걱정이지만, 부왕께서는 일단 명을 내리면 거두는 법이 없는 분이십니다.”
엔히크는 얼음을 넣어 표면에 물방울이 맺힌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형의 급사로 인해 왕위계승자가 되었다. 제왕이 되기 위한 준비를 아무것도 못 한 채 외교 무대에 나오게 된 것이다.
“아까 리리우 공주 이야기를 하셨지요? 정말로 왔군요.”
“물론입니다. 두 분과의 만남을 무척 기대하고 있지요. 어찌나 흥분하며 드레스를 고르던지…….”
리리우 이야기가 나오자 굳어 있던 엔히크의 얼굴이 한결 자연스러워졌다.
“조카와 사이가 좋으신 모양입니다.”
에르난이 말하자 엔히크는 잠시 이야기를 멈췄다. 그의 눈이 레이테를 슬쩍 향하다 말았다. 무엇 때문일지는 뻔했다.
“……리리우는 딸같이 느껴집니다. 그 아이에게는 아버지가 필요하기도 하고요.”
아무래도 헤젤의 왕위계승자는 꽤 소심한 성격인 모양이다. 하지만 레이테는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녀는 다만 남편의 손을 부드럽게 쥘 따름이었다.
“리리우 공주께서는 좋은 숙부를 두셨네요.”
“감사합니다, 폐하.”
아내의 손을 만지작거리던 에르난이 빙긋 웃었다. 그가 말했다.
“사실 우리 셋 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지 않습니까? 그나마 제가 비슷한 일을 겪어 보았다……고 말하기는 뭣하군요. 그냥 초보 셋이서 낑낑거리면서 노련한 귀족들의 입씨름을 구경하다 보면 끝나지 않겠습니까? 모두 힘냅시다.”
에르난이 잔을 들어 올렸다. 밝게 웃음 지은 세 사람은 술을 마셨다.
“왕자, 아예 이곳에서 하룻밤 머물고 내일 같이 회담장에 가는 건 어떻습니까?”
“괜찮습니다. 해가 다 지기 전에는 일단 돌아가야지요. 제가 안 오면 걱정할 겁니다.”
리리우 공주를 말하는 모양이다. 레이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사크틸라 쪽 호위병을 몇 명 붙여 드릴게요.”
레이테가 뒤에 대기한 시종에게 눈짓했다.
술잔의 얼음이 녹고, 그것까지 다 마셨을 때였다. 가볍게 무장한 기사 몇이 헤젤인들과 함께 나타났다.
“시간이 순식간에 가는군요.”
“안전히 돌아가시고 내일 만나요.”
엔히크는 다시 부부와 악수를 나눴다. 다소 긴장한 눈길로 두 왕을 바라보는 헤젤인들과 달리 그의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부부는 석양을 향해 가는 엔히크 일행의 긴 그림자를 오랫동안 보았다.
* * *
회담 당일. 완전무장한 기사, 거만해 보일 만큼 호화롭게 차려입은 귀족 등 회담장에 갈 사람들이 새벽녘부터 바다호스 성문 앞에 모여들었다.
그들이 대열을 맞춰 서자 국왕 부부가 나타났다. 부부 모두 백합 문양이 빼곡한 붉은색 옷을 입고 커다란 보석을 잔뜩 박은 목걸이를 걸었다. 부부가 말에 올라타자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회담이 열리는 국경까지는 말을 천천히 몰아 두 시간이 조금 더 걸린다. 회담장에 일찍 도착하는 편이 햇빛을 피하기에 더 좋다는 참모들의 의견에 따라, 일행은 이른 새벽부터 움직이게 되었다.
회담장의 천막 설치는 헤젤이 맡았다. 미리 답사를 다녀온 관리의 말에 따르면 생각 이상으로 그럴듯하고 튼튼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강해지는 햇볕이 슬슬 따갑게 느껴질 때쯤, 여러 가지 색으로 알록달록하게 장식한 큰 천막이 나타났다. 신경 써서 만든 티가 역력해 보였다. 미리 도착한 헤젤 병사도 곳곳에 있었다. 그중 한 무리가 사크틸라와 바르시나 일행에게 다가왔다.
기수는 파란색과 흰색 바탕에 왕의 문장이 그려진 헤젤의 깃발을 들었다. 그 옆의 말에 탄 남자는 멀리서 보아도 거창해 보이는 차림새였다.
엔히크는 사치를 부리며 자신을 뽐낼 것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은 역시 다른 모양이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하여간…….”
레이테는 피식 웃고 말에서 내리려 했다. 하지만 에르난이 그녀를 멈춰 세웠다.
“잠깐. 저쪽 깃발은 뭡니까?”
남자 뒤편에서 파란색과 노란색 바람개비 모양이 그려진 깃발이 펄럭였다. 말에서 막 내리려던 레이테는 그것을 보고 도로 안장 위에 앉았다.
“왕자인 줄 알았더니. 저건 브라간사네요.”
브라간사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보랏빛 바탕에 금색 자수를 가득 놓은 옷과 같은 색 망토를 입었다.
브라간사의 얼굴을 알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헤젤의 대표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차림새였다. 보라색은 왕의 색이다.
“두 분 폐하,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브라간사가 말에서 내려 부부에게 인사했다. 깔끔하고 정중한 어투에서는 지난날의 불쾌한 일은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반갑소. 왕자 전하께서는?”
에르난이 물었다. 부부는 말에서 내리지도 않았다. 엔히크를 만난 것도 아닌데 그럴 이유가 없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사크틸라와 바르시나 일행은 브라간사의 안내를 받아 이동했다. 회담장 입구에 도착해 말에서 내리자, 시종들이 우르르 다가와 말을 마구간으로 끌고 갔다.
부부는 엔히크가 회담장 밖에서 그들을 맞이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왕자는 보이지 않았다.
조금 의외지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헤젤인들의 분위기가 수상했다.
뭔가를 쑥덕거리던 기사들이 급히 달려 나갔다. 나이 든 귀족들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일단 들어가시지요.”
브라간사가 말했다. 그의 낯빛도 어두워져 있었다.
회담장 안은 바깥만큼이나 정성 들여 꾸며져 있었다.
긴 탁자가 삼각형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탁자와 탁자 사이 공간을 비롯한 회담장 내 이곳저곳에 장식된 화사한 꽃은 천막 안의 답답함을 상쇄시켰다.
레이테는 꽃을 보자 겨울 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헤젤 관리는 여왕이 좋아하는 꽃 등을 조사했었다. 지금 보니 조사할 만도 했다.
‘그런 것만 물어봐서 문제였지.’
그리고 엔히크는 이곳에도 없었다.
“왕자 전하께서는 긴장이 많이 되시는지 주변 산책을 좀 하고 오겠다고 나가셨습니다. 두 분 폐하께서 이렇게 일찍 도착하실 줄 알았더라면 말렸을 텐데……. 제 불찰입니다. 송구합니다.”
브라간사는 두리번거리는 부부의 시선이 무슨 뜻인지 금방 파악한 듯했다. 거만한 차림새에 어울리지 않게 정중한, 아니 대단히 조심스러운 말투였다.
“아, 이해하네. 어제 만났을 때도 그래 보이셨으니. 부인, 일단 앉아 있을까요?”
“그래요.”
부부는 좌우로 갈라져 각각 다른 탁자에 자리 잡았다. 공식 석상에서 언제나 함께했던 그들이지만 오늘은 다르다. 세 나라의 자리가 나뉘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옆자리가 아닌, 제법 거리가 먼 사선에 앉은 남편. 당연하다면 당연한 좌석 배치지만, 이런 식으로 떨어져 앉으니 새삼스레 그의 나라가 타국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레이테는 묘한 긴장과 흥분에 사로잡혔다.
두 나라는 동맹일 뿐 결코 한 나라가 아니다. 부부가 두 나라의 왕위를 모두 가진 것 또한 여러 복잡한 요소가 얽혀 있지만 일단은 명목상의 지위에 가깝다.
레이테는 헤젤 쪽을 힐끗 보았다. 비어 있는 엔히크의 자리 옆에 브라간사가 앉아 있었다.
‘나이가 지긋한 귀족들을 제치고 왕자의 옆자리라.’
왕자는 자리에 없고, 브라간사의 복장은 유독 화려하다. 마치 그가 헤젤의 대표인 것처럼 보였다.
레이테의 친척인 브라간사는 모계 쪽으로는 헤젤의 왕족 혈통이다. 왕의 조카라고 하니 엔히크와는 사촌 관계다. 그와 엔히크는 얼마나 친할까? 헤젤에서 그의 권력은 어느 수준일까?
레이테가 듣기로, 브라간사는 왕의 자식들과 함께 교육받으며 성장했다. 지휘관으로서는 유능함을 충분히 인정받았다고 한다.
‘……그만하자. 여왕이 상대할 헤젤인은 브라간사가 아니라 엔히크야.’
브라간사를 자꾸 신경 쓰는 자신이 답답했다. 주의도 환기할 겸, 레이테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종이 수시로 오가며 브라간사의 귀에 대고 무언가를 말했다. 엔히크가 돌아왔는지 계속 확인하는 듯했다. 브라간사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다.
엔히크의 등장이 늦어지자 사크틸라와 바르시나 사람들의 표정도 점점 싸늘해졌다.
‘이런 분위기라면 억지로 애쓰지 않아도 회담 내내 두 나라가 헤젤을 집중 공격하겠는걸.’
엄청난 결례이지 않나. 그러나 레이테는 못마땅하기보다 걱정이 되었다. 어제 만났던 왕자는 불안해 보였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에르난 또한 화가 났다기보다는 엔히크를 염려하는 듯했다. 아내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잠깐 웃음 지었다가 금방 딱딱한 얼굴로 돌아갔다.
다른 곳도 살피던 레이테는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리리우 공주께서는 어디 계시나요?”
레이테는 브라간사를 보며 물었다.
“공주께서 오셨다던데, 왕족이시니 당연히 이 자리에 함께하셔야지요. 직접 참여하지 않더라도 보고 배워 두는 편이 좋아요.”
브라간사가 무언가 답하기도 전에 여왕이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상냥한 목소리였으나, 브라간사를 향하는 레이테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왕위 계승권도 없는 여자애가 외교는 무슨 외교냐고 생각하려나.’
헤젤은 바르시나처럼 여성의 왕위 계승이 불가능한 나라다. 하지만 리리우는 국왕의 직계 혈통이다. 실질적인 역할을 떠나 회담에 참관할 만하며, 왕족으로서 그래야 한다.
물론 공주로서 외교 무대를 경험하고 싶다던 리리우의 말 자체는 핑계겠지만. 공주는 그저 부부왕과 다시 만나고 싶을 뿐이다.
그렇다 해도 왕족을 입장조차 시키지 않다니. 레이테는 불쾌해졌다.
“공주께서는…….”
브라간사가 답하려 하는데, 바깥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무언가 실랑이가 벌어지는 듯했다.
“전하! 들어가시면 곤란합니다. 제발……!”
“비켜! 필요 없어! 당장 문 열어!”
리리우다.
레이테는 벌떡 일어났다. 그러면 그렇지. 그녀는 닫힌 문 양옆에 선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들어오시라 하세요. 당장.”
상냥함은 온데간데없이 살벌한 목소리에 회담장 내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여왕을 향했다. 지난겨울, 여왕은 브라간사의 무례함 앞에서도 겉으로만은 시종일관 우아하고 나긋나긋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가?
기사들은 어쩔 줄을 모르며 브라간사를 바라보았다.
‘누구 작품인가 싶었더니 역시나.’
레이테는 문으로 다가갔다. 기사들은 살벌한 기세로 다가오는 여왕을 막을 수 없었다.
여왕은 문을 활짝 열었다. 겨울의 그때와 똑같이.
그리고 레이테는 놀라 얼어붙었다.
“아……, 여왕 폐하!”
예쁜 옷을 고르기 바빴다던, 인형같이 생긴 수다쟁이 공주는 엉망으로 구겨진 드레스와 헝클어진 머리카락, 창백한 입술로 한눈에 보아도 제정신이 아닌 모습이었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공주! 세상에, 무슨 일이죠?”
단순히 회담 참석을 거부당했다고 이렇게 될 수는 없다. 놀란 레이테가 리리우에게 다가갔다.
“폐, 폐하……. 숙부님이……, 숙부님이! 흑, 흐으윽……!”
리리우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레이테에게 안겨 통곡하기 시작했다.
“공주, 진정해요. 무슨 일인지 차분히 이야기해 주세요. 왕자께 무슨 일이 생겼나요?”
리리우는 레이테를 올려다보며 무언가 말하려 했다. 하지만 흥분에 오열하던 그녀의 목에서는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천천히 숨 쉬어요.”
레이테는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몸의 경련이 조금 가라앉자, 리리우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숙부님이…… 사, 사라지셨어요…….”?
#088
벌떡 일어난 브라간사가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아내의 옆으로 다가와 있던 에르난이 브라간사를 죽일 기세로 쏘아보았다.
“산책하러 갔다지 않았나?”
“그, 그것이……, 병사를 동원해 찾고는 있습니다만…….”
브라간사 또한 엔히크의 실종을 알았다는 뜻이다.
“산책? 산책이라고? 장난해, 당신? 당장 숙부님을 찾아와! 찾아오란 말이야! 설마 네……!”
여전히 눈물을 흘리는 리리우가 브라간사를 향해 울부짖었다. 얼마나 악에 받쳐 외쳐댔는지 목이 막혀 말을 못 할 정도였다. 공주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 몸을 떨었다. 레이테는 다시 그녀를 안아 몸을 토닥여 주었다.
“에르난, 내가 공주를 돌볼 테니 당신과 황금 양모 기사단원들도 수색에 동참해 줘요.
브라간사 공, 당장 왕자를 찾아오세요. 나와 에르난은 엔히크 왕자와 의논하러 온 겁니다. 그가 있어야 회담을 진행할 수 있어요. 어제 돌아오셨던 건 맞나요?”
“예. 피곤하다며 바로 쉬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새벽, 산책을 다녀오겠다고 하신 것을 시종이 들었습니다. 원래 사색을 즐기는 분이시니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만 혹시 사고라도…….”
“불길한 소리는 됐네.”
에르난이 브라간사의 말을 자르자, 그는 잠시 눈을 찌푸리며 에르난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고치고 부부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바로 수색을 진행하겠습니다.”
브라간사가 사라지자 에르난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프란세스크를 찾았다.
“세스크, 당장 기사들을 이끌고…….”
그런데 에르난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프란세스크가 허겁지겁 밖으로 나왔다. 그는 근처에 매여져 있던 말에 곧바로 올라탔다. 말의 고삐를 쥔 손이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세스크? 무슨 말……, 잠깐!”
프란세스크는 답변하는 대신 말을 몰아 멀리 달려 나갔다. 에르난은 그의 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친구는 그답지 않게 당황하고 있었다. 일부러 의식하지 않으려던 불안감이 급격히 에르난을 사로잡았다.
“아, 혹시…….”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에르난은 정신을 차렸다. 심발로 백작이었다.
“뭔가 아는 게 있나?”
“예. 아무래도 리세우 공은 제 이야기를 듣고 강가로 간 듯합니다. 브라간사도 왕자가 산책을 갔다고 했으니…….”
사크틸라와 헤젤의 국경은 남쪽 바다까지 길게 이어진 강줄기를 따라 형성되어 있다. 그러고 보니 프란세스크가 사라진 방향은 남쪽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했지?”
심발로는 톨도스를 떠나 황량하고 지루한 길을 한창 이동하던 때, 프란세스크와 나눴던 이야기를 설명했다. 임시로 설치한 천막에서 회담이 열리게 된 일에 대한 것이었다.
* * *
프란세스크는 바르시나인임에도 불구하고 헤젤어 실력이 탁월했다. 심발로가 그 점을 신기하게 여기자 프란세스크는 씩 웃으며 “내가 유일하게 자랑할 만한 수준의 지적 활동이지요.”라고 답했다.
그래서일까? 프란세스크는 헤젤의 사정에도 관심이 많았다. 더군다나 그는 원래 다소 개인적으로 에르난을 보좌하던 사람이다.
따라서 회담을 눈앞에 둔 지금, 프란세스크는 헤젤의 대표인 엔히크 왕자에 대한 정보를 이것저것 원하는 듯했다. 그는 심발로가 왕자의 이름을 입에 담으면 그냥 지나가는 일이 없이 자세한 사정을 물어 왔다.
“저도 들었습니다. 바다호스에서 회담을 열자는 통보를 받은 왕자가 이왕 하는 것 철저히 균형을 맞추자면서 제안해 왔다지요. 왕자는 꽤 철저한 면이 있나 봅니다?”
심발로가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그것이 얼마나 유익할지는 모르겠지만. 심발로는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으음, 딱히 그런 느낌은 아니었지만 두 분 폐하를 보고 뭔가 자극받았다는 느낌은 들더군요.”
“호오, 어떤 면에서?”
“그건……, 음. 공께서도 아시다시피 헤젤과 사크틸라의 사이는 별로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왕 폐하께서 즉위하시고는 두 나라 사이에 일단 전쟁이라고까지 부를 상황이 없었잖습니까?”
“그렇지요. 헤젤의 왕은 큰일을 치르기에 너무 늙어 버렸고, 엔히크는 그다지 호전적인 사람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프란세스크가 말하자 심발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왕자는 갈등을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두 분 폐하께서 회담을 요청할 때, 대단히 감명받았다고 하더군요. 자신은 반도의 평화를 막연하게 원했을 뿐, 그를 위한 행동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서요.”
“흠……. 제 생각에는, 왕이 되기 위해 탄생했다 할 수 있는 두 분 폐하와는 달리 엔히크는 원래 왕위를 계승할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 차이가 생긴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자기 편한 대로만 살았을 테니.”
“그랬나 봅니다. 엔히크는 자신이 왕위계승자가 되리라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신기한 물건 수집이나 여행 같은 소소한 취미생활이나 즐겨왔다고 합니다.”
“하긴, 그렇게 사는 게 제일 재밌어요. 설렁설렁 놀고먹다가 기사단 꼬마들 단속하려니 뭐가 이렇게 귀찮은지…….”
심발로는 풋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이 놀고먹었다는 프란세스크의 말은 거짓이겠지만, 그 마음은 이해할 수 있었다. 심발로 역시 비슷한 업무를 맡고 있으므로.
“아, 왕자가 여행한 곳 중에 과디아나 강 유역이 있었습니다.”
“우리 목적지인 바다호스 근처의 강이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남쪽 바다까지 꽤 길고 크게 흐르는 강인데, 예부터 헤젤과 사크틸라의 전쟁이 워낙 잦았던지라 근방에는 사람이 별로 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자연의 모습이 다소 거칠게 남아 있다고 합니다.
왕자는 그 풍광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지만 아무래도 국경 지역이다 보니 사고가 생기지 않을까 잔뜩 긴장하며 구경해야 했다는군요. 마음 편히 그 풍광을 즐기기 위해서라도 평화가 오면 좋겠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뭐, 왕자의 진심이 그렇다 해도 다른 헤젤인은 어떨지 모르지만…….”
이번에는 프란세스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심발로를 이해한다는 투였다.
평화 회담이 열릴 예정이지만, 기본적으로 사크틸라와 헤젤은 적대 관계였다. 더군다나 사크틸라 남부에 있는 심발로의 영지는 과거 헤젤과의 전쟁이 잦았던 곳이었다. 그는 헤젤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그 이야기를 들은 저는 회담장이 결국 강 근처니 경치 좋은 곳이 있다면 두 분 폐하께도 소개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아하. 회담이 마냥 화기애애하지는 않을 테니 숨 쉴 틈은 있어야겠지요.”
“네. 왕자는 제 제안에 무척 흡족해하면서, 그때 자신을 좀 도와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아예 정확히 국경선에서 만나는 편이 좋겠다는 말도 나오고…….”
“그랬군요. 아, 혹시 전에 말씀하신 왕자와의 친분……이던가요? 이 일입니까?”
“그렇지요, 뭐.”
프란세스크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스쳤다. 그는 좀 더 엄청난 것을 기대했던 모양이다. 그것이 민망해 심발로는 머쓱하게 웃었다.
* * *
프란세스크는 말에 거듭 박차를 가하며 달렸다.
‘빌어먹을…….’
바르시나에게 숨기고 무언가를 거래하려던 정황. 실제로 수상했던 사크틸라인 관리.
프란세스크가 심발로를 감시할 이유는 충분했다. 왕자와 백작이 어떤 관계인지, 회담 시작 전까지 어떻게든 알아낼 생각이었다. 겨우 알아낸 그 관계란 허무할 만큼 별것 없었다. 프란세스크는 실망했다.
하지만 대충 들었던 이야기가 뒤늦게 프란세스크의 머릿속을 떠돌았다.
‘혹시 어제 헤젤로 돌아가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그 정도는 확인하고 출발했어야 했다. 성급했다.
프란세스크는 마구 자란 나무들을 헤치며 강으로 다가갔다. 느긋하게 흐르는 물과, 강을 따라 떠내려온 나뭇가지만 보일 뿐이었다.
걸음을 옮길수록 불안감이 커졌다. 심장이 점점 크게 뛰었다. 두근거림을 감당할 수 없어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려던 그때, 프란세스크의 움직임이 멈췄다.
나뭇가지 더미에 기대어진 이질적인 무언가가 그의 눈앞에 있었다.
* * *
회담장 밖은 한꺼번에 끌고 온 말과 그것을 타려는 기사들이 뒤엉켜 난장판이 되었다. 레이테는 남편이 심발로 백작 등과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점점 강하게 내리쬐는 햇볕에 레이테는 눈을 찡그렸다. 실내에서 기다리는 편이 좋겠다. 그녀는 리리우의 어깨를 가볍게 안아 회담장 안으로 들어갔다.
레이테는 빈 의자에 공주를 앉혔다.
“별일 없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어제 만나 보니, 오늘 회담에 대해 무척 긴장하신 것 같았어요. 그래서 늦는 거겠지요.”
계속 훌쩍이던 리리우가 다시 서럽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흑……, 혹시 숙부에게까지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죠? 아버지도 안 계시는데 숙부조차 만날 수 없다면……, 전 어떻게 살아야 해요? 윽, 흐윽…….”
레이테는 리리우를 안아 다독여 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여왕은 아버지를 몰랐다. 딸을 아끼는 아버지였다지만, 지나치게 어린 시절이라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고 숙부라는 존재는 그녀에게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리리우에게 아버지와 숙부의 의미는 레이테와 달랐다. 어제, 엔히크는 조카와 자신이 부녀 같은 사이라 말했다.
리리우의 불안함이 안타까우면서도 어딘가 씁쓸한 느낌이 드는 이유는 부러움 때문일까? 레이테는 그런 사랑을 느껴 보지 못했다.
“저도 숙부를 찾으러 갈래요.”
한참을 울던 리리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레이테는 황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기사들이 전부 수색에 나섰으니 금방 데려올 거예요. 가족을 걱정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런 때에는 침착하게 기다리는 편이……, 아.”
가족.
레이테에게는 가족이 없다. 그랬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피가 이어진 가족은 아니었다. 남편. 에르난. 지독하게 소중한 사람.
만약 에르난이 사라졌다면 자신은 얌전히 기다리기만 할 수 있을까? 그럴 리 없다. 레이테는 비로소 리리우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좋아요. 대신 저와 같이 말을 타고 가요. 혼자서는 위험해요.”
여왕은 리리우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시종이 여왕의 말을 가져왔다. 먼저 말에 탄 레이테는 리리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조심히 올라와요.”
리리우는 레이테의 뒤에 앉아 그녀를 붙잡았다. 여왕의 주변으로 기사 여럿이 다가왔다. 황금 양모 목걸이를 건 자들이었다.
“전부 에르난을 따라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네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여왕 폐하를 호위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에르난은 어디로 갔지요? 심발로가 강가를 말했던 것 같은데.”
“예, 과디아나 강 주변을 살피러 가셨습니다.”
에르난을 따라가는 편이 좋을까? 레이테가 망설이는데, 나팔 소리가 부우우 들려왔다. 남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 * *
“어지러워도 참고 꽉 잡아요.”
“괜찮아요. 그러니까 빨리…….”
여왕과 그 일행은 상당히 빠른 속도로 말을 몰았다. 그늘 하나 없는 벌판을 지나가자 수풀이 나타나고, 그 뒤로 강이 보였다. 그곳에 말과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말을 멈추고 내린 레이테는 리리우의 손을 잡아 주려 했다. 하지만 리리우는 마음이 급한지 털썩 뛰어내려 인파를 향해 뛰어들어 갔다. 레이테는 바쁜 걸음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마침 사람들 틈에서 브라간사가 나타났다. 리리우를 본 그는 얼굴을 굳히고 리리우를 다소 거친 손짓으로 붙잡았다.
“전하, 일단 여기에서 기다리십시오.”
“뭐야, 너. 이 손 당장 놓지 못해? 비켜!”
리리우는 공작의 팔을 매몰차게 뿌리치고 인파 속으로 파고들었다. 레이테가 다급히 그 뒤를 따랐다.
갑자기 리리우가 몸을 흠칫 떨며 멈춰 섰다.
강가에 쌓인 나뭇가지 더미 앞에, 엔히크가 쓰러져 있었다.
쓰러진 엔히크의 옆에는 에르난과 프란세스크가 있었다. 에르난은 아내를 보더니 작게 고개를 저었다.
“강을 떠내려오다 나뭇가지 더미에 걸려서 그나마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뒤따라온 브라간사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익사하신 것 같다고…….”
“안돼!”
리리우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더니 혼절했다.?
#089
시신은 검은 천으로 감싸여 짐수레에 눕혀졌다. 헤젤 깃발이 그 위에 덮였다. 회담장 입구에 세워 뒀던 가장 큰 깃발을 급하게 가져온 것이다.
행렬의 가장 앞에 선 브라간사 공작이 신호하자 수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레 양옆에서 헤젤 기사들이 시신을 지키듯이 서서 걸었다.
그 뒤를 사크틸라와 바르시나의 왕과 휘하의 기사들이 따랐다.
부부는 경직된 얼굴로 조용히 말만 몰았다. 두 사람의 머리에 가득 찬 생각은 똑같았다. 대체 왜?
사크틸라도 바르시나도 헤젤과 좋은 관계는 아니다. 하지만 부부는 엔히크를 말이 통하는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헤젤의 왕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다. 그 뒤를 이을 엔히크라면 삼국의 관계를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 회담은 긍정적인 미래를 위한 출발이 되어야만 했다.
한참을 멍하게 움직이던 에르난은 문득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완전히 넋이 나간 얼굴의 친우가 보였다.
‘세스크의 저런 모습은 처음이야.’
그는 아버지인 선대 공작이 사망했을 때에도 비교적 의연한 모습이었다. 물론 선대 리세우 공작은 병을 오래 앓아 왔기에 죽음을 차분히 준비할 수 있었다. 급사한 엔히크와는 상황이 달랐다.
그렇다 해도 프란세스크의 태도는 부자연스럽다. 왕이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뛰어나가던 행동도 그랬다.
‘아무래도 따로 이야기를 나눠 봐야 할 것 같군.’
이마에서 흐르는 땀이 눈을 건드리자 에르난은 얼굴을 찌푸렸다. 어느덧 몸 여기저기에서 땀이 났다. 벌써 정오쯤 되었나? 햇볕이 무척 따가웠다.
굼뜬 이동이 답답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회담장에서 출발할 때야 말을 빠르게 달려 순식간에 온 길이다. 하지만 지금은 시신을 옮기느라 천천히 움직일 수밖에 없다.
“……욱.”
누구의 신음일까? 에르난은 일부러 확인하지 않았다.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불과 하루 전, 부부와 웃음을 주고받던 이에게서 악취가 나고 있었으므로. 느릿느릿 움직이면서 그늘 하나 없이 햇볕을 그대로 받은 탓이다.
에르난도 마음 같아서는 코를 틀어막고 싶었다. 옆을 보니 아내는 입으로 숨을 쉬며 버티고 있었다.
사크틸라와 바르시나의 기사들이 슬그머니 걸음을 늦추며 수레에서 멀어졌다. 헤젤 기사들은 몸을 움찔하면서도 자리를 지켰다. 억지로 버티는 듯했다.
“속도를 더 내도록.”
브라간사가 명령했다. 그는 뒤를 돌아보며 한숨을 쉬었다가 결국 손으로 코를 틀어막았다. 더는 버티기 힘든 모양이었다. 눈치를 보던 기사들도 은근슬쩍 코를 막았다.
그들의 주인이던 엔히크 왕자는 이제 썩어 가는 고깃덩어리일 뿐이었다.
* * *
회담장에 돌아오니 헤젤의 국경 도시 엘바스에서 사람들이 와 있었다. 시신은 그들이 끌고 온 검은 마차에 실렸다. 마차 문이 닫히고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악취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기사들이 옆을 지키고 섰다. 마부가 자리에 앉는 모습을 본 레이테가 브라간사에게 물었다.
“지금 출발하나요?”
“예. 국왕 폐하께 조금이라도 온전한 모습의 아들을 보여 드려야겠지요.”
하지만 헤젤의 수도 리스보아는 국경에서 서쪽으로 열흘은 가야 할 거리다. 벨류 왕은 아들의 멀쩡한 모습을 보기 힘들 것이다.
“일단 엘바스에 들러 시신을 제대로 정돈할 것입니다. 시간이 조금 걸릴 테니 그동안……, 우리는 다른 일을 해야겠습니다. 사고 경위를 알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의 앞뒤가 맞지 않아. 원인을 조사하려면 왕자는 이곳에 남아야 할 텐데. 당사자 없이 어떻게 알 수 있나?”
에르난이 말했다. 하지만 그는 출발하는 마차를 붙잡을 수 없었다. 하루빨리 왕에게 돌려보내겠다는 말 자체는 틀린 것이 없었다.
“어제 일부터 차근차근 살펴보지요.”
에르난의 의문을 무시하던 브라간사는 마차가 떠나고서야 그에게 말했다.
“마침 회의를 위해 만든 공간이 있잖습니까?”
“……좋네. 다만 잠시 쉬었다가 만나면 좋겠군. 더위 탓에 아내의 체력이 약해졌어.”
* * *
피곤하기는 해도 반드시 쉬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대책을 논의할 시간이 필요했다. 부부는 휴식을 위해 마련된 작은 막사로 향했다.
“레이테, 나는 잠깐 세스크와 이야기를 해야겠으니 먼저 들어가 있어요. 금방 가겠습니다.”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는 아내를 뒤로하고, 에르난은 프란세스크와 함께 인적이 드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대체 뭘 아는 거야?”
프란세스크의 눈이 흔들렸다. 그는 몇 번 한숨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사크틸라로 들어오면서부터, 저는 심발로 백작을 감시해 왔습니다.”
“심발로를? 친하게 지내더니만 감시였나? 아니, 그보다 무슨 이유로?”
“미노리카에서, 심발로는 엔히크 왕자와 뭔가를 약속했습니다. 무슨 약속인지는 모릅니다. 다만 그는 왕자에게 ‘바르시나 쪽에 잘 숨겨주겠다’고 말했지요. 저는 두 나라가 바르시나 모르게 무슨 일을 꾸미는지 알아내려 했습니다만……, 갑자기 왕자가 이렇게 될 줄이야…….”
“그런 일은 보고를 했어야지!”
에르난이 버럭 소리 질렀다. 프란세스크는 면목이 없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이렇게 의기소침해진 프란세스크는 처음 봤다. 그의 반응에 에르난이 오히려 당황할 정도였다.
“아니……, 아니지. 왕자와 심발로의 관계, 또 그들이 꾸미는 일을 알아낸 다음 이야기하려 했겠지. 맞지?”
프란세스크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노리카에 다녀온 뒤로 에르난은 쉬는 때가 극히 드물었다. 왕위에 오르고 순회를 시작하니 더 바빠졌다. 그러니 아직 불확실한 정보로 왕의 걱정거리를 더하고 싶지 않았다.
왕을 배려한답시고 그랬는데, 엉망이 되어 버렸다.
“의도만 좋았지요. 송구합니다.”
에르난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괜찮다고 말하기에는 상황이 지나치게 좋지 않다. 하지만 무작정 프란세스크에게 실망할 일도 아니었다.
“그러면 심발로는……. 아니, 알아낸 것이 없으니 여태 내게 말하지 않았겠군.”
“시시콜콜한 이야기만 나눴지만, 왕자를 찾는 데에 그와의 대화가 도움되기는 했습니다.”
“아, 들었네. 그나마 그 시시콜콜함 덕택에 왕자를 발견한 것은 다행이로군……, 다행? 후우, 다행이라니.”
에르난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신을 봤지만 여전히 비현실적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은 그의 머릿속을 완전히 엉키게 했다.
어제 웃으며 만났던 사람이 오늘 죽는 상황 자체가 처음은 아니었다. 전쟁터에서는 흔한 일이다.
하지만 회담은 전쟁이 아니다. 오히려 전쟁을 예방하려고 마련한 자리가 아닌가.
그러나 일은 터져 버렸고, 지금 에르난은 전장의 지휘관과 같은 냉정한 판단을 해야만 한다. 왕이 흔들려서야 곤란하다.
‘브라간사는 이미 그렇게 행동하고 있어.’
너무나 깔끔하게 일을 처리해서 기분이 나쁠 정도로.
지난날의 일 때문에 브라간사를 자꾸 부정적으로 보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인에게 제대로 인사할 틈조차 주지 않고 시신을 옮기는 것은 매정하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세스크.”
“예, 폐하.”
“왕자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자네야. 뭘 봤지?”
“폐하께서 보셨던 것이 전부입니다. 몸이 불어 있었기에 저는 왕자가 익사했다고 추정했고, 폐하보다 늦게 도착한 브라간사도 마찬가지였지요. 그가 모르게 폐하께만 따로 알릴 내용은 없습니다.”
의기소침한 가운데에도 프란세스크는 질문의 의도를 즉시 파악했다.
“그래……. 치명적인 상처는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어쩌다 물에 빠진 걸까?”
“실수로 발을 헛디뎠을 수 있고, 아니면 누군가…….”
시신에는 싸움의 흔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그를 밀어 강에 떨어뜨린 것은 아닐까?
단순한 사고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에르난의 머리는 그렇게 판단하기를 거부했다. 허무한 죽음이라고 믿고 싶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부담만큼이나 잘하고 싶은 마음도 컸던 엔히크였다. 그것이 보기 좋았고, 그가 어떻게 회담에 임할지 기대되기도 했다.
“일단 여왕 폐하와 함께 이야기해 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헤젤 측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요.”
고개를 끄덕인 에르난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꾹꾹 누르며 빠르게 걸었다.
‘정신 차리자.’
두 사람은 레이테가 있는 막사로 향했다. 막 그곳에 들어가려는 찰나였다.
“대체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건가요!”
심상치 않은 레이테의 외침에 에르난은 막사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그리 넓지 않은 막사에는 레이테, 시스로네스, 팀파노와 심발로 형제, 기사단원 세 명이 있었다.
레이테는 단단히 화가 났는지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어제 왕자를 배웅했던 기사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불렀는데 한 명이 없어요. 오늘 수색에도 참여하지 않았다는군요. 기사단원이 몇 명이나 된다고 그걸 관리 못 하다니!”
기사단의 정원은 서른한 명이다. 단장 에르난, 그리고 사크틸라와 바르시나인이 각각 열다섯 명.
팀파노와 심발로 형제를 비롯한 사크틸라인 기사들은 면목이 없는지 고개를 숙인 채 뭐라 말도 못 하는 상황이었다.
“브라간사는 어제 일부터 살펴보자고 말했지요. 어제 엔히크는 우리를 만나러 왔어요. 즉 자칫하면 우리에게 혐의가 씌워질 수도 있는 상황……, 후우. 이건 정말…….”
레이테는 말을 멈추었다. 그녀는 흥분을 가라앉히고자 심호흡을 반복했다.
“엔히크가 그렇게 된 것도 믿을 수 없고, 슬퍼할 겨를도 없이 책임이나 따져야 한다는 사실은 끔찍해요…….”
에르난은 그녀를 가볍게 껴안았다.
아내 또한 그와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닥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혼란스러운 것이다.
“사라진 자가 혹시 호아킨 투리나인가?”
가만히 듣기만 하던 프란세스크가 기사들에게 물었다. 기사들이 깜짝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투리나라는 기사가 있었던가? 에르난은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왕은 기사단원을 선발할 때 그들의 자료를 일일이 검토했다.
곧, 사크틸라 남부의 유력 가문 출신의 젊은 기사가 떠올랐다. 그는 팀파노와 심발로의 사촌이었다.
프란세스크는 심발로와 엔히크가 바르시나 몰래 뭔가 꾸미는 모양새라고 말했다. 심발로의 친척이라면 그 일에 관련이 있을까?
에르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 모습을 본 프란세스크가 가볍게 고개를 젓고 말했다.
“투리나는 아예 이곳에 오지 않고 바다호스에 있습니다. 지난밤부터 몸이 아프다기에 그냥 쉬라고 했습니다. 기침이 심하더군요. 혹시 두 분 폐하께서 불안하시다면 바다호스에 사람을 보내 그가 있는지 확인하겠습니다.”
“좋아요. 확인 부탁해요.”
프란세스크는 곧바로 막사 밖으로 나갔다.
“에르난, 리세우 공과는 무슨 이야기를 나눴나요?”
“세스크는 왕자의 시신을 가장 먼저 발견했습니다. 혹시 헤젤인에게는 알리지 않은 사실이 따로 있었나 싶어서요.”
에르난은 힐끔 심발로를 살폈다. 그는 그저 투리나에게 별문제가 없으리라는 사실에 안도하는 낌새였다.
“왕자가 죽었는데 헤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습니다.”
시스로네스가 말했다.
“이 일이 단순한 사고라면 브라간사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면 왕은 브라간사를 찔러죽일지도 모르겠군요. 바르시나에 가서도 일을 망치더니 이제는 왕자까지 죽게 내버려 뒀냐며.
공작은 자신이 책임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사태를 설명할 뭔가를 왕에게 보여야 합니다. 가장 쉽고 그럴듯한 방법은 역시…….”
“우리에게 떠넘기는 것이로군.”
에르난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왕위 계승자가 살해당했다. 명분은 이것이면 충분하잖습니까?”
시스로네스가 말하는 명분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는 뻔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전쟁.
에르난은 그 불길한 생각을 어떻게든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부정하기 힘들었다.
“최악이네요. 그런 일 하지 말자고 이 자리를 만들었는데.”
허망하기 짝이 없다는 듯, 레이테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일단 가서 이야기를 들어 보죠. 엔히크에게 진심으로 미안하지만……, 우리는 필사적으로 그의 죽음을 우연한 사고로 만들어야 해요.”
지금 가장 시급한 일은 진실이 아니라 책임 전가다. 그 현실이 부부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090
적당한 기사를 불러 바다호스에 다녀오는 일을 맡기려던 프란세스크의 생각은 마구간에 도착하자 바뀌었다.
말을 보니 국경에서 마주쳤던 수상한 관리가 떠올랐다. 부족한 물자가 넘쳐난다 말하고, 돌아보니 그 모습이 사라졌던 자.
꾸준히 수소문했으나 그를 찾을 수는 없었다. 전형적인 밀정이다. 심발로보다 더 수상했다.
투리나는 아파서 쉴 뿐이었으나, 프란세스크는 어느 것에도 안심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따라온 기사를 돌려보내고 직접 말에 올랐다.
빠르게 달려 나가려던 프란세스크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고삐를 당겨 말을 다시 세웠다.
‘엔히크를 처음 발견한 사람이 회담장을 빠져나간다면, 헤젤이 의심하지 않을까?’
괜한 고민은 아니었다. 적절하게도, 불쑥 나타난 브라간사가 프란세스크의 앞을 막아섰으니.
“어디 가십니까?”
말에 탄 프란세스크를 올려다보는 브라간사의 눈빛이 매서웠다.
“어제 왕자 전하를 호위했던 사크틸라 기사 셋 중 한 명이 몸이 좋지 않아 바다호스에 남아 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가서 살펴보고 상태가 괜찮으면 데려오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요.”
“좋은 생각입니다.”
브라간사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길을 비켜주지는 않았다.
‘역시.’
브라간사로서는 프란세스크를 의심하기 좋은 상황이다. 프란세스크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헤젤 기사 한 명이 저와 동행했으면 합니다.”
브라간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의 웃음은 양쪽 입꼬리가 불균형하게 올라가 뒤틀린 느낌을 주었다.
“딱 적당한 자가 있습니다. 어제 왕자 전하를 호위했던 기사지요. 지금 데려오지요.”
“예. 빨리 출발하고 싶군요.”
아울러 프란세스크가 데려올 기사가 정말 어제 엔히크와 동행했는지 확인할 생각도 있어 보였다.
브라간사는 히카르두라는 이름의 기사를 데려왔다. 그는 어제 왕자를 호위한 기사 중 히카르두가 사크틸라어를 가장 잘한다고 설명했다.
프란세스크는 헤젤어로 말했다.
“저는 헤젤어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습니다. 아무나 데려오셔도 괜찮았을 텐데.”
“정말 능숙하시군요. 그래도 역시 확실한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외국어로 속임수를 쓸 생각 말라는 뜻이로군.’
불편한 기분이 들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의심거리는 줄여야만 한다.
* * *
“시간이 촉박하니 길이 좀 험하더라도 빠른 쪽으로 가겠습니다.”
햇볕이 쨍쨍하게 내리비추던 하늘은 어느덧 회색으로 흐려져 있었다. 황야에 널브러진 돌멩이와 드문드문 보이는 삭막한 나무가 불길한 기운을 더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자꾸 생긴다. 혹시 투리나마저 바다호스에 없는 건 아닐까. 프란세스크는 불안해졌다.
“저게 뭡니까?”
생각에 빠져 있던 프란세스크의 귀에 히카르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을 차려 보니, 돌도 나무도 아닌 뭔가가 벌판에 쓰러져 있었다.
“사람 같은데요?”
프란세스크의 옆에 바짝 붙어 말을 달리던 히카르두가 속도를 줄였다.
사람은 두고 가자. 바다호스에 다녀오는 일이 더 급하다.
인정머리 없는 생각이 프란세스크의 머릿속에서 경고처럼 울렸다.
하지만 결국 프란세스크도 말을 멈추었다. 이런 곳에 쓰러진 사람이라면 이미 죽었거나 앞으로 죽을 사람뿐이다.
“숨을 안 쉬는군요. 아무래도 이미 죽은 모양입니다.”
말에서 뛰어내린 히카르두가 엎드린 시신을 돌려 눕혔다. 낡은 외투를 입고 허리에 주머니를 찬 남자였다.
프란세스크도 말에서 내려와 남자를 살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시신을 번쩍 들어올렸다.
“바다호스에서 장례를 치르게 하지요. 내 말에 태우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시체와 함께 말을 탄다니, 더군다나 시체가 말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면 몸 앞에 두고 꼭 안다시피 해야 한다.
프란세스크에게도 이런 일은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을 몰인정하게 그냥 두고 갈 수도 없잖습니까.”
“공의 말씀이 옳습니다. 말까지 옮기는 데에는 도와드리지요.”
히카르두의 도움을 받아 시신을 간신히 말 위에 얹고, 프란세스크가 그 뒤로 올라탔다. 뭔가 툭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이제 출발……, 잠깐. 시신에서 뭔가 떨어진 모양인데 제가 줍지요……, 맙소사.”
히카르두는 깜짝 놀라더니 손에 집어든 것을 프란세스크에게 보였다. 금으로 된 반지였다.
“아는 물건입니까?”
제발 잘못 보았기를. 제발 아니기를. 프란세스크는 간절히 바라며 물었다.
“왕자 전하의 인장입니다.”
젠장.
“당장 회담장으로 돌아가는 편이 좋겠습니다. 바다호스에 있는 기사보다 이 사실을 알리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돌아갑시다.”
두 사람은 방향을 바꾸어 달리기 시작했다. 히카르두가 앞장서고, 무거운 짐을 실은 프란세스크의 말이 그 뒤를 따랐다.
“각하, 괜찮으십니까?”
히카르두가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괜찮다는 뜻으로 프란세스크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다시 앞을 바라보며 말을 몰았다.
프란세스크는 한 팔로 시체를 붙잡고 있었다. 동시에 그것을 안은 손은 힘겹게 움직여 시체의 허리에 달린 주머니를 열었다. 간신히 열린 주머니 안으로 손을 넣으니, 동전 몇 개가 잡혔다.
“이랴!”
말의 속도를 내고자 프란세스크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동전이 바닥으로 쏟아지며 내는 소음은 커다란 외침과 말발굽 소리 사이에 묻혔다. 프란세스크는 주머니를 도로 닫으려다 말고 아예 그것을 뜯어내 던졌다.
샅샅이 뒤져질 이 시체에서 이상한 것이 나오면 곤란했다.
차라리 시신을 버려 버릴까? 프란세스크의 머리는 그러라고 말했다. 하지만 히카르두가 있다. 그가 이것을 두고 갈 리가 없었다.
‘무조건 모른 체해야 해……!’
말에 태운 시체. 프란세스크는 이 남자의 얼굴을 알았다. 국경에서 보았던 밀정이었다.
* * *
삼국 회담은 평화를 위해 추진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평화와 멀어지다 못해 살기 어린 적대감만이 회담장에 가득했다.
“먼저.”
사람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 가운데, 시스로네스 추기경이 일어나 말했다.
“뜻을 펼치기도 전에 불행하게 세상을 떠난 엔히크 왕자 전하를 위해 기도합시다. 신이시여, 영원한 안식을 엔히크에게 주소서.”
기도를 마친 추기경은 헤젤 측의 빈 좌석을 잠시 응시하다 자리에 앉았다. 그는 앉아서도 십자가에 입을 맞추고 기도를 이어갔다.
브라간사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그는 시스로네스가 십자가를 손에서 놓을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말씀드린 대로, 어제 일부터 차분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실례지만, 두 분 폐하께서는 저희 왕자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셨습니까?”
“왕자께서는 회담에 대한 긴장을 풀고자 오셨던 거요. 사적인 환담이 전부였지.”
“……말씀 감사합니다, 폐하.”
에르난은 더 묻지 말라는 투로 답했다. 그는 왕이다. 헤젤의 귀족이 그를 추궁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면 전하를 배웅했던 사크틸라 기사는…….”
“왕자의 경호는 일차적으로 헤젤 기사의 임무인데, 먼저 그들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지 않나요?”
살짝 신경질적인 목소리의 레이테가 공작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끼어들었다.
“……그렇군요.”
브라간사가 회담장 문을 지킨 병사에게 눈짓했다. 병사가 문을 열자 네 명의 기사가 들어왔다.
“원래는 다섯 명입니다만, 한 명에게는 바다호스에 가는 리세우 공작과의 동행을 명했습니다. 전하를 경호했던 사크틸라 기사 한 명이 그곳에 있어 데려온다더군요.”
“맞아요. 내가 보냈어요.”
“저희 기사들의 이야기는 그가 돌아오면 듣도록 하지요.”
결국 프란세스크가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바다호스까지 다녀오는 데에는 시간이 상당히 걸린다.
그동안 무엇을 해야 할까? 주변을 살피던 레이테의 눈길은 바르시나 쪽을 향했다. 굳은 얼굴로 앉은 에르난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작정한 듯 입을 꽉 다문 바르시나 귀족들이 보였다.
헤젤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서라도 그들은 지금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저들의 태도는 다른 목적이 있어 보였다.
지금 일에서 바르시나는 관련이 없다고 선을 그으려는 모습이다. 아무래도 브라간사는 사크틸라인 기사에게 관심이 있는 모양이니.
바르시나 귀족들을 마냥 비난할 수는 없었다. 엔히크의 죽음과 무관하다고 주장해야 하는 것은 사크틸라도 마찬가지므로.
침묵 가운데 도는 불길한 기류는 결국 모두가 같은 생각 중이기 때문이다. 책임 회피.
“두 분 폐하, 그리고 공작 각하.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회담장 문이 열리면서 고요함은 깨졌다. 헤젤인으로 보이는 기사 한 명이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의 뒤에서 프란세스크도 모습을 드러냈다.
밖으로 나와 보니 죽은 것이 확실한 남자가 눕혀져 있었다. 그를 본 레이테는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하루에 시체를 두 구나 보다니…….’
하지만 두 번째 시체에서 나온 것은 그녀를 더 무섭게 했다.
“이 남자가 갖고 있던 물건입니다.”
히카르두가 왕자의 인장을 꺼내 보이는 순간, 사람들은 모두 숨을 삼켰다.
왕자의 상징이 정체 모를 남자의 시신에서 발견되었다. 불행한 사고이기를 바랐던 죽음은 아무래도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모양이다.
브라간사가 몸을 숙여 죽은 이의 옷을 뒤지기 시작했다. 다른 물건은 나오지 않았다. 허리띠에는 흔한 호신용 단검 하나조차 없었다. 정신없이 움직이는 그의 손길이 떨렸다.
“각하, 일단 진정하십시오.”
헤젤 귀족 한 명이 그에게 말했다. 브라간사는 고개를 홱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살벌한 눈빛에 귀족은 몸을 움찔거렸다.
짧게 심호흡한 브라간사는 아예 시체의 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속을 마구 헤집었다.
그리고 또르르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굴러 나왔다.
사크틸라의 동전이었다.
레이테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여왕 폐하.”
아라고에서 보였던, 딱할 만큼 저자세로 사정하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음산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꽂혔다.
레이테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대체 왜? 어째서?
그때, 그녀의 어깨가 무언가에 붙잡혔다. 레이테가 화들짝 놀라 옆을 돌아보았다. 남편이었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모두가 레이테에게 주목한 상황에서, 에르난은 아내에게 특별한 행동을 할 수 없었다. 의심을 살 수 있으므로.
하지만 가볍게 안아 주는 것만으로도 레이테에게는 위로가 된다.
‘정신 차리자.’
“설마 동전 몇 개로 저 남자가 사크틸라인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공작.”
부드럽게 흐르는 목소리에는 온기가 전혀 없었다. 노골적으로 살기를 뿜어내는 브라간사보다 훨씬 더 날카롭고 정교하게 벼려진 칼날 같았다.
“바다호스로 가는 길에서 발견했다지요? 사크틸라 땅에서는 당연히 사크틸라의 돈을 써야 하지 않나요? 이 사람의 국적이 무엇이든 간에.”
여왕의 지적은 타당했다. 하지만 그녀의 꿋꿋한 태도도 헤젤인을 설득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들의 표정은 냉담하기 짝이 없었다.
낯선 사람에게서 왕자의 인장이 발견되었다. 최악은 이자가 왕자를 살해했으며, 못해도 그를 약탈한 셈이 된다.
왕자를 갑자기 잃은 충격, 또 자신들이 짊어질 책임의 부담 때문에라도 헤젤에게 엔히크의 죽음은 단순 사고여서는 안 되었다.
“대체 이자가 어떻게, 왜 저희 왕자의 반지를 가졌는지 모르겠으나, 사크틸라는 반드시 합당한 설명을 해야 할 겁니다.”
브라간사는 시신의 옆에 놓였던 인장을 홱 낚아챘다. 빠른 움직임은 사나우면서도 묘하게 탐욕스러워 보이는 면이 있었다.
회담장이었던 천막은 순식간에 해체되었다.
헤젤인들은 돌아갈 채비에 바빴다. 사크틸라인, 특히 그 주인인 여왕을 향한 헤젤인의 눈빛은 서늘했다. 그 눈은 모두 같은 말을 했다.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레이테는 적대감 어린 시선을 받는 데에 익숙했다. 오랫동안 그 시선에 감시당하며 살았다. 하지만 지금 그녀를 향하는 눈길에는 진짜 살의가 담겨 있다. 여왕은 몸을 떨고 싶었으나 억지로 버텼다.
“두 분께서는 사크틸라의 공동 군주이시지요.”
말에 탄 브라간사가 나타났다. 아침에 만날 때와 반대로, 지금은 그가 두 왕을 내려다보았다.
“납득 가능한 해명이 없다면 저희 왕께서는 그냥 넘어가지 않으실 겁니다.”
대답 따위 필요 없다는 듯, 브라간사는 곧바로 말을 돌렸다. 다른 헤젤인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중에는 겁에 질려 몸을 덜덜 떠는 리리우도 있었다.?